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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 구조 분석

청빙 없이 시작되는 목회
— 한국 개신교 교회 개척의 소명과 소유 구조

교회 개척이 개인사업인지 하나님의 사명인지 묻는 질문은, 목사의 마음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원리상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답이 나오는 질문은 따로 있다. 누가 개척 비용을 대는가, 세운 교회는 누구의 것이 되는가, 그 자리를 떠날 때 무엇을 가지고 나가는가.

1950년 한국의 개신교 교회는 3,114곳이었다. 1990년에는 35,819곳이 되었다. 마흔 해 사이 열한 배가 넘게 늘어난 이 곡선은 세계 교회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같은 기간 한국은 농촌 사회에서 도시 산업 사회로 옮겨 갔고, 교회는 그 이동의 종착지마다 세워졌다.

한국 개신교 교회 수, 1950–1990

한국종교사회연구소가 1993년 발표한 집계

19503,114
19605,011
197012,866
198021,243
199035,819
교회 수는 1970년대에만 8,377곳, 1980년대에 14,576곳이 늘었다. 증가분의 대부분은 도시에서 발생했다.

이 성장은 우연이 아니라 정책의 산물이기도 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1970년에 5천 교회 150만 신자를 목표로 하는 5개년 계획을 세우고 해마다 300개 교회를 새로 세우겠다고 결의했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1974년 엑스플로 74, 1977년 민족복음화 대성회 같은 초대형 집회가 연달아 열렸고, 교단들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수치 목표를 내걸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은 개인의 결단이자 동시에 교단이 독려하는 사업 목표였다.

그런데 목표를 세운 주체와 비용을 감당한 주체가 달랐다. 이 어긋남이 오늘 한국 교회의 구조를 거의 전부 설명한다.

자립 원칙이 남긴 것 — 개척 비용은 누구도 대지 않는다

한국 개신교의 초기 선교 원칙은 네비우스 방법으로 불린다. 중국에서 40년간 활동한 미국 선교사 존 리빙스턴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가 정리한 방법론으로, 1890년 언더우드의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해 북장로회 선교사들에게 소개했고 1891년 북장로회 선교회 규칙과 1893년 장로교선교부공의회 정책에 반영되었다. 핵심은 세 가지 자(自)다. 토착 교인이 토착민에게 전도하고(자전), 토착 교인이 교역자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을 책임지며(자립), 토착 교인이 교회 문제를 스스로 처리한다(자치).

이 원칙은 선교사 자금에 의존하는 교회가 선교사가 떠나면 무너진다는 경험에서 나왔다. 실제로 한국 교회는 이 원칙 덕분에 식민지기와 전쟁을 통과하며 외부 지원 없이 자기 힘으로 존속하는 능력을 길렀다. 여기까지는 널리 합의된 평가다.

문제는 자립 원칙이 무엇에 관한 원칙이었는지가 시간이 지나며 바뀌었다는 데 있다. 네비우스가 말한 자립은 선교사 자금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오늘 한국 교단이 쓰는 자립은 교단 지원 없이 개별 교회가 생존하는 것을 뜻한다. 같은 낱말이지만 지시하는 대상이 다르다. 앞의 자립에는 대체할 주체가 있었다. 선교사가 빠지면 현지 교인 공동체가 들어선다. 뒤의 자립에는 대체할 주체가 없다. 교단이 빠지면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개척을 시작한 개인이다.

한 낱말이 두 뜻으로 쓰이는 자리

선교 원리로서의 자립은 공동체가 스스로 선다는 뜻이었고, 오늘의 자립은 목회자 개인이 스스로 버틴다는 뜻이다. 앞의 뜻에서 뒤의 뜻으로 미끄러지는 동안 재정 책임의 주체가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옮겨 갔지만, 그 이동은 신학적으로 논증된 적이 없다. 자립이라는 단어가 그대로였기 때문에 이동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개척은 자본이 필요한 일이 되었다. 상가 보증금과 월세, 인테리어와 음향 설비, 강대상과 의자, 간판과 전단. 교단은 개척을 독려하되 그 비용을 대지 않았다. 대출과 사재, 배우자의 소득, 처가와 본가의 자금이 그 자리를 메웠다. 개척교회의 재무제표를 그린다면 초기 투자와 운전자금 항목이 자영업 창업과 구별되지 않는다.

