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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계보 — 학파는 두 세대 만에 끊겼고, 그를 되살린 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물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잇는 철학자의 명단을 만들면 스승과 제자가 사슬처럼 이어진 그림이 나온다.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다. 사슬은 기원전 3세기에 이미 끊겼고, 그 뒤 2300년이 넘도록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되살아났다. 되살린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따라가면 지금 통용되는 설명이 순서를 뒤집어 놓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리케이온은 창립자가 죽은 뒤 곧 다른 학교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22년에 죽었다. 그가 아테네에 세운 학교 리케이온은 곧바로 에레소스의 테오프라스토스에게 넘어갔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식물학과 인간 성격 유형에 관한 저술을 남겼고, 스승이 세운 자연학의 뼈대를 상당 부분 물려받았다. 여기까지는 계승이라고 부를 만하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테오프라스토스가 기원전 287년경 죽자 학교는 람프사코스의 스트라톤에게 넘어갔다. 스트라톤은 '자연학자'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물리적 탐구에 몰두했고, 스승의 목적론적 자연관에서 신적 요소를 걷어내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 뒤 리콘, 크리톨라오스, 티로스의 디오도로스로 이어지는 동안 리케이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문헌을 붙들고 씨름하는 학교이기를 그쳤다.

스탠퍼드 철학사전의 아리스토텔레스 사본 전승 항목을 쓴 쥐스탱 뱅젠리트는 기원전 270년 무렵부터 기원전 90년 무렵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깊이 파고든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시피 하다고 정리한다. 그러니까 헬레니즘기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180년 동안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이름을 단 학교 안에서도 읽히지 않았다.

이 단절의 뿌리는 학파의 성격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것은 완결된 교설이 아니라 문제 목록이었고, 문제 목록은 다음 세대가 다른 문제에 끌리는 순간 쓸모를 잃는다. 그 자신이 이미 그렇게 하라고 적어 두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반박하기에 앞서 그는 이렇게 썼다.

ἀμφοῖν γὰρ ὄντοιν φίλοιν ὅσιον προτιμᾶν τὴν ἀλήθειαν.

암포인 가르 온토인 필로인 호시온 프로티만 텐 알레테이안

둘 다 벗이지만, 진리를 앞에 두는 편이 마땅하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6장, 벡커 1096a16 (바이워터 교정본, 옥스퍼드 고전 텍스트)

스승보다 진리를 택하라는 원칙을 세운 사람의 계보가 충직한 제자들의 사슬로 이어질 리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은 저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렸다고 말한 지점을 갖고 있다.

지하실에서 책이 발견되어 그가 되살아났다는 이야기

끊긴 사슬이 어떻게 이어졌는가에 관해 고대가 남긴 설명이 하나 있다. 기원전 1세기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이 『지리지』 13권 1장 54절에 적고, 1~2세기의 플루타르코스가 『술라전』 26장에서 되풀이한 이야기다.

줄거리는 이렇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물려받은 장서를 스켑시스 출신의 넬레우스에게 남긴다. 이 유증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 5권 52절에 옮겨 적은 테오프라스토스의 유언장에서도 확인된다. 넬레우스는 책을 고향 스켑시스로 가져갔고, 철학에 관심이 없던 그의 상속인들은 이웃 페르가몬 왕조의 장서 수집을 피해 두루마리를 지하 창고에 숨겼다. 책은 습기와 벌레에 상했다. 기원전 1세기 초 테오스의 아펠리콘이 이를 사들여 손상된 부분을 제멋대로 메운 조악한 사본을 만들었고, 기원전 86년 아테네를 함락한 로마 장군 술라가 장서를 통째로 로마로 실어 갔다. 술라가 죽은 뒤 문법학자 튀란니온이 접근권을 얻어 정리했고, 여기서 사본을 얻은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우리가 오늘날 읽는 형태의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을 편찬했다.

안드로니코스는 고대 문헌이 이름을 남긴 유일한 아리스토텔레스 편집자다.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에 관한 가장 믿을 만한 증언은 포르피리오스에게서 나온다. 서기 301년 플로티노스의 저작을 편집하면서 안드로니코스를 본보기로 삼았다고 밝힌 포르피리오스는, 안드로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의 저술을 주제별로 배열해 비슷한 논의를 한자리에 모았다고 전한다(『플로티노스의 생애』 24장).

