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19일
한국은 김·이·박 셋이 인구의 45%를 덮고, 일본은 성씨 종류가 10만을 넘는다. 이 격차는 두 민족의 오랜 기질 차이로 설명되곤 하지만, 실제로 분포를 결정한 것은 국가가 전 인구에게 성씨를 등록시킨 짧은 순간에 어떤 규칙을 걸었느냐였다.
통계청이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집계한 성씨 분포를 보면(주민등록부와 가족관계등록부를 연계한 전수집계다) 김씨가 1,069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1.5%, 이씨가 731만 명으로 14.7%, 박씨가 419만 명으로 8.4%다. 세 성씨를 합치면 44.6%이고, 상위 10대 성씨까지 넓히면 63.9%가 된다. 성씨 하나에 붙는 인구가 이 정도로 두꺼운 나라는 흔하지 않다.
일본은 반대편 끝에 있다. 성씨 연구자들이 추정하는 종류는 조사 방법에 따라 10만에서 30만 사이로 갈리는데, 어느 추정을 택하든 한국과는 자릿수가 다르다. 최다 성씨인 사토(佐藤)조차 인구의 2%에 못 미친다. 인구가 일본의 10배인 중국이 4,700종 정도인 것과 견주면 일본의 수치가 얼마나 예외적인지 드러난다.
이 격차의 설명으로 자리 잡은 것이 민족성이다. 한국은 혈연 의식이 강해 성씨를 함부로 만들지 않았고 일본은 그런 관념이 약했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 설명은 검증하기 어려운 심성을 원인으로 놓고 관찰된 결과를 되풀이할 뿐이다. 더 문제인 것은 반례가 곧바로 나온다는 점이다. 혈연 의식으로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성싶은 스웨덴은 성씨 5개가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반대로 씨족 관념이 강한 서아프리카 만데 지역도 성씨 수십 개가 인구 대부분을 덮는다. 성씨 가짓수와 혈연 관념 사이에는 안정된 대응이 없다.
수치 자체도 그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 앞의 조사에서 한국의 전체 성씨는 5,582개로 집계됐지만, 그중 한자가 있는 성씨는 1,507개이고 나머지 4,075개는 한자 없이 한글로만 적힌 성씨, 곧 귀화자들이 새로 올린 이름들이다. 그리고 인구 1,000명 이상인 한자 성씨는 153개에 불과하며 이들이 전체 인구의 99.8%를 쓴다. 즉 "한국 성씨는 5,582개"라는 문장과 "일본 성씨는 10만 종"이라는 문장은 같은 단위로 세어진 수가 아니다. 성씨의 가짓수를 국제 비교할 때는 무엇을 하나로 세었는지를 먼저 맞춰야 하고, 이 글에서 문제 삼는 것은 일정 규모 이상의 인구가 실제로 쓰는 성씨의 다양성이다.
차이의 뿌리는 성씨가 애초에 무엇을 표시하는 기호였는가에 있다. 한국의 성(姓)은 개인이 아니라 부계 혈통을 가리키는 표지로 들어왔다. 한국사 연구자 이수건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씨」 항목에서 한국의 성이 가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동의 호칭이 아니라 부계 가계 그 자체를 본위로 한 칭호라고 정리한다. 시집온 며느리가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 부부각성(夫婦各姓)이 자연스러운 이유가 여기 있다. 성은 그 사람이 어느 핏줄에서 나왔는지를 적는 자리이지 어느 집에 속하는지를 적는 자리가 아니었다.
혈통 표지로 쓰이는 이름은 새로 만들어질 수 없다. 이미 존재하는 계보에 붙어 있어야 뜻이 서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성씨 총량은 6세기 동안 250 안팎에 머물렀다. 15세기 『세종실록』 지리지에 250여 성이 실렸고, 전국을 대상으로 한 1930년 국세조사에서 250성, 1985년 인구센서스에서 274성이 나왔다.
초기에는 이 이름표를 왕실과 귀족만 달았다. 중국 정사 『신당서』 동이열전 신라조는 당대 신라의 사정을 이렇게 적었다.
王姓金,貴人姓朴,民無氏有名。
왕의 성은 김이고 귀인의 성은 박이며, 백성은 씨가 없고 이름만 있다.
