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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임금님」의 원작과 개작 — 안데르센이 바꾼 결격 조건과 결말

보이지 않는 옷감 이야기는 안데르센의 창작이 아니라 그보다 500년 앞선 카스티야의 예화집에서 왔다. 그가 손댄 곳은 두 군데였고, 이 이야기가 무엇을 겨냥하는지는 그 두 군데에서 결정된다.

「벌거벗은 임금님」에는 지목된 사건이 없다

널리 도는 설명 가운데 하나는 이 이야기를 어떤 실제 사건에 빗댄 고발문으로 읽는다. 어느 왕의 실정, 어느 궁정의 추문, 어느 정치인의 몰락 같은 것이 배후에 있으리라는 추측이다. 그런 사건은 확인되지 않는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이 이야기의 표적을 밝힌 적이 없고, 일기에도 편지에도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겨냥했다는 진술은 남지 않았다.

대신 남은 것은 개작의 흔적이다. 안데르센은 이 이야기를 창작하지 않았다. 500년 넘게 유럽을 돌아다니던 뼈대를 가져다 두 군데를 고쳤고, 고친 자리가 어디인지는 원작과 나란히 놓으면 바로 드러난다. 무엇을 겨냥한 글인지 물으려면 배후의 사건이 아니라 그 두 군데를 봐야 한다.

1335년 카스티야의 원작에서 옷감은 적자 여부를 가리는 장치였다

가장 오래된 문헌 판본은 카스티야의 귀족 돈 후안 마누엘(1282~1348)이 1335년에 엮은 『콘데 루카노르(El Conde Lucanor)』 제32화다. 카스티야는 오늘날 스페인 중북부를 차지하던 중세 왕국이고, 후안 마누엘은 왕족 출신 영주이자 작가였다. 이 책은 예화집(例話集)이다. 루카노르 백작이 곤란한 일을 당할 때마다 조언자 파트로니오가 옛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고 거기서 교훈을 뽑아내는 구성으로, 50편 남짓이 같은 틀로 반복된다. 서술 목적이 오락보다 처세 훈련 쪽에 있다는 뜻이다.

제32화의 줄거리는 익숙하다. 사기꾼 셋이 왕에게 찾아와 놀라운 옷감을 짜 주겠다고 한다. 다만 조건이 하나 붙는다. 그 옷감은 아버지의 적자(嫡子)가 아닌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왕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왕위 계승의 정당성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확인하러 보낸 신하도, 그다음 신하도 같은 이유로 입을 다문다. 결국 왕은 벌거벗은 채 말을 타고 도성을 돈다.

여기서 침묵을 만드는 힘은 명예다. 중세 카스티야에서 명예(honra)는 개인의 자존심이 아니라 신분·상속·혼인의 자격을 떠받치는 사회적 자산이었다. 적자가 아니라는 판정은 재산과 지위를 한꺼번에 잃는 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옷감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그 사실이 자기에 관해 무엇을 증명하는지를 더 두려워한다.

침묵을 깨는 인물이 원작에서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왕의 말고삐를 잡던 흑인 마부다. 잃을 명예가 애초에 없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를 누구의 아들로 보든 상관없다고 말한 뒤, 자기가 눈이 멀었거나 왕이 벌거벗었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한다. 왕은 처음에 그를 모욕하지만, 한 사람이 말하자 다음 사람이 따라 말하고, 결국 왕까지 두려움을 버리고 속임수를 알아차린다. 이야기는 거기서 닫힌다.

세르반테스는 같은 장치를 피의 순수성 검사로 바꿨다

같은 뼈대는 이후에도 반복해서 쓰였다. 민담 분류에서는 이 유형에 아르네·톰프슨·우터 체계의 1620번이 붙어 있다. 세계의 민담을 줄거리 유형별로 번호를 매겨 정리한 목록인데, 같은 번호가 붙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지역의 이야기들이 같은 구조를 공유한다는 뜻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주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막간극 「기적의 무대(El retablo de las maravillas)」다. 1615년 『여덟 편의 희극과 여덟 편의 새 막간극』에 실렸다. 막간극은 긴 연극 사이에 끼워 넣던 짧은 희극이다. 사기꾼 찬파야와 치리노스가 시골 마을에 인형극 무대를 들고 와서, 이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은 개종자의 피가 섞였거나 적법한 혼인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조건이 바뀐 이유는 시대에 있다. 16~17세기 스페인에는 '피의 순수성(limpieza de sangre)' 규정이 작동하고 있었다. 유대교나 이슬람에서 개종한 집안의 후손을 공직·성직·대학에서 배제하던 제도다. 조상 중에 개종자가 있다는 의심만으로 경력이 끝날 수 있었으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자백이 된다. 마을 유지들은 빈 무대를 향해 감탄한다.