이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잃어버린 보물, 지하 창고, 약탈, 그리고 한 편집자의 손에서 되살아나는 철학. 근대 학계는 여기에 살을 붙여 하나의 정설을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헬레니즘기 내내 실종되어 있었고, 안드로니코스의 판본이 그를 되살렸다는 구도다.

순서가 반대라는 증거들

그런데 이 정설은 여러 방향에서 무너진다.

첫째, 고대 안에서 이미 반대 증언이 있다. 2세기 후반의 아테나이오스는 『현자들의 만찬』 1권 3a~b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바로 그 넬레우스에게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게 팔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들어갔다고 적었다. 스켑시스의 지하실 이야기와 정면으로 어긋난다.

둘째, 사본이 세상에 단 한 벌뿐이었다는 전제가 성립하기 어렵다. 조너선 반스는 1997년 논문 「로마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테오프라스토스가 죽던 시점에 그리스 세계 전체에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사본이 하나밖에 없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첫 세대 제자인 로도스의 에우데모스는 자기 사본을 만들어 고향 섬으로 가져갔다.

셋째, 리케이온의 침체는 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연구 방향이 바뀌어서 생긴 일이다. 스트라톤 이후 학교는 자연과학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형이상학과 논리학이 읽히지 않은 이유는 그 책들이 답하는 물음이 학교 안에서 사라진 데 있다.

넷째,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목록에는 '아펠리콘의 장서에서 발견된 책들'이라는 항목이 따로 있는데, 그 아래에는 잡다한 메모와 서한집만 들어 있다. 마르완 라셰드가 2021년에 교정 출간한 이 목록에 따르면 나머지 저작은 아펠리콘이 발견한 것도 안드로니코스가 처음 공개한 것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마이클 프레데는 1999년에 정반대 설명을 제시했다. 안드로니코스의 편집이 아리스토텔레스 부흥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관심이 그 편집 작업을 불러냈다.

순서가 뒤집히는 자리

텍스트가 발견되어 철학이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 철학적 관심이 먼저 생겨 텍스트를 찾아냈다. 이 뒤집기는 스켑시스 지하실 이야기 하나에만 적용되는 예외가 아니다. 아래에서 보듯 아리스토텔레스 부흥의 모든 국면에서 같은 순서가 반복된다.

주석이라는 장르가 생기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교과서가 되었다

서기 1세기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 방식이 하나 생긴다. 본문을 한 줄씩 따라가며 풀이하는 주석(commentarius)이다. 이 장르는 기원전 1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장르가 생겼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개인의 탐구 대상에서 가르쳐야 할 교재로 지위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이 전통의 정점에 서기 200년 무렵의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가 있다. 그의 생애에 관해 알려진 것은 없다시피 하고, 유일한 직접 증거는 『운명론』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 두 황제에게 바치면서 철학 교수직 임명에 감사를 표한 헌사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176년 아테네에 네 학파를 대표하는 교수직 넷을 설치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그중 하나를 맡았다는 서술이 자주 보이지만, 그렇게 단정할 만한 증거는 없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하나의 정합적인 체계로 제시하려 했다. 특히 인간 지성의 지위를 다루면서 개별 영혼이 육체와 함께 소멸한다는 방향의 해석을 내놓았다. 이 해석은 1300년 뒤 이탈리아에서 다시 폭발한다.

알렉산드로스 이후의 주석가들은 성격이 다르다. 포르피리오스, 테미스티오스, 암모니오스, 심플리키오스는 신플라톤주의자였고, 이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으로 올라가기 전에 거치는 예비 단계였다. 포르피리오스가 『범주론』 입문서로 쓴 『이사고게』는 이후 1000년 넘게 논리학 교육의 표준 교재가 된다. 4세기 이후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의 신플라톤주의 학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은 플라톤 입문 과정으로 읽혔다.

여기서 만들어진 것은 '플라톤과 일치하는 아리스토텔레스'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지금은 사라진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편들이 플라톤에 가까운 견해를 담고 있었으리라는 점을 그 근거로 삼았다. 같은 문헌이 어떤 물음 아래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철학자를 만들어 낸 첫 사례다. 6세기의 요한네스 필로포노스는 이 학교 전통 안에 있으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임페투스 개념을 내놓았다.