『신당서』 권220, 동이열전 신라 (중화서국 표점교감본 계열 텍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중국정사조선전 대조)
왕과 귀인에게만 성이 있고 나머지에게는 이름만 있다는 이 짧은 문장이 성씨 제도의 출발점을 보여 준다. 성은 신분이었다.
일본의 묘지(名字)는 다른 자리에서 자랐다. 다나카(田中)는 밭 가운데, 야마모토(山本)는 산 아래, 가와구치(川口)는 강 어귀라는 뜻이다. 무사 가문이 자기가 딛고 선 땅을 이름으로 삼은 데서 시작해, 그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를 가리키는 서술어로 기능했다. 유럽의 성씨도 마찬가지로 서술어에서 나왔다. 대장장이를 뜻하는 Smith, 요한의 아들을 뜻하는 Johnson, 언덕을 뜻하는 Hill, 갈색 머리를 가리키던 Brown처럼 직업·부계·지형·별명 네 갈래가 기본이다.
서술어는 무한히 생성된다. 지형과 직업과 신체 특징의 조합에는 상한이 없고, 표기가 표준화되기 전에는 같은 이름이 Smith·Smyth·Smythe로 갈라지며 종류를 더 늘렸다. 반대로 혈통 표지는 있는 것을 물려받을 뿐이므로 종류가 늘지 않고, 계보가 끊기면 줄어들기만 한다. 이 구조 차이가 성씨 가짓수의 1차 원인이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조가 같은 두 사회가 정반대 결과를 낸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스칸디나비아의 부칭도 서술어 계열인데 성씨 집중도는 한국과 비슷하고, 아랍의 부족 니스바도 혈통 표지인데 지역에 따라 분포가 크게 갈린다. 구조는 조건을 정할 뿐이고, 결과를 확정한 것은 그다음 단계에서 벌어진 일이다.
조선에서 성씨는 오랫동안 인구의 일부만 가진 물건이었다. 이수건의 정리에 따르면 조선 전기인 15~16세기까지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인구의 대략 절반을 차지했고, 천민은 대체로 무성층이었다. 이들이 성을 갖게 되는 과정은 조선 후기 300년에 걸쳐 진행됐고,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무너지며 가속됐으며, 1909년 민적법(民籍法) 시행으로 모든 사람이 성과 본을 갖도록 법제화됐다.
결정적인 대목은 그때 이들이 무엇을 골랐는가다. 같은 항목은 무성층이 새로 성을 갖게 되자 주위에 많은 김·이·박 같은 대성(大姓)을 모방해 성을 정했고, 그 결과 기존의 대성 명문은 수가 더욱 늘었다고 적는다. 전주에서 태어난 사람은 이씨, 경주 출신은 김씨나 최씨를 택하는 식으로 출신지의 대성을 본떴다. 노비는 상전의 성을 그대로 따르기도 했다.
여기에는 유인 구조가 작동했다. 성을 갖는 목적 자체가 양반 행세였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취급돼 군역을 지는 등 실질적 불이익이 따랐고, 그래서 없던 성을 창작하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명문의 성관에 붙어야 효용이 생겼다. 성씨를 새로 만들 자유가 있었더라도 만들 이유가 없었다. 조선의 성씨 집중은 문화적 보수성이 아니라 신분 시장의 가격 신호가 만든 결과에 가깝다.
한국이 성씨 200여 개로 5,000만 명을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은 식별 단위가 성이 아니라 성과 본관의 짝이었기 때문이다. 김씨 하나로는 아무 정보가 없지만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와 광산 김씨는 별개 혈족이다. 2015년 조사에서 성씨 본관은 3만 6,744개로 집계됐고, 김해 김씨가 445만 7,000명으로 9.0%, 밀양 박씨가 6.2%, 전주 이씨가 5.3%였다. 일본이 성씨 자체를 늘려 해결한 문제를 한국은 성 앞에 지명을 붙여 해결했다. 그러니 성씨를 늘릴 압력이 애초에 걸리지 않았다.
