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르마와 젠네제노와 악숨과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각각 다른 이유로 고대 문명 목록에서 빠졌다. 그 이유는 자료보다 목록을 만든 기준 쪽에 있다.
고대 문명을 꼽는 목록에서 아프리카가 차지하는 자리는 언제나 하나다. 이집트다. 넷을 세든 여섯을 세든 결과는 같고, 아프리카 대륙의 나머지는 목록 바깥에 남는다.
이 배치에는 지리적 근거가 있다고들 말한다. 나일강이 지중해 세계와 이어져 있어 이집트는 서아시아·유럽과 같은 권역에 들어가고, 사하라 남쪽은 별개라는 구분이다. 그러나 이 구분을 그대로 두면 곤란한 일이 생긴다. 이집트 바로 남쪽에서 이집트와 겨루던 왕국, 문자 없이 도시를 세운 사회, 중심 권력 없이 도시 규모에 이른 취락, 자체 화폐를 주조한 국가가 모두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여기서 다루는 네 사례는 시간 범위가 넓다. 기원전 2500년에서 기원후 15세기까지 걸쳐 있어 하나의 시대로 묶이지 않는다. 묶이는 것은 다른 지점이다. 넷 모두 이집트 밖 아프리카에 있었고, 넷 모두 목록에 없으며, 넷 모두 목록을 만든 기준 가운데 무언가를 충족하지 않는다.
수단 북부 제3폭포 부근, 한때 나일강 가운데 섬이었던 자리에 케르마가 있다. 기원전 2500년 무렵 성립해 기원전 1500년 무렵까지 이어졌다. 전성 하라파기와 겹치고, 이집트 고왕국 말기에서 신왕국 초기에 해당한다.
스위스 고고학자 샤를 보네 연구진의 장기 발굴로 도시의 모습이 드러났다. 기원전 2500년 무렵 큰 요새가 세워지고 그 주위로 조밀한 도시가 빠르게 자라났다. 원형 오두막과 그보다 큰 공용 목조 건물, 빵 굽는 시설, 시장이 확인됐다. 도시 곳곳에 놓인 큰 토기 항아리는 주민과 방문자에게 물을 공급하는 용도로 보인다. 도시 입구에는 진흙벽돌과 목재로 만든 문이 있었고, 그 양식은 오늘날 누비아 가옥에 남아 있다. 도시 중심 가까이에는 정교한 안뜰을 갖춘 왕실 구역이 들어섰다. 방어 시설로는 도랑과 흙벽과 망루를 갖춘 성벽이 확인됐다.
가장 눈에 띄는 구조물은 서쪽 데푸파다. 진흙벽돌로 쌓은 높이 18미터의 건물이고, 여러 층과 옥상 대지로 이어지는 내부 계단, 지하 공간, 기둥이 선 방과 통로와 벽화와 사당을 갖췄다. 신전으로 기능한 것으로 본다. 데푸파는 세계에 세 기만 남아 있고 모두 케르마 일대에 있다.
도시 동쪽 3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는 묘역이 있다. 거의 천 년 동안 케르마 지배자들의 매장지로 쓰였고, 확인된 무덤이 3만 기가 넘는다. 일부 무덤은 큰 봉분으로 덮였고, 여러 무덤 둘레에 소 두개골 수십 개가 늘어서 있다. 이 지역의 목축 문화를 보여주는 배치다. 왕묘 가운데는 순장자를 수백 명 함께 묻은 사례가 있다.
케르마의 인구는 기원전 1700년 무렵 최소 1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집트와 다른 방향에서 청색 파이앙스를 다루는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했고, 유약을 입힌 규암과 건축용 상감 세공을 남겼다.
이 왕국에는 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케르마에 관한 정보는 발굴 자료와 이집트 쪽 기록에서만 나온다. 이집트 제13왕조 시기 이집트의 힘이 약해지자 케르마가 세력을 넓혀 상·하 누비아를 통합했고, 기원전 1450년 무렵 이집트 신왕국에 정복되면서 끝났다.
