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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상 전통의 행복 개념 — 그리스·중세 신학·아랍·동아시아·근대 서양이 서로 다른 물음에 답한 자리

에우다이모니아, 베아티투도, 사아다, 樂, happiness는 같은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다섯 갈래 전통의 원전을 따라가면 하나의 물음에 대한 여러 답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 물음이 드러나고, 오늘날의 행복 지수는 그 가운데 하나만 잰다.

2026년 8월 18일

해마다 나오는 행복 순위가 실제로 던지는 문장

국가별 행복 순위가 발표될 때마다 어느 나라가 몇 위인지가 기사 제목에 오른다. 그 순위를 만드는 조사가 응답자에게 실제로 던지는 문장은 하나다. 세계행복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는 2012년부터 나온 연례 간행물로, 옥스퍼드대학 웰빙연구센터와 갤럽,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가 함께 낸다. 자료는 갤럽 세계 여론조사에서 나오며, 해마다 140개국이 넘는 지역에서 10만 명 이상이 응답한다. 순위는 그 응답의 3년치 평균이다.

문항은 캔트릴 사다리(Cantril ladder)라 불린다. 응답자에게 맨 아래가 0, 맨 위가 10인 사다리를 떠올리게 한 다음, 꼭대기 칸을 그 사람에게 있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으로, 바닥 칸을 있을 수 있는 가장 나쁜 삶으로 지정한다. 그리고 지금 몇 번째 칸에 서 있다고 느끼는지를 묻는다.

보고서 편집진은 이 문항이 행복·안녕·만족 같은 낱말을 아예 쓰지 않는다는 점을 장점으로 든다. 낱말을 쓰지 않으므로 번역이 쉽고, 무엇이 좋은 삶인지는 응답자가 스스로 판단한다. 같은 자료에서 편집진은 이 문항이 재는 것을 '삶의 평가(life evaluation)'라 부르고, 어제 웃었는지 걱정했는지를 묻는 '정서(affect)' 문항과 구분한다. 순위는 앞의 것만으로 매긴다.

여기서 한 가지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 행복은 당사자가 자기 삶 전체를 한 눈금으로 매길 수 있는 무엇으로 규정된다. 본인이 아닌 누구도 그 값을 정정할 수 없고, 사다리 밖에는 어떤 기준도 없다. 이 전제는 상식처럼 보이지만 인류가 행복을 논해 온 시간의 대부분 동안 상식이 아니었다. 아래에서 다섯 갈래 전통의 원전을 따라가 보면, 그 전통들이 서로 다른 답을 낸 것이 아니라 애초에 서로 다른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에우다이모니아 — 탁월함을 따르는 영혼의 활동

서양 철학에서 행복 논의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낱말은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εὐδαιμονία)다. '좋은(εὖ)'과 '다이몬(δαίμων, 사람에게 배정된 신령)'이 합쳐진 말이니 어원만 보면 '좋은 몫을 타고남'에 가깝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이 낱말을 기능의 수행으로 다시 정의한다. 감정이나 운은 정의에서 빠진다. 그가 남긴 윤리학 강의록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은 사람들이 이미 무엇을 그 말로 부르고 있는지 확인하는 데서 시작한다.

τὸ δ᾽ εὖ ζῆν καὶ τὸ εὖ πράττειν ταὐτὸν ὑπολαμβάνουσι τῷ εὐδαιμονεῖν.

to d' eu zēn kai to eu prattein tauton hypolambanousi tō eudaimonein.

잘 사는 것과 잘 해내는 것을 사람들은 에우다이모니아를 누리는 것과 같은 뜻으로 여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4장, 벡커 쪽수 1095a19

'잘 해냄(εὖ πράττειν)'이 '잘 삶'과 같은 자리에 놓인다. 무언가를 제대로 수행하는 일이 이 낱말의 뜻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뜻이다. 1권 7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논증으로 굳힌다. 피리 연주자에게 고유한 일이 피리를 부는 것이고 훌륭한 연주자는 그 일을 잘하는 사람이듯, 사람에게도 고유한 일이 있다면 훌륭한 사람은 그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된다. 사람에게 고유한 일로 그는 이성을 갖춘 영혼의 활동을 든다.

τὸ ἀνθρώπινον ἀγαθὸν ψυχῆς ἐνέργεια γίνεται κατ᾽ ἀρετήν, εἰ δὲ πλείους αἱ ἀρεταί, κατὰ τὴν ἀρίστην καὶ τελειοτάτην.

to anthrōpinon agathon psychēs energeia ginetai kat' aretēn, ei de pleious hai aretai, kata tēn aristēn kai teleiotatēn.

