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과 연대측정이 성경을 확증했다는 말과 반증했다는 말이 함께 돌아다닌다. 두 말은 같은 자료를 두고 나온다. 자료를 시대순으로 늘어놓으면 그림이 뚜렷해진다. 기원전 9세기 이후의 왕국 기록과 1세기 로마 속주 행정에는 대응하는 비문과 연대기가 여럿 있고, 그보다 앞선 창조·족장·출애굽·정복 서술에는 대응 자료가 없거나 어긋난다. 그 사이에 판정이 열려 있는 구간도 있다. 낙타 뼈, 여리고의 곡물 낟알, 메사 비석의 깨진 한 줄, 남극과 일본 호수의 연속 층, 그리고 세 차례 뒤집힌 인류 집단 크기 추정을 차례로 놓고, 확증의 분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1881년에 정해진 하나의 입증 규칙이 그 분포를 교리 안에서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따진다.
무오설(無誤說, inerrancy)은 성경에 틀린 내용이 없다는 주장이다. 여기까지는 여러 기독교 전통이 함께 말하지만, "틀림"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느냐에서 입장이 나뉜다. 신앙과 구원에 관한 가르침에서만 틀림이 없다고 보는 쪽을 무류설(無謬說, infallibility)이라 부른다. 역사와 자연에 관한 진술까지 포함해 틀림이 없다고 보는 쪽이 좁은 뜻의 무오설이다.
1978년 10월 시카고에서 국제성경무오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n Biblical Inerrancy, ICBI)가 소집한 사흘간의 회의는 이 구분을 문서로 확정했다. 여기서 채택된 「성경 무오에 관한 시카고 선언」에는 200명이 넘는 복음주의 학자가 서명했고, 이후 영어권 복음주의에서 무오설의 기준 문안으로 쓰인다. 제12조는 무오와 무류가 영적·종교적·구원에 관한 주제에만 한정되어 역사와 과학 영역의 진술은 빠진다는 견해를 명시적으로 부정한다. 같은 조항은 지구의 역사에 관한 과학 가설을 창조와 홍수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뒤집는 데 쓰는 것도 부정한다.
이 문장 때문에 고고학과 자연과학의 자료가 검토 대상이 된다. 무오설이 스스로 역사와 과학의 영역을 자기 주장 범위 안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무류설을 택하면 이 검토는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 1965년 11월 18일 공포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데이 베르붐」(Dei Verbum) 11항은 성경의 책들이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nostrae salutis causa) 성경에 담기기를 원하신 진리를 확고하고 충실하게 오류 없이 가르친다고 진술한다. 공의회 기록을 보면 이 구절은 표결 끝에 나온 타협안이다. 앞선 초안에는 "구원에 관한"(salutaris)이라는 형용사가 "진리" 앞에 붙어 있었고, 그 형용사를 빼자는 표결이 세 차례 있었으나 모두 3분의 2를 얻지 못했다. 이후 73명의 교부가 형용사를 지우는 대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경에 담기기를 원하신"이라는 관계절을 넣자고 제안했고, 그 문안이 확정본이 되었다. 이 구절이 무오의 범위를 구원의 진리로 제한한 것인지, 성경이 기록된 목적만 밝힌 것인지는 가톨릭 신학 안에서 지금도 다투는 문제다.
검토 범위 밖에 있는 것도 먼저 정해 두어야 한다. 자연과학은 자연 안의 원인만으로 현상을 설명하는 방법을 쓴다. 신이 존재하는지, 기적이 일어났는지는 이 방법으로 판정되지 않는다. 홍해가 갈라졌다는 서술을 두고 과학이 할 수 있는 말은 자연적 기작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까지이며, 초자연적 개입이 없었다는 결론은 거기서 나오지 않는다. 아래에서 다루는 것은 연대, 인구 규모, 도시의 존재 여부, 왕의 이름과 조공 액수처럼 물증이 남을 수 있는 진술로 한정된다.
시카고 선언 제10조는 영감이 엄밀히 말해 성경의 원본(autographa) 본문에만 적용되며, 사본과 번역은 원본을 충실히 반영하는 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진술한다. 원본은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 이 조항의 문안은 1881년 4월 『프레스비테리언 리뷰』에 실린 아치볼드 하지와 벤저민 워필드의 공동 논문 「영감」(Inspiration, 225~260쪽)에서 나왔다.
이 잡지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하지와 유니언 신학교의 찰스 브릭스가 함께 편집했고, 유럽에서 들어온 성경 비평을 두고 양쪽 진영이 네 편씩 여덟 편을 연재하기로 한 기획의 무대였다. 「영감」은 그 첫 편이다. 브릭스는 10여 년 뒤 미국 장로교에서 이단 재판을 받고 목사직이 정지되며, 유니언 신학교는 교단을 떠난다. 워필드는 교단의 주도권을 놓고 진행 중이던 대결의 한복판에서 이 논문을 썼다. 논문이 무오의 정의보다 반박 요건을 훨씬 세밀하게 규정한 것은 그 상황과 관련이 있다.
하지와 워필드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려는 쪽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세 단계로 적었다.
(1) Let it be proved that each alleged discrepant statement certainly occurred in the original autograph of the sacred book in which it is said to be found. (2) Let it be proved that the interpretation which occasions the apparent discrepancy is the one which the passage was evidently intended to bear. … (3) Let it be proved that the true sense of some part of the original autograph is directly and necessarily inconsistent with some certainly known fact of history, or truth of science, or some other statement of Scripture certainly ascertained and interpreted.
(1) 문제가 된다는 각각의 진술이 그 책의 원본에 확실히 있었음을 증명하게 하라. (2) 불일치처럼 보이게 만드는 그 해석이 해당 구절이 담도록 의도된 뜻임을 증명하게 하라. … (3) 원본 어느 부분의 참뜻이 역사의 확실히 알려진 사실이나 과학의 진리, 또는 확실히 확정되고 해석된 성경의 다른 진술과 직접적이고 필연적으로 모순됨을 증명하게 하라.
아치볼드 하지·벤저민 워필드, 「영감」, 『프레스비테리언 리뷰』 1881년 4월, 「정당한 추정」 절. 번역은 직접 옮김
첫 단계가 나머지 둘을 지배한다. 현존 사본에 있는 진술을 지적해도, 그것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원본에 있었음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 증명할 방법이 없으므로 반박은 첫 단계에서 멈춘다. 같은 논문의 다른 대목에서 두 사람은 이 규칙을 더 짧게 되풀이한다. 영감된 것은 원본 본문뿐이므로, 원래부터 본문에 있었다고 증명되지 않는 오류는 주장될 수 없다고 적었다. 이어지는 세 번째 단계는 "필연적으로 모순됨"을 요구한다. 조화시킬 가능성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모순은 성립하지 않는다.
1881년에 두 사람이 직접 이 절차를 적용한 사례가 누가복음 2장 2절의 인구조사다. 누가는 예수가 구레뇨(퀴리니우스)가 시리아를 다스릴 때 시행된 첫 호적 등록 중에 태어났다고 적었다. 로마 기록상 구레뇨의 시리아 총독 재임은 기원후 6~7년이고, 마태복음 2장 1절은 예수가 헤롯 왕 때 태어났다고 하며 헤롯은 기원전 4년에 죽었다. 하지와 워필드는 독일 고전학자 아우구스트 빌헬름 춤트가 구레뇨의 시리아 총독 재임이 두 번이었음을 거의 증명해 냈다고 쓰고, 여기에 누가가 예수의 출생을 인구조사가 진행되던 기간 안에 놓았을 뿐 총독 재임 시점과 묶지는 않았다는 독법을 더해 문제를 해소했다. 145년이 지난 지금 이 대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뒤에서 다시 본다.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에는 각 인물이 몇 살에 아들을 낳고 몇 해를 더 살았는지가 적혀 있다. 이 숫자를 이어 붙여 아브라함까지 내려오고 거기서 알려진 연대에 맞추면 창조 시점이 대략 기원전 4000년에서 5500년 사이에 놓인다. 17세기 아일랜드의 어셔 대주교가 계산한 기원전 4004년이 마소라 본문 숫자를 따른 값이고, 칠십인역의 다른 숫자를 쓰면 1000년 넘게 올라간다. 어느 경로로 계산하더라도 1만 년을 넘지 않는다.