비슷한 압력이 다른 경로로 작동한 곳이 베트남이다. 응우옌(Nguyễn)은 인구의 38~40%로 추정되는데, 왕조가 바뀔 때마다 성을 갈아야 했던 역사가 쌓인 결과다. 1232년 쩐 왕조의 실권자 쩐 투 도(Trần Thủ Độ)는 무너뜨린 리(Lý) 왕조의 후손들에게 성을 응우옌으로 바꾸게 했다. 패배한 왕조의 집단 정체성을 지워 저항의 구심점을 없애려는 조치였다. 1407년 호 왕조가 무너졌을 때와 1592년 막 왕조가 무너졌을 때는 보복을 피하려는 후손들이 스스로 응우옌으로 바꿨고, 1802년 응우옌 왕조가 들어선 뒤에는 충성의 표시로 그 성을 따르는 흐름이 더해졌다. 성을 바꾸는 일이 생존 전략이었고, 가장 안전한 선택은 언제나 권력을 쥔 쪽의 성이었다.
조선과 베트남은 사정이 달랐지만 도달한 곳은 같다. 이름을 새로 짓는 것이 손해이고 남의 이름을 베끼는 것이 이익인 구조에서는, 전 인구에게 성씨가 퍼질수록 종류는 오히려 줄어든다.
일본도 같은 시기에 전 국민 성씨화를 겪었다. 에도 시대까지 평민은 성이 있어도 공식적으로 쓸 수 없었고, 메이지 정부는 1870년 9월 19일 평민묘자허가령(平民苗字許可令)으로 평민의 성 사용을 허용했다. 그런데 신고가 좀처럼 늘지 않았다. 일본 국립공문서관은 그 이유를 확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세금을 더 걷으려는 것 아니냐는 경계심이 있었다는 설을 든다. 그래서 정부는 1875년 2월 13일 태정관 포고로 성씨 사용을 의무화했다.
自今必ず苗字を相唱うべく、尤も祖先以来の苗字不分明の向は新たに苗字を設くべし
이제부터 반드시 성을 칭할 것이며, 조상 이래의 성이 분명하지 않은 자는 새로 성을 지을 것.
묘자필칭의무령(苗字必称義務令), 1875년 2월 13일 태정관 포고. 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태정유전』 수록본, 국립공문서관 해제에서 인용
뒷절의 한 구절이 조선과 일본을 갈랐다. 새로 성을 지으라는 명령이다. 국립공문서관은 이 강제가 각 방면에 혼란을 불러, 절에 부탁해 성을 지어 받거나 관청이 총동원되어 마을 전 세대의 성을 만들어 준 사례가 기록에 남아 있다고 전한다. 조상의 성을 모르는 사람에게 남의 명문가 성을 베끼라고 하지 않고 없던 이름을 만들라고 요구한 순간, 성씨의 재료는 혈통이 아니라 지형과 직업이 됐고 생성 가능한 조합에서 상한이 사라졌다.
일본에서 사토·이토·스즈키가 많은 이유로는 이 법령 시행 당시 정부가 예시로 든 성씨였다는 설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자유롭게 정하라고 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 많았고, 그런 이들이 정부가 든 예시를 그대로 골랐다는 설명이다. 다만 이것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여러 설 가운데 하나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은 함께 적어 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통념 하나가 무너진다. 한국과 일본의 성씨 격차를 낳은 사건은 수백 년에 걸친 문화의 축적이 아니라 34년 간격을 두고 벌어진 두 번의 행정 조치였다. 1875년과 1909년, 두 정부는 같은 과제를 앞에 두고 정반대 규칙을 걸었다. 한쪽은 없으면 만들라고 했고, 다른 쪽은 있는 것 중에서 고르는 편이 이익인 상태를 그대로 둔 채 등록을 밀어붙였다. 이 규칙 차이가 오늘날 두 나라 전화번호부의 모양을 만들었다.
규칙 설계가 결과를 만든다는 것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는 동남아시아에 있다.
1913년 성씨법 이전에 시암 주민들은 성이 없었고 부모의 이름이나 사는 곳으로 자신을 밝혔다. 라마 6세는 근대적 신분등록 체계를 세우면서 성씨를 의무화했는데, 여기에 성씨는 한 가문에 고유해야 하며 기존 성씨와 중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붙였다. 1962년 인명법은 새 성씨를 태국 문자 자음 10자 이내로 제한하면서 중복 금지 조항을 다시 확인했다.
