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계통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전기를 끊은 것은 전기의 부족이 아니었다. 계통이 잃은 것은 전압을 붙들 자원이었고, 그 자원의 목록을 정한 것은 물리가 아니라 규정이었다.
2026년 8월 25일
부유한 나라들의 전력 수요는 2000년대 들어 오랫동안 거의 늘지 않았다. 공장이 줄고 사무실이 늘었으며, 냉장고와 전구는 해마다 조금씩 덜 먹는 물건이 되었다. 그 정체가 끝나가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International Energy Agency)가 2026년에 낸 『Key Questions on Energy and AI』는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가 2025년 485 TWh(테라와트시, 1 TWh는 10억 kWh)에서 2030년 950 TWh로 약 2배가 된다고 전망했다. 세계 전력 수요의 3% 남짓이다. 같은 보고서는 2025년 한 해에 데이터센터 소비가 17% 늘었고 인공지능 전용 데이터센터는 50% 늘었다고 적었다. 상위 기술기업 다섯 곳의 설비투자는 2025년에 4,000억 달러를 넘겼고 2026년에 다시 75% 늘 것으로 봤다.
이 이야기는 대개 짓는 문제로 흘러간다. 발전소를 더 세우고, 송전선을 더 걸고, 변압기 공급망을 다시 돌린다. 지어야 할 것은 실제로 많다. 다만 이 이야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건이 2025년 봄에 있었다.
2025년 4월 28일 12시 33분 30초, 이베리아 반도 전체가 정전됐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계통이 유럽 대륙 계통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스페인 본토의 수요는 25,184 MW로, 봄철 월요일 정오에 흔한 값이었다. 역대 최대 수요인 44,876 MW(2007년 12월 17일)의 절반을 조금 넘겼을 뿐이다. 전기가 모자라서 꺼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무엇이 모자랐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전력망이 무엇을 하는 기계인지부터 봐야 한다.
전기는 쌓아 둘 수 없다. 배터리는 예외처럼 보이지만 계통 전체 규모에서 보면 아직 곁가지다. 그래서 계통은 생산과 소비를 순간마다 맞춰야 한다. 그것도 사람이 개입할 수 있는 간격보다 훨씬 짧은 주기로.
이 균형을 재는 첫 번째 눈금이 주파수다. 유럽 계통은 50 Hz(헤르츠), 한국은 60 Hz를 기준으로 돈다. 발전이 소비보다 모자라면 계통에 붙은 모든 발전기의 회전이 아주 조금씩 느려지면서 주파수가 내려가고, 남으면 올라간다. 주파수는 계통의 유효전력 수지를 보여 주는 지표다. 유효전력이란 실제로 일을 하는 전력, 모터를 돌리고 히터를 데우는 그 전력이다.
주파수가 급히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 주는 것이 관성이다. 석탄·가스·원자력·수력 발전소에는 수십에서 수백 톤짜리 회전자가 계통과 같은 박자로 돌고 있다. 발전기 하나가 갑자기 떨어져 나가도 이 쇳덩이들은 곧바로 멈추지 않고, 회전 운동에너지를 조금 내주면서 주파수 하락을 늦춘다. 태양광은 회전하는 부분이 없으므로 이 성질을 그 자체로는 갖지 않는다. 정전 직후 세계 여러 곳에서 나온 첫 번째 설명이 여기서 나왔다.
그런데 계통에는 축이 하나 더 있다. 전압이다.
교류 계통에서는 전압과 전류의 파형이 어긋날 수 있다. 어긋난 만큼의 전력은 발전기와 부하 사이를 왔다 갔다 하기만 하고 실제 일로 바뀌지 않는다. 이것을 무효전력이라 부르고 단위는 var(바)를 쓴다. 이름이 무색하게 이 전력은 계통 운영의 핵심이다. 계통 어딘가에서 무효전력을 만들어 내면 그 지점의 전압이 올라가고, 흡수하면 내려간다.
