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둘이라는 집단, 명단에 오른 개인, 그들의 최후를 전하는 이야기는 각각 증거의 질이 다르다. 1세기 편지부터 후대의 외경까지 자료의 층을 갈라, 무엇이 확인되고 무엇이 확인되지 않는지 따진다.
예수의 제자들이 실존 인물이었느냐는 물음에는 하나의 답이 없다. 서로 다른 세 가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예수를 따르던 열둘이라는 집단이 그의 생전에 실제로 있었는가. 둘째, 복음서 명단에 오른 개별 인물들이 각각 실존했는가. 셋째, 그들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죽었다는 후대의 이야기가 사실인가. 세 물음에 걸린 증거의 질은 차례로 떨어진다. 첫째는 예수 사후 20년 안의 문헌이 받쳐 주고, 둘째는 상당수가 확인도 반증도 되지 않으며, 셋째는 대부분 2세기 이후의 자료에 의존한다.
답이 어려운 이유는 자료가 사라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애초에 이런 사람들에 관한 자료가 만들어질 일이 거의 없었다. 1세기 로마 지배하의 유대 지역에서 문서를 남기는 계층은 극히 좁았다. 히브리 문헌학자 메이르 바르일란은 1992년 논문 「기원후 첫 세기 이스라엘 땅의 문맹」에서 랍비 문헌의 규정들과 도시화율을 근거로, 농촌 인구의 문해율이 사실상 0에 가깝고 도시에서도 1~5퍼센트, 티베리아스 같은 대도시에서조차 2~15퍼센트 수준이었다고 추산했다. 그는 여기서 유대인 전체의 문해율이 3퍼센트에 못 미쳤을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다만 이 수치를 그대로 쓰는 데는 조심할 이유가 있다. 이 분야에서 가장 방대한 단행본을 낸 캐서린 헤처는 『로마 시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문해』(2001)에서 고대 유대인의 정확한 문해율은 결정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정확한 수치는 검증도 반증도 되지 않으므로 역사적 가치가 적다고 썼다. 헤처가 확정한 것은 비교다. 팔레스타인의 유대 사회는 자기가 속한 그리스·로마 사회보다 문해율이 낮았고 문서 사용도 제한적이었으며, 로마 이탈리아에서 수만 점의 비문이 남은 것과 달리 팔레스타인에서는 수백 점이 나왔을 뿐이다.
이 사정은 물음의 성격을 바꾼다. 갈릴리의 어부나 세리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이 없었다는 증거가 아니다. 그 계층의 누구에 관해서도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는 뜻이다. 고대사에서 개인의 실존을 외부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왕과 장군, 대토지 소유자, 그리고 글을 남긴 소수의 문인뿐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경우 정상적인 기준은 "독립 사료가 있는가"가 아니라 "그 계층 사람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증거가 무엇이며, 우리에게 그것이 있는가"가 된다.
제자들을 다룰 때 흔히 복음서부터 펼치지만, 신약에서 먼저 쓰인 것은 바울의 편지들이다. 고린도전서는 50년대 중반에 작성되었고, 복음서 가운데 가장 이른 마가복음은 보통 70년 전후로 본다. 20년 가까운 차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 대목에서 자기가 지은 문장이 아니라 전해 받은 문구를 인용한다고 밝힌다.
καὶ ὅτι ὤφθη Κηφᾷ εἶτα τοῖς δώδεκα·
kai hoti ōphthē Kēpha eita tois dōdeka
그리고 그가 케파에게 보이셨고, 그다음에 열둘에게 보이셨다는 것.
고린도전서 15장 5절, 그리스어 본문은 네스틀레-알란트 28판(NA28)
바울은 앞선 3절에서 자기가 "받은 것"을 "전했다"고 쓴다. 이 두 동사는 당시 유대 학파에서 권위 있는 가르침을 넘겨받고 넘겨줄 때 쓰던 정형 표현이다. 게다가 "성경대로", "사흗날", "열둘" 같은 표현은 바울의 다른 글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안토니 티슬턴이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지적하듯 바울 자신은 "열둘"보다 "사도들"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이런 언어적 이질감 때문에 연구자들은 이 몇 줄을 바울보다 앞선 신앙고백 문구로 본다. 제임스 던은 『기억된 예수』(2003)에서 이 전승이 예수 사후 몇 달 안에 형식을 갖추었다고 판단했고, 무신론자인 게르트 뤼데만은 『예수의 부활』(1994)에서 그 요소들을 십자가 처형 후 2년 이내로 잡았다. 예수의 실존 자체를 의심하는 리처드 카리어조차 이 문구가 종파의 기원 시점까지 올라간다는 데는 동의한다. 사료 하나를 두고 정통 신학자와 무신론 학자와 신화론자가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이 이른 연대가 무엇을 보증하고 무엇을 보증하지 않느냐다. 문구가 30년대에 이미 돌았다는 판단은 부활 사건의 사실성을 입증하지 않는다. 그것이 입증하는 것은 훨씬 좁다. 예수 사후 10~20년 안에 이미 "열둘"이라는 집단 호칭이 통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개인의 이름은 이 문구에 단 하나, 케파만 나온다.
바울의 편지에서 훨씬 더 강한 증거가 나오는 곳은 갈라디아서다. 그는 회심 후 3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케파를 만나 보름을 머물렀고, 다른 사도는 보지 못했으며 오직 주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다고 쓴다(갈 1장 18~19절). 뒤에서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이 기둥으로 여겨졌다고 적고(갈 2장 9절), 안디옥에서 케파와 공개적으로 충돌한 일까지 기록한다(갈 2장 11~14절). 만난 사람이 직접, 1인칭으로, 그것도 자기에게 불리한 다툼까지 포함해 남긴 기록이다. 고대사에서 이 정도 등급의 증거는 드물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예수의 동생 야고보의 실존은 이 대목 하나로 사실상 확정된다.
