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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관 논쟁사

토시 하나까지 무오한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세 갈래 유보에서 시카고 선언과 대구 서문교회 총회까지, 성경의 오류를 둘러싼 논쟁이 실제로 다툰 것은 무엇이었나

질문은 대개 두 갈래로 제시된다. 성경은 자모 하나까지 오류가 없는가, 아니면 세부에는 착오가 섞였으되 기독교 진리를 온전히 전하는 문서인가. 이 이분법은 논쟁의 실제 지형을 거의 그리지 못한다. 지난 400년 동안 어느 쪽도 상대가 그린 초상 그대로를 주장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진영도 '토시 하나'를 주장하지 않는다

가장 강경한 형태의 무오 선언으로 통하는 문서는 1978년 10월 시카고에서 채택된 성경무오에 관한 시카고 선언(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이다. 200명이 넘는 복음주의 지도자가 서명했고, 국제성경무오협의회(ICBI, International Council on Biblical Inerrancy)가 주관했다. 그 선언의 제13조는 무오를 확언하면서 동시에 이렇게 부인한다. 현대적 기술적 정밀성의 결여, 문법과 철자의 불규칙, 자연에 대한 관찰자 시점의 서술, 거짓말의 보도, 과장법과 어림수의 사용, 자료의 주제별 배열, 인용의 변형 — 이런 현상은 무오를 훼손하지 않는다.

즉 가장 엄격한 공식 문서조차 '토시 하나까지'를 주장하지 않는다. 어림수는 어림수로 읽고, 인용은 자유롭게 변형될 수 있으며, 해가 뜬다는 서술은 천문학 명제가 아니다.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성경에 착오가 있다고 보는 진영도 그 착오가 문서의 신뢰를 무너뜨린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착오의 존재를 인정해야 문서를 실제 있는 그대로 신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진영이 실제로 겹치는 지점

양쪽 모두 성경이 현대적 정밀성의 기준으로 판정될 문서가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양쪽 모두 필사 과정의 이문(異文)이 존재한다는 데 동의한다. 남는 다툼은 '오류가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오류로 셀 것인가를 누가 정하는가이다. 어림수는 오류가 아니라고 규정하는 순간, 규정의 권한을 쥔 쪽이 무오의 범위를 정한다. 논쟁사는 그 권한이 독자에게서 원본으로, 원본에서 저자의 의도로, 다시 학회의 표결로 옮겨 다닌 기록이다.

용어부터 어긋난다. 한국어에서 무오(無誤)와 무류(無謬)는 종종 뒤섞여 쓰이지만, 영어권 논쟁에서 inerrancy와 infallibility는 20세기 중반 이후 서로 다른 진영의 깃발이 되었다. 앞의 말은 역사와 자연에 관한 진술까지 포함해 성경이 확언하는 모든 것에 오류가 없다는 주장이고, 뒤의 말은 성경이 신앙과 실천의 문제에서 사람을 그르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좁혀 쓰인다. 그런데 시카고 선언 제11조는 두 낱말을 구별할 수는 있으나 분리할 수는 없다고 못박아, 후자만 취하는 용법을 봉쇄하려 했다. 낱말의 뜻을 정하는 일 자체가 이미 논쟁의 수단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세 갈래 유보

서방 교회의 고전적 진술은 405년 무렵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히에로니무스에게 보낸 편지(서간 82)에 있다. 정경에만 이런 존경을 돌린다고 말한 뒤, 그는 곧바로 조건을 단다. 정경을 읽다가 진리에 어긋나 보이는 대목을 만나면 사본이 잘못되었거나, 번역자가 뜻을 놓쳤거나,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판단하기를 주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정경으로 불리는 책들에만 나는 이런 존경과 영예를 돌리기를 배웠다. 이 책들의 저자들만은 전혀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고 나는 가장 굳게 믿는다. 그리고 이 글들 안에서 진리에 반하는 듯한 무언가에 부딪히면, 사본이 잘못되었거나 번역자가 말의 뜻을 잡지 못했거나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나는 주저 없이 판단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서간 82

이 문장은 무오 진영이 가장 자주 인용하는 고대 증거다. 동시에 이 문장은 논쟁의 구조를 이미 완성해 놓았다. 세 갈래 유보 — 사본의 흠, 번역의 실패, 독자의 몰이해 — 는 관측된 어떤 불일치도 본문의 오류로 계산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다. 어긋남이 발견되면 셋 중 하나로 배정되고, 명제 자체는 손상되지 않는다.

