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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 철학

위임 없는 입 — AI 설교로 받은 은혜는 진짜인가

언어 모델이 쓴 설교문에 합성 영상을 입혀 강단에 올렸고, 그것을 모르고 앉아 있던 사람이 위로를 얻어 돌아갔다. 그 은혜의 진위를 묻는 물음은 하나가 아니라 셋이며, 셋의 답이 서로 다르다. 도나투스 논쟁이 남긴 원리와 그 원리가 실제로 근거로 삼았던 것을 구분하는 데서 논의가 갈린다.

2026년 8월 10일

예배 시간에 화면이 켜지고 목사의 얼굴이 뜬다. 설교가 흐르고,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은 자기 처지를 정확히 짚는 말을 듣는다. 오래 붙들고 있던 것이 풀리고, 용기와 위로를 얻어 집으로 돌아간다. 그 설교문은 사람이 쓰지 않았다. 언어 모델이 생성했고, 목사의 얼굴과 음성은 합성 영상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그 사실을 몰랐고, 살아 있는 목사가 자기를 향해 말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 상황을 두고 “그 은혜는 진짜였는가”라고 물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질문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한 문장 안에 서로 층위가 다른 물음 셋이 겹쳐 있고, 셋의 답이 같지 않다. 하나로 답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셋 가운데 둘을 밀어내면서 대답한다. 그래서 진위 판정처럼 보이는 결론이 실제로는 세 물음 가운데 하나를 몰래 골라낸 결과가 된다.

한 질문이 아니라 세 질문이다

첫째는 존재의 물음이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실제로 무엇을 행하셨는가. 둘째는 인식의 물음이다. 그 사람이 겪은 감격은 하나님이 행하셨다는 것의 증거가 되는가. 셋째는 윤리의 물음이다. 그 예배를 그렇게 구성한 교회의 행위는 정당한가.

존재의 물음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행하셨는가

판정 — 매체로 결정되지 않는다. 생성 모델이 개입했다는 사실 하나로 부정할 수 없고, 그렇다고 긍정할 근거도 되지 않는다.

인식의 물음

그 감격이 그 사실의 증거인가

판정 —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생성 모델과 무관하게 원래부터 그랬다.

윤리의 물음

교회의 그 행위는 정당한가

판정 — 아니다. 위임의 부재와 출처의 은폐라는 두 가지 결함이 겹쳐 있다.

이 셋을 갈라 놓으면 겉보기의 역설이 사라진다. 은혜가 실제로 임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교회의 행위를 온전한 잘못으로 판정하는 일이 모순 없이 가능해진다. 아래의 논의는 이 세 갈래를 차례로 따라간다.

나귀와 가야바 — 도구의 결함이 은혜를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

“기계가 쓴 것이니 은혜도 가짜다”라는 반사는 직관적으로 강하지만, 기독교가 이미 한 번 검토하고 기각한 형태의 추론이다. 기각의 무대는 4세기 초 북아프리카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시기에 일부 성직자가 압력에 굴복해 성경 사본을 관헌에 넘겼다. 박해가 끝난 뒤, 그렇게 굴복한 자들이 집행한 세례와 서품이 유효한지를 두고 교회가 갈라졌다. 도나투스를 따르는 쪽은 무효라고 보았다. 배교한 손에서 나온 것은 거룩할 수 없으므로, 그 손이 베푼 세례는 다시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맞선 쪽은 유효라고 보았다. 성례의 참된 집행자는 그리스도이며, 사람은 그 이름을 빌려 쓰는 자리에 있을 뿐이므로, 빌려 쓰는 자의 자격이 무너져도 그 이름의 효력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판단은 종교개혁기의 신앙고백들에 그대로 실려 내려온다.

비록 보이는 교회 안에 악한 자가 늘 선한 자와 섞여 있고 때로는 악한 자가 말씀과 성례의 집행에서 주된 권위를 갖기도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자기 이름으로 행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의 위임과 권위로 집행하는 한, 우리는 말씀을 듣는 일과 성례를 받는 일에서 그들의 사역을 사용할 수 있다.