결말은 원작과 다르다. 사정을 모르고 들어온 병참 장교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그 말을 믿는 대신 그를 개종자로 몰아붙인다. 장교는 칼을 뽑고 난장판이 벌어진다. 진실을 말한 사람이 승리하는 대신 표적이 된다.

안데르센은 검사 항목을 태생에서 직책 적격성으로 옮겼다

안데르센이 이 이야기를 접한 경로는 확인되어 있다. 그는 스페인어를 읽지 못했고, 에두아르트 폰 뷜로가 옮겨 1836년 라이프치히에서 나온 독일어 선집 『노벨렌부흐』 제4권에 「세상 돌아가는 꼴이 그렇다(So ist der Lauf der Welt)」라는 제목으로 실린 판본을 보았다. 안데르센 자신이 일기와 작품 주석에서 출처를 밝혔으므로 이 계보는 추정이 아니다. 그가 쓴 「임금님의 새 옷(Keiserens nye Klæder)」은 1837년 4월 7일 코펜하겐의 라이첼 출판사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제1집 제3권으로 나왔고, 같은 책에 「인어공주」가 함께 실렸다. 한국에서 굳어진 제목은 「벌거벗은 임금님」이지만 원제는 임금이 벌거벗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바꾼 첫 번째 자리는 옷감의 조건이다. 안데르센 판본에서 옷감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적자가 아닌 사람이 아니라, 제 직책에 어울리지 않거나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다.

Ingen vilde lade sig mærke med, at han intet saae, for saa havde han jo ikke duet i sit Embede, eller været meget dum.

아무도 자기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티를 내려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제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거나 몹시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임금님의 새 옷」,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제1집 제3권, 라이첼, 1837(초판 철자)

조건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걸리는 사람의 범위가 달라진다. 태생은 왕과 왕족의 문제다. 원작에서 상속을 걱정하는 사람은 왕과 그 계승 구도에 얽힌 사람들이고, 마부는 애초에 검사 대상 바깥에 있다. 직책 적격성은 다르다. 직책을 가진 사람은 전부 걸린다. 대신도, 감독관도, 시종도, 관직을 바라보는 사람도 모두 자기가 그 자리에 어울리는지를 매일 증명하며 사는 처지가 된다. 검사기 하나가 궁정 전체에 걸리도록 설계가 바뀌었다.

여기에 하나가 더 붙는다. 태생은 바꿀 수 없지만 이미 정해진 사실이다. 적자냐 아니냐는 본인이 어떻게 처신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반면 '직책에 어울리는가'는 판정하는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오늘과 내일이 달라진다. 사람들이 옷감 앞에서 침묵하는 이유가 혈통 은폐에서 평판 관리로 옮겨 가고, 그와 함께 침묵이 한 번의 위기 대응에서 상시적인 처신으로 옮겨 간다.

같은 뼈대, 세 번 바뀐 결격 조건 보이지 않는 옷감 이야기의 세 판본에서 결격 조건, 잃게 되는 것, 먼저 진실을 말한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비교한 표. 같은 뼈대, 세 번 바뀐 결격 조건 1335 · 카스티야 엘 콘데 루카노르 32화 1615 · 스페인 기적의 무대 1837 · 덴마크 벌거벗은 임금님 결격 조건 잃게 되는 것 먼저 말한 사람 아버지의 적자인가 유대·무어 혈통이 없는가 혼인 중 태어났는가 직책에 어울리는가 어리석지 않은가 명예와 상속권 신분과 공직 자리와 평판 왕의 흑인 마부 지킬 명예가 없는 자 지나가던 병참 장교 곧 개종자로 몰림 구경하던 어린아이 아직 체면이 없는 자
세 판본은 줄거리를 공유하지만 결격 조건이 다르다. 결격 판정이 무엇을 앗아 가느냐에 따라 침묵하는 집단의 범위도 달라진다.

