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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 AI 인프라

AI와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언제 끝나는가

2026년의 반도체 시장은 1조 달러 문턱에 서 있다. 그런데 호황의 한복판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질문은 "얼마나 더 오를까"가 아니라 "언제 꺼질까"다. 이 글은 그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이번 사이클은 달력이 아니라 제약 조건이 끝낸다.

2026년 6월 8일 · 전력·반도체·AI 인프라

슈퍼사이클(supercycle)은 일반적인 경기 순환보다 길고 깊은 구조적 호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반도체 산업은 70년 넘게 3~4년마다 호황과 불황을 반복해 왔는데, 그 진폭을 넘어서는 장기 상승 국면을 만났을 때 업계는 이 단어를 꺼낸다. 2024년 중반 이후 인공지능(人工知能, Artificial Intelligence·이하 AI) 수요가 만든 상승은 거의 모든 시장조사기관과 투자은행이 슈퍼사이클로 부른다.

먼저 규모를 보자. 세계반도체무역통계(世界半導體貿易統計, World Semiconductor Trade Statistics·이하 WSTS)는 2026년 세계 반도체 매출을 약 9,750억 달러, 전년 대비 약 26% 증가로 전망한다.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는 이를 보수적이라 보고 30% 증가한 1조 달러 초과를 예상한다. 어느 쪽이든 인류 역사상 반도체 매출이 처음으로 1조 달러 선에 닿는 해다.

이 성장의 엔진은 명백히 데이터센터다. 시장조사기관 IDC(International Data Corporation)는 2026년 데이터센터용 반도체 매출만 약 4,771억 달러에 이르고, 2030년에는 8,432억 달러로 전체 반도체 시장의 절반에 육박할 것으로 본다. 한때 경기 순환의 일부였던 데이터센터 지출이, 스스로를 강화하는 투자 사이클로 바뀌었다는 것이 이 호황의 핵심 진단이다.

상위 하이퍼스케일러 합산 자본지출 단위: 10억 달러 · 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알파벳·메타·오라클 합산 추정 700 0 241 2024년 ~400 2025년 635~725 2026년(전망) 약 75%가 AI 인프라 2년 만에 약 2.7~3.0배 증가
2024년 약 2,410억 달러였던 5대 하이퍼스케일러 합산 자본지출은 2026년 6,350~7,250억 달러로 전망된다. 분기 기준으로는 2025년 3분기에 처음으로 1,000억 달러를 넘었다.

숫자의 결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아보자. 2024년 5대 하이퍼스케일러의 합산 자본지출은 약 2,410억 달러였다. 2026년 전망치는 6,350억~7,250억 달러로, 불과 2년 만에 세 배에 가깝다. 그중 약 75%가 AI 인프라 — 그래픽처리장치(Graphics Processing Unit·이하 GPU), 고대역폭 메모리, 네트워킹, 전력 설비 — 로 향한다. 미국 역사상 평시 최대 규모의 산업 동원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엔비디아(NVIDIA) 한 기업의 실적이 이 동원의 거울이다. 2026년 2~4월 분기 매출은 816억 달러로 전년 대비 85% 늘었고, 그중 데이터센터 부문이 752억 달러(92% 증가)였다. 다음 분기 가이던스는 910억 달러다. 시가총액은 5조 달러를 넘어 지구에서 가장 비싼 회사가 되었다.

01"끝난다"는 무슨 뜻인가

"슈퍼사이클이 언제 끝나느냐"는 질문은 사실 하나의 질문이 아니다. 적어도 세 개의 서로 다른 사이클이 한데 묶여 움직이고 있고, 이들은 같은 시점에 끝나지 않는다. 질문을 분해하지 않으면 답도 흐려진다.

첫째는 가격 사이클이다. 메모리 반도체의 평균판매가격(平均販賣價格, Average Selling Price·이하 ASP)이 오르내리는 순환으로, 가장 빠르고 변동성이 크다. 둘째는 자본지출 사이클이다. 하이퍼스케일러가 데이터센터에 쏟는 돈의 증감으로, 한 번 정해진 투자 계획이 집행되기까지 몇 분기의 관성이 있다. 셋째는 밸류에이션 사이클이다. 주식 시장이 이 모든 것에 매기는 기대값으로, 가장 앞서 움직이고 가장 변덕스럽다.