다만 이름 하나에는 오래된 시비가 붙어 있다. 바울은 대개 아람어 이름 케파를 쓰고, 복음서는 그 뜻을 옮긴 그리스어 이름 페트로스(베드로)를 쓴다. 바트 어만은 1990년 『성서문학저널』 논문 「케파와 베드로」에서 둘이 서로 다른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고, 데일 앨리슨은 2년 뒤 같은 학술지에 「베드로와 케파, 동일인」으로 반박했다. 오늘날 대다수는 앨리슨 쪽을 따른다. 이 논쟁이 알려 주는 것은 결론보다 상황이다. 가장 잘 증언된 제자조차, 이름의 두 형태가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지가 학술지 지면에서 다투어졌다.
유대 출신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로마의 후원 아래 93~94년경 『유대 고대사』를 완성했다. 그 20권 200절에 예루살렘 대제사장 아나누스 2세가 총독 공백기를 틈타 산헤드린을 소집하고 한 사람을 처형한 일이 나온다.
τὸν ἀδελφὸν Ἰησοῦ τοῦ λεγομένου Χριστοῦ, Ἰάκωβος ὄνομα αὐτῷ
ton adelphon Iēsou tou legomenou Christou, Iakōbos onoma autō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 그의 이름은 야코보스였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20권 200절, 그리스어 본문은 니제 교정본
총독 페스투스가 죽고 후임 알비누스가 아직 부임하지 않은 시점이므로 62년의 일이다. 요세푸스는 야고보를 "의인"이라 부르지도, 예루살렘의 감독이라 부르지도 않는다. 후대 기독교 문헌이 덧붙인 순교 서사도 없다. 대제사장이 절차를 어기고 사람을 돌로 쳐 죽였고 그 때문에 아나누스가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유대 내부 정치의 기록일 뿐이다. 이 무미건조함이 오히려 사료로서의 값을 올린다.
이 대목이 후대 필사자의 삽입이라는 소수 견해도 학술지에 실려 있다. 리처드 카리어는 2012년 『초기기독교연구저널』 논문에서, 오리게네스와 에우세비오스와 헤게시포스의 인용 양상을 근거로 "그리스도라 불리는"이라는 구절이 착오로 끼어든 것이며 원래 본문은 대제사장 예수 벤 담네우스의 형제를 가리켰다고 주장했다. 켄 올슨도 비슷한 의심을 제기해 왔다. 하지만 이 문장이 대체로 진본이라는 것이 지금도 압도적 다수 견해다. 판단의 근거는 문체와 맥락이다. 4세기의 기독교 필사자가 손을 댔다면 예수에게 훨씬 호의적인 수식이 붙었을 텐데, 실제 본문은 "그리스도라 불리는"이라는 거리 두기 표현을 쓴다.
여기서 짚을 것이 하나 있다. 요세푸스가 확인해 주는 야고보는 열두 제자가 아니다. 예수의 동생이다. 기독교 바깥 사료가 이름을 대며 실존을 확인해 주는 인물은 열둘 명단 안에 한 명도 없다. 흔히 이 대목이 "제자의 실존을 외부 사료가 확인한다"는 취지로 인용되지만, 확인되는 것은 예수에게 야고보라는 형제가 있었고 그가 62년 예루살렘에서 처형되었다는 사실이다.
집단으로서의 열둘이 예수 생전에 존재했다는 견해는 지금 다수설이다. 가톨릭 사제이자 노터데임대 신약학자였던 존 P. 마이어는 1997년 『성서문학저널』에 실은 논문 「열둘의 무리: 예수의 공생애 동안 존재했는가」에서, 그리고 2001년 『변방의 유대인』 3권에서 이 문제를 길게 다루었다. 그의 논거는 서로 독립된 자료들이 같은 것을 말한다는 점이다. 마가복음에 열 번, 요한복음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공유하는 이른바 Q 자료에(마 19장 28절과 눅 22장 30절의 열두 보좌 약속), 그리고 바울의 고린도전서 15장 5절에 각각 나온다. 서로 베끼지 않은 자료 네 갈래가 같은 집단 호칭을 쓴다면 그 호칭이 공통의 뿌리에서 왔다고 보는 편이 간단하다.
숫자 12 자체도 논거가 된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가리키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E. P. 샌더스는 『예수와 유대교』(1985)에서 예수를 이스라엘 회복을 선포한 종말론적 예언자로 그렸고, 마이어도 예수가 종말의 이스라엘을 위해 열둘이라는 구조를 세웠다고 본다. 여기서 한 가지가 따라온다. 예수 자신은 열둘에 들어가지 않고 그 바깥에서 열둘을 세운 자로 서 있다. 후대 교회가 지도부의 권위를 세우려고 이 구조를 만들었다면, 창립자를 그 구조 밖에 두는 설계는 이상하다.