수도관에 빗대는 설명이 흔하다. 유효전력이 관을 지나가는 물의 양이라면 전압은 수압이라는 식이다. 이 비유는 방향을 잡는 데는 쓸모가 있지만 곧 어긋난다. 수압은 펌프에서 만들어져 관을 따라 내려가지만, 전압은 계통의 여러 지점에서 동시에 오르내리고 그 지점마다 값이 다르다. 무효전력은 멀리 보내기 어렵기 때문에 전압 조절은 언제나 국지적인 일이다. 남쪽에서 전압이 높다고 북쪽 발전기가 대신 눌러 줄 수 없다.
전압에도 허용 범위가 있다. 스페인 계통운영 절차 1.1과 1.3은 안정 상태에서 400 kV(킬로볼트) 송전망의 전압을 380~435 kV, 220 kV 송전망을 205~245 kV 사이에 두도록 정한다. 여기에 더해 계통운영자인 레드엘렉트리카(REE, Red Eléctrica de España)와 배전사업자들은 2021년에 별도 합의를 맺어, 규정상 한계에 붙어 운전하지 않도록 400 kV망의 정상 범위를 380~420 kV로, 220 kV망을 204.6~234.96 kV로 좁혀 뒀다.
전압을 조절하는 도구는 몇 가지다. 계통 자체에 달린 리액터는 붙이면 무효전력을 흡수해 전압을 떨어뜨리지만 켜고 끄는 것 말고는 조절이 안 된다. 미세한 조정은 발전기가 한다. 동기발전기는 계자 전류를 바꿔 무효전력을 연속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고, 전압이 오르면 흡수량을 늘려 계통을 눌러 준다. 스페인 계통에는 동기조상기와 FACTS(유연송전시스템), STATCOM 같은 전력전자 설비도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정부 보고서가 적었듯 2025년 4월 시점에 계통운영자가 손에 쥔 주된 수단은 여전히 리액터와 화력발전기였다.
그러면 4월 28일 정오에 그 손은 무엇을 쥐고 있었는가.
사고 당일 아침부터 이베리아 계통의 전압은 평소보다 크게 출렁였다. 여러 사업자가 이례적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오전 6시 무렵 프랑스와의 연계 계획이 약 1,000 MW 바뀌면서 400 kV 주요 지점의 전압이 흔들렸고, 10시 30분을 지나면서 진폭이 커졌다.
정오가 되자 진동이 나타났다. 첫 번째는 12시 3분, 0.6 Hz 대역에서 주파수 진폭 70 mHz(밀리헤르츠). 유럽 계통에서 통상 관측되는 것보다 빠른 진동이었고 프랑스 타벨 변전소와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도 관측됐다. 이베리아 남서부에서는 전압이 순식간에 오르내렸는데, 엑스트레마두라의 알마라스와 아로요데산세르반 400 kV 변전소에서 최고점과 최저점의 차이가 각각 31.2 kV, 32.7 kV까지 벌어졌다.
두 번째는 12시 19분, 0.2 Hz 대역에 진폭 200 mHz. 이쪽은 유럽 계통이 원래 가진 진동 형태로, 이베리아 반도가 대륙 중앙부와 반대 위상으로 흔들리는 이른바 동부·중앙·서부 진동 모드다.
계통운영자는 진동을 잠재우기 위해 정해진 절차를 밟았다. 프랑스로 나가는 전력을 줄이고, 프랑스와의 직류 연계를 교류 모방 모드에서 정전력 모드로 바꾸고, 열려 있던 400 kV 회선을 차례로 투입해 망을 촘촘하게 만들었다. 11시 10분부터 12시 25분 사이에 회선 10개가 들어갔다. 진동은 잡혔다. 그런데 이 조치들은 모두 전압을 올리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회선이 늘고 흐르는 전력이 줄면 선로 자체의 정전용량 효과가 커져 무효전력이 더 생기기 때문이다.
12시 30분의 계통은 이런 모습이었다. 수요 25,184 MW. 그 순간의 발전 구성은 재생에너지 82%, 원자력 10%, 가스 3%, 석탄 1%, 열병합과 폐기물 4%. 400 kV망 전압은 410~420 kV로 정상 범위의 위쪽. 감쇠 여력은 낮고, 연계 흐름은 조여져 있고, 전압 조절 여유는 줄어든 상태.