목록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면 케르마는 도시와 기념 건축과 계층과 원거리 교역을 갖췄고 문자만 없다. 차일드의 열 가지 가운데 아홉을 충족한다.
말리 남서부 니제르 내륙 삼각주, 오늘날의 젠네에서 남동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젠네제노가 있다. 길이 800미터, 높이 6~8미터의 취락 언덕이다.
이 지역에 관한 통설은 오래 단순했다. 젠네가 13세기 중반 사하라 횡단 교역의 산물로 팀북투와 함께 생겼다는 설명이다. 8세기 창건을 말하는 구전은 근거 없는 것으로 취급됐다.
로더릭 매킨토시와 수전 키치 매킨토시 연구진의 발굴이 이 그림을 바꿨다. 기원전 3세기에 이미 철을 만들어 쓰는 사람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초기 취락은 유적 중앙의 몇 헥타르에 그쳤으나 기원후 1천년기 동안 빠르게 커져 서기 750년에서 1100년 사이에 33헥타르를 넘겼다. 주변 1천 100제곱킬로미터 범위의 지표 조사가 이 결과를 뒷받침한다.
교역도 통설보다 훨씬 이르다. 이 지역 충적 평야에는 돌도 구리도 철광석도 없는데, 서기 400년 무렵의 층에서 먼 곳에서 들여온 돌과 철과 구리가 나온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있다. 공공 건축이 없고, 서열이나 계층을 가려낼 만한 흔적이 없다. 대신 젠네제노 주위에 비슷한 시기의 취락 언덕이 여럿 바짝 붙어 무리를 이룬다.
매킨토시 연구진은 이 배치를 하나의 중심이 주변을 거느리는 형태 대신 여러 취락이 기능을 나눠 맡으며 모여 있는 형태로 해석했다. 직업 집단마다 별도의 취락을 이루고, 그 집합이 전체로서 도시의 기능을 수행했다는 설명이다. 이 해석은 수직적 위계 없이도 복잡한 분업이 성립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반론도 분명하다. 마이클 스미스는 이런 해석이 위계를 나쁜 것으로, 분산된 조직을 좋은 것으로 미리 전제한 뒤 자료를 그 틀에 맞춘다고 비판했다. 엘리트를 사회적 기생자로 부르고 중앙 권력을 부정적으로 서술하는 언어 자체가 분석보다 입장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이 논쟁은 3편에서 다룬 문제와 같은 구조다. 궁전과 계층 무덤이 나오지 않는다는 관찰을 위계의 부재로 읽을 것인가, 아직 찾지 못한 것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알아보는 형태와 다른 위계로 읽을 것인가의 문제다.
에티오피아 북부 티그레 고원의 악숨은 기원후 1세기 무렵 성립해 10세기 무렵까지 이어졌다. 로마와 인도를 잇는 교역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인도양 교역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악숨이 다른 사례와 구별되는 점은 자체 화폐다. 엔두비스 왕의 이름이 새겨진 초기 주화가 금과 은으로 주조됐고, 로마 제국에서 쓰이던 중량 기준을 따랐다. 처음에는 남아라비아 계통 종교의 상징인 초승달과 원반을 새겼다. 에자나 왕이 기원후 340~356년 무렵 기독교로 개종한 뒤에는 그 자리에 십자가가 들어간다. 주화 앞뒤로 왕의 초상이 들어가고 그 옆에 이 지역 곡물인 테프가 새겨진다. 금화는 주로 그리스어로, 은화와 동화는 게에즈 문자로 새겼다. 금화는 수출용, 은화와 동화는 내수용이었다는 뜻이다. 에자나 시기의 주화에는 그리스어로 ‘이것이 이 나라를 기쁘게 하기를’이라는 문구가 들어간다.
