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인문학을 권하는 말은 대개 인간의 물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자리에서 멈춘다. 그러나 물음이 같다는 사실만으로는 왜 하필 2,700년 전의 책을 붙들어야 하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말은 흔하다. 기업 임원 교육 과정에 고전 읽기가 들어가고, 서점에는 그리스 비극과 니체를 풀어 쓴 책이 쌓이고, 대학은 학과 통폐합을 앞두고 인문학의 가치를 호소한다. 그런데 정작 인문학이 무엇이고 왜 그것을 공부해야 하는지를 물으면 돌아오는 답은 거의 하나로 수렴한다.
인간의 물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답이다. 도구는 계속 새로워진다. 인공지능도, 스마트폰도, 원자력발전소도 고대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의 고민까지 새롭지는 않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질투하고, 성공을 욕망하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러니 같은 물음 앞에 섰던 옛사람들이 남긴 생각을 빌려 오늘을 다시 보라고 한다.
듣기 좋고,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이 답에는 구멍이 있다. 물음이 같다는 것만으로는 왜 오래된 책이어야 하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사랑과 질투와 죽음이라면 지난달에 나온 소설에도 들어 있고, 질투의 작동 방식이라면 현대 심리학이 호메로스보다 훨씬 정밀하게 기술한다. 물음의 동일성을 근거로 삼는 순간, 고전은 같은 내용을 더 불편한 문체로 담아 놓은 낡은 판본이 된다. 굳이 읽어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
고전을 읽어야 할 이유는 반대편에 있다. 옛사람들이 우리와 같아서가 아니라, 결정적인 대목에서 우리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 어긋남이 우리가 자연법칙처럼 여기며 사는 전제들을 밖에서 비춰 준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에서 시작한다. 1권에서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사제의 딸을 돌려주게 되자 그 보상으로 아킬레우스에게 배당된 여자 포로 브리세이스를 빼앗는다. 아킬레우스는 전장에서 물러나고, 9권에서 아가멤논이 사절단을 보내 막대한 재물과 브리세이스의 반환을 제안해도 거절한다. 그사이 동료들은 죽어 나간다.
오늘의 독자는 이 대목에서 대개 당황한다. 전쟁의 승패와 동료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여자 포로 하나 때문에 몇 권에 걸쳐 삐쳐 있는 영웅이 유치해 보인다. 그러나 이 반응 자체가 읽을 거리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게라스(geras)는 전투가 끝난 뒤 공동체가 각자의 공로에 따라 나누어 주는 몫이다. 무기, 가축, 포로 같은 물건이지만, 기능으로 보면 재산보다 등급 표시에 가깝다. 그리고 티메(timē)는 그 몫으로 측정되는 명예다. 여기서 명예는 바깥에서 눈에 보이는 크기로 배분된다. 몫을 빼앗기면 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존재의 크기가 실제로 줄어든다.
그래서 9권의 거절은 계산이다. 재물을 더 얹어 주겠다는 제안은 이미 한 번 몫을 회수당했다는 사실, 즉 배분의 권한이 아가멤논에게 있다는 사실을 지우지 못한다. 아킬레우스가 거절한 대상은 재물이 아니라 그 권한 구조다.
어긋남이 드러내는 것
우리는 명예란 남이 어떻게 대하든 내 안에 남아 있는 것이며, 남의 인정에 흔들리는 사람은 미성숙하다고 여긴다. 이것은 관찰이 아니라 전제다. 근대 이후에 자리 잡은 특정한 자아 관념이며, 그 안에서 사는 동안에는 전제라는 것조차 보이지 않는다.
물속의 물고기가 물을 보려면 물 밖의 무언가를 봐야 한다. 명예를 외부의 배분으로 이해했던 사회를 통과해 본 독자만이 자기 시대의 자아 관념을 하나의 선택지로 볼 수 있다.
인문학을 권하는 흔한 말은 이 대목을 정확히 반대로 요약한다. 옛사람들도 우리처럼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고 정리하는 순간, 배울 것이 지워진다. 남는 것은 자기가 이미 가진 감정을 옛 텍스트에서 다시 확인하는 절차뿐이다.