사람에게 좋은 것이란 탁월함을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다. 탁월함이 여럿이라면 그중 가장 뛰어나고 가장 완결된 것을 따르는 활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7장, 1098a16~18

여기서 옮긴 말 가운데 두 개는 번역이 갈리는 자리다. ἐνέργεια는 '활동'으로 옮겼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용법에서 이 말은 실제로 발휘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지니고만 있는 능력은 여기 들지 않는다. 그가 이어지는 장에서 능력을 지니고 있음(ἕξις)과 발휘함(ἐνέργεια)을 구분하며 잠든 사람을 예로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잠든 덕망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ἀρετή는 보통 '덕'으로 옮기는 말이지만 도덕적 선량함보다 '제 기능을 잘 해내는 성질'에 가까워 '탁월함'으로 옮겼다. 칼의 아레테는 잘 드는 것이다.

이 정의를 오늘날의 행복 문항에 대보면 어긋나는 지점이 곧바로 드러난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사람이 스스로 매기는 점수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삶이 사람다운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지에 대한 판정이며, 원리상 당사자가 틀릴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1권 10장에서 죽기 전에는 누구도 행복하다 부르지 말라는 솔론의 말을 길게 검토하는 것도 같은 구조에서 나온다. 판정의 단위가 순간의 기분이 아니라 완결된 생애이기 때문이다.

고대에도 답은 갈렸다 — 바로가 세어 본 288개의 학파

고대 철학이 행복에 대해 한목소리를 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0)는 쾌락을 삶의 목적으로 두었지만, 그가 말한 쾌락은 없어짐이었다. 무언가를 더 얻는 쪽과는 방향이 반대다. 그의 저작 대부분은 사라졌고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가 3세기 저술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철학자들의 생애』 10권에 통째로 인용되어 전한다.

ἀλλὰ τὸ μήτε ἀλγεῖν κατὰ σῶμα μήτε ταράττεσθαι κατὰ ψυχήν· οὐ γὰρ πότοι καὶ κῶμοι συνείροντες οὐδ᾽ ἀπολαύσεις παίδων καὶ γυναικῶν οὐδ᾽ ἰχθύων καὶ τῶν ἄλλων, ὅσα φέρει πολυτελὴς τράπεζα, τὸν ἡδὺν γεννᾷ βίον, ἀλλὰ νήφων λογισμός.

alla to mēte algein kata sōma mēte tarattesthai kata psychēn

몸으로 아프지 않고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어지는 술자리와 잔치도, 소년과 여인을 누리는 일도, 생선을 비롯해 값비싼 식탁이 내오는 것들도 즐거운 삶을 낳지 않는다. 그것을 낳는 것은 깨어 있는 헤아림이다.

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31~132절.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철학자들의 생애』 10권에 인용된 본문

쾌락주의자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이 잔치와 성적 향락을 명시적으로 배제한다. 그가 말한 목표는 아타락시아(ἀταραξία), 곧 흔들림 없음이다.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빼내는 방향에 행복을 두었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답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오히려 뒤에서 살펴볼 불교 쪽에 가깝다.

스토아학파는 또 다른 답을 냈다. 창시자 제논(기원전 334~262)이 세운 목표는 자연과 어긋나지 않게 사는 것이었고, 후계자들은 그것을 탁월함에 따라 사는 것과 같은 말로 풀었다.

τέλος εἶπε τὸ ὁμολογουμένως τῇ φύσει ζῆν, ὅπερ ἐστὶ κατ᾽ ἀρετὴν ζῆν· ἄγει γὰρ πρὸς ταύτην ἡμᾶς ἡ φύσις.

telos eipe to homologoumenōs tē physei zēn, hoper esti kat' aretēn zēn.

목적은 자연과 어긋나지 않게 사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는 곧 탁월함을 따라 사는 것이다. 자연이 우리를 그리로 이끌기 때문이다.

제논, 『인간 본성에 관하여』의 문장으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철학자들의 생애』 7권 87절에 전한다

답이 이렇게 갈리자 답을 세어 보려는 시도까지 나왔다. 로마의 학자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기원전 116~27)는 최고선을 무엇으로 보느냐를 조합해 학파의 수를 288개로 계산했다. 그 계산은 원전이 남아 있지 않고,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신국론』 19권 1장에서 요약해 전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리에 따르면 바로는 최고선의 후보 열둘에 확신과 개연이라는 태도의 구분, 견유적 생활 방식의 채택 여부, 관조·활동·혼합이라는 세 가지 삶의 형태를 곱해 288이라는 수를 얻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뒤이어 그 곱셈에 쓰인 구분들이 최고선 자체와는 무관하다고 지적하며 다시 열둘로 줄인다.