보에티우스는 계획만 남기고 죽었고, 바그다드는 같은 계획을 완수했다

6세기 초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자 동고트 왕국의 고위 관료였던 보에티우스는 거대한 기획을 세웠다. 『명제론』 두 번째 주석에서 그는 이렇게 적는다.

Ego omne Aristotelis opus, quodcumque in manus venerit, in Romanum stilum vertens eorum omnium commenta Latina oratione perscribam … omnesque Platonis dialogos vertendo vel etiam commentando in Latinam redigam formam. His peractis non equidem contempserim Aristotelis Platonisque sententiam in unam quodammodo revocare concordiam.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라면 손에 들어오는 것마다 모두 로마의 문체로 옮기고, 그 전부에 라틴어로 주석을 붙여 쓰겠다. (…) 플라톤의 대화편도 남김없이 번역하거나 주석을 달아 라틴어의 꼴로 만들겠다. 이 일을 마치고 나면,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견해를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의 일치로 되돌리는 작업도 마다하지 않겠다.

보에티우스, 『아리스토텔레스 명제론 주석』 제2판 2권 3장 (마이저 교정본 2권 79쪽 9행 이하~80쪽)

번역만도 아니고 주석까지, 아리스토텔레스만도 아니고 플라톤 전부를, 게다가 둘을 화해시키기까지. 보에티우스는 이 계획의 앞부분만 이루고 45세 무렵 반역 혐의로 처형당했다. 남은 것은 『범주론』과 『명제론』, 그리고 포르피리오스의 『이사고게』 번역과 주석이었다. 라틴 서방은 이후 700년 동안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면 논리학 입문서 몇 권을 뜻하는 세계에서 살았다.

같은 계획을 실제로 완수한 곳은 바그다드였다. 8세기 중반부터 10세기까지 압바스조의 수도에서 문학과 역사를 뺀 세속 그리스 저작 대부분이 아랍어로 옮겨졌다. 알 킨디 주변,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와 그 아들의 작업장, 10세기 바그다드의 번역 집단이 차례로 이 일을 맡았다.

왜 로마에서 실패한 일이 바그다드에서 성공했는가. 디미트리 구타스는 1998년의 『그리스 사상, 아랍 문화』에서 이 대비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보에티우스나 6세기 시리아의 세르기우스가 세운 비슷한 기획이 좌초한 것은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그 작업을 요구하는 사회적·정치적·학문적 맥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압바스조에서는 통치 이데올로기, 행정 수요, 의학과 천문학의 실용적 필요, 신학 논쟁의 도구 확보라는 요구가 겹쳐 있었다. 요구가 번역을 만들었지 번역이 요구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 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살아났다. 알 파라비는 아리스토텔레스 다음가는 '제2의 스승'으로 불렸다. 이븐 시나는 자서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40번 읽어 통째로 외울 지경이 되고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이해를 포기했다고 적는다. 그러다 부하라의 책방 거리에서 헐값에 떠맡다시피 산 알 파라비의 소책자 『형이상학의 목적에 관하여』를 읽고서야 그 책이 무엇을 하려는 책인지 알게 되었다. 40번 읽어도 열리지 않던 책이, 그 책이 답하려는 물음을 알려 준 얇은 안내서 앞에서 열렸다.

이븐 시나는 이 위에 본질과 존재를 구별하는 형이상학을 세웠고, 그 구별은 이후 라틴 서방 형이상학의 축이 된다. 12세기 코르도바의 이븐 루시드는 반대 방향으로 갔다. 그는 이븐 시나가 덧입힌 신플라톤주의를 걷어내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체로 돌아가려 했으며, 대·중·소 세 층위의 주석을 남겨 라틴 세계에서 그냥 '주석가'로 통했다.

번역본은 30년 동안 놀고 있었다

라틴 서방이 아리스토텔레스 전체를 되찾는 과정은 보통 12~13세기의 번역 사업으로 설명된다. 톨레도의 크레모나의 게라르두스가 아랍어에서, 베네치아의 야코부스와 시칠리아의 헨리쿠스 아리스티푸스가 그리스어에서 옮겼고, 13세기에 도미니코회 수사 뫼르베케의 기욤이 나머지를 새로 옮기거나 손봤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그런데 번역이 이루어진 시점과 그 번역이 읽히기 시작한 시점 사이에 큰 틈이 있다.

