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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미술

미네 오쿠보와 『시민 13660』 — 수용소에서 그린 그림이 40년 뒤 고발 문서로 읽히기까지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서부 해안에 살던 일본계 주민 12만여 명이 집을 잃고 철조망 안으로 옮겨졌다. 그 과정을 담은 사진은 대부분 연방정부가 고용한 사진가들이 찍었고, 그중 상당수는 촬영되자마자 국가의 보관고로 들어갔다. 수용소 안의 일상을 책 한 권 분량으로 세상에 처음 내놓은 것은 펜과 먹으로 그린 선화(線畵)였다.

0112만 명이 사라진 과정을 찍은 사진은 국가가 고용해 만들고 국가가 거두었다

행정명령 9066호는 1942년 2월 19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명했다. 명령문 어디에도 '일본'이라는 낱말은 없다. 육군 장관과 그가 지정한 지휘관에게 특정 지역을 군사구역으로 설정하고 그 안에서 누구든 배제할 권한을 넘긴다는 것이 골자였다. 인종을 문면에 적지 않은 채 인종을 겨냥한 결과를 만드는 방식이었고, 실제로 이 명령에 따라 서부 해안에서 쫓겨난 집단은 일본계 주민이었다.

이들을 가둔 시설을 운영한 기관이 전시이주국(War Relocation Authority)이다. 대통령령으로 1942년에 설치된 민간 연방 기관으로, 수용소의 건설과 운영, 수용자의 노동 배치와 외부 재정착 허가를 관할했다. 전시이주국의 공식 통계집이 집계한 수용 인원은 12만 313명이고, 법무부와 육군이 따로 운영한 시설에 갇힌 사람과 임시 집결소만 거쳤다가 풀려난 사람까지 더하면 12만 6천 명에 가깝다. 이 가운데 3분의 2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이었다.

전시이주국은 이 과정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을 직접 발주했다. 1942년에 고용된 사진가 가운데 도로시아 랑게(Dorothea Lange)가 있었다. 대공황기 농업안정국(Farm Security Administration) 소속으로 이주 농업노동자를 찍어 이름을 얻은 인물이다. 랑게가 전시이주국을 위해 남긴 사진은 약 800장인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압수 상태로 묶였다가 국립문서기록관리청으로 넘어갔다. 이 사진들 가운데 119장이 처음 한 권으로 묶여 나온 것은 2006년이다. 린다 고든(Linda Gordon)과 게리 오키히로(Gary Y. Okihiro)가 엮은 『Impounded』(W. W. Norton)가 그 책이며, 제목이 곧 사진에 찍힌 도장이었다.

사진의 사정이 이러했으니 수용소 내부의 모습은 오래 묻혀 있었으리라 짐작하기 쉽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9월, 컬럼비아대학출판부가 209쪽짜리 책 한 권을 냈다. 미네 오쿠보(Miné Okubo, 1912~2001)의 『시민 13660(Citizen 13660)』이다. 페이지마다 위쪽 절반을 선화가 차지하고 그 아래에 한 줄에서 몇 문단에 이르는 글이 붙은 형식으로, 수용소 안의 하루하루를 순서대로 따라간다. 수용 경험자가 직접 쓰고 그려 책 한 권으로 펴낸 기록으로는 이것이 가장 이르다.

사진은 국가가 만들고 국가가 거두었는데, 그림은 국가가 손대지 않았다. 이 비대칭이 어디서 왔는지가 이 글의 물음이다.

02오쿠보가 번호를 받기까지

미네 오쿠보는 1912년 6월 27일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일곱 남매 가운데 하나로 태어났다. 어머니 미요 카토(Miyo Kato)는 도쿄미술학교를 우등으로 마친 뒤 1904년 세인트루이스 만국박람회에 일본 정부가 서예가로 파견한 인물이었다고 집안에 전해진다. 어머니는 집에서 그림을 그렸고 일곱 아이 모두에게 예술을 권했다.

오쿠보는 리버사이드 주니어 칼리지를 거쳐 1933년 무렵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학사와 미술 석사를 마쳤다. 졸업 뒤에는 뉴딜 사업의 하나였던 공공사업진흥국 산하 연방미술기획(Federal Art Project)에서 벽화 작업을 도왔다. 1938년에는 버사 타우시그(Bertha Henicke Taussig) 여행 장학금을 받아 유럽에서 열여덟 달을 보냈다. 1939년 9월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자 마지막 배편 가운데 하나를 잡아 귀국했고, 이듬해 캘리포니아대학교 미술전에서 1등을 했으며 금문교 박람회에서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벽화 작업을 도왔다.