288이라는 수가 실제로 보여 주는 것

이 계산에서 눈여겨볼 것은 288이라는 수 자체보다 그 288개가 모두 같은 물음에 대한 답으로 셈해졌다는 사실이다. 바로가 곱셈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최고선인가'라는 물음의 형태가 학파들 사이에 이미 공유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뒤에 볼 아랍어권과 동아시아, 그리고 근대 이후의 갈림은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답이 아니라 물음이 갈리는 종류의 차이다.

베아티투도 — 활동이 상태가 되고, 완성이 이생 밖으로 옮겨지다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는 라틴어로 넘어오며 두 낱말로 갈라졌다. 하나는 펠리키타스(felicitas)로, 본래 땅과 가축의 번성을 뜻하던 말이라 운과 외적 조건의 냄새가 남았다. 다른 하나는 베아티투도(beatitudo)로, 기독교 저술가들이 궁극의 복을 가리키는 데 썼다. 라틴 세계에서 이 말에 정의를 붙인 사람은 보에티우스(약 480~524)다. 동고트 왕국의 고위 관료였다가 반역 혐의로 처형을 앞두고 옥중에서 『철학의 위안』을 썼다.

Liquet igitur esse beatitudinem statum bonorum omnium congregatione perfectum.

그러므로 지복이란 모든 좋은 것이 한데 모여 완전해진 상태임이 분명하다.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3권 산문 2절. 모레스키니 교정본(2000) 60쪽

여기서 결정적인 낱말은 상태(status)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서 행복은 활동이었는데 보에티우스에게서는 상태가 된다. 이 차이는 중세 내내 쟁점으로 남았고,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신학대전』 2부 1편 3문 2항에서 두 정의를 나란히 놓고 조정한다. 그의 정리에 따르면 보에티우스는 지복이 일반적으로 무엇인지를, 곧 완전한 선의 상태에 있음을 말한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무엇을 통해 그 상태에 이르는지를, 곧 어떤 활동을 통해서라는 것을 말했다. 둘은 같은 것의 다른 측면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조정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을 더 옮긴다. 같은 3문 8항의 본문에서 그는 완전한 지복이 놓일 자리를 이 세상 밖으로 밀어낸다.

Respondeo dicendum quod ultima et perfecta beatitudo non potest esse nisi in visione divinae essentiae.

답하여 말한다. 궁극의 완전한 지복은 신적 본질을 봄에서가 아니면 있을 수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2부 1편 3문 8항 본문

그가 든 근거는 신학적이라기보다 논리적이다. 사람은 더 바랄 것이 남아 있는 한 완전히 복될 수 없고, 지성은 어떤 것의 본질을 알아야 만족하며, 결과만 알고 원인의 본질을 모르면 계속 묻게 된다. 그러니 첫 원인의 본질에 닿기 전에는 탐구가 끝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 첫 문단에서 쓴 문장이 이 논증의 감각적 판본에 해당한다.

quia fecisti nos ad te et in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

당신이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지으셨으므로,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쉬지 못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권 1장 1절

이 대목에서 행복의 좌표가 한 번 더 움직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은 완결된 생애 안에서 판정되는 것이었다. 아퀴나스에게 이생에서 얻는 행복은 불완전한 지복(beatitudo imperfecta)이고, 완전한 것은 죽음 너머에 있다. 현세의 삶 전체를 아무리 잘 살아도 정의상 미달이 되는 구조다. 사다리 문항이 요구하는 자기 채점은 이 구조 안에서는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채점 기준이 응답자가 아직 겪지 않은 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사아다 — 아랍어로 옮겨진 에우다이모니아와 지성의 합일

9세기 바그다드에서 그리스 철학 문헌이 대규모로 아랍어로 번역될 때, 에우다이모니아를 받은 낱말이 사아다(سعادة, saʿāda)였다. 이 말은 원래 '복 받음, 운이 좋음'에 가까웠으나 번역어로 쓰이면서 철학적 목적 개념을 떠맡았다. 다만 아랍어권의 행복론이 그리스 개념의 단순한 이식은 아니다. 코란과 이슬람 법학이 이미 내세의 구원을 다루고 있었으므로, 번역어는 두 계통의 문제를 동시에 짊어졌다.

