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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사 · 불교

부처의 불교와 현대 불교 사이의 거리 — 연대순 증거로 확인되는 것과 19세기 이후 만들어진 것

부처가 남긴 것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증거는 갈수록 얇아지고, 대신 19세기 식민지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두꺼운 지층이 드러난다. 오늘날 '원래 불교'라 불리는 상(像)이 어디서 왔는지를 남아 있는 물증의 연대순으로 따라간다.

사람이 죽은 뒤 2400년쯤 지나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밝히려는 작업은, 목격자가 모두 사라진 사건을 물증만으로 재구성하는 일과 절차가 같다. 먼저 증거를 모으고, 각 증거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인하고, 사건과 증거 사이에 놓인 시간을 계산한다. 불교의 경우 이 절차를 정직하게 밟으면 예상 밖의 결과가 나온다. 가장 오래된 물증은 오늘날 불교의 핵심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거의 말하지 않고, 그 핵심들은 훨씬 나중의 지층에서 발견된다.

이 글의 주장은 하나다. 부처가 의도한 불교는 남아 있는 증거로 확정할 수 없고, 지금 그 이름으로 통용되는 상(像)은 19세기 이후 식민지 아시아에서 만들어졌으며, 그 제작이 언제나 '원래대로 돌아가자'는 복원의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변화라는 사실 자체가 가려졌다. 이 주장을 증거의 연대순으로 확인해 나간다.

01 — 증언이 도착한 시각부처가 언제 죽었는지부터 확정되지 않는다

사건 기록의 첫 항목은 날짜다. 그런데 고타마 붓다가 언제 죽었는지에 대해 학계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전통 연대는 스리랑카의 연대기 『디빠왐사(島史)』와 『마하왐사(大史)』에 실린 계산에서 나왔다. 이 계산을 그대로 따르면 기원전 543년 또는 544년이고, 아소카 왕의 즉위 연대를 서양 사료와 대조해 보정하면 기원전 486년 또는 483년이 된다. 앞의 연대는 불교권에서, 뒤의 연대는 근대 학계에서 오래 통용됐다.

1988년 독일 괴팅겐 근교에서 이 문제만 다루는 학술회의가 열렸다. 인도학자 하인츠 베헤르트가 주관했고, 결과는 『역사적 붓다의 연대(Die Datierung des historischen Buddha)』라는 제목으로 1991년과 1992년에 걸쳐 여러 권으로 나왔다. 이 회의에 제출된 몰년 추정치는 기원전 486년부터 기원전 261년까지 200년 넘게 벌어졌다. 베헤르트 자신은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원정 이전, 대략 기원전 400년에서 350년 사이로 보았다. 리처드 곰브리치는 기원전 400년쯤을 제시하면서 그 수치가 어림수이며 오차 범위가 넓다는 점을 스스로 밝혔다.

수사의 출발점에 200년의 오차가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정보다. 인도 고대사에는 연대를 못 박을 만한 외부 기준점이 거의 없고, 있는 기준점은 대부분 아소카 왕의 비문뿐이다. 부처의 생애는 그 기준점에서 거꾸로 세어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문서는 몇 세대 뒤에 도착했다

부처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말이라고 전해지는 것은 팔리어로 된 경전 모음, 곧 삼장(三藏, 띠삐따까)이다. 팔리어는 고대 인도의 속어 계열 언어이고, 삼장은 율(律)·경(經)·논(論) 세 묶음을 가리킨다. 이 문헌은 수백 년 동안 암송으로만 전해졌다.

스리랑카 연대기는 기록 시점을 명시한다. 왓타가마니(발라감바) 왕 치세에 기근과 전쟁이 겹쳐 암송자 집단이 끊길 위험이 생기자 승려들이 삼장과 그 주석을 책에 옮겨 적었다고 적는다. 왕의 재위는 통상 기원전 29년에서 17년으로 잡힌다. 장소는 마탈레 인근의 알루비하라 석굴로 전한다. 부처의 몰년을 기원전 400년 언저리로 잡아도 300년 이상, 전통 연대를 따르면 450년 이상이 구전으로 지나간 셈이다.

남은 사본은 그보다 훨씬 늦다. 그레고리 쇼펜이 1991년 논문에서 지적했듯, 팔리 문헌은 이른바 '초기 문헌'일수록 오히려 아주 늦은 사본 전통으로만 전해진다. 그는 태국 북부의 팔리 사본을 조사한 오스카어 폰 히뉘버의 보고를 근거로, 현존하는 팔리 사본 자료의 대부분이 18세기 후반보다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실물로 남은 가장 오래된 불교 사본은 팔리 삼장이 아니다. 1994년 대영도서관이 자작나무 껍질에 쓰인 두루마리 29점을 입수했다. 카로슈티 문자로 간다리어를 적은 것으로, 간다라 지역(오늘날 파키스탄 북부와 아프가니스탄 동부)에서 나왔고 서기 1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리처드 살로몬은 이 두루마리를 다르마굽타카(법장부)라는 부파의 것으로 보았다. 즉 실물 증거의 상한선도 부처 사후 400년에서 500년 사이에 걸린다.

증거와 사건 사이의 간격

부처의 몰년: 기원전 486년~261년 사이에서 확정되지 않음. 팔리 삼장의 문자화: 기원전 29~17년. 현존 최고(最古) 불교 사본: 서기 1세기 전반의 간다라 두루마리. 팔리 사본 대다수: 18세기 후반 이후.

02 — 가장 오래된 물증연대가 확정되는 최초의 불교 증거에는 사성제도 열반도 없다

연대와 장소가 함께 확정되는 불교 자료는 딱 한 종류다.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가 기원전 3세기 중엽에 바위와 돌기둥에 새기게 한 비문이다. 돌은 옮겨 쓰이지 않았고 후대 편집자의 손을 타지 않았다. 사료로서의 조건은 어떤 경전보다 낫다.

비문에서 아소카가 반복해 권하는 것은 '담마'다. 그가 담마의 내용이라고 밝힌 대목은 이렇다.