이것이 지적 부정직이라는 뜻은 아니다. 세 갈래는 실제로 그럴듯하다. 고대 문헌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필사 오류와 번역 실패와 자기 몰이해가 실재하는 설명임을 안다. 문제는 그 셋 바깥에 '본문이 틀렸다'는 네 번째 칸이 없다는 점이다. 칸이 없으면 관측이 판정에 개입할 통로도 없다. 이후 1600년 동안 무오 논쟁이 반복해서 되돌아온 자리가 바로 이 네 번째 칸의 유무였다.

칼뱅이 남긴 한 문장과 20세기의 대리전

종교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 위에 올려놓았지만, 본문의 세부에 관해서는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놀랄 만큼 자유로웠다. 루터는 야고보서의 가치를 낮게 평가했고, 칼뱅은 주석에서 본문의 난점을 우회하지 않았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은 사도행전 7장 16절 주석이다. 스데반의 설교는 야곱과 조상들이 아브라함이 하몰의 자손에게서 산 무덤에 묻혔다고 말한다. 창세기 기록과 맞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산 것은 헷 사람 에브론의 막벨라 굴이고, 하몰의 자손에게서 밭을 산 것은 야곱이다. 칼뱅은 이 대목을 두고 아브라함이라는 낱말에 명백한 잘못이 있으며 이 대목은 고쳐져야 한다고 적었다. 같은 주석에서 그는 야곱의 가족 수를 일흔다섯으로 적은 것이 모세의 기록과 맞지 않는다는 점도 짚고, 저자가 히브리어 본문이 아니라 그리스어 번역을 따랐을 가능성을 논한다.

이 몇 줄이 1979년에 폭발했다. 잭 로저스와 도널드 맥킴은 『성경의 권위와 해석』(The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of the Bible, 1979)에서, 교부에서 종교개혁자를 거쳐 개혁파 주류에 이르는 '중심 전통'은 성경이 신앙과 삶에서 그르치지 않는다고 가르쳤을 뿐 역사와 과학의 세부에서까지 무오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논증했다. 칼뱅의 이 문장은 그 논증의 기둥 가운데 하나였다.

반격은 신속했다. 교회사가 존 우드브리지는 1980년 학술지 서평으로 시작해 1982년 단행본 『성경의 권위: 로저스·맥킴 제안 비판』으로 확장하며, 인용의 맥락 절단과 사료 취급의 결함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칼뱅의 문장에 대한 그의 독법은 이렇다. 칼뱅은 '이 대목은 고쳐져야 한다'고 썼고, 이는 저자가 틀렸다는 판정이 아니라 본문이 전승 과정에서 손상되었으니 교정해야 한다는 본문비평적 요구라는 것이다.

같은 문장이 양쪽의 증거가 되는 이유

칼뱅의 라틴어 문장 하나로는 두 독법을 가릴 수 없다. 16세기 주석가에게 '본문의 흠'과 '저자의 착오'는 오늘날처럼 선명하게 갈라진 범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구분은 원본과 사본을 개념적으로 분리한 뒤에야 날카로워진다. 그리고 그 분리는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교리적 장치로 정교해진다. 역사 논증이 이렇게 팽팽해지는 것은 사료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쟁점을 과거의 어휘로 되물었기 때문이다. 로저스·맥킴 논쟁은 교리 논쟁을 역사학의 외피로 치른 대리전이었고, 양쪽 다 '역사적 교회의 입장'이라는 승인 도장을 원했다.

