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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열 재앙과 고고학 — 무엇이 확인되고 무엇이 확인되지 않으며, 이푸웨르 파피루스는 왜 근거가 되지 못하는가

삼각주에 셈족이 살았다는 것은 물증으로 확인된다. 재앙이 일어났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 사이의 거리를 메우려고 가장 자주 동원되는 문서가 이푸웨르 파피루스인데, 이 문서는 재난 보도가 아니다.

2026년 9월 12일

네덜란드 라이덴의 파피루스 한 장이 짊어진 무게

네덜란드 라이덴의 국립고대박물관에는 파피루스 한 장이 있다. 소장 번호는 라이덴 344번이고, 앞면에 이집트 신관문자로 긴 시가 적혀 있다. 신관문자는 상형문자를 붓으로 빠르게 흘려 쓴 필기체다. 이 문서를 처음 완역해 출판한 사람은 영국 이집트학자 앨런 가디너이며, 1909년의 일이다. 가디너가 붙인 제목은 『라이덴의 신관문자 파피루스에 담긴 어느 이집트 현자의 훈계』였고, 여기서 「이푸웨르의 훈계」라는 통칭이 나왔다.

이 시의 화자 이푸웨르는 왕과 조정을 향해 나라가 무너졌다고 말한다. 강이 피가 되었다는 구절이 있고, 역병이 온 땅에 퍼졌다는 구절이 있으며,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고 부자가 가난해졌다는 구절이 있다. 출애굽기 7장에서 12장까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겹쳐 읽고 싶어지는 문장들이다. 그래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이 파피루스는 이집트 열 재앙의 목격 기록으로 거듭 제시되었다. 리버풀대학교의 이집트학자 롤런드 엔마치는 2011년 케네스 키친 기념 논문집에 실은 「어느 중기 이집트어 시의 수용」에서, 이 시가 이집트학 바깥 독자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경로는 출애굽 기사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쓰인 것이라고 적었다.

물음은 여기서 시작한다. 출애굽기가 기록한 열 차례의 재앙은 고고학으로 확인되는가. 확인된다면 어느 자료가 무엇을 확인해 주며, 확인되지 않는다면 그 빈자리를 메우려고 동원되는 자료들은 어디서 무너지는가. 이 글이 확인하려는 논지는 하나다. 이집트 삼각주에 서셈족 주민이 살았고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는 배경은 여러 갈래의 물증으로 확인되지만, 재앙이라는 사건 자체는 어떤 자료로도 확인되지 않으며, 그 간격을 메우려고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이푸웨르 파피루스는 재난 보도가 아니라 장르가 정해진 정치 문학이다.

'열 재앙'이라는 이름은 본문에 없다

먼저 낱말을 정리해야 논의가 흔들리지 않는다. 한국어권에서는 이 사건들을 저주라고 부르는 관행이 있지만, 저주는 말로 남에게 화가 내리기를 비는 행위를 가리키므로 본문의 개념과 맞지 않는다. 히브리어 성경은 이 사건들을 두 낱말로 부른다. 하나는 오트(אוֹת)로 표징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모페트(מוֹפֵת)로 이적이라는 뜻이다. 타격을 뜻하는 마카(מַכָּה)는 출애굽기 9장 14절, 11장 1절, 12장 13절에만 나온다. '열 재앙'이라는 고정 명칭은 후대의 정리다.

행위의 주체도 짚어야 한다. 한국어로 '모세가 내린 재앙'이라고 부르는 관행이 있으나, 본문에서 재앙을 일으키는 주체는 야훼이고 모세와 아론은 지팡이를 들거나 재를 뿌리는 매개자로 등장한다. 영어권 학계의 표준 명칭도 '이집트의 재앙들'이며 모세를 주어로 삼지 않는다.