Dhamma sadhu, kiyam cu dhamme ti? Apasinave, bahu kayane, daya, dane, sace, socaye.

담마는 좋은 것이다. 그런데 담마란 무엇인가. 허물이 적음, 선함이 많음, 자비, 베풂, 진실, 깨끗함이다.

아소카 석주 법칙 제2장, 프라크리트 원문. 델리 토프라 석주본.

이 목록에 없는 것을 세어 보면 목록에 있는 것보다 흥미롭다. 사성제(고집멸도)가 없다. 팔정도가 없다. 열반이 없다. 무아가 없다. 연기(緣起)도 없다. 대신 아소카는 여러 비문에서 '스바가', 곧 천상에 태어나는 일을 목표로 거론한다.

이 공백을 두고 해석은 갈린다. 데바닷타 라마크리슈나 반다르카르나 베니마다브 바루아처럼 아소카의 담마를 국가가 후원한 불교 포교로 읽는 견해가 있고, 라다 쿠무드 무케르지처럼 사성제·팔정도·열반이 빠진 이상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로밀라 타파르와 나얀조트 라히리는 세 번째 길을 택한다. 아소카의 담마가 불교에서 자양을 얻었으되, 다종교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별개의 윤리 강령이었다고 본다.

어느 쪽을 택하든 남는 사실이 있다. 기원전 3세기 중엽에 국가 권력이 공개적으로 새겨 놓은 불교는 살생을 줄이고 부모를 공경하고 베풀고 진실을 말하고 다른 신앙을 헐뜯지 말라는 윤리의 목록이었다. 명상은 거기에 없다.

아소카가 고른 독서 목록

더 구체적인 증거가 하나 있다. 1840년 토머스 시모어 버트 대위가 라자스탄의 바이라트에서 찾아낸 작은 석판이다. 캘커타-바이라트 소칙령 또는 바브라 칙령이라 부르고, 지금은 콜카타의 인도박물관에 있다. 여기서 아소카는 마가다 왕의 자격으로 승가에 인사한 뒤 불·법·승에 대한 신앙을 밝히고, 정법이 오래가도록 승려·비구니·재가 남녀가 자주 듣고 새겼으면 하는 일곱 편의 글을 지목한다.

Vinaya-samukasa · Aliya-vasani · Anagata-bhayani · Muni-gatha · Mauneya-sute · Upatisa-pasine

율의 요체 · 성자들의 삶의 방식 · 다가올 두려움들 · 성자의 노래 · 성자됨에 관한 경 · 우빠띳사의 물음. 여기에 '거짓말을 주제로 라훌라에게 주신 가르침'이 일곱째로 덧붙는다.

아소카 바브라(캘커타-바이라트) 소칙령의 일곱 표제. 표기는 판독본마다 조금씩 다르다.

이 표제들이 오늘날 전하는 어느 경에 해당하는지를 두고 학자들의 동정(同定)은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무니 가타」는 『숫따니빠따』의 무니 숫따, 「우빠띠사 빠시네」는 같은 문헌의 사리뿟따 숫따, 「라굴로와다」는 『맛지마 니까야』의 라훌로와다 숫따에 대응한다고 본다.

목록의 성격은 분명하다. 일곱 편은 출가자의 절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훈계, 앞으로 닥칠 위험에 대한 경고, 성자의 삶에 대한 묘사다. 명상 교본은 한 편도 없다. 오늘날 남방 불교권에서 명상의 근본 경전으로 꼽히는 「사띠빳타나 숫따」는 목록에 들어 있지 않다. 왕이 고른 목록이므로 승단 내부의 우선순위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연대가 확정되는 유일한 초기 증거가 명상을 지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03 — 자료 선택의 문제비문 대신 경전을 택한 것은 학문적 판단이 아니었다

여기서 방법 자체를 의심할 필요가 생긴다. 19세기 유럽에 인도 불교 자료가 들어올 때, 두 종류가 거의 같은 시기에 도착했다. 하나는 비문과 유적이었고, 다른 하나는 필사본 경전이었다. 학계는 후자를 택했다. 그 선택이 왜 이루어졌는지를 정면으로 물은 사람이 미국의 인도 불교 연구자 그레고리 쇼펜이다.

쇼펜은 1991년 학술지 『종교사(History of Religions)』 31권 1호에 「인도 불교 연구의 고고학과 개신교적 전제」를 실었다. 논문의 첫 대목에서 그는 두 자료군을 나란히 세워 놓고 성격을 비교한다. 고고·명문 자료는 시간과 공간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고, 편집을 거치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애초에 읽히려고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문헌 자료는 대개 연대를 확정할 수 없고, 아주 늦은 사본 전통으로만 남았으며, 무겁게 편집됐고, 최소한 어떤 이상을 심으려는 목적을 지녔다. 앞의 자료는 승려와 재가자가 실제로 행하고 믿은 바의 일부를 기록하거나 반영한다. 뒤의 자료는 공동체의 작고 비전형적인 일부가 나머지에게 믿고 행하기를 바란 바를 기록한다.

사료로서 무엇이 나은지는 자명한데도 선택은 반대로 갔다. 쇼펜은 그 선택이 두 자료를 역사 증인으로 저울질한 결과가 아니라 어떤 전제에서 나왔다고 진단한다. 논문 제목에 붙은 '개신교적 전제'가 그 전제의 이름이다. 참된 종교는 경전에 있고, 신자들이 실제로 한 일은 타락이나 혼합이라는 가정이다. 이 가정을 깔면 명문과 고고 자료는 독립된 증인 자격을 잃고, 문헌이 말하는 것을 '뒷받침하고 부연하는' 역할로 밀려난다.

