jacobhan.me

신학 · 미학 · 철학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 기독교적 해석

아름다움은 정말 “보는 사람의 눈”에만 있는가. 서구 사상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아름다움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성질이자, 궁극적으로 신(神)을 가리키는 표지로 이해되었다. 이 글은 그 전통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정의해 왔는지를 따라간다.

2026년 6월 1일

우리는 흔히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같은 그림 앞에서 한 사람은 감탄하고 다른 사람은 무덤덤하니, 아름다움이란 결국 개인의 취향이 투사된 주관적 인상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는 오늘날 거의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서구 지성사에서 이런 생각이 주류가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해 중세를 거쳐 근대 초까지, 아름다움은 사물에 우연히 덧칠된 장식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리고 그 근원이 신에게 있는 객관적 실재로 다루어졌다.

기독교 전통은 이 고대의 직관을 물려받되, 한 가지 결정적인 비틀기를 더했다.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하는, 보기에 가장 흉한 형상을 두고 “여기에 가장 깊은 아름다움이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초월적 속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이라는 고전적 뼈대에서 출발해, 아우구스티누스·아퀴나스·발타사르·에드워즈, 그리고 동방 정교회의 전통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사유했는지를 차례로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움을 전적으로 주관의 문제로 환원한 근대의 전환과 그 한계를 짚는다.

하나존재의 광채 — 초월적 속성으로서의 아름다움


기독교 미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중세 형이상학의 핵심 개념인 초월적 속성(transcendentalia, 라틴어로 ‘초월하는 것들’)에서 시작해야 한다. 여기서 ‘초월적’이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 경험을 넘어선다는 뜻이 아니라, 사물을 분류하는 어떤 범주(예: 색·크기·무게)에도 갇히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두루 적용된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싹튼 이 발상을 중세 신학자들은 체계화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그의 스승 대(大)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를 따라, 가장 기본적인 초월적 속성을 세 가지로 보았다. 하나(unum)·참(verum)·선(bonum), 즉 통일성·진리·선함이다. 핵심은 이 속성들이 존재와 맞바꿀 수 있다(convertible)는 점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하나이고, 알 수 있는 한에서 참이며, 욕구의 대상이 되는 한에서 선하다. 진리가 있는 곳에 존재와 선함도 함께 있다.

비유

한 줄기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빨강·노랑·파랑으로 갈라진다. 색들은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실은 같은 하나의 빛이 다른 각도에서 드러난 것이다. 초월적 속성도 이와 같다. ‘참’과 ‘선’과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말이지만, 결국 하나의 ‘존재’가 지성·의지·감각이라는 서로 다른 능력 앞에서 드러나는 서로 다른 얼굴이다. 따라서 어느 하나를 진정으로 부정하면 나머지도 함께 무너진다.

그렇다면 아름다움(pulchrum)은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 전통은 단일하지 않다. 엄밀한 중세의 표준 목록은 하나·참·선 셋이었고, 아름다움을 독립된 네 번째 초월적 속성으로 명시할지는 논쟁거리였다. 프란치스코회의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아름다움을 추가하는 데 가까웠던 반면, 아퀴나스는 아름다움을 선과 거의 한 몸으로 보았다(뒤에서 다시 다룬다). 진(眞)·선(善)·미(美)를 나란히 세우는, 오늘날 익숙한 삼화음(三和音)이 명료한 형태로 정식화된 것은 오히려 르네상스기,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5세기 피렌체)에 이르러서였다.

그럼에도 아름다움이 존재의 근본 성질이라는 직관 자체는 일찍부터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5~6세기에 활동한 신비신학의 저자 위(僞)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는 『신명론』(De Divinis Nominibus, ‘신의 이름들에 관하여’)에서 선·존재·진리·아름다움·통일성을 모두 신의 이름들로 다루었다. 즉 아름다움은 피조물에게서 발견되기 이전에, 먼저 신에 관해 말해지는 무엇이다.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그 근원에서 빌려온 빛인 셈이다.

