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마리아, 성경 66권과 73권. 널리 도는 대조표는 항목을 늘릴수록 정확도가 떨어진다. 실제로 갈라지는 지점은 두 곳이고, 나머지는 그 두 곳에서 흘러나온 결과이거나 번역이 만든 오해다.
두 교회를 비교하는 글은 대개 대조표로 시작한다. 왼쪽에 개신교, 오른쪽에 천주교를 놓고 성경 권수, 성직자 호칭, 고해성사 유무, 마리아의 지위를 한 줄씩 채워 넣는 방식이다. 이 형식은 읽기 쉽고 외우기 쉽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부정확하다. 표를 만들려면 양쪽 모두 하나의 통일된 교리 체계여야 하는데, 그 조건을 충족하는 쪽은 한쪽뿐이기 때문이다.
한국어에서 흔히 쓰는 ‘기독교와 천주교’라는 짝은 이미 한 번 틀어져 있다. 천주교도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이므로 기독교다. 국가데이터처가 인구주택총조사 종교 문항을 설계할 때 선택지를 ‘기독교(개신교)’와 ‘기독교(천주교)’로 나란히 쓴 것은 이 때문이다. 통계 설계자가 택한 이 표기가 일상 어법보다 정확하다.
더 큰 문제는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에 있다. 천주교는 로마 주교를 정점으로 하는 하나의 교도권을 가지며, 무엇이 이 교회의 가르침인지 물으면 답할 기구가 존재한다. 개신교에는 그런 기구가 없다. 루터교, 성공회, 장로교와 개혁파, 회중교회, 침례교, 감리교, 오순절 계열은 세례의 대상과 방식, 성찬에서 일어나는 일, 교회 정치의 형태, 여성 안수의 가부에서 서로 갈린다. 성공회를 개신교로 분류할 것인지부터 정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이렇게 믿는다’로 시작하는 문장은 거의 언제나 화자가 속한 전통을 개신교 전체로 확대한 진술이다. 한국에서 이 확대가 특히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한국 개신교의 무게중심이 장로교에 쏠려 있어서, 장로교의 견해가 개신교 일반의 견해처럼 통용되기 때문이다. 대조표의 왼쪽 칸은 사실 ‘한국 장로교’ 칸인 경우가 많다.
대조표는 두 개의 완결된 체계가 마주 서 있다고 전제한다. 이 전제가 성립해야 각 행이 ‘A는 X, B는 Y’로 채워진다. 그런데 개신교 쪽에는 그 진술을 발급할 주체가 없다. 표의 왼쪽 칸이 채워졌다는 사실 자체가, 누군가가 개신교를 대표해 말할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는 뜻이다.
이 전제가 무너지면 표의 여러 행이 함께 흔들린다. 성찬 이해가 대표적이고, 예배 형식과 교회 정치가 그 뒤를 따른다.
차이를 세기 전에 무엇이 공유되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차이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두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동정녀 탄생, 십자가 죽음, 육체의 부활, 재림과 최후 심판을 고백한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양쪽 예배에서 그대로 낭독된다. 세례는 서로 인정된다. 개신교 신자가 천주교로 옮길 때 다시 세례를 받지 않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삼위일체 이름으로 물을 사용해 받은 세례라면 유효한 세례로 본다.
이 공유의 범위는 좁지 않다.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지 1700년이 되는 2025년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께 기념 행사를 연 것도 그 신경이 분열선 이전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후에 갈라진 모든 항목은 이 공통 기반 위에서 갈라졌다. 두 교회의 차이를 종교 간 차이처럼 서술하는 글은 이 사실을 지운다.
실제 분기점은 두 개다. 첫째는 권위의 소재다.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은 성경만 읽으라는 독서 지침이 아니라, 신앙과 삶의 최종 심급이 성경 하나라는 주장이다. 교회의 관행도 공의회의 결정도 교부의 해석도 성경 아래에서 검증된다. 천주교는 계시가 성경과 성전이라는 두 물줄기로 전해지며, 그 해석의 최종 권한이 교도권에 있다고 본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 제4회기가 이 구도를 문서로 확정했다.
