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드러낸 석유 시장의 구조적 취약성, 그리고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을 가리지 않고 경제성 계산을 뛰어넘어 진행 중인 각국의 에너지 자급 총력전을 정리한다.
2025년 12월, 국제 유가의 기준물인 WTI(West Texas Intermediate, 서부텍사스산원유)는 배럴당 60달러 아래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2025년 한 해 내내 석유 생산이 소비를 웃돌면서 재고가 쌓였고, 시장에서는 "석유 수요는 정점을 지났다", "유가는 하향 안정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로부터 석 달 뒤, 이 합의는 완전히 무너졌다.
2026년 2월 말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전면전이 발발했고,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선언했다. 전 세계 석유 해상 물동량의 약 5분의 1, 하루 2,000만 배럴 안팎이 지나던 폭 50여 킬로미터의 수로가 사실상 멈춰 섰다. IEA(International Energy Agency, 국제에너지기구)는 이를 두고 세계 석유 시장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급 차질이라고 규정했다. 4월의 휴전, 5월 말의 휴전 연장과 재개방 협상에도 불구하고 6월 초 현재 해협 통행량은 전쟁 이전 수준에 크게 못 미치고, 유가는 90달러대 중반에서 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이 보고서가 다루려는 것은 전황 자체가 아니다. 이번 사태가 드러낸 두 가지 구조적 사실이다. 첫째, 석유·가스 시장은 우리가 믿어 온 것보다 훨씬 빨리 한계에 도달하는 시스템이며, 휴전 합의가 곧 공급 정상화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 그 사실을 일찍 간파한 나라들이 이미 수년 전부터 경제성 계산을 일부 유보하면서까지 에너지 자급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었고, 이번 전쟁이 그 흐름을 결정적으로 가속했다는 것이다. 에너지 정책을 둘러싼 익숙한 질문들 — 얼마나 싼가, 일자리에 도움이 되는가, 기후에 좋은가 — 위에 이제 다른 질문 하나가 올라섰다. 끊기면 어떻게 되는가.
먼저 지난 석 달의 사건을 시간순으로 정리한다. 개별 뉴스로 접하면 단편적이지만, 이어 붙이면 하나의 패턴이 보인다. 합의와 기대가 가격을 끌어내리고, 현장의 물리적 제약이 그 기대를 번번이 배반하는 패턴이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먼저 확인된 사실은 원유 가격과 석유제품 가격의 분리다. 원유(브렌트유 기준)는 전쟁 전 70달러 안팎에서 한때 110달러를 넘어 50%가량 올랐다. 그런데 최종 소비자가 체감하는 제품 가격은 품목에 따라 그보다 훨씬 가파르게 뛰었다. 한국 산업통상부 집계에 따르면 전쟁 전 대비 휘발유 소매가는 미국에서 44%, 영국·독일·프랑스에서 19~37%(휘발유·경유) 올랐다. 항공유는 배럴당 80~90달러에서 200달러를 넘어서며 두 배 이상이 되었고, 선박용 경유는 140%가량 치솟았다.
왜 제품이 원유보다 더 오르는가. 원유는 비축이 가능하지만, 휘발유와 항공유 같은 제품은 품질 열화 때문에 장기 저장이 어렵다. 게다가 호르무즈 안쪽의 중질 원유에 의존하던 동아시아 정유소들이 원료를 구하지 못해 가동률을 낮추자, 제품의 생산 차질이 즉각 가격에 반영됐다. 시장에 직접 충격을 주는 것은 원유 재고가 아니라 제품의 흐름이라는 사실이 새삼 확인된 것이다.
원유가 밀가루라면 휘발유·경유·항공유는 빵이다. 밀가루는 창고에 쌓아둘 수 있지만 빵은 며칠을 못 간다. 밀가루 수입이 끊기면 제분소(정유소)가 멈추고, 창고에 밀가루가 남아 있어도 빵값이 먼저, 그리고 더 크게 뛴다. 소비자가 매일 사는 것은 밀가루가 아니라 빵이기 때문이다.
가격 급등은 곧바로 수요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항공권 유류할증료는 한국 국제선 기준 사상 처음으로 최고 단계인 33단계까지 올랐고, 일부 노선은 왕복 기준 수십만 원의 할증료가 붙었다. 항공사들은 수익성이 낮은 노선부터 감편과 운항 중단에 들어갔다. 나프타 가격 급등을 견디지 못한 석유화학 업계도 가동을 줄였다. 항공과 석유화학을 중심으로 하루 수백만 배럴 규모의 수요가 증발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설적으로 이 수요 파괴가 유가의 추가 폭등을 막아 주는 완충재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지금의 90~100달러대 유가는 "공급이 회복돼서"가 아니라 "수요가 무너져서" 유지되는 가격에 가깝다.