비유

세 사이클은 자동차의 속도계·연료게이지·운전자의 기분과 같다. 운전자의 기분(밸류에이션)은 신호 하나에 급변하고, 속도(가격)는 그보다 느리게 변하며, 연료(자본지출)는 한 번 가득 채우면 한동안 줄지 않는다. "여행이 언제 끝나느냐"는 질문에 답하려면, 기분이 상한 것인지 연료가 떨어진 것인지를 먼저 구분해야 한다. 2000년 닷컴 붕괴는 기분과 연료가 동시에 무너진 사고였다.

역사적으로 가장 파괴적이었던 종말은 셋이 동시에 꺾인 경우다. 2000년 닷컴 붕괴 때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SOX)는 고점에서 약 82% 빠졌고, 정점을 회복하는 데 4년 — 일부 종목 기준으로는 10년 이상 — 이 걸렸다. 반면 2018년 미·중 무역분쟁기의 조정은 30%대에 그쳤다. 같은 "끝"이라도 깊이가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이 글의 질문은 이렇게 다시 써야 한다.

세 사이클 중 무엇이, 어떤 제약에 부딪혀, 가장 먼저 꺾이는가.

02강세론: 2028년까지 갈 수 있다는 근거

먼저 이 사이클이 이례적으로 길 수 있다는 쪽의 논거를 정리한다. 강세론의 핵심은 한 문장이다. 이번 호황은 수요가 넘쳐서가 아니라 공급이 부족해서 굴러간다.

고대역폭 메모리(高帶域幅 메모리, High Bandwidth Memory·이하 HBM)가 그 증거다. HBM은 GPU 옆에 수직으로 쌓아 붙이는 고성능 메모리로, AI 가속기 한 장이 빨아들이는 데이터를 감당한다. 마이크론(Micron)의 2026년 HBM 생산은 장기 계약으로 이미 전량 매진됐고, 할당은 2027년까지 넘어가 있다. HBM 전체시장규모(全體市場規模, Total Addressable Market·이하 TAM)는 2025년 약 350억 달러에서 2028년 약 1,000억 달러로, 연평균성장률(年平均成長率, Compound Annual Growth Rate·이하 CAGR) 약 40%로 커진다는 것이 마이크론의 전망이다. 마이크론은 수요와 공급 제약이 빚는 빠듯한 시장 상황이 2026년을 넘어 지속될 것으로 본다 — 즉 최소 3년 이상 이어지는 상승 국면이다.

왜 공급이 안 늘어나나

HBM은 평범한 동적 램(Dynamic Random-Access Memory·이하 DRAM)보다 비트당 원가가 몇 배 높고, 같은 데이터를 담는 데 약 3배의 웨이퍼 면적이 든다. 제조사가 HBM 생산을 늘리면 일반 메모리 생산이 줄어든다. 공급을 늘리는 일 자체가 다른 공급을 깎아먹는 구조라, 가격이 올라도 물량이 따라 늘지 못한다. 새 증설 물량이 의미 있게 시장에 풀리는 시점도 2026년 말 이후로 늦다.

두 번째 논거는 자금의 성격이다. 피델리티(Fidelity) 분석에 따르면 광범위 지수인 러셀 3000의 자본지출/잉여현금흐름(剩餘現金, Free Cash Flow·이하 FCF) 비율은 현재 1배 미만이다. 2000년 닷컴 정점에서는 이 비율이 4배에 육박했다. 1배 미만은 기업들이 빌린 돈이 아니라 번 돈으로 투자한다는 뜻이다. 빚으로 쌓은 모래성과는 다르다는 것이 강세론의 안전판이다.

세 번째는 수요의 구조 변화다. 추론(推論, inference) — 이미 학습된 모델을 실제 서비스에 돌리는 작업 — 이 이제 전체 AI 연산의 약 3분의 2를 차지한다. 학습은 한 번 끝나면 멈추지만, 추론은 사용자가 늘수록 영원히 돌아간다. 엔비디아는 이를 "에이전트(agent) AI의 변곡점이 도래했다"고 표현한다. 강세론에서 이번 사이클은 단순한 기술 유행이 아니라 인터넷·모바일에 견줄 플랫폼 전환이며, 그 인프라 건설은 이제 막 시작됐다.