이 한 지점이 대조표의 나머지 행 대부분을 생산한다. 교황직, 주교의 사도적 계승, 일곱 성사, 연옥, 마리아 관련 교의는 각각 독립된 쟁점이 아니라 같은 원리에서 나온 파생물이다. 개신교가 무염시태나 성모 몽소승천을 거부하는 이유도 그 내용을 낱낱이 검토해서라기보다, 성경이 말하지 않은 것을 교회가 구속력 있는 교의로 선포할 수 있다는 권한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날짜를 보면 이 구도가 선명해진다.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는 1854년, 교황의 무류성은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성모 몽소승천은 1950년에 교의로 선포됐다. 셋 모두 종교개혁이 끝난 뒤 수백 년이 지나 확정됐다. 개신교의 반발이 격했던 것은 새 교리가 추가됐기 때문이 아니라, 새 교리를 추가할 수 있는 기구가 작동한다는 사실이 눈앞에서 증명됐기 때문이다.
다만 개신교 쪽의 원리에도 조용히 깔린 전제가 있다. 성경만이 최종 권위라면, 무엇이 성경인지는 어디서 오는가. 66권이라는 목록은 그 66권 안에 적혀 있지 않다. 목록을 확정한 것은 고대 교회의 판단이며, 그 판단을 받아들이는 순간 성경 바깥의 권위를 한 번은 인정한 셈이 된다. 개혁파 신학은 이 문제를 성령의 내적 증거로 답해 왔지만, 그 답이 순환을 완전히 벗어나는지는 개신교 내부에서도 계속 다뤄지는 물음이다.
천주교 성경은 73권, 개신교 성경은 66권이다. 차이는 구약에 있다. 토빗기, 유딧기,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마카베오기 상·하 일곱 권과 에스테르기·다니엘서의 일부 대목이 천주교 성경에 있고 개신교 성경에 없다. 천주교는 이를 제2경전이라 부르고 개신교는 외경이라 부른다. 명칭 자체가 이미 판정을 담고 있다.
여기서 유통되는 두 설명이 모두 부정확하다. ‘천주교가 일곱 권을 더했다’는 설명은 1546년 트리엔트 결정을 창작 행위로 그린다. 실제로는 그 이전 천 년 넘게 서방 교회가 통상 써 온 라틴어 성경에 이 책들이 들어 있었고, 트리엔트는 종교개혁의 도전에 맞서 그 관행을 성문화했다. ‘개신교가 일곱 권을 뺐다’는 설명도 마찬가지로 거칠다. 히에로니무스는 4세기에 이미 히브리어 정경에 없는 책들에 유보를 달았고,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이 책들을 삭제한 것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 사이에 부록으로 따로 실어 위치를 낮췄다. 판단이 갈린 것이지 어느 한쪽이 원본을 조작한 것이 아니다.
숫자 자체도 생각만큼 단단하지 않다. 66과 73이라는 값은 권을 세는 방식에 의존한다. 예레미야애가를 예레미야서에 붙일지 떼어낼지, 바룩서 6장을 독립된 편지로 볼지에 따라 총계가 달라진다. 두 숫자를 나란히 놓고 ‘일곱 권 차이’라고 말할 때, 그 일곱이라는 값은 분류 규약의 산물이지 자연수처럼 주어진 값이 아니다.
1968년 교황청 성서위원회와 세계성서공회연합회가 공동번역에 합의했고, 한국에서도 두 진영의 학자가 함께 작업해 1971년 신약을, 1977년 구약을 포함한 『공동번역 성서』를 내놓았다. 번역 지침은 어느 한쪽에만 익숙한 표현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과는 양쪽 모두의 이탈이었다. 한국 개신교 주요 교단은 이 번역을 채택하지 않고 개역 계열을 유지했고, 천주교도 2005년 자체 번역 『성경』으로 옮겨 갔다. 두 교회가 같은 본문을 읽게 하려던 시도는 30년을 채우지 못했다. 번역 원칙의 문제라기보다, 예배와 암송에 쓰이는 본문을 바꾸는 일이 교리 합의보다 훨씬 강한 저항을 받는다는 사실이 드러난 사례에 가깝다.
