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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을 막으려면 컴퓨터 안에서 정전을 일으켜야 한다

전력망을 떠받치던 쇳덩이가 반도체로 바뀌면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리고 왜 사고를 미리 수천 번 계산해 두어야 하는가

2026년 8월 13일


2025년 4월 28일 정오 무렵,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역에서 전기가 끊겼다. 지하철은 터널 한복판에 멈춰 섰고, 신호등이 꺼진 도로는 마비됐으며, 병원은 비상발전기로 버텼다. 휴대전화도 곧 먹통이 됐다. 이베리아반도라는 땅덩어리 하나가 통째로 어두워진, 유럽에서 20년 만에 가장 큰 정전이었다. 전기가 돌아오기까지 대부분의 지역에서 열 시간 안팎이 걸렸다.

그때 유럽이 가장 먼저 의심한 원인은 해킹이었다. 결과적으로 해킹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며칠 동안 유럽 전체가 사이버 공격부터 떠올렸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 전력망이 처한 상황을 보여 준다. 불이 꺼진 순간, 아무도 왜 꺼졌는지 알지 못했다.

이 글이 하려는 이야기는 하나다. 오늘의 전력망에서 사고는 사람이 손쓸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되기 때문에, 안전은 사고가 난 뒤의 대응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미리 대량으로 계산해 두는 데서 나온다. 왜 그렇게 됐는지, 그리고 그 계산이 왜 지금의 컴퓨터로는 벅찬지를 차례로 풀어 보려 한다. 전기에 대한 사전 지식은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개념은 나올 때마다 설명한다.

전기는 창고에 쌓아 둘 수 없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전력망에 관한 기본 사실 하나를 짚어 둘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물건과 달리, 전기는 만들어서 쌓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물건이 아니다.

쌀은 창고에 쌓아 둔다. 물은 저수지에 담아 둔다. 그래서 오늘 생산이 조금 모자라도 어제 쌓아 둔 것으로 메운다. 전기는 그렇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전국에서 소비되는 전력량과 전국에서 생산되는 전력량은 항상 같아야 한다. 배터리가 있지 않으냐고 물을 수 있는데, 배터리에 담긴 양은 나라 전체가 쓰는 양에 비하면 아주 작다. 사실상 전력망은 생산과 소비를 실시간으로 맞추며 굴러가는 시스템이다.

누군가 에어컨을 켜면 그 순간 어딘가의 발전기가 조금 더 일해야 한다. 발전소 한 곳이 고장으로 멈추면 그만큼의 생산이 즉시 사라지므로, 나머지 발전소가 즉시 그 몫을 메우거나 어딘가의 소비를 끊어야 한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전력망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설비들을 차례로 떼어내고, 그 결과가 정전이다.

여기서 균형이 맞는지 아닌지를 알려 주는 신호가 주파수다.

주파수와 60헤르츠(Hz)

콘센트에 들어오는 전기는 방향이 1초에 60번 바뀐다. 이 리듬을 60헤르츠라고 부른다. 전국의 모든 발전기와 모든 가전제품이 이 하나의 리듬에 맞춰 돌아간다. 오케스트라 전체가 하나의 박자에 맞추는 것과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이 박자가 균형의 신호등 노릇을 한다는 점이다. 전기가 남으면 주파수가 60보다 올라가고, 모자라면 내려간다. 그래서 전력망 운영자는 주파수 하나만 봐도 지금 전국의 수급이 맞는지 알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주파수가 크게 흔들린다는 것은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뜻이다. 공장 장비가 오작동하기 시작하고, 더 벌어지면 발전기들이 스스로를 지키려고 계통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대규모 정전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이 박자는 무엇이 지켜 왔는가. 놀랍게도 정교한 컴퓨터가 아니라, 발전소 안에서 돌고 있는 거대한 쇳덩이였다.

백 년 동안 전력망을 지켜 온 것은 회전하는 쇳덩이였다

석탄·가스·원자력 발전소가 전기를 만드는 방식은 사실 단순하다. 연료를 태우거나 핵분열을 일으켜 물을 끓이고, 그 증기로 거대한 바람개비를 돌리고, 바람개비에 연결된 발전기가 회전하면서 전기가 나온다. 이 바람개비와 발전기를 합친 회전체의 무게는 수십 톤에서 수백 톤에 이른다. 이것이 1분에 3,600번, 즉 앞에서 말한 60헤르츠에 정확히 맞춰 돈다.