모음 부호까지 영감되었다는 신조, 그리고 그 폐기

실제로 '토시 하나'에 가까운 주장이 신조가 된 사례가 있다. 계기는 히브리어 모음 부호였다. 1624년 소뮈르의 위그노 학자 루이 카펠은 마소라 본문의 모음 부호가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며 그 시기가 이르지 않다고 논증했다. 바젤의 요한 북스토르프 2세가 1648년 이를 반박했다. 쟁점은 사소해 보이지만 사소하지 않았다. 자음만 적힌 히브리어 본문에서 모음 부호는 낱말의 뜻을 결정한다. 부호가 인간의 후대 작업이라면, 본문의 의미 확정에 인간의 판단이 개입한 셈이 된다.

스위스 개혁파는 1675년 헬베티아 일치신조(Formula Consensus Helvetica)로 답했다. 요한 하인리히 하이데거가 주로 작성했고 프란시스 튜레틴 등이 참여했다. 그 제2조는 구약 히브리어 원문이 자음뿐 아니라 모음에서도 — 모음 부호 그 자체든 최소한 그 부호가 지시하는 음가든 — 내용에서만이 아니라 낱말에서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고 규정한다. 제3조는 칠십인역이나 사마리아 오경, 타르굼을 근거로 히브리어 본문을 수정하는 태도를 배격한다.

모음 부호의 후대 기원은 오늘날 학계에서 다투어지지 않는다. 신조는 30여 년 만에 구속력을 잃었다. 이 삽화가 논쟁사에서 갖는 무게는 실패의 기록이라는 데 있지 않다. 무오 주장의 방어선이 새 지식이 들어올 때마다 한 칸씩 뒤로 물러났다는 사실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손에 든 마소라 본문이 모음 부호까지 영감되었다고 했다. 그 선이 무너지자 자음 본문으로 물러났다. 자음 본문의 이문이 축적되자 다시 물러날 곳이 필요했다. 그 다음 지점이 19세기 말의 '원본'이다.

본문이 역사의 대상이 되다

두 방향에서 압력이 왔다. 하나는 성경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묻는 문서 비평이다. 1670년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고 성경을 다른 고대 문헌과 같은 방식으로 읽을 것을 제안했다. 1678년 오라토리오회 사제 리샤르 시몽의 『구약성서 비평사』는 가톨릭 진영에서 같은 작업을 시도했다가 금서가 되었다. 1753년 장 아스트뤽이 창세기의 신명 사용 차이에 주목했고, 이 실마리가 19세기 독일 학계에서 자료 가설로 발전해 1878년 율리우스 벨하우젠의 『이스라엘 역사 서설』에 이르렀다.

다른 하나는 본문 비평이다. 1844년과 1859년에 걸쳐 시나이 사본이 알려졌고, 1881년 웨스트콧과 호트가 편집한 그리스어 신약이 나왔다. 이 작업이 밝힌 것은 신약 사본들 사이에 무수한 이문이 있으며, 오랫동안 정본으로 쓰인 본문에도 후대의 삽입으로 판단되는 대목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압력의 성격은 다르다. 문서 비평은 저자와 연대에 관한 전통적 귀속을 흔들었고, 본문 비평은 '우리가 읽는 본문'과 '저자가 쓴 본문'이 같지 않음을 실증했다. 무오 교리에 더 곤란했던 것은 후자다. 앞의 것은 논쟁으로 맞설 수 있지만, 뒤의 것은 사본 대조표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1881년 프린스턴 — '원본'이라는 조항

1880년 미국 장로교 안에서 성향이 다른 두 신학교가 공동으로 학술지를 창간했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A. A. 하지와 유니온 신학교의 찰스 A. 브리그스가 함께 편집을 맡은 『프레스비테리언 리뷰』다. 그 지면에서 성경 비평을 주제로 여덟 편의 글이 양쪽에서 네 편씩 실리기로 되어 있었다. 1881년 4월, 첫 글이 나왔다. A. A. 하지와 당시 30대 초반이던 벤저민 B. 워필드가 함께 쓴 「영감(Inspiration)」이다.