존재 esse 하나 unum verum bonum 아름다움 pulchrum
존재와 맞바꿀 수 있는 세 속성(하나·참·선). 아름다움은 점선으로 표시했다 — 독립된 네 번째 속성인지, 선의 한 양상인지에 대해 전통 안에서 견해가 갈렸다.

아우구스티누스 — 너무 늦게야 사랑한 아름다움


기독교 미학의 정서적 원형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354~430)에게서 나온다. 그는 청년기에 『미와 적합함에 관하여』(De Pulchro et Apto)라는 미학 저술까지 썼을 만큼 —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 말과 음악과 형상의 아름다움에 예민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고백록』(Confessiones) 제10권 27장에서 남긴 한 문장은 서구 영성사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 되었다.

“Sero te amavi, pulchritudo tam antiqua et tam nova.”

“너무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토록 오래되고 또 이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여.”

이어지는 대목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방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신은 안에 계셨으나 자신은 밖에 있었고, 신이 지으신 아름다운 것들 속으로 곤두박질치며 정작 그 아름다움의 근원은 지나쳤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미학 전체가 압축되어 있다. 피조물은 진짜로 아름답다. 다만 그 아름다움은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빌려온 것이며, 자기 너머의 근원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 앞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은 무엇인가.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 자체가 아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지 않고 손가락에 멈춰 서는 것, 즉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종착지로 삼아 거기서 만족해 버리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것은 일종의 우상숭배다. 그래서 그의 유명한 명제 —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지으셨기에,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안식하지 못합니다” — 에서 아름다움은 그 안식 없는 마음을 흔들어 깨우는 미끼로 작동한다.

비유

창문으로 비쳐 드는 햇살에 마룻바닥이 황금빛으로 빛난다. 그 빛은 분명 아름답다. 그러나 그 빛은 마루가 만든 것이 아니라 태양에게서 와서 마루에 잠시 머무는 것이다. 마룻바닥의 광택에 사로잡혀 정작 창밖의 태양을 한 번도 올려다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빛을 즐기면서도 그 빛의 출처를 놓친 셈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본 인간의 처지가 바로 이렇다.

이 구도에서 아름다움은 단순한 미적 즐거움을 넘어 신학적 인식론의 한 통로가 된다. 세계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보다, 영혼이 가시적인 것에서 비가시적인 근원으로 상승하도록 이끄는 사다리다. 피조물의 아름다움이 클수록, 그것이 빌려온 빛의 출처가 얼마나 더 눈부실지를 가늠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퀴나스 — 아름다움의 세 조건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름다움의 정서와 방향을 제시했다면,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그것을 분석의 언어로 옮겼다. 그는 미학을 별도의 저술로 다루지 않았지만, 신학 논의 곳곳에서 아름다움의 본성을 정의했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은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제1부 제39문 제8항이다. 흥미롭게도 그가 아름다움을 정의하는 자리는 미술론이 아니라 삼위일체 안의 성자(聖子)를 논하는 신학의 한복판이다.

여기서 아퀴나스는 아름다움에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온전함 integritas 조화 consonantia 광채 claritas 아름다움 pulchrum
『신학대전』 I, q.39, a.8이 제시한 아름다움의 세 조건. 세 요소가 함께 갖추어질 때 사물은 “보아서 즐거운 것”이 된다.

온전함(integritas, 완전함perfectio이라고도 한다)은 사물이 자기 자신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을 모자람 없이 갖춘 상태다. 깨지거나 결손된 것은 그 자체로 추하다. 조화(consonantia, 또는 ‘마땅한 비례’debita proportio)는 부분들이 서로, 또 전체의 목적에 알맞게 배열된 상태다. 광채(claritas)는 사물의 내적 형상(form)이 밖으로 환히 빛나, 그 사물이 무엇인지를 보는 이의 지성에 또렷이 새겨 넣는 ‘지성적 광휘’다.