지구의 나이는 1956년 미국 지구화학자 클레어 패터슨이 정한 값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는 애리조나의 캐니언 디아블로 운석을 포함한 여러 운석과 지구 시료의 납 동위원소 조성을 비교해 45억 5000만 년이라는 값을 얻었고 오차는 7000만 년으로 잡았다(『지오키미카 에트 코스모키미카 악타』 10권 230쪽). 우주의 나이는 유럽우주국의 플랑크 위성이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측정한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자료로 계산되며, 2018년 발표된 최종 결과는 약 138억 년이다.
남극 대륙 돔 C 지점에서 유럽 공동 시추 사업이 3,200미터 넘게 뚫어 올린 얼음 기둥에는 눈이 해마다 쌓인 층이 끊기지 않고 남아 있다. 장 주젤을 비롯한 연구진이 2007년 『사이언스』 317권 793~796쪽에 보고한 바로는 이 기록이 약 80만 년을 덮는다. 지구 전체를 물에 잠기게 한 사건이 수천 년 전에 있었다면 이 층은 그 자리에서 끊기거나 교란되어야 한다. 그런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연간 층이 남는 기록은 남극 얼음만이 아니다. 독일 남부의 강 자갈층에서 나온 참나무와 소나무를 이어 붙여 만든 나이테 연대표는 1만 2000년 넘게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일본 후쿠이현 스이게쓰 호수의 바닥 퇴적층에는 봄에 규조류가 쌓이고 겨울에 점토가 쌓이는 차이 때문에 해마다 줄무늬가 생긴다. 옥스퍼드 방사성탄소연구소의 크리스토퍼 브롱크 램지가 이끈 연구진은 2006년 이 호수에서 네 곳의 시추공으로 뽑은 76미터 퇴적 기둥의 줄무늬를 세고, 퇴적층에 섞인 육상 식물 조각 800여 점을 방사성탄소로 측정했다. 2012년 『사이언스』 338권 370~374쪽에 실린 결과는 1만 1200년 전부터 5만 2800년 전까지 끊긴 구간 없는 연속 기록을 제시한다.
이 기록의 쓰임은 성경 논쟁과 무관한 데 있다. 대기 중 탄소-14 농도가 시대마다 달랐기 때문에 방사성탄소 측정값을 실제 달력 연대로 바꾸려면 연대를 따로 아는 시료가 필요하고, 나이테와 호수 줄무늬가 그 기준을 제공한다. 스이게쓰 자료는 국제 보정 곡선 IntCal의 13판과 20판에 기준 자료로 들어갔다. 앞에서 다룬 여리고와 키르벳 케이야파의 연대도 이 곡선을 거쳐 나온 값이다. 동시에 이 연속 층은 수천 년 전에 지구 전체가 물에 잠겼다는 서술과 맞지 않는다. 호수 바닥이 통째로 뒤집혔다면 줄무늬가 그 자리에서 끊겨야 한다.
창세기 1장의 하늘 구조도 검토 대상에 들어간다. 둘째 날에 만들어지는 것은 히브리어로 רָקִיעַ(라키아)이고, 어근 רקע은 금속을 두들겨 펴는 동작을 가리킨다.
וַיֹּאמֶר אֱלֹהִים יְהִי רָקִיעַ בְּתוֹךְ הַמָּיִם וִיהִי מַבְדִּיל בֵּין מַיִם לָמָיִם׃
wayyōʾmer ʾĕlōhîm yəhî rāqîaʿ bətôkh hammāyim wîhî mavdîl bên mayim lāmāyim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물 가운데 라키아가 있어 물과 물을 나누게 하라.
창세기 1:6. 레닌그라드 사본(『슈투트가르트 히브리어 성경』 대본). 낭독용 억양 기호는 뺐다. 번역은 직접 옮김
기원전 3세기 이후 그리스어로 옮긴 칠십인역은 이 낱말을 στερέωμα(스테레오마, 굳은 것)로, 4세기 말 라틴어 불가타는 firmamentum(단단한 것)으로 옮겼다. 창세기 1장 7절은 이 라키아가 그 위의 물과 그 아래의 물을 갈라놓는다고 하고, 14절은 해와 달과 별을 그 안에 둔다. 하늘 위에 물이 고여 있고 그것을 받치는 단단한 판이 있으며 천체가 그 판에 붙어 있다는 구조는 같은 시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헌에 나오는 하늘 그림과 일치한다. 현대 천문학의 대기와 우주 공간에는 대응하는 것이 없다.
이 대목을 두고 무오설을 유지하는 쪽은 성경이 관찰자의 눈에 보이는 대로 서술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해가 뜬다는 표현이 천동설을 가르치지 않듯 라키아도 하늘의 겉모습을 말한 표현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는 조건이 붙는다. 창세기 1장 7절은 라키아에 물을 나누는 기능을 부여하고, 그 물은 창세기 7장 11절에서 홍수 때 쏟아진다. 서술이 겉모습 묘사에 그치지 않고 구조와 작동까지 말하므로, 해가 뜬다는 관용 표현과 성격이 다르다.
이런 종류의 충돌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관한 규칙은 근대 이전에도 있었다. 5세기 초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 축자 해설』에서 자연에 관한 지식과 성경 해석이 부딪치는 상황을 다루었다.
Plerumque enim accidit ut aliquid de terra, de coelo, de caeteris mundi huius elementis, de motu et conversione vel etiam magnitudine et intervallis siderum, de certis defectibus solis ac lunae, de circuitibus annorum et temporum, de naturis animalium, fruticum, lapidum, atque huiusmodi caeteris, etiam non christianus ita noverit, ut certissima ratione vel experientia teneat. Turpe est autem nimis et perniciosum ac maxime cavendum, ut christianum de his rebus quasi secundum christianas Litteras loquentem, ita delirare audiat, ut, quemadmodum dicitur, toto coelo errare conspiciens, risum tenere vix possit.
땅과 하늘, 이 세계를 이루는 다른 요소들, 별들의 운동과 회전과 크기와 간격, 해와 달의 예측되는 식(蝕), 해와 계절의 순환, 동물과 초목과 돌의 성질, 그리고 이런 종류의 다른 것들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확실한 논증이나 경험으로 붙들어 알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교 문서에 근거해 말하는 듯한 태도로 이런 일을 두고 헛소리하는 그리스도인의 말을 듣고서, 말하자면 온 하늘만큼 어긋난 것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한다면, 이는 대단히 부끄럽고 해로우므로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창세기 축자 해설』 1권 19장 39절. 미뉴 편 라틴 교부 총서(PL) 34권. 번역은 직접 옮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대목에서 요구한 것은 자연에 관한 확립된 지식과 충돌하는 성경 해석을 고집하지 말라는 쪽이다. 시카고 선언 제12조 후반부는 지구 역사에 관한 과학 가설을 성경의 창조·홍수 서술을 뒤집는 데 쓰지 말라고 하여, 같은 상황에서 우선권을 반대편에 둔다. 한편 시카고 선언 제16조는 무오 교리가 교회 역사 전체에 걸쳐 교회 신앙의 일부였다고 확언하고, 그것이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발명이거나 고등비평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견해를 부정한다. 제12조 후반부와 제16조를 함께 놓으면, 5세기의 규칙과 20세기의 규칙이 같은 교리의 연속이라는 주장은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창세기 2~3장은 인류가 한 남자와 한 여자에서 시작했다고 서술한다. 이 진술을 검토하는 도구가 집단유전학이다. 핵심 개념은 유효집단크기다. 오늘날 관찰되는 유전적 다양성을 만들어 내려면 과거에 번식에 참여한 개체가 최소 몇 명이어야 하는지를 역산한 값이며, 실제 인구수와는 다르다. 개체 수가 적을수록 다양성이 빨리 줄어들므로, 지금 남아 있는 다양성의 양이 과거 집단 크기의 하한을 정해 준다.
