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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거버넌스

상하이에서 그어진 선

2026년 7월, 세계인공지능대회에서 벌어진 일은 신제품 발표회가 아니었다. 인공지능을 누가 어떤 규칙으로 다룰 것인지를 두고 두 개의 제도가 같은 주에 나란히 몸집을 키웠고, 그 사이에 한국이 만들어 둔 세 번째 통로가 아직 비어 있다.

2026년 7월 22일

01주석이 직접 연단에 선 이유

세계인공지능대회(World Artificial Intelligence Conference, WAIC)는 중국 정부와 상하이시가 2018년부터 매년 열어 온 행사다. 올해로 아홉 번째였고, 7월 17일부터 20일까지 상하이 푸둥 엑스포·장장·쉬후이 세 권역 네 개 전시장에서 진행됐다. 전시 면적은 처음으로 10만 제곱미터를 넘겼고 1,100여 개 기업이 3,000점 이상의 제품과 기술을 내놨다. 그중 300여 점이 세계 최초 공개였다.

규모보다 눈에 띈 것은 개막식 연단에 선 사람이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이 행사에 직접 참석해 기조연설을 한 것은 대회가 출범한 이래 처음이다. 2024년과 2025년 개막식에는 리창 총리가 나왔다. 국가원수가 산업 전시회 개막식을 국정 연설의 무대로 삼았다는 사실 자체가, 중국이 이 행사에 부여한 무게를 말해 준다. 개막식장에는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아누틴 찬위라꾼 태국 총리가 자리했다. 기술 전시회의 형식을 빌린 정상외교에 가까웠다.

02연설문이 실제로 말한 것

연설의 뼈대는 네 가지 제안이었다. 첫째, 오픈소스와 개방·협력·공유를 장려해 인공지능이 산업 전반에 힘을 보태게 할 것. 둘째, 위험을 직시하고 법령·기술 모니터링·조기 경보·비상 대응 체계를 갖춰 인공지능이 항상 인간의 통제 아래 있도록 할 것. 셋째, 문명 간 상호 학습을 촉진할 것. 넷째, 진정한 다자주의를 실천하고 유엔의 역할을 살려 폭넓은 공감대에 기반한 글로벌 거버넌스 프레임워크를 조속히 구축할 것.

여기까지는 어느 나라 정상이 읽어도 무난한 문장이다. 문제는 둘째 항목에 붙은 단서다. 연설은 “인공지능 분야에서 국가 안보 개념을 일반화하고 자국의 안보를 타국의 안보보다 우선시하는 행태에 공동으로 반대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미국을 지목하지 않았을 뿐, 대중국 반도체·인공지능 수출통제를 겨냥한 문장으로 읽지 않기가 더 어렵다. 같은 연설의 다른 대목에서는 인공지능 발전이 한 국가의 독주가 아니라 국제 협력을 통한 교향곡이 되어야 한다는 비유가 등장했다.

자국 성과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표현 하나가 바뀌었다. 오랫동안 중국을 상징해 온 ‘중국 제조(製造)’ 대신 ‘중국 지조(智造)’, 곧 스마트 제조가 중국식 현대화를 대표하는 명함이 됐다는 문장이다. 세계의 공장에서 지능의 생산자로 좌표를 옮기겠다는 선언이고, 뒤이어 스마트 경제의 핵심 산업 규모가 이미 1조 위안(약 218조 원)을 넘었다는 수치가 붙었다.

선언 뒤에는 숫자가 붙은 실행 항목이 따라왔다. 향후 5년간 개발도상국 5,000명에게 인공지능 연수·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아세안·아랍연맹·아프리카연합·라틴아메리카카리브국가공동체·상하이협력기구·브릭스 여섯 개 지역 협력체를 대상으로 국제 인공지능 응용협력센터를 세우며, 중국이 개발한 기상 지능형 조기경보 솔루션 ‘마쭈(媽祖)’를 30개국에 보급하겠다는 내용이다. 대상과 정량 목표가 이름과 숫자로 붙어 있다는 점에서, 검증 가능한 형태의 약속이다. 다만 각 협력센터의 예산·인력·개소 일정 같은 세부는 공개되지 않았다.