연대가 정해지지 않으면 대조할 지층도 정해지지 않는다

고고학으로 어떤 사건을 확인하려면 먼저 그 사건이 언제 일어났다고 보는지를 정해야 한다. 출애굽 연대는 오늘날까지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

이른 연대는 열왕기상 6장 1절에 근거한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나온 지 480년째 되는 해에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고 적는다. 솔로몬의 성전 착공을 기원전 966년 무렵으로 잡고 480을 더하면 기원전 1446년이 나온다. 이집트 왕조로는 제18왕조에 해당한다.

늦은 연대는 출애굽기 1장 11절의 지명에 근거한다. 이 구절은 히브리인들이 파라오를 위해 국고성 두 곳을 지었다고 하면서 그 이름을 밝힌다.

וַיָּשִׂ֤ימוּ עָלָיו֙ שָׂרֵ֣י מִסִּ֔ים לְמַ֥עַן עַנֹּת֖וֹ בְּסִבְלֹתָ֑ם וַיִּ֜בֶן עָרֵ֤י מִסְכְּנוֹת֙ לְפַרְעֹ֔ה אֶת־פִּתֹ֖ם וְאֶת־רַעַמְסֵֽס׃

와야시무 알라브 사레 미심 레마안 안노토 베시블로탐 와이벤 아레 미스케노트 레파르오 에트 피톰 웨에트 라암세스

그들은 그 위에 부역 감독들을 세워 짐을 지워 괴롭혔다. 그리하여 그는 파라오를 위하여 국고성 피톰과 라암세스를 지었다.

출애굽기 1장 11절. 레닌그라드 사본에 기초한 마소라 본문. 한국어는 직접 옮김.

라암세스는 람세스 2세의 이름에서 나온 지명이며, 이 파라오는 기원전 13세기에 재위했다. 이 단서를 따르면 출애굽은 기원전 1250년 무렵이 된다. 두 안 사이가 200년 가까이 벌어진다. 청동기 후기의 200년은 이집트 왕조가 두 번 바뀌고 가나안의 도시들이 세워졌다 무너지는 시간이므로, 어느 안을 택하느냐에 따라 대조해야 할 지층 자체가 달라진다.

이 문제가 논의를 어떻게 일그러뜨리는지는 검증의 구조를 보면 드러난다. 어떤 자료가 이른 연대와 맞지 않으면 늦은 연대를 택하고, 늦은 연대와 맞지 않으면 이른 연대를 택하는 식으로 옮겨 다닐 수 있다면, 그 검증은 반증 가능성을 잃는다. 연대를 먼저 고정하지 않은 채 자료를 모으는 작업은 수집에 머문다.

이집트 기록에 남은 셈족: 브루클린 파피루스

배경 쪽으로 가면 자료가 제법 있다. 뉴욕 브루클린 박물관에 소장 번호 35.1446번 파피루스가 있다. 미국인 수집가 찰스 에드윈 윌버가 1881년에서 1896년 사이 나일강을 오르내리며 이집트에서 사들인 것이고, 출처는 테베 일대로 추정된다. 온전했을 때 길이가 2미터를 넘었고, 신관문자로 앞뒷면에 걸쳐 적혀 있으며, 필체가 여러 사람이라 몇 세대에 걸쳐 내용이 덧붙었다. 연대는 기원전 1809년에서 1743년 사이로 잡힌다. 브루클린 박물관의 이집트학자 윌리엄 헤이스가 1955년에 전문을 번역해 출판했다.

앞면에는 큰 감옥 또는 노역장으로 번역되는 기관에서 달아난 이집트인 80명의 명단이 있다. 이름, 아버지 이름, 원래 소속된 관리나 기관, 성별, 현재 소재가 적혀 있고 사건 종결 여부까지 표시되어 있다. 뒷면에는 세네브티시라는 테베 귀족 여성이 하인 95명의 소유권을 법적으로 확정하는 절차가 적혀 있다. 이 95명 가운데 45명의 이름이 서아시아 계통이다.