2011년 영국 웰컴 생어 연구소의 헹 리와 리처드 더빈은 『네이처』 475권 493~496쪽에서 한 개체의 전장 유전체만으로 과거 집단 크기를 추정하는 PSMC 기법을 제시했다. 중국인·한국인·유럽인·요루바인 유전체에 적용한 결과, 아프리카 계열에서 유효집단크기가 5,700명 아래로 내려가는 구간은 나오지 않았다. 유럽과 동아시아 계열은 1만 년 전에서 6만 년 전 사이에 급격히 줄어드는 구간을 보였는데, 이는 아프리카를 떠난 집단이 겪은 창시자 효과로 해석된다. 어느 경우에도 두 명까지 내려가는 구간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결과를 두 사람에서 시작했다는 서술의 반증으로 곧바로 쓸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물음이다. 영국 큐 왕립식물원과 런던 퀸메리 대학의 식물유전학자 리처드 벅스는 2017년부터 이 추론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해 왔다. 한 쌍이 앞 세대 집단의 이형접합도 가운데 4분의 3을 그대로 지니고 떠날 수 있으므로, 짧고 급격한 병목은 유전체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논점이다. 리와 더빈의 논문 자체가 모의실험 결과를 보고하면서, 10만 년 전에 1만 2천 명에서 1,200명으로 순간적으로 줄어든 사건을 PSMC가 수만 년에 걸쳐 퍼진 완만한 감소로 잘못 복원했다고 적어 두었다. 벅스의 지적은 이 한계 진술을 근거로 삼는다.
같은 방법론의 불안정성은 반대 방향에서도 드러났다. 2023년 8월 화둥사범대학 판이쉬안과 텍사스대학 푸윈신을 비롯한 연구진은 『사이언스』 381권에서 새 추정 기법 FitCoal을 써서 현대인 3,154명의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들은 93만 년 전부터 81만 3천 년 전까지 약 11만 7천 년 동안 인류 조상의 번식 개체가 약 1,280명까지 줄어든 극심한 병목이 있었다고 보고했다. 이 결과는 앞선 연구들이 잡아내지 못한 구간이며, 저자들은 이 시기 아프리카와 유라시아 화석 기록의 공백과 들어맞는다고 주장했다. 2024년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의 라스무스 닐센 연구진은 이 추정이 통계적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반론을 내놓았다. 아프리카 집단에서만 병목이 검출되고 비아프리카 집단에서는 검출되지 않는다는 결과가 두 집단의 분기 시점을 고려하면 성립할 수 없고, FitCoal이 완만한 감소를 급격한 병목으로 잘못 복원하는 경향이 모의실험에서 확인된다고 지적했다.
이 사례가 보여 주는 것은 유전체 자료가 과거 집단 크기를 직접 보여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찰되는 것은 현재의 다양성이고, 과거 크기는 모형을 통해 역산된다. 모형이 바뀌면 같은 자료에서 다른 역사가 나온다. 그래서 "유전학이 아담과 하와를 반증했다"는 문장과 "유전학이 아담과 하와를 뒷받침하기 시작했다"는 문장이 같은 몇 해 사이에 함께 유통된다. 현재 확정된 것은 좁은 범위다. 지난 20만 년 동안 두 명 규모의 병목이 있었다면 그 흔적이 남아야 하며 그런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짧게 지나간 병목은 현재 기법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에서 낙타를 짐 나르는 가축으로 여러 차례 등장시킨다(창세기 12:16, 24:10~20, 30:43, 37:25). 성경 내부 연대로 이 시기는 기원전 20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놓인다.
텔아비브대학 고고학·고대근동문화학과의 리다르 사피르헨과 에레즈 벤요세프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을 따라 사해에서 홍해까지 이어지는 아라바 계곡의 구리 제련 유적에서 나온 동물 뼈를 분석했다. 이 계곡은 남부 레반트에서 가축 낙타 뼈가 가장 이른 시기에 나오는 지역이다. 분석 대상은 팀나와 와디 파이난의 후기 청동기·철기 유적에서 나온 동물 뼈였고, 각 층의 연대는 방사성탄소 측정으로 따로 확정했다. 두 사람은 2013년 학술지 『텔아비브』 40권 277~285쪽에 낙타 뼈가 기원전 10세기 마지막 3분의 1 이전 층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9세기에 가동된 유적에는 낙타 뼈가 있고, 그보다 이른 유적에는 없다.
이 결과가 확정하는 것은 남부 레반트에서 가축 낙타가 일상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시점이며, 창세기의 족장 연대보다 천 년가량 늦다. 무오설을 유지하는 쪽은 발굴 표본이 전체의 일부일 뿐이고 유목 집단은 흔적을 적게 남기므로 없다는 증거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이 반박은 원칙적으로 옳지만, 아라바 계곡 자료의 성격 때문에 힘이 약해진다. 같은 지역, 같은 종류의 유적을 시대별로 나란히 비교했을 때 특정 시점 이후에만 낙타 뼈가 나타나므로, 표본이 적어 못 찾았다는 설명으로는 그 경계선의 존재를 지우기 어렵다.
낙타 자료의 의미를 정확히 잡으려면 두 가지를 갈라 두어야 한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실존했는지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창세기 본문이 언제 지금 형태가 되었는지의 문제다. 낙타 자료는 앞의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뒤의 것에 대해서는, 기술된 시대에는 없던 물건이 서술에 들어와 있으므로 기술 시점이 그 물건이 흔해진 뒤라는 방향을 가리킨다. 2014년 텔아비브대학이 낸 보도자료는 이 결과가 성경의 역사성에 도전하며 본문이 사건보다 한참 뒤에 편집되었다는 직접 증거라고 썼다. 논문 자체는 낙타 도입 시점을 확정하는 데서 멈추고, 본문 편집 시점에 관한 문장은 보도자료가 덧붙였다. 대학 홍보 문구와 논문 본문을 같은 무게로 인용하면 자료가 말하는 범위가 넓어진다.
창세기 19장은 소돔과 고모라가 하늘에서 내린 유황과 불로 멸망했다고 적는다. 2021년 9월 20일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츠』 11권에 이 서술과 연결되는 논문이 실렸다. 미국 노던애리조나대학의 테드 번치를 비롯한 21명의 저자는 사해 북동쪽 요르단 계곡의 중기 청동기 도시 탈 엘함맘이 기원전 2천년기 중반에 공중에서 폭발한 천체 때문에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근거로 제시된 것은 탄소가 많은 파괴층, 충격으로 녹은 물질, 높은 염분 농도였다. 저자들은 이 사건의 기억이 구전을 거쳐 창세기에 기록되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논문은 발표 직후부터 검증을 받았다. 2021년 11월 과학 부정행위를 조사하는 엘리자베스 빅이 논문에 실린 이미지 여러 장이 변형되었다고 지적했다. 2022년 3월 지질학자 스티븐 재럿과 스콧 해리스는 같은 학술지에 제시된 광물학·지구화학 자료가 충격 사건의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며 고대 제련 기술로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반론을 실었다. 2023년 2월 15일 편집부는 자료와 결론에 제기된 우려를 검토 중이라는 공지를 논문에 붙였다. 2025년 4월 24일 편집부는 논문을 철회했다. 철회 사유는 광물학·지구화학 자료의 방법론과 분석과 해석의 오류, 그리고 물리학자 마크 보슬로와 아리 브루노가 지적한 1908년 퉁구스카 폭발과의 부적절한 비교였다. 교신저자 앨런 웨스트는 철회에 강하게 반대한다고 밝혔고, 새 자료를 붙여 다시 발표하겠다고 했다.