알파라비(약 872~950)는 이 결합을 가장 체계적으로 밀어붙인 인물이다. 그는 『행복의 획득』(Taḥṣīl al-saʿāda)에서 모든 존재자가 저마다의 등급에 맞는 궁극의 완성에 이르도록 만들어졌으며, 사람에게 고유한 완성을 '궁극의 행복(al-saʿāda al-quṣwā)'이라 부른다고 적는다. 해당 구절은 알 야신 교정본 81쪽에 있다. 여기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능 논증과 구조가 같다. 갈리는 지점은 그 완성의 내용이다. 알파라비에게 사람의 완성은 영혼이 현실태의 지성이 되어 능동지성(al-ʿaql al-faʿʿāl)과 합일하는 데 있다. 능동지성은 신플라톤주의 우주론에서 첫 원인으로부터 흘러나온 열 개의 지성 가운데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으로, 사람의 지성이 개별 사물에서 보편적 형상을 뽑아내도록 비추어 주는 역할을 맡는다.

알파라비는 『덕 있는 도시 사람들의 견해의 원리』에서 사람들이 행복이 최고 목적이라는 데는 동의하면서 그 내용에서 갈린다고 적고, 무지한 도시(al-madīna al-jāhiliyya)를 쾌락·재물·명예·권력을 행복으로 오인하는 도시로 규정한다. 목적 개념이 정치 이론의 분류 기준으로 쓰이는 셈이다. 무엇을 행복으로 삼느냐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공동체의 체제를 규정한다는 발상은, 순위를 매기는 오늘날의 조사가 개별 응답의 평균으로 국가를 평가하는 방식과 정확히 반대 방향을 향한다.

미스카와이흐(약 932~1030)는 『행복의 배열과 학문의 위계』에서 행복을 여러 층위로 나누고 그중 궁극의 행복을 따로 논했다. 알가잘리(1058~1111)에 이르면 무게중심이 지성에서 실천과 내면으로 옮겨 간다. 그가 만년에 페르시아어로 쓴 『행복의 연금술』(Kīmiyā-yi Saʿādat, 1105년 무렵)은 바그다드의 교수직을 버리고 은둔한 뒤 내놓은 저작으로, 자기 자신과 신을 아는 것을 행복의 재료로 삼는다. 이 책은 그가 앞서 아랍어로 쓴 대작 『종교학의 부흥』(Iḥyāʾ ʿulūm al-dīn)을 일반 독자용으로 압축한 것이다.

번역어가 겪은 일

사아다는 이후 라틴 세계로 되돌아간다. 아랍어로 보존·주해된 아리스토텔레스가 12~13세기 라틴어로 재번역되면서 아퀴나스의 지복 논의에 재료를 공급했다. 그리스어 한 낱말이 아랍어를 거쳐 라틴어로 돌아오는 동안 '지성의 활동'이라는 뼈대는 유지되었으나, 그 활동이 어디서 완결되느냐는 두 종교의 내세관에 따라 다시 정해졌다.

樂과 福 — 동아시아에는 행복을 총괄하는 낱말이 없었다

동아시아 고전을 펼치면 사정이 다르다. 서양 전통에서 에우다이모니아·베아티투도가 맡던 자리를 한 낱말이 차지하고 있지 않다. 대신 즐거움을 뜻하는 樂과 복을 뜻하는 福이 서로 다른 문맥에서 각각 쓰인다. 『논어』에서 공자가 제자 안회를 두고 한 말이 樂의 용법을 잘 보여 준다.

子曰:「賢哉回也!一簞食,一瓢飲,在陋巷。人不堪其憂,回也不改其樂。賢哉回也!」

선생이 말했다. "어질구나, 회는. 대나무 그릇 하나의 밥과 표주박 하나의 물로 누추한 골목에 산다. 남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다. 어질구나, 회는."

『논어』 옹야 11장

여기서 樂은 가난이라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무엇이 아니다. 조건과 무관하게 성립하는 별개의 것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안회의 樂이 무엇에서 오는지는 본문에 적혀 있지 않고, 후대 주석가들이 그 빈칸을 채우느라 오랫동안 다투었다. 조사 문항으로 옮기자면 안회의 사다리 점수는 낮게 나온다. 그가 서 있는 칸은 물질적 조건으로 매겨지는 반면, 공자가 칭찬한 것은 칸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樂을 목록으로 만든다. 『맹자』 진심 상편 20장에서 그는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을 꼽으면서,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거기에 들지 않는다고 두 번 못박는다.

