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11일
누가복음은 저자가 자기 이름을 한 번도 쓰지 않은 문서다. 그런데도 이 문서에는 성격을 추론할 단서가 다른 복음서보다 많다. 그가 앞선 기록을 고쳐 쓴 자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읽히는 사람은 흔히 말하는 '자비로운 의사'와 상당히 다르다.
누가복음 본문에는 저자의 이름이 없다. '누가'라는 이름이 이 문서에 붙은 것은 2세기 후반의 일이다. 리옹의 주교 이레나이우스가 180년경 쓴 『이단 반박』에서 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바울의 동행자 누가에게 돌렸고, 비슷한 시기의 목록 문헌인 무라토리 단편도 같은 이름을 적었다. 이 귀속의 근거로 늘 인용되는 것은 골로새서 4장 14절, 바울이 자기 동료를 '사랑받는 의사'라고 부른 한 구절이다.
이 이름이 맞는지는 이 글의 관심이 아니다. 성격을 추론하는 작업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비교 대상이다. 어떤 사람의 성향은 그가 무엇을 썼는지보다 무엇을 고쳤는지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백지에 쓴 글에서는 취향과 제약과 자료의 한계가 뒤섞여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데 앞사람의 원고를 손에 들고 고쳐 쓴 글에서는, 지운 자리와 보탠 자리가 그대로 남는다.
누가복음은 바로 그런 문서다. 신약의 처음 세 복음서인 마태·마가·누가는 서로 겹치는 대목이 매우 많아 나란히 놓고 볼 수 있다는 뜻에서 공관복음이라고 불린다. 이 셋의 관계에 대해 오늘날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였고 마태와 누가가 각각 마가를 자료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설명을 전제하면 누가복음의 상당 부분은 마가복음의 교정본으로 읽을 수 있다. 같은 사건을 다루는 두 본문을 겹쳐 놓고, 한쪽에 있는 문장이 다른 쪽에서 사라졌거나 다른 말로 바뀐 자리만 모으는 것이다. 성경학계에서 이런 작업을 편집비평이라고 부른다. 저자가 자료를 어떻게 편집했는지를 통해 그의 관심과 판단을 재구성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문장 하나가 사라진 이유는 성향일 수도 있고, 분량 조절일 수도 있고, 그가 참고한 마가복음 사본이 우리가 아는 것과 조금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단발적인 삭제 하나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종류의 손질이 반복될 때다. 성격은 한 번의 선택이 아니라 반복되는 습관에서만 읽힌다. 아래에서 보는 것은 그런 반복들이다.
누가복음은 네 복음서 중 유일하게 정식 서문을 갖고 있다. 1장 1절부터 4절까지, 그리스어 한 문장으로 이어지는 이 대목에서 저자는 이미 여러 사람이 같은 일을 기록하려 했다고 밝히고, 자기도 처음부터 하나하나 살펴 차례대로 쓰기로 했으며, 그 목적은 수신자가 이미 배운 것에 대해 확실함을 얻는 데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고른 두 낱말이 눈에 걸린다. 하나는 '차례대로'(카테크세스)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절의 '확실함'(아스팔레이아)이다. 뒤의 낱말은 원래 발을 헛디디지 않는 상태, 즉 미끄러지지 않음을 뜻한다. 순서가 잡혀 있어야 하고 딛는 자리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 — 이것이 그가 자기 작업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마가복음에는 이런 문장이 없다. 마가는 아무 예고 없이 곧바로 사건으로 들어간다.
서문은 문체에서도 따로 떨어져 있다. 1장 1절부터 4절까지는 종속절을 겹쳐 쌓아 마지막에 주동사로 마무리하는 정교한 그리스어 문장이다. 그런데 5절부터는 문장이 갑자기 짧아지고, '그리고'로 절을 이어 붙이는 히브리어투로 바뀐다. 이는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그리스어로 번역된 유대인의 성경, 곧 칠십인역의 문체다. 저자는 교양 있는 그리스어 산문과 성경투 그리스어를 모두 쓸 수 있었고, 어디서 어느 쪽을 쓸지 의식적으로 골랐다. 서문에서는 당대 독자가 신뢰할 만한 저술의 얼굴을 보여 주고, 본문에 들어서면 성경의 목소리로 갈아입는다. 문체를 옷처럼 갈아입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글이 누구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계산하는 사람이다.