이 경과에서 검토할 것은 주장이 만들어지고 유통된 방식이다. 소돔의 실재 여부는 여기서 판정되지 않는다. 논문은 성경 서술과의 연결을 가능성으로만 적었고, 보도와 요약은 그 가능성을 제목으로 올렸다. 시카고대학과 드폴대학 등의 고고학자들이 뒤에 지적한 대로, 이런 보도는 유적의 도굴 위험을 높이고 해당 지역 발굴의 신뢰를 떨어뜨린다. 앞의 낙타 연구에서 텔아비브대학 보도자료가 논문 범위를 넘는 문장을 붙인 것과 방향만 반대일 뿐 구조가 같다. 성경과 연결되는 고고학 보고는 양쪽 진영 모두에서 원 논문보다 넓은 주장으로 유통되며, 원 논문으로 돌아가 확인하지 않으면 그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출애굽기 12장 37절은 이집트를 떠난 사람이 여자와 아이를 뺀 장정만 약 60만 명이었다고 적는다. 가족을 포함하면 200만 명 안팎이 된다. 민수기에 따르면 이 집단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낸다. 시나이 반도와 네게브 사막에서 이 규모의 야영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고, 같은 시기 이집트 행정 문서에도 대규모 집단의 이탈에 관한 기록이 없다. 카데스 바네아처럼 성경이 오래 머물렀다고 적은 지점에서도 해당 시기의 토기 조각이 나오지 않았다.
여리고는 이 논쟁이 가장 오래 진행된 유적이다. 영국 고고학자 캐슬린 케니언은 1950년대에 텔에스술탄을 발굴하고, 성벽 도시가 파괴된 시점을 중기 청동기 끝인 기원전 1550년경으로 잡았다. 근거는 후기 청동기 초에 수입된 키프로스 토기가 파괴층에 없다는 것이었다. 1990년 미국 고고학자 브라이언 우드는 『성서고고학리뷰』 3·4월호에서 케니언의 판단을 반박했다. 그는 현지에서 만든 채색 토기와 이집트 제18왕조 풍뎅이 인장, 방사성탄소 측정치를 근거로 파괴 시점을 기원전 1400년경으로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값은 고연대설의 정복 시점과 맞는다.
이 쟁점은 1995년에 다시 측정되었다. 헨드릭 브라윈스와 요하네스 판 데르 플리흐트는 케니언이 1950년대에 수습해 표지를 붙여 둔 시료를 고정밀 방사성탄소 측정에 걸었다. 『라디오카본』 37권 2호 213~220쪽에 실린 결과는 한 해만 자라는 곡물 낟알 시료의 가중평균이 3306 ± 7 BP, 여러 해 자란 목탄이 3370 ± 6 BP였다. 곡물 값은 보정하면 기원전 17세기 후반에서 16세기에 들어가고, 목탄 값이 그보다 오래된 것은 나무가 자란 시점을 재기 때문이어서 예상된 결과다. 두 사람은 여리고의 성벽 도시가 기원전 1400년경에 파괴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측정 기법이 논증의 방향을 바꾼 지점이 여기다. 우드가 1990년에 인용할 수 있었던 방사성탄소 값은 대영박물관이 1980년대 초에 낸 한 건이었고, 그 장비가 한동안 교정을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이 1990년에 공표되면서 값이 수정되었다. 목탄은 나무가 자란 때를 재므로 불이 난 때보다 오래된 값을 주고, 곡물 낟알은 그렇지 않다. 같은 "탄소연대"라는 말이 어떤 시료에 붙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사건의 시점을 가리킨다. 브라윈스와 판 데르 플리흐트가 곡물 낟알 여섯 점을 따로 뽑아 측정한 것은 이 구분 때문이다.
여호수아 7~8장이 여리고 다음으로 함락되었다고 적은 아이는 위치 자체가 논쟁거리다. 전통적으로 비정되는 에트텔에서는 1933년부터 1935년까지 쥐디트 마르케크로스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조지프 캘러웨이가 발굴했다. 두 발굴 모두 같은 그림을 얻었다. 초기 청동기의 성벽 도시가 기원전 2400년경 불에 타 무너지고, 그 뒤 천 년가량 사람이 살지 않았으며, 기원전 1200년경 철기 시대 초에 작은 마을이 폐허 위에 들어섰다. 마을에는 저항을 받은 흔적이 없다. 고연대설의 1400년경에도 저연대설의 1200년 직전에도 공격받을 성읍이 그 자리에 없었다. 이 결과에 대응해 보수 진영 일부는 아이를 키르벳 엔니시야나 키르벳 엘마카티르 같은 다른 유적으로 옮겨 보자고 제안해 왔으나, 학계 다수는 에트텔 비정을 유지한다.
같은 시기에 대응 자료가 있는 항목도 있다. 1896년 영국 고고학자 플린더스 피트리가 테베의 메르넵타 장제전에서 찾아낸 화강암 석비(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JE 31408)는 파라오 메르넵타의 재위 5년, 기원전 1208년경의 원정을 기록한다. 마지막 세 줄에 가나안 원정이 나오고, 거기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아스글론·게셀·야노암에는 도시나 지역을 가리키는 한정 기호가 붙는데, 이스라엘에는 앉은 남녀와 복수 표시로 이루어진 사람 집단용 기호가 붙는다. 확인되는 것은 기원전 13세기 말 가나안에 이집트인이 이스라엘이라 부른 집단이 있었고 그것이 도시국가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다. 이 집단이 이집트에서 나왔는지, 여호수아서가 적은 정복을 수행했는지는 석비가 말하지 않는다.
주류 고고학이 내놓는 이스라엘 기원 모형은 위의 발굴 결과와 산지 지표조사를 함께 놓은 데서 나온다. 기원전 1200년 전후 가나안 중앙 산지에 작은 정착촌이 수백 곳 생겨나고, 그 물질문화는 저지대 가나안 문화의 연속선상에 있으며 외부 유입의 표지가 뚜렷하지 않다. 이 정착 집단에서 이스라엘이 형성되었다는 설명이다. 이 모형에도 빈틈이 있다. 산지 정착촌에서 돼지 뼈가 드물게 나오는 현상처럼 주변 문화와 구별되는 요소가 있고,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지는 정리되지 않았다.
기원전 9세기부터 그림이 달라진다. 1993년 7월 21일 아브라함 비란이 이끄는 발굴대의 측량사 길라 쿡이 이스라엘 북부 텔단의 성문 구조물 벽에서 글자가 새겨진 현무암 조각을 찾아냈다. 이듬해 6월에 두 조각이 더 나왔다. 비란과 히브리대학의 금석학자 요세프 나베가 『이스라엘 탐사 저널』 43권 81~98쪽(1993)과 45권 1~18쪽(1995)에 공표한 이 아람어 비문은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을 무찔렀다고 기록하며, 유다를 בית דוד(비트 다위드, 다윗의 집)라 부른다. 아시리아 문헌이 북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 부르고 아르파드를 "아구시의 집"이라 부르는 방식과 같은 왕조명 표기다. 비문은 기원전 9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며, 텔단이 기원전 733~732년 아시리아에 파괴되었으므로 그 이전이라는 하한이 확정된다.
왕의 이름과 사건이 일치하는 사례는 더 있다. 아합은 아시리아 살만에세르 3세의 쿠르크 석비에 기원전 853년 카르카르 전투의 참전 세력으로 나오고, 예후는 같은 왕의 검은 오벨리스크에 조공을 바치는 장면으로 나온다. 오므리 왕조는 모압 왕 메사의 비석에 등장한다.