베네치아의 야코부스는 1125년에서 1150년 사이에 『분석론 후서』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겼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문적 논증의 구조를 다룬 책이자 『오르가논』의 마지막 조각이다. 몽생미셸 수도원장 로베르투스 데 토리니는 1157년에서 1169년 사이에 쓴 『연대기』에서 야코부스라는 베네치아 성직자가 『토피카』와 두 『분석론』과 『소피스트적 논박』을 라틴어로 옮기고 주석했다고 적으면서, 이미 그 저작들의 옛 번역이 있었는데도 그렇게 했다고 덧붙였다.

이 번역본은 곧바로 유럽 지성계를 뒤흔들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방치되었다. 1159년 솔즈베리의 요한이 쓴 『메탈로기콘』 4권 6장에 그 사정이 남아 있다.

Deinde hec utentium raritate iam fere in desuetudinem abiit, eo quod demonstrationis usus uix apud solos mathematicos est; et in his fere, apud geometras dumtaxat … Ad hec, liber quo demonstratiua traditur disciplina, ceteris longe turbatior est … adeo scriptorum deprauatus est uitio, ut fere quot capita, tot obstacula habeat. … Vnde a plerisque in interpretem difficultatis culpa refunditur, asserentibus librum ad nos non recte translatum.

게다가 이 기술은 쓰는 사람이 드물어 이제 거의 폐어가 되다시피 했다. 논증을 실제로 쓰는 이는 수학자들뿐이고, 그중에서도 사실상 기하학자들뿐이기 때문이다. (…) 논증술을 다룬 그 책은 다른 어떤 책보다 어지럽다. (…) 필사자들의 잘못으로 심하게 망가져서 장(章)의 수만큼 걸림돌이 있을 지경이다. (…) 그래서 대부분은 어려움의 책임을 번역자에게 돌리며, 이 책이 우리말로 제대로 옮겨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솔즈베리의 요한, 『메탈로기콘』 4권 6장 (웹 교정본, 옥스퍼드 1929, 171쪽)

눈여겨볼 대목은 번역 품질에 대한 불평보다 그 앞 문장이다. 논증이라는 기술 자체가 쓸 데가 없어 폐어가 되다시피 했다는 진단이 거기 있다. 수학자와 기하학자를 빼면 아무도 엄밀한 논증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책은 서가에 있었고 라틴어로 읽을 수 있었지만, 그 책이 답하는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 물음은 곧 생겨난다. 12세기 말부터 파리와 볼로냐와 옥스퍼드에 대학이 자리를 잡으면서, 학문을 학문이게 만드는 조건이 무엇인지, 어떤 논변이 증명이고 어떤 논변이 의견인지가 제도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바뀌었다. 신학을 하나의 학문(scientia)으로 성립시킬 수 있느냐는 물음도 여기에 걸려 있었다. 그러자 『분석론 후서』가 갑자기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었다. 로버트 그로스테스트가 이 책에 붙인 주석은 이후 서방 과학방법론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 야코부스의 번역은 300종 가까운 사본으로 전해지는 표준본이 되었고, 그로스테스트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로저 베이컨이 그것을 읽었다.

같은 뒤집기가 훨씬 극적인 형태로 한 번 더 일어난다. 1210년 파리의 주교 관구 회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저작과 그 주석서를 공개적으로든 사적으로든 파리에서 읽는 것을 파문의 벌로 금지했다. 1215년 교황 특사 로베르 드 쿠르송의 대학 규정이 형이상학과 자연학까지 금지 범위를 넓혔고, 1231년 그레고리우스 9세가 이를 재확인했다. 그런데 1255년 파리 대학 인문학부의 새 규정은 당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전부를 공개 강의 필독 목록에 올렸다.

45년 사이에 무엇이 바뀌었나

1210년의 금서와 1255년의 필독서는 같은 책이다. 번역이 개선된 것도 새 사본이 발견된 것도 아니다. 바뀐 것은 대학이라는 제도가 자리를 잡았고, 그 제도가 학문의 자격 요건을 정의할 언어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사정이다. 텍스트는 상수였고 물음이 변수였다.

