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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멘토의 제작 경위와 철학 — 기록은 기억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2026년 9월 4일

크리스토퍼 놀런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메멘토」는 2000년 9월 5일 제57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미국에서는 이듬해 3월 16일에 개봉했다. 러닝타임은 113분이다. 주인공 레너드 셸비는 아내가 살해당한 밤에 머리를 다친 뒤로 새로 겪은 일을 기억에 남기지 못한다. 15분쯤 지나면 방금 만난 사람도, 방금 한 일도 사라진다. 그래서 그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고 그 여백에 메모를 적고, 잃으면 안 되는 정보는 몸에 문신으로 새긴다. 그렇게 아내를 죽인 남자를 쫓는다.

이 설정에는 처음부터 하나의 물음이 붙어 있다. 복수를 끝내도 레너드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왜 계속하는가. 영화는 이 물음에 답하면서 다른 물음을 열어놓는다. 기억이 믿을 수 없다면 기록은 믿을 수 있는가.

레너드가 기억 대신 붙든 기록은 기억의 대체물로 작동하지 않는다. 무엇을 사진으로 남기고 무엇을 문장으로 적을지 고르는 사람이 레너드 자신이고, 그 선택에 이미 해석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놀런 형제가 이 이야기를 만든 경위를 따라가면 그 결론이 처음부터 설계된 것임이 드러난다.

심리학 개론 수업에서 시작된 이야기

이야기의 출발점은 대학 강의실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동생 조너선 놀런은 조지타운대학교 영문학과 학생이었다. 그는 2001년 겨울 영화 전문지 「필름메이커」와 한 형제 공동 인터뷰에서, 형이 첫 장편 「미행」을 마무리하던 무렵 자신은 한 학기를 쉬며 여행 중이었고 심리학 개론 수업에서 이 질환에 관해 읽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가 붙들고 있던 주제는 피해를 입은 사람이 그 뒤를 어떻게 살아가는가였다. 사건의 충격이 가신 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그 일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 그 순간에 붙박여 버린 인물을 그려보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조너선 놀런이 이 착상을 형에게 말한 곳은 시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자동차 안이었다. 그는 그때 이야기를 다 쓰지 않은 상태였고, 운전하는 동안 그 이야기가 영화가 되어 버렸다고 회고했다. 워싱턴으로 돌아간 동생이 두 달 뒤 초고를 보냈고, 형은 그것을 바탕으로 각본을 썼다. 조너선의 단편 「메멘토 모리」는 그 뒤에 완성되어 2001년 3월호 「에스콰이어」에 실렸다. 라틴어 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관용구다. 단편의 주인공 이름은 얼이고, 그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다가 탈출해 범인을 찾는다. 영화의 레너드는 시설에 갇혀 있지 않다.

착상의 목적에 관해 조너선 놀런은 인터뷰에서 분명하게 말했다. 이 질환을 은유적 장치로 썼을 뿐 질환 자체를 진지하게 조사할 생각은 없었다고 그는 밝혔다. 그가 다루려 한 것은 만들어진 기억이었다. 생생하게 느껴지지만 실은 평생 들어온 이야기들을 이어 붙여 지어낸 허구일 수 있는 기억. 그는 그 착상이 형과의 관계에서 왔다고도 덧붙였다. 형은 동생에게 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 이야기는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 위에 살이 붙어 방향이 틀어진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범죄영화가 마지막에 대문자로 쓴 진실 하나로 돌아가는 관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밝혔다.

착상 단계에서 이미 두 가지가 정해져 있었다. 이 영화가 다룰 소재는 조작된 기억이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확정된 진실을 주지 않겠다는 것. 뒤에 나오는 모든 논의는 이 두 결정의 결과다.