영국 국교회 39개조 신조 제26조, 1571년 — ‘사역자의 부적격은 성례의 효력을 막지 못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같은 판단을 더 건조하게 정식화한다. 성례의 효력은 집행자의 경건이나 의도에 달려 있지 않고, 성령의 역사와 제정의 말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27장 3항). 취리히에서 나온 제2스위스신조는 이 원리를 설교로 확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에서 선포될 때 선포되는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주목해야 할 것은 설교하는 사역자가 아니라 설교되는 말씀이고, 그가 악하고 죄인이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참되고 선하다(1장).

성경 안에서도 같은 형태의 사건이 반복된다. 발람은 삯을 받고 저주하러 나선 점술가였는데 그의 입에서 축복이 나왔고, 그 길을 막아선 것은 나귀였다(민수기 22장). 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낫다는 정치적 계산을 내놓았고, 요한은 그 말이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예언이었다고 기록한다(요한복음 11장). 이사야는 이방 군주 고레스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 부른다(45장). 바울은 시기와 경쟁심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을 두고, 동기가 어떻든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는 사실을 기뻐한다고 쓴다(빌립보서 1장).

여기까지의 노선은 단단하다. 도구의 결함이 은혜를 무효로 만든다는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성 모델이 문장을 만들었으니 그 자리에 은혜는 없었다”는 판정은 그 형태만 보면 도나투스의 추론을 그대로 반복한다.

26조가 실제로 근거로 삼은 것은 위임이다

그런데 조문을 끝까지 읽으면 근거의 위치가 드러난다. 26조는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므로 어떤 통로든 상관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근거로 제시된 것은 정확히 한 가지다. 그들이 자기 이름으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의 위임과 권위로 집행한다는 사실이다. 제2스위스신조도 같은 자리에 조건을 박아 둔다. 말씀이 선포되는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경우는 ‘합법적으로 부름받은 설교자들’에 의해 선포될 때다.

즉 반(反)도나투스 원리는 정당한 위임을 가진 사람의 부적격을 다루는 규정이다. 위임 자체의 부재를 다루는 규정이 아니다. 이 구별이 무너지면 그 원리는 무엇에나 갖다 붙일 수 있는 만능 면허가 된다. 배교한 성직자와 생성 모델은 같은 범주에 놓이지 않는다. 앞의 것은 자격이 훼손된 위임이고, 뒤의 것은 위임이 발생한 적 없는 사물이다.

반도나투스 원리가 덮는 범위와 덮지 못하는 범위 위임이 있는데 집행자가 부적격한 경우와 위임 자체가 없는 경우를 두 줄로 나누어 비교한 도식 반(反)도나투스 원리가 덮는 범위와 덮지 못하는 범위 가) 위임은 있고 집행자가 부적격한 경우 그리스도의 위임 부름과 안수가 있다 부적격한 집행자 악하고 죄인이어도 말씀과 성례는 유효 효력은 그리스도에게 근거는 하나님의 능력 일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과 위임으로 집행한다는 사실이다. 나) 위임 자체가 없는 경우 위임이 없다 부름도 안수도 없다 인격 아닌 생성기 진지성 조건이 없다 교회 행위로는 불발 명제 내용은 남는다 부적격은 위임의 결함이고, 부재는 위임의 결여다. 앞의 원리가 뒤를 면허하지 않는다. 두 줄은 같은 사안의 정도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안이다
반도나투스 원리는 위임의 부적격을 다룬다. 위임의 부재는 그 원리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

면직할 수 없는 설교자

26조는 사역자의 부적격이 성례의 효력을 막지 못한다고 선언한 뒤, 곧바로 한 문장을 더 붙인다. 그럼에도 악한 사역자에 대해서는 교회가 조사하고, 그 범과를 아는 자들이 그를 고발하며, 유죄가 확인되면 정당한 판결로 면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후반부는 전반부의 부속물이 아니다. 전반부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이다. 말씀의 효력을 집행자의 자격에서 떼어 놓으려면, 자격 문제를 처리할 별도의 장치가 남아 있어야 한다. 그 장치가 치리다.