쇼펜은 그 결과의 예로 승려 개인의 재산 소유 문제를 든다. 불교는 세계를 등진 종교로 소개돼 왔으므로, 개별 승려가 사유 재산을 가졌는지는 승단의 성격 자체에 걸린 물음이다. 문헌은 무소유를 이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인도 각지의 불탑과 석굴에 남은 봉헌 명문에는 시주자로 이름을 올린 승려와 비구니가 줄줄이 등장한다. 쇼펜은 이런 자료를 모은 논문집을 1997년 하와이대학출판부에서 『뼈, 돌, 그리고 불교 승려들』이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쇼펜의 위치를 감안하면 강조점의 방향도 설명된다. 그는 문헌학이 주도해 온 분야에서 고고·명문 자료를 다루는 소수파였고, 논문은 주류의 방법 자체를 겨냥한다. 반대로 팔리 문헌학 전통에 서 있는 연구자들은 문헌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이 훨씬 많다고 본다. 이 대립은 뒤에서 다시 나온다.

다만 이 대목에서 확인해 둘 것이 하나 있다. 부처의 원형을 경전에서 찾겠다는 태도, 그리고 실제 신앙 관행을 후대의 때로 보는 태도는 부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유럽이 가지고 들어온 렌즈다. 원형 탐구의 도구부터 이미 근대의 물건이었다.

04 — 첫 번째 반전규칙을 늘린 쪽이 보수파였을 수 있다

불교사에서 최초의 큰 갈등은 제2결집으로 불린다. 결집은 승단이 모여 전승을 확인하는 회의를 가리킨다. 전승에 따르면 부처 사후 100년쯤 지나 베살리에서 열렸다.

발단은 돈이었다. 야사 까깐다까뿟따라는 승려가 베살리의 왓지 출신 비구들이 재가자에게 금과 은을 받는 것을 보고 문제를 제기했다. 고대 인도어에서 금은은 화폐 일반을 가리키는 관용 표현이다. 여기에 소금을 뿔에 담아 저장하는 일, 정오를 넘겨 그림자가 손가락 두 마디일 때 식사하는 일, 같은 경계 안에서 포살(布薩) 의식을 여러 곳에 나눠 하는 일 등이 얹혀 열 가지 쟁점, 곧 십사(十事)가 됐다. 상좌부 율장 『쭐라왁가』는 회의가 십사를 모두 율에 어긋난다고 판정했다고 적는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이야기다. 계율을 지키려는 장로들이 느슨해진 무리를 바로잡았다는 구도다. 그런데 반대편 기록이 남아 있다.

승단은 이 무렵 상좌부(스타비라)와 대중부(마하상기카)로 갈라졌다. 대중부 계열의 『사리불문경(舍利弗問經)』은 분열의 원인을 정반대로 적는다. 소수파인 상좌 측이 율에 조문을 추가하려 했고 다수파가 이를 거부한 결과라고 한다. 그러니까 대중부의 기록에서 상좌부는 원형을 지킨 쪽이 아니라 원형을 고친 쪽이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는 각자의 주장만으로 가릴 수 없다. 다만 물증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 현존하는 부파별 율장을 놓고 조문 수를 세면, 상좌 계열 율장이 대중부 율장보다 조문이 많다. 이 사실이 대중부 기록과 방향이 맞기 때문에 일부 연구자는 대중부 율장이 더 오래된 형태라고 본다. 그렇게 보지 않는 연구자도 있다. 애초에 제2결집에서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고 훨씬 뒤에 갈라졌다는 견해도 나와 있다.

누가 '원형'의 표지를 갖는가

제2결집을 둘러싼 두 기록은 같은 사건을 정반대 방향으로 서술한다.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점 자체가 이 글의 논지에 걸린다. 부처 사후 100년 남짓 만에 이미 무엇이 원형인지가 다투어졌고, 다툰 양쪽 모두 자신이 원형을 지킨다고 주장했다. '원래대로 돌아가자'는 형식은 19세기의 발명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었던 논쟁의 문법이다.

05 — 명상의 연대「사띠빳타나 숫따」를 위빳사나 교본으로 읽는 독법은 20세기에 자리 잡았다

오늘날 남방 불교권에서 명상의 근거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경은 「사띠빳타나 숫따」다. 몸·느낌·마음·법 네 가지를 대상으로 사띠(sati)를 확립하는 절차를 설명하는 경이고, 대개 위빳사나(vipassanā), 곧 통찰 명상의 교본으로 소개된다.

브리스틀대학의 팔리 문헌학자 루퍼트 게틴은 2011년 학술지 『컨템퍼러리 부디즘』 12권 1호에 실은 논문에서, 그 독법이 근대에 자리 잡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근거는 단순하다. 그 경에는 위빳사나라는 낱말도, 그 짝인 사마타(samatha, 마음을 고요히 하는 수행)라는 낱말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사띠빳타나를 자세히 다루는 다른 경들은 이 수행을 선정(jhāna)이나 삼매(samādhi)와 묶는다. 게틴이 드는 예는 「몸에 대한 사띠 경」이다. 이 경은 「사띠빳타나 숫따」의 몸 관련 수행을 그대로 가져와 선정 성취의 바탕으로 제시한다. 5세기 스리랑카에서 팔리 주석을 집대성한 붓다고사도, 사띠빳타나를 닦는 이가 '세상에 대한 탐욕과 불만을 극복한다'는 정형구를 삼매로 다섯 장애를 버리는 일로 읽을 수 있다고 풀었다. 게틴은 20세기 이전에 이 경을 오로지 통찰의 길로만 읽었다는 명시적 흔적이 거의 없다고 결론지었다.

'유일한 길'이라는 표어는 번역에서 생겼다

같은 경 첫머리에 네 가지 사띠빳타나를 가리켜 ekāyana라 부르는 대목이 있다. 초기 영역자들은 예외 없이 이 낱말을 '유일한 길'로 옮겼다. 리스 데이비즈는 1910년 번역에서 '오직 하나뿐인 길'이라 했고, 1941년에 이 경과 주석을 옮긴 소마 테라는 '이것이 유일한 길'이라 했으며, 아이잘린 호너는 1954년 번역에서 '이 하나의 길이 있다'고 했다.