연쇄의 형태를 보면 이 사건의 성격이 드러난다. 전압이 오르자 발전기가 떨어졌고, 발전기가 떨어지자 그 발전기가 흡수하던 무효전력이 사라져 전압이 더 올랐고, 그래서 다음 발전기가 떨어졌다. 보고서는 이를 연쇄 반응이라 불렀다. 주파수는 이 과정의 결과로 뒤늦게 무너졌다. 순서가 중요하다.
복구는 프랑스·모로코 연계와 자체 기동이 가능한 수력발전소를 발판으로 여러 개의 전기 섬을 만들어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28일 밤 10시 30분에 수요의 절반가량이 돌아왔고, 29일 오전 7시에 99.95%, 오후 2시 36분에 모든 작업이 끝났다.
사고 직후 가장 널리 퍼진 설명은 관성이었다. 정오의 발전 구성에서 재생에너지가 82%였고, 회전하는 쇳덩이가 적었으니 계통이 흔들림을 견디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직관적이고, 그래서 빨랐다.
공식 조사는 이 설명을 지지하지 않는다. 스페인 정부 조사위원회가 2025년 6월에 낸 보고서는 계통운영자와 발전사업자들이 제출한 계측 자료를 근거로 삼았는데, 사고 직전 계통의 관성과 예비력 수준이 충분했다는 계통운영자의 보고를 그대로 실었다. 계통의 회전 운동에너지는 58,000 MW·s 수준이었고, 이를 그 시점 수요로 나눈 관성 상수는 2.3초로 유럽 송전계통운영자협의회(ENTSO-E)가 권고하는 2초를 넘었다.
관성을 초 단위로 표현하는 관행에는 함정이 있다. 이 값은 계통의 회전 운동에너지를 그 순간의 수요로 나눈 몫이다. 분모가 작아지면, 즉 수요가 낮으면, 회전하는 설비가 늘지 않아도 초수는 커진다. 저수요 봄날 정오에 2.3초가 나온 데에는 그런 사정도 섞여 있다.
그래서 이 수치 하나로 계통이 튼튼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방향은 분명하다. 관성 부족이 방아쇠였다는 설명은 이 값과 맞지 않고, 사건의 시간 순서와도 맞지 않는다. 주파수는 발전이 대량으로 탈락한 뒤에 떨어졌다. 관성이 먼저 무너져 발전기를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발전기가 먼저 떨어져 주파수를 끌어내렸다.
ENTSO-E 전문가 패널은 2026년 3월 20일에 최종 보고서를 냈다. 송전계통운영자와 지역조정센터, 유럽 에너지규제기관협력청(ACER), 각국 규제기관에서 온 49명이 참여했고, 정전을 겪지 않은 두 나라 운영자 소속 전문가가 의장을 맡았다. 패널은 정전이 여러 요인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됐다고 결론지었다. 진동, 전압과 무효전력 제어의 공백, 나라마다 다른 전압 조정 관행, 스페인에서 일어난 급격한 출력 감소와 발전기 탈락, 고르지 않은 안정화 능력. 이것들이 겹쳐 전압을 빠르게 밀어 올렸고, 그 뒤로 발전기 탈락이 연쇄를 이뤘다.
그러니 질문을 옮겨야 한다. 전압을 붙들 자원은 왜 모자랐는가.
스페인 계통에서 전압을 능동적으로 잡는 일은 운영절차 7.4가 정한다. 이 절차는 재래식 화력발전기에 설정값 추종 방식의 동적 전압 제어 의무를 지운다. 발전기가 계통 전압을 관측하다가 값이 오르면 역률을 바꿔 무효전력 흡수를 늘리고, 더 오르면 더 흡수하는 식이다. 여기서 동적이라는 말은 연속적으로, 그리고 계통 상태를 보면서 반응한다는 뜻이다.
4월 28일을 위해 짜인 계획은 이랬다. 전날 기술적 제약 계산에서 동적 전압 제어 임무를 받은 화력은 10기(원자력 3기, 가스복합 7기)였고, 중부·남서·남동·북서·북부·동부·레반테 북부·레반테 남부의 여덟 구역에 나눠 배치됐다. 전압은 국지적으로 다루는 문제이므로 지리적 분산이 필요했다.
