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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에서 확인되는 것과 확인되지 않는 것 — 마을과 무덤은 나오는데 사람은 나오지 않는 이유

예루살렘 동쪽 알 에이자리야에서는 1세기 무덤과 4세기 교회터가 나왔다. 그런데 그 발굴은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개인에게 닿지 못한다. 이 한계의 원인은 1세기 유대의 자료가 개인을 남기는 방식에 있다.

2026년 9월 12일

안내판은 집터를 가리키고 보고서는 그러지 않는다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 남동쪽 비탈에 알 에이자리야라는 마을이 있다.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에 속하며 이름은 아랍어로 '나사로의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이 복음서의 베다니로 여겨지는 마을이다. 마을 한가운데에 나사로의 무덤으로 불리는 바위굴이 있고 순례객이 계단을 내려가 안을 볼 수 있다.

현지 안내와 순례 자료는 이 무덤 외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이라 불리는 지점도 함께 소개한다. 문제는 그 소개가 어디까지 자료에 받쳐 있느냐다. 이 글이 확인하려는 논지는 하나다. 발굴은 베다니라는 마을과 4세기 이후의 기념 전통을 확정하지만 마르다나 마리아라는 개인에게는 닿지 못하며, 그 한계는 1세기 유대 사회가 개인을 기록에 남기는 방식에서 나온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 프란치스코회가 팠다

이 마을에서 이루어진 본격적인 발굴은 프란치스코회 성지관리단이 주관했다. 발굴 책임자는 실베스터 존 살러였고, 작업은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진행되었다. 보고서는 1957년 예루살렘에서 『베다니 발굴(1949-1953)』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으며, 프란치스코회 성서연구원 간행물 총서에 들어 있다.

이 발굴에서 나온 것은 이렇다. 나사로의 무덤으로 불리는 지점의 동쪽에서 교회 네 채가 겹쳐 선 흔적이 나왔다. 가장 오래된 것은 4세기 또는 5세기 것이다. 그 밖에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들, 집터, 포도즙 틀, 물 저장고, 곡물 저장 구덩이가 나왔다. 토기는 페르시아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의 것이 확인되었다.

보고서의 색인에는 유골함, 나사로의 무덤, 나병환자 시몬, 마르다 같은 항목이 올라 있다. 발굴자가 이 유적을 복음서 기록과 연결해 서술했다는 뜻이다. 다만 색인에 이름이 오른 것과 그 인물이 물질 자료로 확인된 것은 다른 문제다.

교회 건물의 내력은 이렇게 정리된다. 4세기에 세운 첫 교회는 무덤을 건물 입구 쪽에 두는 배치였다. 이 건물이 지진으로 무너진 뒤 동쪽으로 옮겨 다시 세웠고 부지도 넓혔다. 12세기에 다시 확장되었으며, 예루살렘의 멜리상드 왕비가 무덤 남쪽에 베네딕도회 수녀원을 세웠다. 이 수녀원은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봉헌되었다. 14세기에는 두 교회가 모두 무너졌고 그 자리에 모스크가 들어섰다. 원래 무덤 입구가 모스크에 막혀서, 16세기 중엽 프란치스코회가 22단짜리 계단을 새로 뚫었다. 오늘날 순례객이 내려가는 계단이 그것이다. 무덤 안쪽 방은 가로세로 2미터 남짓이고 원래 모습은 여러 차례의 개축으로 훼손되었다.

이 결과가 확정하는 것은 두 가지다. 이 마을이 실재했고 사람이 살았다는 것, 그리고 늦어도 4세기에는 기독교인들이 이 지점을 나사로와 그 가족의 장소로 기념했다는 것이다. 확정하지 못하는 것도 분명하다. 그 무덤이 실제 나사로의 무덤인지, 자매가 살던 집이 어디였는지다.

4세기 기록은 무덤을 말하고 자매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이 마을을 기독교 성지로 기록한 가장 이른 문헌은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가 남긴 『오노마스티콘』이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을 알파벳 순으로 정리하고 그 지명이 지금 어디에 해당하는지 적은 책이며, 보통 324년 이전에 편찬된 것으로 본다. 4세기 말에 히에로니무스가 라틴어로 옮기면서 자기 시대의 정보를 덧붙였다.

이 책의 베다니 항목은 짧다. 예루살렘에서 2마일 떨어진 감람산 비탈의 마을이며 구주가 나사로를 살린 곳이라고 적고, 나사로의 자리를 지금도 가리켜 보인다고 덧붙인다. 히에로니무스가 추가한 대목에서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밝힌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항목에 나오지 않는다.

333년경 보르도에서 예루살렘까지 다녀온 익명의 순례자가 남긴 여정기에도 나사로가 묻힌 지하 묘실이 기록되어 있다.

