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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묵상 · 순교와 자기과시

무대의 신앙과 증인의 신앙
— 순교를 자청하는 마음에 관하여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 )하라." 괄호에 들어갈 말을 고르라면 대부분은 '존경'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움베르토 에코는 정반대의 단어를 골랐다. '경계하라.' 순교의 열정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자기를 증명하려는 욕망일 때, 신앙은 증언이 아니라 무대가 된다.

이탈리아의 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늙은 수도사의 입을 빌려 이렇게 경고한다. 진리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된 자들을 두려워하라고. 그런 이들은 대체로 많은 사람을 자기와 함께, 때로는 자기보다 먼저, 때로는 자기 대신 죽게 만든다는 것이다. 소설 속 문맥에서 그 경고는 적그리스도가 다름 아닌 경건 그 자체에서,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태어날 수 있다는 통찰과 맞닿아 있다. 이 한 문장을 실마리 삼아, 신앙의 이름으로 벌어진 몇 장면을 들여다보려 한다.

12018년, 한 섬에서

존 앨런 차우와 노스센티널섬

2018년 11월, 미국의 젊은 복음주의 선교사 존 앨런 차우(John Allen Chau)가 인도 벵골만의 노스센티널섬(North Sentinel Island)으로 향했다. 안다만·니코바르 제도에 속한 이 섬에는 외부와의 접촉을 거부하는 고립 부족 센티널족이 산다. 인도 정부는 1956년 규정에 따라 이 섬 접근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이 부족이 외부인에게 적대적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수만 년 고립되어 외부 병원균에 대한 면역이 없는 이들에게는 흔한 감기 바이러스조차 몰살의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적대성은 성정이 사나워서가 아니라, 외부인의 침입이 곧 죽음이었던 역사를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차우는 감염 위험을 줄이려 백신을 맞고 열흘 넘게 스스로 격리하는 등 나름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준비가 위험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고, 무엇보다 그는 법을 알면서도 어겼다. 어둠을 틈타 자신을 섬으로 실어 나르도록 현지 기독교인 어부들에게 돈을 지불한 것이다. 첫 접촉에서 한 소년이 활을 쏘아 그가 든 성경을 꿰뚫었다. 일기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주님, 이 섬은 당신의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사탄의 마지막 요새입니까? 그럼에도 그는 다시 섬으로 들어갔고, 이후 살아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지 않았다. 어부들은 원주민들이 그의 시신을 끌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은 곧 논쟁에 휩싸였다. 그의 행위를 생명의 복음을 지고 사탄의 요새로 들어간 신앙의 영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으로 볼 것인가. 비판의 핵심은 여러 갈래였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땅을 '사탄의 점령지'로 규정하는 시각의 제국주의적 성격, 면역 없는 원주민을 몰살 위험에 빠뜨린 무모함, 그리고 그를 도운 어부 여러 명을 실정법 위반자로 만든 결과까지. 한 젊은이의 죽음을 두고 그 동기와 과정을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사건은 그를 심판대에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을 비춰 준다. 깃발을 흔들며 이루려는 것이 정말 하나님 나라인가, 아니면 자기 신앙을 증명하려는 욕망인가.


2순교를 자청한 사람들

초대교회부터 종교개혁기까지

자기 신앙을 증명하려는 욕망이 순교의 외피를 쓰는 일은 기독교 역사에 되풀이해 나타난다. 초대교회에도 '순교당하고 싶어' 안달하는 이들이 있었다.