여기서 개인사업이라는 규정이 절반쯤 성립한다. 다만 이 규정은 아직 동기가 아니라 자금 조달 방식만을 설명한다. 소명은 자금 조달 방식을 지정하지 않으므로, 이것만으로는 개척이 사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더 깊은 곳을 봐야 한다.

칼뱅이 소명을 둘로 나눈 이유

개신교에서 목사직의 정당성은 소명(calling)에 근거한다. 그런데 종교개혁 전통이 소명을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보면, 오늘 한국에서 통용되는 용법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4권 3장 11절에서 목사의 부름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은밀한 부름이다. 야심이나 탐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교회를 세우려는 소원으로 이 직분을 받는다는, 자기 마음의 증언이다. 칼뱅은 이 부름에 대해 한 가지를 명확히 한다. 교회는 이 부름의 증인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외적이고 공적인 부름으로, 교회의 공적 질서에 속한다. 누구를 세울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 의해, 어떤 예식으로 세울 것인가가 여기에 속한다.

칼뱅이 다룬 것은 교회의 공적 질서에 관한 외적이고 형식을 갖춘 부름이며, 모든 목사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식하되 교회가 그 증인이 되지 못하는 은밀한 부름은 그 논의에서 따로 떼어 놓았다. 『기독교 강요』 4권 3장 11절의 논지

이 구분의 실천적 함의는 단순하다. 내면의 확신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며, 교회가 검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외적 부름뿐이라는 것이다. 장로교 정치 원리에서 이 외적 부름이 취하는 형태가 청빙이다. 이미 존재하는 회중이 특정한 사람을 자기들의 목사로 부르고, 노회가 그 부름을 심사하고 승인한다. 목사가 회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목사를 부른다는 방향성이 이 절차의 핵심이다.

개척은 이 절차의 방향을 뒤집는다. 부를 회중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개척자는 내적 확신만을 가지고 사역을 시작하고, 회중은 그 이후에 모인다. 즉 외적 부름이 사역의 전제가 아니라 결과가 된다.

이것 자체는 반칙이 아니다. 회중이 없는 곳에서 교회가 생기려면 누군가는 회중 없이 시작해야 한다. 사도행전의 전도 여행이 그랬고 선교사 파송이 그렇다. 다만 이 경우 전통은 청빙 대신 파송이라는 다른 형태의 외적 부름을 요구해 왔다. 보내는 교회가 있고, 심사하는 기관이 있고, 지원하는 예산이 있고, 돌아와 보고하는 절차가 있다. 파송은 청빙의 결여를 메우는 장치다.

한국 도시의 개척은 청빙도 파송도 아닌 제3의 형태다. 파송하는 교회가 없고, 심사하는 절차가 형식에 그치며, 지원 예산이 없고, 보고 의무도 없다. 노회는 개척 사실을 사후에 등록할 뿐이다. 외적 부름의 자리가 비어 있고, 그 빈자리를 무엇이 메우는가.

외적 부름의 자리를 대신 채우는 것

사람이 모이는가. 헌금이 들어오는가. 임대료를 감당하는가. 이 세 가지가 소명의 진위를 사후에 판정하는 실질 기준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 기준은 자영업의 성패 기준과 형식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개척이 사업을 닮는 결정적 지점은 자금 조달이 아니라 여기다. 검증 절차가 없어진 자리에 시장 성과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교회 개척은 하나님의 사명이다"라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소명이 개인의 내면에서 종결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개혁교회 전통 자체가 그 전제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개척을 소명으로 옹호하는 논증과 개혁주의 교회론은 같은 편이 아니다. 한국 장로교 대다수가 자기 정체성으로 삼는 신학 전통이, 자기들이 가장 왕성하게 수행한 사역 형태와 어긋나 있다.