고전이 답을 주지 않고 질문만 남긴다는 말도 사실과 다르다. 고전은 답을 준다. 강하고 불쾌한 답을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1권에서 어떤 사람은 본성상 노예라고 논증한다. 논증의 구조는 이렇다. 도구에는 생명 없는 도구와 살아 있는 도구가 있고, 이성을 스스로 발휘하지 못하되 남의 이성을 알아듣기는 하는 사람은 살아 있는 도구에 해당하며, 그런 사람에게는 지배받는 편이 유익하다. 노예제를 자연에 근거한 제도로 논증했다는 점에서, 이 대목은 그를 읽는 독자에게 도망갈 자리를 주지 않는다.
플라톤은 『국가』 6권에서 배의 비유를 든다. 선주는 덩치는 크지만 눈과 귀가 어둡고 항해술을 모른다. 선원들은 저마다 자기가 키를 잡아야 한다며 선주에게 아첨하고, 정작 별과 바람과 계절을 아는 사람은 쓸모없는 몽상가로 취급된다. 다수의 판단에 배를 맡기는 체제에 대한 불신이 여기에 있다. 민주정을 자명한 선으로 배우고 자란 독자에게 이 비유는 반론의 대상이지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고전을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으로만 규정하면 부딪칠 상대가 사라진다. 남는 것은 안전하게 소비되는 교양이다.
이런 문장 앞에서 독자에게는 감상할 자리가 없다. 왜 받아들일 수 없는지를 스스로 논증해야 하고, 논증하려면 상대의 논증을 먼저 정확히 재구성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결론을 거부하려면 그의 전제 가운데 어느 것이 무너지는지를 짚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가 무엇을 근거로 사람의 동등함을 믿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대개는 확인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발견이 공부다.
어긋남은 결론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8권에서 자기 의지가 자기에게 명령하는데 자기가 따르지 않는 사태를 길게 파고든다. 몸에 명령하면 몸은 즉시 움직이는데 마음에 명령하면 마음은 저항한다는 관찰이다. 현대 독자에게는 익숙한 경험이므로 그대로 공감하고 넘어가기 쉽다. 그러나 그는 이 분열을 의지력의 부족이 아니라 인간 안에 들어온 균열의 증거로 읽었고, 그 독법에서 원죄론과 은총론이 나온다. 같은 경험을 두고 우리는 자기계발의 문제로, 그는 존재론의 문제로 다루었다. 읽을 가치는 공감이 닿지 않는 이 설명 틀의 격차에 있다.
인문학을 권하는 자리에서 『전도서』 1장 9절이 자주 인용된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는 구절이다.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옮긴 문장이며, 강연자들은 이 구절을 인간이 마주하는 문제가 시대를 건너 되풀이된다는 뜻으로 읽고 옛 지혜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근거로 삼는다.
전도서 1장의 어조는 그렇지 않다. 이 장은 세대가 가고 세대가 오지만 땅은 그대로 있고, 해가 떴다가 져서 다시 뜬 자리로 서둘러 돌아가고,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도 바다는 차지 않으며, 그 물이 다시 강으로 돌아간다고 서술한다. 반복의 목록이다. 그리고 그 목록의 결론이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진술이다. 화자 코헬렛에게 반복은 피로였고, 이 책 전체를 여닫는 낱말은 헤벨(hevel), 곧 입김이나 수증기처럼 붙잡히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어 성경은 이를 헛됨으로 옮긴다.
그러니 이 인용은 방향이 뒤집힌 채 유통된다. 모든 수고가 자취 없이 되풀이될 뿐이라는 탄식을, 인간의 물음은 영원하다는 낙관의 근거로 쓴다. 문장은 살아남고 어조는 버려졌다.
인용의 정확성만 문제는 아니다. 텍스트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문장만 꺼내 원래 맥락과 무관한 자리에 놓는 이 습관은, 인문학 훈련이 막아야 할 대표적인 독법이다. 인문학을 권하는 말 자체가 그 독법으로 만들어져 있다면, 권유와 내용이 서로를 반박한다.
인문학 옹호론이 유독 감상적인 답에 머무는 데에는 말하는 자리의 사정이 있다. 그 말은 대개 기업 특강, 교양 강연, 학과 존치를 설득하는 자리에서 나온다. 청중은 정해진 시간을 쓰고 무언가 손에 쥐고 돌아가야 하고, 예산을 배정하는 쪽은 성과로 번역되는 언어를 요구한다.