악숨의 또 다른 표지는 석비다. 화강암 한 덩어리를 깎아 세운 기둥으로, 북쪽 석비 공원에 수백 기가 서 있다. 에자나 왕의 석비는 높이 21미터이고, 무너진 대석비는 33미터, 이른바 악숨 오벨리스크는 24미터다. 밑동에 가짜 문을 새기고 사면에 창문 모양 구멍을 냈다. 기독교가 자리잡은 뒤 석비 건립은 멈춘다.
에자나 석비는 게에즈어와 남아라비아의 사바어와 그리스어 세 언어로 새겨져 있다. 개종과 주변 지역 정복을 기록했고, 정복 대상에는 메로에가 들어간다.
악숨은 목록의 기준을 모두 충족한다. 도시와 기념 건축과 문자와 화폐와 원거리 교역과 국가 조직을 갖췄다. 그런데도 고대 문명 목록에 들어가지 않는다. 시기가 늦다는 것이 이유라면, 같은 논리로 기원전 1600년에 시작한 상나라도 량주보다 1천 700년 늦다.
짐바브웨 고원의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화강암 블록을 모르타르 없이 쌓아 올린 벽과 창고와 방어 시설로 이뤄져 있다. 수천 명이 살았고 정치와 경제와 의례의 중심이었다. 1980년 독립한 나라가 이 유적의 이름을 국호로 삼았고, 이곳에서 나온 동석 조각상이 국기에 들어가 있다.
이 유적의 학술사는 다른 사례와 성격이 다르다. 여기서 다툰 것은 연대나 규모가 아닌 건설자였다.
19세기 말 유럽인들이 이 유적을 보고 내놓은 설명은 페니키아인이나 아라비아인이나 성서의 시바 여왕 같은 외래 세력이 지었다는 것이었다. 1905년 데이비드 랜들맥아이버가 층위를 따라 발굴하고 세부까지 아프리카적이라고 결론지었지만, 리처드 홀을 비롯한 정착민 여론이 강하게 반박했다. 그 결과 더 엄밀한 조사를 위해 거트루드 케이턴톰프슨이 파견됐고, 1929년의 발굴에서 그도 반투어 사용자들이 기독교 시대에 지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절대연대를 잴 방법이 없었으므로 비판자들은 이 결론을 계속 물리칠 수 있었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이 도입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973년 피터 갈레이크는 이 유적이 12세기에서 15세기 사이 오늘날 쇼나족 조상들이 지은 것임을 확인하는 연구를 냈다. 지금은 방사성탄소 연대와 물질 자료를 종합해 융성기를 서기 1100년에서 1450년 사이로 본다. 최근에는 샤드레크 치리쿠레 연구진이 21개의 방사성탄소 연대와 제한적인 층위 정보와 연대를 알 수 있는 수입품을 베이즈 통계로 묶어 더 정밀한 편년을 제시했다.
백인 소수 정권이 통치하던 로디지아 정부는 1970년대까지 고고학자들에게 이 결론을 발표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발굴 자료와 정치적 요구가 정면으로 충돌한 드문 기록이다.
남은 논쟁도 있다. 왕조의 구체적 계보가 확인되지 않았고, 1450년 무렵 쇠퇴한 이유도 확정되지 않았다. 토지가 고갈됐다는 설명과 교역 중심이 북쪽 무타파로 옮겨 갔다는 설명이 함께 제시된다. 초기 발굴자들이 상당한 퇴적층을 제거해 버려 재조사가 어렵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 사례 | 시기 | 도시 | 기념 건축 | 문자 | 계층 |
|---|---|---|---|---|---|
| 케르마 | 기원전 2500~1500년 | 있음 | 데푸파 18미터 | 없음 | 왕묘와 순장 |
| 젠네제노 | 기원전 3세기~서기 1100년 | 33헥타르 | 없음 | 없음 | 확인되지 않음 |
| 악숨 | 서기 1~10세기 | 있음 | 석비 21~33미터 | 게에즈·그리스어 | 왕과 주화 |
| 그레이트 짐바브웨 | 서기 1100~1450년 | 있음 | 석조 대성벽 | 없음 | 있음 |
표를 보면 네 사례가 각각 다른 칸을 비운다. 케르마는 문자가 없고, 젠네제노는 기념 건축과 계층이 없으며, 악숨은 모두 갖췄고,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문자가 없다. 어느 기준을 필수로 삼느냐에 따라 목록에 들어가는 사례가 달라진다.