"세계에는 60일치, 80일치 재고가 있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절반의 진실이다. 그 재고에는 정유·물류 시설을 돌리기 위한 최소 운전재고가 포함돼 있고, 더 큰 위기에 대비해 남겨 둬야 하는 전략 물량이 포함돼 있다. SPR(Strategic Petroleum Reserve, 전략비축유)조차 기술적 방출 속도의 제약과 '그다음 위기'에 대한 대비 때문에 보유량 전부를 꺼내 쓸 수 없다. 실제로 가용한 완충 폭은 통상 두 달 남짓으로 평가되며, 차질이 그 기간을 넘어서면 현장의 압박이 급격히 커진다.
월급이 끊긴 가정이 비상금으로 버틸 때, 통장 잔고를 0원까지 쓰는 집은 없다. 내일 더 큰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잔고가 있다"는 사실과 "쓸 수 있다"는 사실은 다르다. 세계의 석유 재고도 마찬가지다. 장부상 숫자의 상당 부분은 심리적·물리적으로 잠겨 있는 돈이다.
지금 재고가 줄어드는 속도는 전례가 없다. 세계 원유 재고는 3월에 하루 527만 배럴, 4월에는 하루 862만 배럴씩 소진됐고, 일부 상업 재고는 이르면 8월에 최소 운영 수준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의 원유 재고 역시 6주 연속 감소하며 최소 운영 수준에 접근했다. IEA는 해협 통행이 6월부터 정상화된다는 전제 아래 9월은 되어야 재고가 회복 국면에 들어선다고 본다. 그리고 이 전제 자체가 낙관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여기서 이번 사태의 가장 냉정한 산수가 나온다. 설령 오늘 당장 양국 정상이 극적으로 화해하더라도, 설비와 물류가 전쟁 전 수준의 산출을 회복하는 데에는 서너 달이 걸린다. 다시 말해 9월까지의 공급 차질은 이미 확정된 미래이고, 시간이 갈수록 누적 차질량은 계속 불어난다. 한국 정부가 4~5월 두 달 동안 정유사에 빌려준 비축유 스와프 물량만 약 3,100만 배럴에 달한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재고가 얼마나 빠르게 소진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4월의 2주 휴전, 5월 말의 60일 연장 합의에도 해협이 좀처럼 정상화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해상 물류가 다시 돌기 위해서는 네 개의 관문을 차례로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합의, 합의를 실제로 이행하는 체계, 그 이행을 지켜본 보험 시장의 인수 재개, 그리고 전 세계로 흩어진 선박들의 재배치다. 이 가운데 가장 과소평가되는 것이 세 번째다.
전쟁 초기 다수의 유조선이 미사일과 드론에 피격되고 인명 피해까지 발생하자, 주요 보험사들은 호르무즈 항행에 대한 전쟁보험 인수를 사실상 거부했다. 수천억 원짜리 선박과 화물을, 한 번 운항으로 버는 운임 수입과 맞바꿔 위험에 노출시킬 선주는 없다. 4월 휴전 직후 제한적으로 재개된 통행이 통과 선박 피격 사건 한 번으로 다시 얼어붙은 것은, 이 신뢰가 얼마나 쉽게 리셋되는지를 보여 줬다. 합의문이 아니라 "몇 주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쌓여야 보험이 돌아오고, 보험이 돌아와야 배가 움직인다. 업계는 이 과정에 아무리 빨라도 서너 달이 걸린다고 본다.
시장은 이 구조를 가격에 반영하고 있다. 개전 직후 연말물 선물 가격은 70달러 수준이었다. 시장이 "연말이면 정상화된다"고 믿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 기대는 한 달 한 달 뒤로 밀렸고, 연말물 가격도 조금씩 올라왔다. 데드라인 안에 해협이 실질적으로 열리지 않으면 기대가 일시에 무너지며 시장이 반대 방향으로 급격히 움직일 수 있다는 경고 — 여름 이후 150달러 시나리오 — 가 나오는 배경이다. 미국 대통령이 유조선 선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통과하라고 공개 촉구하고,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 호위 함정 파견을 요청한 것도, 군사적 승리와 별개로 '항행의 신뢰'가 좀처럼 복원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물류의 시차도 만만치 않다. 평시라면 너무 당연해서 뉴스조차 되지 않던 중동발 VLCC(Very Large Crude Carrier, 초대형 원유운반선)의 입항이 이제는 한 척 한 척이 보도된다. 대서양권 — 미국·브라질·서아프리카 — 에서 동아시아로 향하는 대체 물량이 늘고 있지만, 항해 거리가 두세 배 길어 선박 회전율이 떨어지고, 시장에 그만한 여유 선복도 없으며, 유종이 기존 설비와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비싸고, 느리고, 지속 가능하지 않은 임시방편이다.
"호르무즈가 막혀도 기름은 계속 나오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잠시 동안만'이다. 수출길이 막힌 산유국들은 생산된 원유를 유조선과 임시 저장시설에 채워 넣으며 버텨 왔지만, 저장 여력은 빠르게 한계에 다다랐다. 걸프 안쪽 바다에는 만선 상태로 출항하지 못한 유조선들이 떠 있다. 장부상의 기름은 많지만, 꺼내 쓸 수 있는 기름은 부족한 기묘한 상황이다.