회전체의 진짜 가치는 평상시가 아니라 사고가 났을 때 드러난다. 어딘가에서 발전소가 갑자기 멈춰 공급이 모자라게 됐다고 하자. 그 순간 전국의 나머지 발전기 회전체들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자기가 품고 있던 회전 에너지를 즉시 계통에 내어놓으며 아주 조금 느려진다. 빠르게 도는 자전거 바퀴를 손으로 툭 쳐도 바로 멈추지 않고 조금 느려질 뿐인 것과 같은 이치다. 이 성질을 관성이라고 부른다.

관성 — 물리 법칙이 공짜로 주는 완충재

관성은 무거운 물체가 자신의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이다. 전력망에서는 회전체가 품은 회전 에너지가 그 역할을 한다.

핵심은 이것이 누가 제어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센서가 이상을 감지하고, 컴퓨터가 판단하고, 명령을 보내는 과정이 전혀 필요 없다. 물리 법칙이 그냥 그렇게 작동한다. 반응 시간은 0이다.

관성이 벌어 주는 시간은 몇 초다. 그 몇 초 동안 보호장치가 동작하고, 대기 중이던 발전기가 출력을 올리고, 관제실의 사람이 상황을 판단하고 조치할 수 있었다. 지난 백 년간 전력망의 안전은 이 몇 초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태양광 패널에는 도는 부품이 하나도 없다. 햇빛이 반도체에 부딪히면 전기가 나오는 방식이라 회전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배터리도 마찬가지다. 풍력터빈은 날개가 돌기는 하지만, 최근 기종 대부분은 그 회전이 전력망에 직접 전달되지 않는 구조여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대신 이들에게는 인버터가 있다.

인버터 — 태양광 설비의 두뇌

태양광 패널이 만드는 전기는 건전지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직류다. 그런데 전력망에 흐르는 것은 1초에 60번 방향이 바뀌는 교류다. 이 직류를 교류로 바꿔 주는 반도체 장치가 인버터다. 손바닥만 한 것부터 냉장고만 한 것까지 크기는 다양하다.

다만 인버터가 하는 일은 전기의 형태를 바꾸는 것만이 아니다. 발전량을 측정하고, 전력망 상태를 감시하고, 필요하면 원격 명령을 받아 출력을 조절한다. 태양광 설비에서 두뇌에 해당하는 부품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발전소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 배터리, 전기차 충전기에도 같은 종류의 장치가 들어간다.

재생에너지가 늘어난다는 것은, 계통에서 회전체가 차지하던 자리를 인버터가 대신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부품 교체 하나가 전력망의 성질을 두 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바꿔 놓았다. 하나는 시간에 관한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문에 관한 변화다.

첫 번째 변화 — 계통의 시계가 빨라졌다

인버터는 회전체보다 훨씬 빠르고 정밀하다. 내부의 제어 회로가 1초에 수천 번씩 출력을 조정한다. 이것은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잘 설계된 인버터는 사고 상황에서 회전체보다 더 빠르게 계통을 떠받칠 수 있다.

문제는 반대 방향으로도 빠르다는 데 있다. 인버터에는 자신을 보호하는 기능이 들어 있어서, 전력망의 전압이나 주파수가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면 즉시 접속을 끊고 물러난다. 값비싼 반도체를 지키기 위한 합리적인 설계다. 그런데 수천 대가 비슷한 설정을 갖고 있으면, 계통이 조금 흔들렸을 때 그 수천 대가 동시에 물러난다. 그리고 그 이탈이 계통을 더 흔들어 다음 이탈을 부른다. 도미노다.

이베리아 정전의 마지막 국면에서 벌어진 일이 정확히 이것이었다. 유럽 각국의 송전망 운영기관이 모인 연합체 ENTSO-E(European Network of Transmission System Operators for Electricity, 유럽송전계통운영자연합)가 2026년 3월 20일 발표한 440쪽짜리 최종 조사 보고서는 사고를 이렇게 복원했다.

2025년 4월 28일, 이베리아 계통이 무너진 마지막 79초

메가와트라는 단위가 낯설 수 있다. 감을 잡기 위한 기준을 하나 대면, 대형 원자력 발전기 한 기의 출력이 대략 1,000메가와트다. 즉 마지막에 2초 만에 사라진 928메가와트는 원자력 발전소 한 기에 가까운 양이다. 그리고 출력 감소가 시작되고 반도가 꺼지기까지 걸린 시간이 전부 합쳐 79초였다.