03약세론: 돈이 원을 그리며 돈다

약세론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거창한 거품론이 아니라 회계의 한 패턴이다. 비판자들은 이를 순환 출자(循環出資, circular financing)라 부른다. 칩을 파는 회사가 그 칩을 살 회사에 직접 투자하는 구조다.

돈은 같은 원 안에서 돈다 2026년 기준 상호 연계 계약 규모 누계 8,000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 엔비디아 칩 공급 · 투자 오픈AI 등 AI랩 모델 개발 클라우드·오라클 데이터센터 운영 ① 지분·현금 투자 ② 컴퓨트 임대 계약 ③ GPU 대량 구매 투자금이 매출로 되돌아오며, 외부에서 보면 수요가 견고해 보인다
엔비디아가 AI 기업에 투자하고, 그 기업이 클라우드에 컴퓨트를 임대하며, 클라우드는 다시 엔비디아 GPU를 사들인다. 같은 돈이 원을 그리며 도는 동안 모든 참여자의 매출과 밸류에이션이 동시에 부푼다.

비판의 핵심은 합법성이 아니다. 이 거래들은 숨겨져 있지도, 불법도 아니다. 문제는 외부에서 볼 때 수요가 실제보다 견고해 보이는 착시를 만든다는 데 있다. 1990년대 말 통신 장비업체들이 인터넷 스타트업에 자금을 대고 그 돈으로 자기 장비를 팔게 했던 벤더 파이낸싱(vendor financing) 구조와 닮았다는 지적이 따라붙는다.

밑바닥 경제는 냉정하다. 오픈AI는 연간 약 600억 달러를 컴퓨트에 쓰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매출은 약 130억 달러 수준이다. 2026년 적자는 약 140억 달러로 전년의 거의 세 배가 될 전망이다. 더 넓게 보면 여러 기업 설문에서 엔터프라이즈 AI 프로젝트의 약 95%가 측정 가능한 투자수익률(投資收益率, Return on Investment·이하 ROI)을 내지 못했다고 답했다. 인프라에 쏟은 돈이 아직 돈을 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다.

재무 구조에도 균열이 보인다. 아마존의 FCF는 2026년 마이너스로 돌아설 전망이고,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는 하이퍼스케일러의 부채 발행이 4,000억 달러를 넘을 것으로 본다. 빅테크 전반의 FCF가 자본지출에 밀려 2026년에 최대 90%까지 줄 수 있다는 추정도 있다. 앞서 강세론이 내세운 "번 돈으로 투자한다"는 안전판은, 오라클처럼 리스(lease)와 부채에 의존하는 기업을 포함하면 빠르게 약해진다. 자본지출/매출 비율은 닷컴 정점의 32%를 이미 넘어 2026년 약 34%로 추정된다.

2008년 금융위기를 예측해 유명해진 마이클 버리(Michael Burry)는 2026년 들어 반도체 랠리가 닷컴 막바지를 닮았다며 주요 AI 종목에 대규모 풋옵션을 걸었다. 그가 옳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SOX 지수가 연초 대비 65% 급등하는 국면에서 "이번엔 다르다"는 말이 반복될 때 경계가 필요하다는 그의 경고는, 역사가 여러 번 검증한 격언이기도 하다.

04진짜 변수 ① 전력 — 칩이 아니라 전기가 모자란다

강세론과 약세론은 모두 돈과 수요를 본다. 그러나 2026년 들어 산업의 발목을 실제로 잡기 시작한 것은 돈도 칩도 아닌 전기다. 데이터센터 업계의 표현을 빌리면, 성장의 정의를 규정하는 제약이 이제 전력으로 옮겨갔다.

문제는 속도의 불일치다. AI 기업·데이터센터·전력망은 서로 다른 시간 단위로 움직인다. 데이터센터 건물은 1~2년이면 짓는다. 그런데 그 건물에 전기를 끌어오는 계통 연계는 미국 주요 지역에서 3~7년, 유럽연합(歐洲聯合, European Union)에서는 2~10년이 걸린다. 고압 변압기 납기는 3~5년으로 늘었고, 스위치기어(switchgear)는 2028년까지 매진이다.