2세기의 기록 『폴리카르포스 순교록』에는 퀸투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박해 소식이 들리자 그는 스스로 권력자 앞에 나서 순교를 자초했다. 그러나 막상 맹수가 눈앞에 나타나자 공포에 질려 신앙을 부인하고 목숨을 구걸했다. 이 순교록은 그의 사례를 들며 스스로 나서는 자를 칭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못 박는다. 거룩한 순교자의 이름을 얻으려는 욕망이 어떻게 자기 과장의 망상으로 흐르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비슷한 시기, 아시아 속주 총독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앞에 한 무리의 기독교인이 몰려와 자신들을 죽여 달라 외쳤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스카풀라에게』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총독은 몇 사람만 처형한 뒤 나머지에게 이렇게 쏘아붙였다. 죽고 싶거든 절벽과 밧줄이 있지 않느냐고. 순교를 향한 집단적 열망이 외부인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광기로 비쳤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이런 열망이 개인에게 머물면 안타까운 비극이지만,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그 광기에 사로잡히면 수많은 이가 함께 휩쓸린다. 16세기 독일 뮌스터의 얀 반 레이던(Jan van Leiden)이 그랬다. 급진 재세례파가 뮌스터를 장악하자 그는 스스로를 '새 예루살렘의 왕'이라 칭하며 극단적 종말론을 퍼뜨렸다. 도시가 포위되자 순교야말로 영광의 왕국으로 가는 길이라며 추종자들에게 무모한 저항을 요구했다. 정작 자신은 화려한 옷을 입고 일부다처를 시행하며 군림했다. 도시가 함락된 뒤 그는 처참하게 처형되었다. 그의 죗값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선동에 목숨을 잃은 이들은 무엇으로 보상받는가.

평화적 선교를 지향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조차 이 그늘에서 자유롭지 않다. 1219년 그가 보낸 다섯 수사는 이듬해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공개적으로 모욕하다 참수되었다. 여러 차례 추방되고도 되돌아가 같은 일을 반복한 끝이었다.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무슬림의 회심이 아니라 순교를 향한 열망 자체를 미화하는 방향으로 전승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들의 목적이 겉으로는 선교였으나, 가장 깊은 곳에서는 순교자의 관을 쓰는 것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예수는 물러나셨다

아나코레오, 뒤로 물러나는 동사

흥미롭게도 예수는 제자들을 선교로 파송하며 이렇게 명령한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태복음 10장 23절). '피하라'는 이 동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에서도 이 명령은 매우 중요하게 이해되었다. 순교를 자청하는 열기가 뜨거웠던 만큼, 물러설 줄 아는 지혜가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은 예수 자신이 여러 차례 '물러나셨다'고 전한다. 여기 쓰인 헬라어 아나코레오는 뒤로 물러나다, 철수하다, 피하다라는 뜻이다. 헤롯이 아기들을 학살하려 하자 물러나셨고, 세례자 요한이 붙잡혔다는 소식에 갈릴리로 물러나셨으며(마태복음 4장 12절), 안식일 논쟁 뒤 대적자들이 죽일 모의를 하자 그곳을 피하셨다(마태복음 12장 15절).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도망이라 해도 좋다. 물러나고, 철수하고, 떠나신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는 역사라는 무대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를 원치 않으셨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고, 무의미한 충돌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려 하지 않으셨다. 예수조차 물러나셨는데, 하물며 인간이 스스로를 불사르겠다며 앞으로 나서는 일은 얼마나 오만한가.

4내세움과 고백

프로페스가 아니라 컨페스

3세기 카르타고의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자기 신앙을 공공연히 과시하며 순교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썼다. 누구도 형제들을 위해 소동을 일으키거나 스스로 이방인들에게 자신을 내어주지 말라고. 붙잡혀 넘겨졌을 때에야 비로소 말하라고. 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profess)이 아니라 증언하는 것(confess)이라고 못 박았다.

무대의 신앙과 증인의 신앙 내세우는 신앙(profess)과 고백하는 신앙(confess)의 대비, 그리고 예수의 물러남-때-고백의 리듬 무대의 신앙과 증인의 신앙 내세움(PROFESS)과 고백(CONFESS)은 어떻게 갈리는가 내세움 · PROFESS 묻지 않아도 스스로 선언한다 과시하고 전시하고 도발한다 무대 위의 주연 배우 순교를 스스로 자청한다 십자가를 직접 제작한다 고백 · CONFESS 물으실 때에 비로소 응답한다 골방에서 조용히 고백한다 하나님의 증인으로 선다 때가 오면 목숨을 건다 허락된 십자가만 진다 예수의 리듬 — 물러나 때를 기다리고, 결정적 순간에 고백하다 물러남 아나코레오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 고백 호모로게오
내세우는 신앙과 고백하는 신앙은 방향이 정반대다. 예수는 물러나 때를 기다리다가, 결정적 순간에 진리를 고백하셨다.
비유 — 무대의 배우와 증인석의 증인