孟子曰:「君子有三樂,而王天下不與存焉。父母俱存,兄弟無故,一樂也。仰不愧於天,俯不怍於人,二樂也。得天下英才而教育之,三樂也。君子有三樂,而王天下不與存焉。」

맹자가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천하에 왕 노릇 하는 것은 거기에 들지 않는다. 부모가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에게 탈이 없는 것이 첫째 즐거움이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둘째 즐거움이다.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셋째 즐거움이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천하에 왕 노릇 하는 것은 거기에 들지 않는다."

『맹자』 진심 상 20장

세 항목 중 첫째는 가족의 생사에, 셋째는 남의 재능에 달려 있어 본인이 어찌할 수 없다. 스스로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둘째뿐이다. 목록의 구성 자체가 행복의 상당 부분이 관계와 운에 걸려 있음을 인정하고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세 항목 어디에도 감정 상태의 강도는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의 생존, 부끄러움의 없음, 가르칠 사람의 확보라는 사실 관계가 즐거움의 내용을 이룬다.

도가 문헌은 여기서 한 번 더 방향을 튼다. 『장자』 외편 「지락」은 가장 큰 즐거움이 있느냐는 물음으로 시작해, 세상이 즐거움이라 부르는 것들을 하나씩 검토한 뒤 이렇게 매듭짓는다.

吾以無為誠樂矣,又俗之所大苦也。故曰:「至樂無樂,至譽無譽。」

나는 무위를 참된 즐거움으로 여기지만, 세속은 그것을 가장 큰 괴로움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말한다. "지극한 즐거움에는 즐거움이 없고, 지극한 기림에는 기림이 없다."

『장자』 외편 지락

至樂無樂을 '지극한 즐거움에는 즐거움이 없다'로 옮긴 것은 뒤 구절 至譽無譽와 짝을 이루는 구조를 살리기 위해서다. '없다'를 부정어로 그대로 두어야 두 구절이 대구로 읽힌다. 이 문장은 즐거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라 불리는 것들의 목록에서 벗어난 자리를 가리킨다. 앞서 본 에피쿠로스의 흔들림 없음과 방향이 같되, 장자는 그것을 즐거움이라는 말 안에서 표현한다.

『담마파다』가 즐거움의 으뜸으로 꼽은 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불교 문헌으로 넘어가면 방향의 전환이 더 뚜렷하다. 팔리어 경전 『담마파다』의 열다섯 번째 품은 이름 자체가 '즐거움의 품(Sukhavagga)'인데, 그 안에서 즐거움(sukha)의 최상급이 놓이는 자리는 무엇을 얻은 상태가 아니다.

Ārogyaparamā lābhā, santuṭṭhiparamaṃ dhanaṃ; vissāsaparamā ñāti, 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

얻는 것 가운데 으뜸은 병 없음이고, 재물 가운데 으뜸은 넉넉히 여김이며, 친족 가운데 으뜸은 믿을 수 있음이고, 즐거움 가운데 으뜸은 니르바나다.

『담마파다』 204게, 즐거움의 품

바로 앞 203게는 같은 마지막 구절을 다른 전제에서 끌어낸다. 여러 조건이 모여 이루어진 것들(saṅkhāra)이야말로 가장 큰 괴로움이며, 이를 있는 그대로 알 때 니르바나가 으뜸가는 즐거움으로 드러난다고 적는다. 니르바나는 문자 그대로 '불어서 끔'이니, 여기서 최상의 즐거움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오가는 구조 자체가 꺼진 상태를 가리킨다. 즐거움의 양이 가장 많은 상태와는 다른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앞서 본 전통들과의 차이가 계량 가능성의 문제로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활동이므로 정도를 말할 수 있고, 벤담 이후의 행복은 쾌락의 양이므로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소멸을 최상급에 놓는 서술에서는 눈금이 성립하지 않는다. 사다리의 꼭대기 칸을 '가장 좋은 삶'으로 규정하는 문항은 이 답을 아예 담지 못한다. 사다리를 오르는 것과 사다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같은 축에 놓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계량할 수 있는 것만 남기기 — 벤담의 계산과 칸트의 거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행복 개념은 성격을 바꾼다. 제러미 벤담(1748~1832)이 1780년에 인쇄하고 1789년에 펴낸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은 첫 문단에서 논의의 바닥을 갈아엎는다.