배급사를 구하지 못한 영화가 4천만 달러를 벌기까지

각본은 완성되었지만 시장은 냉담했다. 제작자 에런 라이더가 이 각본을 뉴마켓에 가져갔고 뉴마켓이 제작비를 댔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라이더가 그 각본을 자기가 본 것 중 가장 참신했다고 평가했다고 전한다. 뉴마켓은 그때까지 영화에 돈을 대는 금융 회사였고 극장 배급에는 손대지 않았다. 주연 후보로 브래드 피트 같은 이름이 거론되었으나 성사되지 않았고, 결국 「LA 컨피덴셜」의 가이 피어스가 레너드를 맡았다. 「매트릭스」에 출연한 캐리앤 모스와 조 판톨리아노가 그 곁에 섰다.

제작비 수치는 자료마다 다르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450만 달러에서 900만 달러 사이로 보도가 나뉘었다고 적었고, 2001년 6월 「살롱」에 실린 앤디 클라인의 분석 기사는 500만 달러라고 썼으며, 박스오피스 모조는 900만 달러로 기재하고 있다. 한 편의 영화가 얼마를 썼는지 같은 단순한 사실조차 공개 기록에서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완성 후 미국 배급사들에게 시사를 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영화 자체와 감독의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줄거리가 너무 복잡해 관객이 들지 않으리라고 보았다. 스티븐 소더버그가 이 영화를 보고 공개적으로 지지했지만 배급사는 나서지 않았다. 결국 뉴마켓이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배급에 나섰고, 이 결정을 계기로 뉴마켓은 배급사로 전환했다.

베니스에서 시작된 반응은 도빌, 토론토, 선댄스를 거치며 커졌다. 개봉 몇 주 만에 상영관이 500곳을 넘었다. 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최종 흥행은 북미 2554만 4867달러, 해외 1451만 5083달러, 합계 4006만 108달러다. 클라인은 개봉 15주차에도 이 영화의 스크린당 평균 수입이 2억 달러를 쓴 「진주만」과 2달러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관객이 한 번 보고 끝내지 않고 다시 보러 왔다는 뜻이다.

아카데미에서는 각본상과 편집상 후보에 올랐다. 원작 단편이 있는데도 각본상 후보가 된 데에는 사정이 있다. 영화가 2000년 가을 유럽에서 먼저 개봉한 반면 단편은 2001년 3월에야 발표되었으므로, 심사 시점에 이 각본은 발표된 저작을 옮긴 것이 아니었다. 조지타운대 학보 「호야」는 2002년 2월 12일 후보 발표 당시 조너선 놀런이 형과 함께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H.M.이라는 환자와, 레너드에게 남아 있는 것

영화가 다루는 질환은 실재한다.

선행성 기억상실 사고나 수술 이후에 겪은 일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지 못하는 상태다. 사고 이전의 기억과 지능, 성격은 그대로 남는다. 영화나 드라마에 더 자주 나오는 쪽은 반대편인 역행성 기억상실로, 머리를 부딪친 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설정이 그것이다. 두 가지는 원인도 경과도 다르다.

이 질환의 연구는 한 환자에게서 시작되었다. 1953년 미국의 신경외과의 윌리엄 스코빌은 심한 뇌전증을 앓던 20대 남성 헨리 몰레이슨의 발작을 줄이기 위해 양쪽 측두엽 안쪽을 절제했다. 해마를 포함한 부위였다. 발작은 줄었으나 그는 새로운 사실과 사건을 기억에 담지 못하게 되었다. 스코빌과 신경심리학자 브렌다 밀너는 이 사례를 포함해 정신질환자 여덟 명과 뇌전증 환자 한 명, 모두 아홉 명의 수술 결과를 정리해 1957년 『신경학·신경외과학·정신의학 저널』 20권 1호 11~21쪽에 「양측 해마 병변 이후의 최근 기억 상실」을 실었다. 절제가 뒤쪽으로 깊이 들어가 해마와 해마이랑을 건드릴 때 최근 기억의 손상이 지속된다는 것, 손상 정도가 해마를 얼마나 제거했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 이 논문의 결론이었다. 대조군을 둔 실험은 없었다. 수술을 받은 환자들을 사후에 검사한 사례 보고였고, 그런 한계에도 이 논문은 기억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몰레이슨은 사망할 때까지 이니셜 H.M.으로만 불렸다.

