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도덕 판단
현대소설이 선과 악의 구분을 버렸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사라진 것은 선악이 아니라 그것을 대신 발음해 주던 목소리다. 그 목소리가 어디로 옮겨 갔고, 옮기는 데 무슨 값이 들었는지를 따진다.
"왜 사람을 죽였는가"라는 물음에 "햇살이 눈부셔서"라고 답하는 장면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2부 법정에 있다. 뫼르소가 재판 내내 처음으로 자기 입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대목이고, 방청석은 웃는다. 이 장면은 현대소설이 선악의 구분을 포기했다는 증거로 자주 인용된다. 그런데 소설이 실제로 배치한 것은 판단의 소멸이 아니라 판단 기구의 오작동이다.
재판은 해변의 총성보다 장례식장의 태도를 집중적으로 심문한다. 어머니의 관 앞에서 울지 않았고, 밀크커피를 마셨고, 담배를 피웠고, 이튿날 해수욕을 하고 희극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이 차례로 제출된다. 검사가 구축하는 것은 살인의 인과가 아니라 인물의 성격이다. 사형은 그 성격에 내려진다.
이 독법은 카뮈 자신이 못 박아 두었다. 1955년 미국 대학판을 위해 쓴 서문에서 그는 이 사회에서 어머니의 장례식에 울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사형을 선고받을 위험이 있다는 뜻이었다고 적었다. 뫼르소가 처벌받는 이유는 각본을 연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악 판단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라면 이 법정 장면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재판은 판단 기구이고, 소설은 그 기구가 무엇을 재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래서 '판단이 없다'는 인상은 작품의 내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술자가 독자를 대신해 평결을 발음해 주지 않는다는 형식적 사실에서 나온다. 뫼르소의 행위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끝까지 독자에게 남겨진다.
이 형식적 변경이 최초로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카뮈보다 85년 앞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은 1856년 잡지 연재 직후 공중도덕·종교도덕 훼손 혐의로 기소되어 1857년 초 파리에서 재판을 받았다. 검사 에르네스트 피나르의 논거는 간통을 묘사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 책에 엠마에게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인물이 하나도 없고 간통을 규탄하는 한 줄도 없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피나르가 겨눈 것은 자유간접화법이었다. 플로베르는 거의 모든 가치 판단과 서술을 등장인물의 시선 안쪽에서 처리했고, 그 결과 어떤 문장이 작가의 견해인지 인물의 자기 정당화인지 표면상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 피나르는 엠마의 내면 서술 두 문장을 법정에서 낭독하면서 그것이 곧 이 소설이 권장하는 간통관이라는 듯이 다루었다. 플로베르는 무죄를 받았지만, 법원은 예술이 형식에서도 표현에서도 순결해야 함을 잊었다는 훈계를 판결에 붙였다.
검사가 정확히 이해한 것
피나르의 추론은 문학사가들의 정리보다 오히려 명료하다. 평결문을 발음하는 목소리가 텍스트에서 사라졌다면 그 판단은 소멸한 것이 아니라 수취인이 바뀐 것이고, 새 수취인은 독자다. 국가 검사의 자리에서 보면 그것은 곧 통제 불능이다. 그가 이 책을 위험하다고 본 근거와, 후대가 이 책을 근대소설의 출발로 세운 근거는 같은 하나의 기법이다.
여기서 갈라야 할 것이 하나 있다. 판단을 발음하지 않는 것과 판단이 없는 것은 다르다. 앞의 것은 서술 기법이고 검증 가능하다. 뒤의 것은 작품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주장이며, 앞의 것으로부터 자동으로 따라 나오지 않는다. 현대소설론의 상당 부분은 이 두 층을 한 문장에 담아 왔다.
판단하지 않는 서술자의 강령으로 가장 널리 인용되는 것은 안톤 체호프의 서한이다. 1888년 5월 30일 알렉세이 수보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예술가가 자기 인물과 그들의 말에 대한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되며 공정한 관찰자여야 한다고 적었다. 같은 해 10월 27일 편지에서는 문제를 푸는 일과 문제를 올바르게 세우는 일을 혼동하지 말라고,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뒤쪽뿐이라고 썼다.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올바른 제기다.
1888년 10월 27일 수보린에게 보낸 편지의 논지
그런데 같은 상대에게 보낸 1891년 11월 25일 편지에서 체호프는 방향을 주는 이념의 부재, 목표를 향해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당대 문학의 병이라고 불렀다. 1890년대의 그는 인물을 판단하고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려 했으며, 그 변화가 후기 단편의 밀도를 만들었다는 것이 러시아 문학 연구의 오랜 정리다.