그 글의 핵심 문장은 조건절에 있다. 교회의 역사적 신앙은 성경의 모든 확언이 — 영적 교리든 물리적·역사적 사실이든 심리적·철학적 원리든 — 오류가 없다는 것이되, 그것은 원 자필본의 바로 그 낱말들이 확정되고 자연스럽고 의도된 뜻으로 해석될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논증 규칙도 명시된다. 불일치를 주장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진술이 해당 책의 원 자필본에 실제로 있었음을 입증해야 한다.

입증 책임이 옮겨 간 자리

이 조항의 작동 방식은 명료하다. 원 자필본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어떤 반례도 '이 오류가 원본에 있었다'는 전제를 세울 수 없고, 세울 수 없으므로 반례로 성립하지 않는다. 무오 명제는 관측 가능한 어떤 텍스트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접근 불가능한 텍스트에 대한 주장이 된다.

옹호자의 응답은 이렇다. 이것은 회피가 아니라 사실의 반영이며, 필사 오류가 실재하는 이상 무오를 사본에 돌리는 것이야말로 부정직하다는 것이다. 시카고 선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원본의 부재가 기독교 신앙의 어떤 본질적 요소에도 영향을 주지 않으며 무오 주장을 무효화하거나 무의미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부인한다. 어떤 문서가 특정 반론을 조문으로 부인한다는 것은, 그 반론이 실제로 아프게 들어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조항은 원본과 사본을 개념적으로 분리해, 본문 비평을 신앙의 위협이 아니라 봉사로 재배치했다. 워필드 자신이 1886년 신약 본문 비평 입문서를 써서 국제적 평판을 얻었다. 무오 교리와 본문 비평이 한 사람 안에서 공존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설계였다. 방어선을 원본으로 물린 대가로, 사본에 대한 자유로운 학문적 조사가 가능해진 것이다.

공동 편집은 오래가지 못했다. 브리그스는 1891년 유니온 신학교 취임 강연에서 축자영감과 원본 무오를 정면으로 공격했고, 1893년 미국 북장로회 총회는 그를 정직 처분했다. 그는 이후 성공회 사제가 되었고, 유니온 신학교는 장로회 총회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1910년 총회가 채택한 다섯 가지 요지의 첫 항목이 성경의 무오였다. 『근본』(The Fundamentals) 총서가 1910년부터 1915년까지 발간되며 '근본주의'라는 이름의 어원이 되었고, 1925년 스코프스 재판이 그 운동의 대중적 이미지를 결정했다.

여기서 발화 위치를 짚을 필요가 있다. 하지와 워필드의 글은 순수한 교의학 논문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편집권을 나눠 가진 상대 진영과의 지면 대결 첫 수로 쓰였다. 원본 조항의 정밀함은 학문적 신중함의 산물인 동시에 논쟁적 방어물의 성격을 갖는다. 훗날 로저스와 맥킴이 이 조항을 '프린스턴의 발명'이라 부르고 우드브리지가 '교회 전통의 계승'이라 반박한 것도, 결국 이 문장이 태어난 자리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다툼이었다.

로마가톨릭이 지나온 다른 경로

같은 시기 로마가톨릭은 다른 궤도를 그렸다. 1893년 레오 13세의 회칙 『프로비덴티시무스 데우스』는 성경 연구에 비평적 방법의 사용을 처음으로 공식 허용하면서, 동시에 성경의 일부만 무오하고 나머지는 오류를 담을 수 있다는 해석을 금지했다. 1902년 교황청 성서위원회가 설치되었고, 1906년 위원회는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을 옹호하는 결정을 내렸다.

전환은 1943년 비오 12세의 회칙 『디비노 아플란테 스피리투』에서 왔다. 원어 본문 연구를 장려하고, 성경 저자가 사용한 문학 양식을 규명하는 일을 해석의 필수 과제로 인정했다. 1948년 성서위원회가 파리의 쉬아르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은 오경 문서의 성립 시기와 창세기 1~11장의 문학 양식에 관해 학자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용했다. 무오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무엇이 확언인지 판정하는 권한을 문학 양식 연구에 넘긴 것이다.