밀너는 그에게 거울에 비친 상을 보면서 도형의 윤곽을 따라 그리는 과제를 며칠에 걸쳐 시켰다. 그는 매번 그 과제를 처음 본다고 말했지만 성적은 날마다 좋아졌다. 기억에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드러났다.

서술기억과 절차기억 서술기억은 말로 꺼낼 수 있는 기억이다. 어제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도시가 어느 나라에 있는지가 여기 속한다. 절차기억은 몸에 밴 기술이다. 자전거를 타거나 자판을 치는 능력이 그것이며, 어떻게 하는지 설명하지 못해도 몸은 해낸다. 해마가 손상되면 서술기억은 무너지지만 절차기억은 남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일도 여전히 가능하다.

임상 쪽에서 이 영화를 평가한 기록도 있다. 런던 국립신경학·신경외과병원의 임상신경심리학자 샐리 백센데일은 1915년부터 2004년까지 기억상실 인물이 나오는 영화 60편을 검토해 2004년 12월 『영국의학저널』 329권 7480호 1480~1483쪽에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기억은 없다: 영화 속 기억상실」을 실었다. 그는 대다수 영화가 실제 임상과 무관하다고 결론지었다. 한 번 머리를 다쳐 잃은 기억을 두 번째 충격으로 되찾는다는 설정, 기억과 함께 인격까지 바뀐다는 설정을 그는 대표적인 오류로 꼽았다. 그러면서 예외 세 편을 들었고 그중 하나가 「메멘토」다. 백센데일은 이 영화가 H.M.에 관한 신경심리학 연구에서 부분적으로 착상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고 적으면서, 레너드가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고 역행성 기억상실이 거의 없으며 이 질환이 일상에서 만드는 곤란을 여러 장면에서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장면이 조각나 이어지는 배열이 이 질환의 영원한 현재라는 성질을 잘 드러낸다고도 했다.

여기에 어긋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각본의 출발점을 만든 조너선 놀런은 질환을 정확히 그릴 생각이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인터뷰에서 선행성 기억상실을 설명하면서 사건 이전과 이후의 일을 모두 기억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말했는데, 이는 이 질환의 정의와 맞지 않는다. 임상적 정확성이라는 평판은 제작진이 다른 목표를 좇다가 얻은 결과다.

정확성 논란과 별개로, H.M.의 사례는 이 영화의 핵심에 닿아 있다. 서술기억이 사라진 사람에게 무엇이 남는가. 몸에 밴 것이 남는다. 레너드는 자기가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면서도 사진을 찍고 메모를 하고 차를 몬다. 영화가 그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힘으로 제시하는 것은 회상이 아니라 굳어진 행동 방식이다.

로크는 기억을 자아의 근거로 삼았고, 리드는 반례를 냈다

기억을 잃은 사람이 여전히 같은 사람인가라는 물음은 철학에서 인격동일성 문제로 불린다. 어제의 그 사람과 오늘의 이 사람이 같다고 말할 때 그 같음이 무엇에 근거하는가를 따지는 문제다. 이 논의의 방향을 정한 사람은 존 로크다. 그는 『인간지성론』 2판(1694)에 「동일성과 상이성에 관하여」라는 장을 새로 넣어, 사람의 동일성이 몸이나 영혼이라는 실체가 아니라 의식의 연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in this alone consists personal Identity, i.e. the sameness of rational Being: And as far as this consciousness can be extended backwards to any past Action or Thought, so far reaches the Identity of that Person; it is the same self now it was then; and 'tis by the same self with this present one that now reflects on it, that that Action was done.