이 조건에서 팔리는 답은 정해져 있다. 통찰, 창의성, 공감 능력, 융합적 사고 같은 성과어다. 반대로 팔리지 않는 답도 정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 논증을 세 시간 동안 재구성하고 그것을 반박하지 못한 채 강의실을 나서는 경험은 상품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옹호론은 어긋남을 지우고 닮음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운다. 옛사람도 우리와 같았다는 말은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번역된 상품과 원래 훈련은 다르다. 인문학 훈련의 실체는 옛 책을 사랑하는 태도가 아니라 저항하는 텍스트를 다루는 절차다. 요약해 주지 않는 글, 전제를 문장 밖에 숨긴 글, 지금의 상식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글을 붙들고 저자가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주장하는지 재구성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함께 들어간다. 남의 논증을 상대가 인정할 만한 형태로 복원하는 능력, 자기 전제가 노출될 때 방어하지 않고 살펴보는 태도, 그리고 결론이 나지 않는 상태를 견디는 지구력이다.
이 능력이 지금 희소해진 데에는 조건의 변화가 있다. 그럴듯한 문장은 이제 비용 없이 생산된다. 요약도, 해설도, 매끄러운 논평도 마찬가지다. 모자란 쪽은 그 텍스트가 맞는지 판별하는 능력이다. 논증을 재구성해 본 사람만이 어디에 전제가 빠졌는지 알아본다.
이 답은 인간의 물음이 영원하다는 말보다 덜 아름답다. 대신 검증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인문학을 공부했는지는 자기와 반대되는 논증을 얼마나 정확히 복원하는가로 확인된다. 읽은 책의 목록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기준은 요약본을 훑는 일과 실제로 공부하는 일을 갈라놓는다.
고전이 값진 이유는 그것이 우리와 닮아서가 아니라 결정적인 대목에서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 논지는 세 갈래로 떠받쳐진다.
첫째, 닮음은 고전만의 자산이 아니다. 사랑과 질투와 죽음을 다루는 텍스트는 어느 시대에나 넘치고, 감정의 작동 원리라면 현대의 학문이 더 정밀하다. 반면 명예를 공동체가 배분하는 몫으로 이해했던 사회는 지금 어디에도 없다. 옛 텍스트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그 어긋남이고, 어긋남만이 자기 시대의 전제를 밖에서 보게 한다.
둘째, 고전은 답을 준다. 자연적 노예론과 다수 판단에 대한 불신은 질문이 아니라 결론이다. 독자는 그 결론과 싸워야 한다. 싸우려면 먼저 상대의 논증을 정확히 복원해야 하고, 복원하는 동안 자기가 무엇을 근거 없이 믿어 왔는지 드러난다. 고전을 끝나지 않은 질문으로만 규정하는 정의는 이 부딪침을 없애고 감상만 남긴다.
셋째, 옹호론이 감상 쪽으로 기우는 것은 말하는 자리의 조건 때문이다. 강연과 교양 시장은 불편함을 상품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 조건을 걷어내고 남는 실체는 저항하는 텍스트를 다루는 능력이며, 유창한 문장이 무한히 공급되는 지금 희소해진 것도 이 능력이다.
그래서 쟁점은 인문학의 본체를 어디에 두느냐로 좁혀진다. 위안에 둔다면 옛 텍스트를 고집할 이유가 약하고, 훈련에 둔다면 어긋나는 텍스트일수록 값이 올라간다. 두 답은 같은 책을 권하면서 전혀 다른 읽기를 요구한다.
남는 물음은 그 훈련을 어디서 유지하는가다. 논증을 복원하고 반박당하고 다시 복원하는 과정은 규모를 키우기 어렵고, 사람이 시간을 들여 봐 주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요약과 해설의 값이 0에 수렴하는 동안, 요약되지 않는 것을 다루는 훈련의 값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 훈련이 대학의 세미나실 바깥에서 어떤 형태로 남을 수 있는지는 아직 답이 나와 있지 않다.
본문에 언급된 대목: 『일리아스』 1권과 9권,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권, 플라톤 『국가』 6권,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8권, 『전도서』 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