비유

잘 만들어진 한 자루의 칼을 떠올려 보자. 날·슴베·손잡이가 모두 갖추어져 칼로서 모자람이 없으면 온전함이고, 날의 길이와 손잡이의 균형이 손에 꼭 맞으면 조화다. 그리고 잘 벼린 칼날이 빛을 받아 그 단단함과 예리함을 한눈에 ‘말해 줄’ 때, 그것이 광채다. 셋이 함께 있을 때 우리는 그 칼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낀다. 흠집 난 날(온전함 결여)도, 손잡이가 너무 짧은 칼(조화 결여)도, 녹슬어 흐릿한 칼(광채 결여)도 그 느낌을 깬다.

아퀴나스의 또 다른 핵심 정의는 아름다움을 인식의 차원에서 규정한다. 『신학대전』에서 그는 아름다움을 “id quod visum placet” — “보아서(혹은 인식하여) 즐거운 것”이라 부른다. 여기서 그는 아름다움과 선함의 미묘한 관계를 정리한다. 선(善)은 욕구가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잠잠해지는 대상인 반면, 아름다움은 그것을 바라보거나 아는 것만으로도 욕구가 잠잠해지는 대상이다. 그래서 그는 아름다움을 가리켜 “선과 같되 다만 개념에서만 다르다”(idem bono, sola ratione differens)고 말한다. 아름다움은 ‘바라봄에 즐거움을 주는 형태의 선’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점은, 아퀴나스가 이 세 조건을 그냥 사물 일반이 아니라 성자에게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성자는 아버지의 본성을 온전히 지니므로 ‘온전함’에, 아버지의 완전한 형상(image)이므로 ‘조화’에, 지성의 빛이자 ‘말씀’이므로 ‘광채’에 상응한다. 아름다움의 분석이 곧 그리스도론으로 이어지는 이 대목은, 다음 장에서 다룰 ‘십자가의 역설’로 가는 다리가 된다.

십자가의 역설 — 추함의 한가운데서 빛나는 아름다움


여기서 기독교 미학은 고대 그리스의 미학과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그리스 전통은 아름다움을 균형·비례·완전한 형태와 동일시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채찍에 찢기고 십자가에 못 박혀 일그러진 한 사람의 형상이 놓여 있다. 이것은 어떤 기준으로도 ‘보기에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성서는 이 긴장을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한편으로 시편 45편은 메시아를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분, 입술에 은혜를 머금은 분”으로 노래한다. 다른 한편 이사야 53장은 같은 인물, 곧 ‘고난받는 종’을 두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도, 보기에 끌리는 풍채도 없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해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받고 상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시편 45편 가장 아름다운 분 — 영광 가운데 계신 왕 이사야 53장 흠모할 아름다움이 없는 — 고난받는 종 십자가에서 다시 정의된 아름다움 = 스스로를 내어 주는 사랑의 광채
성서의 “두 나팔 소리”. 가장 아름다운 분과 아름다움이 없는 분이라는 모순된 묘사는 십자가에서 종합되어, 아름다움의 의미 자체를 다시 묻게 만든다.

20세기에 이 역설을 인상적으로 짚은 사람이 요제프 라칭거(Joseph Ratzinger, 훗날 교황 베네딕토 16세)다. 그는 사순절 성무일도에서 시편 45편에 붙는 두 개의 후렴(antiphon)에 주목했다. 하나는 메시아를 ‘가장 아름다운 분’으로 노래하고, 성주간(聖週間)에는 같은 시편을 이사야 53장의 빛 아래 읽어 ‘아름다움이 없는 분’으로 뒤집는다. 같은 인물을 향한 이 정반대의 묘사를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그 답의 방향을 가리켰다. 그가 보기에 그리스도의 수난 앞에서 아름다움에 관한 위대한 그리스 철학은 그냥 폐기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시 물음에 부쳐진다. 아름다움이 무엇이며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제 새로 사유되어야 하고, 또한 ‘겪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유

전쟁터에서 부하를 살리려 수류탄 위로 몸을 던진 병사의 사진을 떠올려 보자. 찢긴 몸과 흙먼지뿐인 그 장면은 표면만 보면 처참하고 ‘예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진 앞에서 “아름답다”고 말한다. 거기서 빛나는 것은 형태의 균형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 준 사랑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십자가를 두고 ‘아름답다’고 할 때의 어법이 바로 이것이다. ‘예쁜 것’(the pretty)과 ‘아름다운 것’(the beautiful)은 다르다.

