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obhan.me

황허 단일 계보는 성립하지 않는다 — 량주·타오쓰·스마오·싼싱두이가 보여주는 것

중국에서 가장 이른 국가 단계 사회는 중원이 아닌 창장 하류에 있었고, 같은 시기 황토고원 남북에도 중심이 따로 있었다. 중원이 앞선 것은 그 뒤의 일이다.

2026년 9월 12일

하나의 강, 하나의 계보

중국 고대사를 다루는 서술은 오랫동안 한 줄기를 따라갔다. 황허 중류 중원에서 앙사오 문화가 일어나고, 룽산 문화를 거쳐 하나라와 상나라와 주나라로 이어졌으며, 그 계보가 곧 중국 문명이라는 줄기다. 이 서술에서 다른 지역은 중원의 영향을 받거나 중원에 흡수되는 변두리로 처리된다.

이 그림이 만들어진 데는 이유가 있다. 문헌 때문이다. 『사기』를 비롯한 후대의 역사서가 하·상·주의 왕조 계보를 적어 두었고, 20세기 초의 고고학은 그 문헌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1928년 시작된 안양 은허 발굴에서 갑골문이 나오면서 상나라가 실재했음이 확인됐고, 그 성공이 뒤의 조사 방향을 정했다. 문자가 나오는 곳을 찾고, 문헌의 왕조와 맞춰 보는 방식이다.

지난 30년의 발굴은 이 줄기 바깥에서 같은 시기에 존재한 중심들을 여럿 확인했다. 창장 하류, 황토고원 북부, 황토고원 남부, 쓰촨 분지에 각각 다른 계보를 가진 대규모 정치체가 있었다.

지리 용어 중원은 황허 중류의 허난성 일대 평원을 가리키며 전통적으로 중국 문명의 중심으로 여겨진 지역이다. 황토고원은 그 서쪽과 북쪽의 산시성·산시성(陝西省) 일대로, 바람에 실려 쌓인 황토가 두껍게 덮인 지대다. 창장은 양쯔강의 중국식 이름이고, 그 하류 삼각주가 오늘날 상하이와 항저우 일대다. 쓰촨 분지는 창장 상류의 분지로 산맥에 둘러싸여 있다. 네 지역은 수백에서 천 킬로미터씩 떨어져 있고 지형과 기후가 서로 다르다.

창장 하류의 량주

기원전 3300년에서 2300년 사이 창장 하류 삼각주에는 량주가 있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대규모 흙댐 수리 시설, 계급이 뚜렷하게 나뉜 무덤과 정교한 옥기가 함께 나온다.

류빈 연구진은 수리 시설의 축조 연대를 5천 100년 전으로 보고했다(류 외, 2017, PNAS 114권 13637~13642쪽). 골짜기 입구의 높은 댐과 평원의 낮은 댐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홍수를 막고 물을 대는 기능을 함께 했다. 이 규모의 토목 공사를 조직하려면 상당한 노동을 동원해야 한다.

판산 묘역의 무덤은 두 층으로 갈린다. 상위 무덤에는 옥과 비단과 상아와 칠기가 들어가고 하위 무덤에는 토기만 들어간다. 옥기에는 신인수면문이라 부르는 도상이 반복해 새겨져 있어, 공유된 신앙 체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콜린 렌프루와 류빈은 량주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국가 사회일 수 있는 사례로 정리했다(2018, Antiquity 92권 975~990쪽). 유네스코는 2019년 이곳을 세계유산(등재번호 1592)으로 올리면서 벼농사를 기반으로 한 신석기 후기의 초기 지역국가로 규정했다. 상나라보다 1천 500년 이르고, 중원에서 멀다.