오직 여기에만 인격의 동일성, 곧 이성적 존재의 같음이 있다. 그리고 이 의식이 과거의 어떤 행동이나 생각에까지 거슬러 뻗을 수 있는 만큼, 딱 그만큼 그 인격의 동일성이 미친다. 그때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는 같은 자기이며, 그 행동을 한 것은 지금 그것을 되돌아보는 이 자기와 같은 자기다.

존 로크, 『인간지성론』 2권 27장 9절. 니디치 교정본(옥스퍼드 클래런던)의 철자를 따랐다. 번역은 직접 옮겼다.

로크가 쓴 낱말은 기억이 아니라 의식(consciousness)이다. 그러나 과거의 행동에까지 거슬러 뻗는 의식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기억이다. 이 점을 지적하고 반례를 만든 사람이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토머스 리드다. 그는 1785년 『인간 지성 능력론』에서 로크의 설명이 의식과 기억을 뒤섞었다고 비판했다. 스무 해 전의 일을 지금 의식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으며, 그런 앎은 기억이라고 불러야 한다.

리드가 든 사례는 이렇다. 한 소년이 학교에서 과수원의 과일을 훔치다 매를 맞는다. 그는 자라서 첫 전투에 나가 적의 군기를 빼앗는다. 노년에는 장군이 된다. 군기를 빼앗던 시점에 그는 어린 시절 매맞은 일을 기억하고 있었고, 장군이 된 시점에는 군기를 빼앗은 일은 기억하지만 매맞은 일은 완전히 잊었다. 로크의 기준을 적용하면 매맞은 소년과 군기를 빼앗은 청년은 같은 사람이고, 군기를 빼앗은 청년과 장군도 같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장군과 소년도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장군의 기억은 매맞은 일에 닿지 않으므로 같은 기준에 따라 장군은 그 소년이 아니다. 같은 사람이면서 같은 사람이 아니게 된다.

리드는 더 나아가, 기억은 동일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의 증거일 뿐이라고 명확히 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그 일을 했다고 기억한다면 그 기억은 그가 그 일을 한 사람이라는 증거다. 그러나 그 기억이 그를 그 일을 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증언을 증언된 사실의 원인으로 삼는 것은 앞뒤가 뒤집힌 설명이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레너드는 이 반례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인물이다. 로크의 기준이 맞다면 그는 15분마다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는 같은 목표를 향해 계속 움직인다. 그를 붙들고 있는 것은 회상이 아니라 습관이며, 이는 밀너가 H.M.에게서 확인한 절차기억이 하는 일과 같은 종류다. 영화가 인격동일성 문제에 내놓는 답은 기억이 아니라 몸에 밴 반복이다.

문신은 기억의 대체물인가

레너드 자신은 자기 체계에 확신을 갖고 있다. 그가 영화 안에서 반복해 내세우는 논리는 이렇다. 기억은 왜곡되지만 기록은 사실이다. 목격자 진술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지 경찰에 물어보라고,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라고 그는 말한다. 사실이 있으면 기억은 필요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 주장의 앞부분은 인지과학의 논의와 겹친다. 사람의 뇌 바깥에 놓인 기록이 기억의 일을 대신할 수 있다는 문제를 철학자와 인지과학자들이 오래 다뤄 왔다.

엑소그램과 확장된 마음 인지과학자 멀린 도널드는 1991년 저서 『현대적 마음의 기원』에서, 뇌 안에 남는 기억 흔적을 가리키는 엔그램(engram)에 짝을 맞춰 뇌 바깥의 물질적 형태로 저장된 기억을 엑소그램(exogram)이라고 불렀다. 글, 그림, 사진, 수첩이 여기 속한다. 철학자 앤디 클라크와 데이비드 차머스는 1998년 학술지 『애널리시스』 58권 1호 7~19쪽에 실은 「확장된 마음」에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오토는 미술관 주소를 수첩에 적어두고 필요할 때 꺼내 본다. 주소를 머릿속에서 꺼내 보는 잉가와 오토 사이에 원리상 차이가 없다면, 오토의 수첩은 기억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그의 기억 자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두 사람의 논증이다.