건물은 빠르고, 전기는 느리다 착공·납품·연계 소요 기간(년) · 미국·유럽 추정 범위 02 46 810년 데이터센터 건설 1~2년 고압 변압기 납기 3~5년 전력 계통 연계 2~10년 수요는 1~2년 단위로 늘지만, 전기를 대는 데는 그 몇 배가 걸린다
골드만삭스(Goldman Sachs)는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2027년까지 50%, 2030년 말까지 최대 165% 늘 것으로 본다. 미국 에너지부와 로런스버클리연구소는 데이터센터가 2030년 미국 전체 전력의 최대 12%를 소비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2024년 약 4%).
비유

고속도로(전력망)는 그대로인데, 톨게이트로 들어오려는 화물차(데이터센터)가 갑자기 열 배로 늘어난 상황이다. 차를 더 만드는 일(칩 생산)은 빠르지만, 고속도로를 넓히는 일(송배전·발전 증설)은 인허가와 공사 때문에 몇 년이 걸린다. 결국 차가 아무리 많아도 도로가 받아주는 만큼만 굴러간다. AI 성장의 상한이 연산 성능에서 가용 전력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이 뜻이다.

이 제약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는 호황을 식히는 브레이크다. 전기를 못 끌어오면 GPU를 사놓고도 못 돌린다. 실제로 2026년 1분기에만 미국에서 지역 사회 반대로 약 417억 달러 규모의 데이터센터 프로젝트가 취소됐다. 다른 한편으로는 호황을 떠받치는 구실도 한다. 공급이 빠듯할수록 이미 전력을 확보한 사업자의 자산 가치가 오르고, 변압기·송전·발전 설비에 또 다른 투자 파도가 인다. 전력은 슈퍼사이클을 끝낼 수도, 다음 국면으로 넘길 수도 있는 이중 스위치다.

05진짜 변수 ② 커스텀 실리콘 — 고객이 직접 칩을 만든다

두 번째 변수는 이 사이클의 상징인 엔비디아의 가격 권력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린다. 추론이 전체 연산의 3분의 2로 커지면서, 무엇이든 잘하지만 무엇에도 최적화되지 않은 범용 GPU의 약점이 드러났다. 추론처럼 작업이 정형화된 영역에서는 주문형 반도체(注文型半導體, Application-Specific Integrated Circuit·이하 ASIC)가 더 싸다.

고객이 만든 칩이 더 빨리 큰다 2026년 AI 가속기 출하 성장률(연 추정) · 출처: 트렌드포스 0% 25% 50% 44.6% 커스텀 ASIC 16.1% 범용 GPU ASIC가 GPU보다 약 2.8배 빠르게 성장
구글의 텐서처리장치(Tensor Processing Unit·TPU), 아마존 트레이니엄, 마이크로소프트 마이아, 메타 MTIA가 대표적이다. 트렌드포스(TrendForce)는 2026년 AI 서버의 약 27.8%가 ASIC 기반이 될 것으로 본다(2023년 약 15%).

경제 논리는 단순하다. 대규모·다년 추론에서 ASIC는 범용 칩보다 총소유비용(總所有費用, Total Cost of Ownership·이하 TCO)이 40~65% 낮다는 분석이 있다. 이미지 생성 서비스 미드저니(Midjourney)는 추론을 엔비디아 GPU에서 구글 TPU로 옮긴 뒤 월 컴퓨트 비용을 약 210만 달러에서 70만 달러로 줄였다고 밝혔다. 65%가 넘는 절감이다.

주목할 점은 ASIC를 만드는 주체다. 엔비디아 데이터센터 매출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다섯 회사가, 동시에 엔비디아를 대체할 칩을 만들고 있다. 경쟁이라기보다 고객의 완만한 이탈이다. 일부 분석은 엔비디아의 추론 시장 점유율이 90% 이상에서 2028년 20~30%로 내려갈 수 있다고 본다(엔비디아는 베라 루빈 같은 차세대 제품으로 방어한다). 앤트로픽(Anthropic)이 브로드컴(Broadcom)에 110억 달러어치 커스텀 칩을 주문한 것도 같은 흐름이다.

이 변수가 끝내는 것은 사이클 전체가 아니라 한 회사의 마진이다. AI 인프라 투자가 계속돼도, 엔비디아가 누리던 70%대 매출총이익률은 ASIC 경쟁이 본격화될수록 압박을 받는다. 슈퍼사이클의 주인공이 바뀌는 것은 사이클이 꺾이는 것과 다른 사건이다.