총유라는 이름의 공백

세운 교회는 누구의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한민국 법의 답은 명확하다.

대법원은 2006년 4월 20일 전원합의체 판결(2004다37775)에서 교회를 법인 아닌 사단으로 보고, 교회 재산은 교인들의 총유에 속한다고 정리했다. 총유란 단체 구성원 전원이 공동으로 소유하되 개별 지분이 없는 형태다. 이 판결은 종전에 인정되던 교회 분열 법리를 폐기하고, 교단 탈퇴에는 의결권 있는 교인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며 그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이탈한 교인들은 종전 교회 재산에 대한 권리를 잃는다고 판시했다.

법적 귀결은 세 가지다. 첫째, 담임목사는 교회 재산의 소유자가 아니다. 둘째, 개척자라는 사실은 소유권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셋째, 목사는 교회의 대표자일 뿐 교회 자체가 아니므로, 목사들 사이에서 오간 교회 인수 대금이나 권리금은 그 두 사람 사이의 채권 관계일 뿐 교인들을 구속하지 않는다.

이 판결에 대해 한국 교회 안에서 나온 평가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신앙 공동체로서 교회의 권위를 존중해 일반 단체와 구별되는 법리를 적용해 오던 태도에서 교회 분쟁도 결국 재산 다툼과 다르지 않다고 정면으로 인정한 전환이라는 지적이다. 법원이 교회를 세속화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분쟁 양상이 법원으로 하여금 일반 법리를 적용하게 만들었다는 순서에 가깝다.

그런데 소유와 지배는 다르다. 총유는 소유의 형식일 뿐 지배의 형식이 아니다. 지분이 없으므로 교인 개인은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없고, 매각이나 처분에는 총회 결의가 필요하며, 그 총회를 소집하고 의안을 상정하는 권한은 당회장인 담임목사에게 있다. 재산은 전원의 것이고 결정은 한 사람의 것이다.

주식회사와 정확히 어긋나는 지점

주식회사에서 소유는 분할 가능하고 이전 가능하며 잔여재산 청구권을 동반한다. 그래서 창업자는 지분을 팔고 나갈 수 있다. 교회에서 소유는 분할 불가능하고 이전 불가능하며 청구권을 동반하지 않는다. 개척자는 30년을 바쳐 교회를 세워도 지분이 없고, 은퇴할 때 가지고 나갈 것이 없다.

대형교회를 대기업에 비유하는 화법은 이 차이를 지운다. 문제의 상당 부분은 교회가 기업처럼 운영되어서가 아니라, 기업이라면 당연히 갖췄을 소유권 이전 장치를 갖추지 못한 채 기업만 한 자산을 쌓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소유권 없이 축적된 자산과 지배권만 남은 개척자. 이 조합이 두 가지 우회로를 만들었다.

첫째 우회로 — 교회가 매물이 되는 시장

2011년 4월, 온라인에서 이뤄지는 교회 거래의 실태가 일반 일간지 지면에 보도되면서 논란이 됐다. 교회 부동산 거래를 중개하는 한 사이트에는 전년 한 해 810여 건의 매물이 올라왔고, 2011년 1월부터 4월 중순까지 등록된 매물도 270건에 달했다. 거래 대상에는 건물과 시설비뿐 아니라 권리금이 포함되었다. 강대상과 의자 같은 설비 비용에 더해 입지 조건과 출석 인원을 셈에 넣은 금액이었다.

이 시장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존속한다. 교회 부동산과 목회자 청빙 정보를 함께 다루는 기독교 생활정보 사이트들이 여러 곳 운영되고 있고, 매물 문구에는 시설 완비 여부와 사택 포함 여부, 시설비·권리금 유무가 명시된다. "후임자를 찾습니다"라는 표현이 매물 게시판의 관용구로 자리 잡았다.

