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본문 읽기
마태복음은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책을 여러 번 읽은 사람은 어떤 인상을 갖게 된다. 숫자를 맞추고, 절차를 적어 두고, 위선을 못 견디고, 그러면서 자비를 자꾸 변호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인상이다. 그 인상이 근거를 갖는 추론인지, 갖는다면 어디까지인지가 이 글의 문제다. 결론을 미리 적으면 이렇다. 저자의 성격은 그가 무엇을 말했는지에서가 아니라 물려받은 자료를 어디서 지우고 어디서 늘렸는지에서 드러나며, 그 손질의 습관이 가리키는 사람은 세리 출신 회계원이 아니라 엄격함이 본능이어서 자비를 굳이 논증해야 했던 교사다.
마태복음 스물여덟 장 어디에도 "내가 이 글을 썼다"는 문장이 없다. 이것은 사소한 사실이 아니다. 누가복음은 첫머리에서 자기가 자료를 조사해 차례대로 썼다고 밝히며 1인칭을 쓴다(누가복음 1장 1~4절). 요한복음은 마지막에 "이 일을 증언하고 기록한 제자"를 지목한다(요한복음 21장 24절). 마태복음에는 그런 자리가 없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나고, 저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 성경에 붙어 있는 "마태복음"이라는 표제는 본문의 일부가 아니라 사본에 붙은 제목이며, 다수 학자는 이 제목이 2세기에 정착했다고 본다. 저자를 사도 마태로 지목한 가장 이른 외부 증언은 소아시아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이었던 파피아스의 말이다. 파피아스가 2세기 초에 쓴 책은 사라졌고, 그 문장은 4세기 역사가 에우세비우스가 『교회사』 3권 39장 16절에 옮겨 적은 인용으로만 남았다. 마태가 히브리 말로 '로기아'(주의 말씀)를 엮었고, 각 사람이 능력대로 그것을 옮겼다는 짧은 진술이다.
문제는 이 진술이 지금 남아 있는 책과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 남아 있는 마태복음은 어록 모음집이 아니라 탄생부터 부활까지를 갖춘 완결된 서사이고, 그리스어로 쓰였으며, 셈어 원문을 번역한 문서 특유의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파피아스가 가리킨 문서가 지금의 마태복음이 아닐 수 있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진다. 오늘날 다수 학자는 이 책을 대략 서기 80~90년 사이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유대 전통과 성경 해석 논쟁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썼다고 본다. 반대편에서는 사도 저작과 이른 연대를 옹호하는 학자들이 파피아스와 이레나이우스, 오리게네스로 이어지는 고대 증언의 일치를 무겁게 본다. 이 논쟁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그러면 성격을 추론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무너지는가.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그 사람의 기질을 말하는 것은 공중에 집을 짓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추론의 대상을 바꾸면 사정이 달라진다. 알 수 없는 것은 실명 인물의 전기이지만, 알 수 있는 것은 본문이 함축하는 저자다. 문학 연구에서 내포 저자라 부르는 것으로, 텍스트를 만든 판단들에서 역산되는 인격의 윤곽이다. 이것은 심리 진단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참지 못하고 무엇을 반복하는지가 그가 만든 물건의 형태에 남는다는, 목수의 대패 자국을 보는 것에 가까운 작업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이 작업에 유난히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저자가 무엇을 재료로 썼는지를 상당한 정도로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마가·누가복음은 같은 사건을 같은 순서로, 때로 같은 문장으로 전한다. 세 책이 서로 겹치는 이 현상을 공관복음 문제라 부른다. 오늘날 다수설은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였고 마태와 누가가 그것을 자료로 삼았다는 설명이다. 마태복음에는 마가복음 내용의 대부분이 들어 있으며, 여기에 마태와 누가에만 공통으로 나타나는 어록 자료(연구자들이 Q라 부르는 가설상의 자료)와 마태에만 있는 자료(같은 관행으로 M이라 부른다)가 더해졌다고 본다.