기원전 8세기 말 예루살렘의 수로도 대조된다. 열왕기하 20장 20절과 역대하 32장 30절은 히스기야가 기혼 샘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이는 수로를 팠다고 적는다. 1880년 실로암 못 근처에서 놀던 소년이 터널 벽에 새겨진 고대 히브리어 비문을 발견했다. 비문은 양쪽에서 굴을 파 들어간 인부들이 가운데서 만나는 순간을 기록하며, 왕의 이름은 적지 않는다. 2003년 9월 11일 히브리대학 지리학과의 아모스 프룸킨, 이스라엘 지질조사소의 아리에 시므론, 영국 레딩대학의 제프 로젠바움은 『네이처』 425권 169~171쪽에 이 터널의 연대측정 결과를 실었다. 터널 안 침전물의 식물 조각을 방사성탄소로, 천장의 종유석을 우라늄-토륨 방법으로 재고 기원전 700년경이라는 값을 얻었다. 이들은 연대측정과 서체 분석과 문헌 기록이라는 세 갈래 증거가 모두 기원전 700년 무렵으로 모인다고 보고했다. 성경에 등장하는 구조물 가운데 연대측정이 적용된 첫 사례다.
가장 정밀하게 대조되는 것은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 왕 산헤립의 유다 침공이다. 열왕기하 18장 13~16절은 히스기야가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바쳤다고 적는다. 산헤립의 연대기는 히스기야가 금 30달란트와 은 800달란트, 그리고 보석·상아 가구·흑단 따위를 니네베로 보냈다고 적는다.
| 항목 | 열왕기하 18:14 | 산헤립 연대기 |
|---|---|---|
| 금 | 30달란트 | 30달란트 |
| 은 | 300달란트 | 800달란트 |
| 예루살렘 함락 | 없음 | 기록하지 않음(포위와 봉쇄만 기록) |
| 아시리아군 18만 5천 명 사망 | 있음(왕하 19:35) | 없음 |
금의 수량이 두 기록에서 같다는 사실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은이 300과 800으로 어긋나는 대목을 두고는 여러 설명이 제시되었다. 아시리아 쪽이 과장했다는 설명, 800달란트가 은과 함께 적힌 보석·상아까지 합한 무게라는 설명, 두 나라의 달란트 단위가 달랐다는 설명이 있다. 마지막 설명은 검토할 만하다. 달란트는 지역마다 무게가 다른 계량 단위였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이 설명은 증명되지 않은 가능성이며, 하지와 워필드의 세 번째 요건인 "필연적 모순"을 성립하지 않게 만드는 데 쓰인다. 숫자 하나가 어긋나는 자리에서 조화 가설이 셋 나오고 그중 어느 것도 배제되지 않으면, 그 자리는 영구히 미결로 남는다.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이 어떤 규모였는지는 지금도 정리되지 않았다. 텔아비브대학의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은 기원전 10세기 예루살렘이 작은 거점에 지나지 않았고 성경이 묘사한 규모의 왕국은 9세기 오므리 왕조 이후의 상황을 앞당겨 투영한 것이라고 본다. 히브리대학의 요세프 가르핀켈은 유다 셰펠라 지역의 키르벳 케이야파를 반대 근거로 든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 발굴된 이 유적은 이중 성벽과 계획된 성문 구조를 갖춘 요새 도시이며, 20~30년만 사용되고 버려졌다. 가르핀켈 연구진이 올리브 씨 17점을 벨파스트와 옥스퍼드 두 실험실에서 측정해 2015년 『라디오카본』 57권 5호 881~890쪽에 보고한 결과는 유적의 파괴 시점을 기원전 10세기 첫 3분의 1로 놓는다. 핑켈슈타인과 알렉산더 판탈킨은 2012년 『텔아비브』 39권 38~63쪽에서 이 유적이 유다 소속이라고 볼 근거가 약하며, 설령 그렇더라도 광역 왕국의 증거는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 논쟁에서 양쪽은 같은 방사성탄소 자료를 놓고 다른 결론을 낸다. 쟁점이 측정치 자체가 아닌 유적의 소속 판정과 국가 형성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발굴 주체가 판정 주체이기도 하다는 조건도 작용한다. 가르핀켈은 자신이 발굴한 유적의 해석을 제시하고, 핑켈슈타인은 자신이 세운 저연대 편년의 틀에서 그 해석을 검토한다. 어느 쪽도 자료를 조작하지 않지만, 무엇을 왕국의 표지로 삼을지는 자료가 아니라 연구자가 미리 정한다.
메사 비석은 1868년 요르단의 디본 유적에서 발견되었고, 지금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기원전 9세기 후반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의 지배에서 벗어난 일을 새긴 34행의 비문이다. 발견 직후 현지에서 분쟁이 생겨 비석이 깨졌는데, 깨지기 전에 프랑스 고고학자 샤를 클레르몽가노가 젖은 종이를 눌러 글자 자국을 뜬 탁본이 남아 있다. 지금의 판독은 깨진 조각과 이 탁본을 함께 놓고 이루어진다.
비석의 아래쪽 31행은 일곱 글자쯤이 떨어져 나갔다. 1992년 프랑스 금석학자 앙드레 르메르는 이 자리를 בת[ד]וד(비트 다위드, 다윗의 집)로 읽자고 제안했다. 이 판독이 맞으면 텔단 비문보다 먼저 발견된 유물에 다윗 왕조가 등장하는 셈이 된다. 2019년 이스라엘 핑켈슈타인과 나답 나아만, 콜레주 드 프랑스의 토마 뢰메르는 『텔아비브』 46권 3~11쪽에서 루브르가 2018년 전시 때 촬영한 고해상도 사진과 탁본을 재검토했다. 세 사람은 르메르가 읽은 타브가 그 자리에 없고, 베트 다음 낱말 앞에 문장 전환을 표시하는 세로 획이 있으므로 베트를 "집"이 아닌 이름의 첫 글자로 판단했다. 이들이 제안한 이름은 민수기 22~24장 발람 이야기에 나오는 모압 왕 발락이다.
같은 해에 반대 결과도 나왔다. 스트라스부르대학의 미카엘 랑글루아는 『세미티카』 61권 23~47쪽에서 같은 비석과 탁본을 RTI 기법으로 촬영한 결과를 제시했다. RTI는 광원의 각도를 바꿔 가며 수십 장을 찍은 뒤 합성해 표면의 미세한 요철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랑글루아는 이 영상에서 다윗 판독을 뒷받침하는 획이 확인된다고 보고했다. 2021년 프랑스 개신교신학연구소의 마티외 리셸도 다윗 판독을 지지하는 재검토를 발표했다.
| 연도 | 제안자 | 판독 | 근거 |
|---|---|---|---|
| 1992 | 르메르 | 다윗의 집 | 탁본의 글자 흔적 |
| 2019 | 핑켈슈타인·나아만·뢰메르 | 발락 | 루브르 고해상도 사진, 문장 전환 획 |
| 2019 | 랑글루아 | 다윗의 집 | 비석과 탁본의 RTI 합성 영상 |
| 2021 | 리셸 | 다윗의 집 | 탁본 재검토 |
같은 돌에서 30년 사이에 네 차례 판독이 나왔고, 더 나은 촬영 기법이 판정을 한쪽으로 좁히지 않았다. 이 사례는 "고고학이 다윗을 확증했다"거나 "고고학이 다윗을 지웠다"는 요약이 어디서 생기는지 보여 준다. 남아 있는 글자가 적은 자리에서는 판독 자체가 재구성이고, 재구성에는 무엇이 그 자리에 있을 법한지에 관한 판단이 들어간다. 다윗 왕조의 실재를 뒷받침하는 텔단 비문의 문장이 훨씬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점은 이와 별개로 유지된다.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점토판 BM 21946은 신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즉위년부터 재위 11년까지, 기원전 605년부터 594년까지의 사건을 해마다 짧게 적은 연대기다. 학계에서는 이 문서를 바빌로니아 연대기 5번 또는 예루살렘 연대기라 부른다. 뒷면 12행은 네부카드네자르가 재위 7년에 유다의 도성을 포위했고 아다르월 둘째 날에 성을 함락하고 왕을 사로잡았다고 적는다. 이어 자기가 고른 왕을 그 자리에 세우고 무거운 조공을 받아 바빌론으로 보냈다고 기록한다. 아다르월 둘째 날은 율리우스력으로 기원전 597년 3월 16일이다.