저장마저 가득 차면 유전은 생산을 줄이거나 멈춰야 하는데, 유전은 수도꼭지처럼 잠갔다 여는 설비가 아니다. 장기간 생산을 멈추면 배관과 정두에 왁스 성분이 침적해 유로가 막히고, 지하 저류층의 압력·유동 구조가 변해 재가동 후의 산출이 이전 수준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 석유공학적으로 이만한 규모의 동시 차단은 전례가 없어, 전쟁이 끝난 뒤 중동 산유능력이 온전히 복원될지 자체가 불확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전을 멈추는 것은 수도꼭지를 잠그는 일이 아니라 흐르던 혈관을 묶는 일에 가깝다. 피가 흐르지 않는 혈관에는 침전물이 쌓여 굳고, 오래 묶어 두면 다시 풀어도 예전처럼 흐르지 않는다. 멈추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복원에는 긴 시간이, 때로는 영구적인 손실이 따른다.
나라별 명암도 갈렸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동부 유전지대와 홍해를 잇는 동서 파이프라인 덕에 홍해 얀부항 경유 수출을 평시의 3배 이상으로 끌어올려, 전체 수출(평시 일 700만 배럴 수준)의 절반 이상을 회복했다. UAE(United Arab Emirates, 아랍에미리트)도 호르무즈 바깥 푸자이라항으로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으로 하루 100만~150만 배럴을 내보내지만, 반복되는 드론 공격으로 가동이 끊기곤 한다. 반면 걸프 가장 안쪽에 자리해 우회로가 전혀 없는 쿠웨이트는 4월 한 달간 원유를 단 한 배럴도 수출하지 못했다. 걸프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인데, 당시가 시설 파괴로 인한 '생산 불능'이었다면 이번에는 시설이 멀쩡한데도 내보낼 길이 없는 '운송 불능'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라크 남부의 수출 역시 사실상 전적으로 호르무즈에 묶여 있다. 좁은 수로 하나가 막혔을 뿐인데, 같은 산유국들 사이에서도 파이프라인 하나의 유무가 국가의 명운을 갈랐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직관에 반하는 데이터는 미국의 휘발유 가격이다. 미국은 원유 순수출국이고 중동산 수입 의존도가 낮은데도, 주요 선진국 가운데 휘발유 소매가 상승률(44%)이 가장 높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미국은 유류세 비중이 낮아 도매가 상승이 소매가에 거의 그대로 전가된다. 유류세가 가격의 절반 가까이 되는 한국·유럽에서는 같은 도매가 상승이 절반쯤으로 희석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둘째, 더 근본적으로 석유는 단일한 세계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미국 기업 입장에서 국제 시세가 국내가보다 높으면 수출하는 것이 합리적이고(주주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다), 그 결과 국내 가격은 국제 시세에 그대로 연동된다.
이 역설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한국이 설령 산유국이 된다 해도, 시장에 맡겨 두는 한 국내 기름값은 국제가를 따라간다. 에너지 안보의 목표는 '국제가와의 단절'이 아니라 물량 단절의 회피와 가격 변동성의 흡수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한편 이 구조의 수혜자도 분명하다. 원유 판매와 정제 마진 양쪽에서 이익이 불어난 북미 석유·정유 기업들은 이번 전쟁의 최대 수혜자로 꼽힌다. 그런데도 이들이 대대적 증산에 신중한 이유가 흥미롭다. 셰일오일의 신규 시추 손익분기점은 배럴당 60달러 안팎인데, 불과 반년 전 유가가 그 언저리까지 떨어졌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급등 못지않게 급락이 무서운 것이다. 가격이 폭등과 폭락을 오가면 그 누구도 수십 년짜리 에너지 인프라에 돈을 묻지 않는다. 이것이 다음 장의 주제로 이어진다.
이번 사태의 1라운드가 남긴 교훈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에너지는 공기·물·식량과 같은 부류의 재화다. 풍족할 때는 싸냐 비싸냐를 따지지만, 끊기는 순간 가격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시장 논리의 핵심은 '가장 싼 공급자에게 집중하라'인데, 필수재에서 그 최적화는 곧 단일 실패점을 만드는 일이다. 2025년 내내 시장이 합의했던 '구조적 공급 과잉' 전망이 한 분기 만에 '사상 최대 공급 차질'로 뒤집힌 경험은, 장기 가격 예측이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 줬다.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안보에 대한 투자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일제히 시장에 개입했다. 한국은 1969년 법 제정 이후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석유 최고가격제를 57년 만에 발동해 2주 단위로 공급가 상한을 고시하고, 유류세 인하와 정유사 손실 보전을 병행하고 있다. 공공기관 차량은 18년 만에 홀짝 2부제로 묶였고, 공영주차장에는 5부제가 적용됐다. IEA는 재택근무 확대, 고속도로 제한속도 하향, 대중교통 전환 등 10대 비상 수요 감축 조치를 권고했으며, 일본의 완성차 업체들은 감산에 들어갔다. 효과는 있었다. 최고가격제 시행 후 9주간 한국의 휘발유 소비는 3%, 경유는 8% 줄었고 가격 상승률은 주요국 최저 수준에 묶였다. 그러나 대가도 분명하다. 억눌린 가격과 국제 시세의 격차만큼 재정이 메우고 있고, 그 규모는 이미 수조 원대로 불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가격 통제는 시간을 버는 수단이지 해법이 아니며, 출구 전략 없이는 지속 불가능하다.