1942년 봄, 오쿠보는 오클랜드의 군인 휴게소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야간 통행이 금지된 뒤에도 작업을 끝내려고 특별 허가를 받아 오갔다. 그러는 사이 가족은 흩어졌다. 아버지는 몬태나주 미줄라에 억류됐고, 화가였던 오빠 벤지는 하트마운틴으로, 다른 형제들은 포스턴으로 갔다. 오쿠보 자신은 남동생 한 명과 함께 샌브루노의 탄포란으로 보내졌다. 경마장을 급히 개조한 시설이었고, 배정받은 거처는 말이 쓰던 칸이었다. 이후 유타주의 토파즈로 옮겨졌다.

이 사건을 부르는 이름이 갈리는 이유

당시 정부가 쓴 용어는 대부분 완곡어였고, 지금은 그것을 그대로 쓰지 않는 쪽이 표준에 가깝다. 일본계 미국인의 역사를 수집·연구하는 비영리 기관 덴쇼(Densho)가 정리한 기준은 이렇다.

임시 집결소(assembly center)
탄포란처럼 경마장·박람회장을 급조해 쓴 초기 시설. '집결'이라는 말과 달리 군 경찰이 지키는 울타리 안이었다.
이주 수용소(relocation center)
토파즈·만자나 같은 장기 시설. 철조망과 무장 경비가 있고 허가 없이 나갈 수 없었으므로 덴쇼는 '강제수용소(concentration camp)'라 부른다.
억류(internment)와 구금(incarceration)
'억류'는 전시에 적국 국민을 가두는 법적 절차를 가리키는 말이다. 법무부와 육군이 운영한 시설에 갇힌 1세대 약 8천 명에게는 이 말이 맞지만, 시민권자에게 쓰면 그들을 외국인으로 미는 효과가 생긴다. 덴쇼는 그 밖의 경우에 '구금'을 권한다.

이 글에서도 시설 종류를 가릴 필요가 있는 자리에서는 위의 구분을 따른다.

책 제목의 숫자는 정부가 오쿠보 남매에게 매긴 가족 식별번호다. 이주 통보를 받은 사람들은 그 번호를 짐에 붙이고 자기 몸에도 달았다. 이름 대신 번호를 다는 절차가 책의 첫 장면이고, 제목이 이미 그 사실을 말한다.

03카메라는 금지 품목이었고 연필은 아니었다

진주만 공격 뒤 일본계 주민에게는 카메라가 금지 품목으로 지정됐다. 많은 사람이 이주 전에 카메라를 경찰서에 반납하거나 팔거나 숨겼고, 돌려받지 못한 경우도 흔했다. 오쿠보는 1983년 재간행판 서문에서 카메라와 사진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스케치와 드로잉과 회화로 모든 것을 기록했다는 취지로 적었다.

같은 이유로 연필을 든 사람이 여럿이었다. 캉고 다카무라(Kango Takamura)는 산타페와 만자나에서 스케치와 수채화로 자기 시간을 남겼고,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본 것을 그대로 그렸다고 뒷날 회고했다. 버클리 미술 교수였던 지우라 오바타(Chiura Obata)는 탄포란에 미술학교를 세웠고 오쿠보도 여기서 가르쳤다. 토파즈로 옮긴 뒤 오쿠보는 수용소 문예지 『트렉(Trek)』의 미술 편집을 맡아 표지와 삽화를 그렸다. 수용 기간에 남긴 그림의 수는 집계가 갈려서, 1,000점이 넘는다는 계산과 약 2,000점이라는 계산이 함께 통용된다. 그중 200점 안팎이 『시민 13660』에 실렸다.

여기서 사실 하나가 자주 뒤로 밀린다. 카메라 금지는 오쿠보가 그림을 택한 이유였지만, 그것이 곧 국가가 수용소의 시각 기록 전체를 막았다는 뜻은 아니다. 막힌 것은 사진이었다. 사진에 무슨 조건이 붙었는지를 보면 그 차이가 드러난다.