게틴은 이 번역이 틀렸다고 본다. 낱말의 정확한 해석은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적어도 '오직'이라는 뜻은 아니고 '갈래지지 않은', '한 곳으로 곧장 가는'에 가깝다. 그렇게 읽으면 그 문장은 '이 길만이 유일하다'가 아니라 '이 길은 곧고 분명하다'가 된다.

차이는 크다. 앞의 번역은 사띠 수행을 불교 전체의 유일한 정문으로 만들고, 뒤의 번역은 여러 길 가운데 곧은 하나로 둔다. 20세기에 위빳사나 운동이 자기 정당성을 세울 때 앞의 번역이 쓰였다.

대중 명상은 1885년 이후의 버마에서 만들어졌다

수천 명이 열흘씩 합숙하며 좌선하는 오늘날의 풍경이 언제 시작됐는지에 대해서는 또렷한 답이 있다. 미국의 불교학자 에릭 브라운은 2013년 시카고대학출판부에서 낸 『통찰의 탄생』에서 그 기원을 버마의 승려 레디 사야도(1846~1923)에게서 찾았다.

배경은 식민 통치다. 1885년 영국이 상(上)버마를 병합하면서 불교를 후원하던 왕실이 사라졌다. 승단은 교법(사사나)이 소멸할지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대응책을 찾았다. 레디의 방법은 두 가지였다. 먼저 아비담마를 재가자에게 개방했다. 아비담마는 마음과 물질의 요소를 낱낱이 분류하는 고도로 전문적인 논서 체계이고, 종래 소수 학승의 영역이었다. 그다음 그 개념 체계를 발판으로 명상법을 표준화하고 단순화해 재가자도 따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브라운은 이 변화가 식민 지배의 충격만으로 생기지 않았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버마 문화 안에 이미 있던 요소들과 식민기의 파괴적 힘이 함께 작용했다. 인쇄와 결사(結社)라는 새 수단도 여기에 얹혔다. 그 결과 문헌 학습과 명상 수행이 재가자에게 열렸고, 대규모 명상이 성립할 공간이 생겼다.

마하시 사야도(1904~1982)와 우 바 킨(1899~1971)이 각각 방법을 체계화했고, 이들에게 배운 서구인들이 20세기 후반에 그것을 유럽과 미국으로 옮겼다. 오늘날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위빳사나 센터의 형식은 이 경로를 따라 퍼진 것이다.

미시간대학과 버클리에서 가르친 로버트 샤프는 1995년 학술지 『누멘』 42권 3호에 실은 논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체험'이라는 범주 자체가 근대 불교 연구의 중심에 놓였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승단의 수행, 특히 명상이 무엇보다 특정한 종교적·신비적 체험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라는 전제를 의심하는 연구자가 드물고, 그 결과 수행 단계를 가리키는 여러 전문 용어가 개인이 실제로 겪는 의식 상태를 지시하는 말처럼 읽히게 됐다고 보았다. 샤프는 2015년 논문에서 '순수한 주의'를 강조하는 오늘날의 명상 담론이 20세기 전반 버마의 개혁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전통적인 상좌부 교리와 수행에 비추어 보면 어긋나는 면이 있다고 정리했다.

06 — 낱말의 출생 기록'mindfulness'는 1881년에 한 영국인이 고른 낱말이다

사띠는 팔리어이고 산스크리트로는 스므리티다. 19세기 유럽의 사전들이 이 낱말에 붙인 뜻은 기억, 회상, 상기, 마음에 떠올림이었다. 모니어 윌리엄스의 1872년 산스크리트 사전과 로버트 차일더스의 1875년 팔리 사전이 그렇게 적었다.

초기 번역자들은 이 낱말을 어떻게 옮길지 몰라 헤맸다. 게틴이 찾아낸 가장 이른 시도는 1845년 대니얼 고거리의 '올바른 명상'이다. 1850년 로버트 스펜스 하디는 '도덕적 문제를 판단하는 능력, 곧 양심'이라 풀었고, 1853년 저서에서는 아예 번역하지 않고 두거나 '주의를 고정함'으로 옮겼다. 두 사람 모두 실론에서 오래 지내며 승려와 재가자를 접한 선교사였다.

토머스 윌리엄 리스 데이비즈가 1881년 『불교 경전』을 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 책 안에서도 사띠는 여전히 '정신 활동'이나 '생각'으로 옮겨진 자리가 있다. 그러나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 서문에서 팔정도의 정념(正念)을 설명하며 그는 이미 mindfulness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1899년 『붓다의 대화』 1권에서는 거의 일관되게 쓰였고, 1910년 2권에서 「마하사띠빳타나 숫따」를 옮기며 본격적인 논의를 붙였다.

그가 1910년에 적은 설명은 지금 읽어도 흥미롭다. 어원상 사띠는 기억이지만 불교 맥락에서 그렇게 옮기면 오해를 부른다고 그는 적었다. 사띠란 특정한 사실들, 무엇보다 모든 현상이 원인에 따라 생겨나고 다시 사라진다는 사실을 삶의 매 경험에 되풀이해 적용하는 일이라고 풀었다. 그는 이어 서양의 대응물로 양심을 들면서도, 양심으로 번역하는 것은 서양 관념을 불교에 집어넣는 일이라며 물리쳤다.

이 선택은 곧 굳었다. 로버트 찰머스의 1926년 『맛지마 니까야』 부분역, 캐럴라인 리스 데이비즈와 프랭크 우드워드의 1917~1930년 『상윳따 니까야』, 에드워드 헤어와 우드워드의 1932~1936년 『앙굿따라 니까야』가 모두 이 낱말을 썼다. 냐나몰리 비구가 1956년에 낸 붓다고사 『청정도론』 영역도 마찬가지다.