Nature has placed mankind under the governance of two sovereign masters, pain and pleasure. It is for them alone to point out what we ought to do, as well as to determine what we shall do.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의 통치 아래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리키고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정하는 일은 오직 그 둘의 몫이다.

제러미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1장 1절

이 문장이 바꾼 것은 행복의 단위다. 내용은 그대로 두고 재는 방식을 갈아 끼웠다. 벤담은 뒤이어 쾌락과 고통의 값을 강도·지속·확실성·근접성 등의 항목으로 재는 방법을 제시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행복이 사람 사이에 더하고 뺄 수 있는 양이 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표어가 정책의 기준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활동은 합산할 수 없고, 아퀴나스의 지복은 더더욱 그렇다.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은 1863년 『공리주의』에서 이 계량에 질의 구분을 끼워 넣는다. 쾌락의 양만 세면 사람과 돼지가 같은 저울에 오른다는 비판에 대한 대응이었다.

It is better to be a human being dissatisfied than a pig satisfied; better to be Socrates dissatisfied than a fool satisfied.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 2장(1863년 초판 12쪽)

같은 문단에서 밀은 행복(happiness)과 만족(content)을 서로 다른 관념이라고 못박는다. 그러나 이 구분을 도입한 순간 계량은 흔들린다. 질의 높낮이를 판정하는 것은 두 쾌락을 모두 겪어 본 사람의 선호인데, 그 선호는 다시 양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사다리 문항이 재는 것이 밀이 말한 행복인지 만족인지도 이 구분 위에서는 확정되지 않는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 칸트(1724~1804)는 반대편의 결론을 냈다. 그는 『실천이성비판』 이전인 1785년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행복(Glückseligkeit)을 도덕의 기준에서 아예 떼어 낸다. 이유는 행복이 사소해서가 아니라 개념으로서 확정되지 않아서다.

weil Glückseligkeit nicht ein Ideal der Vernunft, sondern der Einbildungskraft ist, was bloß auf empirischen Gründen beruht.

행복은 이성의 이상이 아니라 상상력의 이상이며, 경험적 근거에만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이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학술원판 4권 418쪽

칸트가 든 논거는 실무적이다. 어떤 행위가 이성적 존재의 행복을 늘릴지 확실하고 보편적으로 정하는 과제는 풀리지 않으므로, 행복에 관한 명령은 조언(Anratungen)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순수이성비판』에서 그는 행복을 우리 모든 경향성의 충족이라 정의하는데, 경향성의 목록이 사람마다 다르고 한 사람 안에서도 시시각각 변하므로 정의는 있으되 내용은 비어 있다.

근대가 남긴 두 갈래

벤담은 행복을 재기 위해 내용을 쾌·고로 줄였고, 칸트는 내용이 줄지 않는다는 이유로 행복을 도덕의 기준에서 뺐다. 오늘날의 행복 조사는 이 두 선택 가운데 벤담의 것을 이어받되, 재는 대상을 쾌락의 양이 아니라 응답자 본인의 총평으로 바꾼 절충안에 해당한다. 앞서 본 대로 그 총평은 표본 조사로 수집되므로, 값의 유효 범위는 응답자가 자기 삶에 매긴 점수의 평균까지다. 칸트가 지적한 확정 불가능성은 해결되지 않았고 응답자에게 넘겨졌다.

'행복'이라는 낱말은 19세기 말에 만들어졌다

여기까지 다섯 갈래 전통을 훑는 동안 '행복'이라는 한국어 낱말을 계속 써 왔다. 그런데 그 낱말 자체가 지금 다루는 문제의 일부다.

영어 happiness의 어근 hap은 우연·운을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 계통 낱말이다.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의 다이몬, 라틴어 펠리키타스의 번성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몫을 가리켰다. 서양 어휘사에서 행복을 뜻하는 말들이 공통으로 운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그 개념을 사람의 노력이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재정의하려는 시도가 곧 어원과의 싸움이었음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능 논증도 아퀴나스의 지복 논의도 그 싸움의 일부였다.

한자어 행복(幸福)은 사정이 더 짧다. 미국 위스콘신대학 매디슨 캠퍼스의 인류학자 저우융밍(周永明)은 2010년 홍콩중문대학이 내는 학술지 『二十一世紀』(21세기) 121기에 「행복이 중국에서 겪은 불행」이라는 논문을 실어 이 낱말의 내력을 추적했다. 그가 확인한 바는 다음과 같다.