04랑게·애덤스·미야타케 — 사진에는 세 겹의 조건이 붙었다

랑게는 고용된 사진가였지만 촬영 대상에 제한을 받았다. 무장 경비, 철조망, 수용자의 항의 장면은 찍을 수 없었다. 경비병이 수시로 통행증을 요구했고 수용자와 대화하는 것도 막았다. 랑게 자신은 이 일을 맡은 이유를 정확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결과물은 공개되지 않았다. 정부가 원한 것은 기록이되 공개되는 기록은 아니었다는 것이 랑게의 결론이었다.

앤설 애덤스(Ansel Adams)의 경우는 반대편에서 같은 선을 보여 준다. 요세미티 풍경으로 이름난 이 사진가는 만자나 수용소장 랠프 메릿(Ralph Merritt)과 친분이 있어 1943년에 초청을 받아 드나들었다. 그에게도 감시탑과 철조망은 촬영 금지였고, 애덤스는 탑을 찍는 대신 탑 위에 올라가 찍는 방식으로 탑의 존재를 드러냈다. 1944년 잡지사 U.S. Camera가 펴낸 112쪽짜리 사진집 『Born Free and Equal』이 그 결과물이다. 제목이 이미 논지를 말한다. 애덤스가 택한 틀은 부당한 처우 아래에서도 공동체를 일구어 낸 충성스러운 미국 시민이었다. 1965년 의회도서관에 원판을 기증하며 쓴 편지에서도 그는 같은 표현을 되풀이했다. 이 사진들은 기증 뒤로도 오랫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세 번째가 도요 미야타케(Toyo Miyatake)다. 로스앤젤레스 리틀도쿄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1세대 사진가로, 만자나로 끌려가면서 렌즈와 필름 홀더를 몰래 들여갔다. 수용소 안의 목수가 렌즈를 넣을 나무 상자를 만들어 주었고, 예전 거래처였던 철물상이 필름을 대 주었다. 군 경찰의 순찰을 피해 이른 아침과 식사 시간에 찍었다. 그러다 소장 메릿에게 사진관 개설을 요청했는데, 처음에 붙은 조건은 미야타케가 카메라를 걸고 구도를 잡되 셔터는 백인이 눌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건은 나중에 풀렸고 그는 공식 수용소 사진사가 되었다.

세 사람의 경로는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이 뚜렷하다. 사진에는 반드시 조건이 붙었다. 무엇을 찍을 수 있는지, 누가 셔터를 누를 수 있는지, 찍은 것을 어디에 둘 수 있는지가 모두 관리 대상이었다. 그림에 그런 조건이 붙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사진은 증거로 취급됐고 그림은 그렇게 취급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쿠보의 선화는 국가의 눈을 피해 몰래 축적된 기록이었을까. 남아 있는 서류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05그 책 기획을 수용소 관리자들은 알고 있었고 승인했다

크리스틴 홍(Christine Hong, 캘리포니아대학교 산타크루즈)이 덴쇼 백과사전의 『시민 13660』 항목에서 정리한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자료는 통념과 어긋나는 그림을 보여 준다. 오쿠보의 수용자 개인 파일과 전시이주국·인디언사무국 내부 문서에서 그는 '수용자 집단 가운데 특별한 재능을 지닌 젊은이'로 지목되어 있었다. 관리자들은 『트렉』에 실릴 그의 글과 그림을 사전에 검토했고, 여기서 겪은 일로 책을 쓰겠다는 계획 자체를 승인했다.

그 배경에는 정책 판단이 깔려 있다. 홍은 1942년 6월 해군정보국 케네스 링글(Kenneth Ringle) 중위가 낸 기밀 보고서를 든다. 이주와 재정착의 전 과정을 당사자 관점에서 그림을 곁들여 서술한 역사가 '미국화'에 도움이 된다는 취지였다. 수용된 사람이 스스로 그린 일상은 미국식 자기표현의 증거로 쓸 여지가 있었다.