치리는 인격을 전제한다. 조사받을 수 있고, 고발될 수 있고, 답변할 수 있고, 면직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성립한다. 생성 모델에는 그중 어느 것도 적용되지 않는다. 원고에 오류가 있어도 물을 상대가 없고, 이단적 주장이 섞여도 심문할 대상이 없고, 잘못이 확인되어도 면직할 몸이 없다. 이 불가능성은 절차의 번거로움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직분이 사라진 것이다.

같은 요구가 성경 여러 곳에서 반복된다. 야고보는 가르치는 자가 더 큰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한다(3장). 사도행전은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그대로 받지 않고 성경을 뒤져 확인했다고 칭찬한다(17장). 바울은 예언하는 자가 말할 때 나머지가 분별하라고 지시한다(고린도전서 14장). 히브리서는 인도하던 자들의 삶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고 말한다(13장). 이 요구들은 모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을 향해 있다. 검증 가능성, 심판 가능성, 본받을 수 있는 생애가 직분의 구성 요소이며, 생성기에는 셋 다 없다.

면직 불가능성이 뜻하는 것

강단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설교자가 편의를 위해 자리를 비웠다는 뜻이 아니다. 그 설교에 대해 책임을 지는 주체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책임 없는 발화는 설교의 한 형태가 아니라 설교가 아닌 다른 것이다.

하실 수 있다는 말에서 해도 된다는 말로 넘어가는 자리

여기서 “하나님이 나귀로도 말하셨는데 언어 모델로는 못 하시겠는가”라는 되물음이 나온다. 이 되물음은 옳고, 동시에 논점을 이탈한다.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교회의 의무다.

제2스위스신조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는 그 대담한 문단 바로 뒤에 자기 손으로 선을 긋는다. 하나님이 외적 사역 없이도 원하시는 이를 원하시는 때에 조명하실 수 있음을 인정하며 그것은 그의 권한에 속한다고 말하되,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과 본보기로 우리에게 전해 주신 통상적인 가르침의 방식이라고 못 박는다.

스콜라 신학의 어휘로 옮기면,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그가 스스로 정해 두신 통상적 수단은 다른 층위다. 절대적 능력에 근거해 개별 사례를 두고 자비를 소망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 소망을 근거로 제도를 세우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나귀 사건은 이 구별을 오히려 선명하게 만든다. 나귀가 말한 것은 이스라엘의 예배 제도가 아니라 그 제도를 뚫고 들어온 파열이었고, 무엇보다 그 나귀는 발람인 척하지 않았다.

시나리오의 결함은 생성 모델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통상적 수단 밖에 있는 통로를 통상적 수단의 외형으로 위장해 주일마다 반복 가능한 절차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 감격은 무엇을 향해 있었는가

여기서 무대가 교회에서 청중석으로 옮겨간다. 앞의 논의는 강단에서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다루었다. 이제 물어야 할 것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의 경험이 무엇을 향해 있었는지다.

현상학의 기본 관찰에 따르면 모든 의식 작용은 대상을 향해 있다. 두려움은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고, 감사는 무엇에 대한 감사다. 그리고 그 대상이 실재하지 않을 때에도 작용 자체는 실제로 일어난다. 유령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실제로 두려워하고 있다. 다만 그 두려움이 붙들고 있는 것이 없다.