고전 한문에는 다른 뜻으로만 있었다
『신당서』 이위 등의 열전 찬(贊)에 幸福이라는 두 글자가 나오지만, 뜻은 '복을 빌다'이며 문맥은 부정적이다. 지금 쓰는 뜻과 다르다.
청대까지 일상어에 없었다
『홍루몽』에는 福 한 글자가 100회 넘게 나오지만 幸福은 나오지 않는다. 『통속편』, 『항언록』 등 청대에 엮인 구어 어휘집에도 보이지 않고, 1867년 영국 외교관 겸 중국학자 토머스 웨이드가 낸 북경관화 교재 『어언자이집』에도 福은 여러 번 나오되 幸福은 없다.
중국어 성경 번역에도 없었다
가장 널리 쓰인 화합본(신약 1906년, 전체 1919년)에서 福과 그 합성어가 593개 절에 나오지만 幸福은 한 번도 쓰이지 않는다. 1940년대에 나온 여진중 역본도 마찬가지다.
청일전쟁 뒤 일본에서 들어왔다
저우융밍은 중일 어휘 교류를 연구한 간사이대학 선궈웨이(沈國威) 교수에게 문의해, 幸福이 청일전쟁 이후 일본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신조어이며 당시 개혁파가 낸 『시무보』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는 답을 얻었다. 일본어에서도 幸福은 신조어였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저우융밍은 이어 중국에서 이 말이 처음에는 집단의 것으로 쓰였다고 정리한다. 『시무보』의 초기 용례에서 幸福의 주어는 언제나 '우리 국민', '영국인', '노동자' 같은 복수였고, 량치차오는 벤담의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을 소개하는 글을 따로 썼다. 개인의 체험으로 무게중심이 옮겨 간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이 어휘사가 논지에 걸리는 지점은 분명하다. "동서고금이 행복을 어떻게 정의했는가"라는 물음에서 주어 노릇을 하는 낱말이 동아시아에서는 130년 남짓 되었고, 그 낱말은 근대 서양어 happiness를 받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앞서 살펴본 樂이나 福, 사아다, 베아티투도, 에우다이모니아를 모두 '행복'으로 옮겨 나란히 세우는 순간, 이미 근대 서양어의 틀에 나머지를 끼워 넣은 셈이 된다. 번역어는 중립적인 그릇이 아니다.

사다리를 떠올리게 하면 권력과 부가 떠오른다

측정 도구도 중립적이지 않다. 룬드대학의 아우구스트 닐손을 제1저자로 하는 연구진은 캔트릴 사다리 문항이 응답자에게 실제로 무엇을 떠올리게 하는지를 실험으로 검토해 2024년 『사이언티픽 리포츠』 14권에 실었다(논문 번호 2642). 영국 성인 1581명을 대상으로 2022년 2월과 3월 두 차례에 걸쳐 자료를 모았고, 사다리 이미지, '가장 나쁜 삶에서 가장 좋은 삶'이라는 눈금 표현, '아래에서 위로'라는 방향 표현을 하나씩 바꿔 가며 응답자가 적어 낸 낱말을 사전 기반 분석, 토픽 분석, 단어 임베딩 세 가지 방법으로 비교했다.

결과는 사다리 틀이 다른 조건에 비해 권력과 부에 관련된 관념을 더 많이 끌어낸다는 것이었다. 눈금의 기준점을 조화(harmony)로 바꾸었을 때 권력·부 관련 언급이 가장 크게 줄었고(코헨의 d = −0.76), 틀을 바꾸자 응답자가 바라는 눈금 위치의 평균도 8.4에서 8.9로 올라갔다(d = 0.36).

이 결과가 말하는 바는 사다리 문항이 특정한 행복관을 이미 담고 있다는 점이다. 문항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사다리는 위아래가 있는 물건이고, 위로 갈수록 좋다. 그 이미지를 제시하면서 '가장 좋은 삶'을 물으면 응답자는 자연히 오를 수 있는 것, 남보다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을 떠올린다. 안회의 樂이나 장자의 至樂無樂, 니르바나는 이 척도 위에서 표현될 자리가 없다. 표현되지 않는 것은 낮은 점수로 잡히거나 아예 잡히지 않는다.