바깥의 요청도 같은 방향이었다. 1943년 3월, 진보 성향 계간지 『Common Ground』의 편집자 마거릿 앤더슨(M. Margaret Anderson)은 『트렉』을 본 뒤 오쿠보에게 편지를 보내 스케치로 된 수용소 이야기를 제안했다. 이때 그가 덧붙인 주문은 차이보다 공통점을 부각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상황을 강조하라는 것이었다. 그해 10월에는 버클리 행정관 먼로 도이치(Monroe Deutsch)가 11월까지 책을 끝내라고 격려하면서, 일본계 이주와 재정착을 연구하던 버클리의 조사 사업을 이끈 도러시 스웨인 토머스(Dorothy Swaine Thomas)도 그림만 모은 책의 자료적 가치를 언급했다고 전했다.

정리하면 이렇다. '카메라가 금지되었으므로 몰래 그렸다'는 설명은 국가가 시각 기록 일반을 억누르려 했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한다. 그 전제가 흔들린다. 국가가 관리한 것은 사진이었고, 그림은 통제 목록에 오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쓸모가 있다고 판단됐다. 사진은 법정에 가져갈 수 있는 물증처럼 취급됐고, 손으로 그린 것은 해석의 산물로 분류됐다. 증거로서의 무게가 낮다고 본 바로 그 판단 덕분에 오쿠보의 선화는 검열을 통과했다.

통념에 균열을 내는 사실이 두 가지 더 있다. 첫째, 카메라 금지는 끝까지 유지되지 않았다. 홍은 금지가 전쟁 후반에 완화됐고 수용자 시점에서 찍힌 사진도 상당량 남아 있다고 덧붙인다. 둘째, 랑게의 사진이 30년 동안 봉인돼 있다가 1972년 전시로 풀렸다는 설명에도 이견이 있다. 덴쇼는 역사학자 로저 대니얼스(Roger Daniels)의 지적을 함께 싣는다.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은 사진을 넘겨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람을 허용했다. 그렇다면 압수의 실질은 접근 차단보다 유통 관리에 가깝다. 국가가 관리한 것은 이미지가 대중 앞에 놓이는 경로였다.

061946년의 서평자 명단에 수용소 최고 책임자가 있다

책이 나온 뒤의 반응을 보면 이 판단이 더 분명해진다. 초판을 칭찬한 사람 가운데 전시이주국 국장 딜런 마이어(Dillon Myer)와 홍보 책임자 M. M. 토지어가 있었다. 같은 명단에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 벅(Pearl Buck), 문학평론가 해리 핸슨(Harry Hansen), 수용 정책을 비판해 온 저술가 캐리 맥윌리엄스(Carey McWilliams), 그리고 앤더슨이 함께 올라 있다. 서평들은 이 책을 제2차 세계대전 문헌의 하나로 남을 회화적 기록, 다큐멘터리 증거, 정직한 기록이라고 불렀다.

수용소를 운영한 사람과 수용소를 비판한 사람이 같은 책을 나란히 칭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 통용되던 자유주의적 해석 틀 안에서 수용소는 의도는 민주적이었으나 집행이 미흡했던 일, 곧 소수집단을 미국 사회 전역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의 불행한 경유지로 설명됐다. 이 틀 안에서 오쿠보의 그림은 정책이 낳은 인간적 풍경을 정직하게 보여 주는 자료로 읽혔다. 정책 자체를 겨눈 문서라는 인식은 여기에 없었다.

이후의 이력이 그 독법을 뒷받침한다. 『시민 13660』은 출간 뒤 20년 동안 재판되지 않았다. 1966년 AMS Press와 1979년 아르노 프레스(Arno Press)가 다시 찍었는데, 둘 다 도서관 납품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 작은 재간행 전문 출판사였다. 오쿠보 자신은 뒷날, 전후 미국에서 일본과 관련된 것이면 무엇이든 기피 대상이던 시기에 책이 나왔다는 취지로 회고했다. 고발장으로 읽혔다면 20년의 공백은 설명되지 않는다.

071981년 청문회장과 1983년 서문이 책의 뜻을 바꿨다

변화는 1970년대에 시작됐다. 아시아계 미국인 예술가와 연구자들이 오쿠보의 전시 작업을 다시 꺼냈고, 1972년 오클랜드미술관에서 첫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같은 시기에 배상 운동이 조직됐다.

1980년 7월 31일, 지미 카터 대통령이 공법 96-317에 서명해 전시이주·민간인억류위원회(Commission on Wartime Relocation and Internment of Civilians)를 설치했다. 아홉 명으로 구성된 이 연방 조사기구는 1981년 여러 도시에서 청문회를 열어 750명이 넘는 증언을 들었다. 오쿠보가 증언대에 선 것은 1981년 11월 23일 뉴욕 루스벨트 호텔에서 열린 청문회다. 그는 『시민 13660』 한 권을 기록으로 남겨 달라며 위원회에 제출했다.