1조 위안중국 스마트 경제
핵심 산업 규모
5,000명5년간 개도국
인공지능 연수 목표
30개국기상 조기경보 ‘마쭈’
보급 목표국

03WAICO — 명단이 곧 메시지다

개막 전날인 7월 16일, 상하이에서 세계인공지능협력기구(World Artificial Intelligence Cooperation Organization, WAICO) 설립 협정 서명식이 열렸다. 중국을 포함해 29개국 대표가 서명했고, 중국 측에서는 왕이 외교부장이 대표로 나섰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한 국제기구 대표들도 서명식에 참석했다. 협정은 WAICO를 유엔 헌장의 목적을 따르는 독립적 정부 간 국제기구로 규정했으며, 본부는 상하이에 둔다.

창립 회원국 명단은 이 기구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러시아, 벨라루스, 세르비아, 쿠바, 브라질,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카자흐스탄, 남아프리카공화국, 세네갈을 포함해 아프리카 10개국과 아시아 12개국이 이름을 올렸다. 미국, 유럽연합, 영국, 일본, 한국은 빠졌다.

평가는 갈린다. 회의적인 쪽은 서방 주요국이 중국 주도 기구에 들어갈 가능성이 낮은 이상 반쪽짜리 기구로 남을 것이며, 오히려 중국식 인터넷 통제 규범이 수출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반대쪽은 유럽연합 인공지능법이든 주요 7개국 논의든 개발도상국에는 사실상 발언권이 없었다는 점을 든다. 규칙이 만들어지는 자리에 처음으로 앉게 된 나라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집행력과 구속력 있는 규제, 분쟁 해결 기능을 갖춘 기구가 될지 선언 수준의 포럼에 머물지는 운영 첫해에 드러날 것이다.

정부 트랙에서 서방이 빠진 자리를 학술 트랙이 채웠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올해 WAIC는 자체 국제 학술 콘퍼런스를 처음 만들었다. 튜링상 수상자 야오치즈 교수가 프로그램 의장을, 강화학습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처드 서튼 교수가 국제 공동 의장을 맡았다. 딥러닝 분야의 요슈아 벤지오 교수는 유엔 인공지능 거버넌스 작업 프레임워크를 현장에서 소개했고, 2025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오마르 야기를 포함해 튜링상·노벨상 수상자 아홉 명이 연단에 섰다. 정치·산업·학술 세 트랙에 각기 다른 손님을 배치한 구성이다.

AI 국제질서의 세 갈래 트랙 미국 주도 팍스 실리카, 중국 주도 WAICO, 한국이 제안한 UN 글로벌 AI 허브를 출범 시점·참여 규모·성격으로 비교한 도식. AI 국제질서의 세 갈래 트랙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셋이 만들어졌다. 겨루는 것은 모델 성능이 아니라 규칙과 공급망이다. 미국 주도 팍스 실리카 Pax Silica 출범 2025년 12월 참여 24개국(한국 포함) 반도체·광물·에너지 성격: 공급망 안보 중국 주도 세계인공지능협력기구 WAICO 출범 2026년 7월 16일 창설 회원 29개국 본부 상하이 성격: 규범·역량 지원 한국 제안 UN 글로벌 AI 허브 Global AI Hub 의향서 2026년 3월 9개 기구·5개 은행 UN 체계 안에서 추진 성격: 공공난제 적용 카자흐스탄은 팍스 실리카와 WAICO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 진영의 경계는 아직 배타적이지 않고, 다수 국가는 양다리를 선택지로 남겨 두고 있다.
AI 국제질서의 세 갈래 트랙 팍스 실리카, WAICO, UN 글로벌 AI 허브를 출범 시점과 참여 규모, 성격으로 비교한 세로 배열 도식. AI 국제질서의 세 갈래 트랙 겨루는 것은 모델 성능이 아니라 규칙과 공급망이다 미국 주도 팍스 실리카 Pax Silica 출범 2025년 12월 참여 24개국(한국 포함) 반도체·광물·에너지 공급망 성격: 공급망 안보 블록 중국 주도 세계인공지능협력기구 WAICO 출범 2026년 7월 16일 창설 회원 29개국 본부 상하이·UN 헌장 준거 성격: 규범·역량 지원 한국 제안 UN 글로벌 AI 허브 Global AI Hub 협력의향서 2026년 3월 UN 9개 기구·개발은행 5곳 UN 체계 안에서 추진 성격: 공공난제 적용 카자흐스탄은 팍스 실리카와 WAICO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 진영의 경계는 아직 배타적이지 않다.
같은 반년 사이에 세 개의 트랙이 형성됐다. 겨루는 대상은 모델 성능이 아니라 규칙과 공급망이다.