단기 대응은 어느 나라나 같다 — 아끼고, 통제하고, 버틴다. 차이는 중장기 대응에서 갈린다. 그리고 그 중장기 대응의 공통분모는 '에너지를 가능한 한 자기 손안에 두는 것'이다.
거시 지표부터 보면, 흐름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IEA 집계 기준 2025년 세계 청정에너지 투자는 약 2.2조 달러로, 화석연료 투자(약 1.1조 달러)의 두 배에 달했다. 재생에너지의 결정적 매력은 단순하다. 연료를 수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 설비는 한 번 사 오면 그만이지만, 연료는 끊길 때마다 인질이 된다. 이번 전쟁은 그 차이를 모든 정부의 눈앞에 증명해 보였다.
독일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재생에너지에 '압도적 공익(überragendes öffentliches Interesse)' 지위를 부여하고, 사전 조사를 마친 부지에 대해서는 간소화된 인허가 절차를 적용하는 등 절차 단축 입법을 거듭해 왔다. 통상 수년씩 걸리던 해상풍력 인허가를 1년 수준으로 압축하는 추가 입법까지 단행하며, 주민 수용성 절차의 일부를 사실상 정부 직권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한 조치에는 "민주적 절차의 후퇴"라는 비판도 따랐다. 전기요금 부담에 대한 오랜 비판에도 독일이 방향을 꺾지 않는 데에는 두 가지 계산이 있다.
첫째는 회계의 계산이다. 재생에너지 설비는 초기 투자가 크지만 연료비가 없다. 수입 화석연료에 해마다 지불하던 국부 유출이, 자국 내 투자·고용·임대수익으로 환류된다. 둘째는 산업의 계산이다. 태양광 패널 자체는 이미 범용재가 되어 누가 만들든 사 오면 그만이지만, 수백만 개의 분산 자원이 만들어 내는 출렁이는 전기를 안정된 전력으로 조율하는 기술 — 전력망 운영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시장 플랫폼 — 은 고부가가치 영역으로 남는다. 게다가 전력망은 국가 안보의 심장부라 이 시장에는 중국 기업이 들어올 수 없고, 서방 내부에서도 자국·역내 기업이 우선된다. 전기화가 깊어질수록 독일 산업이 가져갈 몫이 커진다는 베팅이며, 전력 인프라 기업들의 실적 회복은 그 베팅이 일부 적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는 누구나 살 수 있는 악기다. 그러나 수백만 개의 악기가 제멋대로 내는 소리를 하나의 교향곡으로 만드는 것은 지휘자의 일이고, 지휘 기술은 악기처럼 수입할 수 없다. 독일이 노리는 자리는 악기상이 아니라 지휘자다. 그리고 각국은 자기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외국에, 특히 잠재적 적성국에 맡기지 않는다.
독일의 일상은 이미 그 시스템 안에서 돌아간다. 시간대별로 가격이 달라지는 동적 요금제가 보편화되어, 햇빛과 바람이 넘치는 시간대에는 도매 전력 가격이 0원 밑으로 떨어지는 '마이너스 가격' 시간이 2024년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가정에서는 전기가 싸지는 시간에 맞춰 세탁기를 돌리고 전기차를 충전하라는 알림을 받는 것이 자연스럽다. 패널 가격이 워낙 떨어지자 베란다 난간에 거는 소형 '발코니 태양광'이 수십만 가구 단위로 보급됐고, 정원 울타리 자재보다 태양광 패널이 싸서 아예 패널로 담장을 두르는 집까지 등장했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현실이 된 것이다.
재생에너지 확산을 '대규모 발전단지'의 이야기로만 이해하면 절반을 놓친다. 지금 가장 빠르게 번지는 것은 지붕이다. 일본 도쿄도는 2022년 조례를 통과시켜 2025년 4월부터 대형 주택공급사업자가 짓는 신축 주택에 태양광 설치를 의무화했고, 일본 정부는 에너지 다소비 사업장에 옥상 태양광 설치 목표를 부과하며 미이행 시 벌금까지 규정했다. 2030년 시점의 최저비용 전원 전망도 원자력에서 태양광으로 바꿨다. 중국의 누적 분산형(지붕형 중심) 태양광은 2024년 말 370GW(기가와트)로 전체 태양광 설비의 40% 안팎에 이르고 — 최근 수년간은 사막의 초대형 단지보다 지붕이 더 빨리 늘었다 — 다수 지방정부가 신축 공장·창고의 옥상 태양광을 사실상 의무화하고 있다. 한 도시(쉬저우)에서만 14만 개 지붕에 패널이 올라갔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가난한 나라, 전쟁을 겪은 나라에서의 확산이다. 십 년 넘는 내전으로 전력망이 무너진 시리아에서는 불안정한 계통 전기의 대안으로 지붕 태양광이 전국적으로 퍼졌다. 만성 정전과 비싼 전기요금에 시달리던 파키스탄은 2024년 한 해에만 중국산 패널을 약 17GW어치 수입하며 세계 최대급 수입국으로 떠올랐고, 현지에서는 태양광 패널이 혼수품 목록에 오를 정도가 됐다. 원자력 발전소는 조 단위의 자본과 수십 년의 정치적 안정이 전제돼야 하지만, 태양광과 ESS(Energy Storage System, 에너지저장장치)는 100만 원 규모로도, 100조 원 규모로도 지을 수 있는 규모 자유(scale-free) 기술이다. 돈이 없는 나라, 인프라가 약한 나라, 국가가 미덥지 않은 사회의 틈새로 스며들고, 낱낱으로는 작지만 모이면 거대해진다.