이 그림에 반대하는 설명도 있다. 마태복음이 먼저이고 마가가 그것을 줄였다는 고전적 견해, 그리고 Q라는 가설 문서 없이 누가가 마가와 마태를 함께 보았다고 설명하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아래의 추론은 마가 우선을 전제로 하며, 그 전제가 바뀌면 "무엇을 지웠는가"라는 관찰의 방향도 뒤집힌다. 다만 방향이 뒤집혀도 관찰 자체는 남는다. 두 본문이 나란히 있고 한쪽이 짧고 한쪽이 길다면, 어느 쪽이 원본이든 둘 사이의 차이가 누군가의 선택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편집이 저자의 성격을 보여 주는 이유는 단순하다. 새로 쓴 문장은 재능을 보여 주지만, 남이 쓴 문장을 손질한 자리는 취향과 불안을 보여 준다. 무엇을 견디지 못해 지웠고 무엇이 아쉬워 늘렸는지가 거기 남는다.
구체적인 예를 보자. 마가복음 5장 1~20절은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 이야기를 스무 절에 걸쳐 전한다. 쇠사슬을 끊고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던 정황, 이름을 묻고 답하는 대화, 돼지 떼의 수, 고침받은 사람이 따라가겠다고 청했으나 예수가 돌려보내며 집으로 가라 한 결말까지 세밀하다. 마태복음 8장 28~34절은 같은 이야기를 일곱 절로 줄인다. 정황 묘사는 사라지고 결말의 대화도 사라진다.
이런 축약은 마태복음의 기적 이야기 전반에서 되풀이된다. 그러면 지면은 어디로 갔는가. 가르침으로 갔다. 마가복음에서 짧게 언급되거나 흩어져 있던 말씀들이 마태복음에서는 길고 완결된 담화로 묶인다. 산상수훈(5~7장)만 해도 마가복음에 대응하는 덩어리가 없다.
같은 장면을 짧게 만들고 같은 책을 길게 만든 선택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이 저자는 장면을 실감 나게 재현하는 데 관심이 적고, 되풀이해 가르칠 수 있는 문장을 확보하는 데 관심이 크다. 사건의 결말보다 규범의 형태가 그에게 더 급하다.
마태복음은 족보로 시작한다.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이름을 늘어놓은 뒤, 저자는 굳이 셈을 밝힌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까지 열네 대, 유수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라고 적는다(1장 17절). 자료를 옮기는 사람은 이런 문장을 쓰지 않는다. 배열을 설계한 사람만 자기 배열의 규칙을 독자에게 알려 준다.
왜 열넷인가. 히브리 문자에는 각각 수 값이 있고, 그 값을 더해 낱말에 수를 대응시키는 관행이 있다. 이를 게마트리아라 부른다. 다윗이라는 이름을 이루는 히브리 자음 세 글자의 값을 더하면 14가 된다. 즉 족보의 마디마디가 다윗의 이름을 반복하는 구조다. 여기까지는 정교한 설계다.
그런데 셋째 묶음의 이름을 실제로 세어 보면 열네 개가 아니라 열세 개다. 이 어긋남을 두고 오래된 해설이 여럿 있다. 다윗이나 여고냐를 두 묶음에 걸쳐 두 번 센다는 설명, 저자가 열셋을 열넷으로 반올림해 형태를 지켰다는 설명, 예수와 그리스도를 각각 한 대로 세었다는 설명, 초기 사본 전승에서 이름 하나가 탈락했다는 설명이 있다. 어느 해설도 결정적이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답을 고르는 일이 아니다. 이 저자에게는 실제 합계보다 형태가 먼저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열넷이라는 마디를 세 번 반복해야 다윗의 자손이라는 주장이 눈에 보이므로, 그는 이름을 덜어 내면서까지 마디를 맞췄고 그러고도 하나가 비는 것을 감수했다. 셈에 밝은 사람이 셈을 틀리는 방식이 아니라, 셈을 논증의 도구로 쓰는 사람이 도구를 밀어붙이는 방식이다.
같은 습관이 책 전체의 골격에도 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긴 가르침이 다섯 덩어리로 놓여 있고, 그 덩어리가 끝날 때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에 해당하는 거의 같은 문장이 나온다(7장 28절, 11장 1절, 13장 53절, 19장 1절, 26장 1절). 서사와 담화가 번갈아 나오는 이 구조는 독자가 발견해 낸 것이 아니라 저자가 표지를 박아 알려 준 것이다.