덧붙일 것이 있다. 이 사고의 원인은 관성 부족이 아니었다. 보고서는 전압과 무효전력 제어의 공백, 계통 진동, 발전기들의 연쇄 이탈이 얽힌 복합 사고로 결론지었고, ENTSO-E 이사회 의장 다미안 코르티나스는 발표 자리에서 문제는 재생에너지가 아니라 전압 제어라고 못 박았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사고가 보여 준 것은 원인의 종류보다 진행 속도다. 회전체가 지배하던 시절 대형 사고는 초에서 분 단위로 전개됐고, 그 시간은 사람의 것이었다. 인버터가 늘어난 계통에서 결정적 국면은 수백 밀리초에서 수 초 사이에 끝난다. 계통의 시계가 사람의 반응 속도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두 번째 변화 — 성벽에 문이 수십만 개 생겼다

부품 교체가 바꾼 것은 속도만이 아니다. 회전체는 전선으로만 계통과 이어져 있었다. 인버터는 통신선에도 물려 있다. 발전량을 감시하고, 원격으로 출력을 조정하고, 소프트웨어를 갱신하려면 네트워크 연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회전체가 인버터로 바뀌는 순간, 계통은 충격을 받아 주던 완충재를 잃는 동시에 밖에서 들어올 수 있는 문을 하나 얻는다. 두 변화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부품 교체의 앞뒤 면이다.

10년 전 전력망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비유할 수 있었다. 발전소와 송전선, 변전소가 외부 인터넷과 분리된 전용 통신망으로만 연결돼 있어서, 들어올 수 있는 지점 자체가 몇 곳으로 한정됐다. 지금은 주택 옥상의 태양광, 아파트 단지의 에너지저장장치, 골목의 전기차 충전기가 모두 계통과 실시간으로 신호를 주고받는다. 국내 태양광 발전소는 수십만 곳이고, 가정마다 달린 스마트미터는 수천만 대다. 문이 몇 개에서 수십만 개로 늘었다.

에너지저장장치(ESS, Energy Storage System)

남는 전기를 배터리에 담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설비다. 휴대전화 보조배터리를 아주 크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파트 단지, 공장, 태양광 발전소 옆에 설치된다. 전기를 넣고 뺄 때 인버터를 거치므로, 앞에서 말한 성질을 태양광과 그대로 공유한다.

이것이 이론상의 우려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증명됐다. 2015년 12월 23일 우크라이나에서 해커들이 배전회사 세 곳의 제어망에 침투해 변전소 약 30곳의 차단기를 원격으로 내렸다. 한겨울에 약 22만 5천 고객이 최대 여섯 시간 동안 정전을 겪었다.

침투의 시작은 대단한 기술이 아니었다. 직원에게 배달된 평범해 보이는 업무 메일 한 통이었다. 누군가 첨부파일을 열었고, 그 순간 심어진 악성코드를 발판으로 공격자들은 몇 달에 걸쳐 회사 내부를 조용히 파악한 뒤 결정적인 하루에 움직였다. 인터넷 건너편의 누군가가 변전소 차단기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 이때 세계에 처음으로 실증됐다.

한국의 대응도 이 방향을 향하고 있다. 2026년 3월 11일 국가정보원은 국가보안기술연구소와 함께, 기후에너지환경부·한국전력·전력거래소 등과 협력해 만든 「지능형 전력망 사이버보안 가이드라인」을 공개했다. 171쪽 분량의 이 문서는 발전에서 소비까지 전력망을 이루는 요소들의 연결 구조 전체를 보호 대상으로 놓는다. 태양광·풍력 같은 분산된 발전원과 민간 사업자의 참여가 늘면서 공격에 악용될 수 있는 접점이 함께 늘었다는 문제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여기에 한국 고유의 사정이 하나 더 있다. 국내 태양광 인버터 시장은 외산, 사실상 중국산이 장악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산 비중은 80퍼센트대지만, 국내 대기업이 중국 제조사 제품을 들여와 자사 상표만 붙여 파는 방식까지 포함하면 90퍼센트에 이른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앞에서 설명했듯 인버터는 계통과 상시 통신하며 원격 제어까지 받는 두뇌 부품이다. 그 두뇌 수십만 개의 공급망이 한 나라에 쏠려 있다는 것은, 개별 제품의 품질이 좋고 나쁘고와는 다른 차원의 구조적 위험이다. 정부가 2026년 5월 확정한 제1차 재생에너지 기본계획에서 공공기관의 태양광 모듈과 인버터를 국산으로 한정하기로 한 배경이기도 하다.