거래의 양변에 서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이 시장의 성격을 규정한다. 파는 쪽에는 은퇴를 앞둔 개척 1세대가 있다. 30년을 목회했지만 총유 재산에 지분이 없으므로 교회에서 노후 자금을 받을 근거가 없다. 사는 쪽에는 청빙받을 교회를 찾지 못한 목사가 있다. 교회 수보다 목사 수가 많아진 결과다.

양변의 이해가 정확히 맞물린다. 한쪽은 30년의 노동을 현금화할 통로가 필요하고 다른 쪽은 강단이 필요하다. 법적으로는 교인을 구속하지 않는 거래이므로 매수자가 인수하는 것은 사실상 건물 임차권과 기존 회중이 흩어지지 않을 개연성뿐이다. 권리금이 값을 매기는 대상이 바로 그 개연성이다.

이 시장을 목사 개인의 타락으로 설명하는 것은 설명력이 약하다. 노후 소득 보장 장치가 제도적으로 없고, 목사 공급이 회중 수요를 초과하며, 개척 자금을 개인이 조달했으므로 회수 욕구가 발생한다. 세 조건이 갖춰지면 시장은 누가 기획하지 않아도 형성된다. 실제로 이 시장은 어느 교단도 승인한 적이 없고 모든 교단이 공식적으로 부인하지만 계속 존재한다.

공급과 수요의 역전은 통계로 확인된다.

예장합동이 제110회 총회에 보고한 2024년 말 통계에서 전체 교인은 224만 2,844명으로 전년보다 7,686명 줄었고, 소속 교회는 44곳 감소했다. 같은 기간 소속 목사는 약 270명 늘었다. 교회와 교인은 줄고 목사는 느는 이 어긋남은 특정 연도의 예외가 아니라 여러 교단에서 반복되는 형태다.

2025년 각 교단 정기총회에 보고된 교세는 일제히 감소를 가리켰다. 예장통합은 219만 919명으로 10년 연속 줄었고, 기독교대한감리회는 110만 6,385명으로 1998년 수준을 밑돌았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합동 −17%, 통합 −22%, 고신 −18%, 기장 −33%다. 그러나 여러 교단에서 목사와 장로 수는 오히려 늘었다.

공급 쪽 압력은 신학교에서 나온다. 예장합동과 통합 산하 신학대학원 11곳에서 해마다 1,000명에 가까운 졸업생이 나온다. 2024년 기준 합동 산하 신대원 졸업생이 440명, 통합 산하가 494명이었다. 이 인원이 매년 새로 강단을 찾는다. 청빙 자리는 그만큼 생기지 않으므로 남는 경로는 개척이거나 인수다.

공급 곡선이 꺾이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다만 이 압력은 최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사고시 응시생이 1,000명선 아래로 내려갔고, 서울 소재 신대원조차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공급 과잉이 해소되면 권리금이 붙는 매물 시장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 예측이 틀렸음을 확인하는 지표는 단순하다. 목사 후보생이 계속 줄어드는데도 교회 매물 게시판의 권리금 표기가 유지되거나 늘어난다면, 시장을 지탱하는 힘은 공급 과잉이 아니라 은퇴 소득 공백 쪽이었다는 뜻이 된다.

둘째 우회로 — 지배권의 승계

매각이 하나의 출구라면 승계는 다른 출구다. 세습이라는 말이 쓰이지만 법적으로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상속은 소유권의 이전을 뜻하는데, 담임목사에게는 이전할 소유권이 없다. 넘어가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지배다. 당회를 소집하고 인사를 결정하며 예산을 편성하고 강단을 배타적으로 사용하는 권한.