량주는 기원전 2300년 무렵 끝난다. 도시가 버려지고 수리 시설이 방치되며, 문화층 사이에 진흙과 모래자갈 층이 끼어들고 그 안에 나무가 묻혀 있다. 홍수와 해수면 상승을 원인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황토고원 남부의 타오쓰

산시성(山西省) 남부 린펀 분지의 타오쓰는 기원전 2300년에서 1900년까지 이어졌다. 룽산 문화의 후기에 속하며 타오쓰기라는 이름으로 따로 부른다.

1999년에서 2001년 사이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확인한 것은 거대한 판축 성벽이다. 직사각형이고 안쪽 면적이 280헥타르에 이른다. 성 안에는 또 하나의 판축 담장이 있어 지배층의 거주 구역과 의례 구역을 평민 거주 구역과 갈라 놓았다. 30년의 발굴로 궁전 구역, 지배층 거주 구역, 왕릉, 의례 중심, 공방 구역, 별도의 저장 구역, 평민 거주 구역이 차례로 드러났다. 계층이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뜻이다.

이 유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2003년에 발견된 관상대다. 판축으로 쌓은 원형 대지가 세 겹으로 포개져 있고, 전체를 지름 약 50미터의 흙 담장이 두른다. 맨 위 대지는 지름 24.5미터이며, 그 가장자리를 따라 13개의 각기둥이 서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틈이 관측선 역할을 한다. 가운데 놓인 관측 지점에서 그 틈을 통해 해 뜨는 방향을 보는 구조다.

실험 결과 이 시설은 하지와 동지 무렵에 특히 유효하게 작동하며, 태양과 달의 운행을 함께 반영한 역법을 만드는 데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천년기 중반의 구조물이므로 세계에서 가장 이른 천문 관측 시설 가운데 하나다.

타오쓰의 마지막은 평화롭지 않았다. 후기 단계에 정복당했고, 궁전 담장과 궁전 건물과 성벽과 제단 같은 기념 건축이 거의 모두 헐렸다. 정치체가 무너질 때 건축물이 표적이 됐다는 뜻이다.

황토고원 북부의 스마오

산시성(陝西省) 북부, 둥촨 강과 투웨이 강이 만나는 언덕 위에 스마오가 있다. 기원전 2300년에서 1800년 사이의 유적이고 면적은 400헥타르를 넘는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중국 문명의 변두리로 여겨졌다.

스마오는 돌로 쌓았다. 중앙의 궁전 대지를 두 겹의 석성이 둘러싸는 구조이고, 방어 시설이 정교하다. 곧장 들어가지 못하게 꺾어 놓은 성문, 문루, 성벽에서 튀어나온 치, 모서리의 각루를 갖췄다. 성벽을 쌓기 전에 사람을 제물로 바친 흔적이 나왔고, 담장의 돌 사이에 옥기를 박아 넣었다. 청동 야금의 흔적도 함께 나온다.

옥기의 규모는 짐작하기 어렵다. 전 세계 박물관과 개인 소장품 가운데 3천에서 4천 점의 옥기가 스마오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20세기 초부터 도굴되어 흩어진 결과다.

스마오와 타오쓰는 건축 재료가 다르다. 한쪽은 돌을 쌓고 한쪽은 흙을 다졌다. 그런데 나머지는 비슷하다. 토기 조합, 도시 배치, 축조 기법, 옥기 조합, 여러 색을 쓴 장식, 의례적 폭력, 야금이 모두 닮았다. 리민은 이 유사성이 경쟁 관계나 한쪽이 다른 쪽을 이은 관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가 제시한 설명은 교차로다. 스마오와 타오쓰가 기원전 3천년기 후반에 유라시아의 기술과 의례 지식과 물자가 흘러 다니는 통로에 놓여 있었고, 서로 다른 영향이 만나는 자리에서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기원전 2000년 무렵 황토고원에는 스마오를 중심으로 한 북부 정치체, 루산마오를 중심으로 한 중부 정치체, 그리고 스마오와 긴밀히 이어진 남부의 타오쓰 정치체가 함께 있었다.