04같은 시각 워싱턴에서

서명식이 열린 7월 16일 저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25분간 대국민 연설을 했다. 새로 기밀 해제한 정보 문건을 근거로, 중국이 2020년 대선을 전후해 미국 유권자 파일 2억 2,000만 건을 불법 취득했다는 주장이었다. 공개된 자료에는 18개 주에서 확보한 유권자 등록 데이터 분석 내용이 담겼고, 노스캐롤라이나 한 주의 파일에만 800만 명 이상이 포함돼 있었다고 했다. 그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유권자 자격 요건 강화 법안을 처리하라고 의회를 압박했다.

다만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언론은 선거 개입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다고 지적했고, 트럼프 행정부 관료들의 증언도 같은 취지였다고 보도했다. 중국 외교부는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한쪽에서 중국이 안보 위협으로 지목되는 동안 다른 쪽에서 중국이 책임 있는 기술 리더를 자처하는 장면이 같은 24시간 안에 겹쳤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배치가 정교하다. 대회 개막 이틀 전인 7월 15일에는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이 애플의 생성형 인공지능 서비스 ‘애플 인텔리전스’의 중국 출시를 승인했다. 중국판에는 알리바바의 대규모 언어모델 큐원(Qwen)이 탑재되고 검색은 바이두 서비스와 연동된다. 2024년 공개 이후 약 2년을 끌던 심사가 이 시점에 끝난 것이다. 세계 최대 스마트폰 시장에서 미국 기업이 중국 모델을 얹어야 서비스를 팔 수 있다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05이미 세워져 있던 반대편 기둥

WAICO가 갑자기 등장한 대응처럼 보이지만, 순서로 보면 먼저 움직인 쪽은 미국이었다. 2025년 12월 11일 미국 국무부 주도로 경제안보협력체 ‘팍스 실리카(Pax Silica)’가 출범했다. 라틴어로 평화를 뜻하는 팍스에, 반도체 핵심 소재인 실리카를 붙인 이름이다. 반도체와 핵심 광물, 에너지를 하나의 전략 자산으로 묶어 중국 의존을 줄이겠다는 구상이며, 설계자는 제이컵 헬버그 미 국무부 차관으로 알려져 있다.

출범 당시 8개국이던 참여국은 반년 만에 크게 늘었다. 한국·일본·호주·이스라엘·싱가포르·영국·카타르에 이어 2026년 6월 워싱턴 정상회의에서 유럽연합과 독일·네덜란드·그리스가 합류했고, 아르헨티나·칠레·코스타리카·카자흐스탄·파나마가 뒤따르며 24개국 규모가 됐다.