물음이 텍스트를 불러내면 갈등도 함께 온다. 대 알베르투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전반을 주해했고, 그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장 영향력 있는 종합을 내놓았다. 반대편에서 브라방의 시제루스와 다치아의 보에티우스는 이븐 루시드의 급진적 독해를 밀어붙였다. 1270년 파리 주교 에티엔 탕피에가 아베로에스주의 명제 13개를 단죄했고, 1277년 3월 7일에는 219개 명제를 금지했다. 다만 이 219개 가운데 시제루스나 보에티우스의 저작에서 출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79개뿐이고, 68개는 출처를 전혀 특정하지 못한다.

교회가 물음을 만들자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가 돌아왔다

1513년 12월 19일,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 제8회기에서 교황 레오 10세가 대칙서 「사도적 통치」(Apostolici regiminis)를 반포했다. 이 문서는 영혼이 본성상 죽는다는 주장과 모든 인간에게 지성이 하나뿐이라는 주장을 단죄하고, 대학의 철학 교수들에게 그런 견해를 강의할 때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가르치고 반대 논변을 논박하도록 명령했다.

3년 뒤인 1516년, 볼로냐 대학의 피에트로 폼포나치가 『영혼 불멸론』을 냈다. 아리스토텔레스 본문에 근거해 지성의 활동이 육체에 전혀 의존하지 않음을 보일 수 없으며 따라서 영혼 불멸은 철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이 그 결론이었다. 폼포나치가 근거로 삼은 것은 1300년 전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가 내놓았던 해석이다. 책은 베네치아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졌고, 폼포나치는 추기경 피에트로 벰보의 비호 덕에 이단 재판을 면했다.

순서를 다시 짚어 두자. 알렉산드로스의 저작은 새로 발견된 것이 아니다. 1495년에 라틴어 번역이 인쇄되어 있었고, 그 이전에도 학계에 알려져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를 무기로 만든 것은 교회가 철학자들에게 증명 의무를 부과한 그 명령이었다. 증명하라는 요구가 없었다면 증명할 수 없다는 논증도 나오지 않았다.

파도바에서는 야코포 자바렐라가 이 노선을 이어받아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영혼은 죽는다는 견해를 반종교개혁기에 정면으로 논증했고, 동시에 분해와 합성을 오가는 방법론을 정식화해 이후 과학방법론 논의에 자취를 남겼다.

16세기 말에는 성격이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1597년 살라망카에서 예수회의 프란시스코 수아레스가 『형이상학 논쟁』을 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이 다루는 문제를 모두 포괄하되 그 책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54개 논쟁으로 재편한 저작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의 형식을 버린 최초의 체계적 스콜라 형이상학이라는 소개가 널리 퍼져 있으나, 1587년 도미니코회의 디에고 마스가 낸 『존재자와 그 속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논쟁』이 앞선다.

수아레스의 책은 곧 유럽 전역에서 다시 찍혀 형이상학 문제의 표준 참고서가 되었다.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와 볼프가 스콜라 형이상학을 접한 통로가 바로 이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음이 그의 본문에서 떨어져 나와 자족적인 체계로 정리되자, 다음 세대는 체계만 물려받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버릴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의 반아리스토텔레스 혁명은 그가 너무 잘 정리되었기에 가능했다.

19세기에 그를 부른 것은 새 판본이 아니라 헤겔이었다

1831년 베를린 학술원이 이마누엘 베커가 편집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집』을 냈다. 르네상스 이후 쌓인 교정 시도를 걷어내고 중세 사본에서 다시 출발한 최초의 완역 교정본이며, 오늘날 학계가 쓰는 인용 표기(예: 1096a16)가 여기서 나왔다.

판본이 나왔으니 연구가 부흥했다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같은 시기 독일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읽게 만든 동력은 다른 데 있었다. 헤겔이었다.