이 확산의 엔진은 이념이 아니라 가격이다. BNEF(BloombergNEF, 블룸버그 뉴에너지파이낸스) 집계 기준 태양광 모듈 가격은 공급 과잉 속에 와트당 0.1달러 선까지 떨어졌고(2024년 한 해 동안만 36% 하락), 세계 고정형 태양광의 LCOE(Levelized Cost of Electricity, 균등화발전비용)는 MWh당 평균 36달러로 전년 대비 21% 급락했다. 리튬이온 배터리 팩 가격은 kWh당 115달러로 10여 년 전의 10분의 1 수준이다. 양산 패널의 변환 효율은 10년 전 17% 안팎에서 22% 내외로 올라왔고, 연구실의 페로브스카이트 탠덤 셀은 34%를 넘겼다. 제조사 보증 수명은 30~35년에 이른다. 가격은 한 자릿수 분의 1로 떨어졌는데 한 장당 뽑아내는 전기는 30% 늘었으니, 같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전기가 10년 새 열 배 이상이 된 셈이다.
"태양광은 간헐적이라 못 쓴다"는 반론에 대한 답도 숫자로 나오고 있다. 태양광에 충분한 ESS를 붙여 간헐성의 95%를 보완한 '준상시 전원' 기준의 시스템 원가를 추산한 업계 분석들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이 원가가 최근 5년 사이 30%가량 내렸고, 자국산 기자재로 짓는 중국에서는 5년 전 kWh당 170원 수준에서 현재 66원 수준까지 떨어졌으며 2030년에는 40원 안팎까지 내려갈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의 원전 정산단가(60~70원대)와 교차하는 구간이다. 미국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가 한국 조건으로 수행한 분석에서도 2030년 대규모 태양광의 LCOE는 MWh당 47~48달러로 모든 전원 중 가장 낮아질 것으로 전망됐다. 세계 전체로는 풍력·태양광 발전량이 원자력·수력의 합계를 수년 내에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이 일반적이다.
이 곡선이 무서운 이유는 따로 있다. 비용이 폭락하며 과잉 생산된 패널과 배터리가, 위에서 본 '스케일 자유' 속성과 결합해 국가 단위의 결심 없이도 보급을 밀어붙인다는 점이다. 정부가 망설이는 동안에도 개인과 기업이 각자의 계산으로 지붕에 패널을 올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백만 개의 발전소를 누가, 어떤 기술로 묶어 낼 것인가 — 다시 독일이 선점하려는 '지휘자'의 문제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절박했던 나라는 인도였다. 인도는 원유 수입의 40% 이상, LNG의 절반 이상, 취사용 LPG의 약 90%를 호르무즈 경유 물량에 의존해 왔다. 봉쇄와 함께 전국적 연료 대란이 벌어졌다. 가스를 구하지 못한 가정이 장작으로 밥을 짓고, 식당이 문을 닫고, LPG 가스통을 둘러싼 몸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인도는 이란과의 양자 협상으로 통과를 보장받은 자국 LPG 운반선들을 해군 함정으로 직접 호위해 해협을 빠져나오게 했다. 미군도 하지 않던 일이다.
이 경험이 인도의 에너지 전략을 한층 다그치고 있다. 인도의 누적 태양광 설비는 2025년 말 기준 136GW로 세계 3위권이며, 라자스탄 사막의 바들라 단지(2.2GW)에 이어 구자라트 카브다에는 태양광·풍력을 합쳐 30GW — 파리시보다 넓은 면적 — 의 세계 최대 하이브리드 단지가 건설되고 있다. 2030년 비화석 발전설비 500GW가 국가 목표다. 햇빛만큼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이 나라에서는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장작불 앞에서 체득한 교훈이 됐다.