중원이 앞선 것은 나중이다

전통적으로 중원이라 불린 지역이 두드러지게 된 것은 이 고지대 중심들이 쇠퇴한 뒤다. 기원전 2000년 무렵 저지대의 룽산계 국가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그 공백 위에서 뤄양 분지의 얼리터우(기원전 1900~1600년)가 자리를 잡는다. 궁전 구역과 청동 주조 공방을 갖췄고 문헌의 하나라와 연결짓는 견해가 많지만, 동시대 문자 기록이 없어 확인되지 않는다.

그 뒤 정저우와 안양이 중원 국가의 우위를 강화한다. 문자로 인정받는 갑골문은 기원전 1250년 무렵 안양에서 나온다. 즉 문헌이 말하는 계보는 실재하지만, 그 계보가 중국 전역에서 가장 이른 것은 아니다. 량주보다 1천 400년 늦고, 스마오와 타오쓰보다 400년 늦다.

쓰촨 분지의 싼싱두이

중원의 우위가 확립된 뒤에도 먼 지역에는 대등한 정치체가 있었다. 가장 분명한 사례가 쓰촨 분지의 싼싱두이다.

청두 북동쪽 40킬로미터, 야쯔 강 남안에 있는 이 유적은 면적이 약 12제곱킬로미터이고, 고촉국의 수도로 본다. 중심 시기는 3천 600년에서 3천 100년 전으로, 상나라와 겹친다.

1929년에 한 농민이 옥기 무더기를 발견하면서 알려졌고, 여러 세대의 고고학자가 조사했지만 큰 성과가 없다가 1986년에 벽돌용 흙을 채취하던 주민들이 우연히 두 개의 갱을 찾아냈다. 여기서 나온 것은 그때까지 중국 고고학에서 본 적 없는 유물이었다. 높이 2.62미터의 청동 입인상, 폭 1.38미터에 눈이 돌출하고 귀가 큰 청동 가면, 높이 3.95미터의 청동 신수, 길이 1.42미터의 금장이 포함된다. 이후 다섯 개의 갱이 더 확인되어 모두 여덟 개가 됐고, 2021년 3월에는 새로 찾은 여섯 갱의 발굴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다. 금 가면 조각과 청동기, 옥기, 토기, 상아가 다량 나왔다.

싼싱두이가 제기하는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 청동 제작 기술이 다르다. 상나라와 같은 시기이면서 합금 조성과 주조 방식이 다르다. 상나라 청동기가 제기 중심인 데 비해 싼싱두이 청동기는 사람 형상과 가면과 나무 같은 형태가 중심이다. 양식에 더해 만드는 방법 자체가 다르다.

둘째, 문헌에 없다. 1천 년 가까이 이어진 이 정치체를 중국의 역사서가 직접 기록하지 않았다. 성격을 설명해 줄 동시대 문자 자료도 없다. 문헌을 따라 고고학을 진행하는 방식으로는 이 유적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는 뜻이다.

싼싱두이 이후 수도는 같은 분지의 진사로 옮겨 간다. 리민은 이 계통에 스마오의 유산이 의례 방면으로 들어와 있다고 본다.

네 중심을 나란히 놓으면

중심시기지역특징
량주기원전 3300~2300년창장 하류성벽 도시, 흙댐 수리 시설, 옥기, 계층 무덤
타오쓰기원전 2300~1900년황토고원 남부280헥타르 판축 성벽, 관상대, 왕릉, 구역 분리
스마오기원전 2300~1800년황토고원 북부400헥타르 석성, 정교한 방어 시설, 인신공희, 옥기
얼리터우기원전 1900~1600년중원(뤄양 분지)궁전 구역, 청동 주조 공방
상(정저우·안양)기원전 1600~1046년중원청동 제기, 갑골문
싼싱두이기원전 1600~1100년쓰촨 분지독자적 청동 양식, 대형 인물상과 가면, 문헌 기록 없음

표를 보면 세 가지가 드러난다. 첫째, 가장 이른 중심은 중원이 아닌 창장 하류에 있다. 둘째, 기원전 2300년에서 1900년 사이에는 황토고원 남북과 창장 하류에 중심이 동시에 여럿 있었다. 셋째, 중원이 앞서게 된 뒤에도 쓰촨 분지에서 다른 계통이 1천 년 가까이 이어졌다.