심리학 안에서도 이 한계는 오래전에 지적되었다. 리처드 라이언과 에드워드 데시는 2001년 『심리학 연례 개관』 52권에 실은 논평에서 안녕 연구가 두 갈래로 갈려 왔다고 정리한다. 쾌락 획득과 고통 회피로 안녕을 규정하는 쾌락적(hedonic) 접근과, 의미와 자기실현의 정도로 규정하는 에우다이모니아적(eudaimonic) 접근이다. 이름이 말해 주듯 뒤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되살린 것이다. 다만 되살아난 것은 개념의 이름과 방향이지 판정 구조가 아니다. 심리학의 에우다이모니아 척도 역시 응답자의 자기 보고로 측정되므로, 당사자가 자기 삶에 대해 틀릴 수 있다는 원래 개념의 핵심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결론 — 세 물음은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고, 지수는 그중 하나만 잰다

지금까지 살펴본 전통들은 행복이라는 한 물음에 서로 다른 답을 낸 것이 아니다. 다른 물음을 던졌고, 그 물음들이 근대 번역어 하나에 묶여 같은 물음처럼 보이게 되었다. 갈림은 세 축에서 일어난다.

활동인가 상태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은 탁월함을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었고, 보에티우스에게는 모든 좋은 것이 모여 완전해진 상태였다. 아퀴나스는 둘을 조정했으나 조정 자체가 두 물음이 별개임을 보여 준다. 활동이라면 하고 있어야 성립하고, 상태라면 지니고 있으면 성립한다.
채움인가 비움인가
벤담의 계산과 대부분의 통념은 좋은 것을 더하는 쪽에 서 있다.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 장자의 至樂無樂, 『담마파다』의 니르바나는 반대쪽에 있다. 이 축의 두 끝은 같은 눈금 위에 놓이지 않는다. 하나는 최대치를 향하고 하나는 눈금 자체의 소멸을 향하기 때문이다.
생애 안에서 완결되는가 밖에서 완결되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완결된 생애를 판정 단위로 삼은 데 비해, 아퀴나스는 완전한 지복을 이생 밖으로 옮겼고 알파라비와 알가잘리도 궁극의 행복을 지성의 합일이나 내세에 두었다. 이 축에서는 현세의 삶 전체가 원리상 미완이며, 당사자의 자기 평가는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세 축을 놓고 보면 오늘날의 행복 지수가 어디에 서 있는지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상태를 재고, 채움 쪽을 향하며, 생애 안에서 당사자의 자기 채점으로 완결된다. 세 축의 각 한쪽 끝만 고른 좌표다. 이것이 잘못된 선택이라는 말은 아니다. 국가 간 비교가 가능한 지표를 만들려면 어딘가에서 값을 하나로 뽑아야 하고, 그러자면 채점자를 당사자로 정하는 것 말고 실행 가능한 대안이 마땅치 않다. 문제는 그렇게 뽑은 값이 '행복'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올 때, 나머지 다섯 좌표가 측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넘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읽힌다는 데 있다.

번역어의 내력은 이 착시를 굳히는 쪽으로 작용했다. 幸福은 근대 서양어를 받기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그 말로 옛 문헌을 읽으면 옛 문헌이 근대적 물음에 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회가 낮은 점수를 받고도 즐거웠다는 식으로 읽히는 것이 그 예다. 정작 『논어』의 문장은 점수라는 축을 쓰지 않는다. 원어를 되짚는 작업이 현학적 취미가 아닌 이유가 여기 있다. 에우다이모니아·베아티투도·사아다·樂·sukha를 각각의 낱말로 되돌려 놓아야 무엇이 서로 다른 물음이었는지가 다시 보인다.

남아 있는 물음은 측정 대상의 선정에 걸려 있다. 척도를 정밀하게 다듬는 일과는 층위가 다르다. 닐손 연구진의 실험이 보여 준 것처럼 문항의 은유를 바꾸면 응답자가 떠올리는 것이 달라지고 값도 달라진다. 조화를 기준점으로 삼은 조건에서 권력과 부에 관한 언급이 크게 줄었다는 결과는, 다른 좌표를 재는 문항이 원리상 만들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그런 문항이 만들어진다 해도 세 축이 하나로 합쳐지지는 않는다. 활동과 상태, 채움과 비움, 이승과 내세의 갈림은 무엇을 사람의 좋음으로 보느냐에 대한 서로 다른 결정이며, 척도를 정교화한다고 화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결정은 지표를 쓰기로 한 쪽에서 이미 내려져 있다.


본문의 그리스어·라틴어·팔리어·한문·독일어·영어 인용은 각 항목에 적은 판본과 위치에서 가져와 직접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