이 문서가 무엇을 보여 주고 무엇을 보여 주지 않는지는 구분해야 한다. 한 가문의 하인 절반 가까이가 서아시아 출신이었다는 것은 제13왕조 이집트에 이 계통 인구가 빠르게 늘고 있었다는 뜻이며, 그들이 종속적 지위에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견고하다. 그러나 이 명단의 이름들을 히브리 이름이라고 부르는 서술은 시대착오다. 헤이스 본인이 1955년 판본에서 이 이름들을 일관되게 '아시아계'라고 불렀고, 브루클린 박물관도 지금까지 같은 용어를 쓴다. 성경의 역사성을 적극 옹호하는 쪽의 연구자들도 같은 태도를 지켰다. 윌리엄 올브라이트, 제임스 호프마이어, 케네스 키친은 이 명단의 인물들을 아시아계 또는 셈족이라고 불렀지 히브리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기원전 18세기의 서셈어 이름은 가나안과 시리아 일대의 여러 집단이 함께 썼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어온 목축민: 아나스타시 6번 파피루스

두 번째 자료는 아나스타시 6번 파피루스다. 메르넵타의 재위기, 곧 기원전 13세기 말에 작성된 이집트 행정 서신 모음이고, 54행에서 56행에 국경 초소의 보고가 실려 있다. 에돔 지역의 샤수 부족들을 초소를 지나 통과시켰으며, 그들과 그들의 가축을 살리기 위하여 체쿠에 있는 피톰의 저수지로 보냈다는 내용이다. 샤수는 이집트어로 유목민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체쿠는 오늘날 와디 투밀라트 일대로 비정되며, 여기를 성경의 숙곳으로 보는 견해가 앙리 브룩슈 이래 널리 받아들여졌다. 피톰은 이집트어 페르아툼, 곧 창조신 아툼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 문서와 창세기 46장의 상황은 구조가 같다. 가나안 쪽에서 가뭄을 피해 가축을 몰고 온 셈족 집단이 이집트 관리의 허가를 받아 삼각주 동쪽 변두리에 자리를 잡는다. 만프레트 비타크와 게리 렌즈버그가 공동 집필한 『이집트와 출애굽』의 해당 장은 이 문서가 성경 기사와 아주 가까운 평행 사례라고 정리한다. 다만 여기서도 한계는 분명하다. 이 문서에 나오는 집단은 샤수로 불리고 에돔과 연결되어 있지, 이스라엘이라고 적혀 있지 않다. 같은 시기의 이집트 기록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따로 존재하므로, 서기가 두 집단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샤수 이집트 기록이 시리아·팔레스타인 일대의 이동 목축민을 부르던 말이다. 특정 민족의 이름이라기보다 생활 방식에 따른 범주이고, 제18왕조부터 제20왕조까지 폭넓게 쓰였다. 홍해 연안의 집단에까지 이 말이 쓰인 사례가 있어 지리적 범위가 넓다. 샤수와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자료는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

메르넵타 석비가 알려 주는 것과 알려 주지 않는 것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이집트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자료는 메르넵타 석비다. 플린더스 피트리가 1896년 테베에서 찾아냈고, 스물여덟 줄의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지금은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 소장 번호 JE 31408번으로 보관되어 있다. 피트리와 함께 일한 빌헬름 슈피겔베르크가 처음 번역했다. 석비 자체는 아멘호테프 3세의 석비를 재활용한 것으로, 거친 뒷면에 새겨져 있어 판독이 까다롭다고 슈피겔베르크가 1897년 보고서에 적었다.

본문의 대부분은 메르넵타가 리비아와 그 동맹 세력을 무찌른 기록이다. 그런데 마지막 세 줄에서 가나안 원정으로 화제가 바뀌고, 27행에 이스라엘이 등장한다. 가나안이 약탈당했고, 아스글론이 제압되었고, 게셀이 함락되었으며, 야노암이 사라졌고, 이스라엘은 황폐해져 그 씨가 없다는 내용이다. 메르넵타의 재위는 기원전 1213년에서 1203년이므로 석비의 연대는 기원전 1207년 무렵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에 붙은 한정사다. 이집트 문자에는 낱말의 범주를 지시하는 기호가 따라붙는데, 아스글론과 게셀과 야노암에는 도시나 지역을 뜻하는 기호가 붙은 반면 이스라엘에는 사람 집단을 뜻하는 기호가 붙어 있다. 기원전 13세기 말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안에 존재했으며 아직 영토 국가가 아닌 집단으로 인식되었다는 뜻이다.