반대 견해도 오래되고 만만치 않다. 루돌프 불트만은 열둘의 역사성을 의심했고, 귄터 클라인은 『열두 사도: 한 관념의 기원과 내용』(1961)에서, 필리프 필하우어는 1965년 논문집에 실린 「예수 선포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와 인자」에서, 발터 슈미탈스는 『초기 교회의 사도직』(1969)에서 각각 열둘을 부활절 이후의 산물로 보았다. 이들의 주장은 이렇다. 예수가 임박한 종말을 선포하면서 열두 지파를 다스릴 열두 사람을 임명했다는 그림은 조직을 갖춘 교회의 관심사를 예수에게 되비춘 것이다. 마이어는 이 견해들을 검토하면서, 서로 크게 다른 이 연구자들이 한 가지에서만은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열둘이 예수 생전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각자가 그린 예수상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 지적은 상대편에게도 그대로 돌아온다. 열둘의 존재를 확정하면 예수를 이스라엘 회복의 예언자로 읽는 그림이 서고, 부정하면 제도와 무관한 지혜 교사로서의 예수상이 편해진다. 어느 쪽이든 결론이 먼저 있고 자료가 뒤따를 위험이 있다. 그래서 이 문제에서 가장 참고할 만한 태도는 샌더스의 것이다. 그는 예수에 관해 사실상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 여덟 가지를 열거하면서 "예수가 제자들을 불렀고 그들이 열둘이라고 말했다"를 목록에 넣었다. 그러면서 같은 책에서 열둘의 역사성이 그 목록 가운데 가장 약한 항목이라고 스스로 단서를 달았다. 열둘은 그 자리에 있지만 가장자리에 걸쳐 있다.
바울의 문구 자체에도 균열이 하나 있다. 부활한 예수가 "열둘"에게 나타났다고 하는데, 복음서의 서술대로라면 그 시점에 유다는 이미 이탈했으므로 남은 인원은 열하나다. 이 불일치는 오히려 "열둘"이 인원수를 세는 말이 아니라 고정된 칭호로 굳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같은 현상이 마가복음에도 나온다. 배신자를 소개하면서 "열둘 가운데 하나"라고 부른다. 숫자가 명부가 아니라 이름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 문구가 보증하는 것은 "열두 명이 있었다"가 아니라 "'열둘'이라 불리는 집단이 있었다"에 가깝다.
열두 제자의 명단은 신약에 네 번 나온다. 마가복음 3장 16~19절, 마태복음 10장 2~4절, 누가복음 6장 14~16절, 사도행전 1장 13절이다. 앞의 아홉 자리는 겹치지만 뒤로 갈수록 어긋난다.
| 마가복음 3장 | 마태복음 10장 | 누가복음 6장 · 사도행전 1장 |
|---|---|---|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 다대오 | 다대오(일부 사본은 렙배오) | 야고보의 유다 |
| 가나나인 시몬 | 가나나인 시몬 | 젤롯이라 불리는 시몬 |
| 가룟 유다 | 가룟 유다 | 가룟 유다 |
마가와 마태에 있는 다대오가 누가와 사도행전에서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이름이 들어온다. 마태복음 10장 3절의 일부 사본은 다대오 대신 렙배오라고 적거나 "렙배오라 불리는 다대오"로 절충한다. 흠정역 영어 성경이 따른 형태가 이것이다. 일부 고대 라틴어 사본은 이 자리에 "열심당원 유다"라는 이름을 넣는데, 브루스 메츠거는 『그리스어 신약성서 본문 주석』에서 이것이 누가의 명단에 있는 "젤롯이라 불리는 시몬"에 끌려 생긴 동화 현상일 수 있다고 보았다. 한 자리를 두고 세 개의 이름이 경쟁한 셈이다.
누가가 쓴 표현 자체도 애매하다. 그리스어 Ἰούδας Ἰακώβου는 "야고보의 유다"이며, 관계를 나타내는 명사가 생략되어 있어 아들인지 형제인지 문법만으로는 정해지지 않는다. 한국어 성경 대부분은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옮기지만 그것은 번역자의 선택이다. 요한복음에는 명단이 없는 대신 "가룟인 아닌 유다"가 한 번 등장하는데(요 14장 22절), 이 사람이 누가의 유다와 같은 사람인지 확정할 길이 없다. 게다가 이 구절은 사본마다 다르다. 3~7세기의 사히드 콥트어 사본들은 여기를 "가나나인 유다"로 적어 또 다른 제자인 가나나인 시몬과 뒤섞고, 고대 시리아어 사본들은 "유다 도마"로 적는다. 아람어 테오마는 쌍둥이라는 뜻이다.
이 어긋남을 읽는 방향은 둘이다. 하나는 후대에 지어낸 명단이라면 이렇게 헝클어질 이유가 없으므로 오래된 전승을 그대로 옮긴 흔적이라는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복음서가 쓰인 70~100년 무렵에 이미 정확한 구성원이 잊혔다는 뜻이라는 해석이다. 둘은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성립할 때 가장 자연스럽다. 실제 집단이 있었고, 핵심 인물 몇 명은 이름과 함께 기억되었으며, 나머지는 한 세대 만에 흐려졌다는 그림이다. 샌더스는 이 상황을 두고 열두 제자가 로마의 일곱 언덕과 비슷하다고 썼다. 관념은 아주 오래되었는데 목록을 채우려 들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몬이라는 이름이 워낙 흔했기 때문에 구별할 표지가 필요했다. 복음서에는 게바라는 별명을 받은 시몬, 가나나인 시몬, 나병환자 시몬, 구레네 사람 시몬이 나온다. 야고보도 세베대의 아들과 알패오의 아들로 나뉘고 유다도 둘로 나뉜다. 실제 집단 안에서 동명이인을 가려야 했던 흔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수식어 하나가 시대 문제를 안고 있다. 마가와 마태가 쓴 "가나나인"(Καναναῖος)은 가나안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열심을 뜻하는 아람어 카나나를 음차한 것이고, 누가가 쓴 "젤롯"(Ζηλωτής)은 그 말을 그리스어로 옮긴 것이다. 문제는 젤롯이 무엇을 가리키느냐다. 개인의 기질을 뜻하는 형용사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요세푸스가 서술하는 무장 당파로서의 젤롯은 66년 유대 전쟁 발발 이후에야 예루살렘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한다. 예수가 활동하던 20~30년대에는 그런 이름의 정당이 없었다. 누가가 이 말을 쓸 때 그의 독자들은 이미 전쟁기의 당파를 떠올렸을 것이다. 오래된 별명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뜻을 얻은 사례다. 그러므로 "열두 제자 가운데 무장 저항파가 있었다"는 익숙한 설명은 본문이 보증하는 것보다 멀리 나간 것이다.
