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사
8세기 중반에 시작된 그리스어 저작의 대량 번역을 기준선으로 놓고, 그 앞의 아랍어권 논쟁 문화와 그 뒤에 달라진 증명의 기준을 나누어 정리한다.
아랍 철학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줄일 때 자주 쓰이는 설명이 있다. 유럽이 그리스 철학을 잊고 지내는 동안 아랍인들이 그것을 보관해 두었다가 훗날 유럽에 돌려주었다는 이야기다. 이 설명에는 판단이 두 겹으로 들어 있다. 하나는 그리스 문헌이 들어오기 전 아랍어를 쓰는 세계에는 철학이라 부를 것이 없었다는 판단이고, 다른 하나는 들어온 뒤에도 그 세계가 한 일은 주로 옮기고 지키는 일이었다는 판단이다.
두 판단은 모두 지난 반세기의 사료 연구에서 크게 흔들렸다. 아래에서 세우려는 논지는 하나다. 그리스 문헌의 유입은 없던 사유를 이식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아랍어권 안에서 굴러가던 논쟁이 불러들인 결과였다. 그리고 유입이 실제로 바꾼 것은 무엇을 증명으로 인정할 것인가라는 기준이었다.
먼저 시간의 뼈대를 세워 둔다. 아래 연표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은 본문에서 하나씩 설명한다.
보관소라는 말은 안에 든 것이 들어올 때와 나갈 때 같은 물건이라는 뜻을 품는다. 그래서 이 비유를 쓰는 순간 아랍어권은 그리스 사상의 창고 관리인이 되고, 그 사이 400년 동안 그 세계 안에서 무엇이 만들어졌는지는 물을 필요가 없는 문제로 바뀐다.
비유가 어긋나는 지점은 분명하다. 아랍어로 옮겨진 그리스 저작의 목록을 펼쳐 보면 들어온 것과 나간 것이 같지 않다. 아랍어권은 그리스어 저작 전체를 옮기지 않았고, 옮긴 것도 원문 그대로 두지 않았다. 무엇을 고를지 결정한 기준이 따로 있었고, 그 기준은 아테네가 아니라 바그다드에 있었다. 뒤에서 보겠지만 이 선택의 흔적이야말로 유입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 준다.
그러므로 물음을 둘로 나누어야 한다. 첫째, 그리스 문헌이 들어오기 전 아랍어권에서는 무엇을 놓고 어떻게 다투고 있었는가. 둘째, 문헌이 들어온 뒤 실제로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두 물음을 붙여 놓아야 유입이라는 사건의 크기를 재는 자가 생긴다.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반도에 오늘날 철학이라 부를 만한 제도는 없었다. 학교도, 주석 전통도, 논증을 직업으로 삼는 계층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 대신 있었던 것은 고도로 발달한 시(詩)와 격언이다. 아랍어에는 히크마라는 말이 있었는데, 삶의 요령과 처세를 압축한 지혜라는 뜻이다. 이 말은 훗날 그리스 철학을 가리키는 용어로 전용되지만, 7세기 이전에는 잠언에 가까웠다.
11세기 안달루스의 학자 사이드 알안달루시는 초기 무슬림들에게 학문 분과가 없었다고 적었다. 이 관찰 자체는 사실에 가깝다. 다만 그것을 사유가 없었다는 뜻으로 읽으면 그다음 100년이 통째로 사라진다.
632년 무함마드가 죽은 뒤 한 세대 만에 아랍 군대는 사산조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비잔티움 제국의 시리아와 이집트를 차지했다. 정복은 신학 문제를 곧바로 불러왔다. 큰 죄를 지은 자를 여전히 신자로 볼 것인가. 부당한 통치자에게 복종해야 하는가. 이런 물음은 내전과 반란의 한복판에서 나왔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 끈 것이 카다르 논쟁이다. 카다르는 신이 정한 몫이라는 뜻으로, 인간의 행위가 미리 정해져 있는가를 묻는다. 정해져 있다면 죄인을 벌하는 일이 정당한가. 정해져 있지 않다면 신이 모르는 일이 세상에 있다는 말인가. 자흠 이븐 사프완(745년 사망)은 인간에게 실질적인 행위 능력이 없다는 쪽으로 밀고 갔고, 와실 이븐 아타(748년 사망)를 시작으로 하는 흐름은 인간이 자기 행위를 만들어 낸다는 쪽으로 갔다. 뒤쪽 흐름이 훗날 무타질라라 불린 신학 학파로 자란다.