철학자 앤드루 케이니어가 엮은 논문집 『메멘토』(라우틀리지, 2009)에는 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장이 들어 있다. 존 서턴이 쓴 65~86쪽의 「세계의 감촉: 엑소그램, 습관, 그리고 기억 종류의 혼동」이다. 리처드 헤어스밍크는 『마인드 앤드 랭귀지』 2020년 논문에서 서턴의 이 글을 소개하며, 레너드가 메모를 적은 폴라로이드와 문신 같은 인공물로 기억을 확장하는 사례로 다뤄진다고 정리했다. 장 제목에 이미 답이 절반쯤 들어 있다. 문제는 기억의 종류를 혼동하는 데 있다.

오토의 수첩이 작동하는 이유는 거기 적힌 것이 사건이기 때문이다. 미술관이 53번가에 있다는 문장은 오토가 그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든 바뀌지 않는다. 레너드의 체계는 이 조건을 채우지 못한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문장은 존 G라는 남자가 자기 아내를 강간하고 죽였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사건에서 끌어낸 결론이다. 그가 폴라로이드에 적는 문구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을 믿지 마라, 저 사람이 도와줄 것이다. 모두 판단이다.

레너드가 내세우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하나가 조용히 전제되어야 한다. 무엇을 기록으로 남길지 고르는 일이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전제다. 그러나 사진을 찍을 대상을 정하고 그 여백에 쓸 문장을 정하는 사람은 15분 전의 판단을 잃어버린 레너드 자신이다. 기억이 해석이라서 못 믿겠다던 그는, 해석을 한 번 더 거쳐 만든 물건에 자기 인생을 걸고 있다. 그가 세운 규칙, 곧 자기 필체로 쓴 것만 믿는다는 규칙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되풀이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 전제를 무너뜨린다. 테디는 레너드에게 그가 찾던 남자를 이미 1년 전에 죽였고 자기가 그 뒤로 계속 그를 이용해 왔다고 말한다. 존 G라는 이름은 흔하다는 것, 그리고 자기 이름도 그 조건에 해당한다는 것까지 알려준다. 레너드는 이 말을 곧 잊을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총알을 빼고, 복수를 마친 자신을 찍은 사진을 태우고, 테디의 폴라로이드에 그를 믿지 말라고 적고, 테디의 차량 번호를 범인의 것으로 받아 적는다. 그리고 그 번호를 문신으로 새기러 간다. 여기서 레너드는 기록을 만드는 사람이 된다. 그는 진실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쫓을 대상을 계속 갖기 위해 증거를 제작한다.

그러므로 레너드의 실패는 기억을 잃었다는 데서 오지 않는다. 저장 수단을 바꾸어도 선별과 해석은 그대로 남았고, 그는 그 사실을 자기 체계에서 지워 두었다.