재생에너지 확대가 한 갈래의 답이라면, 또 다른 갈래의 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나라는 프랑스다. 프랑스는 2026년 들어 신규 대형 원전 6기의 건설 계획을 확정 단계로 밀어붙이고 있고, 추가 8기까지 검토 대상에 올려놓았다. 합치면 최대 14기다. 그런데 이 드라이브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프랑스 원전이 한 번 처절하게 실패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프랑스는 2007년 노르망디의 플라망빌 부지에서 차세대 노형인 EPR(European Pressurized Reactor, 유럽형 가압경수로) 1기를 착공했다. 당초 목표는 공기 약 5년, 예산 33억 유로. 결과는 17년이 걸려 2024년 말에야 전력망에 연결됐고, 사업자인 EDF(Électricité de France, 프랑스전력공사)가 집계한 건설비만 132억 유로였다. 프랑스 감사원은 금융 비용까지 합치면 사업비가 190억 유로대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당초 계획의 네 배가 넘는다.
역설적인 것은 기술 자체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는 점이다. EPR은 독립된 안전 계통을 4중으로 갖추고, 노심이 녹아내리는 최악의 사고가 나더라도 용융물을 원자로 건물 바닥에서 받아내는 코어캐처(core catcher)를 설치했으며, 대형 항공기가 충돌해도 견디도록 격납건물을 이중으로 둘렀다. 단일 호기 출력은 1,650MW(메가와트)로 세계 최대급이다. 안전과 성능의 거의 모든 항목에서 당대 최고 사양을 모아 놓은, 말하자면 원자로의 오트쿠튀르였다.
문제는 그 최고 사양에 도전한 시점이었다. 프랑스는 이 사업 직전까지 20년 가까이 대형 원전을 새로 짓지 않았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서방 대부분이 그랬다. 그 사이 대형 단조품과 특수 용접을 소화할 공급망은 흩어졌고 숙련 인력은 은퇴했다. 백지 상태의 산업 기반 위에서 가장 어려운 설계를 처음 시공하니, 용접 결함과 재작업과 규제 대응이 꼬리를 물며 공기를 잡아먹었다. 같은 노형을 먼저 시작한 핀란드의 올킬루오토 3호기 역시 18년 가까이 걸렸고, 시공을 맡은 업체는 사실상 사업 부문이 해체되는 수준의 타격을 입었다.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 안에서 원전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해 온 진영의 핵심 논거가 안전이 아니라 경제성이라는 사실이다. 이 돈이면 다른 전원을 훨씬 많이 지을 수 있었다는 비판에, 플라망빌의 숫자만 놓고 보면 반박이 궁색했다.
첫 붕어빵은 비싸다. 틀을 새로 만들고, 반죽 배합을 익히고, 굽는 손을 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틀로 쉬지 않고 구우면 한 개당 원가는 가파르게 떨어진다. 원전도 같다. 동일한 노형을 끊김 없이 반복 건설해 온 나라는 틀과 손을 그대로 유지했고, 20년 만에 다시 굽기로 한 나라는 틀부터 새로 파야 했다. 서방과 동아시아의 원전 건설비 격차의 상당 부분은 기술력이 아니라 이 '연속성'의 차이에서 나온다.
실제로 체르노빌 이후에도 원전을 거의 끊김 없이 지어 온 한국·중국 등의 건설 실적은 서방의 초도호기들과 뚜렷이 대비된다. 한국은 동일 노형(APR1400)을 국내외에서 반복 건설하며 설계·기자재·시공 생태계를 유지해 왔고, 최근 착공분의 기당 사업비는 EPR2 목표치의 절반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은 현재 20기가 넘는 원전을 동시에 건설 중이다. 짓는 것을 멈추지 않은 나라와 멈췄던 나라의 차이가, 지금 세계 원전 시장의 지형을 가르고 있다.
플라망빌의 수업료를 치른 프랑스가 내놓은 답이 EPR2 프로그램이다. 설계 철학부터 다르다. 검증이 어렵거나 시공 난도를 끌어올리는 사양은 덜어내 설계를 간소화하고, 펜리·그라블린·뷔제 등 이미 원전이 가동 중인 기존 부지에 2기씩 짝지어 짓는다. 부지 선정과 주민 수용성이라는 가장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처음부터 제거하고, 동일 설계를 연속 건설해 학습 효과를 누리겠다는 것이다. 일정은 2026년 말 최종투자결정(FID, Final Investment Decision), 2029년 펜리 1호기 첫 콘크리트 타설, 2038년 첫 호기 가동을 목표로 한다.
그렇게 간소화하고도 비용은 만만치 않다. 2026년 3월 프랑스 정부 검증을 거쳐 확정된 6기 건설비 상한은 728억 유로, 기당 약 121억 유로로 한화 19조 원 안팎이다. 플라망빌보다는 나아졌지만, 연속 건설 생태계를 유지해 온 나라들과의 격차는 여전히 크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프로그램의 진짜 혁신이 등장한다. 혁신은 원자로가 아니라 돈의 구조에 있다.