여기까지의 중간 정리

회전하는 쇳덩이를 인버터로 바꾼 부품 교체 하나가 두 가지를 동시에 만들었다. 첫째, 계통이 흔들릴 때 몇 초를 벌어 주던 물리적 완충재가 사라지면서 사고의 진행이 사람의 반응 시간 아래로 내려갔다. 둘째, 계통과 통신하는 접점이 수십만 개로 늘면서 사고의 입구가 많아졌다.

사고는 빨라졌고, 사고가 시작될 수 있는 곳은 많아졌다. 이 조합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숫자는 실태를 가린다 — 제주가 보여 주는 것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전력망이 건강한지 판단해야 하는가. 흔히 쓰이는 지표는 설비 보급 실적이다. 태양광 몇 기가와트를 깔았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몇 퍼센트가 됐다 하는 숫자들이다. 그러나 설치된 설비의 용량과, 그 설비가 만든 전기가 실제로 안정되게 쓰이는가는 다른 질문이다. 이 간극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곳이 제주도다.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그 지역의 수요를 넘어서면 계통이 그 전기를 받아낼 수 없게 된다. 이때 전력거래소는 발전소의 출력을 강제로 낮추거나 아예 끊는다. 이것을 출력제어라고 부른다. 이미 만들어진 전기를 버리는 조치이므로, 출력제어 횟수는 계통이 재생에너지를 소화하지 못하는 정도를 보여 주는 지표가 된다. 제주의 연도별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제주 재생에너지 출력제어 발생 횟수 (전력거래소·제주도 집계)

연도20152016201720182019202020212022202320242025
횟수361415467765132181830

2020년까지는 풍력만 대상이었고, 2021년부터 태양광 출력제어가 포함된다.

2015년 3회로 시작한 출력제어는 2023년 181회로 정점을 찍었다. 8년 사이 60배다. 보급 실적이 쌓이는 동안 버려지는 전기도 같은 속도로 쌓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표의 마지막 칸이 눈에 띈다. 2025년, 출력제어는 0건이었다. 문제가 풀린 것인가. 절반만 그렇다.

2025년 6월부터 제주에서 전력시장 제도개선 시범사업이 시작됐다. 그전까지 국내 전력시장은 하루 전에 다음 날의 발전 계획을 확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바람과 햇빛은 계획대로 불고 비추지 않는다. 계획보다 많이 생산되면 그 초과분을 처리할 길이 없어 출력제어가 걸렸다. 시범사업은 여기에 15분 단위로 전기를 사고파는 실시간 시장을 추가했다. 초과 생산분이 실시간으로 소화될 통로가 생기자 강제 출력제어가 사라졌다.

다만 지역 환경단체들은 다른 지적을 내놓는다. 실시간 시장은 입찰 방식이라 낙찰되지 못한 사업자는 전기를 팔지 못하고, 팔지 못하면 발전기를 스스로 세울 수밖에 없다. 강제로 끄던 것이 자발적으로 끄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 실질은 같은데,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례가 보여 주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 제도와 시장 설계는 계통 문제를 실제로 완화할 수 있다. 이것은 성과다. 둘, 그럼에도 통계는 물리를 대신하지 못한다. 출력제어 0건이라는 숫자 아래에서 계통에 실제로 얼마나 여유가 있는지, 어떤 조건에서 한계에 닿는지는 그 숫자가 말해 주지 않는다. 그것을 알려면 계통의 물리를 직접 계산해 보는 수밖에 없다.

사고 난 뒤에 대응할 수 없다면, 남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다시 이베리아의 79초로 돌아가자. 928메가와트가 2초 만에 사라지는 상황에서 관제실의 운전원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면 답은 분명하다. 경보음을 인지하고, 화면을 읽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판단하고, 어떤 조치를 취할지 정하고, 실행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그 사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이 느려서가 아니다. 계통이 빨라졌기 때문이다.

사고가 시작된 뒤의 대응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남는 길은 하나다. 사고가 나기 전에,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미리 일으켜 보고 결과를 알아 두는 것이다. 어떤 조건에서 계통이 버티고 어떤 조건에서 무너지는지를 사전에 계산해 두면, 위험한 조건에 가까워지기 전에 운전 방식을 바꾸고, 보호장치 설정을 손보고, 취약한 지점에 설비를 보강할 수 있다. 사람의 판단을 사고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사고 이전으로 옮기는 것이다.