자매가 이름으로 등장하는 가장 이른 현장 기록은 에게리아의 여행기다. 에게리아는 히스파니아 출신 여성으로 381년에서 384년 사이 예루살렘 일대를 순례하고 고향의 여성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11세기에 몬테카시노에서 필사된 아레초 사본 하나로만 전해지고 앞뒤가 결락되어 있다.

Lazarium autem, id est Bethania, est forsitan secundo miliario a ciuitate. Euntibus autem de Ierusolima in Lazarium forsitan ad quingentos passus de eodem loco ecclesia est in strata in eo loco, in quo occurrit Domino Maria, soror Lazari.

라자리움, 곧 베다니는 도시에서 대략 2마일 거리에 있다. 예루살렘에서 라자리움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그곳에서 대략 500걸음 못 미쳐 길가에 교회가 하나 있는데, 나사로의 자매 마리아가 주님을 맞은 자리다.

에게리아, 『여행기』 29장 3절에서 4절. 라틴어 본문은 W. 헤레우스 판(하이델베르크, 1908)을 따른다. '라자리움'은 나사로의 무덤에 세운 교회와 그 일대를 함께 가리키는 이름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그 교회가 무엇을 기념하는 자리로 설정되었느냐다. 에게리아는 마리아가 주님을 맞은 자리라고 적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를 먼저 맞으러 나간 사람은 마르다이고(20절), 마리아는 뒤에 같은 자리로 나간다(30절에서 32절). 4세기 말 예루살렘 교회의 전례에서 이 지점에 붙은 이름은 마리아였다.

390년경 히에로니무스가 이 일대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기록한 것도 같은 시기다. 그는 당시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다.

이 문헌들을 모아 놓으면 시간표가 만들어진다. 4세기 초에 이곳은 이미 나사로를 기념하는 장소였고, 4세기 말에는 교회 건물과 전례 행렬이 자리 잡았다. 그 이전에 대한 기록은 없다.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게도 이 가족은 나오지 않고, 로마 측 기록에도 없다.

유대인은 시신을 두 번 묻었다

요한복음 11장의 장면을 이해하려면 당시 예루살렘 일대의 매장 관습을 알아야 한다. 이 관습은 발굴로 충분히 확인된 영역이다.

매장은 두 단계였다. 먼저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시신을 안치한다. 무덤 벽에는 깊이 1.8미터가량, 폭과 높이 50센티미터에서 60센티미터가량의 가로 구멍을 여러 개 파는데, 이것을 히브리어로 코킴이라 한다. 여기에 시신을 밀어 넣는다. 벽을 아치 모양으로 파고 그 아래 선반을 만드는 방식도 있고 이것을 아르코솔리움이라 한다. 무덤 입구는 사람이 몸을 굽혀야 들어갈 만큼 작고, 네모난 돌로 막은 뒤 작은 돌과 회반죽으로 틈을 메운다. 무덤 전체가 주변 비탈에 묻혀 눈에 띄지 않게 마감되는 경우가 많다.

약 1년 뒤 살이 썩고 나면 가족이 다시 무덤에 들어가 뼈를 모아 석회암 상자에 담는다. 이것을 유골함이라 한다. 이런 이차 매장 관습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예루살렘 일대에서 널리 쓰였다. 유골함은 예루살렘에서만 수천 점이 나왔고 상당수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유골함 히브리어로 글로스카마, 영어로 오서리라 부르는 돌 상자다. 길이 60센티미터 안팎이며 뚜껑이 있다. 겉면에 장미 문양이나 기하 무늬를 새긴 것이 많다. 이름을 새긴 글씨는 대개 거칠다. 어두운 굴 안에서 가족이 직접 새겼기 때문이다. 언어는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가 섞여 나온다. 이름을 새긴 이유는 기념보다 식별에 있었다. 한 무덤을 여러 세대가 함께 쓰므로 누구의 뼈인지 표시해 두어야 했다.

이 배경에서 요한복음 11장의 세부가 제자리를 찾는다. 38절에서 무덤을 막은 돌을 치우라고 하는 장면은 첫 단계의 무덤을 여는 일이다. 굴리는 원반형 돌은 소수의 큰 무덤에만 있었고, 보통은 네모난 돌로 입구를 덮었다. 44절에서 나사로가 손발이 묶이고 얼굴에 수건을 두른 채 나오는 것도 첫 단계의 상태다.

나흘이라는 기간에 대해서는 설교와 주석에서 자주 인용되는 설명이 있다. 유대 전승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흘간 시신 곁에 머물다 떠난다는 관념이 있어서, 나흘째는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을 뜻한다는 것이다. 근거로 드는 자료는 예루살렘 탈무드 예바못 편과 상례를 다룬 소논문 세마홋 등이다.