2년 뒤인 1983년, 워싱턴대학출판부가 이 책을 다시 냈다. 아시아계 미국 문학에 힘을 실어 온 출판사였다. 오쿠보는 이 판에 새 서문을 붙였는데, 강제 이주와 구금이 낳은 고통을 짚은 뒤 정부에 배상과 사과를 요구했다. 초판에는 없던 요구다. 같은 해 위원회는 조사 결과를 『Personal Justice Denied(개인에게 부정된 정의)』라는 보고서로 의회에 제출하면서, 이 정책의 원인을 군사적 필요에서 찾을 수 없으며 인종 편견과 전시 히스테리와 정치 지도력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결론지었다.

1984년에는 비포콜럼버스재단이 주는 미국도서상이 이 책에 돌아갔고, 도쿄의 오차노미즈쇼보가 일본어판을 냈다. 그리고 1988년 8월 10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시민자유법(공법 100-383)에 서명했다.

As the Commission documents, these actions were carried out without adequate security reasons and without any acts of espionage or sabotage documented by the Commission, and were motivated largely by racial prejudice, wartime hysteria, and a failure of political leadership.

위원회가 밝힌 대로, 이 조치들은 충분한 안보상의 이유 없이 시행되었고 위원회가 확인한 간첩 행위나 사보타주도 없었으며, 주로 인종 편견과 전시 히스테리와 정치 지도력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시민자유법(Civil Liberties Act of 1988), 공법 100-383 제2조 (a), 102 Stat. 903-904

법은 생존자 한 사람에게 2만 달러와 대통령 명의의 사과를 약속했다. 지급은 1990년에 시작됐고 8만 2,219명이 받았다. 1942년에 번호를 받은 사람들에게 46년 만에 문장이 돌아왔다.

번호에서 배상까지의 46년
  1. 1942.02행정명령 9066호 서명. 서부 해안 배제 시작
  2. 1942.05오쿠보 남매, 탄포란 임시 집결소 수용. 거처는 개조한 마구간
  3. 1942유타 토파즈로 이송. 문예지 『트렉』 미술 편집
  4. 1944.01전시이주국 허가로 토파즈를 떠나 뉴욕행. 『포춘』 일본 특집 작업
  5. 1946.09컬럼비아대학출판부, 『시민 13660』 출간
  6. 1966·1979AMS Press와 아르노 프레스가 도서관용으로 재간행
  7. 1981.11뉴욕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책을 기록으로 제출
  8. 1983워싱턴대학출판부 재간행. 새 서문에서 배상과 사과 요구
  9. 1984미국도서상 수상. 도쿄에서 일본어판 출간
  10. 1988.08시민자유법 서명. 생존자 1인당 2만 달러와 사과

홍은 이 회수 과정에 유보를 단다. 배상 운동의 문법 안에서 『시민 13660』을 읽으면 오쿠보의 전시 작업이 밝혀지기보다 오히려 가려지는 면이 있다고 본다. 근거는 같은 시기의 다른 작업이다. 오쿠보는 1944년 토파즈를 나온 뒤 『포춘』의 일본 특집호 삽화를 그렸고, 그 그림들은 일본계 미국 시민과 일본 제국의 신민을 하나의 상으로 묶어 냈다. 홍은 그 형상이 전후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을 안보 구역으로 재편하면서 일본을 민주화 대상으로 삼던 기획과 맞물린다고 본다(「Illustrating the Postwar Peace」, 『American Quarterly』 67권 1호, 2015, 105~140쪽). 오쿠보가 그린 수용소 풍경과 오쿠보가 그린 일본은 같은 손에서 나왔고, 앞엣것만 떼어 고발로 읽으면 뒤엣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반대 방향의 독법도 텍스트 안에 근거를 갖는다. 『시민 13660』에는 뻐드렁니와 째진 눈으로 일본인을 그린 당대의 인종 캐리커처를 자기 형상 옆에 나란히 놓은 대목이 있다. 책의 마지막 그림은 철조망 안에 남겨진 아주 늙은 사람과 아주 어린 아이들이다. 서술은 미래로 향하는데 그림은 안에 남은 사람들을 비춘다. 오쿠보가 자기를 거의 모든 장면 안에 옆모습으로 그려 넣은 것도 같은 기능을 한다. 화가가 보았으니 독자도 볼 수 있다는 신호이며, 이것이 이 책의 증언 형식이다.