이 논쟁들이 취한 형식을 칼람이라 부른다. 아랍어로 말 또는 담화라는 뜻인데, 학문 용어로는 계시가 참임을 전제한 뒤 그 안에서 이성적 논증으로 교리를 방어하고 상대 주장을 무너뜨리는 토론술을 가리킨다. 형식은 문답이다. 상대에게 질문을 던져 대답을 받고, 그 대답에서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을 끌어내 물러서게 만든다. 라틴 세계의 스콜라 논쟁과 겉모습이 닮았지만 시기가 훨씬 이르다.
칼람의 뿌리를 어디에서 찾을지는 지금도 갈린다. 마이클 쿡은 1980년 논문에서 이 논쟁 형식이 시리아와 이라크의 아랍계 기독교 공동체에서 벌어지던 그리스도론 논쟁의 문답 형식과 겹친다고 보았다. 반대편에는 요제프 판 에스처럼 이슬람 내부의 물음에서 자생했다고 보는 계열이 있다. 어느 쪽이든 한 가지는 공통된다. 칼람의 문답술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이 아랍어로 번역되기 전에 이미 굴러가고 있었다.
여기서 정리해 둘 것이 있다. 유입 이전 아랍어권의 상태는 사유의 공백이 아니었다. 다만 논증을 최종적으로 판정하는 기준이 계시 텍스트와 아랍어라는 언어 공동체 안에 있었다. 상대를 이기려면 상대도 인정하는 구절과 상대도 인정하는 어법에 호소해야 했다. 공동체 밖에서 통하는 척도라는 발상 자체가 아직 없었다.
같은 시기 아랍어권에서는 신학보다 조용하게, 그러나 훨씬 체계적으로 자란 학문이 둘 있었다. 문법학과 법학이다. 둘 다 종교에서 출발했지만 결과물은 순수한 절차 기술이었다.
문법학의 출발점은 실무였다. 정복으로 아랍어를 모어로 쓰지 않는 사람들이 대거 무슬림이 되면서 꾸란을 정확하게 읽는 문제가 생겼고, 모음 표기가 없던 초기 아랍 문자에서는 한 글자가 여러 갈래로 읽혔다. 이 문제를 붙들고 여러 세대가 지난 뒤 페르시아계 학자 시바와이히가 『키타브』, 곧 『책』이라 불리는 저작을 남긴다. 796년 무렵의 일이다. 이 책은 아랍어의 모든 문장을 몇 가지 기본 형태와 그 변형으로 환원하고, 개별 표현이 왜 그 형태를 취하는지를 규칙에서 도출한다. 관찰된 용례를 모아 둔 목록을 넘어, 규칙에서 결과를 끌어내는 체계다.
법학에서는 알샤피이(820년 사망)가 비슷한 일을 했다. 그가 쓴 『리살라』, 곧 『서한』은 법 판단의 근거를 꾸란, 예언자의 언행 기록, 학자들의 합의, 유추의 네 층으로 세우고 층 사이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네 번째 층인 유추가 절차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술을 금하는 규정이 있고 새로 등장한 음료에 대한 규정이 없을 때, 금지의 이유가 취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고 보면 그 이유를 공유하는 다른 음료에도 같은 판단을 확장할 수 있다. 판단의 근거를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텍스트에서 뽑아낸 이유에 두는 절차이며, 이유가 무엇인지를 놓고 다투는 이차 논쟁이 여기서 열린다.