여기서 눈에 걸리는 이름이 카자흐스탄이다. 팍스 실리카에 합류한 그 나라의 대통령이 한 달 뒤 상하이 개막식 귀빈석에 앉았고, 카자흐스탄은 WAICO 창립 회원국 명단에도 올랐다. 진영이 갈렸다는 서술은 편리하지만, 실제로 다수 국가는 아직 어느 한쪽을 배타적으로 고르지 않았다. 냉전기의 철도 궤간에 비유하자면 궤도는 깔리기 시작했으되 아직 두 궤도를 모두 밟는 차량이 다니는 상태다.

AI 국제질서 재편 일지 2025년 12월 팍스 실리카 출범부터 2026년 9월로 예정된 미중 정부 간 AI 대화까지의 주요 사건을 시간 순으로 정리한 세로 연표. 여덟 달 사이에 벌어진 일 2025.12 미국 주도 팍스 실리카 출범 — 창립 8개국 2026.03 한국, UN 6개 기구와 글로벌 AI 허브 협력의향서 2026.05 서울에서 비전 선포 — 9개 기구·5개 개발은행 참여 2026.06 팍스 실리카에 EU·독일·네덜란드 합류, 24개국으로 2026.07.15 중국, 애플 인텔리전스 승인 — 알리바바 큐원 탑재 2026.07.16 WAICO 설립 서명(29개국), 이튿날 시진핑 기조연설 2026.09 미·중 첫 정부 간 AI 대화 예정
AI 국제질서 재편 일지 2025년 12월부터 2026년 9월까지의 주요 사건을 시간 순으로 정리한 세로 연표. 여덟 달 사이에 벌어진 일 2025.12 미국 주도 팍스 실리카 출범 창립 8개국 2026.03 한국, UN 6개 기구와 글로벌 AI 허브 협력의향서 2026.05 서울에서 비전 선포 9개 기구·5개 개발은행 참여 2026.06 팍스 실리카에 EU·독일· 네덜란드 합류, 24개국으로 2026.07.15 중국, 애플 인텔리전스 승인 알리바바 큐원 탑재 2026.07.16 WAICO 설립 서명(29개국) 이튿날 시진핑 기조연설 2026.09 미·중 첫 정부 간 AI 대화 예정
규칙을 만드는 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움직임이 반년 사이에 겹쳐 일어났다.

06전시장에서 확인된 우회로

전시장 입구를 차지한 것은 화웨이, 알리바바, 바이두가 각각 자체 칩으로 구성한 컴퓨팅 시스템이었다. 가장 긴 줄이 늘어선 곳은 화웨이가 실물을 처음 공개한 ‘아틀라스 950 슈퍼포드(Atlas 950 SuperPoD)’다. 자체 신경망처리장치(Neural Processing Unit, NPU) ‘어센드 950’을 초고속 광통신망으로 묶는 방식으로, 이번 전시에서는 1,024개 구성이 나왔고 최대 8,192장까지 확장할 수 있다. 조 단위 매개변수 규모의 대규모 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 학습과 추론을 겨냥한 설계이며, 4분기 출하가 목표다.

비유

대형 엔진 한 대를 못 만들면 소형 엔진을 수천 대 묶어 같은 출력을 낸다는 발상이다. 반도체 분석기관 세미애널리시스는 어센드 단일 칩 성능을 엔비디아 블랙웰 계열의 3분의 1 수준으로 본다. 칩 하나로는 이기지 못하니, 칩 사이를 잇는 배선과 시스템 설계로 격차를 상쇄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대신 전력 소비와 설치 공간, 소프트웨어 생태계라는 청구서가 따라붙는다.

화웨이는 엔비디아 차세대 시스템 ‘NVL144’와 비교해 총 연산력 6.7배, 메모리 용량 15배라고 주장했다. 회사 측 수치이고 독립 검증은 아직 없으니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미국의 칩 규제를 개별 소자가 아니라 시스템 엔지니어링으로 우회하는 전략이 실물의 형태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중흥통신(ZTE)도 여러 중국 그래픽처리장치 기업과 공동 개발한 슈퍼노드 기반 인프라를 함께 내놨다.