부사구 하나로 봉합된 균열

1964년 10월 2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빈의 프란츠 쾨니히 추기경이 독일어권 주교단을 대표해 발언했다. 성경에 역사와 자연에 관한 오류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취지였고, 구체적 사례를 들었다. 마가복음 2장 26절은 다윗이 대제사장 아비아달 때에 성전에 들어갔다고 하지만 사무엘상의 기록에서는 아비아달의 아버지 때였다. 마태복음 27장 9절은 예레미야의 예언이라 하지만 인용된 것은 스가랴서다. 다니엘서 1장 1절의 예루살렘 포위 연대도 다른 기록과 어긋난다.

초안 작업은 이 문제를 어휘로 해결하려 했다. 네 번째 초안에서 '어떤(any)'이라는 낱말이 '오류' 앞에서 빠지고, '진리'를 한정하는 형용사 '구원적인(salutarem)'이 붙었다. 구원에 관한 진리에서만 무오하다는 뜻으로 읽히자 반발이 일었고, 신학위원회는 교황 바오로 6세에게 문제를 넘겼다. 최종 문안에서 형용사는 사라지고 부사구가 들어왔다.

성경의 책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경에 기록되기를 원하신 그 진리를 확고하게, 충실하게, 오류 없이 가르친다고 인정해야 한다.

계시헌장 『하나님의 말씀』 제11항, 1965년 11월 18일 반포

문법의 위치가 옮겨진 결과는 결정적이다. '구원적 진리'라고 쓰면 진리가 분류되고 무오의 범위가 잘린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기록되기를 원하셨다'고 쓰면 구원은 기록 행위의 목적을 서술할 뿐, 무오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독법이 열린다. 두 독법이 모두 가능하도록 만든 문안이었고, 그래서 60년이 지나도록 해석이 갈린다. 제한적 무오의 근거로 읽는 주석가가 있고, 초안 작업에 참여한 아우구스틴 베아 추기경처럼 그 독법을 부인한 이가 있다.

어휘 선택이 논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이관했다. 공의회는 표결로 갈라질 뻔한 사안을 문법의 모호성으로 봉합했고, 갈등의 처리를 후대의 해석 공동체에 넘겼다. 개신교 진영이 명제를 정교화해 경계선을 세우는 길을 택했다면, 가톨릭은 명제를 유연하게 두고 해석 권한을 제도에 남기는 길을 택했다. 두 선택은 이후 각 진영에서 분쟁이 터지는 방식까지 다르게 만들었다.

1976년, 무오가 복음주의의 경계선이 되다

미국 복음주의 진영에서 이 문제가 다시 폭발한 계기는 한 신학교의 신앙고백 개정이었다. 1947년 설립된 풀러 신학교의 최초 신앙고백은 정경이 전체와 부분에서 완전히 영감되었고 모든 오류로부터 자유롭다고 규정했다. 1970년대 초 이사회는 새 신앙고백을 채택했고, 성경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자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무류한 규범으로 규정하되 '전체와 부분에서 모든 오류로부터 자유롭다'는 구절을 삭제했다.

풀러의 전직 부총장이자 당시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편집장이던 해럴드 린젤이 1976년 『성경을 위한 전투』(The Battle for the Bible)를 냈다. 논지는 도미노 논증이었다. 무오 신앙을 떠난 기관은 5년이 걸리든 50년이 걸리든 결국 신앙의 다른 근본 조항들도 떠나고 역사적 의미의 복음주의 기관이기를 그친다는 것이다. 책이 나온 달, 풀러 총장 데이비드 허버드는 기자들을 부른 자리에서 린젤의 무오 이해를 비성경적이라 규정하고 제한적 무오를 옹호했다.

2년 뒤 시카고 선언이 나왔다. ICBI는 1978년 무오 선언, 1982년 해석학 선언, 1986년 적용 선언을 남기고 1988년 해산했다.