옅은 칸이 서사, 짙은 칸이 다섯 담화다. 담화 칸 오른쪽의 절 번호는 그 담화가 끝나는 자리에 박힌 종결 문장의 위치다.
20세기 초 벤저민 베이컨은 이 다섯 덩어리가 모세오경에 대응하도록 설계되었다고 주장했다(1918년 제안, 이후 『마태복음 연구』로 정리). 오경 대응 가설 자체는 지금 회의적으로 다뤄지지만, 그가 지목한 종결 형식구의 존재와 그 경계 기능은 널리 인정된다. 즉 오경을 겨눈 것이든 아니든, 저자가 다섯이라는 수를 의식하고 표지를 반복해 박았다는 관찰은 남는다.
셋도 자주 나온다. 광야의 시험이 세 차례로 전개되고, 6장은 경건의 실천을 구제·기도·금식 세 항목으로 나란히 다루며, 18장의 권징 절차는 세 단계로 짜인다. 여기에 더해 마태복음에는 짝을 만드는 기묘한 습관이 있다. 마가복음에서 한 사람이던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8장 28절), 마가복음에서 이름까지 나오는 한 명의 소경 바디매오가 두 소경이 되고(20장 30절), 마가복음의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나귀와 그 새끼 두 마리가 된다(21장 2절).
나귀의 경우는 스가랴 9장 9절의 병행 표현을 두 마리로 읽은 결과라는 설명이 유력하다. 그러나 소경과 귀신 들린 사람에는 그런 인용 사정이 없다. 눈에 띄는 것은 같은 저자가 18장 16절에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는 신명기 19장 15절의 규정을 끌어온다는 점이다. 증언이 성립하려면 둘이어야 한다고 적어 두는 사람이 자기 이야기의 증인도 둘로 만든다. 우연의 일치일 수 있으나, 이 책에서 수가 놓이는 방식과는 잘 맞는다.
이런 배열은 계산 능력의 과시가 아니다. 열넷과 다섯과 셋으로 끊어 놓은 자료는 외우기 쉽다. 종결 형식구는 어디까지가 한 단원인지 알려 준다. 기적을 두 장에 모아 두면 주제별로 찾아 쓸 수 있다. 이 저자가 정돈하는 방식은 교실의 필요를 따른다.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정형 문구가 있다. 사건을 서술한 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를 덧붙이고 히브리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는 형식이다. 연구자들은 이를 성취 인용구라 부르며, 열 곳 남짓으로 센다(1장 22절, 2장 15절, 2장 17절, 2장 23절, 4장 14절, 8장 17절, 12장 17절, 13장 35절, 21장 4절, 27장 9절). 마가복음에는 이런 반복 정형이 사실상 없다.
이 정형은 성경에 밝은 사람의 습관이다. 동시에 성경을 자유롭게 부리는 사람의 습관이기도 하다. 인용된 구절들은 어떤 곳에서는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에 가깝고, 어떤 곳에서는 히브리 본문에 가깝고, 어떤 곳에서는 둘을 섞은 형태로 나타난다. 2장 23절의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대응 구절을 히브리 성경에서 특정하기 어렵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27장 9절이다. 유다가 받은 은 삼십이 토기장이의 밭 값이 되는 장면에서, 저자는 이 일이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의 성취라고 적는다. 그러나 인용된 내용은 스가랴 11장 12~13절에 훨씬 가깝다. 예레미야서에는 토기장이의 집과 밭을 사는 장면이 따로 있어(예레미야 18~19장, 32장) 두 예언서의 모티프를 합성했다는 해석이 있고, 예언서 두루마리 묶음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예레미야를 썼다는 해석도 있다.
족보의 마디를 맞추려 이름을 덜어 낸 사람과 예언서 출처를 뭉갠 사람이 같은 사람이다. 이 두 어긋남은 방향이 같다. 그에게 정확성은 논증이 향하는 주장에 종속된다. 어느 예언서에서 왔는지보다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형태가 앞서고, 실제 이름 수보다 열넷이라는 마디가 앞선다. 꼼꼼한 사람이라는 인상은 절반만 맞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 논증의 형태에 대해 꼼꼼한 사람이다.
이 저자가 자기 직업을 어떻게 보았는지 짐작할 만한 구절도 있다. 비유 담화를 마무리하며 그는 이런 말을 배치한다.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자기 보물 중에서 새것과 옛것을 내오는 집주인과 같다.