프리드리히 아돌프 트렌델렌부르크는 1833년 『영혼론』 교정본을 내고 1836년에는 김나지움 교육용으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요강』을 펴냈다. 그리고 1840년 『논리 연구』에서 헤겔의 변증법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존재와 무에서 모든 개념을 도출한다는 헤겔의 절차가 전제 없는 학문이 아니라 운동이라는 전제를 몰래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 논지의 핵심이었다. 이 책은 당시 독일 지성계에서 헤겔주의의 영향력을 무너뜨린 단일 저작 가운데 가장 큰 몫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청년 마르크스가 이에 대한 헤겔주의적 반박을 준비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트렌델렌부르크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고전 연구의 대상이기 이전에 사변 철학을 겨눈 무기였다. 논리학이 개별 과학의 실제 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사례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꺼내 들었다. 판본이 물음을 만든 것이 아니라 물음이 판본을 쓸모 있게 만들었다.

그의 제자 가운데 프란츠 브렌타노와 빌헬름 딜타이가 있다. 브렌타노는 1862년 학위 논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존재자의 여러 의미에 관하여』를 냈고, 표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한 구절을 새겼다.

τὸ δὲ ὂν λέγεται μὲν πολλαχῶς, ἀλλὰ πρὸς ἓν καὶ μίαν τινὰ φύσιν καὶ οὐχ ὁμωνύμως.

토 데 온 레게타이 멘 폴라코스, 알라 프로스 헨 카이 미안 티나 퓌신 카이 우크 호모뉘모스

있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해지지만, 하나를 향해 그리고 어떤 하나의 본성을 향해 말해지는 것이지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4권 2장, 벡커 1003a33 (로스 교정본, 옥스퍼드 1924)

번역할 때 갈리는 낱말은 πολλαχῶς다. '여러 뜻으로'라고 옮기면 다의어 문제처럼 들리고, '여러 가지로'라고 옮기면 서술 방식의 다양성으로 읽힌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곧이어 그것이 이름만 같은 동음이의(ὁμωνύμως)가 아니라고 못박는 것으로 보아, 뒤엣것이 그의 뜻에 가깝다. 브렌타노의 물음은 그 여럿을 하나로 묶는 것이 무엇이냐였다.

1907년 여름, 콘스탄츠의 김나지움 학생이던 마르틴 하이데거가 훗날 프라이부르크 대주교가 되는 콘라트 그뢰버에게서 이 책을 선물로 받았다. 하이데거는 1963년 「현상학에 이르는 나의 길」에서 이 책이 철학에 들어서려던 자신의 서툰 시도를 떠받친 지팡이였다고 회고했고, 1972년에는 존재의 여럿 속에 있는 단순한 것에 관한 물음이 20년 뒤 『존재와 시간』을 쓰게 만든 끊임없는 계기였다고 적었다. 다만 노년의 회고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1937~38년에 쓴 「지금까지의 나의 길」에는 브렌타노의 책이 등장하지 않는다.

같은 시기 프로이센 학술원은 1882년부터 고대 그리스어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전체를 교정 출간하는 사업(Commentaria in Aristotelem Graeca)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와 심플리키오스와 필로포노스가 1000년 넘게 잠들어 있다가 이때 깨어난다. 이 사업도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문제 삼기 시작한 흐름 위에서 이루어졌다.

20세기에 그를 부른 것은 입법자를 잃은 '의무'였다

1958년 1월, 케임브리지의 엘리자베스 앤스컴이 학술지 『필로소피』 33권 124호에 「현대 도덕철학」을 실었다. 19쪽짜리 논문이다.

논지는 이렇다. 근대 도덕철학이 중심에 놓은 '도덕적 의무'와 '해야 한다'는 개념은 법 개념 위에서만 뜻이 서는 말이다. 어떤 행위가 요구된다는 것은 요구하는 입법자가 있다는 뜻이며, 서구 전통에서 그 입법자는 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런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근대는 신적 입법자를 버리면서 그 위에 서 있던 어휘는 그대로 남겨 두었다. 남은 것은 근거 없이 무거운 말들이다. 앤스컴은 도덕 심리학을 제대로 갖출 때까지 이 어휘를 접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듯 성품과 덕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결과주의'(consequentialism)라는 용어도 이 논문에서 나왔다.

이 논문이 영어권 덕윤리 부흥의 기점이 된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덕의 상실』(1981), 필리파 풋의 『자연적 선함』(2001), 로절린드 허스트하우스의 작업,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 접근법이 그 위에서 나왔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앤스컴의 역사적 주장이 스콜라 철학의 '해야 한다' 이해를 잘못 읽은 데 기대고 있다는 비판은 지금도 이어진다.