국가정보원 가이드라인에서 가장 묵직한 대목도 같은 발상에 서 있다. 침입을 100퍼센트 막을 수는 없다고 인정하고, 대신 침해가 일어나도 운영이 무너지지 않는 회복력을 앞세운다. 지진을 막을 수 없으니 무너지지 않는 건물을 짓자는 내진 설계와 같은 논리다.

그런데 내진 설계에는 구조 계산이 따라붙는다. 이 건물이 진도 몇까지 견디는지를 숫자로 내놓지 못하면 설계가 아니라 다짐이다. 계통의 회복력도 마찬가지다. 인버터의 몇 퍼센트가 동시에 조작되면 계통이 무너지는가. 이 질문에 숫자로 답할 수 없다면 보안 예산을 어디에 얼마나 써야 하는지도 정할 수 없고, 회복력은 구호에 머문다.

전력망의 충돌시험장

계산이 필요하다면 실제로 해 보면 되지 않을까. 안 된다. 전기가 끊기면 병원의 수술이 멈추고 공장의 생산 라인이 망가진다. 실험 삼아 전력망을 흔들어 볼 수는 없다.

같은 문제를 다른 산업은 이미 오래전에 해결했다. 자동차 회사는 안전성을 확인하려고 고객이 모는 차를 벽에 박아 보지 않는다. 똑같은 차를 따로 만들어 수백 번 부순다. 항공사는 승객을 태운 비행기의 엔진을 꺼 보며 비상 절차를 시험하지 않는다. 지상의 시험장에서 엔진을 수없이 망가뜨려 본다. 안전은 실제 운행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만들어진다.

전력망도 같은 것이 필요한데, 자동차와 달리 똑같은 것을 하나 더 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컴퓨터 안에 짓는다. 발전기와 인버터, 송전선과 변압기, 보호장치를 하나하나 수식으로 옮겨 담아 실제 계통과 똑같이 움직이는 복제본을 만든 뒤, 그 안에서 마음껏 사고를 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서는 송전선을 끊어 봐도 되고, 태양광 수천 곳을 동시에 꺼 봐도 되고, 해킹을 가정해 이상한 제어 명령을 넣어 봐도 된다.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문제는 이 복제본을 얼마나 정밀하게 만드느냐다. 여기서 계산 방식이 갈린다.

두 가지 계산 방식 — 성긴 시계와 촘촘한 시계

지금까지 계통 운영과 계획에 널리 쓰여 온 방식은 계통을 수십 밀리초(1,000분의 몇십 초) 간격으로 들여다본다. 그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평균값으로 뭉뚱그린다. 감시 카메라가 1초에 스무 장씩 찍는 것과 비슷하다. 회전체가 지배하던 계통에서는 이 정도로 충분했다. 계통이 그보다 느리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버터의 제어 회로는 1초에 수천 번 동작한다. 인버터들이 서로 간섭하며 만드는 진동, 전압이 급변할 때의 보호 동작, 설정의 미세한 차이가 부르는 연쇄 이탈은 모두 저 성긴 간격 사이에서 벌어진다. 카메라가 놓치는 순간에 사고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EMT 해석이다. EMT는 Electromagnetic Transient(전자기 과도현상)의 약자로, 전기가 순간적으로 요동치는 현상을 뜻한다. 이 방식은 계통을 마이크로초(100만분의 1초) 간격으로 계산한다. 초고속 카메라로 총알이 유리를 뚫는 순간을 찍는 것에 해당한다. 인버터 안의 제어 논리까지 모형에 담기 때문에, 인버터가 늘어난 계통에서 사고가 실제로 어떤 궤적을 그리는지 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다. 이베리아 정전의 원인을 규명할 때도 핵심 도구가 이 수준의 정밀 시뮬레이션이었다.

그런데 정밀함에는 값이 붙는다. 시간을 100만분의 1초 단위로 자른다는 것은, 단 1초 동안 벌어지는 일을 보기 위해 계산을 100만 번 반복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계통에 물린 인버터가 수백, 수천 대로 늘면 매 단계마다 풀어야 하는 방정식의 덩치도 함께 커진다. 그래서 지금까지 EMT 해석은 계통의 작은 조각을 떼어 내 대표적인 사고 몇 개만 확인하는 용도로 쓰여 왔다. 정밀하지만 느린 현미경이었던 셈이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 태풍 예보가 하는 일

여기서 앞의 결론이 되살아난다. 안전이 사전 계산에서 나온다고 할 때, 필요한 것은 정밀한 계산 한 번이 아니다.

