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SNS에는 비슷한 자랑 글이 넘친다. “ChatGPT(챗지피티)에 셀카 한 장 보냈더니 내 퍼스널 컬러를 무료로 알려줬다.” 화면 속 진단 이미지는 오프라인 컨설팅 결과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10만 원 안팎을 받던 진단 서비스는 사라질 운명이라는 평이 따라붙는다. AI 인테리어 시뮬, AI 헤어 시뮬, AI 패션 코디도 같은 길 위에 서 있다.
여기서 흔히 던져지는 질문은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다. 데이터 해자, 규제 장벽, 도메인 전문성, 비슷한 충고가 반복된다. 하지만 정작 던져야 할 더 근본적인 질문은 다른 데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 10만 원에 무엇을 사고 있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색상 코드 한 줄을 받기 위해 10만 원을 낸 것이 아니다. 표준 조명 아래 천을 댈 때마다 “이 색은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라고 말해주는 누군가, 30분 동안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 봐주는 시선, 카페에서 친구에게 “나 봄 웜톤 진단받았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자격증 같은 것들이 그 가격에 함께 묶여 있었다. 색상은 그중 가장 작은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AI는 그 묶음을 풀어버렸다. 색상 진단이라는 기능적 부분만 떼어 무료로 풀어주면서, 우리가 사실은 색상이 아니라 다른 것을 사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음반 산업이 비슷한 일을 먼저 겪었다. 한 장에 1만 5000원짜리 CD가 팔리던 시절, 사람들이 산 것은 노래 한 곡이 아니라 재킷, 가사집, 소장의 만족감이 묶인 패키지였다. 스트리밍이 곡 단위로 분리해 100원에 들려주자, 비로소 우리가 무엇을 사고 있었는지가 드러났다. AI도 마찬가지다. 죽인 것은 사업이 아니라, ‘나에 대한 관심’에 가격표를 붙일 수 있던 묶음의 시대다.
같은 일이 도처에서 일어난다. 한 시간에 30만 원 받던 변호사 상담의 절반은 법률 검색이 아니라 “당신의 사정은 충분히 억울합니다”라는 인정이었다. 헬스장 개인 트레이닝 비용의 상당 부분은 운동 처방이 아니라 “오늘도 오셨네요”라는 출석 확인이었다. 영양 상담, 학습 코칭, 심지어 의사 진료의 일부도 마찬가지다. AI가 정보 부분을 무료로 만들면, 거기 묶여 있던 관심·인정·돌봄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래서 다가오는 양극화는 단순한 가격의 양극화가 아니다. 의미의 양극화다. 정보와 진단은 무료에 수렴하고, 그 자리에 있던 인간의 시선·시간·인정은 오히려 더 비싸진다. 입문급 컨설팅이 사라진 자리에, 결혼식을 앞두고 “오직 당신만을 위해 두 시간을 쓰겠습니다”라는 고가 서비스가 남는다. 사업이 망한 게 아니라, 사업이 무엇을 팔고 있었는지를 뒤늦게 알게 되는 과정이다. 한국 사회가 특히 빠르게 이 변화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 짧은 시간에 자기를 정의해 줄 외부 권위를 사들이는 데 익숙한 시장일수록, 그 권위가 무료가 되는 순간 충격도 크다.
진짜 위험한 사람은 따로 있다. 자기가 무엇을 팔고 있었는지 끝까지 모른 채 “AI 때문에 망했다”고 한탄하는 사업자다. AI가 빼앗은 것은 색상 진단이 아니라, 자기 일이 정말로 어떤 가치를 전달하고 있었는지 들여다볼 시간이었다. 그 질문을 회피하는 한, 어떤 해자도 효과가 없다.
직장인의 경력도 다르지 않다. 내가 회사에서 받는 월급은 정확히 무엇에 대한 대가인가. 보고서 작성인가, 정보 정리인가, 회의 진행인가. 모두 곧 AI가 무료에 가깝게 해줄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회사가 그 월급으로 사고 있던 진짜 가치는 무엇이었나. 책임지는 자세, 동료에 대한 신뢰, 어려운 결정 앞의 판단력. 그런 것들이라면 AI 시대에 오히려 더 비싸질 것이다. 반대로 자기 일을 끝까지 ‘정보 처리’로만 정의해 온 사람이라면, 그 정의 그대로 AI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AI가 죽인 것은 사업이 아니다. AI가 죽인 것은, 자기 일의 정체를 묻지 않아도 되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