가룟 유다의 별명도 확정되지 않았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풀이는 히브리어 이쉬 케리요트, 곧 유대 남부 마을 케리욧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풀이가 맞다면 유다는 열둘 가운데 유일한 비갈릴리 사람이 된다. 예일대의 찰스 토리는 1940년대 『하버드신학논평』에 실은 논문 「가룟이라는 이름」에서 당시까지 나온 여러 설명을 정리하며, 이 별칭이 신약 연구의 오래된 수수께끼이고 그만큼 성립하기 어려운 가설도 많이 낳았다고 썼다. 그가 꼽은 후보에는 거짓을 뜻하는 히브리어 셰케르에서 왔다는 설, 유다가 돈주머니를 맡았다는 요한복음 서술에 맞추어 가죽 가방을 뜻하는 라틴어 스코르테아에서 왔다는 설이 들어 있다. 단검을 쓰는 암살자를 뜻하는 라틴어 시카리우스에서 왔다는 설도 오래 인기를 끌었지만, 요세푸스가 시카리이를 서술하는 시점은 50년대이므로 젤롯의 경우와 같은 시대 문제에 걸린다.
이름 하나가 더 얽혀 있다. 마가복음 2장 14절은 세관에 앉아 있다가 부름을 받은 사람을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부르고, 같은 장면을 옮긴 마태복음 9장 9절은 그를 "마태"라고 부른다. 전통적으로는 한 사람의 두 이름으로 본다. 그런데 리처드 보컴은 『예수와 목격자들』에서 이 동일시를 의심한다.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인 인명 자료를 훑어보면 한 사람이 흔한 셈족계 이름 둘을 함께 쓴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별명을 덧붙이는 방식은 흔했지만(시몬 게바처럼 서로 다른 언어의 이름을 겹치는 것도 그 하나다), 같은 계열의 흔한 이름 두 개를 나란히 갖는 일은 없었다. 이 논거가 맞다면 마태복음은 마가의 레위를 사도 명단에 있는 마태로 바꿔 적은 것이 된다. 명단의 한 자리가 다른 방식으로 흔들리는 셈이다.
2000년대 들어 이 문제에 새로운 종류의 자료가 들어왔다. 히브리대학의 탈 일란이 2002년 펴낸 『후기 고대 유대인 인명 사전』 1권이 그것이다. 기원전 330년부터 기원후 200년까지 팔레스타인에서 확인되는 유대인 약 2,500명의 이름을 비문, 오스트라콘, 파피루스, 문헌에서 모아 정리한 책이다. 사람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세는 방식이므로,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서 어떤 이름이 얼마나 흔했는지를 통계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세인트앤드루스대의 신약학자 리처드 보컴은 『예수와 목격자들: 목격 증언으로서의 복음서』(2006, 개정 2017)에서 이 자료를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적용했다. 일란의 자료에서 가장 흔한 남자 이름은 시몬과 요셉이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도 그렇다. 반면 같은 시기 이집트나 소아시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는 분포가 뚜렷하게 달랐다. 최근 통계 분석이 쓴 기원전 4년~기원후 73년 구간의 서방 디아스포라 자료는 인명 1,227건에 고유 이름 575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상위 열 개 이름은 샤브타이, 도시테오스, 프톨레마이오스, 알렉산드로스, 시몬, 가이우스, 테오도토스, 율리우스, 테오도로스, 필론이며, 팔레스타인 상위권과 겹치는 것은 시몬 하나뿐이다. 보컴의 논지는 이렇다. 복음서가 1세기 후반 팔레스타인 바깥에서 쓰였는데도 현지의 인명 분포를 정확히 반영한다면, 그 안의 이름들을 공동체가 익명 전승 과정에서 자유롭게 지어냈다고 보기 어렵다.
팔레스타인 자료의 특이한 성질이 이 논증에 힘을 보탠다. 일란 자신의 정리에 따르면 이름 풀의 20.7퍼센트가 남성 인구의 73.4퍼센트를 감당했다. 상위 두 이름만으로 남성의 16퍼센트가 넘는다. 비교하자면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어 인명 자료에서 상위 두 이름은 남성 인구의 5퍼센트에 못 미친다. 하스몬 왕조 계열의 이름 몇 개에 인구가 쏠린 이 기묘한 분포는 바깥 사람이 흉내 내기 어렵다.