문법학과 법학은 철학이 아니다. 존재나 인식을 묻지 않고 각각 언어와 규범이라는 정해진 대상만 다룬다. 그러나 두 분야가 8세기 말까지 만들어 낸 것은 일반 규칙에서 개별 판단을 끌어내고, 반례를 만나면 규칙을 수정하고, 상대의 도출 과정을 공격하는 훈련된 절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이 아랍어로 읽히기 전에, 그 책이 다루는 종류의 작업이 다른 재료 위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 사실은 뒤에 나올 932년의 논쟁을 이해하는 열쇠다. 논리학이 들어왔을 때 아랍어권 문법학자들이 보인 반응은 낯선 것을 만난 사람의 반응이 아니라, 자기 영역에 경쟁자가 들어온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리스 문헌이 아랍어권으로 들어왔다고 말하면 지중해를 건너온 장면이 떠오른다. 실제 경로는 그렇지 않았다. 8세기 아랍어권에 그리스 학문을 공급한 곳은 비잔티움이 아니라 제국 안에 이미 살고 있던 시리아어권 기독교 공동체였다.
시리아어는 아람어의 한 갈래로, 메소포타미아 북부와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이 쓰던 언어다. 이 지역의 에데사와 니시비스에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 사이에 학교가 섰고, 교리 교육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그리스 논리학과 철학을 시리아어로 옮겼다. 신학 논쟁에서 상대의 개념 구분을 반박하려면 논리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 레샤이나의 세르기우스다. 그는 5세기 말 알렉산드리아에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암모니오스에게 배웠고, 고향으로 돌아와 갈레노스의 의학서를 시리아어로 옮겼다. 9세기의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는 세르기우스가 옮긴 갈레노스 저작 26종의 제목을 자기 목록에 적어 두었다. 세르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포르피리오스의 『이사고게』도 옮겼다. 『이사고게』는 『범주론』을 읽기 위한 입문서로, 종과 유 같은 기본 개념을 정의하는 짧은 책이다. 세르기우스가 죽은 해는 536년이며, 이는 무함마드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1930년 독일의 의사이자 학자 막스 마이어호프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바그다드로」라는 강연에서 그리스 학문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아랍어권에 도달했다는 그림을 내놓았고, 이 그림이 오래 통용됐다. 직선 도식은 편리하지만 두 가지를 감춘다.
하나는 시리아어권이 단순한 통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무엇을 옮길지 고른 것도, 어떤 개념을 어떤 단어로 바꿀지 정한 것도 그들이었다. 아랍어 번역가들은 상당수 시리아어 번역본을 대본으로 삼았으므로, 아랍어권이 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한 번 걸러진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다른 하나는 아랍인들이 그리스 학문을 자기 영토 안의 주민들에게서 넘겨받았다는 점이다. 번역가 대다수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던 것은 이 구조의 결과다.
8세기 중반부터 10세기까지 약 200년 동안, 문학과 역사를 뺀 거의 모든 그리스어 학술서가 아랍어로 옮겨졌다. 천문학, 의학, 수학, 논리학, 자연학, 점성술, 연금술, 약초학이 모두 포함된다. 이 규모의 번역 사업은 그전에도 그 뒤에도 오래 없었다.
왜 하필 그때 일어났는가. 오랫동안 답은 개인에게서 찾아졌다. 칼리프 알마문이 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났다는 일화가 대표적이다. 예일대학의 디미트리 구타스는 1998년에 낸 『그리스 사상, 아랍 문화』에서 다른 답을 제시했고, 이 설명이 지금은 표준에 가깝다. 번역운동을 밀어 올린 것은 새 왕조의 정치적 필요였다.
750년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았다. 지지 기반의 큰 몫이 이라크와 이란의 주민, 즉 사산조 페르시아의 후예들이었다. 새 왕조는 이들에게 자기 통치가 정당하다는 신호를 보내야 했고, 그 방법으로 사산조의 궁정 관행과 그 이념을 이어받았다. 여기에 사산조가 남긴 이야기 하나가 유용하게 쓰였다. 고대의 학문은 원래 페르시아의 것이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침공해 빼앗아 갔고, 이제 그것을 되찾아 오는 것이 정당한 회수라는 서사다. 그리스어 책을 아랍어로 옮기는 일이 이 서사 안에서는 약탈물의 반환이 된다.