열왕기하 24장 10~17절은 같은 사건을 적는다. 여호야긴 왕이 항복해 바빌론으로 끌려갔고, 네부카드네자르가 여호야긴의 삼촌 맛다니야를 시드기야로 개명해 왕으로 세웠다. 연대기가 "자기가 고른 왕"이라고만 적은 인물의 이름을 성경이 제공하고, 성경이 날짜를 적지 않은 자리에 연대기가 날짜를 제공한다. 두 문서는 서로의 빈칸을 채운다. 이 정도로 세부가 맞물리는 대조는 구약 전체에서 드물다.
그런데 해가 어긋난다. 연대기는 함락을 네부카드네자르 재위 7년으로 적고, 예레미야 52장 28절도 7년이라 적는다. 열왕기하 24장 12절은 8년이라 적는다. 통용되는 설명은 두 나라의 재위 연수 계산법이 달랐다는 쪽이다. 바빌로니아는 왕이 즉위한 해를 "즉위년"으로 따로 세고 다음 해부터 1년으로 셌고, 유다는 즉위한 해를 곧바로 1년으로 셌다. 이 차이를 적용하면 같은 해가 두 체계에서 7년과 8년으로 나온다. 이 설명은 다른 사건들에서도 일관되게 작동하므로 근거가 있다.
동시에 이 설명의 구조를 보아 두어야 한다. 두 숫자가 어긋나는 자리에서 계산법의 차이를 가정하면 어긋남이 사라진다. 그 가정이 옳다는 독립적 증거는 다른 사건들에서의 일관성이고, 그 일관성을 확인하려면 다시 같은 가정을 적용해야 한다. 앞의 산헤립 조공에서 달란트 단위가 달랐을 것이라는 설명과 같은 형태다. 이런 설명은 틀렸다고 보기 어렵지만, 어긋남을 없애는 방향으로만 작동하고 반대 방향으로는 검증되지 않는다. 하지와 워필드의 세 번째 요건이 "필연적 모순"을 요구하는 한, 이런 설명이 하나라도 성립하면 반박은 종결되지 않는다.
다니엘서는 무오설 논쟁에서 가장 오래된 표적이다. 3세기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포르피리오스가 이 책이 기원전 2세기 안티오코스 4세 박해기에 쓰였고 예언 형식을 빌린 당대 기록이라고 주장한 이래, 저작 시점이 6세기냐 2세기냐가 쟁점으로 이어졌다. 이 물음은 예언의 가능 여부와 얽혀 있어 자료만으로 정리되지 않지만, 자료가 판정하는 부분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벨사살이다. 다니엘 5장은 바빌론의 마지막 왕을 벨사살이라 적는다. 19세기까지 알려진 모든 고전 기록은 바빌론의 마지막 왕을 나보니두스로 적었고, 기원전 3세기 초 바빌로니아 사제 베로수스의 역사서에도 벨사살은 나오지 않는다. 1854년 영국 영사 존 테일러가 우르 유적에서 발굴한 나보니두스 원통 비문이 상황을 바꾸었다. 이 비문은 나보니두스가 자기 맏아들 벨샤르우수르를 위해 기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바빌로니아 문서들로 나보니두스가 아라비아의 테이마에 10년 가까이 머무는 동안 벨사살이 바빌론에서 실질적으로 통치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2세기의 저자가 다른 어떤 문헌에도 남지 않은 이 이름을 지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른 하나는 다리오다. 다니엘 5장 31절과 6장은 벨사살을 이어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받았다고 적는다. 바빌로니아 연대기와 키루스 원통 비문은 기원전 539년 10월 12일 구티움 총독 우그바루와 키루스의 군대가 싸움 없이 바빌론에 들어갔다고 기록하며, 그 뒤 왕위는 키루스에게 간다. 벨사살과 키루스 사이에 다리오라는 왕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 인물을 우그바루로 보는 제안, 키루스의 다른 칭호로 보는 제안, 후대의 캄비세스로 보는 제안이 나왔으나 어느 것도 정착하지 않았고, 다수 연구자는 문학적 인물로 본다.
언어 자료는 양쪽으로 쓰인다. 다니엘 2장 4절부터 7장까지는 아람어로, 나머지는 히브리어로 쓰였다. 이 아람어에 페르시아어 차용어와 그리스어 차용어가 섞여 있다. 그리스어 차용어는 3장의 악기 이름에 몰려 있다. 후대 저작설은 그리스어 낱말의 존재를 알렉산드로스 이후의 증거로 보고, 이른 저작설은 그 낱말이 악기 이름에만 나타나며 악기와 이름이 교역로를 따라 먼저 들어올 수 있었다고 본다. 쿰란에서는 다니엘서 사본이 여러 점 나왔고 가장 이른 것은 기원전 2세기 말로 편년된다. 이 사본은 본문이 그 무렵 이미 존재했음을 확정하지만 처음 쓰인 시점을 확정하지는 않는다.
다니엘서에서 자료가 하는 일은 한쪽 편을 드는 데 있지 않다. 벨사살에서는 성경만 보존한 정보가 뒤늦게 확인되었고, 다리오에서는 성경만 전하는 인물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두 결과가 한 책 안에 있다. 이 책의 저작 시점을 어느 쪽으로 정하든 나머지 한쪽은 설명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이사야서 44장 28절과 45장 1절은 페르시아 왕 키루스를 이름으로 부르며 그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다시 세우게 하리라고 적는다. 이사야는 기원전 8세기 인물이고 키루스는 기원전 6세기에 등장한다. 1892년 독일 신학자 베른하르트 둠은 『이사야서』에서 이 책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정리했다. 1~39장은 8세기 이사야, 40~55장은 바빌론 유수 말기의 익명 예언자, 56~66장은 귀환 이후의 또 다른 저자라는 구분이다. 근거로 제시된 것은 40장 이후에서 예루살렘이 이미 파괴된 상태로 서술된다는 점, 어휘와 문체가 앞부분과 다르다는 점, 40장 이후에 이사야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키루스의 실명이다.
반대 진영은 반론을 여럿 내놓았다. 40장 이후에 나오는 백향목·측백나무·상수리나무는 바빌론에서 자라지 않는 팔레스타인의 수종이고, 예루살렘이 아직 서 있는 것처럼 말하는 구절도 섞여 있다는 지적이 있다. 쿰란의 이사야 대두루마리에서 40장이 새 단으로 시작하지 않고 앞 단의 마지막 줄에서 이어진다는 점도 자주 인용된다. 이 관찰은 사실이지만 확정하는 범위가 좁다. 기원전 2세기의 필사자가 이 책을 한 권으로 다루었다는 것이 확인될 뿐, 그 책이 처음부터 한 사람의 작품이었는지는 필사 형태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 논쟁이 무오설과 직접 맞닿는 지점은 시카고 선언 제18조다. 이 조항은 본문이나 그 배후의 자료를 다루는 방식 가운데 본문의 가르침을 상대화하거나 탈역사화하거나 축소하는 것, 그리고 본문이 내세우는 저작자 주장을 거부하는 것을 정당한 해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진술한다. 이사야서는 1장 1절에서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의 환상이라고 밝히고, 다니엘서는 여러 장에서 다니엘을 1인칭 화자로 세운다. 이 조항을 따르면 저작자 문제는 문헌학적 검토의 대상에서 미리 빠진다. 무오의 범위를 역사 진술까지 넓힌 제12조와 저작자 주장을 보호하는 제18조가 함께 작동하면, 검토 가능한 영역은 넓어지고 검토 결과가 교리에 닿는 경로는 좁아진다.