20조 원짜리 설비를 짓는 사업의 경제성은 노형 못지않게 이자율이 결정한다. 원전은 총비용의 대부분을 가동 전에 쏟아붓고 수십 년에 걸쳐 회수하는 구조라서, 조달 금리가 높으면 그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 전기 원가에 그대로 얹힌다. 프랑스 감사원과 환경단체의 분석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대목인데, 요즘처럼 시장 금리로 8~9%대에 자금을 조달하면 같은 원전이라도 전기 원가가 저리 조달 대비 두 배 가까이 벌어진다. 시중은행 돈으로 지은 원전의 전기는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전기가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가 설계한 패키지는 이렇다. 건설비의 약 60%를 국가가 우대 금리로 직접 대출해 준다. 그 재원의 핵심은 국민들이 은행에 맡겨 둔 비과세 저축을 모아 공공 투자에 활용하는 국민 저축기금이다. 국민의 예금이 원전 건설 자금으로 흘러 들어가는 구조다. 여기에 건설비가 상한을 넘길 경우의 초과 리스크를 국가와 사업자가 사전에 합의한 비율로 분담하는 장치를 더했다.
수익 쪽에는 더 긴 장치를 걸었다. 가동 후 40년 동안 적용되는 차액계약(CfD, Contracts for Difference)이다. 기준가는 메가와트시당 100유로(2024년 화폐가치 기준)를 상한으로 정했는데, 원화로 환산하면 킬로와트시당 대략 150~160원 수준이다. 시장 전기 가격이 기준가보다 낮으면 부족분을 국가가 채워 주고, 기준가보다 높으면 초과분을 사업자가 국가에 반환한다. 어느 쪽으로 시장이 움직이든 사업자의 판매 수입은 40년간 기준가에 고정된다. 이 지원 구조는 2025년 11월 EU(European Union,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국가보조 승인 절차를 위해 공식 통보됐다.
배추값 폭락이 무서워 농가가 파종을 주저할 때, 유통업체가 "포기당 1,000원에 전량 수매"를 미리 약속하면 농가는 안심하고 심는다. 가을에 배추값이 500원이 되면 차액을 보전받고, 2,000원으로 뛰면 초과분은 약속대로 돌려준다. 농가가 포기하는 것은 대박의 꿈이고, 얻는 것은 수확까지의 예측 가능성이다. 수십조 원을 가동 전에 쏟아붓는 원전에서 이 40년짜리 예측 가능성은, 어떤 안전 설비보다 중요한 '경제성의 설계 요소'다. 유럽의 대형 해상풍력이 먼저 이 방식으로 자금을 모았고, 이제 원전이 같은 길을 간다.
요약하면 이렇다. 짓는 돈은 국민 저축으로 싸게 빌려 주고, 번 돈은 40년간 국가가 보증한다. 전력망 쪽에서도 송전망 운영사가 2040년까지 약 1,000억 유로 규모의 망 투자를 예고했다. 이것은 시장이 알아서 굴러가는 그림이 아니다. 프랑스는 "시장이 감당하지 못하는 시간 지평의 투자는 국가가 멍에를 멘다"는 쪽을 선택했고, 거기에 국민의 예금까지 동원했다. 킬로와트시당 150원대라는 기준가는 한국 원자력 정산단가(60~70원 수준)와 비교하면 두 배가 넘는 비싼 전기다. 그럼에도 한다는 것, 그것이 이 프로그램이 보내는 신호다. 가격표가 아니라 자급이 목적 함수가 됐다.
독일은 재생에너지와 전력 시스템에, 프랑스는 원전에, 중국은 그 둘 모두에, 인도는 사막의 태양에 베팅했다. 겉보기에 제각각인 이 선택들을 한 줄에 꿰는 공통분모가 있다.
첫째, 연료를 수입하지 않는 에너지라는 점이다. 한국이 한 해 원유·가스·석탄을 사 오는 데 쓰는 돈은 유가와 환율에 따라 100조 원을 훌쩍 넘나든다. 이 돈은 국경 밖으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반면 재생에너지든 원전이든 자국 공급망으로 짓고 자국 연료(혹은 무연료)로 돌리는 전원은, 표면의 발전 단가가 더 비싸 보여도 그 돈이 국내의 설비·일자리·금융으로 환류한다. 독일이 전기요금 상승을 감내하며 버틴 논리도, 프랑스가 한국의 두 배가 넘는 기준가를 받아들인 논리도 결국 같다. 밖으로 새는 돈과 안에서 도는 돈은 액수가 같아도 국민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다르다는 것이다.
둘째, 시장 원리를 초월한 국가 개입이라는 점이다. 독일은 재생에너지에 '압도적 공익' 지위를 부여하고 인허가 기간을 법으로 짧게 못 박았다. 프랑스는 국민 저축을 동원하고 40년 수입을 보증했다. 중국은 신축 건물 옥상의 태양광을 의무화하고, 인도는 국책 사업으로 기가와트 단위의 단지를 밀어붙인다. 안전한 해상 수송로를 패권국이 보증해 주던 시대가 저물면서, 에너지의 안보 비용은 더 이상 어쩌다 치르는 돌발 비용이 아니라 상수가 됐다. 각국 정부는 그 상수를 시장에 맡겨 두지 않기로 했다.