진실을 말하는 자리에 마부 대신 아이가 들어왔다

두 번째로 바꾼 자리는 결말이다. 안데르센의 초고는 아이 없이 끝났다. 임금이 행진하고 사람들이 없는 옷을 찬탄하며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상태로 이야기가 닫혔다. 원고가 이미 인쇄소에 넘어간 뒤에 안데르센은 결말을 바꿔 아이의 외침을 집어넣었다. 마감 직전의 교체였다.

바뀐 결말에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원작의 마부와 자리는 같지만 성격이 다르다. 마부는 신분 질서의 바깥에 서 있기 때문에 말한다. 잃을 명예가 없으므로 손해 계산이 성립하지 않는다. 아이는 그 질서를 아직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말한다. 무엇을 잃는지 모르므로 계산 자체를 하지 않는다. 앞의 것은 신분 구조의 밑바닥에서 나오는 발언이고, 뒤의 것은 학습되기 전의 발언이다. 안데르센이 고른 쪽은 뒤였고, 그 선택은 침묵의 원인을 신분이 아니라 사회화에 둔다.

1872년의 회상을 창작 동기로 쓸 수 없는 이유

결말 교체의 배경으로 자주 인용되는 일화가 있다. 안데르센이 어린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프레데릭 6세를 보러 갔다가 임금도 사람일 뿐이라고 소리쳤고 어머니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는 이야기다.

이 회상이 기록된 시점은 1872년이다. 작품이 나온 1837년으로부터 35년 뒤이고, 그때는 이미 이 이야기가 그의 대표작이 된 다음이다. 자기 작품의 유래를 설명하는 노년의 진술은 작품에 맞춰 다듬어지기 쉽다. 결말 교체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과 그 동기가 이 일화라는 것은 증거의 무게가 다르다.

아이가 외친 뒤에도 행진은 멈추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대개 정직한 한마디가 거짓을 무너뜨린다는 쪽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안데르센이 실제로 쓴 마지막 문단은 그 반대에 가깝다.

Det krøb i Keiseren, thi han syntes, de havde Ret, men han tænkte som saa: "nu maa jeg holde Processionen ud". Og Kammerherrerne gik og bar paa Slæbet, som der slet ikke var.

임금은 속이 오싹했다. 저들 말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이 행진을 끝까지 버텨야 한다." 그리고 시종들은 있지도 않은 옷자락을 받쳐 들고 걸어갔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임금님의 새 옷」, 1837(초판 철자)

아이가 외치고 군중이 따라 외치는 데까지는 통념대로다. 그다음이 다르다. 임금은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행진을 계속하고, 시종들은 없는 옷자락을 오히려 더 받쳐 든다. 거짓이 무너진 자리에서 무너진 것은 믿음뿐이고 대오는 그대로다. 진실이 밝혀졌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마지막 장면이다.

원작과 견주면 차이가 분명해진다. 후안 마누엘의 이야기는 왕까지 두려움을 버리고 속임수를 깨닫는 데서 끝난다. 폭로가 인식의 회복으로 이어지고 사건이 종결된다. 안데르센은 인식의 회복까지만 허용하고 그 뒤를 잘라 낸다. 임금은 알았고 백성도 알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마감 직전에 그가 덧붙인 것은 아이의 외침만이 아니다. 그 외침이 통하지 않는 장면도 함께 붙었다.

이렇게 읽으면 이야기의 표적이 좁혀진다. 사기꾼은 처벌받지 않고 무대에서 사라진다. 임금은 어리석지만 거짓을 만든 사람은 아니다. 끝까지 남아서 거짓을 지탱하는 것은 옷자락을 받쳐 든 시종들, 곧 자기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이미 무너진 거짓을 계속 연기하는 사람들이다. 결격 조건을 태생에서 직책으로 바꾼 개작과 이 결말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후원으로 살아간 작가가 후원 체계를 그렸다

안데르센의 위치를 보면 이 결말이 왜 이렇게 닫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오덴세의 구두 수선공 아들로 태어났다. 열네 살에 코펜하겐으로 올라가 극장 언저리를 떠돌다가 왕립극장 운영진의 일원이던 요나스 콜린의 눈에 들었고, 콜린이 학비를 대 준 덕에 학교를 마쳤다. 작가로 자리를 잡은 뒤에도 그의 생활은 상류층의 후원과 초대에 매여 있었다. 살롱에 불려 가 자기 작품을 낭독하는 일이 수입이자 사교였다.