이 도구로 예배당에서 일어난 일을 성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설교문이 전한 명제 — 죄가 용서된다, 버림받지 않았다, 끝이 결정되어 있다 이 명제가 성경이 말하는 것과 일치했다면, 그것이 참인지는 누가 낭독했는지와 무관하다.
대상 실재
2
지금 나를 향해 말하고 있는 사람의 진심과 현존 그런 사람은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없었다.
대상 부재
3
그 명제를 자기 생애로 견뎌 본 증인이 그것을 건네고 있다는 사실 원고를 생성한 것에는 견뎌 본 생애가 없다.
대상 부재
4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듣고 있는 공동체 이 성분은 조작되지 않았다.
대상 실재

이 분해가 곧 답이 되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곤란은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1번과 2번이 분리된 채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설교는 명제의 배달이 아니라 인격적 발화로 수용된다. 그래서 “명제는 참이었으니 은혜도 참이다”라는 정리는 실제 경험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그 사람이 받은 것 가운데 얼마가 1번에 걸려 있었고 얼마가 2번과 3번에 걸려 있었는지는 본인도 그 순간에는 구분할 수 없었다.

불발된 행위를 통과하는 명제

언어행위론은 같은 사안을 다른 각도에서 자른다. 오스틴의 분석에서 발화 행위는 명제의 참·거짓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절차와 자격을 갖추었는지에 따라 ‘부적절’해질 수 있고, 부적절은 다시 두 종류로 갈린다. 절차나 자격이 어긋나 행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불발과, 행위는 성립했으나 화자가 요구되는 심적 상태를 갖추지 않은 오용이다. 심판 자격이 없는 사람이 판결을 선고하면 불발이고, 지킬 뜻 없이 약속하면 오용이다.

설교를 교회의 공적 행위로 본다면, 위임 없는 통로에서 나온 그것은 오용이 아니라 불발에 해당한다. 서얼과 그라이스가 정식화한 진지성 조건 쪽에서 보면 사정이 더 분명하다. 주장은 주장하는 주체를 요구하고, 그 주체가 명제를 참이라고 믿는 상태를 요구한다. 확률 분포에서 토큰을 뽑는 절차에는 그런 상태가 없다. 엄밀히 말하면 그 설교에서는 아무도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았다.

주장한 자를 굳이 찾자면 그 영상을 제작해 송출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보면 발화의 주체는 회복되지만, 그 주장은 두 겹이 된다. 내용 층위에서는 진심일 수 있다. 그들도 죄가 용서된다는 것을 믿을 것이다. 출처 층위에서는 거짓이다. 그들은 ‘우리 목사가 지금 당신에게 말하고 있다’는 명제를 거짓인 줄 알면서 전달했다.

그런데 불발에는 남는 것이 있다. 명제 내용은 행위의 불발을 통과한다. 아무도 세우지 않은 표지판에 ‘길이 끊겼다’고 적혀 있고 실제로 길이 끊겼다면, 그 표지판은 세운 사람이 없어도 참인 것을 알려 준다. 이 사실이 성급한 판정 하나를 막아 준다.

현존 여부만으로는 판정되지 않는다

스펄전이 죽은 뒤 그의 인쇄된 설교문을 읽다가 회심한 사람들이 있고, 아무도 그 회심을 가짜라 부르지 않는다. 그 자리에는 살아 있는 화자도, 실시간 발화도, 청중을 향한 그 순간의 지향도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실시간으로 말하지 않았으므로 은혜가 아니다’라는 기준은 성립하지 않는다.

인쇄된 설교문과 합성 영상의 차이는 두 가지다. 첫째, 인쇄물은 현존을 주장하지 않는다. 독자는 자기가 죽은 사람의 글을 읽고 있음을 안다. 둘째, 그 문장들에는 그것을 자기 생애로 견딘 사람이 있었다. 앞의 차이는 거짓의 유무이고, 뒤의 차이는 증인의 유무다. 시나리오는 두 가지를 동시에 잃는다.

감격은 원래부터 증거가 아니었다

이제 두 번째 물음에 답할 차례다. 그 사람이 받은 것은 은혜였는가, 아니면 종교적으로 학습된 반응이었는가.

이 질문의 형태를 가장 정밀하게 다룬 것은 조너선 에드워즈의 1746년 저작 『신앙감정론』이다. 대각성 운동의 열기와 그 열기에 대한 반발 사이에서 쓰인 이 책은, 감정을 옹호하지도 배척하지도 않고 감정 중 어떤 것이 은혜의 표지인지 가려내는 작업을 한다. 책의 절반 가까이가 표지가 되지 못하는 것들의 목록에 배정되어 있다.