서문은 또 한 사람을 부른다. 데오빌로다. 저자는 그를 부를 때 '가장 존귀한'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이 호칭이 어떤 무게였는지는 같은 저자의 다른 책에서 확인된다. 사도행전에서 이 낱말은 로마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를 부르는 자리에 쓰인다(사도행전 23:26, 24:3, 26:25). 즉 이것은 친구를 부르는 말이 아니라 관직과 신분이 있는 사람을 향한 격식이다. 데오빌로가 실존 인물인지 상징적 이름인지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저자가 자기 글의 수신자를 상층 후원자로 설정했다는 사실은 문면에서 그대로 읽힌다.
이 설정은 곧 서술의 강조점으로 나타난다. 누가복음의 수난 기록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죄가 없다고 세 번 말하고(23:4, 14, 22), 처형은 로마 사법의 판단이 아니라 압력에 밀린 결과로 그려진다. 사도행전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 로마 관리들은 대체로 온건하게 등장하고, 새 신앙은 제국의 질서를 흔드는 운동이 아니라 조사받고 무혐의로 풀려나는 무엇으로 제시된다. 어떤 사실을 강조하고 어떤 사실을 여백에 두는지는 저자의 성향만이 아니라 그가 상정한 독자의 위치에서 나온다. 관직 있는 후원자를 앞에 두고 쓰는 사람은 자기 진영이 위험하지 않다는 점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저자의 성격에 관한 가장 널리 퍼진 설명은 그가 의사였다는 것이다. 1882년 아일랜드의 성직자 윌리엄 커크 호바트가 『누가의 의학 용어』를 내어, 마태와 마가가 일상어를 쓴 자리에서 누가복음이 의학 문헌의 용어를 골라 썼다는 목록을 제시했다. 골로새서의 '사랑받는 의사'와 이 목록이 맞물리자, 정확한 관찰과 환자에 대한 동정심이라는 성격상이 함께 따라왔다.
이 논증은 한 세대 뒤에 대부분 해체됐다. 헨리 캐드베리가 1919년과 1920년에 걸쳐 낸 『누가의 문체와 문학적 방법』은 호바트가 모은 낱말들을 다른 저자들에게서 그대로 찾아냈다. 상당수가 칠십인역과 요세푸스에 있었고, 나머지도 플루타르코스와 루키아노스 같은 사람들의 글에 있었다. 이들은 아무도 의사가 아니다. 결론은 간단했다. 호바트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면 고대의 교양 있는 저자 대부분이 의사가 된다.
직업을 증명하려던 목록이 실제로 증명한 것이 논쟁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다. 안네테 바이센리더가 2003년에 낸 연구는 누가복음의 질병 서술을 고대 의학 문헌의 진단 도식과 맞대어 다시 검토했고, 최근에도 캐드베리의 용례 목록 일부가 부정확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기울어도 처음의 추론은 복원되지 않는다. 어휘는 저자가 읽은 것의 폭을 알려 주지 직업을 알려 주지 않는다.
남는 사실은 다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어휘 폭은 신약 문헌 가운데 가장 넓고, 그 안에는 신약에 단 한 번만 나오는 낱말이 유난히 많다. 이것은 의사의 표지가 아니라 낱말을 고르는 사람의 표지다.
의사설의 증거로 자주 인용되는 대목 하나는 사본 문제에 걸려 있다. 마가복음 5장 26절은 열두 해 동안 피를 흘린 여인이 여러 의사에게 많은 고생을 하고 가진 것을 다 썼으나 낫지 않고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적는다. 이 가운데 '더 나빠졌다'는 대목은 누가복음 8장 43절에서 확실히 사라졌다. 그런데 '의사들에게 재산을 다 썼다'는 부분은 사정이 복잡하다. 이 구절은 시나이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을 비롯한 대다수 사본에는 들어 있고, 3세기 파피루스 사본 하나와 바티칸 사본에서는 빠져 있다. 즉 저자가 의사에 대한 험담을 지웠다는 주장은, 원래 무엇이 있었는지부터 논쟁 중인 자리에 서 있다. 근거로 삼기에는 발밑이 흔들린다.
발밑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다른 쪽이다.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에서 지운 것들을 모아 보면, 지워진 문장들 사이에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등장인물의 체면을 깎는 대목이 반복적으로 사라진다.