이 논증이 통계적으로 견디는지를 물은 것이 카밀 그레고르와 브라이언 블레이스다. 두 사람은 2023년 『역사적 예수 연구 저널』에 「이름의 인기도는 역사성의 좋은 시험인가」를, 2024년에는 『신약연구저널』에 후속 논문을 실었다. 이들이 지적한 첫째는 보컴이 자기 자료에 실제 통계 검정을 거의 적용하지 않은 채 높은 확신을 표명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표본 문제다. 다른 사료로 실존이 이미 확인되는 인물을 빼고 나면 복음서·사도행전에 남는 이름은 50여 개에 불과해, 통계적으로 유의한 결론을 끌어내기에 너무 작다는 것이다. 2024년 논문에서는 명백히 허구인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 후대 기독교 외경과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인명 분포를 같은 방식으로 검정해, 이 자료들도 복음서·사도행전보다 유의하게 나쁘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잘 맞는다고 보고했다.
반박은 곧바로 나왔다. 루크 판 데 베헤와 바이올라대의 통계학자 제이슨 윌슨은 2024년 『역사적 예수 연구 저널』에 「이름의 인기도는 역사성의 좋은 시험이다」를 실어, 그레고르와 블레이스가 쓴 방법이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귀무가설과 대립가설을 뒤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적합도 검정에서는 참조 분포를 귀무가설에 놓아야 하는데 반대로 했다는 지적이다. 둘째는 한 번만 나오는 희소한 이름들을 잡음으로 취급해 버린 점이다. 두 사람은 카이제곱 적합도 검정에 데이터 구간화를 적용해 다시 계산했고, 복음서·사도행전 표본 82건의 이름 빈도가 팔레스타인 참조 분포에 대해 p값 0.855를 얻었다고 보고했다. 대조군으로 넣은 고대 외경의 허구 인명과 근대 역사소설 『벤허』·『창』의 인명은 모두 10의 마이너스 15승 수준으로 어긋났다. 이들은 2026년 『신약연구저널』에 다시 방법론 비판을 실었다.
이 공방에서 짚을 것은 논증의 사거리다. 판 데 베헤와 윌슨 자신도 통계 분석으로 복음서의 모든 이름이 역사적임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명시한다. 이 검정이 가려내는 것은 그 문헌들이 고대 역사 서술에 어울리는 수준의 정보 보존을 보였는가이지, 특정 인물이 살았는가가 아니다. 명단 전체가 책상 위에서 만들어졌다는 설명에는 부담을 주지만, 다대오가 실존했는지에는 답하지 못한다. 한편 이 연구들의 발표 지면과 소속을 보면 논쟁 구도도 보인다. 보컴을 옹호하는 쪽 저자 한 명은 복음주의 대학 소속이고, 그레고르와 블레이스는 예수 신화론에 가까운 진영에서 활동해 왔다. 각자의 위치는 어느 쪽 논문의 수식이 옳은지를 판정하지 않지만, 어떤 결론을 찾으려 자료에 다가갔는지는 설명한다.
제자들의 역사성을 논할 때 가장 자주 동원되는 논거는 자료의 종류가 아니라 판정 기준 쪽이다. 초기 교회에 불리한 내용은 지어낼 동기가 없으므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기준이 열둘 문제에 걸리는 자리가 가룟 유다다. 마이어는 열둘의 역사성을 논하면서, 유다가 열둘에 속했다는 전승이야말로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라고 보았다. 지도자가 자기 핵심 집단의 내부자에게 팔려 넘어갔다는 이야기는 그 집단의 권위를 깎는다. 존 도미닉 크로산은 1995년 저서에서 유다의 배신 자체는 있었을 법하지만 그가 열둘에 속했다는 설정과 그의 최후 서술은 후대의 것으로 보았는데, 마이어는 이 절충도 성립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같은 기준이 무덤 이야기에도 적용된다. 네 복음서 모두 빈 무덤을 처음 발견한 사람으로 여성들을 지목한다. 근거로 인용되는 것이 요세푸스의 다음 규정이다.
γυναικῶν δὲ μὴ ἔστω μαρτυρία διὰ κουφότητα καὶ θράσος τοῦ γένους αὐτῶν
gynaikōn de mē estō martyria dia kouphotēta kai thrasos tou genous autōn
여자들의 증언은 받아들이지 말 것이니, 그 성(性)의 경솔함과 무모함 때문이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4권 219절, 그리스어 본문은 러브 고전총서판
이 규정을 근거로, 이야기를 지어낼 참이었다면 남성 목격자를 내세우는 편이 유리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논증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논증에는 두 갈래의 반론이 붙는다. 첫째는 사료 해석 문제다. 캐럴린 오지크는 1997년 『HTS 신학연구』에 실은 논문 「무덤의 여자들, 그들은 거기서 무엇을 하는가」에서, 고대 유대교에서 여성이 법적 증인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은 주석의 상투어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여성의 증언이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여러 가지 있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요세푸스의 문장은 법정 규정이다. 마가복음은 법정 변론으로 쓰인 글이 아니라 이미 믿는 사람들을 위해 쓰인 글이고, 시신을 돌보는 일은 그 문화에서 여성의 몫이었다. 여자들이 무덤에 간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뒤집지 않는 자연스러운 서술이다.
둘째는 기준 자체에 대한 반론이다. 크리스 키스와 앤서니 르돈이 엮은 『예수, 기준들, 그리고 진정성의 종말』(2012)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논문집이다. 키스는 첫 장에서, 당혹·다중 증언·정합성·비유사성 같은 기준들이 모두 양식비평의 한 가정 위에 서 있다고 지적했다. 복음서라는 신학적 서사에서 그 이전의 구전 전승을 걸러낼 수 있다는 가정이다. 기준들은 원래 복음서 이전의 구전 자료를 식별하려고 만들어진 것이지 그 뒤에 있는 실제 사건이나 인물을 식별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같은 책에서 라파엘 로드리게스는 당혹의 기준을 아예 폐기하자고 주장했다. 이 기준이 결국 비유사성 기준의 한 부분이며, 무엇이 누구에게 창피한 일인지는 시대와 공동체에 따라 달라지므로 오늘의 감각으로 1세기의 난처함을 판정하는 일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 논문집은 40여 년 전 모나 후커가 제기했다가 묻힌 문제 제기를 되살린 것이었고, 후커 본인이 서문을 썼다.