표지가 아닌 것으로 에드워즈가 꼽은 것들에는 감정이 매우 높이 고조되었다는 사실, 신체에 큰 영향이 나타났다는 사실, 종교적인 이야기를 유창하고 열렬하게 하게 되었다는 사실, 여러 종류의 감정이 함께 나타났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포함된다. 그중 이 사안에 특히 걸리는 항목이 하나 있다. 그 감정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인지 아닌지도 어느 쪽으로도 표지가 되지 못한다는 항목이다. 발생 경로는 판정 근거에서 배제된다.

그가 참된 표지로 제시한 열두 번째 항목은 감정이 기독교적 실천으로 열매를 맺는가다. 그는 이것을 은혜의 모든 표지 가운데 으뜸이라 부르고, 논증에 저작 전체의 약 오분의 일을 쓴다. 열매로 안다는 복음서의 기준이 그 자리에 놓인다.

에드워즈의 기준을 적용하면 답은 이렇게 된다. 그 사람의 감격은 은혜의 증거가 아니다. 은혜가 아니었다는 뜻이 아니다. 감격 자체는 어느 쪽으로도 판정 근거가 못 된다는 뜻이다. 판정은 몇 달 뒤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서 나온다. 원한을 놓았는가, 갚을 것을 갚았는가, 견디던 자리를 여전히 견디는가.

중요한 것은 이 결론이 생성 모델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1746년에 이미 그랬다. 시나리오가 만든 것은 새로운 신학적 문제가 아니라, 이미 있던 문제를 더는 회피할 수 없게 만든 장치다.

다만 이 지점에서 한 가지 관찰이 남는다. 설교 말뭉치로 학습한 모델이 같은 종류의 눈물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주일마다 은혜로 통용되어 온 것의 상당 부분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반응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 관찰은 두 방향으로 쓰일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형식에 반응한다는 사실만으로 은혜의 부재가 증명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형식을 쓰시고, 바울도 수사를 썼다. 그러나 감격을 신앙의 계기판으로 읽어 온 관행은 이 관찰을 통과하지 못한다. 계기판이 외부에서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고지된 AI 예배는 차갑게 끝났다

이 사안에는 이미 실제 사례가 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는데, 알려진 사례는 전부 사전에 고지되었다.

2023년 6월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개신교 총회에서 빈 대학의 신학자 요나스 지머라인이 ChatGPT로 40분 예배 전체를 구성했다. 설교와 기도가 생성문이었고 강단에는 아바타가 섰다. 참석자 반응은 냉담했다. 마음도 영혼도 없다는 평이 나왔고, 아바타의 빠르고 단조로운 전달 때문에 집중이 어려웠다는 지적이 이어졌으며, 아바타가 주기도문을 인도했을 때 소리 내어 따라 읽기를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다. 기술 수준에 긍정적으로 놀랐다고 말한 사람들조차 전체 경험이 공허했다는 데는 같은 판단을 내놓았다.

같은 해 9월 17일 텍사스 오스틴의 연합감리교 소속 바이올렛 크라운 시티 교회에서 제이 쿠퍼 목사가 설교와 창작 찬양까지 포함한 예배 전체를 생성 모델로 구성했다. 교인들의 결론은 해 봐서 좋았지만 다시 하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2024년 7월에는 롱아일랜드 팻초그의 조합교회에서 드와이트 리 월터 목사가 같은 실험을 하고 이후 별도의 설교 시간에 교인들의 반응을 함께 정리했다.