그런데 남서부를 맡기로 한 한 기가 27일 저녁 7시 47분에 고장으로 정지를 선언했다. 30일 0시까지였다. 계통운영자는 실시간 기술적 제약 조정에서 다른 설비를 붙였지만, 남서부는 이튿날 전압 흡수가 가장 절실해진 바로 그 지역이었다. 12시 30분 시점에 설정값 전압 조정 의무를 지고 계통에 붙어 있던 화력은 원자력 4기, 석탄 1기, 가스 6기에 수력이 더해진 정도였다.
같은 시각 계통에는 수만 MW의 태양광과 풍력이 돌고 있었다. 전체 발전의 82%였다. 이 설비들은 전압 제어에 참여하지 않았다. 스페인 법령 413/2014에 따라 재생에너지와 열병합, 폐기물 발전은 고정 역률 방식에만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고정 역률이란 유효출력에 비례해 무효전력을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계통 전압이 오르든 내리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 발전량에만 반응한다.
정부 보고서는 이 대목을 담담하게 적었다. 재생에너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설정값 방식으로 운전할 기술적 능력을 갖췄다고 적었다. 문제는 그다음 구절에 있다.
la normativa aún no se lo exige ni se lo permite
규정이 아직 그것을 요구하지도, 허용하지도 않는다.
스페인 정부 「2025년 4월 28일 전력 위기 상황 분석 위원회 보고서」, 4장 전압 제어의 의무와 자원
정전 이후의 논쟁에서 재생에너지가 전압을 잡지 못한다는 말이 자주 쓰였다. 이 문장에서 잡지 못한다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갈린다. 능력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고, 허가가 없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사실이었던 것은 뒤쪽이다. 4월 28일 정오에 스페인 계통이 갖지 못한 것은 전압을 붙들 설비가 아니라, 그 설비에 전압을 붙들라고 지시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이 구분에는 실질이 있다. 전압 제어 자원의 목록은 계통에 무엇이 설치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규정이 누구에게 의무를 지웠는가로 만들어진다. 그날 그 목록에는 화력 11기가 있었고, 그중 남서부 담당 한 자리가 비어 있었으며, 나머지 82%는 목록 바깥에 있었다.
같은 규정은 반대 방향의 비용도 만든다. 봄날 정오처럼 수요가 낮고 태양광이 넘칠 때에도 계통은 전압 제어를 위해 가스복합을 붙여 둬야 한다. 이때 그 발전기는 최소 기술 출력으로 돌아간다. 전압 때문에 붙여 둔 발전기이므로, 그 발전기가 내보내는 전력만큼 시장에서 이미 낙찰된 다른 발전이 밀려난다. 보고서는 이 구조가 재생에너지 출력 제한을 늘린다고 짚었다.
4월 28일의 도매 전력가격은 하루 평균 18.50 €/MWh였다. 2024년 연평균 58.6 €/MWh와 견주면 3분의 1에 못 미친다. 한낮 시간대는 0이거나 음수였다. 전기가 남았다는 뜻이다.
오전 10시 30분에서 11시 15분 사이, 시간내시장 가격은 -10 €/MWh 부근까지 내려갔다. 발전사업자가 전력을 시장에서 거둬들이면 오히려 돈을 받는 구간이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간대에 태양광 출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하루 중 발전량이 한창 오르는 구간이었고 이를 설명할 기상 변화도 없었다. 조사위원회는 가격 신호를 가장 그럴듯한 원인으로 봤다.
여기서 두 규칙이 만난다. 고정 역률로 묶인 재생에너지가 출력을 줄이면 그 설비가 흡수하던 무효전력도 비례해서 줄어든다. 동시에 선로에 흐르는 전력이 줄어들면 선로 자체가 만들어 내는 무효전력이 늘어난다. 두 효과가 같은 방향으로 겹쳐 전압을 밀어 올린다. 실제로 그 시간대의 전압 상승은 태양광 출력 감소, 프랑스 연계 흐름 변화와 나란히 움직였다.
다시 말해 시장 규칙이 계통 전압에 직접 작용했다. 가격은 유효전력을 사고파는 신호로 설계됐고 전압은 무효전력의 문제이므로, 두 규칙은 서로를 모른 채 돌아간다. 시장이 태양광을 밀어내면 계통은 전압 흡수 능력을 함께 잃는데, 이 손실을 되사 오는 장치는 그 시점의 제도에 없었다.