결과는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나타났다. 짧고 좋은 조합은 일찍 등록한 집안들이 가져갔고, 뒤에 온 가문들은 산스크리트와 팔리어 낱말을 겹쳐 쌓아 남은 조합을 찾아야 했다. 태국 성씨가 긴 것은 미적 취향이 아니라 선착순으로 소진된 이름 공간의 흔적이다. 그래서 태국에서 성이 같은 두 사람은 한 집안 사람이다. 한국에서 성이 같은 두 사람이 남남일 가능성이 높은 것과 정확히 반대다.
1849년 11월 21일 스페인 총독 나르시소 클라베리아는 전 인구의 민적을 만들기 위해 『성씨 알파벳 목록(Catálogo alfabético de apellidos)』을 펴냈다. 각지 신부들이 모은 스페인계와 토착 성씨 6만 662개를 담은 책이다. 각 도의 수장은 마을마다 필요한 성씨 수를 계산해 이 목록에서 알파벳 순으로 잘라 배정했고, 배정받은 목록을 받은 본당 신부가 마을 관리를 통해 각 집안 최연장 남성을 불러 하나씩 고르게 했다.
그래서 필리핀의 어떤 지방은 주민 성씨가 죄다 같은 글자로 시작한다. 성씨가 지리적 기원이나 직업이 아니라 행정 편의를 위해 자른 알파벳 구간을 반영하는 흔치 않은 사례다. 오늘날 필리핀인 대다수의 성씨는 1849년까지밖에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며, 스페인식 성을 가졌다고 해서 스페인 혈통인 것도 아니다.
두 사례를 나란히 놓으면 규칙의 힘이 분명해진다. 태국은 중복을 금지해 성씨 수를 인구 규모까지 밀어 올렸고, 필리핀은 유한한 목록을 나눠 주어 성씨 분포를 지리적으로 고정했다. 어느 쪽도 그 사회의 오랜 관습에서 나오지 않았다. 두 나라 모두 성씨가 없던 사회였고, 성씨가 생긴 첫날의 규칙이 지금의 모양을 만들었다.
등록 규칙은 성씨의 개수만 정하지 않았다. 무엇을 성씨로 쓸 수 있는가를 정하면서 그 성씨가 담고 있던 정보를 지우기도 했다.
튀르키예 공화국은 1934년 6월 21일 성씨법(Soyadı Kanunu)으로 모든 시민에게 고정 세습 성씨를 요구했다. 오스만 시대에는 파샤·베이·에펜디 같은 칭호가 그 자리를 대신했으므로, 이 법은 성씨 제도의 도입인 동시에 오스만식 신분 표지의 폐지였다. 같은 해 11월 의회는 무스타파 케말에게 아타튀르크(튀르크의 아버지)라는 성을 부여하고 오스만 유래의 칭호를 금지하는 법을 함께 통과시켰다.
문제는 그해 12월 20일 공포된 시행규칙이었다. 튀르키예 근현대사 연구자 에마뉘엘 쉬레크가 브릴에서 펴낸 논문집에 옮긴 조문에 따르면, 규칙 제5조는 새로 정하는 성씨를 튀르키예어에서 고르도록 했고, 제7조는 다른 민족을 연상시키거나 튀르키예어가 아닌 언어에서 빌려 온 접미사와 낱말을 금지했다. 명시적으로 열거된 것이 아르메니아계의 -yan, 슬라브계의 -of·-vich, 그리스계의 -is·-dis·-pulos·-aki, 페르시아계의 -zade, 아랍계의 -veled·-bin 등이었고, 그 자리에는 튀르키예어 어미 -oğlu를 넣으라고 했다.
성씨는 그것을 만든 언어의 흔적을 담는다. -yan은 아르메니아어이고 -pulos는 그리스어이며 -oğlu는 튀르키예어다. 어미를 갈아 끼우라는 명령은 형식상 표기 규정이지만, 실제로는 한 인구 집단의 출신을 문서에서 조회할 수 없게 만드는 조치였다. 성씨 등록 제도가 무엇을 기록에 남길지 정하는 장치이기도 하다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유럽 유대인의 성씨도 국가가 만들었다. 합스부르크의 요제프 2세는 1787년 7월 23일 이른바 유대인 성명 특허(Das Patent über die Judennamen)로 제국 내 유대인에게 독일식 이름과 성씨를 갖도록 명령했다. 고를 수 있는 이름은 알파벳순 등재부로 제시됐고, 통합을 촉진한다는 이유로 독일식·기독교식 발음을 가진 이름만 허용됐다. 원하는 이름을 얻으려면 비용이 필요했고 그 돈을 마련하지 못한 신청자에게는 관청이 이름을 배정했다.