즉 '판단하지 않는 예술가'라는 초상은 스물여덟 살의 두 문장을 서른 이후의 자기 수정과 분리해 얻은 것이다. 인용의 절단면이 논지를 만든다. 체호프가 남긴 것은 판단 금지의 강령이 아니라, 판단을 소설의 어느 층에 놓을지에 대한 평생에 걸친 미결 상태였다.
동기 없는 살인이라는 장치는 카뮈의 발명이 아니다. 앙드레 지드가 1914년에 낸 『바티칸의 지하실』이 그 원형을 놓았다. 지드 자신은 이 책을 소설이라 부르지 않고 소티(sotie), 곧 소극이라 불렀다. 로마에서 나폴리로 가는 야간열차 객실에서 열아홉 살 라프카디오 블루이키는 옆자리의 아메데 플뢰리수아르를 문밖으로 밀어 떨어뜨린다. 이해관계도 원한도 없다. 문 손잡이가 손 안에 있었고,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었다.
이 장면에서 뽑아낸 '무상의 행위'라는 표현은 이후 프랑스 문학의 상투어가 되었다. 카뮈보다 스물여덟 해 앞선 이 대목을 두고 자유의 순수한 증명이라는 해석이 오래 붙어 다녔다. 그러나 소설 자체가 그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다.
장치가 시험한 것과 시험의 결과
결말에서 라프카디오는 자기 범죄의 의식에 시달린다. 그는 죄를 벗지 못하고, 신앙과 사랑이라는 두 출구를 앞에 놓고 흔들린다. 도덕적 인과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가설은 소설 안에서 검증되었고, 결과는 실패로 기록된다.
논리적으로도 그렇다. 아무 동기 없이 행하겠다는 의지는 이미 하나의 동기다. 자기 자유를 증명하겠다는 동기이며, 라프카디오의 행위는 그 동기에 정확히 종속되어 있다. 무동기의 순수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동기 살인의 도입과 도덕 판단의 폐기는 별개의 사건이다. 소설은 동기의 사슬을 끊어 보이면서 무엇이 남는지를 관찰했고, 남은 것은 대체로 회한과 귀속이었다. 장치를 도덕 부재의 선언으로 읽는 것은 실험 설계를 실험 결론으로 오독하는 일이다.
같은 세기의 반대편 극에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있다. 1866년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에게는 동기가 없지 않고 너무 많다. 비범인 이론, 가난,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부채, 자기 예외성의 시험, 우발적 격분이 겹쳐 있어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서술은 평결을 미루지만 그것은 판단의 부재가 아니다. 판단들이 서로를 반박하며 공존하는 상태다.
미하일 바흐친이 이 구조를 다성성이라 부른 것은 작가의 목소리가 인물의 목소리를 압도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지, 목소리들이 도덕적으로 등가라는 뜻이 아니었다. 소냐의 목소리와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목소리는 소설 안에서 서로 다른 무게를 지닌 채 끝까지 남는다.
그러므로 '현대소설'을 단일 주어로 삼는 문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도덕의 소재지를 다루는 방법이 20세기 초에 최소한 두 갈래로 갈렸고, 두 갈래 모두 오늘까지 이어진다. 한쪽은 판단의 발음을 지웠고, 다른 한쪽은 판단을 인물 수만큼 증식시켰다.
이 문제를 가장 압축된 명제로 정리한 사람은 밀란 쿤데라다. 1993년에 낸 에세이 『배신당한 유언들』에서 그는 폭풍 속에서 혼자 울부짖다가 잔잔해지면 남들의 게으름을 꾸짖는 라블레의 파뉘르주를 들어, 이 인물이 독자의 분노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소설이라는 형식의 정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 명제를 세운다. 도덕 판단의 유보는 소설의 비도덕이 아니라 소설의 도덕이다.
쿤데라의 정식에서 결정적인 것은 이어지는 단서다. 소설가는 도덕 판단이 정당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소설 안에 그 자리를 주지 않는다. 파뉘르주를 비겁하다 하고 엠마 보바리를 비난하고 라스티냐크를 고발하는 일은 독자가 하면 되고, 소설가는 그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판단의 정당성과 판단의 배치 장소를 분리하는 이 구별이 정식의 전부다. 이 단서를 떼고 앞 문장만 옮기면, 소설은 도덕이 없는 영역이라는 전혀 다른 주장이 된다.
