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기뻐하라"고 명령형으로 말한다.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다. 그렇다면 기쁨은 상황이 좋아졌을 때 저절로 찾아오는 감정이 아니라, 훈련으로 몸에 익히는 습관에 가깝다. 팍팍한 세상을 기쁘게 사는 데에도 나름의 문법이 있다는 뜻이다.
흔히 기쁨을 슬픔이나 고난이 없는 상태로 오해한다. 그러나 비교할 슬픔이 전혀 없다면 기쁨이라는 감각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어둠을 지나본 사람만이 빛을 알아본다. 그래서 기쁨은 문제가 사라진 자리가 아니라, 그 문제를 넘어선 자리에서 피어난다. 이 정의를 붙들어야 다음 이야기가 열린다.
출발점은 빌립보서 4장 6절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써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고 이어지는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뒷문장은 누구나 좋아한다. 문제는 앞의 조건, 곧 "감사함으로"에 있다. 감사할 거리가 마땅치 않을 때, 기쁨의 회로는 좀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이 설교가 붙드는 세 가지 습관을 먼저 한눈에 보자.
결핍마저 감사의 조건으로 삼는 태도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는 것, 곧 기도 제목을 갖는 것은 조금도 잘못이 아니다. 그 제목이 소박하든 거창하든, 신앙의 연조에 따라 다르든, 필요를 아뢰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이 구절이 짚는 것은 구하는 방법이다. 그냥 구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구하라는 것.
커피 한 잔이 필요하다고 하자. 한쪽은 "제게 커피가 없습니다, 커피 주세요"라고 구한다. 다른 쪽은 "빵이 있어 참 감사한데, 커피도 좀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구한다. 구하는 내용은 같지만 태도가 다르다. 후자는 이미 손에 쥔 것을 먼저 헤아린 뒤 부족한 것을 구한다. 성경이 권하는 기도는 이 두 번째 태도다. 필요를 구하는 일이 잘못이 아니라, 감사를 딛고 구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뜻밖의 전환이 있다. 우리가 불평하는 이유의 상당수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 때로는 금하신 것 때문이다. 그런데 금하심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일 수 있다. 창세기의 선악과가 자주 시빗거리가 되지만, 먹지 말라는 그 금지는 인간에게 "네가 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 곧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사는 법을 가르치는 장치이기도 하다. 한계를 아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은혜인 셈이다.
일상의 예도 다르지 않다. 몸이 아파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 늘어나는 것은 처음엔 저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금해진 것을 실제로 끊었을 때 몸이 회복된다면, 그 제한은 오히려 복이 된다. 중독도 같은 구조다. 마약이나 도박처럼 욕망이 이끄는 것을 "하지 말라"는 제약, 내 욕망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은 인생의 큰 복이다. 결핍과 제한이 저주가 아니라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발견, 그것이 첫 번째 습관이다.
시편 23편 1절도 이 자리에서 다시 읽힌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구절은 영어 성경에서 I shall not want, 곧 "내가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다"로 옮겨진다. 다윗이 모든 것을 이룬 뒤 부른 노래가 아니라는 데 방점이 있다. 그의 인생에는 여전히 해결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럼에도 여호와가 나의 목자 되심을 고백하고 나니 그 결핍이 견딜 만해진 것이다. 결핍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감사의 고백 위에서 부족함이 부족함으로 느껴지지 않게 된 것이다.
환경이 아니라 방향이 기쁨을 좌우한다
두 번째 습관은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다. 기쁨은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따라 오르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가치를 붙들 때 찾아온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향해 사는지가 기쁨의 온도를 정한다.
사도 바울의 전과 후가 이 대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예수를 만나기 전의 바울은 누구보다 열심히 산 사람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일, 스스로 의를 쌓는 일에 목숨을 걸었고,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이는 데 앞장설 만큼 치열했다. 그러나 그 열심이 그의 인생을 오히려 곤고하게 만들었다. 율법으로 자신을 세우려 할수록 율법은 끊임없이 그에게 죄를 더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사는데도 삶이 공허하다면, 문제는 열심의 양이 아니라 그것이 향한 방향일 수 있다.
영어 destination은 목적지이자 방향을 뜻하고, destiny는 운명을 뜻한다. 두 단어는 한 뿌리에서 나왔다.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방향이 어긋나 있으면 그 질주는 엉뚱한 곳에 도착할 뿐이다. 바울의 삶이 율법을 향해 달리던 동안 그의 운명은 율법적 인생, 곧 공허한 인생이었다. 방향이 곧 운명을 결정한다.