정전의 방아쇠는 12시 32분에 당겨졌지만,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상태는 그날 오전 내내 규칙들 사이의 틈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인버터가 전압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스페인만의 사정이 아니다. 태양광과 배터리는 전력전자 장치를 통해 계통에 붙으므로 무효전력을 빠르고 정밀하게 주고받을 수 있다. 회전 관성은 없지만 전압 제어에서는 오히려 동기발전기보다 반응이 빠르다. 문제는 어느 나라가 그 능력을 접속 조건으로 요구해 두었느냐다.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는 2016년 6월 16일 명령 827호를 냈다. 그전까지 풍력발전은 무효전력 공급 의무에서 면제돼 있었는데, 이 명령이 면제를 없앴다. 새로 접속하는 비동기 발전기는 발전소 변전소 고압측에서 역률 0.95 진상부터 0.95 지상까지의 범위에서 동적 무효전력을 낼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 같은 해 9월 21일부터 효력이 생겼다.
한국의 접속 기준도 이 능력을 요구한다. 한국전력의 「송·배전용 전기설비 이용규정」 별표6 신재생발전기 계통연계기준은 신재생발전기가 세 가지 무효전력 제어 방식 가운데 계통운영자가 지시하는 하나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정한다. 유효출력과 무관하게 일정한 무효전력을 내는 방식, 일정 역률을 유지하는 방식, 그리고 전압에 따라 자동으로 무효전력을 조절하는 방식이다. 마지막 것이 스페인이 재생에너지에 허용하지 않았던 그 기능이다. 사업자는 이 능력을 시험하고 결과를 한전에 제출해야 한다.
스페인이 2025년 4월까지 갖지 못한 것은 인버터가 아니라 이런 문장이었다. 물리는 세 나라에서 같았고, 결과를 가른 것은 문서였다.
다만 접속 기준에 능력 조항이 있다는 것과, 계통운영자가 그 능력을 구역별로 실제 동원할 절차와 보상 체계를 갖췄다는 것은 별개다. 앞의 것은 설비 인증의 문제이고 뒤의 것은 운영과 정산의 문제다. 스페인의 화력이 전압 제어 임무를 배정받고 그 대가를 받았듯, 인버터 자원을 목록에 넣으려면 누가 언제 어느 구역에서 얼마를 흡수할지 정하고 값을 매기는 절차가 따로 필요하다.
이 두 층을 구분하지 않으면 두 방향으로 잘못 읽게 된다. 접속 기준만 보고 준비가 끝났다고 여기거나, 운영 절차의 공백을 보고 설비가 능력이 없다고 여기게 된다.
조사 보고서를 읽을 때는 그 문서가 어떤 조건에서 만들어졌는지도 함께 봐야 한다. 이 보고서의 결론이 왜 그런 모양인지가 거기서 설명된다.
위원회는 2025년 4월 30일 국가안보회의 지침으로 만들어졌고 생태전환·인구변화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았다. 구성원은 국가안보국장, 사이버공간합동사령부와 국가암호센터, 국가핵심기반보호센터, 에너지국의 책임자들이었다. 사이버보안·디지털시스템 실무반과 계통운영 실무반 둘로 나뉘어 일했다.
기한이 있었다. 유럽연합 규정 2019/941 제17조에 따라 회원국은 전력 위기 이후 석 달 안에 집행위원회와 전력조정그룹에 사후 평가 보고서를 내야 한다. 위원회는 이 일정 위에서 움직였다.
더 중요한 조건은 자료 수집 방식이다. 위원회는 사업자들에게 강제로 자료를 요구할 권한 없이 자발적 협조에 기대 정보를 모았다. 111건의 공문으로 770개 항목을 요청했고 대부분은 회신을 받았다. 그러나 공개 범위는 달랐다. 자료 공개 동의를 물은 67개 사업자 가운데 6곳은 비밀 유지를 요구했고, 3곳은 공개 전 승인을 요구했으며, 57곳은 명시적 허락을 보내지 않았고, 자기 자료의 공개를 허용한 곳은 1곳이었다.