마태복음 13장 52절여기서 서기관은 문서를 다루고 율법을 해석하는 직업인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에만 있고, 오래전부터 저자의 자화상으로 읽혀 왔다. 새것과 옛것을 함께 내온다는 표현은 이 책이 실제로 하는 일과 정확히 겹친다. 물려받은 자료를 버리지 않고, 새로운 고백을 그 위에 얹는 작업이다.
또 하나. 23장 34절에서 예수는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겠다고 말한다. 병행하는 누가복음 11장 49절은 "선지자와 사도들"이라고 적는다. 파견 목록에 서기관을 올린 것은 마태복음이다. 저자는 자기 직군을 예수가 보내는 사람들의 명단에 넣었다.
그런데 같은 책 23장은 서기관을 향한 가장 맹렬한 공격문이기도 하다. 화 선언이 되풀이되는 그 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회칠한 무덤이자 독사의 자식으로 불린다. 자기 직군을 예수의 사자로 세우면서 동시에 그 직군을 가장 혹독하게 치는 것은 외부인의 태도가 아니다. 안에서 아는 사람의 태도다.
마태복음을 읽으면 돈의 단위가 자주 걸린다. 그리고 이 인상은 통계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장면의 비교로 확인된다.
대제사장들이 유다에게 배신의 대가를 약속하는 장면에서, 마가복음 14장 11절은 "돈을 주기로 약속"했다고만 적는다. 마태복음 26장 15절은 "은 삼십"이라고 액수를 적는다. 파견 담화에서 여행 준비를 금하는 대목도 그렇다. 마가복음 6장 8절은 돈을 가지지 말라 하고, 누가복음 9장 3절은 은을 말하며, 마태복음 10장 9절은 금과 은과 동 세 금속을 열거한다.
액수가 요점이 되는 이야기는 아예 마태복음에만 있다. 성전세를 내는 장면(17장 24~27절)이 그렇다. 두 드라크마를 걷는 사람이 오고, 물고기 입에서 나온 것은 한 스타테르다. 스타테르는 네 드라크마에 해당하므로 두 사람 몫이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단위 환산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18장의 용서 담화에 붙은 비유는 액수의 대비 자체가 논증이다. 한 종이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는다. 데나리온은 하루 품값이고(20장 2절), 한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쯤이다. 일만 달란트는 육천만 일당, 대략 이십만 년 치 노동에 해당한다. 그 종이 동료를 옥에 넣는 빚은 백 데나리온, 곧 백 일치다. 과장은 분명하지만 계산된 과장이다.
포도원 일꾼 비유(20장 1~16절)에서는 품값이 한 데나리온으로 고정되고, 주인이 사람을 부르러 나가는 시각이 이른 아침·제삼시·제육시·제구시·제십일시로 열거된다. 달란트 비유(25장 14~30절)는 다섯·둘·하나를 맡기고 배로 늘린 결과를 회수하는 구조로, 누가복음의 대응 비유(19장)가 므나라는 다른 단위를 쓰는 것과 대조된다.
여기서 오래된 추론이 나온다. 저자가 세리였으니 숫자와 돈에 밝다는 것이다. 본문에도 근거처럼 보이는 자리가 있다. 세관에 앉아 있다가 부름받은 사람을 마가복음 2장 14절과 누가복음 5장 27절은 레위라 부르는데, 마태복음 9장 9절은 마태라 부른다. 열두 제자 명단에서도 마태복음 10장 3절만 "세리 마태"라고 직업을 붙이며, 마가복음 3장 18절과 누가복음 6장 15절이 마태를 도마보다 앞에 두는 것과 달리 도마 뒤로 자기를 놓는다. 이 순서 바꿈과 직업 표기는 오래도록 겸손의 표지로 읽혔다.
그런데 이 추론은 두 겹의 전제 위에 서 있다. 첫째, 이 책의 저자가 사도 마태라는 전제다. 둘째, 화폐 어휘가 세리라는 직업의 흔적이라는 전제다. 두 전제 모두 그대로 두기 어렵다.