이 설명에는 연대 문제가 있다. 인용되는 자료들은 예수 시대보다 몇 세기 뒤에 편찬되었다. 1세기에 그 관념이 이미 통용되었는지는 이 자료들로 확정되지 않는다. 요한복음 본문 자체는 이 전승을 언급하지 않고, 마르다가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것으로 부패가 진행되었음을 나타낼 뿐이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네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유골함에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성경 인물의 유골함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오래 있었다. 1953년에서 1955년 사이 감람산의 도미누스 플레빗 유적에서 이름이 새겨진 유골함 40여 점이 나왔고 거기에 마리아, 마르다, 마태, 요셉, 예수가 모두 있었다. 2007년에는 예루살렘 남쪽 탈피오트에서 나온 유골함 무리가 예수 가족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크게 논란이 되었다.

이 기대가 왜 성립하지 않는지는 이름 통계가 답한다. 이스라엘 학자 탈 일란이 이 시기 유대 지역 사람들의 이름을 전수 조사했다. 1989년 학술지 『유대학 연구』 40권 186쪽에서 200쪽에 실은 논문에서 그는 자신이 찾은 여성 247명 가운데 58명 또는 59명이 마리아였다고 보고했다. 전체의 23.5퍼센트다. 살로메가 61명으로 그다음이었다. 그는 2002년에 이 작업을 확장해 『고대 후기 유대인 이름 사전』 1권으로 출간했으며, 대상 범위는 기원전 330년에서 기원후 200년 사이의 팔레스타인이다.

리처드 보컴이 2006년 『예수와 목격자들』에서 이 자료를 다시 정리했다. 그가 집계한 수는 이름 521종에 걸친 2,953회의 출현이고, 그 가운데 남성이 이름 447종에 2,625회, 여성이 이름 74종에 328회다. 여성 이름은 대상 표본이 작아 남성 쪽보다 신뢰도가 낮다는 점을 그 자신이 밝혔다.

이 표본에서 나온 비율은 이렇다.

항목비율
가장 흔한 남성 이름 2개(시몬, 요셉)를 가진 남성15.6퍼센트
가장 흔한 남성 이름 9개를 가진 남성41.5퍼센트
가장 흔한 여성 이름 2개(마리아, 살로메)를 가진 여성28.6퍼센트
가장 흔한 여성 이름 9개를 가진 여성49.7퍼센트

여성 이름 순위에서 마르다는 마리아, 살로메, 셸람지온에 이어 네 번째다. 남성 이름 순위에서 나사로의 본래 형태인 엘르아살은 시몬, 요셉에 이어 세 번째다. 베다니 가족 세 사람의 이름이 모두 당대 최상위권 이름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유골함에서 마리아나 마르다나 엘르아살이라는 이름이 나와도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여성 넷 중 한 사람이 마리아였던 사회에서 이름 하나로 개인을 특정하려면 다른 식별 정보가 함께 있어야 한다. 탈피오트 무덤 논쟁에서 반론의 뼈대가 된 것이 이 통계였다.

보컴은 같은 자료를 반대 방향으로도 썼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름의 분포가 팔레스타인 전체의 분포와 잘 맞는다는 관찰이다. 남성 쪽에서 가장 흔한 두 이름을 가진 비율이 인구 전체에서 15.6퍼센트,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18.2퍼센트로 가깝다. 그는 이 일치가 이 이야기들이 그 시대 그 지역에서 나왔음을 가리키는 정황 근거라고 보았다. 개인을 확인하는 근거는 아니고 전승의 배경을 확인하는 근거다.

고고학이 개인에게 닿지 못하는 것은 이 유적만의 일이 아니다

신약 인물 가운데 고고학이나 외부 기록으로 직접 확인되는 사람은 통치자나 대제사장급이다. 1961년 카이사레아에서 나온 돌에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헤롯 가문은 건축물과 주화로 확인되며, 1990년 예루살렘 남쪽에서 나온 장식된 유골함에는 가야바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공직에 있었고 이름이 공적 기록물에 남을 자리에 있었다.

베다니의 자매 같은 사람은 그 자리에 없다. 공직도 재산 기록도 남기지 않았고, 유골함을 남겼다는 기록조차 없다. 유골함이 남았다 해도 앞의 이름 통계 때문에 특정할 수 없다.

이 구조를 뒤집어 읽으면 안 된다.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은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1세기 유대 지역에 살던 사람의 대다수가 같은 이유로 확인되지 않는다. 반대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 있었다는 뜻도 아니다. 자료가 판정 수단을 제공하지 않는 상태이며, 그 상태를 어느 쪽으로도 메우지 않는 것이 자료를 다루는 방식이다.