그래서 공개본에는 설비 이름과 사업자 이름이 곳곳에서 지워져 있다. 남서부 전압 제어를 맡기로 했다가 전날 저녁 정지한 발전기가 무엇이었는지, 어느 화력이 무효전력을 흡수하는 대신 오히려 내보냈는지, 공개본만으로는 알 수 없다. 위원회는 계통을 무너뜨린 단일 고장을 찾지 못했다고 적었는데, 이 진술은 물리적 사실인 동시에 증거 수집 조건의 함수이기도 하다. 개별 사업자의 책임을 가리는 일은 애초에 이 위원회의 임무가 아니었고, 그 임무를 수행할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다.
위원회를 탓할 일은 아니다. 위기 직후 석 달 안에, 강제력 없이, 수십 개 민간 사업자에게서 초 단위 계측 자료를 받아 초 단위 연쇄를 재구성한 문서다. 다만 그런 조건에서 만들어진 결론은 구조를 향할 수밖에 없다. 개별 책임보다 규칙의 생김새를 말하게 된다. 이 보고서가 제도 개편 권고로 끝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제도는 실제로 움직였다. 스페인 국가시장경쟁위원회(CNMC)는 2025년 6월 12일 결의로 전압 제어 서비스를 손보는 작업을 시작했다. 왕령 997/2025는 계통운영자에게 운영 방식을 검토하고 필요하면 개정안을 내라는 의무를 지웠고, 레드엘렉트리카는 2026년 2월 6일 법령 413/2014와 운영절차 7.4, 그리고 비육지계통용으로 신설할 절차에 대한 개정 제안을 규제기관에 제출했다.
2026년 6월 30일 CNMC는 운영절차 7.4와 14.4의 개정을 의결했고 7월 10일 관보에 실렸다. 골자는 셋이다.
첫째, 고정 설정값 방식이 새로 생겼다. 실시간으로 지령을 받을 통신 설비가 없는 설비도 전압이나 무효전력의 고정 목표값을 따르는 방식으로 전압 제어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대상은 1 MW 이상의 발전 설비와 저장 설비이며, 송전망 연계와 배전망 연계를 가리지 않는다. 고정 역률 방식에서 본격적인 전압 조정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에 해당한다.
둘째, 보상이 바뀌었다. 실시간 설정값 추종에 대한 대가를 올렸고, 유효전력을 내지 않는 시간에 무효전력만 공급할 때의 비용을 따로 보전하도록 했으며, 설비용량에 연동해 기술 개조 비용과 그에 따르는 망 이용요금을 메워 주는 항목을 뒀다. 햇빛이 없는 밤에도 인버터를 켜 두고 전압을 잡게 하려면 그 전기값과 개조비를 누군가 내야 한다.
셋째, 계통운영자에게 구역별 전압 제어 필요량과 가용 자원, 적합한 해법을 주기적으로 공표하도록 요구했다. 그동안 이 정보는 계통운영자 안에만 있었다.
규정이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는다. 판정 근거는 계통운영자가 공표하기 시작할 구역별 자료다. 전압 제어를 목적으로 가스복합을 최소 출력에 붙여 두는 기술적 제약 물량이 줄지 않는다면, 새 방식은 서류상의 선택지로 남는다는 뜻이 된다. 이 경우 원인은 둘 중 하나다. 새 보상이 개조 비용을 덮지 못했거나, 고정 설정값 방식으로는 국지적 전압 변동을 따라잡지 못했거나.
반대로 화력을 붙여 두는 물량이 줄면서 400 kV망의 전압 변동 폭이 지금 수준을 유지한다면, 그때는 전압 제어 자원의 목록을 규정이 정했다는 이 사건의 교훈이 실측으로 확인된다.
CNMC는 이 비용을 소비자에게 어떻게 물릴지에 대해서는 결정을 미뤘다. 판매사업자들은 전압 제어와 기술적 제약 비용을 시장가격이 아니라 규제요금에 넣자고 요구했으나, 규제기관은 그렇게 하면 불확실성이 판매사업자에게서 소비자로 옮겨 갈 뿐이라고 판단했다. 고정가격 계약을 맺은 소비자가 1년 동안 보장받던 값이 요금 개정 주기마다 흔들리게 되고, 소비자에게는 그 위험을 관리할 수단이 없다는 이유였다. 대신 기술적 제약 비용 자체를 줄이는 쪽을 우선순위로 삼았고, 이번 개정이 바로 그 수단이다.