번역어에서 임상 기법까지

다음 단계는 독일 출신 승려 냐나포니카였다. 그는 1950년대 초 버마에서 마하시 사야도 밑에서 수행한 뒤 1954년 『불교 명상의 심장』을 냈다. 여기서 그는 사띠의 핵심을 '순수한 주의(bare attention)'로 제시했다. 우리가 지각한 것에 이해관계에 따른 판단을 덧씌우는 습관을 걷어 내고,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하는 방법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잭 콘필드가 1977년 책에서 정리한 정의, 곧 판단하지 않는 직접적 관찰과 현재 순간에 머무는 주의도 같은 계보에 있다.

임상으로 넘어간 시점은 명확하다. 존 카밧진은 1979년 매사추세츠대학교에 스트레스 감소 클리닉을 세웠고, 1995년에는 같은 대학에 마음챙김 센터를 열었다. 그가 만든 프로그램이 MBSR(마음챙김 기반 스트레스 감소)이고, 여기서 MBCT(마음챙김 기반 인지치료)가 갈라져 나왔다. 카밧진이 널리 인용되는 정의로 제시한 것은 '의도를 가지고, 현재 순간에, 판단하지 않으면서 특정한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다.

게틴의 비교는 여기서 날카로워진다. 초기 불교 문헌이 사띠를 설명할 때 쓰는 말들은 회상(anussati), 되새김(paṭissati), 기억함(saraṇatā), 마음에 지님(dhāraṇatā), 떠다니지 않음(apilāpanatā), 잊지 않음(asammussanatā)이다. 즉 '기억'이라는 축이 살아 있다. 무엇을 하기로 했는지를 잊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무엇을 목표로 삼았는지를 계속 상기하는 것이 사띠의 뼈대다. 게틴이 보기에 MBSR과 MBCT의 정의에서는 이 측면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판단하지 않음'이라는 규정도 그는 따져 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 전통 상좌부의 관점에서 보면, 판단하지 않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고 모든 마음 상태가 같은 값을 갖는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탐욕이 무집착과 같고 성냄이 자애와 같다는 결론을 그 전통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다만 게틴은 MBSR과 MBCT에서 이 표현이 최종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실천상의 태도로 쓰이는 것으로 보이며, 정의의 차이가 실제 임상 적용에서는 그다지 크지 않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 낱말이 지나온 경로

사띠(기억·상기) → 1845년 '올바른 명상' → 1850년 '양심' → 1881년 이후 mindfulness → 1954년 '순수한 주의' → 1979년 임상 프로그램. 각 단계마다 뜻이 조금씩 옮겨 갔고, 그 이동은 번역과 수용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07 — 개신교 불교복원 운동의 교리문답을 쓴 사람은 미국인 신지학자였다

19세기 후반 실론(오늘날 스리랑카)에서 벌어진 일은 이 글의 논지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례다.

헨리 스틸 올콧은 1832년 뉴저지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다. 남북전쟁기에 군에서 일했고 법률가이자 언론인이었다. 1875년 헬레나 블라바츠키와 함께 신지학회를 세웠고, 1879년 본거지를 인도로 옮겼으며, 1880년 5월 16일 콜롬보에 도착했다. 당시 실론의 불교는 영국 식민 정부의 지원을 잃고 기독교 선교사와의 공개 논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올콧이 택한 대응은 선교사의 도구를 그대로 쓰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불교 학교에서 쓸 교본을 만들기로 하고, 서양 기독교 종파들이 효과적으로 써 온 초급 교리문답서를 본떠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렇게 나온 것이 『불교 문답』이다. 1881년 7월 24일 영어와 싱할라어로 동시에 나왔고, 이후 40판 넘게 찍혔으며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다. 스리랑카 학교에서는 지금도 쓰인다.

스티븐 프로데로가 정리했듯, 이 책은 기독교에 대한 해독제를 표방했으나 그 구성부터 기독교에 기대고 있었다. 문답의 형식이 그랬고, 던지는 질문도 그랬다. 붓다는 신이었는가. 불교도는 창조주가 무에서 만물을 만들었다는 이론을 받아들이는가. 이런 물음은 기독교 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기독교를 겨냥해 만든 것이다. 올콧이 기독교에 던진 비판, 곧 기적에 대한 불신과 이성·경험의 강조, 자립, 지옥 관념에 대한 반감은 같은 시기 자유주의 개신교가 정통 교리에 던진 비판과 겹친다.

제도도 함께 옮겨졌다. 콜롬보 불교신지학회가 1880년 6월 17일 세워졌고, 이 조직을 통해 460개에 이르는 불교 학교가 생겼다. 청년불교회는 기독교청년회를 본떴다. 1885년에는 불교기 도안 위원회에 자문했고, 그 깃발이 뒷날 세계불교도우의회의 상징이 됐다. 웨삭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운동도 그의 제안에서 나왔다.

올콧의 조력자로 출발한 실론인이 돈 데이비드 헤와위타르나다. 그는 칸디의 사리 문제로 올콧과 갈라선 뒤 스스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곧 집 없는 정법의 수호자라는 이름과 지위를 만들었다. 출가자도 재가자도 아닌 제3의 신분이었다. 1890년대부터 그는 사원의 불상 숭배와 의례를 초기 경전에서 벗어난 감각적 일탈로 규정하고, 위빳사나 명상과 경전 직독을 그 자리에 놓았다.

이 현상에 이름을 붙인 사람

스리랑카 출신 인류학자 가나나트 오베예세케레는 1970년 『모던 실론 스터디스』 창간호에 실은 논문 「실론의 종교적 상징과 정치적 변동」에서 이 흐름을 '개신교 불교'라 불렀다. 그가 밝힌 뜻은 두 겹이다. 하나는 개신교 선교 관행에서 그대로 가져온 규범과 제도다. 청년회, 군종, 주일학교, 선교 조직, 각종 협회가 여기 들어간다. 다른 하나는 소문자 p의 뜻, 곧 기독교와 서양의 정치적 지배 양쪽에 대한 항의다.