| 대목 | 마가복음 | 누가복음 |
|---|---|---|
| 안식일 논쟁 | 예수가 노여워하며 둘러본다 (3:5) | 노여움이 지워진다 (6:10) |
| 베드로의 고백 직후 | 베드로를 사탄이라 부르며 꾸짖는다 (8:33) | 책망 장면이 없다 (9:20~22) |
| 높은 자리 다툼 | 야고보와 요한이 영광의 자리를 청한다 (10:35~37) | 이름 없는 다툼으로 남는다 (22:24) |
| 겟세마네 | 제자들이 잠들고 이유는 없다 (14:37~41) | 슬픔에 지쳐 잠들었다고 한다 (22:45) |
| 체포 직후 | 제자들이 모두 버리고 달아난다 (14:50) | 달아나는 장면이 없다 |
| 세례 요한의 죽음 | 잔치와 목 베기를 길게 그린다 (6:17~29) | 옥에 갇혔다고만 적는다 (3:19~20) |
이 목록을 두고 저자가 사실을 은폐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그는 다툼이 있었다는 사실을 삭제하지 않았다. 삭제한 것은 누가 다퉜는지다. 제자들이 잠들었다는 사실도 삭제하지 않았다. 보탠 것은 잠든 이유다. 이것은 사실을 없애는 손이 아니라 사실에서 인격에 대한 흠집만 걷어내는 손이다.
따뜻함이라고 부르기도 정확하지 않다. 같은 저자가 부자를 향해서는 신약에서 가장 매서운 문장들을 쓴다. 그가 관리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평판이다. 공적으로 회람될 문서를 만드는 사람의 습관에 가깝다. 어떤 조직의 기록을 정리하는 사람이 사실관계는 남기고 개인에 대한 험담은 덜어내는 것과 같은 종류의 판단이다. 이 성향은 미덕이기도 하고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마가복음을 읽을 때 느껴지는 당혹감, 즉 예수의 측근들이 얼마나 그를 이해하지 못했는가 하는 날것의 인상은 누가복음에서 상당히 누그러진다. 편집자가 독자의 걸림돌을 치울 때, 걸림돌이 전하던 정보도 함께 치워진다.
걸림돌을 치우는 습관은 인물의 평판에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 것을 미리 골라낸다.
가장 선명한 예는 중풍병자를 지붕으로 들여보내는 장면이다. 마가복음 2장 4절에서 사람들은 지붕을 뜯어내고 구멍을 파서 병자를 내린다. 팔레스티나의 민가는 나무 서까래에 흙을 덮어 눌러 만든 평지붕이었으므로 파낼 수 있었다. 누가복음 5장 19절에서 같은 사람들은 기와를 벗겨 내린다. 기와지붕은 그리스·로마 도시의 건축이다. 저자는 자기 독자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흙지붕을 그들이 아는 지붕으로 갈아 놓았다.
같은 손질이 낱말에서도 반복된다. 마가복음은 아람어를 그대로 옮겨 적고 뜻을 붙이는 방식을 즐긴다. 죽은 소녀에게 한 '달리다굼', 귀먹은 사람에게 한 '에바다', 야고보와 요한의 별명 '보아너게', 처형 장소 '골고다'가 그렇다. 누가복음에는 이 낱말들이 하나도 없다. 처형 장소는 '해골이라 하는 곳'으로만 적힌다(23:33). 예수를 부르는 호칭도 '랍비'가 아니라 그리스어 독자가 아는 '선생'이나 '주인'으로 바뀐다.
배려와 거리감이 같은 흔적으로 남는 지점이 손질은 독자에 대한 배려로 읽히지만, 저자 자신의 위치도 함께 드러낸다. 유대 지역의 지리에 관해 누가복음은 몇 군데에서 흐릿하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났다는 서술(17:11)은 두 지역의 위치를 아는 사람에게는 어색한 경로다. 아람어를 걷어내고 지붕을 갈아 놓은 사람은 그 땅의 관습을 독자에게 설명해 줄 필요가 있는 사람이었고, 어쩌면 자신도 그 땅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이었다.
순서와 확실함을 앞세운 성향은 이 문서에서 가장 큰 대가를 치른다.
누가복음 3장 1절과 2절은 세례 요한의 활동 시작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재위 15년으로 못 박고, 여기에 유대 총독 빌라도, 갈릴리 분봉왕 헤로데, 그의 동생 빌립, 아빌레네의 루사니아,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까지 여섯 겹의 좌표를 겹쳐 놓는다. 신약 어디에도 이만큼 촘촘한 연대 표기가 없다. 이것은 자기 서술을 검증 가능한 자리에 놓겠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같은 문서의 2장 2절이 문제를 만든다. 예수의 출생을 구레뇨가 시리아 총독이던 때의 호적 등록과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사료의 좌표는 이렇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구레뇨의 시리아 총독 재임과 유대 지역 호적 조사는 서기 6년의 일이다. 유대를 로마가 직접 통치 아래로 편입하면서 세금 산정을 위해 재산을 등록시킨 조치였다. 반면 헤로데 대왕은 기원전 4년에 죽었다. 누가복음 1장은 세례 요한의 출생을 헤로데 재위 중으로 두었고(1:5), 2장은 예수의 출생을 헤로데의 시대로 전제한다. 두 좌표 사이에 열 해가 벌어진다. 문제는 외부 자료와의 충돌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 문서 자체의 내부 충돌이다.