이 흐름이 제자 문제에 남기는 결과는 양쪽에 걸친다. 유다 전승과 여성 목격자 전승을 근거로 열둘의 역사성을 확정하려는 논증은 예전만큼 강하게 서지 못한다. 동시에 이 전승들이 후대의 창작이라는 반대 논증도 같은 기준의 뒤집힌 형태에 의존하므로 함께 약해진다. 판정 도구가 무뎌졌을 때 남는 것은 자료 자체의 연대와 계보다.
"제자들은 자기가 본 것을 위해 죽었고, 거짓말을 위해 죽는 사람은 없다"는 논증은 대중적으로 널리 쓰인다. 이 논증이 성립하려면 두 가지가 조용히 전제되어야 한다. 그들이 실제로 처형되었다는 것, 그리고 처형을 피할 길이 그들에게 있었는데 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의 전제부터 자료로 따져 보면 그림이 좁아진다.
1세기 안의 자료로 처형이 확인되는 사람은 셋이다.
클레멘스의 문장은 뒤이어 바울을 다루면서 일곱 번의 투옥, 돌에 맞은 일, 동방과 서방에서의 전도, 통치자들 앞에서의 증언까지 구체적으로 적는다. 베드로 쪽은 눈에 띄게 짧고 막연하다. 19세기부터 이 대비가 지적되어 왔다. 저자가 로마에 있었으면서도 베드로의 최후에 대해서는 바울만큼 알지 못했다고 읽는 쪽이 자연스럽다.
거꾸로 매달린 십자가 이야기는 그 뒤에 나온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가 3세기 초 『창세기 주석』 3권에서 사도들의 관할 구역을 열거하며 베드로가 로마에서 머리를 아래로 하여 십자가에 달렸고 그것이 본인의 요청이었다고 적었다. 이 대목은 오리게네스의 원저가 사라진 탓에 4세기 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 3권 1장 인용으로만 전한다. 2세기 후반의 외경 『베드로행전』에도 같은 모티프가 있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논쟁거리다.
같은 오리게네스 인용문에 사도들의 선교지 배정이 나오는데, 여기서 도마에게 할당된 곳은 인도가 아니라 파르티아다. 안드레는 스키타이, 요한은 아시아를 맡았다고 되어 있다. 도마와 인도를 잇는 이야기는 『도마행전』에서 온다. 시리아어로 에데사에서 3세기 초, 대략 200~240년 사이에 쓰인 외경으로, 도마가 인도의 왕 군다파르 앞에 끌려가 겪는 모험을 담고 있다. 케랄라의 기독교 공동체는 도마가 52년 남인도에 도착했다는 전승을 보존해 왔지만, 그 전승을 문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3세기의 소설적 서사에 닿는다.
요한에 관한 자료는 서로 정면으로 충돌한다. 널리 알려진 전승은 그가 에베소에서 노년까지 살다 자연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5세기의 시데 사람 필리포스는 자기 교회사에서, 2세기 초의 파피아스가 그 저작 2권에서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가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적었다고 전한다. 9세기의 게오르기오스 하마르톨로스도 같은 내용을 자기 연대기에 옮기면서 파피아스를 출처로 댄다. 파피아스의 원저는 사라졌으므로 이 주장의 진위는 확인할 수 없고, 필리포스가 세베대의 아들들을 다른 인물들과 혼동했으리라는 의심도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확인되는 것은 하나다. 가장 잘 알려진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의 최후에 대해 고대 교회는 서로 배타적인 두 이야기를 동시에 물려주었다.
나머지 인물들의 순교담은 모두 그보다 늦은 자료에 실려 있다. 바이올라대 기독교 변증학 교수 션 맥다월은 박사 논문을 고쳐 낸 『사도들의 최후』(2015, 개정판 2024)에서 인물마다 확률 등급을 매겨 자료를 정리했다. 그가 내린 판정은 이렇다. 베드로, 바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최고 등급이고, 도마는 그럴 가능성이 더 높은 정도, 안드레는 반반보다 조금 나은 정도다. 빌립, 바돌로매,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젤롯 시몬, 맛디아는 반반이다. 요한의 순교는 그가 오히려 낮게 본다. 맥다월은 변증학 진영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므로 자료를 관대하게 읽을 이유가 있는데도, 사도가 요한을 빼고 모두 순교했다는 통설은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개정판에서는 자기 이전 결론을 수정해 적어도 두 사도는 자연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썼다.
순교 전승의 무대 자체를 의심하는 연구도 있다. 프린스턴대 고전학자 브렌트 쇼는 2015년 『로마학연구저널』에 「네로 박해라는 신화」를 실어, 64년 로마 대화재 이후 네로가 기독교인을 대량 처형했다는 통념을 반박했다. 그의 논지는 이렇다. 이 사건의 유일한 사료는 타키투스 『연대기』 15권 44장의 짧은 대목이고, 그 문장은 타키투스가 쓴 것이 맞지만 그가 글을 쓰던 2세기 초의 관념과 연상을 반영할 뿐 60년대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 60년대 로마에서 기독교인이 국가에 별개의 집단으로 인지되었을 가능성 자체가 낮다는 것이다. 하버드대의 크리스토퍼 존스는 2017년 『신약연구』에 반론을 실어, 그 무렵 로마에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이 알려졌을 수 있고 군중이 그들을 지목했을 수 있으므로 타키투스의 서술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쇼는 이듬해 같은 학술지에 재반박을 실었다. 이 공방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베드로와 바울의 죽음을 네로 박해와 묶는 서술은 현재 학계에서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논쟁 중인 가설이다.