놀런은 객관적 시점을 처음부터 두지 않았다

이 영화의 형식은 이야기 내용에 붙어 있다. 색채 장면은 시간을 거슬러 배열되고, 흑백 장면은 순방향으로 진행하며, 둘은 마지막에 만난다. 관객은 결과를 먼저 보고 원인을 모르는 채 다음 장면으로 들어간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이 선택의 이유를 여러 차례 밝혔다. 「필름메이커」 인터뷰에서 그는 필름 누아르가 시점을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로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장르라고 말했다. 필름 누아르는 1940~1950년대 할리우드의 범죄영화 계열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흠 있는 주인공과 믿을 수 없는 인물들, 그늘진 화면이 특징이며, 1960년대 이후 이 관습을 의식하며 되살려 쓴 영화들을 네오누아르라고 구분해 부른다. 놀런은 그 장르 관습 가운데 시점의 불안정성을 가져왔고, 마지막에 진상이 정리되는 결말은 가져오지 않았다. 그는 레너드의 상태와 그의 시점이 구조의 이유라고 설명했다. 관객을 그의 머릿속에 넣어, 그가 주변 인물과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 그대로 관객도 이해하게 만들려 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다른 자리에서는 주인공에게서 감춘 정보를 관객에게서도 감추면 관객을 그의 머릿속에 넣는 일이 꽤 잘 된다는 착상이 어느 날 떠올랐고, 그 방법이 이야기를 거꾸로 짜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같은 인터뷰에서 놀런은 조각들을 맞추면 이야기가 말이 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영화는 무엇이 객관적 진실인지 명시하지 않으며, 그렇게 하면 객관적 실재와 연결될 길이 없는 인물의 머릿속에 머물겠다는 원칙을 배신하게 된다고 했다. 결말의 미결은 이 원칙에서 나온 결과다. 앞서 본 대로 동생 조너선도 대문자 진실로 돌아가는 관습에서 벗어나려 했다고 밝혔다. 형제의 진술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놀런은 관객 반응 가운데 하나를 예상하지 못했다고도 말했다. 관객이 결말에서 테디가 하는 말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유를 이렇게 짚었다. 관객은 영화 내내 테디의 폴라로이드에 적힌 그를 믿지 말라는 문구를 보아 왔고, 레너드의 시각적 회상이 의심스럽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뒤에도 여전히 그 이미지를 믿는 쪽을 택한다. 그러면서 이 영화에서 진상을 아는 유일한 인물을 관객이 이미 신뢰하지 못하는 배우가 연기한다는 사실이 자기에게는 무서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관객이 문구 하나 때문에 판단을 굳히는 방식은 레너드가 자기 문신 때문에 판단을 굳히는 방식과 같다.

놀런의 이런 발언에는 그가 서 있던 자리가 작용했다. 그는 2001년 3월 15일 「뉴 타임스 로스앤젤레스」와 한 인터뷰에서 애매성과 주관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자기는 이 영화의 진실을 알고 있으며 자세히 보면 다 나온다고 주장했다. 클라인은 극장에서 네 번, 비디오로 한 번 더 본 뒤 그 말을 더는 믿지 않게 되었다고 「살롱」에 썼다. 감독에게는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은 상태를 유지할 이유가 있었다. 이 영화의 상업적 수명은 관객이 두 번, 세 번 다시 보는 데 걸려 있었고, 15주차까지 상영관을 지킨 실적이 그 결과다. 이 서술의 목적은 감독이 어떤 자리에서 말하고 있었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영화 바깥의 기록도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공식 웹사이트가 따로 있었다. 주소는 otnemem.com이었고, 만든 사람은 단편을 쓴 조너선 놀런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그 사이트가 단편의 착상과 영화의 착상을 합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클라인은 그 사이트가 레너드를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사람으로 분명하게 그리고 있으며, 그것이 공식 정본의 일부로 취급되는 듯하다고 적었다.

이 사실은 영화 해석의 조건을 바꾼다. 웹사이트를 작품의 일부로 치면 결말에서 테디가 한 말은 사실이라는 쪽으로 굳어지고, 레너드가 새미 잰키스의 이야기로 옮겨 놓은 사건은 레너드 자신의 것이 된다. 웹사이트를 홍보물로 치고 본편만 작품으로 보면 그 판단은 열린 채로 남는다. 케이니어가 논문집에 실은 마지막 장 「메멘토란 무엇인가: 주류 영화에서의 존재론과 해석」이 다루는 문제가 이것이다. 무엇을 작품의 본체로 볼 것인가를 정하지 않으면 이 영화의 중심 물음에 답할 수 없다.