첫째 전제는 앞에서 본 이유들로 약하다. 익명의 본문, 2세기에 붙은 표제, 파피아스의 진술과 현존 본문의 불일치, 그리고 마가복음을 자료로 삼았다는 다수의 판단이 겹친다. 예수의 사역을 직접 본 제자가 그 자리에 없던 사람의 기록을 골격으로 삼아 축약하며 쓴다는 그림은 설명하기 까다롭다.
둘째 전제는 더 단순하게 무너진다. 화폐 어휘가 세리의 증거가 되려면 다른 직업군은 그런 어휘를 쓰지 않는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1세기 갈릴리와 시리아에서 데나리온과 달란트는 세관의 전문 용어가 아니라 시장의 일상어였다. 품값을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잡는 감각은 일한 사람 모두의 것이었고, 성전세 두 드라크마는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알던 액수였다. 그리스어로 유대인 회중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이 단위들은 예화를 또렷하게 만드는 재료였다.
결정적인 자리는 다른 곳에 있다. 세리라는 낱말이 이 책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보면 된다.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대하라.
마태복음 18장 17절권징 절차의 마지막 단계에서 저자는 공동체 밖으로 밀려난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에 비긴다. 세리를 경계 바깥의 이름으로 쓰는 관용구를 손대지 않고 남긴 것이다. 5장 46절에서도 세리는 사랑의 하한선을 보여 주는 예로 쓰인다. 반대 방향의 문장도 있다. 21장 31절은 세리와 창녀가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9장 10~13절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은 식탁을 변호한다.
같은 낱말이 두 방향으로 쓰인다는 것은, 그 낱말이 저자의 정체성이 아니라 저자가 다루는 재료라는 뜻이다. 세리 출신이 자기 과거를 각별히 의식해 쓴 글이라면 18장 17절의 관용구는 손질되거나 피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지 않았다.
세리 출신설이 약해지면 숫자와 액수에 대한 관심도 함께 사라지는가. 아니다. 관찰은 그대로 남고 설명만 바뀐다. 이 사람이 액수를 적는 이유는 회계 습관이 아니라 교육 효과다. 이십만 년 치 빚과 백 일치 빚을 나란히 놓으면 용서의 규모가 눈에 보인다. 스타테르가 정확히 두 사람 몫이면 이야기가 종결된다. 숫자는 직업의 잔재가 아니라 강의 도구다.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낱말이 하나 있다. 회중 또는 교회로 옮기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다. 네 복음서 가운데 이 낱말이 나오는 것은 마태복음뿐이며, 두 곳에 나온다(16장 18절, 18장 17절). 예수의 활동 당시에 제도로서의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이 낱말은 저자가 살던 시대 공동체의 언어가 본문에 들어온 자리로 읽힌다.
그 두 번째 자리에 절차가 붙어 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먼저 둘만 있는 데서 권면하고, 듣지 않으면 두세 증인을 데리고 가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회중에 알린다(18장 15~17절). 증인 조항에는 신명기 19장 15절이 인용된다. 이것은 설교의 문장이 아니라 규정의 문장이다. 단계가 있고, 각 단계의 요건이 있고, 마지막 처분이 명시된다.
같은 성향이 이혼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마가복음 10장 11~12절은 예외 없이 금한다. 마태복음은 두 곳에서 "음행한 이유 외에는"이라는 예외를 단다(5장 32절, 19장 9절). 이 차이는 신학의 차이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문장의 성격 차이가 더 눈에 띈다. 예외 조항은 규범을 실제 사건에 적용할 사람이 필요로 하는 장치다. 판결해야 하는 사람만 예외를 적는다.
다만 예외를 적는 순간 새로운 문제가 열린다. '음행'의 범위를 다투는 해석이 시작되고, 그 해석사는 지금도 닫히지 않았다. 규정을 명료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오히려 무한한 사례 판정을 불러들이는 구조다. 이것은 규정을 쓰는 사람이 늘 치르는 대가이며, 저자가 그 대가를 예상했는지는 본문으로 알 수 없다.
맹세 금지 대목도 같은 결이다(5장 33~37절).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자기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나씩 열거해 봉쇄한다. 이렇게 촘촘히 막는 사람은 맹세의 형식을 바꿔 구속력을 조절하던 당시의 해석 관행을 아는 사람이다. 매고 푼다는 표현(16장 19절, 18장 18절)도 금지와 허용을 판정하는 랍비 문헌의 용어와 겹친다.