문서의 자기규정과 실제 기능의 간극

시카고 선언은 서문에서 짧고 집중된 회의에서 작성된 문서의 한계를 인정하며 이 선언에 신조적 무게를 부여할 것을 제안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그러나 이후 40여 년 동안 이 문서는 신학교 임용, 학회 회원 자격, 교단 총회의 판정에서 사실상 시험지로 기능했다. 선언 자신은 신조가 아니라고 말하고, 선언을 쓰는 제도는 그것을 신조로 쓴 것이다.

이 간극은 위선이라기보다 구조다. 어떤 진영이 경계선을 필요로 할 때, 경계선 노릇을 할 문서는 마침 가장 정밀하게 쓰인 문서가 된다. 정밀함이 곧 판별력이기 때문이다. 문서의 저자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정밀한 문서는 선별 장치로 쓰이게 된다.

무오를 고백하고도 축출된 사례

이 구조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1983년 12월 댈러스에서 열린 복음주의신학회(ETS,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연례 총회다. 대상은 로버트 건드리였다. 그는 1982년 마태복음 주석에서 편집비평을 사용해, 마태가 청중의 필요에 맞추어 예수 이야기를 다듬었으며 그 다듬음이 때로 비역사적이었다고 논증했다. 유아기 이야기의 일부를 신학적 동기에 따른 비역사적 서술로 본 대목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건드리는 무오를 부인한 적이 없다. ETS 회원은 매년 무오를 명시한 신앙 진술에 서명하며, 그는 서명했고 자신이 무오를 믿는다고 공언했다. 그의 논지는 본문이 확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현대적 역사 기준을 전제하는 독자에게 자연스러울 뜻을 부인하되, 원래 청중에게 자연스러웠을 뜻은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먼 가이슬러가 축출 운동을 주도했다. 1983년 초 서한을 돌려 여러 신학교 교수 59명의 서명을 모았고, 학회는 임시위원회를 구성했다. 표결 결과 74퍼센트가 사임 요구에 찬성했고, 건드리는 사임했다. 가이슬러가 학회지에 제시한 기준은 이러했다.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귀결이 성경 전체의 완전한 진실성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는 해석학적·신학적 방법은 정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건이 드러낸 것은 무오라는 명제가 경계선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명제는 양쪽이 함께 서명할 수 있다. 갈라지는 것은 어떤 본문이 무엇을 확언하는가에 대한 판정이고, 그 판정은 명제가 아니라 해석 방법에서 나온다. 따라서 실제 시험대는 신앙 진술이 아니라 승인된 해석 방법의 목록이었고, 그 목록은 어디에도 성문화되어 있지 않았다. ICBI가 1978년 선언에 이어 1982년 해석학 선언을 별도로 낸 것은 이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같은 시기의 다른 문안

1974년 로잔 세계복음화국제대회가 채택한 로잔 언약 제2항은 성경이 그것이 확언하는 모든 것에서 오류가 없다고 규정한다. 초안을 총괄한 존 스토트는 'inerrancy'라는 낱말을 요구하는 대신 그 낱말의 정의를 문장으로 풀어 넣는 방식을 택했다. 낱말 자체에 거부감을 가진 복음주의자도 서명할 수 있고, 무엇이 확언인지를 정하는 작업은 열려 있다.

스토트 자신은 1999년 저작에서, 성경에 오류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무오를 누가 복음주의자인지 가리는 시금석으로 쓰는 것은 지혜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다고 썼다. 2013년 『성경 무오에 관한 다섯 견해』에서 마이클 버드는 미국 바깥의 복음주의가 무오라는 개념 없이도 성경의 진실성을 오랫동안 고백해 왔으며, 시카고 선언은 미국의 근본주의·자유주의 전쟁이라는 특수한 맥락의 산물이라고 논했다. 같은 책에서 앨버트 몰러와 케빈 밴후저는 자유주의의 도전이 각국에 도달하는 이상 그 문서의 유용성도 각국에 도달한다고 응수했다.