나폴레옹도 1808년 7월 20일 바욘에서 칙령을 내려, 고정된 성과 이름이 없는 유대인 신민에게 공포 후 3개월 안에 이름을 정해 민적 담당관에게 신고하도록 했다. 이 칙령 제3조는 구약성경에서 온 이름과 도시 이름을 명시적으로 금지했다. 조상의 이름을 그대로 쓰거나 살던 도시를 성으로 삼는 두 가지 흔한 방법이 동시에 막혔다.
그 결과 아슈케나지 성씨에는 로젠탈이나 골드베르크처럼 국가가 허용한 어휘 안에서 조립된 독일어 조어가 대량으로 남았다. 좋은 이름을 받으려면 뇌물을 줘야 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으나, 이 부분은 실증이 약해 전설로 다뤄진다. 반면 카츠(Katz)가 코헨 체데크의, 시걸(Segal)이 세간 레비야의 머리글자를 딴 축약어라는 것처럼 등록 이전부터 쓰이던 종교적 표지는 확인된다.
데이비드슨과 리처드슨의 -son은 부칭(patronymic), 곧 아버지의 이름에서 만든 이름이다. 아랍어의 이븐(ibn), 히브리어의 벤(ben), 게일어의 맥(Mac-), 웨일스어의 압(ap-), 노르만계의 피츠(Fitz-), 슬라브계의 -오비치, 스페인어의 -에스와 같은 자리에 놓이며, 고대 노르드어에서 아들을 뜻하는 sonr에서 온 게르만계 형태다.
영어권에는 같은 뜻을 표시하는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son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격 -s다. Richards와 Williams와 Roberts, 그리고 John's에서 온 Jones는 아들이라는 낱말이 생략된 형태이므로 Richardson과 뜻이 같다. -son은 스칸디나비아인이 정착했던 잉글랜드 북부와 데인로 지역에, -s는 남부와 웨일스에 주로 남았다. 여기에 애칭이 끼어들면 같은 이름에서 여러 성이 갈라진다. Richard의 애칭 Dick과 Hick에서 딕슨과 힉슨이, John의 애칭 Jack과 Jenkin에서 잭슨과 젠킨스가 나왔다. 다만 -son으로 끝난다고 모두 부칭은 아니어서, 메이슨(Mason)은 고대 프랑스어 masson에서 온 석공이라는 직업명이다.
핵심은 이 부칭이 언제 세습 성씨로 굳었는가다. 잉글랜드에서는 14~16세기에 이미 얼어붙었다. 리처드슨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의 아버지 이름이 리처드일 필요가 그때부터 사라졌다. 반면 스칸디나비아는 19세기까지 살아 있는 부칭을 썼다. 안데르스의 아들은 안데르손이고, 그 사람의 이름이 라르스면 손자는 라르손이 되는 식으로 세대마다 성이 바뀌었다. 세습 성씨를 의무화한 시점은 덴마크 1828년, 스웨덴 1901년, 노르웨이 1923년이다. 아이슬란드는 지금도 가문명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이름과 아버지 이름을 잇는 방식을 유지하며, 그래서 전화번호부가 성이 아니라 이름 순으로 정렬된다.
고정 시점이 분포를 결정했다. 부칭의 재료는 남자 이름인데, 중세 유럽에서 통용된 남자 이름은 성인(聖人) 이름 몇십 개로 좁았다. 좁은 재료로 만든 이름을 어느 한 해에 통째로 얼리면 소수의 성씨에 인구가 몰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스웨덴은 안데르손·요한손·칼손·닐손·스벤손 5개만으로 인구의 약 20%를 차지한다.
이 사례가 앞서 말한 구조 설명을 보완한다. 스웨덴의 부칭은 일본의 지형명과 마찬가지로 서술어 계열이고 새로 만들 자유도 있었지만, 결과는 한국과 닮은 소수 집중이었다. 자유가 있어도 재료가 좁으면 다양성은 생기지 않는다. 성씨의 가짓수를 결정하는 것은 생성의 허용 여부가 아니라 생성에 쓸 수 있는 재료의 폭과, 그 재료를 언제 잠갔는가다.