모델 쪽에서도 흐름이 확인됐다. 인공지능 모델 마켓플레이스 오픈라우터 기준 7월 둘째 주 토큰 사용량 상위 다섯 자리를 텐센트, 샤오미, 딥시크, 미니맥스, 즈푸AI의 모델이 모두 차지했다. 여기에 스타트업 문샷이 2조 8,000억 개 매개변수 규모의 오픈웨이트 모델 ‘키미 K3’를 공개했다. 경쟁의 축이 폐쇄형 최고 성능에서 가격 대비 성능과 배포 가능성 쪽으로 옮겨 가고 있다는 신호다.

로봇 전시장에는 300대가 넘는 기체가 모였다. 관람객의 눈길을 가장 오래 붙든 것은 유니트리 로보틱스의 ‘GD01’이었다. 5월에 처음 공개된 이 기체는 높이 약 2.7미터, 탑승자를 포함한 무게 약 500킬로그램으로, 두 발 보행과 네 발 보행을 상황에 따라 전환한다. 회사는 세계 최초의 양산형 유인 기체라고 소개했고 시작 가격을 390만 위안(약 8억 5,000만 원)으로 제시했다. 실내 공간, 배터리 지속 시간, 유지보수, 규제상 분류 같은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걷는 시연을 보여 주던 단계에서 사람을 태우고 값을 매겨 파는 단계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남는다.

07왜 하필 글로벌 사우스인가

연수 5,000명과 협력센터 여섯 곳, 기상 조기경보 30개국이라는 항목은 선의의 원조로도, 시장 선점으로도 읽힌다. 어느 쪽이든 그 대상이 개발도상국이라는 선택 자체에는 기술적 근거가 있다. 인공지능이 사회를 실제로 바꾸기 쉬운 곳은 기존 제도가 촘촘한 선진국이 아니라 아직 비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의료가 가장 분명한 예다. 선진국에서 진단 인공지능을 도입하려면 의사 단체, 병원 경영, 면허 제도, 배상 책임, 보험 수가라는 이해관계의 층을 하나씩 통과해야 한다. 반면 세계보건기구 아프리카지역사무소는 2030년까지 이 지역의 보건 인력이 610만 명 부족할 것으로 전망한다. 2020년 기준 아프리카의 일반의 밀도는 인구 1만 명당 2.9명으로, 유럽의 36.6명과 열두 배 넘게 벌어져 있다. 이런 조건에서 진단 인공지능은 누군가를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가 된다. 대체할 대상이 없으므로 저항도 없다.

실제 사례도 쌓이고 있다. 르완다에서는 드론을 이용한 혈액 배송이 국가 의료 체계 안으로 편입됐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시는 코로나19 국면에서 시정부 대화형 서비스 ‘보티’에 증상 문진과 경증 환자 추적, 백신 예약을 맡겼다. 케냐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말라리아 진단 보조 인공지능이 현장 검증 단계를 지나고 있다.

비유

중국 자신이 이 경로의 사례다. 유선전화망이 충분히 깔리기 전에 이동통신으로 건너뛰었고, 신용카드 결제망이 자리 잡기 전에 QR코드 결제로 넘어갔다. 낡은 인프라가 없었기 때문에 교체 비용도 없었고, 그래서 더 빨랐다. 개발도상국의 인공지능 도입도 같은 형태를 띨 가능성이 크다.

중국이 이 지점에 힘을 싣는 이유는 계산이 분명하다. 인터넷 시대에 중국이 뒤늦게 들어갔을 때 프로토콜과 표준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규칙을 만드는 자리에 앉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인공지능을 새로운 인터넷으로 본다면, 이번에는 그 자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판단이 뒤에 있다. 인프라가 들어가면 그 위에 데이터와 업무 절차, 규격이 함께 들어간다. 무상 제공은 비용이 아니라 진입로에 가깝다.