둘째 분기점은 칭의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지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개신교는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다고 말한다. 법정에서 선고가 내려지듯 신분이 바뀌며, 그 선고는 신자의 실제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한다. 천주교는 은총이 주입되어 사람 자체가 실제로 의롭게 변화된다고 말한다. 선고와 변화 중 어느 것이 칭의인가, 이것이 16세기 논쟁의 핵이었다.
칭의는 단번에 완결되는 법정적 선언이다. 신자는 여전히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다. 성화는 칭의의 결과로 뒤따르되 칭의의 근거는 아니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게서 나오는 열매다.
칭의는 세례에서 시작해 평생에 걸쳐 심화되는 실제 변화다. 은총으로 시작되고 은총으로 유지되며, 그 안에서 사람은 실제로 의로워진다.
은총에 협력해 이루어진 선행은 하나님이 그 자신의 선물에 상급을 주시는 방식으로 공로가 된다.
이 대목에서 개신교 쪽 요약이 자주 넘어간다. ‘천주교는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는 문장이 그것이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사람이 은총 없이 자기 힘으로 구원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는 주장을 명시적으로 정죄했다. 은총이 앞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는 데 양쪽 모두 동의한다. 논쟁은 은총이 앞선 뒤에 사람의 협력이 어떤 지위를 갖는가에 있었고, 이것은 ‘은혜 대 행위’라는 구도로는 담기지 않는다. 대조표가 이 행을 두 단어로 채우는 순간, 실제 쟁점은 표 밖으로 밀려난다.
1999년 10월 31일, 루터교세계연맹과 로마 가톨릭 교회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칭의 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서명일이 종교개혁 기념일이었다. 이후 2006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가 이 문서에 합류했고, 성공회 자문회의가 2016년에 그 실질을 승인했으며, 세계개혁교회커뮤니온이 2017년 비텐베르크에서 참여했다. 개신교 주요 흐름 대부분이 형식적으로는 이 합의에 들어와 있다.
합의의 문면은 그러나 흔히 알려진 것보다 좁다. 공동선언과 부속 문서가 말한 것은 16세기의 상호 정죄가 ‘이 선언에 제시된 형태의 가르침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이가 사라졌다는 선언이 아니라, 정죄의 사정거리를 제한한 선언이다. 두 전통이 칭의의 기본 진리에서 합의에 이르렀다고 하면서도 남은 차이를 함께 명기했다.
합의 직전의 마찰이 이 성격을 드러낸다. 1998년 6월 바티칸이 내놓은 공식 응답은 이미 상당한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인정하면서도, 신자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표현이 트리엔트가 말한 내면의 갱신과 어떻게 양립하는지 불분명하다며 유보를 달았다. 같은 해 독일 개신교 신학자 수백 명이 반대 서명을 냈다. 교회론과 교회 권위의 차이가 배경으로 밀려난 채 없는 것처럼 다뤄진다는 것이 반대의 주된 논거였다. 1년의 조정 끝에 공동 성명과 부속 문서가 추가돼 서명이 성사됐다.
이 문서에 서명한 주체는 개별 교회가 아니라 세계 단위의 교단 협의체다. 협의체의 결정은 회원 교단을 통해 아래로 전달되어야 지역 교회의 설교와 교리교육에 닿는데, 그 전달 경로는 대개 존재하지 않거나 작동하지 않는다.
그 결과 칭의 문제가 국제 문서상으로는 정리된 지 25년이 넘었는데도, 지역 교회에서는 여전히 ‘저쪽은 행위 구원’이라는 요약이 유통된다. 2006년 채택 장소가 서울이었다는 사실조차 한국 개신교 안에서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교리의 합의와 교인의 인식은 다른 회로를 탄다.
성찬은 대조표가 가장 크게 실패하는 행이다. 천주교의 입장은 하나다.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고 감각되는 속성만 남는다는 화체설이며,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이 용어를 채택하고 트리엔트가 확정했다.