정리하면 논증의 앞쪽 전제는 셋에 대해서만 선다. 뒤쪽 전제, 곧 그들이 처형을 피할 선택지를 앞에 두고 거부했다는 부분은 어느 자료에도 서술되어 있지 않다. 사도행전의 야고보는 재판 장면조차 없이 한 절로 처리되고, 요세푸스의 야고보는 율법 위반 혐의로 산헤드린에 끌려간다. 철회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서술은 2세기 이후 순교록의 문학적 장치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이 논증이 지지하는 것은 좁다. 초기 지도자 몇 사람이 자기 신념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들이 진심이었음을 보여 주지 그들의 진술이 옳았음을 보여 주지 않는다. 맥다월 자신도 같은 구분을 한다.
제자들과 얽힌 유적은 여럿 발굴되었지만, 그 가운데 어느 것도 특정 개인의 실존을 입증하지 않는다. 구조와 연대는 밝혀도 주인을 밝히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가버나움에서는 1968년 4월 프란치스코회의 비르질리오 코르보와 스타니슬라오 로프레다가 비잔틴 시대 팔각형 교회 아래를 파 내려가 1세기 가옥을 확인했다. 발굴자들은 이 집의 큰 방이 1세기 말 무렵 확장되고 회벽이 발라져 가정 교회로 바뀌었고, 4세기에 담장으로 마을과 분리되었으며, 5세기 후반에 그 위로 팔각형 교회가 세워졌다고 정리했다. 회벽 조각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모노그램, 기도 문구가 새겨진 낙서가 여러 언어로 나왔다. 문헌 쪽 증거로는 381~384년 사이 성지를 여행한 수녀 에게리아의 기록이 있다. 그는 가버나움에서 사도들의 수장의 집이 교회로 바뀌어 있다고 적었다.
여기까지가 자료이고, 그다음부터는 추론이다. 4세기 순례자들이 그 집을 베드로의 집으로 불렀다는 사실과 그 집이 실제로 베드로의 집이었다는 사실은 다르다. 조앤 테일러는 『기독교인과 성지: 유대 기독교 기원설이라는 신화』(1993)에서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 가버나움의 유적을 문헌과 발굴 보고로 하나씩 검토한 뒤, 어떤 부류의 기독교인도 4세기 이전에 특정 장소를 성지로 숭배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판단으로는 기독교 성지와 순례라는 현상 자체가 콘스탄티누스가 325~330년 무렵 팔레스타인에 네 개의 바실리카를 세우면서 시작되었고, 원래 이교의 관행이던 성소 순례가 그때 기독교에 접붙여졌다. 이 견해가 옳다면 가버나움의 1세기 가옥과 5세기 교회 사이에는 숭배의 연속이 아니라 4세기의 단절이 놓인다.
로마 쪽 사정은 더 얽혀 있다.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 지하 발굴에서 2세기 중엽의 붉은 벽과 그 옆 낙서 벽이 나왔고, 벽에서 떨어진 회벽 조각에 그리스어 글자 몇 개가 남아 있었다. 로마대학의 그리스 금석학자 마르게리타 구아르두치는 이것을 "페트로스 에니(Petros eni)", 곧 "베드로가 여기 있다"로 판독하고, 낙서 벽의 다른 기호 스무 개가량을 박해기 신자들이 쓴 암호 메시지로 해석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8년 유해가 확인되었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앞서 같은 현장을 발굴했던 예수회 고고학자 안토니오 페루아는 구아르두치의 판독과 방법론을 평생 받아들이지 않았다. 글자가 손상되어 있어 다르게 읽을 여지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 논쟁은 1995년까지도 지면에서 이어졌고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도 정리되지 않았다. 유골의 신원을 확정할 독립된 방법은 없다.
1986년 갈릴리 호수에서 나온 배도 마찬가지다. 가뭄으로 수위가 내려간 틈에 기부츠 기노사르의 두 형제가 진흙에 묻힌 선체를 발견했고, 이스라엘 고대유물국의 셸리 왁스만이 발굴을 지휘했다. 길이 8.3미터에 너비 2.3미터, 최대 열다섯 명을 태울 수 있는 어선이었고 레바논산 삼나무와 참나무로 장부맞춤 방식으로 지어졌다. 근처에서 나온 1세기 토기와 등잔, 그리고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으로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후 70년 사이의 배임이 확인되었다. 복음서에 배가 쉰 번 넘게 나오므로 이 유형의 배가 예수와 제자들이 탔을 법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특정 인물과 연결할 근거는 없다.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어떤 경로로 전해졌는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람은 소아시아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다. 2세기 초에 다섯 권짜리 『주의 말씀 해설』을 썼고, 그 서문에서 자기 방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장로들을 따랐던 사람이 오면 그 장로들이 무엇을 말했는지, 곧 안드레나 베드로가, 빌립이나 도마가, 야고보나 요한이나 마태나 그 밖의 주의 제자들이 무엇을 말했는지 캐물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가 직접 밝혔다.