지금까지의 사례는 모두 국가가 성씨를 강제한 시점이 있는 사회다. 그런데 그 순간을 아직 통과하지 않았거나 통과하다 만 지역이 넓게 남아 있고, 거기서는 성씨 가짓수를 세는 일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전통 아랍 작명은 성씨 체계가 아니다. 이름(ism)에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이븐(ibn, ~의 아들)으로 이어 붙인 나사브(nasab)가 따르고, 여기에 출신지·부족·직업을 형용사로 만든 니스바(nisba)가 붙는다. 알미스리는 이집트 사람, 알타미미는 바누 타밈 부족 사람, 알나자르는 목수를 뜻한다. 역사가 이븐 할둔의 정식 이름이 압두라흐만 이븐 무함마드 이븐 무함마드 이븐 아비 바크르 이븐 칼리드인 것이 전형이다. 마지막 요소는 물려받는 가문명이 아니라 그 사람이 놓인 위치를 지시하는 서술어이므로, 셀 대상 자체가 없다.
근대 국가가 여권과 호적을 만들면서 이 사슬이 굳었는데, 굳는 방식이 지역마다 갈렸다. 레반트와 마그레브에서는 나사브가 짧아지며 고정 가문명으로 대체됐고, 걸프 국가들은 부족 계보를 명시하는 긴 나사브를 유지했으며, 이집트와 수단은 나사브와 니스바를 결합해 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에서는 지금도 부칭제를 유지해 이름과 아버지 이름과 할아버지 이름이 공문서에 그대로 실린다.
그 결과 같은 아랍권 안에 한국형과 유럽형이 함께 있다. 사우디에서 흔한 알가미디·알오타이비·알카흐타니는 부족명이고 한 부족이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이므로 집중도가 높다. 반면 레반트의 하다드(대장장이)·나자르(목수)·쿠리(사제)·사예그(금세공)는 유럽의 직업 성씨와 같은 원리로 만들어져 분포 양상도 유럽과 닮았다. 같은 언어와 같은 종교를 공유하는 지역이 이렇게 갈리는 것 자체가, 성씨 분포를 문화권 단위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어디서 빗나가는지를 보여 준다.
아프리카는 지역별로 나눠 봐야 한다.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소말리아에는 성씨가 아예 없다. 두 번째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이고 소말리아는 여기에 할아버지 이름까지 붙는다. 아비 아흐메드 알리는 알리의 아들 아흐메드의 아들 아비라는 뜻이다. 계보 데이터베이스가 에티오피아의 고유 성씨를 8만여 개로 집계하는 일이 있는데, 이는 성씨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남자 이름의 가짓수를 성씨 칸에서 세고 있다는 뜻이다. 앞서 한국의 5,582개와 일본의 10만 종이 같은 단위가 아니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착시다.
남부 아프리카는 한국과 구조가 비슷하다. 응구니계의 이시봉고(isibongo)는 시조를 공유하는 씨족명이어서 본관을 붙이지 않은 성관에 해당한다. 들라미니(Dlamini)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이며, 이 성을 가진 사람은 대개 들라미니 씨족의 성원으로 들라미니 1세라는 한 인물에게서 갈라져 나온 코사·줄루·스와지·소토 분파를 이룬다. 에스와티니 왕실도 이 씨족이다.
서아프리카 만데·풀라 지역도 소수 집중형이다. 트라오레·케이타·쿠야테·디알로·바·소우·바리 같은 자무(jamu)는 수십 개 남짓한 씨족명 안에서 돌고, 여기에 성씨 짝을 기준으로 농담을 주고받는 관습적 관계까지 얹혀 성씨가 사회적 좌표 노릇을 한다.
다양성이 큰 쪽은 요루바와 이보다. 아데바요·오군레예·바바툰데처럼 뜻을 가진 문장을 통째로 이름으로 삼기 때문에, 일본의 지형 성씨와 같은 원리로 생성에 상한이 없다. 여기에 선교와 식민 행정이 유럽식 성씨를 얹었고,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포르투갈계 성씨, 사헬과 스와힐리 해안의 아랍·이슬람계 이름이 각각 다른 재고를 들여왔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대서양 노예무역을 거친 아메리카의 아프리카계 인구다. 이들은 아프리카 성씨가 아니라 노예주의 유럽 성씨를 물려받아, 좁은 이름 풀에 강제로 밀어 넣어진 상태로 남았다.