한국 — 성경관이 교단 지도를 그리다

한국 장로교의 분열선은 성경관을 따라 그어졌다. 시작은 1935년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 사건이었다. 미국 감리교 계열 출판사가 낸 주석의 번역·집필에 참여한 인사들이 축자영감을 부인한다는 공격을 받았고, 김재준·송창근·한경직이 그 대상에 들었다.

본격적 충돌은 해방 이후였다. 1939년 문을 연 조선신학교는 1946년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준받았으나, 1947년 4월 대구에서 열린 제33회 총회에 재학생 51명이 진정서를 냈다. 김재준이 고등비평을 가르쳐 성경의 권위를 훼손한다는 내용이었고, 진정인 다수는 북에서 내려온 학생들이었다. 박형룡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와 그 권위를 파괴하는 고등비평이 양립할 수 없다고 정리했다. 1948년 박형룡을 중심으로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가 세워졌고, 1949년 제35회 총회가 이 학교를 총회 직영으로 결의했다.

파면 결의문의 문언은 사료로서 무겁다. 김재준이 제36회 총회 결의를 위반하고 '성경유오설'을 주장했으므로 권징조례 제6장 42조에 따라 목사직을 파면한다는 것이다. 신학적 견해가 교단 사법 절차의 죄목으로 명시된 드문 사례다. 같은 총회는 축자영감을 부인한 캐나다 선교사 서고도(W. M. Scott)의 처벌도 결의했다.

박형룡의 성경관은 프린스턴에서 배운 계보 위에 있다. 원본 무오와 축자영감이라는 1881년의 조항이 미국 장로교 논쟁에서 만들어져, 반세기 뒤 식민지에서 해방된 교회의 노회 표결에서 사법적 효력을 갖는 규범으로 작동한 셈이다. 교리가 국경을 건너면 그 교리가 태어난 논쟁의 맥락은 함께 건너오지 않는다. 미국에서 그 조항은 지면 논쟁의 방어물이었으나, 한국에서는 교단 재산과 신학교 인준과 목사 자격을 가르는 집행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63년 뒤, 예장통합 제101회 총회는 제38회 총회의 결의를 철회했다. 철회 사유로 제시된 것은 김재준의 성경관이 옳았다는 판단이 아니라 권징 없이 책벌할 수 없다는 헌법을 위반하고 총회가 직접 제명을 결의했다는 절차상 하자였다. 교리 다툼으로 시작된 사건이 절차법의 문제로 정리된 것이다. 이 처리 방식은 교단이 신학적 판정을 뒤집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되 관계는 복원하려 할 때 취하는 전형적 경로이며, 동시에 애초의 파면이 순수한 신학적 판단만은 아니었을 가능성을 조용히 시인한다.

해석 기준 문장의 삭제 — 남침례교 2000년

같은 다툼이 조문의 문면에서 벌어진 사례가 미국 남침례교다. 1963년 판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Baptist Faith and Message)의 성경 조항은 이렇게 끝난다.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다. 이 문장은 1961년 랄프 엘리엇의 창세기 연구를 둘러싼 분쟁의 여파 속에서 추가되었다.

1979년 이후 남침례교의 주도권이 재편되었고, 2000년 개정판은 그 문장을 삭제하고 다른 문장으로 대체했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며 그리스도가 신적 계시의 초점이라는 것이다. 개정을 주도한 쪽은 옛 문장이 곤란한 본문을 회피하는 통로로 쓰였다고 설명했다. 반대한 쪽은 성경 해석의 그리스도론적 원리를 버림으로써 성경을 그리스도 위에 올려놓았다고 비판했다.

두 문장이 실제로 다투는 것

성경 안에 해석의 위계를 인정할 것인가.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문장은 성경의 어떤 대목이 다른 대목을 판정하는 자리에 설 수 있음을 함축한다. 그 함축이 열리면 곤란한 본문을 상대화할 통로가 생기고, 닫히면 모든 본문이 동일한 무게로 나란히 선다.