이 개념은 1988년 오베예세케레가 리처드 곰브리치와 함께 프린스턴대학출판부에서 낸 『변형된 불교』에서 확장됐다. 그 뒤 아시아의 다른 근대 불교 현상에도 확대 적용됐고, 동시에 반발도 받았다. 스리랑카 안에서는 서구의 영향을 과대평가하고 토착 행위자의 주체성을 지운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개념 자체가 여전히 논쟁 중이라는 사실은 그대로 밝혀 둘 필요가 있다.

흐름 전체를 서구 사상사 쪽에서 정리한 것은 데이비드 맥마한이 2008년 옥스퍼드대학출판부에서 낸 『불교 근대주의의 형성』이다. 그의 진단은 이렇다. 지난 150년 동안 나온 불교 문헌과 그에 관한 연구의 상당 부분은 고대 전통이나 시대를 초월한 가르침, 불교의 본질을 대변한다고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근대 불교를 구성해 냈다. 그 재료는 서구 계몽주의의 과학적 합리주의, 자유주의 유일신교, 낭만주의적 표현주의였고, 아시아 쪽 저자들도 이 작업에 함께 참여했다. 맥마한은 그 과정을 탈전통화, 탈신화화, 심리학화 세 축으로 정리했다.

여기서 앞 절과 이 절이 만난다. 명상이 불교의 심장이라 불리게 된 것과, 바로 그 명상이 불교라는 종교에서 떼어 내져 세속의 기법이 된 것은 같은 과정의 앞뒤다. 심리학화된 명상은 교리와 승단과 우주론에서 분리될수록 널리 퍼졌다.

08 — 동아시아의 경우일본은 1872년에, 한국은 1954년에 승려의 몸을 다시 정의했다

식민지 상황에서 불교가 다시 만들어진 사례는 남아시아에만 있지 않다.

일본에서는 1872년 메이지 정부가 짧은 법령 하나를 냈다. 앞으로 승려는 고기를 먹고 아내를 얻고 머리를 길러도 좋으며, 종교 활동 중이 아닐 때 평복을 입어도 벌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통칭 육식처대(肉食妻帯) 법이다. 리처드 자페가 『승려도 속인도 아닌』에서 정리했듯, 이 조치는 법적 형벌을 없앤 비범죄화였는데 많은 성직자가 이를 허가나 지시로 받아들였다. 앞뒤로 승려에게 성씨를 갖게 하고 호적에 편입시키고 징병 대상으로 삼는 조치가 함께 시행됐다. 15년 남짓 사이에 승려는 다른 사람들과 종류가 아니라 정도에서만 다른 존재가 됐다. 그 결과 오늘날 일본에서는 모든 종파에 걸쳐 승려의 결혼이 일반적이다.

한국에서는 방향이 정반대인 사건이 반세기 뒤에 일어났고, 두 사건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이 사건은 '왜색 불교 청산'과 '전통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다. 명분은 사실에 근거가 있었다. 대처승 제도가 총독부 정책의 산물이라는 점은 위 연표가 보여 준다. 그러나 복원을 실행한 힘은 승단 내부가 아니라 국가에서 나왔다. 특정 종교의 내부 문제에 대통령이 직접 개입한 것을 두고 당시부터 부적절하다는 평가가 있었고, 지금도 정화운동의 성격을 두고 평가가 갈린다. 어느 쪽이든, 20세기 중반 한국 불교의 형태를 결정한 것은 1954년의 정치적 결정이었다.

끊어진 계맥은 다른 부파에서 빌려 이었다

복원이 실제로 어떤 작업인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는 비구니 구족계다.

구족계는 정식 출가자가 되는 수계 절차이고, 비구니의 경우 이미 계를 받은 비구니들이 정족수를 채워야 새 비구니를 낼 수 있다. 스리랑카의 비구니 승가는 11세기 무렵 침공과 사원 체계 붕괴 속에서 끊겼다. 버마의 계맥은 13세기쯤 더 일찍 끊긴 것으로 보인다. 정족수를 채울 비구니가 없으니 자체 복원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고, 다른 상좌부 나라에서 빌려 올 수도 없었다. 그 뒤 900년 넘게 상좌부 여성이 택할 수 있는 최대치는 열 가지 계를 지키는 재가 수행자였다.

돌파구는 다른 부파에서 나왔다. 여성 구족계의 계맥이 끊이지 않고 남아 있던 곳은 중국·한국·대만·베트남의 동아시아 불교였고, 그 율맥은 상좌부가 아니라 다르마굽타카(법장부) 계열이다. 1996년 12월 인도 사르나트에서 스리랑카 여성 10여 명이 구족계를 받았다. 마하보디회의 스리랑카 비구들이 주관했고 한국의 승려들이 도왔다. 1998년 2월에는 대만의 불광산이 주관해 보드가야에서 국제 수계식이 열렸고, 20여 개국에서 온 여성들이 상좌부와 대승의 승려들이 함께 참여한 이부승(二部僧) 수계를 받았다. 이후 스리랑카에서 수계가 정기적으로 이어졌다.

절차를 뜯어보면 성격이 분명해진다. 상좌부의 '원래' 계맥은 원래대로 되살아난 것이 아니다. 다른 부파의 율맥을 통해 새로 이어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이 복원은 여전히 일부 상좌부 교단의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원형인지를 두고 벌어지는 다툼의 구조는 제2결집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09 — 반대 심문그래도 부처의 사유는 읽을 수 있다, 다만 읽어 보면 통념과 어긋난다

여기까지의 논의는 회의(懷疑)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균형을 위해 반대편 주장을 세워 볼 필요가 있다.

옥스퍼드의 팔리학자 리처드 곰브리치는 2009년 『부처는 무엇을 생각했는가』에서 정반대 입장을 폈다. 학계가 인정하기를 꺼리는 것보다 부처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그의 사유는 보통 인정되는 것보다 정합적이라는 주장이다. 곰브리치가 제시한 열쇠는 맥락이다. 팔리 경전을 당대의 브라만교 문헌과 자이나교 사상에 대한 응답으로 읽으면, 지금까지 뜻이 통하지 않던 대목들이 풍자와 반어까지 포함해 읽히기 시작한다고 그는 본다.