이념만으로는 200년이 유지되지 않는다. 실무 수요가 뒤를 받쳤다.
여기에 물질적 조건이 겹쳤다. 8세기 후반부터 이라크에 제지술이 퍼지면서 책값이 내려갔고, 파피루스나 양피지 시대에는 불가능했던 규모의 필사가 가능해졌다. 후원 시장도 만들어졌다. 발주자는 칼리프에 그치지 않았다. 재상, 장군, 부유한 상인, 의사 가문이 저마다 돈을 댔고, 번역가는 그 사이에서 값을 받고 일하는 전문직이었다.
번역운동을 그리스 문화의 수용이라 부르면 받는 쪽이 가만히 있었다는 인상이 남는다. 실제 순서는 반대에 가깝다. 아랍어권 안에서 먼저 수요가 생겼고, 그 수요에 맞는 물건을 찾다가 그리스어 서고에 손이 닿았다. 무엇을 번역할지 정한 기준은 그 수요였다.
이 판단의 근거는 번역된 목록이 아니라 번역되지 않은 목록에 있다. 호메로스도, 그리스 비극도,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도 아랍어로 옮겨지지 않았다. 문학과 역사에 쓸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랍어권에는 이미 자기 시가 있었고 자기 역사 서술이 있었다. 반면 계산과 진단과 논증에 쓸 것은 남김없이 옮겨졌다. 골라 가진 자는 창고지기가 아니다.
번역운동을 이야기할 때 거의 빠지지 않는 이름이 바이트 알히크마, 곧 지혜의 집이다. 대중서에서는 대개 칼리프가 세운 국립 번역원이자 연구소로 그려진다. 각지에서 온 학자들이 한 건물에 모여 그리스어 책을 나누어 옮기고 토론했다는 그림이다.
사료는 이 그림을 받쳐 주지 않는다. 구타스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바이트 알히크마에 관해 남은 기록은 놀랄 만큼 적고, 그 적은 기록이 가리키는 것은 궁정의 문서고 겸 도서관이다. 사산조 궁정의 관행을 그대로 가져온 기구이며, 초기에 보관한 것도 주로 중세 페르시아어 연대기와 점성술 자료였다. 결정적인 정황은 침묵이다. 그리스어 번역 사정을 가장 자세히 기록한 사람은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인데, 그는 사본을 구하러 여러 지역을 돌아다닌 고생을 길게 적으면서도 바그다드의 그 도서관을 뒤졌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번역 현장의 그 누구도 그곳을 작업장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번역원 이미지가 굳어진 경위도 추적됐다. 19세기 유럽 학자들이 아랍어 사본을 편집하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해가 출발점이었고, 여기에 근대적 연구기관의 상을 9세기에 겹쳐 놓는 상상이 더해졌다.
바이트 알히크마의 규모를 줄이는 일은 아랍 학문의 성취를 깎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국립 번역원이 있었다는 그림에서는 번역운동이 한 통치자의 결단으로 설명되고, 그 결단이 사라지면 운동도 끝난다. 기관을 지우면 200년을 굴린 동력이 드러난다. 흩어진 후원자, 값을 받고 일하는 전문 번역가, 사본을 찾아 지역을 도는 유통망, 그리고 번역물을 사서 읽는 독자층이다.
사회 전체에 퍼진 수요는 칼리프 한 사람의 취향보다 훨씬 무너뜨리기 어렵다. 번역운동이 두 세기를 버틴 이유가 여기 있고, 미흐나처럼 궁정의 신학 노선이 뒤집힌 뒤에도 번역이 계속된 이유도 여기 있다.
번역은 단어를 갈아 끼우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어에는 있고 아랍어에는 없는 개념을 옮기려면 아랍어 안에 자리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이 작업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해낸 사람이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809~873)다.