신약의 인물과 연대는 1세기 로마 속주 행정의 기록과 겹치므로 대조 지점이 많다. 세 가지가 자주 인용된다.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진 돌은 1961년 6월 이탈리아 고고학자 안토니오 프로바가 이끈 발굴대가 지중해 연안 카이사레아 마리티마의 헤롯 극장에서 찾아냈다. 높이 82센티미터의 석회암 덩어리로, 4세기에 계단 부재로 다시 쓰이면서 새김면이 일부 깎여 나갔다. 남은 글자에서 티베리움이라는 건축물 이름과 폰티우스 필라투스, 유다이아 총독(praefectus Iudaeae)이 읽힌다. 이 돌은 빌라도의 이름이 나오는 유일한 고대 비문이며, 그의 직함이 후대 용어인 프로쿠라토르가 아닌 프라이펙투스였음을 확정한다. 요세푸스와 타키투스는 뒤에 쓰인 기록이므로, 동시대 자료로는 이것이 유일하다.
사도행전 18장 12절은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일 때 바울이 고린도에서 법정에 섰다고 적는다. 1905년 이후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근처에서 아홉 조각으로 나온 그리스어 비문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델포이에 보낸 서신의 사본이며, 루키우스 유니우스 갈리오를 황제 자신의 친구이자 아가야 총독으로 부르는 구절이 들어 있다. 비문에는 클라우디우스가 스물여섯 번째로 임페라토르 칭호를 받았다는 표시가 있어 기원후 52년으로 연대가 잡힌다. 속주 총독의 임기가 1년이었으므로 갈리오의 재임은 51년 후반에서 52년 전반으로 좁혀지고, 여기서 바울의 고린도 체류 시점이 고정된다. 신약 연대기 전체가 이 한 비문에 걸려 있다고 할 만큼 기준점 역할을 한다.
1990년 11월 예루살렘 남쪽 평화의 숲에서 건설 작업 중 불도저가 무덤 천장을 뚫었다. 이스라엘 문화재청의 츠비 그린후트가 발굴한 이 무덤에서 납골함 열두 개가 나왔고, 그중 장식이 정교한 하나에 카야파의 아들 요셉을 뜻하는 아람어 이름 요세프 바르 카야파가 두 번 새겨져 있었다. 안에는 예순 살쯤 된 남자를 포함해 여섯 사람의 뼈가 있었다. 요세푸스도 대제사장을 카야파라 불린 요셉으로 적으며, 납골함의 철자가 그 표기와 같다. 함께 나온 헤롯 아그리파 1세의 주화로 무덤은 1세기로 편년된다. 이 납골함이 복음서의 대제사장 본인의 것인지는 확정되지 않았고, 카야파 가문의 무덤이라는 점까지가 확인된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자료를 시대순으로 놓으면 경계가 뚜렷하다.
| 성경 내부 연대 | 대응 자료의 상태 |
|---|---|
| 창조와 홍수 | 지구·우주 연대, 나이테와 호수 줄무늬와 빙하의 연속 기록과 어긋남 |
| 인류의 기원 | 지난 20만 년에 두 명 규모의 병목 흔적 없음. 더 이른 시기는 미결 |
| 족장(기원전 2000~1500) | 직접 대응 자료 없음. 낙타는 1000년 뒤에 들어옴 |
| 소돔 | 유적 비정과 파괴 원인 모두 미확정. 2021년 보고는 2025년 철회 |
| 출애굽·정복(1400 또는 1200) | 여리고·아이에 해당 시기 성읍 없음. 메르넵타 석비는 집단명만 확인 |
| 통일 왕국(10세기) | 왕조명은 확인(텔단 비문). 왕국 규모와 메사 비석 판독은 논쟁 중 |
| 분열 왕국(9~8세기) | 왕 이름·전투·조공이 아시리아·모압 기록과 대응. 실로암 터널은 연대측정으로 확인 |
| 바빌론 유수(기원전 597) | 함락 날짜까지 연대기와 일치. 재위 연수 표기만 어긋남 |
| 신약(1세기) | 빌라도·갈리오·가야바 확인. 구레뇨 인구조사는 미결 |
표를 위에서 아래로 읽으면 대응 자료의 밀도가 단조롭게 올라간다. 이 분포는 성경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정하지 않는다. 그보다 각 기록이 사건과 얼마나 떨어진 시점에 만들어졌는지를 가리킨다. 동시대 서기가 적은 기록은 외부 자료와 맞물릴 자리가 많고, 오랜 구전을 거쳐 뒤에 정리된 기록은 그 자리가 적다. 낙타 사례가 이 차이를 보여 주는 지점이다. 기술된 시대에는 없던 물건이 서술에 들어와 있다면, 서술한 사람이 그 물건을 일상으로 보는 세계에 살았다는 뜻이 된다. 사건 자체의 유무는 여기서 나오지 않는다.
확증이라는 말이 두 뜻으로 쓰이는 것도 짚어야 한다. 텔단 비문은 다윗이라는 이름의 왕조가 기원전 9세기에 실재했음을 확증하며, 이것은 20세기 후반에 다윗을 문학적 창작으로 본 일부 주장을 무너뜨렸다. 같은 비문이 사무엘서와 열왕기의 다윗 서술이 사실이라고 확증하지는 않는다. 산헤립 프리즘의 금 30달란트가 열왕기와 일치한다는 사실은 그 기록이 실제 사건에 닿아 있음을 보여 주지만, 같은 프리즘이 은 800달란트를 적고 18만 5천 명의 죽음을 적지 않는다. 한 문서가 어떤 항목에서는 성경을 뒷받침하고 다른 항목에서는 어긋난다면, 그 문서를 "성경을 확증한다"로 요약하는 것도 "성경을 반증한다"로 요약하는 것도 자료를 줄여 쓰는 일이다.
앞에서 미뤄 둔 구레뇨 문제로 돌아간다. 하지와 워필드는 춤트가 구레뇨의 두 차례 시리아 총독 재임을 거의 증명했다고 썼다. 이 주장의 물증은 18세기에 로마 근교 티볼리에서 나온 비문 라피스 티부르티누스다. 어느 로마 고관의 이력을 새긴 이 비석에는 시리아의 총독을 두 번 지냈다는 표현이 있다. 이름이 적힌 부분은 깨져 나갔다.
영국 고고학자 윌리엄 램지는 20세기 초에 이 비문의 주인공을 구레뇨로 보고 그의 1차 재임을 기원전 11/10년에서 8/7년으로 잡았다. 에밀 쉬러, 에이드리언 셔윈화이트, 레이먼드 브라운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는 비문에 이름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이 비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두 번"이 시리아를 수식하는지 총독직을 수식하는지도 논쟁거리이며, 셔윈화이트는 다른 비문 자료를 근거로 시리아를 수식한다고 보았다. 그는 별개의 경로로, 시리아 총독 기록에 공백이 있는 기원전 4년에서 1년 사이를 구레뇨의 1차 재임 시기로 제안했다. 어느 재구성도 확정되지 않았고, 기원전 4년 이전의 인구조사를 직접 기록한 로마 문서도 아직 없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 입증 규칙의 작동 방식이다. 1881년의 해법은 그 뒤 학계에서 유지되지 않았고, 대신 다른 재구성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무오설이 반박당한 것은 아니다. 하지와 워필드가 요구한 것은 "필연적 모순"의 증명이었고, 이름이 지워진 비문 하나와 총독 명단의 공백 구간이 남아 있는 한 그 요구는 충족되지 않는다. 조화 가설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가설로 자리를 옮기면 되고, 그 과정에서 교리가 치르는 비용은 없다. 반대 방향도 마찬가지다. 어떤 자료도 이 규칙 아래에서는 결정적 반례가 되지 못하므로, 자료가 늘어난다고 해서 무오설이 강해지지도 않는다.
시카고 선언 제10조와 1881년 논문의 첫 단계는 모두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다. 각 성경 책마다 저자가 완성한 원본이 하나 있었고, 이후의 차이는 그 원본을 베끼는 과정에서 생긴 잡음이라는 전제다. 이 전제를 정면으로 검토할 자료가 1947년부터 사해 서쪽 쿰란 동굴들에서 나왔다.