누가 어디서 이 말을 했는지가 강조점을 바꾼다
같은 책에서 쿤데라는 조지 오웰의 『1984』가 삶을 정치로, 정치를 선전으로 환원했고 그래서 의도와 무관하게 전체주의의 정신에 합류했다고 비판한다. 두 대목은 함께 읽어야 한다.
체코를 떠나 프랑스에 정착한 망명 작가가 전체주의 체제의 검열과 이념적 독서를 겪은 뒤에 쓴 명제다. 그 위치에서 '유보'는 도덕의 부재를 옹호하는 말이 아니라, 이해하기 전에 판정부터 내리는 습관에 맞서는 반대 명제로 기능한다. 실제로 쿤데라는 그 즉결 판단의 태세를 가장 해로운 것이라고 부른다. 정식이 도덕 회의론처럼 인용되는 것은 발화 위치를 지운 결과다.
서술자가 판단을 발음하지 않을 때 독자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사변의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미디어 심리학에는 이 문제를 40년 넘게 측정해 온 계열이 있다. 돌프 질만의 정서적 성향 이론(affective disposition theory)이 그것이다.
이 이론의 골자는 이렇다. 이야기의 즐거움은 인물에 대한 호감과 그 인물이 맞는 결말의 일치에서 나오고, 호감은 인물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에서 만들어진다. 질만은 2000년의 논문에서 관객을 지치지 않는 도덕 감시자라고 불렀다. 감시는 텍스트가 요청하지 않아도 켜져 있다.
도덕적으로 모호한 주인공이 대중 서사의 중심에 들어선 뒤 이 이론은 정면으로 시험받았다. 결과는 판단이 정지된다는 쪽이 아니었다. 후속 연구들이 보고한 것은 관객이 판단을 우회하는 여러 경로를 스스로 동원한다는 것이었다. 인물 유형에 대한 사전 도식을 적용해 미리 면허를 발급하거나, 도덕적 이탈 기제를 써서 특정 위반을 감면하거나, 위반의 크기에 따라 감면 폭을 조절한다. 어느 경로에서도 도덕 계산은 꺼지지 않는다. 회계 방식만 달라진다.
한 문장에 겹쳐 있는 두 개의 주장
'현대소설에는 선악의 구분이 없다'는 문장은 서로 층이 다른 두 진술을 포개고 있다. 첫째는 서술자가 평결을 발음하지 않는다는 형식적 관찰이다. 이것은 텍스트를 펼쳐 확인할 수 있고 대체로 참이다. 둘째는 작품이 도덕적으로 중립인 공간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독자 쪽에서 검증해야 하는 명제이며, 실험 연구는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두 층을 한 문장에 담으면 검증 가능한 형식적 관찰이 근거 없이 존재론적 주장으로 승격된다. 텍스트에서 무언가가 빠졌다는 관찰만으로는, 그 무언가가 독서에서도 빠졌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이방인』으로 돌아가면 더 불편한 층이 하나 남는다. 코너 크루즈 오브라이언은 1970년에 낸 카뮈 연구에서 이 소설의 재판 장면 자체가 개연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1930년대 식민지 알제리에서 유럽인이 아랍인을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는 일은 당시 사법 현실과 맞지 않는다. 더구나 상대는 칼을 뽑았고 그 전에 이미 레몽을 다치게 했으므로, 변호인이 정당방위 정황을 세우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오브라이언의 더 큰 지적은 인물 목록에 관한 것이었다. 소설에서 피살자는 이름을 갖지 않고 끝까지 '아랍인'으로만 불린다. 카뮈의 작품 세계 전체에서 아랍어가 발화되는 장면이 없고, 아랍인이 고유명사로 등장하는 대목도 거의 없다. 오브라이언은 이 공백이 작가의 의도와 별개로 프랑스령 알제리라는 구성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했다고 보았다.
같은 각도에서 카뮈의 1955년 서문을 다시 읽으면 균열이 보인다. 그 서문은 뫼르소를 거짓말을 거부하는 인간으로, 진실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물로, 나아가 우리가 받을 만한 유일한 그리스도로 규정한다. 그러나 소설 안의 뫼르소는 레몽을 대신해 여자를 유인하는 편지를 쓰고 경찰서에서 레몽에게 유리한 진술을 한다. 작가의 사후 해석과 텍스트의 행위 기록이 어긋난다는 지적은 이 지점에서 나왔다.
2013년 카멜 다우드는 『뫼르소, 대응 수사』를 내면서 피살자에게 무사라는 이름을 주고 그 동생의 목소리로 사건을 다시 썼다. 이 소설이 수행한 것은 원작의 도덕적 판정을 뒤집는 일이 아니라, 판단 대상 목록에 빠져 있던 한 명을 목록에 넣는 일이었다.