이로써 기독교는 아름다움의 정의에 새로운 깊이를 더한다. 아름다움은 더 이상 흠 없는 표면의 조화만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과 추함마저 끌어안아 변모시키는 사랑의 광채를 포함한다. 십자가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흉하지만, 거기서 신의 사랑과 정의가 한꺼번에 드러나기에 — 그것이 동시에 선하고 참되기에 — 가장 깊은 의미에서 아름답다.

다섯발타사르 — 영광, 그리고 신학적 미학의 회복


20세기에 아름다움을 신학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은 인물이 스위스의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다. 그의 대표작 『주님의 영광』(독일어 원제 Herrlichkeit, 영역본 The Glory of the Lord)은 일곱 권에 이르는 ‘신학적 미학’으로, 선(善)을 다룬 『신학적 드라마』, 진리를 다룬 『신학적 논리』와 함께 거대한 삼부작을 이룬다. 진·선·미라는 세 초월적 속성을 각각 한 부씩 신학으로 풀어낸 셈이다.

발타사르의 출발점은 일종의 진단이다. 그는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이 ‘아름다움’을 점차 변두리로 밀어냈고, 그 결과 진리와 선함마저 함께 메말라 갔다고 보았다. 아름다움 앞에서 더 이상 기도하지 못하게 된 시대는, 머지않아 선 앞에서 사랑할 줄 모르고 진리 앞에서 설득당할 줄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처방은 두 개념에 집약된다. 형상(Gestalt, ‘게슈탈트’ — 구체적이고 통일된 형태)과 영광(Herrlichkeit, 빛나는 광휘)이다. 신의 영광은 추상으로 머물지 않고 언제나 하나의 구체적인 형상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최고의 형상이 바로 그리스도다. 아름다움이란 이 형상이 자기 안의 깊이를 밖으로 환히 비추는 ‘광휘’이며, 그 광휘는 보는 이를 단순히 분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로잡아 끌어올린다.

비유

훌륭한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를 떠올려 보자. 우리는 화성학 공식을 따지기 전에 먼저 ‘아, 좋다’ 하고 압도당한다. 곡의 의미는 음표 뒤에 따로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울려 퍼지는 그 형태 자체에 실려 우리를 사로잡는다. 발타사르가 말하는 ‘형상의 광휘’가 이와 같다. 그리스도라는 형상의 아름다움은 교리로 번역되기 이전에, 먼저 사람을 끌어당기고 황홀하게 만든다 — 그리고 그 끌림이 곧 신앙의 시작이다.

이 관점에서 아름다움은 장식이 아니라 진리가 스스로를 입증하는 방식이다. 참된 것은 그저 논리적으로 옳은 데 그치지 않고 빛난다. 그 빛남이 우리를 끌어당겨, 증명을 따라가기도 전에 ‘이것이 옳다’는 예감을 갖게 한다. 발타사르는 십자가에서 이 원리가 극한에 이른다고 보았다. 가장 어두운 자기 비움의 형상에서 가장 밝은 사랑의 영광이 비치기 때문이다.

여섯에드워즈 — 거룩함의 아름다움


같은 주제를 개신교 전통에서 가장 깊이 파고든 사람은 미국의 신학자 조너선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여러 주제 중 하나가 아니라, 신과 세계와 윤리를 꿰는 신학 전체의 조직 원리였다.

에드워즈는 아름다움을 두 층위로 나눈다. 일차적 아름다움(primary beauty)은 “존재가 존재에 동의함”(consent of being to being), 곧 사랑·선의(善意)·거룩함이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의 좋음을 기꺼이 긍정하는 그 마음의 일치가 가장 깊은 의미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반면 이차적 아름다움(secondary beauty)은 물리적 세계의 비례·대칭·조화처럼, 우리가 흔히 ‘아름답다’고 부르는 형태적 균형이다. 에드워즈에게 이차적 아름다움은 일차적 아름다움의 그림자이자 닮은꼴이다.