예장통합은 2013년 제98회 총회에서 세습 금지를 결의했고, 이듬해 제99회 총회에서 교단 헌법 제2편 28조 6항을 신설했다. 규범이 먼저 만들어져 있었다는 점에서 이후의 경과는 규범과 현실 중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2017년 명성교회가 김삼환 원로목사의 아들 김하나 목사를 담임으로 청빙하면서 이 조항이 시험대에 올랐다. 경과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판결의 결론이 아니라 권한의 흐름이다. 교단이 스스로 만든 금지 규범을 교단의 최고 의결기구가 개별 사안에 대한 유권 해석으로 무력화했고, 국가 법원은 그 해석 권한이 총회에 있다는 이유로 개입을 자제했다. 세속 법정은 교회 자율을 존중해 물러섰고 교회 법정은 총회 표결에 굴복했다. 규범을 집행할 주체가 양쪽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920 대 284가 말하는 것

수습안을 통과시킨 총대의 다수는 대형교회 목사가 아니다. 예장통합 교회의 70%는 교인 100명 미만이며, 총회 총대의 구성 또한 그 분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즉 세습으로 이익을 얻지 않는 사람들이 세습을 승인했다.

이 표결을 개인의 굴복으로 읽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총대들이 실제로 저울에 올린 것은 규범의 관철과 교단 분열의 비용이었다. 명성교회 규모의 교회가 이탈하면 총회 재정과 산하 기관, 신학교 운영이 직접 타격을 받는다. 재정 기여도가 곧 교회법상 발언권으로 전환되는 구조에서, 규범은 그 구조를 이길 수 없다.

대형교회를 대기업으로, 작은 교회를 중소기업으로 비유하는 화법이 놓치는 것이 이 지점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는 계약과 시장을 매개로 하지만, 대형교회와 작은 교회는 같은 의결기구에서 동일한 한 표를 행사한다. 형식적 평등이 실질적 종속과 결합해 있다는 점에서 이 구조는 기업 생태계보다 정치체에 가깝다.

0.2%가 21%를 가진 분포

교회 규모의 분포는 기업 생태계의 비유가 성립하는지를 가늠할 직접 증거다. 예장통합이 2019년 기준으로 집계한 규모별 분포는 다음과 같다.

교회 수의 비중과 교인 수의 비중

예장통합 2019년 교세 통계 기준. 위쪽 두 줄은 교회 수 기준 비중, 아래 두 줄은 그 규모대에 속한 교인의 비중이다.

30명 이하 교회33.8%
1만 명 초과 교회0.2%
위 교회의 교인2.2%
위 교회의 교인21.0%
교인 30명 이하 교회는 전체 교회의 33.8%를 차지하지만 그 교회들에 속한 교인은 전체의 2.2%다. 교인 1만 명을 넘는 교회는 전체의 0.2%지만 전체 교인의 21.0%를 품는다. 30명 이하 초소형 교회의 비중은 2010년 23.8%에서 2019년 33.8%로 10.0%포인트 늘었고, 같은 기간 가장 크게 줄어든 것은 101~300명 규모의 중간층이었다.

이 분포에는 이름이 필요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구도가 아니라, 허리가 빠진 채 양극단만 두터워지는 구조다. 2022년 기준 예장통합에서 교인 100명 미만 교회는 전체의 70%, 200명 미만은 82%였다. 2024년 말에는 소속 교회 9,446곳 가운데 100명 이하가 6,845곳, 30명 이하가 3,874곳으로 전체의 41%였다. 재정 기준으로 보면 예장합동 교회자립개발원이 2018년 총회에 보고한 자료에서 연간 예산 3,500만 원 미만인 교회가 42%였다.

기업 생태계와의 결정적 차이는 퇴출 기제에 있다. 시장에서 30명 규모의 사업체가 40년간 적자를 내며 존속하는 일은 드물다. 교회에서는 흔하다. 폐업 대신 겸업이 선택되기 때문이다.