태양광 10곳이 동시에 꺼지면 어떻게 되는가. 100곳이면. 1,000곳이면. 그 일이 냉방 수요가 몰리는 여름 오후에 벌어지면. 송전선 한 가닥의 고장과 겹치면. 해킹으로 인버터 설정이 조작된 상태라면. 조건 하나만 바꿔도 결과가 달라지므로, 답해야 할 질문은 덧셈이 아니라 곱셈으로 불어난다.

이런 상황을 다루는 방법을 기상청은 이미 갖고 있다. 태풍 경로를 예보할 때 기상청은 계산을 한 번만 하지 않는다. 시작 조건을 조금씩 다르게 준 수십 개의 계산을 동시에 돌리고, 그 결과들이 흩어지는 범위가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부채꼴 예상 경로가 된다. 하나의 미래를 맞히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미래들의 범위를 그려서 대비하는 방식이다.

계통의 안전도 같은 자리로 가야 한다. 하나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수천 개의 시나리오를 계산해야 한다. 정밀도는 EMT 수준이어야 하고, 횟수는 수천 번이어야 한다. 이 둘을 동시에 요구하는 순간, 정밀하지만 느린 현미경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병목은 여기다.

계산을 나눠서 한꺼번에 — HSEMT가 겨냥하는 자리

이 병목을 겨냥해 한국전기연구원이 개발하고 있는 것이 HSEMT(High-Speed ElectroMagnetic Transient simulator), 고속 전자기 과도 해석기다. 접근의 핵심은 계산을 잘게 쪼개 한꺼번에 처리하는 데 있다.

왜 그래픽카드로 전력망을 계산하는가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는 복잡한 일을 순서대로 빠르게 처리하도록 만들어졌다. 반면 그래픽처리장치(GPU), 흔히 그래픽카드라고 부르는 장치는 화면의 수백만 화소를 동시에 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단순한 계산을 동시에 아주 많이 하는 데 특화된 구조다.

박사 한 명이 어려운 문제를 순서대로 푸는 것과, 초등학생 수천 명이 쉬운 문제를 한꺼번에 푸는 것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 문제의 성격에 따라 어느 쪽이 유리한지가 갈린다.

계통 시뮬레이션은 후자에 가깝다. 인버터 수천 대의 거동은 저마다 같은 꼴의 계산이고, 조건만 다른 수천 개의 시나리오도 서로 같은 꼴이다. 나눠서 한꺼번에 처리하기에 알맞다.

여기서 속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계산이 빨라진다는 것은 같은 답을 조금 일찍 받아 본다는 뜻이 아니다. 계통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의 수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하루 걸리던 계산이 분 단위로 끝나면, 대표 사고 몇 개를 확인하던 자리에서 수천 개의 조건 조합을 훑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때 비로소 앞에서 쌓아 둔 질문들에 답이 나온다.

첫째, 회전체가 줄어든 계통이 실제로 어떤 궤적을 그리며 무너지는지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궤적을 꺾으려면 무엇을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도 계산할 수 있다. 여기서 후보로 거론되는 것이 그리드포밍 인버터다.

그리드포밍 인버터 — 관성을 흉내 내는 반도체

보통의 인버터는 계통이 만들어 놓은 60헤르츠 박자를 따라간다. 박자를 감지하고 거기에 맞춰 전기를 내보내므로, 박자를 만드는 쪽이 없어지면 함께 흔들린다.

그리드포밍 인버터는 반대로 스스로 박자를 만든다. 회전체가 하던 역할을 소프트웨어로 흉내 내서, 계통이 흔들릴 때 물러나는 대신 버텨 주도록 설계된 것이다. 다만 흉내이기 때문에 회전체처럼 공짜로 나오는 물리적 관성과는 성질이 다르고, 어디에 얼마나 넣어야 실제로 효과가 나는지는 계통 구성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계산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둘째, 제주 같은 지역에서 전기를 버려야 하는 진짜 이유를 가려낼 수 있다. 전기를 못 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송전선이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서는 경우다. 수도관이 굵기 이상의 물을 못 흘리는 것과 같다. 다른 하나는 선에는 여유가 있는데 그만큼을 흘리면 계통이 불안정해져 흔들릴 위험이 생기는 경우다. 앞의 것은 선을 늘려야 풀리고, 뒤의 것은 제어와 설비 보강으로 상당 부분 풀린다. 처방이 다른데 겉으로 보이는 결과는 똑같이 출력제어다. 정밀 계산은 이 둘을 구분해 주고, 그러면 버리지 않아도 될 전기가 얼마인지 나온다.