그리고 5장 17~20절이 있다. 율법의 한 점 한 획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선언 뒤에 이어지는 것은 완화가 아니라 상향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아니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못 박는다. 이 저자가 생각하는 개혁의 방향은 기준을 낮추는 쪽이 아니다.
규정 취향을 개인의 기벽으로만 보면 절반을 놓친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뒤 유대교의 중심은 성전 제사에서 율법 해석으로 옮겨 갔고, 회당의 주도권을 둘러싼 재편이 진행되었다.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유대인 공동체는 그 재편 속에서 자기 정통성을 입증해야 했다. 그래서 저자는 율법을 버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했고(5장 17절), 동시에 회당의 사법 기능을 대신할 자체 절차가 필요했다(18장). 예외 조항과 단계별 권징은 그 이중 과제의 산물이다. 성향과 상황이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 문장은 이렇게 촘촘해진다.
어휘의 분포는 기질을 비교적 정직하게 드러낸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휘포크리테스는 본래 가면을 쓰고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뜻했다. 오늘날 다수 학자가 쓰는 비평 본문에서 이 낱말은 신약 전체에 열일곱 번 나오는데, 그중 열세 번이 마태복음에 있다. 마가복음에 한 번, 누가복음에 세 번이다.
심판의 어휘도 마찬가지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 여섯 번 나오고(8장 12절, 13장 42절, 13장 50절, 22장 13절, 24장 51절, 25장 30절) 누가복음에 한 번 나온다. 바깥 어두운 데, 풀무불, 알곡과 쭉정이의 분리가 되풀이된다. 23장은 화 선언이 연달아 쏟아지는 장으로, 회칠한 무덤과 독사의 자식이라는 표현이 여기서 나온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호세아 6장 6절을 두 번 끌어온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한다는 구절이다. 신약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마태복음뿐이고, 그것도 두 번이다(9장 13절, 12장 7절). 두 곳 모두 규정을 앞세우는 상대에게 맞서 관용을 변호하는 자리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겠다.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낮다. …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이 대목도 마태복음에만 있다.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 짐을 가볍게 하는 예수를 기록으로 남긴 것은 이 저자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는 문장(5장 7절)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는 문장(18장 21~22절)도 그렇다.
그러나 용서를 가르치는 그 담화의 결말을 보라.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을 참지 못한 대가로 옥에 넘겨지고, 담화는 마음에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그와 같이 하실 것이라는 경고로 닫힌다(18장 34~35절). 자비의 가르침이 형벌 경고로 봉인된다.
이 배치에서 읽히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순서다. 자비가 몸에 붙은 사람은 그것을 두 번 인용해 방어할 필요가 없다. 인애를 원한다는 구절을 두 번 끌어오고, 온유한 예수를 자기만 기록하고, 그러면서 이를 갊을 여섯 번 쓰고 위선자를 열세 번 부르는 사람은 자기 안의 준엄함과 싸운 사람이다. 자비는 그에게 자연스러운 성정이 아니라 성경으로 뒷받침해 스스로에게 관철시켜야 하는 명령이었다. 용서 담화가 형벌로 끝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는 자비조차 강제력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어휘를 통제하는 방식도 이 인상을 거든다. 마태복음은 "천국"에 해당하는 표현을 서른두 번 쓰고 "하나님의 나라"를 네 번만 쓴다(12장 28절, 19장 24절, 21장 31절, 21장 43절). 전통적 설명은 신명을 직접 부르지 않으려는 유대교의 완곡어법이다. 그러나 같은 책이 '하나님'이라는 낱말을 자유롭게 쓰기 때문에 회피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반론이 있고, 하늘과 땅을 대비시키는 신학적 장치로 보는 해석이 제시되어 왔다. 어느 설명을 택하든 남는 사실은 하나다. 이 저자는 자료에서 물려받은 표현을 서른두 번에 걸쳐 일관되게 바꿔 놓았다. 습관이 아니라 방침이다.