월 41만 3천 원이 반증하는 것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가 2024년 발표한 조사에서, 미자립교회 목회자의 월 사례비 평균은 41만 3천 원이었다. 사례비를 아예 받지 못하는 교회가 21.5%였고 연회 전체 목회자의 평균 사례비는 185만 9천 원이었다. 미자립교회 목회자 가정의 수입은 후원금 34만 7천 원, 연회·지방회 지원금 5만 3천 원, 이중직 수입 40만 1천 원, 배우자의 경제활동 79만 3천 원을 모두 합쳐도 근로자 1인의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했다. 은퇴 후 경제적 어려움을 걱정한다고 답한 목사가 63.8%, 은퇴 준비 수단이 전혀 없다는 응답이 14.8%였다.

목회데이터연구소가 2021년 예장 통합·합동 등 소속 목회자 6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작은 교회 목회자의 48.6%가 이중직을 경험했고, 47.7%가 사례비를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중직 선택 사유의 60.5%는 생계였다. 종사한 업종은 노무직 22.3%, 자영업 15.9%, 택배 15.0%, 학원 14.1%, 대리운전 9.1% 순이었다.

사업 가설이 설명하지 못하는 다수

개척이 개인사업이라는 규정은 이 숫자들 앞에서 무너진다. 40년간 월 41만 원을 받으며 택배 일로 생계를 잇는 자영업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업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다.

사업 가설이 성립하는 범위는 분포의 오른쪽 끝이다. 자산이 축적되고 지배권이 자산화되는 지점, 즉 매물이 되거나 승계 대상이 되는 규모부터다. 그 아래의 다수에게 개척은 회수 불가능한 매몰비용이며, 그럼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소명 개념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가장 강한 증거다.

따라서 개인사업이냐 사명이냐는 물음에 대한 정직한 답은 둘 중 하나가 아니다. 같은 제도 안에서 두 가지가 규모에 따라 갈라져 나타난다. 그리고 갈라지는 지점을 만든 것은 각자의 신앙 수준이 아니라, 소유권 없이 지배권만 쌓이게 설계된 구조다.

국가는 이것을 사업으로 보지 않기로 했다

같은 질문을 국가가 다룬 적이 있다. 2015년 12월 개정 소득세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2년의 유예를 거쳐 2018년 1월 1일부터 종교인 소득에 대한 과세가 시행됐다. 정부 수립 이후 종교인 과세 의무가 명문화된 적이 없었고 성직자에게 세금을 요구하지 않는 관행이 이어져 온 데 대한 정리였다.

제도의 설계에는 이 글의 질문에 대한 국가의 답이 들어 있다.

기타소득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이 활동이 고용도 사업도 아니라는 판단이다. 그 판단 자체는 신학적으로 이상하지 않다. 목사의 활동은 노동 계약으로 환원되지 않고 이윤 추구로도 환원되지 않는다는 전통적 이해와 형식적으로 부합한다.

문제는 두 번째 항목이다. 비과세 대상인 종교활동비의 규모를 종교단체가 스스로 정한다는 것은, 총 보수 가운데 과세분과 비과세분의 비율을 지급 주체가 설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2018년 3월 제기된 헌법소원(2018헌마319)이 문제 삼은 지점이 정확히 여기였다. 종교활동비를 종교단체가 임의로 정하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무제한의 비과세가 가능해지고, 세무조사 범위 제한과 결합해 일반 국민의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이었다.

면세 재량이 보수 설계 권한으로 바뀌는 자리

사례비를 줄이고 활동비를 늘리는 방식으로 과세 대상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담임목사의 실질 보수를 설계 가능한 변수로 만든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설계를 하는 기구는 담임목사가 의장을 맡는 당회다.

국가는 교회를 사업체로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동시에 사업체라면 규제되었을 임원 보수 설계 권한을 규제 바깥에 두었다. 사업이 아니라는 판정이 사업보다 넓은 재량으로 귀결되는 구조다.