개신교 쪽은 셋으로 갈린다. 루터는 실체 변화를 부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몸이 빵과 함께 실재한다고 보았고, 칼뱅은 성령을 통해 신자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참여한다는 영적 임재를 말했으며, 츠빙글리는 성찬을 기념 행위로 보았다.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루터와 츠빙글리는 다른 조항에는 합의하고도 이 한 조항에서 결렬했다. 개신교 내부의 이 분열은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의 거리 못지않게 오래됐다.
한국의 현실은 여기에 층을 하나 더 얹는다. 한국 장로교가 표준으로 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칼뱅 계열의 영적 임재를 말하지만, 실제 지역 교회의 성찬 설교와 집례는 츠빙글리적 기념설에 가깝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고백 문서와 실천이 어긋나 있는 것인데, 이 어긋남은 대조표의 어느 칸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표는 각 교회가 공식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적을 뿐, 무엇을 실제로 행하는지는 적지 않기 때문이다.
마리아 문제는 성격이 다르다. 여기서 논쟁의 상당 부분은 교리가 아니라 어휘에서 생긴다. 라틴어 신학은 하나님께만 돌리는 예배를 흠숭, 성인에게 돌리는 공경을 공경, 마리아에게 돌리는 특별한 공경을 별도 등급으로 구분한다.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흠숭을 바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스스로 가르친다. 성인에게 기도한다는 표현도 하나님께 대신 청해 달라는 중보 요청을 뜻한다.
한국어에서 이 구분이 ‘숭배’라는 한 단어로 뭉개진다. ‘마리아 숭배’라는 표현이 성립하는 순간 천주교의 자기 서술은 논의에서 배제되고, 반박할 필요조차 없는 우상숭배가 된다. 논쟁이 되기 전에 번역이 승부를 내 버리는 구조다.
그러나 여기서 천주교 쪽 답도 완결되지는 않는다. 공식 교리가 등급을 구분한다는 사실과, 지역 교회의 실제 신심 생활에서 그 구분이 유지된다는 사실은 별개의 문제다. 성모 신심이 강한 지역에서 이 경계가 흐려진다는 지적은 천주교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나온다. 개신교의 비판이 향해야 할 대상은 교리 문서가 아니라 실천의 층위인데, 대조표는 교리만 적으므로 이 비판을 담을 자리가 없다. 비판이 부정확해지는 이유가 비판자의 무지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연옥은 죽은 뒤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에 이르기 전 정화가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천주교는 이를 교리로 유지하고, 개신교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대사는 이미 용서된 죄에 남아 있는 잠벌을 교회가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에 의지해 면해 주는 것으로, 이 제도 역시 지금도 존재한다. 2025년 희년에도 대사가 부여됐다.
다만 종교개혁이 문제 삼은 형태와 현재의 형태는 같지 않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대사 자체는 유지하면서 대사에 금전상의 이득을 결부시키는 관행을 폐기했고, 이후 금전과 결부된 대사는 금지됐다. 개신교 강단에서 ‘면벌부를 팔던 교회’가 현재형으로 언급될 때, 그 진술의 시제는 5백 년 전에 고정돼 있다. 대사 제도를 비판할 근거는 여전히 있지만, 그 근거는 판매가 아니라 교회가 잠벌을 면할 권한을 가진다는 주장 자체에 있어야 한다. 비판의 표적이 이미 폐지된 관행에 머무르면 비판은 논쟁력을 잃는다.
천주교 사제는 서품을 통해 사제직에 들어가며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에서 사죄를 선언한다. 개신교 목사는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을 위임받은 직분자이고, 신자 전체가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 원리 아래서 신자와 본질적으로 다른 신분에 있지 않다. 이 차이가 고해성사의 유무를 결정한다. 개신교에서 죄의 고백은 하나님께 직접 향하며, 목사에게 하는 고백은 상담과 권면의 성격을 가진다.