이 구도에서 신은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이자 척도다. 유한한 모든 아름다움은 신의 사랑스러움을 비추는 상(像)이며, 참된 덕(true virtue)이란 결국 신의 선의를 본받는 일이다. 그래서 에드워즈에게는 윤리가 곧 미학이다. 선하게 사는 것은 ‘존재 전체를 향한 선의’라는 가장 깊은 아름다움에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결정적인 단서가 붙는다. 에드워즈는 타락한 인간이 거룩함을 ‘보기는’ 해도 그 아름다움은 보지 못한다고 진단했다. 마귀와 멸망받은 자도 신의 거룩함을 알지만, 그 거룩함이 아름답다는 사실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듭남이란 새로운 ‘영적 감각’(spiritual sense), 곧 “거룩함의 아름다움”(시편 29편의 표현)을 지각하는 마음의 새 눈이 열리는 일이라고 보았다.

비유

에드워즈 자신이 든 비유에 가깝게 옮기면 이렇다. 미술에 무지한 사람이 거장의 그림 앞에 서 있다. 그는 색과 형태를 분명히 ‘본다’. 그러나 옆 사람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그 아름다움은 전혀 느끼지 못해 자꾸 시계만 본다. 같은 그림, 같은 망막의 상이지만, 한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없다. 차이는 그림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능력에 있다. 에드워즈에게 거듭남이란 바로 이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마음’이 새로 주어지는 사건이다.

일곱동방 정교회 — 세상을 구원할 아름다움


지금까지의 흐름이 주로 서방(라틴) 전통이었다면, 동방 정교회는 아름다움을 신학의 변두리가 아니라 예배와 영성의 한복판에 두어 왔다. 정교회에서 이콘(icon, 聖畵)은 단순한 종교화가 아니라 ‘하늘로 난 창’으로 이해된다. 이콘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모사하지 않고, 변모(變貌)된 천상의 실재를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양식화된다. 아름다움은 가르침을 전달하는 수단을 넘어, 그 자체로 보는 이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여겨진다.

이 감수성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원초 연대기』(Russian Primary Chronicle, 11~12세기 수도사들이 편찬한 키예프 루스의 연대기)에 전한다.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대공(Vladimir the Great)이 새 신앙을 찾던 987년 무렵, 여러 종교를 살피러 사절을 보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소피아 대성당에서 예배에 참석한 사절들은 이렇게 보고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자신들이 하늘에 있는지 땅에 있는지 알 수 없었으며, 지상 어디에도 그런 아름다움은 없더라는 것이다. 전승에 따르면 이 ‘아름다움의 경험’이 루스의 개종(988년경)을 이끈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교리적 논증보다 앞서 작동하는 일종의 ‘복음 전도’다.

아름다움과 구원을 잇는 정교회의 직관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 1821~1881)의 한 문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소설 『백치』(1869)에 나오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말이다. 다만 여기에는 흔히 간과되는 결이 있다. 이 문장은 작가가 직접 단언한 것이 아니라 작중 인물(미시킨 공작)에게 돌려진 말이며, 같은 소설 안에서 또 다른 인물은 곧바로 되묻는다 — “어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인가?” 도스토옙스키 자신은 아름다움을 결코 단순하게 보지 않았다. 다른 작품에서 그는 아름다움이 신과 악마가 싸우는 ‘전쟁터’가 될 수 있다고까지 썼다. 아름다움은 구원할 수도, 파멸시킬 수도 있다.