이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가 실패한 사례가 탈피오트 무덤이다. 2007년 주장의 구조는 흔한 이름 여럿이 한 무덤에 모여 있을 확률을 계산하는 것이었다. 반론은 그 계산의 전제를 겨눴다. 이름이 흔할수록 우연한 조합의 확률이 높아지고, 어느 이름을 포함하고 어느 이름을 제외할지가 계산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다. 통계가 개인 식별의 도구가 되려면 표본과 선택 기준이 먼저 고정되어야 한다. 고대 이름 자료에서는 그것이 고정되지 않는다.

안내판과 발굴 보고서가 갈라지는 지점

지금까지 본 것을 알 에이자리야의 현재 안내에 대보면 어디까지가 자료이고 어디부터가 전승인지 구분된다.

자료에 받쳐 있는 것은 이렇다. 이 마을이 복음서의 베다니에 해당한다는 비정, 예루살렘에서 약 2마일 거리라는 위치, 바위를 판 무덤이 그 시대 유대인 매장 방식과 일치한다는 것, 4세기 이후 기독교인이 이 지점을 나사로 기념 장소로 삼았다는 것, 그 위에 교회가 네 차례 지어졌다는 것이다.

전승에 속하는 것은 이렇다. 오늘날 계단으로 내려가는 그 굴이 실제 나사로가 묻혔던 무덤이라는 것, 특정 지점이 자매의 집터라는 것, 인근의 다른 지점이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는 것이다. 이 비정들은 4세기 기념 전통에서 나왔고 그 전통이 1세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는 없다.

여기에 방법상의 제약이 하나 더 있다. 성지의 지점 비정은 순례 수요가 만든다. 순례객은 기념할 지점을 원하고 현지는 그것을 제공한다. 4세기에 무덤이 확정되자 그 주변에 집터와 만남의 자리가 차례로 지정되었고, 12세기 십자군 시대에 수녀원이 들어서면서 자매의 이름이 건물에 붙었다. 이 과정은 기록으로 추적되지만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결론 — 발굴은 마을을 확정하고 사람은 확정하지 않는다

알 에이자리야에서 나온 자료는 베다니라는 마을의 실재와 4세기 이후의 기념 전통을 확정한다.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개인은 확정하지 못한다. 이 글이 확인한 바는 세 갈래로 정리된다.

첫째, 발굴 결과는 마을 단위까지 닿는다. 1949년에서 1953년 사이 살러가 이끈 프란치스코회 발굴에서 겹쳐 지은 교회 네 채, 바위를 판 무덤들, 집터, 포도즙 틀, 물 저장고가 나왔다. 가장 오래된 교회는 4세기 또는 5세기이며 토기는 페르시아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까지 올라간다. 문헌 쪽에서는 에우세비우스의 『오노마스티콘』, 보르도 순례자의 여정기, 에게리아의 여행기, 히에로니무스의 기록이 4세기 초부터 말까지 이 지점의 기념 전통을 연속으로 증언한다. 그 이전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다.

둘째, 개인 식별이 막히는 이유는 이름 통계에 있다. 탈 일란의 조사에서 이 시기 유대 지역 여성의 23.5퍼센트가 마리아였고, 보컴이 정리한 수치에서 여성의 28.6퍼센트가 마리아 아니면 살로메였다. 마르다는 여성 이름 4위, 나사로의 본래 형태 엘르아살은 남성 이름 3위다. 유골함에 이 이름들이 나와도 개인을 특정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셋째, 이 한계는 유적의 문제가 아니다. 1세기 유대 지역에서 고고학이나 외부 기록으로 개인이 확인되는 사람은 빌라도, 헤롯 가문, 가야바처럼 공직에 있던 인물이다. 공직도 재산 기록도 없는 사람은 같은 방식으로 확인되지 않으며, 이는 베다니 가족만의 사정이 아니다. 확인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없었다는 뜻도 아니고 있었다는 뜻도 아니다.

이 결과가 남기는 실질적인 물음은 성지의 안내 방식이다. 현지 안내와 순례 자료는 자료로 확정된 것과 4세기 이후 전승으로 지정된 것을 같은 어조로 소개한다. 두 층을 구분해 표시하는 일은 각 층이 무엇에 근거하는지를 밝히는 작업에 해당한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이 마을에서 앞으로 새 발굴이 이루어져도 개인 식별의 벽은 그대로 남는다. 이름 통계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베다니 가족에 관해 새로운 판정 자료가 나올 영역은 사본 쪽이다. 요한복음 11장과 12장의 본문 자체가 사본마다 흔들린다는 사실이 최근 20년 사이에 다시 주목받았고, 그 논의는 땅을 파는 일과 무관하게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