여기서도 순서를 확인해 두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본문은 1958년에 새로 발견된 것이 아니다. 옥스퍼드 번역본이 이미 나와 있었고 학부 강의에서 읽히고 있었다. 그를 되살린 것은 세속화된 도덕 어휘의 공허함이라는 20세기 특유의 문제였다.

형이상학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50년대부터 1994년까지 분석철학의 표준은 본질을 양상 개념으로 환원하는 것이었다. 어떤 것이 본질적으로 F라는 말은 그것이 존재하는 한 필연적으로 F라는 뜻으로 풀렸다. 1994년 키트 파인이 「본질과 양상」에서 이 환원이 실패한다고 논증했다. 소크라테스와 그를 원소로 하는 단일 집합은 서로가 존재하는 한 필연적으로 서로에 대한 관계를 갖지만, 소크라테스가 무엇인지를 말할 때 그 집합은 아무 몫도 하지 않는다. 필연성은 본질에서 나온다. 조너선 로우, 데이비드 오더버그, 캐서린 코슬리키가 이 방향을 이어받아 현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형이상학이라는 흐름을 만들었다. 파인이 한 일도 잊힌 본문의 발굴은 아니었다. 양상 논리라는 20세기의 도구가 벽에 부딪히자 오래된 개념이 다시 필요해졌다.

결론 — 아리스토텔레스를 잇는 것은 물려받은 책이 아니라 새로 생긴 물음이다

계보를 묻는 물음에 명단으로 답하면 사실관계는 맞지만 구조는 놓친다. 테오프라스토스와 알렉산드로스, 알 파라비와 이븐 루시드, 알베르투스와 토마스, 폼포나치와 자바렐라와 수아레스, 트렌델렌부르크와 브렌타노, 앤스컴과 매킨타이어와 파인. 이들은 하나의 사슬이 아니다. 사슬은 기원전 3세기에 이미 끊겼고, 그 뒤의 인물들은 각자 자기 시대의 막다른 골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불러낸 사람들이다.

그 부름의 계기를 하나씩 보면 방향이 일정하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철학적 관심이 안드로니코스의 편집을 불렀고, 압바스조의 통치와 학문 수요가 바그다드의 번역을 불렀으며, 대학이라는 제도의 성립이 30년 방치되어 있던 『분석론 후서』를 필독서로 만들었다. 라테라노 공의회의 증명 명령이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를 1300년 만에 되살렸고, 헤겔 변증법에 대한 반발이 트렌델렌부르크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들었으며, 입법자를 잃은 도덕 어휘의 공허함이 앤스컴을 아리스토텔레스로 돌려보냈다. 어느 국면에서도 텍스트의 재발견이 먼저 오지 않았다. 물음이 먼저 왔고, 텍스트는 그 물음을 감당할 만한 물건으로 이미 거기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남는 물음은 왜 하필 아리스토텔레스였는가다. 각기 다른 시대가 각기 다른 곤경에서 같은 저자에게 돌아갔다면, 그 저자의 무엇이 그런 되풀이를 가능하게 했는가. 한 가지 대답은 그가 남긴 것이 닫힌 교설 대신 미결의 문제 목록이었다는 데 있다. 있는 것을 여러 가지로 말한다는 명제, 학문을 학문이게 하는 조건이 무엇이냐는 물음, 좋은 삶이 성품의 문제라는 착상은 어느 것도 닫힌 답이 아니다. 닫히지 않았기에 다시 열 수 있었다.

이 설명에는 한계가 있다. 물음이 먼저라고 해도 텍스트가 물리적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면 어떤 물음도 그것을 불러낼 수 없다. 필사와 교정과 번역이라는 지루한 노동이 없었다면 계보는 실제로 끊겼을 것이다. 다만 그 노동 자체도 누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을 이유를 가졌기에 이루어졌다. 보존과 부름 가운데 무엇을 본체로 보느냐에 따라 이 역사의 주인공은 편집자가 되기도 하고 논쟁가가 되기도 한다. 어느 쪽을 택하든, 계보를 사제 관계의 사슬로 그리는 그림만은 실제와 어긋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