목회 현장의 온도는 조사로도 확인된다. 라이프웨이 리서치가 2026년 4월에 발표한 미국 개신교 조사에서 교인들은 설교 준비에 생성 모델을 쓰는 것이 옳은지를 두고 절반으로 갈렸다. 목회자 쪽 우려는 더 구체적이다. 84퍼센트는 생성된 내용에 오류가 있다고 가정하고 편집해야 한다는 점을, 81퍼센트는 신뢰할 만한 출처만 쓰도록 통제하기 어렵다는 점을, 76퍼센트는 판단 방식 자체에 편향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문제로 꼽았다. 사용률은 규모에 따라 갈린다. 출석 250명 이상 교회 목회자 중 43퍼센트가 실험 중이고 15퍼센트가 상시 사용자인 반면, 50명 미만 교회에서는 28퍼센트가 이 기술을 아예 무시하고 있다고 답했다.

고지된 사례들의 결과와 시나리오의 결과는 정반대다. 같은 종류의 생성문이 한쪽에서는 공허함을, 다른 쪽에서는 위로를 낳았다. 달라진 변수는 문장이 아니라 화자에 대한 청중의 믿음이다.

이 비교가 증명하는 것과 증명하지 못하는 것

알려진 사례들은 단조로운 아바타 전달이라는 교란 변수를 함께 갖고 있다. 그래서 냉담한 반응의 원인 가운데 고지의 몫과 전달 품질의 몫을 분리할 수 없다. 시나리오는 설득력 있는 합성 영상을 전제하므로 두 조건이 같지 않다. 이 비교는 가설을 시사하되 확정하지 못한다.

그래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시나리오의 감격 가운데 일부는 고지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생한다. 사후에 사실을 알게 될 때 무너지는 몫이 있다면, 그만큼은 명제를 붙들고 있던 것이 아니라 거짓 믿음을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무너지지 않는 몫이 있다면, 그만큼은 낭독자의 정체와 무관하게 참인 무엇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이 분리는 사후에만 관측된다.

거짓은 그 사람의 몫이 아니다

세 번째 물음의 답은 앞의 두 답과 달리 단순하다. 그 교회의 행위는 정당하지 않고, 잘못의 위치는 청중석이 아니라 강단 뒤편이다.

칸트의 정식은 여기에 바로 적용된다. 인간은 언제나 목적으로 대우받아야 하고 수단으로만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처지를 정확히 짚는 말을 듣고 위로를 받은 사람은 그 순간 자기 판단의 근거 하나를 조작당한 상태에 있었다. 결과가 좋았다는 사실은 이 판정을 바꾸지 않는다. 좋은 결과로 정당화되는 거짓이 있다면 그 논리는 처음부터 상대의 판단 능력을 계산에서 제외한 논리다.

프랑크푸르트의 구별은 이 사안의 고유한 결함을 더 정확히 지목한다. 거짓말하는 자는 진리의 권위를 인정한다. 무엇이 참인지 알아야 그 반대를 말할 수 있고, 그래서 거짓말은 진리를 겨냥한 채 거스른다. 그가 ‘헛소리’라 이름 붙인 것은 다르다. 참인지 거짓인지에 관심이 없고, 겨냥 자체를 하지 않으며, 오직 어떤 인상을 만들어 내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그가 이것을 거짓말보다 진리에 더 위험하다고 본 이유는, 거짓말은 진리라는 범주를 남겨 두지만 무관심은 그 범주를 지운다는 데 있었다.

확률 분포에서 다음 토큰을 고르는 절차는 이 구별의 뒤쪽에 정확히 놓인다. 출력이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으나, 어느 쪽이든 참을 겨냥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강단은 진리에 대한 무관심이 허용될 수 없는 자리 가운데 하나다. 문제는 생성문에 오류가 섞일 확률이 아니다. 오류가 없더라도 그 문장이 참을 겨냥한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두 번째 층위의 손해는 개별 예배가 아니라 제도에서 발생한다. 이런 방식이 한 번이라도 발각되면 그 교회의 모든 설교가 소급해서 의심의 대상이 된다. 다음 주에 실제 목사가 자기 문장으로 설교해도, 청중은 그것을 판별할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 개별 사례에서 얻은 위로가 신뢰라는 자산을 소진하는 구조이며, 결과만 계산하는 관점에서도 규칙 층위로 올리면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사실을 알게 된 뒤 그 사람에게 남는 문제도 정리할 수 있다. 그가 받은 위로의 근거는 그 문장을 낭독한 것이 누구인지와 독립적으로 참인 약속이다. 내용이 성경이 말하는 것과 일치했다면 위로를 철회할 이유는 없다. 철회해야 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위로의 소재에 대한 오해다. 그와 별개로 실질적인 침해가 있었고, 그 침해의 회복은 침해를 당한 쪽이 감당할 일이 아니다.