쿰란 제1동굴에서 나온 이사야 대두루마리(1QIsaᵃ)는 66장 전체가 남은 유일한 완본 성경 두루마리다. 서체 분석으로는 기원전 125년경, 방사성탄소 측정으로는 기원전 202~107년 구간에 놓인다. 이 두루마리와 마소라 본문의 차이는 2,600곳이 넘게 집계되지만, 대부분은 철자와 문법 형태이며 문단 구분과 낱말 순서가 달라진 자리가 이어진다. 내용과 배열에서 두 본문의 차이는 거의 없다. 천 년의 필사 전승을 거치고도 본문이 이 정도로 유지되었다는 것이 이 두루마리가 확정한 사실이다.
같은 동굴 무리에서 나온 예레미야서 사본은 다른 그림을 준다. 칠십인역 예레미야서는 마소라 본문보다 분량이 7분의 1가량 적고, 장과 절의 배열도 다르다. 오랫동안 이 차이는 그리스어 번역자가 본문을 줄였기 때문으로 설명되었다. 제4동굴에서 나온 히브리어 사본 4QJerᵇ와 4QJerᵈ는 이 설명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두 사본은 칠십인역과 같은 짧은 형태와 같은 배열을 히브리어로 보여 준다. 에마누엘 토브를 비롯한 연구진이 『유대 사막 발견 문헌』 15권(옥스퍼드대학 출판부, 1997) 145~207쪽에 공표한 두 사본은 예레미야서가 길이와 배열이 다른 두 히브리어 판본으로 전해졌음을 뜻한다. 같은 제4동굴에서 마소라 본문 계열의 사본(4QJerᵃ)도 함께 나왔다.
예레미야서 사본이 흔드는 것은 "원본"이라는 개념의 단수성이다. 본문의 신뢰성은 여기서 문제되지 않는다. 기원전 2세기에 이미 두 판본이 나란히 유통되고 있었다면, 무오가 적용되는 "그 원본"이 둘 중 어느 쪽인지를 정해야 한다. 짧은 쪽이 원본이고 긴 쪽이 뒤에 늘어난 것이라면, 오늘날 모든 기독교 성경이 쓰는 마소라 본문 예레미야서는 원본보다 7분의 1이 더 붙어 있는 판본이 된다. 긴 쪽이 원본이라면 짧은 쪽을 설명해야 한다. 두 판본을 모두 영감된 것으로 보는 제3의 선택지도 제시되어 있으나, 그 선택은 원본 하나에 무오를 묶어 둔 제10조의 문장과 맞지 않는다.
하지와 워필드가 원본 조항을 세운 1881년에 쿰란 자료는 없었다. 그들이 다룬 문제는 중세 사본들 사이의 사소한 차이였고, 원본이 단수로 존재했다는 전제는 검토할 필요가 없는 배경이었다. 시카고 선언은 그 조항을 1978년에 그대로 이어받았다. 사해 사본이 발견되고 30년이 지난 시점이다.
고고학과 자연과학이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내놓은 것은 성경 전체에 대한 하나의 평결이 아닌, 시대에 따라 밀도가 다른 대응 자료다. 세 갈래로 묶인다.
첫째 갈래는 자료가 성경 서술과 정면으로 맞지 않는 구간이다. 창세기 족보에서 나오는 1만 년 이내의 연대는 운석 납 동위원소로 잰 지구의 나이,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으로 잰 우주의 나이, 그리고 남극 얼음과 일본 스이게쓰 호수 퇴적층과 독일 참나무 나이테에 남은 연속 층 기록과 맞지 않는다. 창세기 1장의 라키아가 그리는 하늘 구조에도 대응하는 물리적 대상이 없다. 족장 시대의 낙타는 천 년 뒤에 들어왔고, 여리고와 아이에는 정복 시기에 파괴될 성읍이 없었다.
둘째 갈래는 자료가 성경 서술과 세부까지 맞물리는 구간이다. 산헤립 연대기의 금 30달란트는 열왕기하의 수량과 같고, 실로암 터널은 연대측정·서체·문헌 세 갈래가 모두 기원전 700년 무렵으로 모인다. 바빌로니아 연대기는 예루살렘 함락 날짜를 기원전 597년 3월 16일로 적고, 성경은 그 연대기가 이름을 적지 않은 왕의 이름을 제공한다. 다니엘서의 벨사살은 19세기까지 성경에만 남아 있던 이름이었다가 1854년 우르에서 나온 나보니두스 비문으로 확인되었다. 빌라도·갈리오·가야바는 비문과 납골함으로 확인된다.
셋째 갈래는 자료가 아직 판정하지 않는 구간이다. 메사 비석 31행은 30년 사이에 네 차례 다르게 읽혔고 더 나은 촬영 기법도 판정을 좁히지 않았다. 키르벳 케이야파를 둘러싼 10세기 왕국 규모 논쟁에서 양쪽은 같은 방사성탄소 자료로 다른 결론을 낸다. 다니엘서의 메대 사람 다리오는 성경 밖 기록에 자리가 없고, 구레뇨 인구조사는 이름이 지워진 비문 하나에 걸려 있다. 인류 집단의 초기 병목은 2011년과 2023년과 2024년 사이에 추정 기법이 바뀔 때마다 다른 값이 나왔다.
세 갈래는 성경이 얼마나 믿을 만한가라는 하나의 눈금 위에 놓이지 않는다. 갈래를 가르는 것은 기록과 사건 사이의 거리다. 동시대 서기가 적은 기록은 외부 자료와 맞물릴 자리가 많고, 오랜 구전을 거쳐 뒤에 정리된 기록은 그 자리가 적다. 낙타가 그 차이를 보여 준다. 기술된 시대에는 없던 물건이 서술에 들어와 있다면, 그것은 서술한 사람이 살던 시대를 가리킨다.
이 그림들은 무오설을 반증하지 않는다. 반증되지 않는 이유는 1881년에 정해진 입증 규칙에 있다. 오류를 주장하려는 쪽은 그것이 남아 있지 않은 원본에 있었음을 먼저 증명해야 하고, 조화 가설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모순은 성립하지 않는다. 산헤립의 은 800달란트는 단위 차이로, 열왕기의 재위 8년은 계산법 차이로, 구레뇨는 두 차례 총독 재임 가설로 각각 처리된다. 어느 설명도 증명되지 않았고 어느 설명도 배제되지 않았다. 145년 동안 조화 가설의 목록만 길어졌다.
그래서 실제 판정은 무오의 적용 범위를 정하는 문장에서 이루어진다. 시카고 선언 제12조처럼 역사와 과학의 진술까지 범위에 넣으면 위의 자료 하나하나가 조화 작업의 대상이 되고, 제18조가 저작자 주장까지 보호하면 이사야서와 다니엘서의 문헌학적 검토는 시작 전에 결론이 정해진다. 「데이 베르붐」 11항처럼 하나님이 구원을 위하여 성경에 담기기를 원하신 진리로 범위를 한정하면 낙타와 여리고의 연대는 신앙의 문제에서 벗어나지만, 대신 어떤 진술이 구원에 관한 것인지를 판정할 기준이 필요해진다. 어느 쪽도 공짜가 아니다. 앞의 선택은 조화의 부담을 지고, 뒤의 선택은 경계 설정의 부담을 진다.
자료 쪽에서 앞으로 확인될 것은 남아 있다. 키르벳 케이야파를 둘러싼 논쟁은 셰펠라 지역의 추가 발굴과 방사성탄소 자료가 쌓이면 한쪽으로 좁혀질 수 있다. 라피스 티부르티누스의 결락 부분에 해당하는 조각이 나오면 구레뇨 문제도 정리된다. 탈 엘함맘의 철회된 논문은 저자들이 새 자료로 재발표하겠다고 예고했으므로 그 자료의 성격에 따라 판정이 정해진다. 그런 확인이 바꾸는 것은 개별 항목의 사실관계이며, 무오를 어디까지 적용할지의 물음은 그와 별개로 남는다. 그 물음은 성경이 어떤 종류의 문서로 읽히도록 쓰였는가에 관한 것이고, 발굴 보고서가 답할 수 있는 종류의 물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