독신 규정은 자주 오해된다. 사제 독신은 교리가 아니라 규율이며, 라틴 전례 교회에 적용된다. 로마와 일치하는 동방 가톨릭 교회들에는 기혼 사제가 있고, 성공회에서 천주교로 옮겨 온 기혼 성직자에게 예외가 인정된 사례도 있다. 즉 이 항목은 변경 가능한 규정이며, 변경 논의도 계속돼 왔다. 반면 여성 서품 불가는 1994년 문서로 재확인된 뒤 교리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다뤄진다. 두 항목을 ‘천주교는 결혼과 여성 성직을 금한다’로 한 줄에 넣는 대조표는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규범을 같은 무게로 만든다.
한국에서 두 교회의 거리는 신학 문헌보다 생활 어휘와 의례에서 먼저 감지된다. 천주교는 하느님, 개신교 다수는 하나님을 쓴다. 미사와 예배, 신부와 목사, 성당과 교회, 마태오와 마태, 바오로와 바울로 갈린다. 이 차이는 교리 차이가 아니라 번역 계보의 차이인데, 실제 대화에서는 교리 차이보다 훨씬 강하게 소속을 표시한다.
조상 제사는 더 무거운 층에 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한 일이 조선 정부의 천주교 금지령으로 이어졌다. 제사 거부가 순교의 직접적 계기였던 것이다. 그 입장은 1939년 12월 8일 교황청 훈령으로 뒤집혔다. 조상에 대한 예는 이제 시민적·사회적 의미만 지닌다는 판단 아래, 미신적 요소를 배제하는 조건에서 제사 참여가 허용됐다. 한국 개신교 대다수는 지금도 제사를 드리지 않고 추도예배로 대체한다.
이 역전은 권위 구조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중앙 교도권을 가진 교회는 이백 년 넘게 유지한 판단을 문서 하나로 바꿀 수 있다. 성경만을 최종 권위로 삼는 교회는 그런 문서를 발급할 기구가 없으므로, 같은 문제를 교단별·교회별·가정별 판단으로 처리하게 된다. 개신교 안에서 제사 문제가 지금도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은 신학적 입장이 더 강경해서가 아니라 결론을 내려 줄 기구가 없어서다. 첫 번째 축이 이런 방식으로 일상에 도달한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사회적 이미지 차이도 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천주교는 온건하고 개신교는 공격적이라는 인식은 20세기 후반의 정치사에서 형성됐다. 유신·신군부 시기 천주교 조직이 인권 의제에서 취한 위치, 같은 시기 개신교 주요 교단의 위치, 이후 대형교회 중심의 성장과 그에 따른 사회적 마찰이 각각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교리 대조표로는 이 차이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대중이 두 교회를 구별할 때 실제로 사용하는 기준의 상당 부분이 표 밖에 있다는 뜻이다.
규모 비교에서도 같은 종류의 착오가 반복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2026년 4월 발표한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25」에 따르면 2025년 12월 31일 기준 신자는 600만 6832명으로 전체 인구 5272만 2298명의 11.4%다. 반면 국가데이터처의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천주교 인구는 389만 명이었다. 같은 교회를 두고 200만 이상 벌어진다.
두 숫자가 다른 것은 오차 때문이 아니라 측정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적은 세례 기록의 누적이다. 한 번 세례를 받으면 신앙생활을 중단해도 기록은 남는다. 센서스는 응답 시점의 자기 정체성을 잰다. 앞의 숫자는 ‘세례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을, 뒤의 숫자는 ‘지금 자신을 신자로 여기는 사람’을 센다. 주일미사 참례율 15.5%는 두 숫자 사이의 간격을 안쪽에서 보여준다. 교적에 이름이 있는 100명 중 15명이 미사에 나온다.
같은 문제가 표본조사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2025년 조사에서 천주교 신자 비율을 한국리서치는 11%로, 한국갤럽은 6%로 집계했다. 문항 설계와 표본 구성의 차이가 두 배 가까운 격차를 만든다. 하나의 확정된 값이 존재하고 조사가 그것을 근사한다는 전제가 여기서 무너진다. 측정 방식이 대상을 정의한다.