그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의사였고, 아랍어와 시리아어와 그리스어를 모두 다뤘다. 그가 남긴 『서한』은 갈레노스 저작 129종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각 책이 누구의 요청으로 언제 옮겨졌고 어떤 대본을 썼는지 기록한 문헌이다. 자기 목록에 따르면 그는 갈레노스를 시리아어로 95종, 아랍어로 39종 옮겼다.
주목할 것은 방법이다. 그는 한 종을 옮기기 전에 같은 책의 사본을 여러 벌 모아 서로 대조해 믿을 만한 본문을 확정하고, 그 위에서 번역했다. 앞선 번역본이 있으면 함께 놓고 비교했다. 용어를 정하는 방식도 달랐다. 그 이전 세대는 그리스어 낱말을 소리 나는 대로 옮겨 적는 일이 잦았지만, 후나인은 개념을 풀어 아랍어 안에서 새 술어를 만드는 쪽을 택했다.
이 선택의 결과가 크다. 술어를 아랍어로 만들면 그리스어를 모르는 독자도 개념을 붙들 수 있고, 개념을 붙들 수 있으면 그 개념으로 새 문장을 쓸 수 있다. 술어가 아랍어 어근에서 자라 나오면서 아랍어는 학문을 담아 두는 그릇에서 학문을 만들어 내는 언어로 옮겨 갔다. 9세기 이후 300년 동안 아랍어가 유라시아 서쪽의 학술 공용어 노릇을 한 것은 이 작업의 뒷면이다.
번역은 중립적인 통로가 아니다. 무엇을 누구의 저작으로 묶느냐에 따라 뒤따르는 400년의 논쟁 구도가 달라진다. 아랍 철학사에서 가장 큰 결과를 남긴 사건은 오귀속이었다.
9세기 바그다드에서 알킨디를 중심으로 한 학자 모임은 그리스 철학을 하나의 정합적인 체계로 제시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3세기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 일부를 요약하고 재배열한 아랍어 문헌이 만들어졌고, 이 책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프로클로스의 『신학 강요』를 손본 다른 문헌은 『순수선에 관하여』가 되어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으로 통했다. 뒤엣것은 훗날 라틴어로 옮겨져 『원인론』이라는 이름으로 유럽 대학에서 읽힌다.
여기서 신플라톤주의가 무엇인지 짚어야 한다. 플라톤을 이어받았다고 자처한 후기 고대의 흐름으로, 세계를 하나의 궁극적 원천에서 단계적으로 흘러나온 층위들로 설명한다. 원천은 그 자체로는 아무 규정도 갖지 않으며, 거기서 지성이 나오고 지성에서 영혼이 나오고 영혼에서 물질계가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이와 다르다. 세계를 흘려보내는 원천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유하는 부동의 원동자이며, 세계는 그것을 향해 움직일 뿐 그것에서 흘러나오지 않는다.
두 체계가 한 사람의 이름 아래 묶이면서, 아랍어권이 물려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플라톤주의로 봉합된 아리스토텔레스가 됐다. 알파라비와 이븐 시나가 세운 우주론에서 세계가 신에게서 단계적으로 흘러나오는 구조를 취한 데에는 이 오귀속이 크게 작용했다.
결과는 신학 쪽에서 터졌다. 흘러나오는 구조에서는 원천이 있는 한 흘러나온 것도 있으므로 세계에 시작이 없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반면 꾸란은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알가잘리가 훗날 철학자들을 공격할 때 첫 번째로 겨눈 지점이 바로 세계의 영원성이었다. 이 충돌은 아랍어권이 그리스 철학을 잘못 읽어서가 아니라, 번역 단계에서 두 체계가 한 저자로 묶인 데서 상당 부분 나왔다.