비유

같은 불이 추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집을 태우기도 한다. 아름다움도 그렇다. 진리·선함과 묶여 그 근원을 가리킬 때 아름다움은 영혼을 끌어올리지만, 진리·선함에서 떨어져 나와 감각적 자극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 도스토옙스키의 표현을 빌리면 — 그것은 ‘우상’이 된다. 그래서 정교회의 답은 명확하다. 세상을 구원하는 아름다움이란 막연한 아름다움 일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요 십자가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정교회 영성의 또 다른 축인 ‘신화(神化, theosis)’ — 인간이 은총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해 변모되어 간다는 사상 — 도 이 미학과 맞물린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아름다워지도록’ 부름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여덟근대의 전환 — 주관성의 시대와 그 한계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다”는 오늘날의 상식은 어디서 왔는가. 큰 전환점은 근대 미학의 성립, 특히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이후다. 거칠게 말하면, 아름다움의 무게중심이 대상에서 주관으로 옮겨갔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사물이 지닌 성질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한 주체가 느끼는 ‘이해관계 없는 즐거움’으로 설명했다. 이로써 미학은 형이상학(존재론)과 윤리학에서 점차 분리되어, 취향과 감정의 영역으로 자립해 갔다.

이 전환에는 분명한 강점이 있다. 그것은 미적 경험에서 주체의 자리, 곧 감상하는 사람의 자유와 감수성을 정직하게 인정한다. 또 단일한 미의 규범을 만인에게 강요하는 권위주의를 경계하고, 문화와 시대에 따라 미감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아름다움은 취향의 문제’라는 명제는 이런 다원성과 관용의 정신을 담고 있다.

기독교 전통은 이 주관적 차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드워즈의 ‘영적 감각’이나 발타사르의 ‘사로잡힘’이 보여주듯,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데에는 보는 이의 훈련된 마음과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전통이 끝까지 양보하지 않는 지점이 있다. 거기에는 실제로 ‘볼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미적 지각이 주관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곧 아름다움이 순전히 주관의 발명품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천문학에 무지한 눈에는 별자리의 질서가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질서가 보는 이의 환상인 것은 아니다.

전통이 우려하는 것은 분리의 대가다. 아름다움이 진리·선함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순수한 취향이 될 때, 그것은 쉽게 ‘예쁜 것’으로 납작해지고,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우상이 될 수 있다. 진·선·미가 한 근원에서 나온 한 빛의 세 얼굴이라는 옛 직관이 옳다면, 아름다움만 따로 떼어 소유하려는 시도는 결국 아름다움 자체를 빈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홉한 폭으로 모으며


서로 다른 시대와 교파를 거쳐 온 이 목소리들은, 강조점은 달라도 하나의 공통된 주장으로 수렴한다. 아름다움은 사물에 우연히 덧칠된 장식이 아니라 선함과 진리가 눈에 보이고 마음에 끌리게 되는 방식이며, 그 가장 깊은 역설은 십자가에 있고, 그 근원과 종착지는 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전통 · 인물아름다움이란핵심 기여
초월적 속성 (위디오니시우스·아퀴나스)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아름다움을 존재·신과 묶음
아우구스티누스근원을 가리키는 빌려온 빛피조물의 미를 신을 향한 사다리로
아퀴나스보아서 즐거운 것 (온전함·조화·광채)아름다움의 객관적 조건을 분석
십자가의 역설고통을 끌어안는 사랑의 광채‘예쁜 것’과 ‘아름다운 것’을 구분
발타사르형상이 내뿜는 영광의 광휘아름다움을 신학의 중심으로 회복
에드워즈존재가 존재에 동의함 (거룩함·사랑)윤리와 미학을 하나로, ‘영적 감각’
동방 정교회변모시키는 천상의 실재예배·이콘의 미, 신화(theosis)

이 전통이 오늘의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무엇이 아름다운가”에 대한 닫힌 공식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시선의 방향을 바꾸라는 제안에 가깝다. 아름다움을 손에 쥐고 소유하려 드는 대신 자기 너머의 무엇으로 받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표면의 매끈함이 아니라 진리와 선함이 함께 빛나는 자리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라는 것이다. 너무 늦게야 사랑했다던 아우구스티누스의 탄식이 여전히 울림을 갖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아름다움 앞에서 정작 자주 놓치는 것은, 그 아름다움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자기 너머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문제는 늘, 우리가 손가락에 멈추느냐 그 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느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