성씨는 한 번 등록되고 끝나지 않는다. 결혼과 출생을 거치며 계속 재배치된다. 이 단계의 규칙도 나라마다 다르고, 그 차이가 분포에 다시 작용한다.
일본은 부부가 같은 성을 쓰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 민법 750조는 이렇게 규정한다.
夫婦は、婚姻の際に定めるところに従い、夫又は妻の氏を称する。
부부는 혼인할 때 정하는 바에 따라 남편 또는 아내의 씨를 칭한다.
일본 민법 제750조
조문 자체는 남녀 어느 쪽이든 고를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실제 선택은 한쪽으로 쏠린다. 일본 법무성이 후생노동성 인구동태통계를 인용해 공개한 수치를 보면 남편의 씨를 택한 부부의 비율은 1995년 약 97.4%, 2000년 약 97.0%, 2010년 약 96.3%, 2019년 약 95.5%다. 최고재판소는 2015년 12월 16일 대법정 판결과 2021년 6월 23일 대법정 결정에서 이 조항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두 차례 판단했고, 제도의 형태는 국회에서 논할 사안이라고 밝혔다.
한국은 정반대다. 성불변의 원칙과 부부각성주의를 택해 혼인해도 성이 바뀌지 않는다. 자녀의 성에 관해서는 민법 781조가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2005년 개정으로 혼인신고 때 부모가 협의하면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게 열어 두었다. 세계 최대의 성씨 종류를 가진 일본이 부부별성은 인정하지 않고, 성씨 종류가 200여 개인 한국이 부부별성을 당연시하는 조합이 만들어진 이유는 두 나라의 성이 가리키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의 씨는 오래도록 집(家)의 명칭이었고 한국의 성은 부계 혈통의 표지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함께 물려주므로 모계 성씨가 한 세대에 사라지지 않는다. 스페인은 1999년 11월 5일 법률 40/1999호로 민법 109조를 고쳐 부모가 합의하면 두 성의 순서를 정할 수 있게 했고, 합의가 없으면 아버지 성이 앞에 오는 기존 규칙을 남겨 두었다. 이 잔여 규정은 2017년 6월 30일부터 출생신고 때 부모가 순서를 반드시 적도록 바뀌면서 사라졌다. 인도네시아에는 지금도 성이 없는 사람이 많아 수카르노와 수하르토처럼 이름 하나로 산다. 인도 타밀나두에서는 성씨가 카스트를 드러낸다는 이유로 성을 버리고 아버지 이름의 머리글자만 쓰는 관행이 퍼졌다. 이름 제도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고, 움직이는 방향은 그 사회가 무엇을 기록에 남기고 싶어 하는지를 따라간다.
성씨가 제 기능을 잃으면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메운다. 웨일스는 존스·윌리엄스·데이비스·에번스 몇 개가 인구를 뒤덮은 탓에 성으로 사람을 구별할 수 없게 되자, 마을에서 Jones the Milk나 Dai the Post처럼 직업을 덧붙여 부르는 관습이 자리 잡았다. 중국은 반대 방향의 문제를 겪는다. 왕(王)과 이(李)는 세계에서 쓰는 사람이 가장 많은 성씨로 꼽히는 한편, 유니코드에 없거나 전산 시스템이 표시하지 못하는 벽자(僻字)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신분증과 계좌를 만들지 못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성씨를 등록 가능한 문자로 제한한다는 규칙이 지금도 사람을 걸러 내고 있다.
부계로 이어지는 성씨와 Y염색체는 전달 경로가 같다. 그래서 성씨가 계보 기능을 유지한 사회에서는 성씨가 유전 자료가 된다.
브라이언 사이크스와 캐서린 어븐은 2000년 『미국인간유전학회지』에 사이크스(Sykes)라는 성을 가진 남성들의 Y염색체를 분석한 결과를 실었다. 잉글랜드 북부 세 주에서 무작위로 고른 269명에게 우편으로 시료를 요청해 61명이 회신했고 그중 48명의 DNA를 분석했다. Y염색체 미세부수체 4개를 분석한 결과 43.8%가 동일한 하플로타입 15-23-11-14를 공유했는데, 이 유형은 같은 지역의 대조군에서도 영국 전체 대조군에서도 관찰되지 않았다.