이 어긋남을 메우려는 시도는 백 년 넘게 쌓였다. 구레뇨가 이전에 한 번 더 시리아에 부임했다는 재구성, '첫 번째 호적'이라는 표현을 두 번의 호적을 구별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읽는 해석, 헤로데의 사망 연도 자체를 다시 계산하는 논의가 있다. 반대편에는 슈러 이래로 이어진 견해가 있다. 레이먼드 브라운과 조지프 피츠마이어 같은 주요 주석가들은 이 대목을 저자의 착오로 정리했다. 최근에는 방향을 바꾼 독법도 나왔다. 2024년 『성서문헌학회지』에 실린 연구는 이 호적 언급을 출생 연도의 표시가 아니라 요세푸스가 전하는 갈릴리 유다의 반란과 예루살렘 함락으로 이어지는 서사적 연결로 읽자고 제안한다. 파피루스 자료로 로마 호적 제도의 실제 운용을 재검토해 이 장면의 개연성을 다시 따지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어느 해법을 택하든 성격에 관한 관찰은 흔들리지 않는다. 마가복음은 이런 오류를 낼 수 없다. 마가복음에는 연도가 없다. 황제의 재위년도, 총독의 이름도, 호적 조사도 없다. 검증될 수 있는 문장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반증될 수도 없다. 누가복음이 가장 자주 역사적 정확성 문제로 다투어지는 복음서가 된 것은 그것이 가장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정확성을 자기 작업의 표지로 내세운 유일한 복음서이기 때문이다. 순서를 세우겠다고 선언한 사람만 순서가 틀린 것이 드러난다. 이것이 이 저자의 성향에서 가장 값비싼 부분이자, 동시에 그 성향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가장 강한 증거다.
누가복음은 재산에 관해 신약에서 가장 날이 선 문서다. 이 사실과 그가 상층 후원자에게 글을 바쳤다는 사실은 나란히 놓고 보아야 한다.
마리아의 노래는 권력자를 자리에서 내리고 낮은 자를 높이며, 배고픈 자를 채우고 부한 자를 빈손으로 보낸다고 말한다(1:52~53).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 '마음이 가난한 자'를 축복하는 자리에서(마태 5:3) 누가복음은 수식 없이 가난한 자를 축복하고, 곧이어 부한 자와 배부른 자와 웃는 자를 향한 저주를 대칭으로 붙인다(6:20~25).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16:19~3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16~21), 재산의 절반을 내놓는 삭개오(19:8)는 모두 이 복음서에만 있다.
이것을 계급적 진정성의 증거로 읽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같은 저자가 '가장 존귀한' 데오빌로에게 글을 바치고, 헤로데의 재산 관리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 같은 이름을 알고 있으며(8:3), 예수의 활동을 지원한 여인들의 재력을 명시하고, 로마 관리들을 대체로 호의적으로 그린다. 가난한 저자가 부자를 규탄하는 구도가 아니다.
더 그럴듯한 설명은 이 문장들이 누구에게 필요했는가를 보는 쪽이다. 소유를 나누라는 요구는 나눌 것이 없는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다. 부한 자를 향한 저주가 문서에 실린 것은 그 문서를 읽을 사람들 가운데 부한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상층에 속했거나 적어도 상층과 어울려 살았다는 정황과, 이 복음서가 재산 문제를 가장 집요하게 다룬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사정의 두 면이다. 자기 진영의 문제를 가장 날카롭게 쓰는 사람은 대개 그 진영 안에 있다. 사도행전이 초기 공동체의 재산 공유를 반복해 묘사하면서 그 실패 사례까지 함께 적는 것도(사도행전 4:32~5:11) 같은 관심의 연장으로 읽힌다.
이 저자에게는 이름을 남기는 습관이 있다. 마가복음에서 이름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누가복음에서는 자주 이름을 얻는다. 예수를 따라다니며 지원한 여인들의 명단(8:1~3), 성전에서 아기를 맞은 시므온과 안나(2:25~38), 마르다와 마리아(10:38~42), 삭개오, 엠마오로 가던 글로바(24:18)가 그렇다.