프로페스(profess)의 pro-는 '앞으로'라는 뜻이다. 앞으로 나서서, 묻지도 않는데 스스로 선언하고 과시하고 도발한다. 그렇게 일으킨 거부 반응과 모욕을 신앙의 면류관으로 삼는다. 이것은 무대 위 주연 배우의 자리다. 반면 컨페스(confess), 곧 고백은 다르다. 무대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증인석에 앉는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가"라는 물음이 왔을 때 인정하고 응답하는 것, 그 응답의 수동성이 고백의 본질이다.

비유 — 신적 수동태, 숨은 주어

신약 헬라어에는 '신적 수동태'라는 어법이 있다. 문장의 주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 일을 행하는 주체가 하나님일 수밖에 없을 때를 가리킨다. 주어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나는 뒤로 물러서는 문법이다. 신앙의 고백도 이와 같다. 내가 무대의 주인공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자리를 비우고 어쩔 수 없이 고백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고백하는 것. 신앙의 수동성이란 그런 것이다.


5사랑 없이도 몸을 내어줄 수 있다

고린도전서 13장 3절의 한 글자

바울의 이른바 '사랑장'에도 이 문제가 스며 있다. 개역 계열 성경은 고린도전서 13장 3절을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유익이 없다고 옮긴다. 오래도록 이 구절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몸을 내어주는 것은 사랑의 최고 행위인데, 어떻게 사랑 없이 몸을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

실마리는 본문 자체에 있다. 이 대목에는 한 글자 차이의 사본 이문이 있다. '불사르게'로 옮겨진 헬라어 카우테소마이와, '자랑하기 위하여'로 옮겨지는 카우케소마이다. 발음이 거의 같아 혼동되기 쉬운데, 사실 초기 사본 증거는 '자랑'을 지지하는 쪽이 더 강하다. 가장 오래된 파피루스와 주요 대문자 사본들이 '자랑' 독법을 담고 있고, 오늘날의 비평 원문과 새번역·새한글 성경도 이를 따라 자랑하려고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로 옮긴다. 학자들은 순교가 불로 이루어지던 후대에 어느 필사자가 '자랑'을 '불사름'으로 바꾸었으리라 본다.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자기를 희생할 수 있다. 그 희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입증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기꺼이 몸까지 내어준다.

이 독법 위에서 바울의 문장은 비로소 또렷해진다. 신앙의 영광을 얻기 위해, 신앙의 영웅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사람은 자기 몸조차 내어줄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맺으며 — 십자가를 제작하지 말라

가장 중요한 순간의 고백

그리스도는 자신을 비우셨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내려놓고 우리 가운데 하나같이 되셨다고 빌립보서 2장은 노래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십자가를 지기보다 십자가를 제작해, 많은 사람이 보는 신앙의 무대 위에 그것을 세우려 한다. 자기를 비우는 길과 자기를 전시하는 길은 정반대다.

오늘의 풍경은 이 유혹을 더 부추긴다. '좋아요'와 공유와 댓글의 숫자가 인정 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골방에서 조용히 고백해야 할 신앙이 무대 위 전시로 바뀌고, 깊이는 사라진다. 그러나 예수는 불필요한 갈등을 피해 이곳저곳에서 물러나셨고, 정작 빌라도 앞에 서신 결정적 순간에는 목숨을 걸고 진리를 고백하셨다.

자기 신앙이 얼마나 대단한지 증명하려고 십자가를 제작하지 말 것. 다만 허락된 십자가는 질 것.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전시하는 대신, 삶으로 고백할 것. 신앙의 전시는 넘치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의 고백은 없는 것은 아닌지, 그 한 가지를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