08한국이 서 있는 자리

흥미로운 사실은 유엔 체계를 인공지능 협력의 축으로 삼자는 구상을 먼저 움직인 쪽이 한국이라는 점이다. 2026년 3월 1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노동기구, 국제이주기구, 국제전기통신연합, 세계보건기구, 세계식량계획, 유엔개발계획 등 유엔 산하 6개 기구가 한국의 ‘글로벌 AI 허브’ 유치를 위한 협력의향서에 서명했다. 5월 21일 서울에서 열린 비전 선포식에는 유엔환경계획, 유엔난민기구, 유엔아동기금을 더한 9개 국제기구와 세계은행·아시아개발은행·미주개발은행·유럽부흥개발은행·중미경제통합은행 등 5개 다자개발은행이 참여했다. 기후, 보건, 식량, 난민 같은 국제 현안에 인공지능을 적용하는 협력 플랫폼을 한국에 두겠다는 구상이다.

배경에는 미국이 60개가 넘는 유엔 산하 국제기구에서 발을 빼며 생긴 재정·조직의 공백이 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정보통신 강국으로 옮겨 간 이력, 세계 최초로 시행된 인공지능 기본법, 미국과 중국 어느 쪽에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은 위치가 한국을 대안으로 만들었다.

구분WAICO글로벌 AI 허브
주도중국한국
제도적 위치유엔 밖에 새 기구를 설립유엔 기구들을 한 플랫폼으로 결집
정통성 근거협정문의 유엔 헌장 준거기존 유엔 기구의 직접 참여
초점규범 형성과 역량 지원공공난제에 대한 적용과 실증
현재 단계29개국 서명, 본부 확정협력의향서와 비전 선포 단계

두 구상은 성격이 다르다. 중국은 유엔 밖에 자기 기구를 세웠고, 한국은 유엔이라는 정통성 안에서 기구들을 끌어모으는 방식을 택했다. 미국이 다자 체계에서 물러나고 중국이 신뢰 문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이 차이는 한국에 유리하게 작동할 여지가 있다.

문제는 속도다. 한국이 협력의향서와 비전 선포에 머무는 사이 중국은 협정 서명과 본부 소재지 확정까지 밀고 나갔다. 중국이 유사한 구상을 처음 언급한 것은 지난해였고, 그때는 공식 가입을 밝힌 나라가 하나도 없었다. 1년 만에 29개국이 서명대에 섰다. 제도는 먼저 세워 놓은 쪽이 의제를 정한다. 사무국 하나를 유치하는 것과 규칙을 쓰는 자리에 앉는 것은 다른 일이다.

099월에 확인될 것

규범이 서방형과 중국형으로 갈라지면 그 여파는 모델에서 끝나지 않는다. 데이터 이전 규칙, 금융 결제, 전자거래 표준, 인증 체계까지 두 갈래로 나뉠 수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는 양쪽 규격을 모두 맞춰야 하는 비용이 그대로 청구된다. 국내 기업이 어느 궤도의 부품을 만들지, 어느 인증을 받을지 선택해야 하는 국면이 온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분단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미국과 중국은 오는 9월 정부 차원의 첫 공식 인공지능 협상을 준비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의 9월 24일 방미 일정에 앞서 열릴 가능성이 거론되며, 참석자와 장소, 의제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중국은 정치적 성격보다 기술적 사안 위주의 논의를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미국 측은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이 대표단을 이끌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성사되면 2024년 제네바 실무급 대화 이후 처음이다.

7월 상하이에서 확인된 것은 결론이 아니라 분기점이다. 두 개의 궤도가 깔리기 시작했고 폭이 얼마나 벌어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9월 협상의 결과가 그 폭의 첫 눈금이 될 것이다.

규칙이 만들어지는 국면에서 가장 비싼 선택은 늦게 고르는 것이 아니라, 고를 자리에 앉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