준엄한 기질에는 대가가 따랐다. 빌라도 앞의 군중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말하는 장면(27장 25절)은 마태복음에만 있다. 저자의 자리에서 이 문장은 유대인이 유대인을 겨눈 예언서식 질책의 문법에 속한다. 같은 책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애가가 나오고(23장 37절), 저자 자신이 유대 전통 안에서 성경으로 논증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그 문법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문장은 저자가 상정한 독자 범위를 넘어 유통되었고, 이후 오랜 세월 유대인 집단에 대한 책임 전가의 근거로 인용되었다. 안에서 벌어진 논쟁의 언어가 밖으로 나갈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를 이 한 구절이 보여 준다.
6장 1~18절은 경건의 실천을 세 항목으로 다루는데, 세 항목의 결론이 모두 같다. 구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하며, 금식은 얼굴에 표를 내지 말라고 한다.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가 갚으신다는 문장이 세 번 반복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를 이 저자는 특별히 못 견딘다. 위선자라는 낱말이 이 대목에서만 세 번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호칭에 대한 태도도 같다. 23장 8~10절은 랍비라 불리지 말고, 지도자라 불리지 말고,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한다.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쓴 사람이 교사 호칭을 금지하는 문장을 자기 책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저자의 이름이 없다. 누가는 서문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요한복음은 마지막에 기록자를 지목하며, 바울은 편지마다 첫 줄에 이름을 적는다. 마태복음은 그러지 않는다.
이 침묵을 겸손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1세기 유대 문헌에서 익명은 예외가 아니라 흔한 관례였고, 저자를 밝히지 않는 것이 곧 자기를 낮추는 행위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익명이라는 사실과, 은밀함을 세 번 반복해 편집하고 교사 호칭 금지를 배치한 손이 같은 사람의 것이라는 점은 남는다. 둘 사이에 인과가 있다고 증명할 수는 없어도, 두 선택이 서로 어긋나지는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 자리다. 이 저자는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았지만 자기 직분은 남겼다. 서기관을 예수가 보내는 사람들의 명단에 올렸고(23장 34절),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을 새것과 옛것을 내오는 집주인에 비겼다(13장 52절). 개인은 숨기고 역할은 정당화한다. 이것은 자기 자랑을 삼가는 사람의 태도이면서, 동시에 제도를 세우는 사람의 자기 이해다. 그가 세우려 한 것은 자기 명성이 아니라 가르치는 직무의 정당성이었다.
네 복음서의 결말은 서로 다르다. 마가복음은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서 무덤을 떠난 여인들의 두려움으로 끝난다(16장 8절. 그 뒤에 붙은 긴 결말은 후대의 부가로 보는 것이 다수설이다). 누가복음은 승천으로, 요한복음은 기록되지 않은 일들이 더 있다는 진술로 닫힌다.
마태복음의 끝은 명령이다.
그러니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며,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장 19~20절동사가 셋이다. 제자로 삼고,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지막 동사에 붙은 목적어가 이 책의 정체를 밝힌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은 앞선 스물여섯 장에 놓인 다섯 담화다. 산상수훈과 파견 담화와 비유 담화와 공동체 담화와 종말 담화가 곧 그 교재이며, 종결 형식구는 단원의 경계 표시였고, 열넷과 다섯과 셋은 그 교재의 목차였다.
그렇다면 이 책은 예수의 전기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가르쳐 지키게 하기 위한 교과 편성이다. 저자가 마가복음의 생생한 장면 묘사를 잘라 내고 담화를 늘린 이유, 액수와 시각을 적어 예화를 또렷하게 만든 이유, 권징 절차와 이혼 예외를 조항으로 적어 둔 이유가 마지막 문장에서 한꺼번에 설명된다.
본문이 함축하는 사람의 윤곽은 이렇게 모인다. 물려받은 것을 버리지 못해 새것과 함께 다시 배열하는 사람. 합계가 맞지 않아도 형태를 지키는 사람. 판정해야 할 일이 생기면 조항을 적어 두어야 안심하는 사람. 겉과 속이 다른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 못 견딤이 자기에게 먼저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아 인애를 두 번 인용한 사람. 그리고 은밀히 하라는 문장을 세 번 배치하고 자기 이름은 적지 않은 사람.
그 이름은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스물여덟 장의 배열이 말해 준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바란 형태였을 것이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던 문장을, 그는 자기 책의 표제에서부터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