부활하신 예수가 바울의 삶에 새로운 가치를 더하고 그 방향을 다시 정렬했을 때, 그는 비로소 공허에서 벗어났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다. 삶의 '가치'는 세상적 '열심'과 구별되어야 한다. 열심 자체가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다. 방향이 바로 선 열심, 곧 참된 가치를 향한 열심만이 기쁨으로 이어진다. 기쁨이 사라지고 마음이 자꾸 우울해진다면, 지금 내 삶을 붙드는 가치가 무엇인지, 그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지 점검해 볼 일이다.
얻는 기쁨보다 내려놓는 기쁨이 오래간다
세 번째 습관은 가장 역설적이다. 우리의 기쁨은 소중히 여기던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찾아온다. 인생을 곤고하게 만드는 많은 것들의 정체는 실은 집착이다. 놓지 못하기에 힘들고, 놓칠까 두렵고, 놓쳐서 실망한다. 반대로 내려놓을 수 있으면 거기서 오는 기쁨이 있다.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 자기 삶에 유익이라 여기던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버림에 기쁨이 있었다.
얻는 것에 대한 기쁨은 금방 끝난다. 그러나 손해 볼 수 있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그 기쁨을 오래 소유한다.
이 대목에서 설교자는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그는 담임목사가 되며 전 교인을 상대로 설문을 돌렸다. 어떤 목사를 원하느냐는 물음에 성도들이 가장 먼저 꼽은 것은 도덕성이었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돈·이성·명예 앞에서의 정결을 뜻했다. 그래서 그는 재임하는 동안 자기 이름으로 된 집·건물·재산을 소유하지 않겠다, 돈을 모으지 않겠다, 최고의 명예는 이 교회의 담임목사로 족하니 교단 정치나 다른 자리를 탐하지 않겠다고 성도들 앞에서 선언했다.
선언은 시험대에 올랐다. 세 들어 살던 아파트를 조금만 보태면 살 수 있다는 아내의 말에 그는 "우리 소유하지 않기로 했잖아"라며 접었다. 몇 년 뒤 그 아파트 값은 두 배 넘게 뛰었다. 그런데 그는 기뻤다고 말한다. 돈을 놓쳐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 정도는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기뻤다는 것이다. 소유하는 기쁨보다 소유하지 않는 기쁨이 더 컸다는 고백이다. 그 포기의 힘은 어디서 왔는가. 자신을 부르신 부르심의 가치에서 왔다고 그는 말한다.
주차 공간이 부족한 어느 교회 옆에 넓은 땅이 있었다. 팔지는 않던 주인이 어느 날 "쓰시라" 하고 내주었는데, 딱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52주 가운데 51주만 쓰고 한 주는 비워 두라는 것. 처음엔 감사하던 교인들도 시간이 지나자 불평했다. 이왕 빌려줄 거 왜 한 주는 못 쓰게 하느냐고. 주인의 답은 이랬다. "그래야 이 땅이 내 땅인 줄 알지요."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것이 값없이 주어진 선물임을 잊지 않게 하는 장치가 바로 그 '한 주'다.
내려놓음의 원리는 예수의 비유에서도 확인된다. 마태복음 13장 44절,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가장 귀한 것을 발견했기에 덜 귀한 것을 기꺼이 내놓는 것이다. 포기가 손실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얻는 통로가 되는 순간이다.
세 습관이 하나로 모이는 자리
세 가지 습관은 결국 한 문장으로 수렴한다. 가장 귀한 것을 얻으면 덜 귀한 것을 내려놓게 된다. 감사함으로 아뢰는 사람은 결핍마저 은혜의 통로로 바꾸고, 삶의 참된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방향이 정렬되어 공허에서 벗어나며, 그 가치를 붙든 사람은 소중하던 것도 기꺼이 내려놓는다. 이 세 결이 만나는 곳에서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기쁨이 자란다.
반대편의 기쁨, 곧 욕망과 세상적 성취가 주는 기쁨은 달콤하지만 곧 허무로 바뀐다. 채워지는 순간의 만족은 짧고, 이내 다음 갈증이 밀려온다. "이렇게 살다 죽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삶과, "이렇게 살다 후회할 것 같다"는 삶의 갈림은 지금 어떤 가치를 향해 서 있느냐에서 갈린다.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가장 귀한 것을 얻는 자리에서 온다. 그 하나를 붙들면 나머지는 내려놓을 수 있게 되고, 내려놓을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오래가는 기쁨이 소유된다. 무거운 결단처럼 들릴지 몰라도, 실은 팍팍한 날들을 가장 가볍게 건너는 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