이 처지는 서술의 강조점과 생략을 함께 설명한다. 후원받는 사람은 자기 자리가 남의 평가로 유지된다는 것을 매일 확인한다. '이 자리에 어울리는가'라는 질문은 그에게 비유가 아닌 실무였고, 그래서 그 질문이 옷감의 조건 자리로 들어갔다. 동시에 그는 그 체계를 무너뜨릴 처지가 아니었다. 행진을 끝내는 결말, 즉 임금이 물러나거나 시종들이 옷자락을 놓아 버리는 결말을 쓰지 않은 것은 상상력의 한계라기보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에 가깝다.

1837년 덴마크의 정치 조건도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당시 국왕은 프레데릭 6세였고, 덴마크는 1849년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절대왕정이었다. 임금을 끌어내리는 결말을 쓸 수 있는 지면이 아니었다. 왕조 자체가 아니라 왕조를 떠받치는 사람들의 처신으로 초점을 옮긴 것은, 검열 아래에서 쓸 수 있는 이야기의 형태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특정 궁정을 겨냥한 풍자로 좁혀지지는 않는다. 겨냥한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조건이기 때문이다. 결격 조건을 걸어 두면 그 조건에 걸릴 것이 있는 사람은 전부 침묵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작동 원리이고, 이 원리는 카스티야의 상속 제도에서도, 스페인의 혈통 규정에서도, 덴마크의 관직 사회에서도 똑같이 돌아간다. 세 판본이 각각 자기 시대에서 가장 두려운 항목을 골라 그 자리에 끼워 넣었을 뿐이다.

결론 — 고발 대상은 임금이 아니라 결격 판정을 두려워한 자리 전체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원작자를 묻는 물음에는 두 겹의 답이 있다. 지금 읽히는 형태를 만든 사람은 안데르센이고, 1837년 4월에 발표했다. 뼈대를 만든 사람은 1335년 카스티야의 돈 후안 마누엘이며, 안데르센은 1836년 독일어 번역을 통해 그것을 읽었다. 무엇을 고발하려 했느냐는 물음에는 특정 사건을 지목하는 답이 없다. 대신 그가 원작을 고친 두 자리가 대답을 대신한다.

첫째, 옷감의 결격 조건을 태생에서 직책 적격성으로 옮겼다. 원작에서 검사에 걸리는 사람은 왕위 계승선에 놓인 소수였지만, 바뀐 조건에서는 자리를 가진 사람 전원이 걸린다. 침묵의 이유가 혈통 은폐에서 평판 관리로 바뀌고, 그와 함께 침묵이 일회성 위기 대응에서 일상적 처신으로 바뀐다. 둘째, 결말에 아이의 외침을 넣으면서 그 외침이 통하지 않는 장면까지 함께 넣었다. 임금은 알고도 행진을 계속하고 시종들은 없는 옷자락을 더 높이 든다. 폭로가 아무것도 무너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야기가 멈춘다.

두 개작은 같은 곳을 가리킨다. 거짓을 만든 사기꾼도, 거짓에 속은 임금도 아니라, 결격 판정을 두려워해 거짓을 유지하는 자리들이다. 안데르센 자신이 그런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깎지 않고 오히려 설명한다. 바깥에서 던진 야유가 아니라 안에서 그린 도면이기 때문에 임금을 끌어내리는 대목이 없다.

남는 물음은 결말의 해석이다. 안데르센이 인쇄 직전에 아이를 넣은 것을 두고, 침묵의 주술이 한마디에 깨질 만큼 약하다는 쪽으로 읽을 수도 있고, 깨진 뒤에도 대오가 유지될 만큼 질기다는 쪽으로 읽을 수도 있다. 본문은 두 장면을 잇달아 배치하고 어느 쪽에도 판정을 내리지 않는다. "임금이 벌거벗었다"는 말이 오늘날 관용구로 쓰일 때 대개 앞의 장면만 인용되지만, 안데르센이 마지막에 적어 둔 문장은 뒤의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