사이크스라는 이름은 샘·개울·경계 도랑을 뜻하는 지형어이고, 문헌 연구는 요크셔 여러 곳에서 따로 생겨났으리라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절반 가까이가 한 하플로타입을 공유한다는 것은 현존 사이크스 남성 다수가 한 명의 시조에서 갈라졌음을 가리킨다. 나머지 하플로타입의 분포는 대조군과 유의하게 다르지 않았고, 논문은 이를 700년에 걸쳐 누적된 비부계(非父系) 출생으로 설명하면서 세대당 평균 1.3%라는 추정값을 제시했다.
표본 48명은 작고, 특정 성씨 하나에서 얻은 결과를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연구가 갖는 함의는 분명하다. 지형에서 나온 서술어형 성씨도 일단 세습 성씨로 고정되면 700년 동안 부계 계보를 실어 나른다는 점이다. 성씨의 기원이 혈통이었는지 서술어였는지는 등록 이후에는 중요하지 않다. 고정되는 순간부터 모든 성씨는 혈통 기록이 된다.
세계의 성씨 가짓수는 각 사회가 오래 길러 온 혈연 관념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가 전 인구를 장부에 올리려 한 짧은 순간에 어떤 규칙을 걸었는지가 결정했다. 이 글에서 확인한 근거는 세 갈래로 묶인다.
첫째, 같은 과제에 정반대 규칙을 건 두 나라가 정반대 결과를 냈다. 1875년 일본은 조상의 성을 모르면 새로 지으라고 명령해 이름 공간을 열었고, 1909년까지 진행된 조선의 성씨 보편화는 명문의 대성을 베끼는 것이 이익인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진행돼 이름 공간을 좁혔다. 34년 간격의 두 행정 조치가 오늘날 두 나라 성씨 분포를 설명한다.
둘째, 규칙의 종류가 달라지면 결과의 종류도 달라진다. 태국은 중복을 금지해 성씨 수를 가문 수까지 끌어올렸고, 필리핀은 유한한 목록을 알파벳순으로 배급해 성씨를 지리에 고정했으며, 튀르키예와 합스부르크·나폴레옹 정부는 허용 어휘를 제한해 성씨가 담고 있던 출신 정보를 지웠다. 스칸디나비아는 살아 있던 부칭을 특정 연도에 동결해, 서술어형 이름을 쓰고도 한국과 닮은 소수 집중에 도달했다.
셋째, 그 순간을 통과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사우디와 예멘,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처럼 부칭제가 살아 있는 곳에서 성씨 개수를 세면 남자 이름의 개수가 나온다. 한국의 5,582개와 에티오피아의 8만여 개가 모두 같은 착시의 산물이라는 점은, 성씨 통계를 국제 비교할 때 먼저 무엇을 하나로 세었는지 맞춰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성씨는 상상만큼 오래된 물건이 아니다. 필리핀인 대다수의 성씨는 1849년, 일본 평민의 성씨는 1875년, 태국인의 성씨는 1913년, 튀르키예인의 성씨는 1934년에 생겼다. 한국의 성씨는 훨씬 오래된 계통을 가졌지만 전 인구가 그것을 갖게 된 것은 역시 20세기 초의 일이다. 우리가 뿌리라고 부르는 성씨의 연원은 근대 국가가 사람을 세려고 만든 장부에 닿아 있다.
남은 물음은 이 장부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다. 성씨는 사람을 식별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지금은 주민등록번호와 생체 정보가 그 일을 대신하고, 성씨에 남은 기능은 계보의 표시 쪽으로 옮겨 가고 있다. 그 사이에서 각국의 규칙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중이다. 스칸디나비아는 금지했던 부칭을 다시 허용했고, 태국은 여전히 중복을 막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부부동성 조항의 개정 여부가 국회로 넘어가 있다. 성씨가 무엇을 기록하는 자리인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그 답은 다음 세대의 장부가 어떤 규칙으로 작성되는지에 따라 다시 갈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