06진짜 변수 ③ 메모리 — 가장 먼저 꺾이는 사이클

세 사이클 중 가장 빨리 끝나는 것은 거의 언제나 메모리 가격 사이클이다. 그래서 메모리는 슈퍼사이클의 조기 경보기 역할을 한다.

지금의 가격은 뜨겁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2026년 DRAM 매출이 51%, 낸드 플래시(NAND flash)가 45% 늘고, ASP는 각각 33%·26% 오를 것으로 본다. 트렌드포스 집계로 2026년 1분기 DRAM 계약가는 전분기 대비 90~95% 뛰었는데, 이는 기록적인 분기 상승이다. HBM과 서버용 메모리에 생산을 몰아주느라 일반 메모리 공급이 줄면서, 개인용 컴퓨터(個人用, Personal Computer)와 스마트폰 가격까지 밀어 올리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 위험이 있다. 가격이 너무 빨리 오르면, 그 가격을 감당해야 하는 최종 제품의 수요가 식는다. 트렌드포스는 이미 스마트폰·노트북·게임기 출하 전망을 하향했다. 그리고 메모리 사이클의 종말은 늘 같은 방식으로 온다. 증설된 물량이 한꺼번에 풀리는 시점과 주문이 둔화되는 시점이 겹치면, 호황은 과잉공급으로 뒤집힌다. 2017~2018년 메모리 슈퍼사이클도 약 2년 뒤 급락으로 끝났다.

지금 무엇이 다른가

과거 모든 다운턴 직전에는 공통 신호가 있었다. 공급망 재고가 15주를 넘겼고, 부품 회사들이 미리 사재기(buffer stock)에 나섰다. 그런데 2026년 현재 메모리 공급망 재고는 2~4주에 불과하고, 사재기 신호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고객들은 비싼 값에 메모리를 줄여 쓰는 중이다. 기간으로만 보면 2023년 중반 저점에서 약 30개월 — 역대 가장 길었던 2018년 사이클과 맞먹는 — 이 지났으니 정점에 닿았어야 하는데, 정점을 알리는 지표들이 아직 켜지지 않았다.

이것이 이번 사이클의 핵심 긴장이다. 달력은 끝을 가리키는데, 계기판은 아직 가속 중이다. 둘 중 하나다. HBM의 구조적 공급 제약이 사이클을 정말로 늘렸거나, 아니면 모두가 같은 방향에 베팅하다 신호를 놓치고 있거나.

07역사의 렌즈 — 끝은 늘 같은 방식으로 왔다

반도체 산업은 70년간 15번 넘는 다운사이클을 겪고도 매번 더 높은 고점으로 올라섰다. 무어의 법칙(Moore's law)을 믿는 한 산업은 결국 성장한다. 그러나 그 사이의 골은 깊고 가팔랐다. 끝의 방식은 매번 비슷했다 — 수요가 급증하고, 공급이 시차를 두고 따라붙다 초과하며, 그 불일치가 폭락을 만든다.

끝의 깊이는 매번 달랐다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SOX) 고점 대비 최대 하락폭 · 대략값 0% -82% 2000 닷컴 약 -60% 2008 금융위기 약 -30% 2018 무역분쟁 약 -35% 2022 긴축
닷컴 붕괴의 골은 회복에 약 4년이 걸린 반면, 2008년 하락은 약 18개월 만에 회복됐다. 같은 "끝"이라도 거시 환경과 거품의 크기에 따라 깊이와 회복 기간이 전혀 달랐다.

2000년의 교훈이 가장 무겁다. 당시 통신·인터넷 인프라 투자가 칩 수요를 끌어올렸고, 그 전망에 맞춰 생산능력이 늘었다. 그런데 인터넷 서사가 무너지자 수요는 사라졌는데 생산능력은 그대로 남았다. 지금의 AI 자본지출이 그리는 그림과 구조가 같다. 다만 결정적 차이가 하나 있다. 닷컴 거품은 기술 부문에 갇혀 있었지만, 이번 AI 투자는 미국 경제와 주식 시장의 절반에 걸쳐 있다. 끝이 온다면 충격의 범위가 그때보다 넓다는 뜻이다.