παρὰ ζώσης φωνῆς καὶ μενούσης
para zōsēs phōnēs kai menousēs
살아 있고 머물러 있는 목소리로부터.
파피아스, 에우세비오스 『교회사』 3권 39장 4절에 인용
책에서 얻는 것보다 살아 있는 목소리에서 얻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 문장이 우리에게 도달한 방식이다. 파피아스의 다섯 권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4세기 에우세비오스가 인용한 몇 단락과 그보다 늦은 저자들이 옮긴 단편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손에 쥔 것은 제자를 만난 사람을 만난 사람의 증언을, 200년 뒤의 역사가가 요약해 옮긴 기록이다. 이 사슬이 신약 바깥 전승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사슬의 각 고리가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고리 하나를 지날 때마다 검증 가능성은 줄어든다. 앞서 본 파피아스의 요한 피살 전승이 5세기와 9세기 저자를 거쳐서만 전하는 것도 같은 구조다.
이 구조를 밀고 나가면 더 급진적인 질문에 닿는다. 예수 자신이 실존하지 않았고 제자들도 문학적 구성이라는 주장이다. 리처드 카리어는 『예수의 역사성에 관하여』(2014)에서 베이즈 확률을 동원해 이 입장을 학술적 형식으로 정리했다. 예일대의 대니얼 굴로타는 2017년 『역사적 예수 연구 저널』에 37쪽에 걸친 반박 서평을 실었다. 그는 카리어의 책이 예수 신화론을 학술적으로 측정할 기준이 될 만한 성실한 저작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정했고, 카리어가 제기한 방법론 비판 상당수는 이미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 자신이 제기해 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굴로타의 서평이 실린 학술지의 편집위원 마이클 버드는 그 편집진이 유대교, 복음주의, 주류 개신교, 불가지론, 무신론을 아우르며 예수에 관한 거의 모든 문제에서 서로 의견이 갈린다고 밝혔다. 그런 편집진이 신화론에 대해서만은 한목소리를 낸다. 이것은 신화론이 반박되었다는 증명이 아니라, 이 분야의 전문가 공동체가 그 입장을 진지한 선택지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서술이다. 제자 개인의 실존 문제는 이 논쟁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따져야 한다. 예수가 실존했더라도 명단의 절반은 여전히 확인되지 않으며, 예수가 실존하지 않았더라도 바울이 케파와 야고보를 만났다는 1인칭 기록은 설명되어야 한다.
세 층의 증거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집단은 가장 튼튼하다. 예수 사후 10~20년 안에 형성된 문구가 "열둘"이라는 호칭을 쓰고, 서로 독립된 네 갈래 자료가 같은 집단을 전제하며, 숫자 12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가리키는 상징이라는 점이 예수의 활동 성격과 맞물린다. 다만 이 증거가 보증하는 것은 인원이 정확히 열둘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열둘"이라 불린 핵심 집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유다 이탈 이후에도 같은 호칭이 쓰인 것이 그 증거다. 샌더스가 이 항목을 확실한 사실 목록에 넣으면서도 그중 가장 약하다고 단 것은 이 차이를 의식한 판단이다.
개인은 둘로 갈라진다. 바울이 직접 만났다고 1인칭으로 쓴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요세푸스가 확인해 주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실존이 확정된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사도행전이 41~44년 사이의 처형으로 기록한다. 나머지는 다르다. 다대오, 바돌로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젤롯 시몬은 명단 밖에서 행적이 전해지지 않고, 명단 안에서조차 이름이 흔들린다. 인명 통계 연구는 명단 전체가 창작이라는 설명에 부담을 주지만 개별 인물을 세워 주지는 못한다. 1세기 갈릴리에서 그 계층의 개인을 확인할 외부 사료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 인물들에 대한 정직한 판정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보류다.
최후의 이야기는 가장 약하다. 1세기 자료로 죽음이 서술되는 사람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예수의 동생 야고보, 그리고 방식과 장소 없이 고난만 언급되는 베드로뿐이다. 거꾸로 매달린 십자가, 인도 선교, 페르시아 순교는 모두 2세기 이후의 외경과 전설에 근거한다. 자기 진영에 유리한 방향으로 자료를 읽을 이유가 충분한 연구자조차 절반 이상의 사도에 대해 "반반"이라는 판정을 내놓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의 배경이 되는 네로 박해 자체가 지금 학술지에서 다투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실존했는가"라는 물음에 하나의 답을 요구하면 답이 왜곡된다. 집단을 본체로 보면 답은 그렇다에 가깝고, 명단의 열두 자리를 본체로 보면 답은 일부는 확정되고 일부는 확인 불가에 걸치며, 순교담을 본체로 보면 대부분 후대 자료라고 해야 한다. 쟁점은 어느 층을 묻고 있는지를 먼저 정하는 데 있다.
남는 물음은 방법에 관한 것이다. 지난 20~30년 사이 이 분야에서 벌어진 변화는 새 사료의 발견이 아니라 판정 도구의 재검토였다. 당혹의 기준을 비롯한 진정성 기준들은 신뢰를 잃었고, 그 자리에 인명 통계 같은 정량적 접근이 들어왔지만 그 접근 역시 2023년부터 학술지에서 방법론 공방을 겪는 중이다. 도구가 바뀌면 같은 자료에서 다른 답이 나온다. 발굴이 새로 무언가를 내놓을 가능성은 낮다. 1세기 어부의 이름이 새겨진 유물이 나올 확률은 사실상 0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 문제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자료가 아니라 자료를 다루는 방식이고, 지금 진행 중인 통계 논쟁의 귀결이 그 방식의 한 자리를 결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