이 시기에 팔사파라는 새 낱말도 생겼다. 그리스어 필로소피아를 아랍어로 옮긴 말로, 계시가 아니라 이성만을 출발점으로 삼는 학문 전체를 가리켰다. 팔사파를 하는 사람은 파일라수프라 불렸고, 이들은 자기 작업을 칼람과 분명히 구별했다. 칼람은 계시가 참임을 이미 전제하고 그것을 방어하는 반면, 팔사파는 전제를 두지 않고 논증만으로 결론에 이른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유입 이전에는 이런 구별을 세울 자리가 없었다. 새 범주가 하나 생긴 것이며, 이것이 유입이 만든 가장 뚜렷한 변화다.
번역이 한창이던 시기에 아바스 궁정은 신학 논쟁에 직접 개입했다. 쟁점은 꾸란이 창조된 것인가였다. 무타질라 신학은 창조됐다고 보았다. 신은 절대적으로 하나이므로 신과 나란히 영원한 다른 것이 있을 수 없고, 꾸란은 신의 말씀이되 신 자신은 아니므로 창조된 것이어야 한다는 논증이다. 전통주의 학자들은 반대로 꾸란이 신의 말씀인 이상 신과 함께 영원하다고 보았다.
칼리프 알마문은 827년에 창조설을 지지한다고 공표했고, 833년에는 관리와 법관과 학자에게 이 교리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심문을 제도로 만들었다. 이것이 미흐나다. 거부하면 파면되거나 투옥됐고 매를 맞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저항자는 법학자 아흐마드 이븐 한발이다. 심문은 알마문이 죽은 뒤에도 이어졌고, 848년에서 851년 사이에 칼리프 알무타왁킬이 방향을 뒤집으며 끝났다.
이 사건은 두 가지를 보여 준다. 하나는 그리스 논리학의 유입이 곧바로 자유로운 사유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성적 논증을 앞세운 쪽이 국가 권력을 쥐자 논증 대신 심문을 썼다. 다른 하나는 강제의 결과다. 미흐나 이후 무타질라의 위신은 회복되지 않았고, 매를 맞고 물러서지 않은 이븐 한발이 전통주의의 상징이 됐다. 논쟁의 결론을 위에서 정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반대편에 정당성을 넘겨주었다.
그러면서도 번역은 멈추지 않았다. 궁정의 신학 노선이 뒤집힌 뒤에도 후나인 세대의 작업은 계속됐고, 알킨디 모임의 문헌도 이 시기 전후에 나왔다. 번역운동의 동력이 특정 교리 진영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수요에 있었다는 앞의 판단이 여기서 한 번 더 확인된다.
유입이 무엇을 건드렸는지가 한자리에서 드러난 사건이 있다. 932년 바그다드에서 재상 이븐 알푸라트의 저택에 학자들이 모인 가운데 벌어진 공개 논쟁이다. 한쪽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논리학자 아부 비슈르 마타 이븐 유누스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아랍어로 옮긴 인물이자 뒤에 알파라비를 가르친 사람이다. 다른 쪽은 시바와이히의 『키타브』에 주석을 단 문법학자이자 법관 아부 사이드 알시라피였다. 이 장면은 반세기 뒤 아부 하이얀 알타우히디가 기록으로 남겼다.
마타의 주장은 이랬다. 참과 거짓을 가리려면 언어에 매이지 않는 도구가 필요하고, 그 도구가 논리학이다. 논리학은 사고의 형식을 다루므로 아랍어를 쓰든 그리스어를 쓰든 똑같이 적용된다.
알시라피는 그 전제를 되받았다. 마타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리스어 원문이 아니라 시리아어 번역본을 거쳐 읽는다는 점을 짚고, 번역을 거친 사람이 어떻게 언어를 넘어선 도구를 손에 넣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아가 그가 보편적 사고 형식이라 부르는 것이 실은 그리스어의 문법을 추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아랍어에는 아랍어의 규칙이 있으므로 아랍어로 말해진 것의 참과 거짓은 아랍어 문법으로 가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는 알시라피가 우세했다. 다만 승패보다 중요한 것은 쟁점의 성격이다. 두 사람이 다툰 것은 논리학의 특정 규칙이 아니라 판정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였다. 이런 물음은 그리스 문헌이 대량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세워질 수 없었다. 언어 공동체 밖에서 통하는 척도를 주장하는 쪽이 없었기 때문이다.