여기서 문제의 성격이 한 번 더 드러난다. 계통 서비스를 누가 제공할지 정하는 일은 기술 규격의 문제로 시작해 곧바로 값을 매기고 나누는 문제가 된다. 전압을 잡는 일에는 대가가 따르고, 그 대가는 결국 어딘가에서 청구된다. 4월 28일 이전의 스페인은 그 값을 가스 연료비의 형태로 치르고 있었다. 다만 그 사실이 전압 제어 비용이라는 이름으로 계산서에 적혀 있지 않았을 뿐이다.
이베리아 반도가 어두워진 이유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전기는 모자라지 않았고 회전 관성도 권고치를 넘었지만, 전압이 오르는 것을 보고 반응할 수 있는 자원이 그 시각 그 구역에 충분히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이 결론을 떠받치는 근거는 세 갈래다. 첫째, 사건의 시간 순서가 주파수가 아니라 전압에서 시작한다. 12시 32분부터 전압이 직선으로 올랐고, 과전압에 의한 탈락이 연쇄를 만들었으며, 주파수는 그 결과로 무너졌다. 둘째, 전압 제어 자원의 목록은 계통에 설치된 설비가 아니라 규정이 정했다. 재생에너지 인버터는 설정값을 따라 전압을 조절할 능력을 이미 갖고 있었지만, 스페인 법령은 그것을 요구하지도 허용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날 계통에 돌던 발전의 82%는 전압 문제에서 관객이었다. 셋째, 시장 규칙과 전압 제어 규칙이 서로를 모른 채 작동한 결과, 음의 가격이 태양광을 밀어냈을 때 계통은 유효전력만이 아니라 무효전력 흡수 능력을 함께 잃었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 갈리는 쟁점은 재생에너지가 계통을 불안하게 만드느냐가 아니다. 그 물음 자체가 잘못 세워졌다. 실제로 갈리는 지점은 계통 서비스를 어떻게 조달할 것이냐다. 특정 발전 방식에 의무로 묶어 두고 그 설비를 필요할 때 붙여 둘 것인가, 아니면 성능 요건을 만족하는 모든 자원에서 기술 중립적으로 사 올 것인가. 앞의 방식은 예측 가능하지만 계통 구성이 바뀌면 값이 빠르게 오르고, 뒤의 방식은 값이 내려갈 여지가 있지만 성능 검증과 실시간 동원 절차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스페인은 2026년에 뒤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 선택의 성패는 앞으로 몇 년의 운영 자료에 나타난다.
남는 물음은 이 문제가 이베리아 반도만의 것이냐다. 수요는 다시 늘고 있고, 새로 들어오는 부하의 성격도 달라졌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의 서버 부하가 1초 안에 정격 용량의 절반 넘게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고 적었다. 이런 부하가 특정 지역에 몰려 들어오는 계통에서는 전압과 무효전력이 지금보다 훨씬 자주 문제가 된다.
전력망을 키우는 일은 선로와 발전소의 문제로 이야기된다. 실제로 지어야 할 것도 많다. 다만 그 선로 위에서 전압을 붙드는 일이 누구의 의무이고 그 대가를 누가 치르는지는 계통이 지금과 다르게 생겼던 시절의 문서에 적혀 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확인된 것은 그 문서가 물리보다 늦게 갱신된다는 사실이었다.
본문의 사실관계는 스페인 정부 「2025년 4월 28일 전력 위기 상황 분석 위원회 보고서」(2025년 6월), 스페인 국가시장경쟁위원회의 2026년 6월 30일 결의와 그 보도자료, ENTSO-E 전문가 패널 최종 보고서 관련 공표(2026년 3월 20일), 국제에너지기구 『Key Questions on Energy and AI』(2026),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 명령 827호(2016), 한국전력 「송·배전용 전기설비 이용규정」 별표6에서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