무오 논쟁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성경이 오류를 담느냐가 아니라, 성경 안에서 무엇이 무엇을 해석하느냐다. 위계를 인정하는 쪽은 그것이 신약이 구약을 읽는 방식 자체라고 말한다. 거부하는 쪽은 그 위계를 세우는 손이 결국 독자의 손이며, 독자가 무엇을 그리스도적이라 여기는지에 따라 본문이 잘려 나간다고 말한다. 양쪽 다 상대의 위험을 정확히 짚는다.

2005년 피터 엔스가 『영감과 성육신』에서 성경의 인간적 조건을 성육신에 유비해 설명하며 고대 근동 문헌과의 유사성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2008년 봄 학기가 끝난 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그를 정직시켰다. 논쟁의 형식은 1893년 브리그스, 1983년 건드리와 같다. 다투어진 것은 무오라는 낱말의 수용 여부가 아니라, 그 낱말을 유지한 채 본문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의 한계선이었다.

두 진술이 각각 치르는 비용

논쟁을 400년 늘어놓고 보면 각 입장이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드러난다. 어느 쪽도 부담 없이 서 있지 않다.

완전 무오를 주장할 때

주장의 대상이 손에 든 성경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원본이 된다. 반례가 원리적으로 제출될 수 없으므로 주장은 관측과 무관해지고, 그 대가로 설명력도 잃는다. 조화 작업은 개별 난점마다 새 가설을 요구하고, 그 가설들은 서로 독립적이어서 하나가 무너져도 다른 것이 대신 들어온다. 조화의 성공은 언제나 잠정적이다.

제한 무오를 주장할 때

오류의 범위를 정할 안정적 규칙이 없다. 역사와 자연의 세부를 면제하면 다음 물음이 온다. 부활은 역사인가 신앙인가. 선을 그을 때마다 그 선이 왜 거기여야 하는지를 별도로 논증해야 하고, 논증의 근거는 대개 본문 바깥에서 온다. 린젤의 도미노 논증은 이 취약점을 겨눈 것이었다.

린젤의 예측은 경험적 주장이었고, 절반만 맞았다. 풀러 신학교는 신앙고백에서 그 구절을 뺀 뒤에도 복음주의 기관으로 남아 존속했다. 반대로 무오를 조문으로 못박은 기관들에서도 분열은 그치지 않았다. 건드리 사건과 엔스 사건이 보여 주듯, 무오를 함께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축출이 일어난다. 조문은 이탈을 막지 못했고, 조문이 없다고 이탈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도미노 논증이 실제로 예측한 것은 교리의 운명이 아니라 제도의 통제력이었으며, 그 부분에서는 상당히 맞았다. 무오 조문을 유지한 기관은 인사와 회원 자격을 통제할 수단을 유지했다.

권한이 옮겨 다닌 자리

이 논쟁을 하나의 실로 꿰면, 다투어진 것은 텍스트의 속성이 아니라 오류를 정의할 권한의 소재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세 갈래 유보는 그 권한을 독자에게 두었다. 어긋남을 만나면 사본과 번역과 자기 이해를 먼저 의심하라는 지침은, 판정의 부담을 텍스트가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 지운다. 헬베티아 일치신조는 그 권한을 마소라 본문의 부호에 두었고, 부호의 기원이 밝혀지자 물러났다. 프린스턴의 원본 조항은 접근 불가능한 텍스트에 두었다. 계시헌장의 부사구는 저자가 무엇을 기록되기 원했는가라는 의도에 두었고, 그 의도를 판별하는 일은 문학 양식 연구와 교도권에 맡겼다. 1983년 ETS는 학회 표결에 두었다. 2000년 남침례교 개정은 조문 한 줄의 삭제로 그 권한이 그리스도론적 해석 원리로 흘러 나가는 통로를 막았다.

그래서 처음의 이분법은 답할 수 없는 형태로 제기된 것이다. 자모 하나까지 무오하다는 진술은 어느 본문에 대한 진술인지를 먼저 정해야 하고, 다소 오류가 있으나 진리를 담는다는 진술은 오류의 경계를 누가 긋는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두 진술 다 전제 하나를 조용히 깔고 있으며, 논쟁 400년은 그 전제를 각자 다른 곳에 못 박아 온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