계보가 아니라 상호작용권

이 자료들을 묶는 틀로 자주 인용되는 것이 장광즈가 제시한 상호작용권 개념이다. 신석기 후기 중국의 여러 지역 문화가 각자 발전하면서도 토기 양식과 옥기 형태와 의례 관행을 주고받았고, 그 교류망 전체가 뒤에 나올 것의 바탕이 됐다는 설명이다. 여러 중심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그림이며, 하나의 중심에서 퍼져 나간 구도와 다르다.

리민은 여기에 유라시아 쪽 연결을 더한다. 스마오와 타오쓰가 중앙아시아 방면의 기술과 물자가 들어오는 통로였고, 그래서 두 유적에 야금술과 새로운 의례 요소가 함께 나타난다고 본다. 중원의 부상은 이 교류망이 작동한 결과이지 그 출발점이 아니다.

이 틀을 받아들이면 ‘중국 문명의 기원’이라는 물음의 형태가 바뀐다. 어느 지점에서 시작됐는가를 묻는 대신, 여러 중심이 어떤 순서로 일어나고 무너지고 무엇을 남겼는가를 묻게 된다. 중국의 문명탐원공정이 문자와 청동기와 도시라는 전통적 기준 대신 국가의 출현을 기준으로 삼은 것도 같은 방향이다. 그 기준에서는 량주가 문명 단계에 들어간다.

결론 — 황허 단일 계보는 문헌에서 왔지 발굴에서 오지 않았다

중국에서 가장 이른 국가 단계 사회는 창장 하류의 량주이고 기원전 3300년에 시작한다. 기원전 2300년에서 1900년 사이에는 황토고원 북부의 스마오와 남부의 타오쓰가 각각 400헥타르와 280헥타르 규모로 동시에 존재했고, 건축 재료는 달랐지만 토기와 옥기와 의례 관행이 서로 닮았다. 중원의 얼리터우가 부상하는 것은 이 고지대 중심들이 쇠퇴한 기원전 1900년 이후이며, 문자로 인정받는 갑골문은 다시 650년 뒤인 기원전 1250년에야 나온다. 그 시점에도 쓰촨 분지에서는 상나라와 전혀 다른 청동 양식을 가진 싼싱두이가 따로 이어지고 있었다.

황허 중류에서 시작해 하·상·주로 이어지는 단일 계보는 문헌이 제공한 틀이다. 20세기 초의 고고학이 그 문헌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중원 바깥은 오래 조사되지 않았고, 조사가 이뤄지자 같은 시기의 다른 중심들이 잇따라 나왔다. 스마오는 중국 문명의 변두리로 여겨지던 곳에서 나왔고, 싼싱두이는 어떤 역사서에도 적히지 않았다.

남은 물음은 이 중심들 사이의 관계다. 스마오와 타오쓰가 토기와 옥기와 의례에서 닮은 이유를 경쟁으로도 계승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와 있고, 유라시아 방면의 연결을 끌어들이는 설명이 제시돼 있다. 이 설명을 검증하려면 중앙아시아와 황토고원 사이의 중간 지대에서 같은 시기 자료가 더 나와야 한다. 싼싱두이 쪽에서는 2021년에 발굴된 여섯 갱의 유물 분석이 진행 중이고, 그 결과에 따라 이 정치체가 상나라와 어떤 관계였는지에 대한 그림이 달라진다. 문자가 나오지 않는 한 정치 구조를 직접 읽을 방법은 없으므로, 당분간 판단은 청동기의 합금 조성과 주조 기법 같은 물질 자료에 기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