배제는 무판단처럼 보인다
도덕 판단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이유의 일부는 시점 배분에 있다. 서술이 한 인물의 감각 안쪽에 머무는 동안, 그 인물이 도덕적 무게를 부여하지 않는 존재는 서술에서도 무게를 얻지 못한다. 판단의 부재가 아니라 판단 대상의 축소다.
그리고 이 축소가 70년 넘게 논의의 중심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평결권을 독자에게 넘길 때 생기는 비용을 보여 준다. 넘겨받은 독자는 자기가 이미 가진 위계를 동원해 빈자리를 채운다. 서술자의 평결이 사라진 자리는 진공으로 남지 않고, 시대의 기본값으로 메워진다.
판단 없는 소설에 대한 정면 반격은 1978년에 나왔다. 미국 소설가 존 가드너는 『도덕적 소설론』에서 참된 예술은 도덕적이며, 당대 문학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므로 그것을 쓴 사람들은 나쁜 예술가이거나 예술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도덕이 임의의 사회적 구성물이 아니라 시대마다 형태를 바꾸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고, 도덕적 소설의 임무를 설교나 이념 판매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정직하게 시험하는 일로 규정했다. 동시대 작가들을 실명으로 겨눈 이 책은 격렬한 반발을 불렀고, 저자의 이력을 바꾸어 놓았다.
10년 뒤 웨인 부스가 낸 『우리가 지키는 동행』은 윤리를 문학 논의의 중심으로 되돌리자는 같은 방향의 요구였다. 다만 부스의 설계는 가드너와 달랐다. 그는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에 대한 확정적 판정이라는 옛 희망을 명시적으로 포기하고, 특정 독자와 특정 작품 사이의 만남을 평가하는 대화로 윤리 비평을 재정의했다. 소설이 봉사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개인적·사회적 좋음에 관한 논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격의 두 판본을 나란히 놓으면 논쟁의 축이 드러난다. 어느 쪽도 19세기 서술자의 평결문을 복원하려 하지 않았다. 물음은 판단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판단을 누가 어디서 하느냐로 이미 옮겨져 있었고, 옮겨진 뒤에는 되돌릴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같은 구조가 한국 소설에서도 확인된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1965년 6월 『사상계』에 실려 제10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구청 병사계 직원인 '나', 부잣집 대학원생 '안', 그리고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판 돈을 쥔 서른 대여섯 살 사내가 하룻밤 술집을 옮겨 다닌다. 사내는 그 돈을 화재 현장에 던져 버리고, 세 사람이 나눠 든 여관방에서 자살한다. 다음 날 아침 남은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헤어진다.
서술자는 누구도 규탄하지 않는다. 사내의 죽음을 막지 않은 두 사람에게 평결을 내리지 않고, 시체를 판 행위에도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한 해 앞서 같은 지면에 실린 「무진기행」의 화자 역시 자기 배신을 서술만 하고 판정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두 작품이 남기는 것은 무관심에 대한 고발이다. 평결문이 없는 자리에서 고발이 성립하는 것은, 독자가 그 자리를 채우도록 텍스트가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간접화법의 도입은 서구 소설사의 사건이지만, 판단권을 독자에게 이관하고 그 이관 자체를 작품의 효과로 삼는 구조는 지역과 무관하게 반복된다.
"햇살이 눈부셔서"가 충격을 주는 이유는 그 대답에 아무 내용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법정이 요구한 형식과 대답의 형식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법정은 납득할 만한 동기와 회한을 제출하라고 요구했고, 뫼르소는 감각의 사실을 제출했다. 두 형식의 불일치가 사형을 만들었고, 소설은 그 불일치를 기록하는 데까지만 간다.
그 지점에서 소설이 지운 것은 선과 악이 아니라, 선과 악을 대신 발음해 주던 목소리다. 판단은 남았고 자리가 바뀌었다. 그리고 자리를 옮기는 데는 값이 들었다. 서술자의 평결이 물러난 공간을 독자가 채우는 구조에서는, 독자가 이미 가진 위계가 판단을 대신하고 그 위계는 오래 검토되지 않는다. 이름 없이 죽은 인물이 70년 넘게 이름 없이 남아 있었던 것이 그 값이다.
현대소설에 선악이 없다는 진술은 그러므로 다시 쓰여야 한다. 없어진 것은 평결이고, 남은 것은 평결을 내려야 하는 부담이며, 그 부담은 읽는 쪽으로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