그가 드는 대표적 예가 업(業)이다. 브라만교와 자이나교에는 이미 업 관념이 있었다. 부처가 한 일은 그것을 윤리로 옮긴 것이다.

Cetanāhaṁ, bhikkhave, kammaṁ vadāmi. Cetayitvā kammaṁ karoti—kāyena vācāya manasā.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를 업이라 말한다. 의도한 뒤에 몸으로, 말로, 뜻으로 업을 짓는다.

『앙굿따라 니까야』 6:63 「닙베디까 숫따」, 마하상기띠 교정본.

제사나 의례가 아니라 의도가 행위의 값을 정한다는 선언이다. 곰브리치는 이것이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하나는 윤리적 가치가 사적인 영역, 곧 개인의 마음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각자가 자기 운명에 책임을 진다는 관념이다. 카스트에 따라 정해지는 윤리는 이 지점에서 무너진다.

그런데 이 유명한 정식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cetanāhaṁ kammaṁ vadāmi라는 등식은 팔리 니까야 전체에서 단 한 번 나온다. 후대에 나가르주나가 『중론』의 업 장(章)에서 받아 쓰면서 결정적인 정의로 자리 잡았지만, 경전 안에서의 빈도는 그 위상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날 불교의 핵심 교리로 통하는 문장 하나하나가 실제로 경전에서 어떤 무게를 차지하는지는 따로 세어 볼 일이다.

곰브리치의 재구성에도 반론이 있다. 루퍼트 게틴은 2012년 서평에서, 브라만교에 대한 응답으로 읽는 것이 해석의 열쇠라는 주장은 여전히 논쟁 중이며 요하네스 브롱코스트처럼 기원전 1천년기 인도 종교사에 다른 모형을 제시하는 연구자도 있다고 지적했다. 곰브리치가 내놓은 개별 독법 가운데 특히 논란이 된 것이 둘 있다. 부처가 사회의 기원을 이야기하며 인간 아닌 존재들의 세계를 끌어들인 것은 풍자였고 제자들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는 해석, 그리고 부처가 자애(mettā)를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가르쳤으나 직계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경전을 직접 열면 통념이 흔들린다

흥미로운 것은, 곰브리치처럼 경전에서 많은 것을 읽어 낼 수 있다고 보는 쪽을 따라가도 오늘날의 통념이 그대로 확인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두 가지 예가 있다.

첫째는 무아다. '불교는 자아가 없다고 가르친다'는 요약은 널리 통용된다. 그런데 유행자 왓차곳따가 정면으로 물었을 때 부처는 답하지 않았다.

“Kiṁ nu kho, bho gotama, atthattā”ti? Evaṁ vutte, bhagavā tuṇhī ahosi. “Kiṁ pana, bho gotama, natthattā”ti? Evaṁ vutte, bhagavā tuṇhī ahosi.

“고타마 존자여, 자아는 있습니까.” 이렇게 여쭈었으나 세존은 잠자코 계셨다. “그러면 고타마 존자여, 자아는 없습니까.” 이렇게 여쭈었으나 세존은 잠자코 계셨다.

『상윳따 니까야』 44:10 「아난다 숫따」.

왓차곳따가 떠난 뒤 아난다가 이유를 물었다. 부처의 대답은 두 갈래였다. 있다고 답하면 영원한 자아를 주장하는 상주론자들과 한편이 되고, 없다고 답하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단멸론자들과 한편이 된다고 했다. 게다가 이미 혼란에 빠져 있던 왓차곳따는 '전에 내게 있던 자아가 지금은 없어졌다'고 여겨 더 큰 혼란에 빠졌으리라고 했다.

이 대목은 무아를 존재론적 부정 명제로 요약하는 방식과 맞지 않는다. 부처가 거부한 것은 두 개의 형이상학적 답 모두였다. 곰브리치가 후대 전통의 오해로 꼽는 항목에 무아와 연기가 들어가는 이유도 여기 있다. 오늘날 '불교는 자아를 부정하는 종교'라는 요약이 편리하게 쓰이는 것은, 그 요약이 서양 철학의 실체 논쟁과 잘 맞물리기 때문이지 경전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은 아니다.

둘째는 이른바 자유 탐구의 헌장이다. 「깔라마 숫따」는 근대 불교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에 든다.

Etha tumhe, kālāmā, mā anussavena, mā paramparāya, mā itikirāya, mā piṭakasampadānena, mā takkahetu, mā nayahetu, mā ākāraparivitakkena, mā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mā bhabbarūpatāya, mā samaṇo no garūti.

깔라마들이여, 오라. 거듭 들었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말라. 대대로 전해 왔다는 이유로도, 소문이라는 이유로도, 경전 모음에 실렸다는 이유로도, 논리적 추론이라는 이유로도, 원칙에서 끌어냈다는 이유로도, 그럴듯한 사유라는 이유로도, 곱씹은 견해와 맞는다는 이유로도, 말하는 이가 유능해 보인다는 이유로도, ‘이 사문은 우리 스승이다’라는 이유로도 받아들이지 말라.

『앙굿따라 니까야』 3:65 「께사뭇띠 숫따」(통칭 「깔라마 숫따」), 팔리성전협회본 A i 188.

이 대목이 널리 퍼진 데는 번역자의 손이 있었다. 소마 테라가 자신의 영역본에 '부처의 자유 탐구 헌장'이라는 부제를 달았고, 그 표현이 그대로 굳었다.

그런데 팔리 본문에는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목록에 '삐따까삼빠다네나', 곧 경전 모음에 실렸다는 이유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경전을 근거로 삼지 말라는 문장을 경전에서 인용하는 구조는 그 자체로 눈여겨볼 만하다. 다른 하나는 판정 기준이다. 부처는 스스로 알라고 하면서 그 기준으로 '지혜로운 이들이 나무라는가(viññugarahitā)' 또는 '지혜로운 이들이 칭찬하는가(viññuppasatthā)'를 함께 제시한다. 개인의 판단만으로 완결되는 절차가 아니다. 그리고 경의 끝에서 깔라마들은 삼보에 귀의한다.