목록에서 빠진 이유는 셋으로 나뉜다.
기준 때문에 빠진 경우. 케르마와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문자가 없다. 문자를 문명의 요건으로 삼은 차일드식 기준에서는 자동으로 탈락한다. 같은 기준에서 안데스의 카랄-수페도 탈락한다.
시기 때문에 빠진 경우. 악숨과 젠네제노와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고대 문명’이라는 범주가 다루는 시간대보다 늦다. 그런데 이 범주의 경계 자체가 명시된 적이 없다. 기원전 1046년까지 이어진 상나라가 들어가고 기원후 1세기에 시작한 악숨이 빠지는 경계선이 어디인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조사 때문에 빠진 경우. 젠네제노는 1970년대 후반에야 체계적으로 발굴됐고, 그 전까지 이 지역의 도시는 13세기 이후의 것으로 여겨졌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발굴 결과가 정치적 이유로 억눌렸다. 목록이 굳어진 20세기 중반에 이 자료들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인정되지 않았다.
세 번째 이유가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만든 면이 있다. 목록은 그것을 만들 당시 알려진 자료로 짜였고, 그 자료의 분포는 어디를 먼저 팠는가에 좌우됐다.
이집트 남쪽 제3폭포에서 케르마가 기원전 2500년부터 천 년 동안 이어졌고, 무덤이 3만 기 넘게 확인되며, 높이 18미터의 진흙벽돌 신전이 남아 있다. 말리의 젠네제노는 기원전 3세기부터 철을 다뤘고 서기 750년 이후 33헥타르를 넘겼지만 공공 건축도 계층의 흔적도 나오지 않는다. 악숨은 로마 중량 기준에 맞춘 금화를 주조했고 세 언어로 새긴 석비를 남겼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서기 1100년부터 1450년까지 화강암 대성벽을 쌓았고, 그 건설자가 누구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20세기 내내 이어졌다.
넷 가운데 어느 것도 고대 문명 목록에 들어가지 않는다.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사례마다 다르고, 그 이유들은 모두 목록을 만든 기준 쪽에 있다. 문자를 요건으로 삼았기 때문이고, 시간대의 경계를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목록이 굳어진 시점에 이 자료들이 아직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앞선 여섯 편에서 반복된 구조와 같다. 네 발상지라는 목록이 자료보다 편집에서 나온 것처럼, 아프리카가 이집트 한 칸으로 줄어든 것도 대륙의 과거가 비어 있어서가 아니다. 기준을 바꾸면 목록이 바뀌고, 조사가 진행되면 기준을 다시 따져야 한다.
앞으로 확인될 지점은 세 곳이다. 케르마 쪽에서는 보네 연구진이 인근 두키 겔에서 발굴을 이어 가고 있고, 이집트가 남쪽으로 세력을 뻗기 전 이 지역 사회의 성격이 더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젠네제노 쪽에서는 주변 취락 무리 전체를 같은 기준으로 조사해야 중심 없는 도시라는 해석을 검증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젠네제노 본체의 발굴 자료가 주를 이룬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초기 발굴에서 제거된 퇴적층이 많아 새 자료를 얻기 어렵지만, 남아 있는 부분을 확인하는 조사와 베이즈 편년 작업이 진행 중이다. 왕조 계보와 쇠퇴 원인은 이 작업의 결과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