이 습관을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으로만 읽는 것은 한쪽만 보는 것이다. 다른 해석도 같은 자료로 성립한다.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다. 헤로데 궁정 재산 관리인의 아내라는 신원처럼 지나치게 구체적인 정보는 서사적 장치로는 설명되지 않고, 정보의 출처를 관리하는 습관으로 설명하는 편이 간결하다. 앞의 서문에서 그가 목격자에게서 전해진 것을 살폈다고 밝힌 것과도 이어진다. 정서적 관심과 자료 관리 습성은 이 문서에서 구분되지 않으며, 어느 한쪽만 골라내려는 시도는 근거를 넘어선다.
더 확실한 것은 배치의 습관이다. 이 저자는 짝을 맞춘다. 사가랴에게 천사가 오고 마리아에게 천사가 온다. 성전에서 남자 시므온이 말하고 여자 안나가 말한다. 잃은 양 하나를 찾는 남자와 잃은 은전 하나를 찾는 여자가 나란히 놓인다(15:3~10). 족보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고(3:23~38), 시므온의 입에서 이방을 비추는 빛이 언급된다(2:32). 대칭을 만들고 범위를 넓히는 이 배치는 즉흥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구조를 먼저 세우고 재료를 채워 넣는 사람의 작업이다. 서문에서 차례를 말한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여기까지의 추론에는 큰 함정이 하나 있다. 성격이라고 읽은 것 가운데 상당 부분이 실은 당대의 관습일 수 있다는 것이다.
1993년 러브데이 알렉산더는 누가복음 서문에 관한 통설을 뒤집었다. 그때까지 학계는 이 서문이 투키디데스와 폴리비오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역사서의 서문 형식을 따랐다고 보았고, 그래서 저자가 자신을 역사가로 제시하려 했다고 읽었다. 알렉산더는 이 서문이 오히려 헬레니즘 세계에 널려 있던 기술 편람, 즉 의학·측량·기계·점성 같은 실용 분야의 교본 서문과 훨씬 닮았다고 논증했다. 그 형식에서는 앞선 저작을 언급하고, 자기가 다시 쓰는 이유를 밝히고, 한 사람에게 헌정하는 것이 정해진 순서다. 이 견해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데이비드 오니와 션 애덤스 등은 역사서 서문과의 유사성이 여전히 강하다고 반박했고, 두 계열을 깔끔하게 갈라놓을 수 없다는 정리가 지금은 더 흔하다.
어느 쪽이든 성격 추론에는 같은 제약이 걸린다. 앞선 기록들을 언급한 것도, 조사했다고 말한 것도, 헌정 대상을 부른 것도 그 형식이 원래 요구하는 항목이었을 수 있다. 서문에서 조심스러움과 겸손을 읽어 낸 것은 어쩌면 저자의 성격이 아니라 그가 지킨 예법을 읽은 것이다. 관습이 설명하는 부분은 성격의 증거에서 빼야 한다.
그러나 빼고 남는 것이 있다. 관습은 무엇을 넣으라고 가르치지만 무엇을 지우라고는 가르치지 않는다. 마가복음의 어떤 문장을 남기고 어떤 문장을 덜어낼지 정해 주는 편람은 없었다. 앞의 목록에 모인 것들이 바로 그 남은 부분이다. 노여움을 덜어내고, 이름을 감추고, 잠든 이유를 달아 주고, 흙지붕을 기와로 갈고, 아람어를 걷어내고, 연대를 여섯 겹으로 쌓아 올린 결정들. 이것들은 형식이 시키지 않은 선택이며, 따라서 사람의 것이다.
그 선택들을 모으면 한 사람의 윤곽이 나온다. 순서를 먼저 세우고 재료를 채우는 사람, 자기 문서가 검증대에 오를 것을 알고 좌표를 촘촘히 박아 두는 사람, 독자가 걸려 넘어질 낱말과 풍습을 미리 갈아 놓는 사람, 등장인물의 흠집을 덜어내되 사실은 남기는 사람, 관직 있는 후원자를 향해 쓰면서 재산에 관해 가장 불편한 문장을 실은 사람. 이것은 자비로운 의사의 초상이 아니다. 자료를 다루는 태도가 조심스럽고, 체면과 평판을 함께 관리하며, 정확성을 자기 작업의 명분으로 삼은 교양층 편집자의 초상이다.
그리고 이 성향의 장점과 약점은 갈라지지 않는다.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읽기 편한 문서가 나온 것도, 신약에서 가장 자주 연대 오류로 다투어지는 문서가 나온 것도 같은 습관에서 나왔다. 확실함을 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은 자기 문장을 반증 가능한 자리에 세운다. 그 자리에 서지 않은 문서는 틀릴 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