08결론 — 『시민 13660』을 고발 문서로 만든 것은 40년 뒤에 붙은 독법이었다

『시민 13660』이 수용소 최초의 내부 기록으로 남은 데에는 분명한 조건이 있었다. 카메라가 금지 품목이었으므로 오쿠보는 연필을 들었다. 그러나 그 책이 국가 범죄의 고발장으로 읽히기 시작한 시점은 1980년대이고, 그 전환에는 세 갈래의 근거가 있다.

첫째, 국가가 관리한 대상은 사진으로 좁혀져 있었다. 랑게는 무장 경비와 철조망을 찍을 수 없었고 결과물을 넘겨야 했다. 애덤스도 감시탑을 정면으로 찍지 못했다. 미야타케는 셔터를 누를 권한부터 협상해야 했다. 손으로 그린 것에는 그런 조건이 붙지 않았고, 증거로서의 무게가 낮다고 본 판단이 오히려 통과의 조건이 되었다.

둘째, 오쿠보의 책 기획은 은밀한 작업이 아니었다. 수용소 관리자들은 그 계획을 알았고 『트렉』의 원고를 검토했으며 책을 쓰겠다는 목표를 승인했다. 당사자 시점의 그림 기록이 미국화의 증거로 쓸모 있다는 정책 판단이 이미 1942년에 문서로 남아 있었다.

셋째, 1946년의 독자들은 이 책을 고발로 읽지 않았다. 전시이주국 국장이 비판적 저술가와 나란히 이 책을 칭찬했고, 이후 20년 동안 재판되지 않았다. 뜻이 바뀐 지점은 1981년 11월의 청문회장과 1983년 재간행판 서문이다. 저자 자신이 앞에 나서서 책의 용도를 다시 지정했고, 미국도서상과 시민자유법이 그 지정을 사후에 승인했다.

여기서 판단은 무엇을 이 책의 본체로 보느냐에 따라 갈린다. 그려진 것 자체를 본체로 보면 고발은 1946년에 이미 종이 위에 있었다. 인종 캐리커처를 자기 옆에 세운 페이지와 철조망 안에 남은 노인과 아이들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은 뒷사람이 나중에 그려 넣은 것이 아니다. 반면 기록물의 지위를 유통과 독법에서 찾으면 고발은 1983년의 사건이다. 같은 선화가 40년 사이에 다른 문서가 되었고, 그 변화를 만든 힘은 종이 밖에 있었다. 두 답 가운데 하나를 고를 필요는 없지만, 어느 쪽을 택하든 '몰래 그려 남긴 저항의 기록'이라는 요약은 유지되지 않는다.

남는 물음은 통제의 형태를 다시 재는 일이다. 랑게 사진에 찍힌 압수 도장은 접근을 막았다기보다 유통을 미뤘고, 카메라 금지는 전쟁 후반에 느슨해졌다. 그렇다면 이 시기 시각 기록에 작동한 힘은 무엇이 언제 대중 앞에 놓이는지를 정하는 배치에 가깝다. 오쿠보의 선화가 검열의 그물을 빠져나간 경로와 랑게의 사진이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선반에서 보낸 시간은 같은 체계의 두 얼굴이며, 어느 쪽도 매체의 성질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주요 참고: 크리스틴 홍, 「Citizen 13660 (book)」 및 그레그 로빈슨, 「Miné Okubo」(덴쇼 백과사전) / 덴쇼, 「Controlling the Historical Record」 및 용어 지침 / 린다 고든·게리 오키히로 엮음, 『Impounded』(W. W. Norton, 2006) / 미 의회도서관 앤설 애덤스 만자나 컬렉션 및 『Born Free and Equal』(U.S. Camera, 1944) 디지털판 / 캘리포니아 온라인 아카이브 미네 오쿠보 컬렉션 안내 / 전미일계인박물관 오쿠보 전시 자료 / 시민자유법 공법 100-383, 102 Stat. 903-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