이 제도 설계를 두고 종교계가 특혜를 받았다는 비판과, 시행 자체를 수용한 양보였다는 교계의 설명이 맞서 왔다. 어느 쪽 평가를 택하든 확인되는 사실은 하나다. 개척과 목회를 사업으로 볼 것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이미 한 차례 공적으로 답해졌고, 그 답은 규정의 문언과 실제 작동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형태로 남았다.

답이 나오는 질문으로 바꾸면

개척이 개인사업인지 사명인지를 묻는 방식에는 구조적 결함이 있다. 두 개념이 같은 층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명은 동기를 서술하는 개념이고 사업은 조직 형태를 서술하는 개념이다. 층위가 다른 두 개념을 양자택일로 묶으면, 어느 쪽을 택해도 상대 층위의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더 실질적인 문제는 검증 가능성이다. 동기를 묻는 질문은 원리상 외부에서 판정할 수 없다. 칼뱅이 은밀한 부름에 대해 교회는 그 증인이 아니라고 못 박은 것도 같은 이유다. 그가 검증 가능한 영역으로 남겨 둔 것은 오직 외적이고 공적인 절차뿐이었다.

그러므로 판정 가능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띤다. 이 물음들에는 각각 문서로 확인되는 답이 있다.

이 다섯 가지는 신앙의 진정성과 무관하게 답이 정해진다. 그리고 앞의 여러 사실이 보여주듯, 한국 개신교의 표준 설정값은 다섯 항목 모두에서 개별 교회와 담임목사 개인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 설정값은 네비우스 원칙이 자립을 가르친 이래 한 번도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지 않았다.

대형교회가 대기업인가라는 물음도 같은 방식으로 옮겨진다.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규모에 상응하는 견제 장치가 있는가의 문제다. 상장회사에는 이사회와 감사와 공시 의무와 소액주주 소송권이 있다. 교인 3만 명의 교회에는 그중 어느 것에도 대응하는 장치가 없다. 총유는 소유의 형식일 뿐 통제의 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비유하는 화법이 부당한 것은 교회를 모욕해서가 아니라, 대기업이 감당하는 통제를 교회가 감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려 주기 때문이다.

작은 교회를 중소기업에 비유하는 화법도 마찬가지로 어긋난다. 중소기업은 폐업할 수 있고, 파산 절차가 있고, 실패한 창업자에게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 작동한다. 월 41만 원의 사례비로 40년을 버티고 노후 준비 수단이 전혀 없는 목회자에게는 그중 무엇도 없다.

그리스도의 집이라는 규정과 사업체라는 규정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신학적 정체성은 조직 형태를 면제해 주지 않으며, 조직 형태의 결함은 신학적 정체성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한국 개신교가 40년간 겪은 문제의 상당 부분은 앞의 규정으로 뒤의 질문에 답하려 한 데서 나왔다. 하나님의 집이므로 회계를 공개할 필요가 없고, 소명받은 자리이므로 후임 선정에 절차가 필요 없으며, 세속 기업이 아니므로 지배구조를 논할 이유가 없다는 식이다.

칼뱅이 소명을 둘로 나눈 것은 정확히 그 혼동을 막기 위해서였다. 은밀한 부름은 하나님과 개인 사이에 있고 교회는 그것의 증인이 되지 못한다. 교회가 다룰 수 있는 것은 절차뿐이다. 절차를 다루기를 그만두면 그 자리에 소명이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절차를 대신할 성과 지표가 들어선다. 사람 수, 헌금 액수, 건물 크기.

자료: 한국종교사회연구소 교회 수 집계(1993), 대법원 2006. 4. 20. 선고 2004다37775 전원합의체 판결, 칼뱅 『기독교 강요』 4권 3장,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합동 총회 교세 통계,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 목회자 실태조사(2024), 목회데이터연구소 목회자 이중직 조사(2021), 소득세법 및 헌법재판소 2018헌마319 사건 기록, 각 교단 총회 회의록과 관련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