논쟁은 활발했고 절차도 정교했다. 다만 상대를 이기려면 상대도 인정하는 텍스트와 상대도 인정하는 어법에 호소해야 했다. 무슬림과 무슬림 사이에서는 이 조건이 자동으로 충족됐고, 그래서 기준을 따로 물을 이유가 없었다.
공동체 밖에서도 통한다고 주장하는 도구가 생기자 기준 자체가 논쟁거리가 됐다. 알시라피의 반론은 이 도구가 실은 그리스어라는 또 하나의 특수한 언어에서 나왔다는 것이었고, 이 지적은 오늘날의 언어와 논리 논쟁에서도 되풀이된다.
알시라피가 짚은 지점은 실제로 성립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열 가지 범주는 그리스어 문장의 구조와 무관하지 않고, 존재를 뜻하는 계사가 아랍어에서는 그리스어처럼 문장에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아랍어권 철학자들은 존재를 표현할 술어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알시라피의 논법을 끝까지 밀면 서로 다른 언어 공동체 사이에서는 어떤 논쟁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곤란이 뒤이은 세대의 과제가 됐다.
그 과제를 떠안은 사람이 알파라비다. 그는 논리학을 문법의 경쟁자가 아니라 상위 학문으로 배치했다. 문법이 한 언어 안에서 표현을 규율한다면 논리학은 모든 언어에 공통되는 사고의 규칙을 다루며, 따라서 둘은 층위가 다르다는 설명이다. 알파라비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저작 전체를 순서대로 재편하고 각각에 주석을 붙인 작업은 이 배치를 실증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이븐 시나(980~1037)에 이르러 아랍어권의 철학은 주석에서 벗어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설하는 대신 자기 체계를 세웠고, 그 안에서 사물의 본질과 그 사물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을 갈라 놓았다. 무엇인가가 무엇인지를 아무리 완전하게 규정해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거기서 따라 나오지 않으며, 존재는 밖에서 주어져야 한다는 논증이다. 이 구분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 스콜라 철학의 핵심 문제가 됐다.
그다음에 오는 것이 알가잘리(1058~1111)의 『철학자들의 모순』이다. 1095년 무렵 쓰인 이 책은 철학자들의 주장 20개를 골라 그들 자신의 논증 규칙으로 반박한다. 세 가지 주장에 대해서는 신앙에서 벗어났다는 판정까지 내렸다. 세계에 시작이 없다는 주장, 신이 개별 사건을 알지 못하고 보편적인 것만 안다는 주장,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는 주장이다.
여기서 통념이 하나 붙는다. 이 책이 이슬람 세계의 철학을 끝냈고 그때부터 학문이 내리막을 걸었다는 이야기다. 실제 기록은 다르게 읽힌다.
구타스는 이 사정을 근거로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를 오히려 아랍 철학의 전성기로 본다. 최근 연구들도 15세기와 그 이후의 논리학·자연학 저작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고 보고한다. 쇠퇴 서사가 오래 버틴 이유는 자료가 아니라 범주에 있다. 철학을 팔사파라는 특정 장르로만 세면 이븐 루시드(1126~1198)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만, 논증으로 근본 문제를 다루는 작업으로 세면 끝나지 않는다.
서방 이슬람권에서 철학 활동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에서는 이븐 루시드 이후 이 계열의 저술이 눈에 띄게 감소한다. 반대로 이란과 인도에서는 계속됐다. 유럽 학계가 오래 참고한 것은 앞쪽 지역의 사정이었다.