개신교 쪽은 반대 방향으로 어긋난다. 2025년 교단 정기총회에 보고된 수치를 보면 예장합동 224만 2844명, 예장통합 219만 919명, 기독교대한감리회 110만 6385명, 예장고신 37만 6629명, 기장 18만 8159명이다. 주요 교단을 합해도 2015년 센서스의 967만 6000명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교단에 속하지 않은 독립교회, 교단 통계에서 빠지는 소규모 교단,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개신교인으로 응답하는 사람이 그 사이를 채운다. 개신교 인구의 상당 부분이 어느 교단의 명부에도 없다.
추세는 두 교회 모두 같은 방향이다. 예장통합은 2015년 이후 10년 연속 감소해 그동안 약 62만 명이 줄었고, 감리교와 기장도 장기 감소세다. 천주교는 교적상 600만 선을 넘었지만 증가율은 0.2%로 둔화했고, 군종교구를 제외하면 사실상 감소로 돌아섰으며 65세 이상 신자 비율이 28.9%에 이르렀다. 교리 차이를 논쟁하는 동안 두 교회가 공유하게 된 조건은 고령화와 다음 세대의 이탈이다.
2025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종교 항목 결과는 2026년 11월 발표 예정이다. 이 발표가 확인해 줄 것은 교세의 실제 크기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크기이며, 두 교회의 자체 집계와 어긋나는 폭이 10년 전보다 커졌는지 줄었는지가 관찰 대상이다. 격차가 더 벌어진다면 명부에 이름을 남긴 채 소속감을 잃은 층이 두꺼워졌다는 뜻이고, 좁혀진다면 명부 정리가 진행됐다는 뜻이다. 어느 쪽이든 교리 논쟁과는 무관한 지표다.
차이 목록이 생산되는 자리를 보면 목록의 형태가 설명된다. 이런 자료는 대개 교리교육과 개종 방지를 목적으로 각 교회 내부에서 제작된다. 그 목적에서 필요한 것은 상대의 자기 서술이 아니라, 신자가 짧게 기억하고 즉시 사용할 수 있는 요약이다. 그래서 상대 진영이 스스로 하지 않을 표현이 요약에 들어가고, 상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구분은 생략된다. ‘마리아 숭배’, ‘행위 구원’, ‘면벌부를 파는 교회’가 그 결과물이다. 반대 방향에서도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라는 요약이 같은 기능을 한다.
이 구조를 지적하는 것은 어느 한쪽이 부정직하다는 판정이 아니다. 요약은 목적에 최적화된 도구이고, 개종 방지라는 목적에서는 정확도보다 판별력이 값을 갖는다. 문제는 그 도구가 목적을 벗어나 ‘두 교회의 차이’에 대한 일반적 설명으로 유통될 때 생긴다. 항목이 많을수록 신뢰가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항목이 늘어난 만큼 부정확한 행이 늘어난다.
정리하면 갈라지는 곳은 두 곳이다. 계시의 최종 권위를 어디에 두는가, 그리고 죄인이 의롭다 여겨지는 일이 선고인가 변화인가. 교황직과 성사 체계와 마리아 교의는 첫째에서 나온 결과이고, 공로와 연옥과 대사는 둘째와 첫째가 만나는 자리에서 나온다. 성찬은 개신교 내부에서 먼저 갈라지므로 두 교회 사이의 항목으로 세기에 적합하지 않고, 마리아 문제의 절반은 번역 문제다. 성경 권수 차이는 첫째 축의 파생 사례이며, 성직 규율의 일부는 교리가 아니라 변경 가능한 규정이다.
두 축은 실제로 깊다. 500년이 지났고 국제 문서상의 합의가 있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 깊이는 항목을 스무 개로 늘려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니케아 신경을 함께 낭독하고 서로의 세례를 인정하는 두 교회가 무엇 때문에 갈라져 있는지는, 두 개의 물음을 정확히 붙드는 편이 스무 개의 행을 채우는 것보다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