셋째, 이들 정책의 진짜 표적이 '낮은 가격'이 아니라 '고정된 가격'이라는 점이다. 앞서 보았듯 급등만큼이나 급락도 투자를 죽인다. 셰일 기업은 유가가 출렁일까 봐 시추를 망설였고, 원전 사업자는 전기값이 떨어질까 봐 착공을 망설였다. 차액계약, 장기 구매계약, 자가소비형 지붕 태양광 — 형태는 달라도 모두 가격의 변동성을 죽이는 장치다. 안보의 시대에 에너지 정책의 제1 과제는 가격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가격을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동했다.
한국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림이 선명해진다. 한국은 원유의 약 70%를 중동에 의존하고, LNG(Liquefied Natural Gas, 액화천연가스)도 상당 물량이 호르무즈를 지나온다. 약 7개월분에 이르는 민관 비축은 세계 최상위권이고 이번 사태에서 실제로 시간을 벌어 줬지만, 이번 봄이 보여 준 것은 비축이 구조를 바꾸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비축은 진통제이지 치료제가 아니다.
최고가격제는 민생 방어에는 효과를 냈지만 셈법이 어렵다. 정유사 손실을 사후 보전하는 구조라 사태가 길어질수록 재정 부담이 조 단위로 쌓이고, 가격 신호를 눌러 놓으니 소비는 좀처럼 줄지 않는다. 가격이 두 배 가까이 뛴 시기에 휘발유 소비가 한 자릿수 퍼센트 줄어드는 데 그쳤다는 사실은, 보조가 두터울수록 절약의 유인이 약해진다는 오래된 딜레마를 다시 확인시켜 준다.
수입선 다변화는 필요하지만 만능이 아니다. 2장에서 본 산유국의 역설이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석유와 가스는 세계 단일 시장이어서, 미국산 비중을 아무리 늘려도 중동에서 터진 충격의 가격은 고스란히 청구된다. 다변화는 물량이 끊기는 위험에 대한 보험이지, 가격이 뛰는 위험에 대한 보험이 아니다. 가격 위험까지 줄이는 길은 결국 수입 연료 자체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것뿐이다.
그 길 위에서 한국의 제약 조건은 실재한다. 국토의 약 70%가 산지이고 지가는 세계 최고 수준이며 주거의 다수가 아파트다. 대규모 지상 태양광이 다른 나라만큼 쉽게 들어설 땅이 아니라는 지적은 옳다. 그러나 그 제약이 지붕과 시스템까지 포기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한국은 태양광 설비에서 대형 사업용의 비중이 압도적이고 지붕형이 유독 적은, 세계적으로 드문 구성을 가진 나라다. 땅이 가장 비싼 나라에서 땅을 가장 많이 쓰는 방식으로만 태양광을 해 온 셈이다. 여기에는 복잡한 건축 규제, 까다로운 계통 연결 절차, 낮은 전기요금이 만든 약한 경제적 유인이 겹쳐 있다. 기술의 문제라기보다 제도의 문제이고, 제도는 바꿀 수 있는 영역이다. 그리고 수백만 개의 지붕이 만들어 낼 복잡한 전력망을 다루는 운영 기술은, 독일의 사례가 보여 주듯 그 자체로 수출 가능한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원전 쪽에서 한국이 가진 자산은 분명하다. 동일 노형을 끊김 없이 반복 건설해 온 생태계는 서방 전체가 부러워하는, 돈으로 단기간에 살 수 없는 역량이다. 다만 프랑스 사례의 교훈을 "그러니 원전이 답"으로만 읽으면 절반을 놓친다. 진짜 교훈은 자본비가 큰 전원의 경제성은 금융과 시장 설계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저리의 장기 자금, 수십 년짜리 고정가격 계약 같은 장치는 원전에도 해상풍력에도 똑같이 필요하다. 전원 구성을 둘러싼 논쟁이 진영 싸움이 되는 동안, 정작 각국이 경쟁적으로 정비하고 있는 것은 이 금융·계약 인프라다.
그래서 공론장의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어느 쪽 전기가 더 싸냐"는 질문은 가격의 시대의 질문이다. 안보의 시대의 질문은 이것이다. 끊기면 어떻게 되나. 그 돈은 어디로 흐르나. 30년 뒤에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나.
유가는 내릴 수 있다. 휴전이 유지되고 해협이 다시 열리면 시장은 빠르게 안도할 것이고, 어느 시점에는 이번 봄의 기름값이 옛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두 가지는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는 기억이다. 합의가 통행을 보장하지 않고, 패권국이 바닷길을 지켜 주지 않으며, 보험사의 펜 끝이 함대보다 강하다는 것을 세계의 화주와 정부 들은 잊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결정이다. 법으로 못 박힌 인허가 기간, 서명된 최종투자결정, 착공된 기가와트 단지는 유가가 70달러로 돌아가도 취소되지 않는다.
이번 사태가 가른 것은 유가의 고점이 아니라 시대의 이름이다. 가격의 시대에 좋은 에너지는 가장 싼 에너지였다. 안보의 시대에 좋은 에너지는 최악의 날에도 끊기지 않는 에너지, 그리고 거기에 치르는 돈이 자국 안에서 도는 에너지다. 세계는 이미 그 기준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움직임은 다음 유가 하락 국면에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