비구 보디는 1988년 스리랑카 불교출판협회 소식지에 실은 글에서 이 점을 짚었다. 한 대목을 맥락에서 떼어 내 인용한 탓에 부처가 모든 교리와 믿음을 물리치는 실용적 경험주의자로 만들어졌고, 붓다의 가르침이 각자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담는 자유사상가의 도구 상자처럼 취급됐다고 적었다. 그가 덧붙인 사실 관계는 이렇다. 깔라마들은 이 대화의 출발점에서 부처의 제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여러 스승의 상충하는 주장 앞에서 혼란에 빠져 있었고, 의심을 풀어 줄 상담자로 부처를 찾아왔다.

즉 이 경은 확신에서 회의로 가는 문서가 아니라 혼란에서 확신으로 가는 문서다. 근대의 독법은 방향을 뒤집었다. 뒤집힌 독법이 널리 퍼진 이유는 앞 절들이 설명한다. 과학적 합리주의와 개인의 자율을 축으로 삼는 근대 불교에 이 문장만큼 잘 들어맞는 재료가 없었다.

10 — 판정결론 — 원형은 확정되지 않았고, '복원'이라는 형식이 변화를 실행한 방법이었다

증거를 연대순으로 놓고 보면 세 층위가 갈린다.

확정할 수 없는 것. 부처의 생몰연대는 200년 넘는 폭 안에서 흔들린다. 그의 말은 300년에서 450년 사이 구전을 거쳐 문자가 됐고, 그 문자가 담긴 사본조차 대부분 훨씬 뒤의 것이다. 실물로 남은 가장 오래된 불교 사본은 서기 1세기 간다라의 자작나무 껍질이며 그것도 특정 부파의 것이다. 축자적 원형을 복원하겠다는 기획은 자료의 조건상 성립하기 어렵다.

확정되는 것. 연대와 장소가 확실한 유일한 초기 증거는 기원전 3세기 아소카의 비문이다. 거기서 공표된 불교는 살생을 줄이고 부모를 공경하고 베풀고 진실을 말하는 윤리의 목록이며, 사성제와 팔정도와 열반과 무아는 등장하지 않는다. 왕이 승가에 권한 일곱 편의 독서 목록에도 명상 교본은 없다. 명문 자료가 보여 주는 승단은 시주자로 이름을 올리고 사리를 모시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만들어진 것. 「사띠빳타나 숫따」를 통찰 명상의 단독 교본으로 읽는 독법, '유일한 길'이라는 표어, 재가자 수천 명이 참여하는 대중 명상, mindfulness라는 낱말과 그것이 지시하는 '판단하지 않는 순수한 주의', 임상 프로그램, 의례와 신앙을 걷어 낸 순수한 원시 불교라는 상(像). 이 목록의 항목들은 모두 1845년에서 1979년 사이에 자리를 잡았고, 대부분 식민 통치와 그에 대한 대응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만들어졌다.

이 세 층위를 잇는 것이 이 글의 논지다. 각 단계의 변화가 예외 없이 '원래대로 돌아가자'는 형식을 취했다. 레디 사야도는 사라져 가는 교법을 지키려 했고, 다르마팔라는 후대의 감각적 일탈을 걷어 내려 했으며, 한국의 정화운동은 왜색을 청산하려 했고, 비구니 수계 복원은 끊긴 계맥을 되살리려 했다. 제2결집의 양쪽도 각자 원형을 지킨다고 주장했다. 복원의 언어를 쓰는 한 그 작업은 변화로 인식되지 않고, 인식되지 않은 변화는 검증되지도 않는다.

판단이 갈리는 지점도 분명하다. 무엇을 불교의 본체로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문헌이 제시한 이상을 본체로 보면 근대의 개혁 운동은 회복이다. 사람들이 실제로 행한 바를 본체로 보면 그것은 단절이다. 쇼펜과 곰브리치의 대립은 결국 이 물음에서 갈린다. 어느 한쪽을 고르지 않아도 되지만, 두 답이 같은 답이 아니라는 점은 확정해 둘 필요가 있다.

부처가 남긴 마지막 말로 전해지는 문장은 이 사정과 묘하게 맞물린다.

Handa dāni, bhikkhave, āmantayāmi vo: “vayadhammā saṅ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ti. Ayaṁ tathāgatassa pacchimā vācā.

자, 이제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이르노라.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게 마련이니, 흐트러짐 없이 이루어 내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말이었다.

『디가 니까야』 16 「마하빠리닙바나 숫따」, 팔리성전협회 교정본(리스 데이비즈·카펜터 편, 1903).

여기 쓰인 appamāda 한 낱말만 해도 번역이 갈린다. 리스 데이비즈는 '부지런함으로 그대들의 구원을 이루라'로 옮겼고, 뒷사람들은 '지치지 말고 정진하라', '방일하지 말고 성취하라'로 옮겼다. 어근을 따지면 취하지 않음, 들뜨지 않음에 가깝다. 마지막 한 문장에서도 원어와 번역 사이에는 이만한 폭이 벌어져 있다.

남은 물음은 자료 쪽에 있다. 간다라 사본의 판독은 아직 진행 중이고, 그 결과에 따라 초기 경전의 형태에 대한 그림이 달라질 수 있다. 한역 아함과 팔리 니까야를 대조해 부파별 편집이 어디서 갈라졌는지 좁히는 작업, 여러 부파 율장을 비교해 조문의 선후를 가리는 작업도 계속되고 있다. 이 작업들이 부처의 육성을 되찾아 주지는 않겠지만, 무엇이 어느 시점에 덧붙었는지의 목록은 지금보다 촘촘해질 것이다. 원형을 확정하는 대신 변형의 연대기를 정밀하게 만드는 쪽이, 남아 있는 증거로 할 수 있는 일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