여기에 번역의 비대칭이 겹친다. 12세기 이후 라틴어로 옮겨진 것은 유럽이 필요로 한 부분, 곧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과 의학과 천문학이었다. 아랍어권에서 그 뒤로 300년 넘게 이어진 신학과 논리학 저작은 옮겨지지 않았다. 유럽이 본 아랍 철학이 그리스 철학의 주석과 전달로 보인 것은 유럽이 그 부분만 가져갔기 때문이다. 보관소라는 인상은 아랍어권의 역사가 아니라 라틴어 번역 목록의 형태를 반영한다.
그리스 문헌의 대량 유입을 기준선으로 놓고 앞뒤를 보면, 달라진 것은 사유의 유무가 아니라 논쟁을 판정하는 기준이었다. 이 논지를 받치는 근거는 세 갈래다.
첫째, 유입 이전에도 논증은 있었다. 정복 직후부터 인간의 행위 능력과 신의 속성을 놓고 칼람이라는 문답 형식의 토론이 굴러갔고, 문법학과 법학은 규칙에서 개별 판단을 끌어내고 반례로 규칙을 수정하는 절차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랍어로 읽히기 전에 이미 세웠다. 없던 것은 사유가 아니라 언어 공동체 밖에서 통한다고 주장하는 척도였다.
둘째, 번역의 방향을 정한 것은 받는 쪽의 필요였다. 아바스 왕조가 페르시아계 신민에게 정통성을 설득해야 했던 사정, 점성술과 의학과 측량과 논쟁이라는 실무 수요, 제지 기술이 만든 값싼 책, 여러 후원자가 발주하는 시장이 겹쳐 200년을 굴렸다. 그 증거는 번역된 목록보다 번역되지 않은 목록에 선명하다. 계산과 진단과 논증에 쓸 것은 남김없이 옮겨졌고 문학과 역사는 옮겨지지 않았다. 국립 번역원이라는 기관을 사료에서 덜어 내면 이 구조가 더 잘 보인다.
셋째, 유입 이후의 쟁점은 실제로 기준의 문제였다. 932년의 논쟁에서 다툰 것은 진리를 언어 안에서 가릴 것인가 언어 밖에서 가릴 것인가였다. 팔사파라는 범주가 칼람과 구별되어 생긴 것도, 알가잘리가 철학자들을 공격하면서 논리학은 오히려 교과에 들여놓은 것도 같은 축 위에 있다. 그동안 번역 단계의 오귀속은 이 판을 한 번 더 비틀었다. 플로티노스와 프로클로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으로 들어오면서 세계가 신에게서 흘러나온다는 구조가 아랍어권 철학의 기본형이 됐고, 뒤이은 창조 논쟁의 형태도 그 위에서 정해졌다.
이 주제에서 판단이 갈리는 지점은 시대 구분이 아니라 범주 정의다. 철학을 팔사파라는 장르로 세면 아랍 철학은 12세기 말에 끝나고 유럽으로 넘어간 유산이 된다. 논증으로 근본 문제를 다루는 작업으로 세면 그것은 칼람 안으로 들어가 계속됐고, 앞뒤를 가르는 선은 훨씬 흐려진다. 무엇을 본체로 볼 것이냐에 따라 답이 갈리며, 어느 쪽을 고르든 그 선택을 밝혀 두어야 한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칼람의 문답 형식이 시리아어권 기독교 논쟁에서 왔는지 이슬람 내부에서 자랐는지는 두 진영이 갈린 채로 남아 있고, 초기 자료가 워낙 적어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기 어렵다. 시리아어라는 중간 지대의 규모도 아직 다 그려지지 않았다. 최근 한 시리아어 사본에서 지워진 아래층 글씨가 판독되면서 세르기우스가 옮긴 갈레노스의 약물학 저작 일부가 다시 나온 일이 있는데, 이런 발견이 늘어날수록 아랍어권이 넘겨받은 그리스 학문의 실제 모습은 조금씩 다시 그려진다. 유입 전후를 가르는 선의 위치도 그만큼 움직인다.
이 글에 나오는 인물의 생몰 연도와 사건 연도는 통용되는 표기를 따랐다. 초기 인물 가운데 일부는 사료마다 연도가 갈리며, 그런 경우 무렵이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