반대 방향의 역사도 있다. 클라우드 컴퓨팅 건설은 15년에 걸쳐 꾸준한 수익을 냈다. 철도·전력망 건설도 초기엔 거품 논란에 휩싸였지만 결국 한 세대의 인프라가 됐다. 통신 광케이블 붐은 2조 달러 넘는 주주 가치를 날렸다. 이번 사이클은 이 두 역사의 특징을 모두 보인다. 그래서 가장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극단적 붕괴도 무한 상승도 아닌, 주기적 조정을 동반한 균형 성장이다.

08그래서 언제 끝나는가 — 지켜봐야 할 계기판

날짜를 묻는 질문에 정직한 답은 "달력으로는 알 수 없다"이다. 끝을 정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제약이기 때문이다. 대신 어떤 계기판이 먼저 빨간불이 들어오는지는 추적할 수 있다. 다음 다섯 지표가 이번 사이클의 조기 경보기다.

지표지금 상태(2026년 중반)꺾임 신호
하이퍼스케일러 자본지출 가이던스상향 일색, 2026년 6,350~7,250억 달러한 곳이라도 "투자 속도 조절" 언급 — 2026년 중반 실적이 1차 시험대
메모리 공급망 재고2~4주(매우 타이트)15주 이상으로 급증, 사재기 정황
현물가 대 계약가 괴리계약가 강세, 일부 현물가 약세현물가가 계약가를 끌어내리기 시작
인프라 기업 재무부채·리스 부담 급증신용부도스와프(CDS) 가산금리 확대, 신용등급 하향
엔터프라이즈 ROI측정 가능한 수익 사례 부족증명 실패가 길어져 투자 회수기 경고 본격화

이 다섯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첫째 줄, 하이퍼스케일러의 자본지출 가이던스다. 자본지출 사이클은 관성이 커서, 일단 꺾이면 메모리 가격과 밸류에이션이 뒤따라 무너진다. 그래서 2026년 중반 빅테크 실적 발표에서 누구라도 투자 속도를 늦춘다는 신호가 나오는지가 첫 번째 분기점이다. 두 번째 분기점은 전력으로, 계통 연계가 풀리지 않으면 자본지출이 의지와 무관하게 둔화된다.

지속 시나리오 가능성 중

HBM의 구조적 공급 제약과 추론 수요가 사이클을 2028년 안팎까지 늘린다.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2028년까지 간다는 마이크론의 전망이 맞는 경우다. 주인공은 엔비디아에서 메모리·ASIC·전력 설비로 분산된다.

분류 시나리오 가능성 상

붕괴가 아니라 옥석 가리기다. ROI를 증명한 기업과 못 한 기업, 전력을 확보한 사업자와 못 한 사업자가 갈린다. 메모리 가격은 2026년 말~2027년 한 차례 조정을 거치되 폭락은 아니다. 균형 성장에 주기적 조정이 섞인다.

고리 끊김 시나리오 가능성 하·꼬리위험

엔터프라이즈 ROI가 끝내 실망스럽고 자본 시장이 식으면서 순환 출자 고리가 빠르게 풀린다. 벤더 파이낸싱으로 부풀었던 매출이 증발하고 자산 상각이 연쇄로 번진다. 닷컴 벤더 파이낸싱 붕괴의 재현 — 가능성은 낮지만 충격은 가장 크다.

09맺으며

"언제 끝나느냐"는 질문은 사실 "무엇이 먼저 막히느냐"는 질문이다. 메모리 가격은 가장 먼저 꺾일 사이클이지만 아직 정점 신호가 켜지지 않았다. 자본지출은 관성이 크지만 전력 계통 연계라는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엔비디아의 가격 권력은 고객이 만든 ASIC에 안에서부터 깎이지만, 그것은 사이클의 종말이 아니라 주인공의 교체다.

가장 정직한 답은 이렇다. 기간으로만 보면 이번 사이클은 이미 역대 최장 국면에 들어섰고, 따라서 어느 시점의 조정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조정이 2000년식 폭락일지 2018년식 가벼운 골일지는, 끝나는 순간 세 사이클이 동시에 꺾이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으로서는 동시 붕괴보다 시차를 둔 분류가 더 그럴듯하다. 그리고 그 분류의 첫 신호는, 가장 화려한 GPU 매출이 아니라 가장 지루한 두 가지 — 메모리 재고 주수(週數)와 변압기 납기 — 에서 먼저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