셋째, 사이버 침해 시나리오를 물리적 피해량으로 환산할 수 있다. 인버터의 몇 퍼센트가 동시에 조작되면 계통이 무너지는가. 특정 제조사 제품이 한꺼번에 이상 동작하면 어디부터 위험해지는가. 이 숫자가 나와야 회복력은 구호에서 설계 변수로 바뀌고, 보안 투자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근거가 생긴다.

정리하면 이렇다. 태풍이 지나간 뒤에 경로를 계산하는 예보는 없다. 예보의 가치는 태풍이 오기 전에 수많은 가능성을 미리 계산해 두는 데 있다. 전력망의 시뮬레이션도 같은 자리로 가야 한다. 현재의 발전량과 수요, 계통 상태를 입력으로 받아 지금 이 순간 어떤 사고가 위험한지를 상시로 계산해 두는 것이다. 실제 계통은 평온하더라도, 그 뒤의 컴퓨터 안에서는 매일 수천 번의 정전이 일어나고 있어야 한다. 현실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결론 — 전력망의 안전은 설비 용량이 아니라 미리 계산해 본 시나리오의 수로 잰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전기는 저장할 수 없어서 생산과 소비가 늘 같아야 하고, 그 균형을 지켜 온 것은 발전소 안에서 도는 수십 톤짜리 회전체였다. 회전체의 관성은 사고가 났을 때 몇 초를 벌어 줬고, 그 몇 초 안에서 사람이 판단하고 조치할 수 있었다. 재생에너지가 늘면서 그 자리를 인버터가 대신하게 됐는데, 이 부품 교체 하나가 두 가지를 동시에 바꿨다. 완충재가 사라져 사고의 진행이 사람의 반응 시간 아래로 내려갔고, 통신 접점이 수십만 개로 늘어 사고의 입구가 많아졌다. 이베리아에서 928메가와트는 2초 만에 사라졌고, 우크라이나에서는 메일 한 통이 변전소 30곳의 차단기를 내렸다.

사고 후 대응이 성립하지 않는 조건에서 안전을 만드는 방법은 사전 계산뿐이다. 그런데 그 계산은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한다. 인버터의 제어까지 담아내는 EMT 수준의 정밀도, 그리고 조건을 바꿔 가며 수천 개의 가능성을 훑는 규모다. 지금까지 이 둘은 양자택일이었다. 정밀하면 느리고, 빠르면 뭉개졌다. 둘을 함께 확보하려는 시도가 계산을 잘게 나눠 한꺼번에 처리하는 고속 EMT 해석이고, HSEMT가 겨냥하는 자리가 여기다.

제주의 표가 보여 주듯, 지표는 제도가 바뀌면 하루아침에 0이 될 수 있지만 물리는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다. 설비 용량, 보급 실적, 출력제어 횟수 같은 숫자들은 모두 계통의 겉면이다. 계통이 실제로 얼마나 버티는지는 그 겉면이 아니라, 무너지는 조건을 얼마나 많이 미리 계산해 봤는가에서 갈린다. 발전소를 짓는 속도만큼 계통을 들여다보는 계산에도 투자해야 한다는 결론이 여기서 나온다.

남는 물음은 이 계산이 어디까지 일상이 될 수 있는가다. 유럽은 이베리아 정전 이후 재생에너지 발전소가 전압 조절에 참여하도록 규정을 고쳐 2026년 3월 시행을 마쳤고, 한국은 전력망 사이버보안 가이드라인과 재생에너지 기본계획으로 제도의 틀을 세우는 중이다. 제도가 자리를 잡을수록, 그 제도가 요구하는 회복력을 숫자로 검증해 줄 계산 기반의 무게는 함께 커진다. 관제센터 한켠에서 수천 개의 가상 정전이 쉬지 않고 돌아가는 풍경이 언제 당연한 것이 되는지가, 인버터 시대 전력망의 성숙도를 재는 다음 눈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