앞으로 24~36개월 사이에 갈라질 지점

아래 예측은 지금 확인되는 상태에서만 근거를 가져왔고, 각각에 무엇이 관측되면 예측이 틀린 것으로 볼 수 있는지를 붙였다.

고지 없이 생성 원고와 합성 영상을 쓴 사례가 공개 적발되고, 해당 교회가 대응하는 방식이 이후의 사실상 판례로 기능한다.

반증 조건 — 24개월 안에 어떤 교단 절차나 언론 보도에서도 미고지 사례가 확인되지 않고, 목회자 대상 조사에서 원고 작성을 전면 위임하는 비율이 계속 한 자릿수에 머무름.

교단 차원의 규정은 사용 금지가 아니라 고지 의무의 형태로 정착한다. 준비 단계 사용은 허용하고, 강단에서 낭독되는 원고의 저자성 표시를 요구하는 쪽으로 문안이 잡힌다.

반증 조건 — 주요 교단 중 하나가 준비 단계 사용까지 포괄하는 전면 금지 규정을 채택하거나, 반대로 어떤 교단도 24개월 안에 관련 문안을 채택하지 않음.

논쟁의 축이 ‘기계가 설교할 수 있는가’에서 ‘원고의 저자성을 어디까지 밝혀야 하는가’로 이동한다. 주석 검색, 예시 수집, 초안 생성, 전면 대필 사이의 경계를 어디에 그을지가 실무 쟁점이 된다.

반증 조건 — 논의가 아바타·음성 합성 같은 전달 매체 규제에 머물고, 원고 작성 단계의 구분선을 다루는 문서가 교단·신학교에서 나오지 않음.

규모에 따른 사용률 격차가 벌어진다. 상근 인력과 제작 설비를 갖춘 대형 교회의 채택이 먼저 진행되고, 소형 교회는 도구 자체보다 사용 사실을 밝히는 관행 쪽에서 먼저 규범을 만든다.

반증 조건 — 후속 조사에서 250명 이상 교회와 50명 미만 교회의 상시 사용률 차이가 현재보다 줄어듦.

위임 없는 입

처음의 세 물음으로 돌아가면 답은 이렇게 정리된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행하셨는지는 생성 모델의 개입 여부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렇게 결정된다고 말하는 순간 도나투스의 추론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그것을 허가로 읽는 것도 오독이다. 신앙고백들이 근거로 삼은 것은 하나님의 능력 일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과 위임이었고, 위임의 부적격과 위임의 부재는 같은 사안이 아니다.

그 사람의 감격은 하나님이 행하셨다는 증거가 아니다. 이것은 강단 위에 무엇이 서 있었는지와 무관하게 원래부터 그랬다. 판정은 그 다음 몇 달의 삶에서만 나온다. 그 자리에서 확인된 것은 그의 감격이 형식에 반응할 수 있다는 사실이며, 이 사실은 은혜의 부재를 증명하지 않되 감격을 계기판으로 쓰는 관행을 무효로 만든다.

그 교회의 행위는 정당하지 않다. 결과가 좋았다는 사실이 근거로 쓰이지 못하는 이유는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결과를 위해 상대의 판단 능력을 계산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하나의 상태다. 강단에서 말이 흘러나오고 그 말은 참일 수 있으나, 그 말을 붙들고 조사받을 사람도, 면직될 몸도, 본받을 생애도 그 뒤에 없다. 위임 없는 입에서 나온 참말은 표지판에 가깝고, 표지판은 길이 끊겼음을 알려 줄 수 있으나 함께 걷지는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