본편만 놓고 보아도 자료가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클라인은 다섯 차례 관람과 각본 대조를 거쳐 어긋나는 곳들을 정리했다. 레너드는 테디의 말을 들은 뒤 아내에게 주사를 놓는 장면을 잠깐 떠올린다. 그런데 시간 순서로 여러 시간 뒤에 해당하는 다른 장면에서 그는 같은 이미지를 다시 떠올린다. 사고 이후의 일을 기억에 담지 못한다는 그의 조건이 맞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또 테디의 말이 사실이라면 레너드의 아내는 당뇨를 앓고 있었어야 하는데, 사고 이전 기억이 온전하다는 레너드는 아내에게 당뇨가 없었다고 단언한다. 클라인의 결론은 모든 것을 앞뒤가 맞게 설명하려면 이 질환의 규칙 자체가 장면마다 달라졌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관객이 진상을 확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관객이 놓친 단서가 있어서가 아니다. 확정에 필요한 자료가 서로 어긋나게 배치되어 있고, 그 배치는 두 형제가 착상 단계에서 정한 방침에서 나왔다. 백센데일이 임상적으로 정확하다고 평가한 이 영화는 정확성이 목표가 아니었고, 감독이 진실을 알고 있다고 말한 이 영화는 진실을 확정할 재료를 관객에게 주지 않는다.

결론 — 레너드의 실패는 기억을 잃은 데 있지 않고, 무엇을 남길지 자기가 골랐다는 데 있다

레너드의 체계는 무너진 기억을 기록으로 메우려는 시도다. 그 시도가 실패하는 곳은 저장이 아니라 선별이다. 오토의 수첩이 기억의 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거기 적힌 것이 해석을 거치지 않은 사건이기 때문인데, 레너드의 문신과 폴라로이드 문구는 그가 내린 결론을 옮겨 놓았다. 기억이 해석이라서 못 믿겠다는 그의 논리는 자기가 만든 기록에 그대로 되돌아온다. 결말에서 그가 테디의 차량 번호를 범인의 것으로 적어 넣을 때, 그는 자기 체계의 이 허점을 이용한다.

인격동일성을 기억에 두는 로크의 설명에 리드가 이미 반례를 냈고, 레너드는 그 반례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사례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굳어진 행동이고, 이는 밀너가 H.M.에게서 확인한 절차기억과 같은 종류다. 사람을 붙들고 있는 것이 습관일 수 있다는 결론이 여기서 나온다.

제작 경위는 이 결론이 사후 해석이 아님을 보여준다. 조너선 놀런은 이 질환을 만들어진 기억을 다루기 위한 장치로 골랐다고 밝혔고, 확정된 진실로 돌아가는 관습에서 벗어나려 했다고 말했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객관적 진실을 명시하면 인물의 머릿속에 머문다는 원칙을 깨게 된다고 설명했다. 시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차 안에서 정해진 것이 이 두 가지다.

답이 나뉘는 곳은 하나 남는다. 무엇을 작품의 본체로 볼 것인가다. 본편만 본체로 보면 테디의 진술과 레너드의 회상 중 무엇이 사실인지 확정할 수 없고, 조너선 놀런이 만든 공식 웹사이트와 단편까지 본체에 넣으면 레너드가 시설에서 나온 인물이라는 쪽으로 기운다. 어느 쪽을 택하든 마지막 장면에서 레너드가 스스로 증거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앞의 논의는 그 사실 위에 서 있으므로 정본 논쟁의 결과에 좌우되지 않는다.

남는 물음은 책임의 자리다. 로크 이후 인격동일성 논의는 기억을 기준으로 삼아 왔는데, 레너드 같은 경우 그 기준이 습관과 외부 기록 쪽으로 옮겨간다. 그러면 마지막 장면에서 증거를 조작한 인물에게 그 행위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물을 수 있다면 몇 시간 뒤 그 결정을 잊어버린 인물이 그 책임의 주체인지가 함께 문제가 된다. 케이니어의 논문집 첫 장에 실린 마이클 매케너의 「도덕적 괴물인가 책임 있는 인격인가: 결함 있는 행위주체성의 사례 연구로서의 메멘토의 레너드」가 이 물음을 다룬다. 개봉한 지 25년이 넘도록 이 영화가 철학 강의 자료로 남아 있는 이유는 그 물음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사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