이 석비가 출애굽 논의에서 하는 일은 하한선을 긋는 것뿐이다. 기원전 1207년에는 이스라엘이 이미 가나안에 있었으므로 출애굽은 그보다 앞이어야 한다. 석비는 이스라엘이 어디서 왔는지, 이집트를 떠난 적이 있는지, 재앙이 있었는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집트 왕실 기록이 이스라엘을 자기가 무찌른 대상으로 적고 있다는 사실은, 이집트가 이 집단에게 굴복해 내보냈다는 서사와 나란히 놓기 어렵다.

광야가 비어 있다: 카데스바네아

민수기는 광야 40년의 대부분을 카데스바네아에서 보냈다고 적는다. 이 지명은 오늘날 시나이반도 북동부 와디 엘아인 골짜기의 텔 엘쿠데이라트로 비정된다. 사철 물이 솟는 오아시스이고 교역로가 지나가며, 1914년 레너드 울리와 T. E. 로런스가 이곳을 지목한 뒤 학계의 다수가 이 비정을 받아들였다.

발굴은 1956년 모셰 도탄이, 1976년부터 1982년까지 루돌프 코헨이 수행했다. 결과는 이렇다. 이 언덕에는 철기 시대 요새가 세 겹으로 쌓여 있다. 가장 아래 것은 기원전 10세기의 타원형 요새이고, 그 위에 기원전 8세기 후반의 두꺼운 벽 요새가 있으며, 다시 그 위에 기원전 7세기의 이중벽 요새가 있다. 마지막 요새는 기원전 7세기 말이나 6세기 초에 파괴되었고, 파괴한 쪽은 바빌로니아로 추정된다.

청동기 후기 층은 나오지 않았다. 코헨 본인이 발굴 보고에서 이 결과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유적이 잘못 비정되었을 가능성, 초기 거주층이 발굴 구역 바깥에 있을 가능성, 초기 거주가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 그리고 성경의 기록이 왕정 시대에 만들어진 기원 설화일 가능성을 함께 열거하고, 어느 쪽인지 아직 정할 수 없다고 적었다. 처녀토까지 파 내려간 구역이 제한적이라는 단서도 붙였다.

이 유보를 존중하더라도 현재 상태는 분명하다. 수십만 명이 한 세대 동안 머물렀다는 기록에 대응하는 물질 흔적이 지목된 유적에서 나오지 않았다. 부재 증거가 부정 증거는 아니지만, 규모가 클수록 부재가 설명을 요구한다는 원칙은 남는다.

이푸웨르 파피루스: 사본의 연대와 본문의 연대는 다르다

이제 처음의 파피루스로 돌아간다. 이 문서를 출애굽의 증거로 쓰려면 두 가지가 성립해야 한다. 연대가 맞아야 하고, 장르가 재난 보도여야 한다. 둘 다 성립하지 않는다.

연대부터 본다. 사본과 본문은 다르다. 라이덴 344번 파피루스라는 물건 자체는 제19왕조, 곧 기원전 13세기 무렵에 필사되었다. 그러나 필사본의 연대는 그 안에 적힌 작품이 언제 지어졌는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작품의 연대는 어휘와 문법과 문학 관습으로 따진다. 이 방법으로 얻어진 결론은 제12왕조 후반보다 이르지 않다는 것이며, 리처드 파킨슨은 2002년 저서에서, 엔마치는 2008년 연구서에서, 안드레아스 슈타우더는 2013년 연구에서 각각 제12왕조 후기에서 제13왕조 사이를 제시했다. 제12왕조는 기원전 1939년에서 1760년, 제13왕조는 1759년에서 1630년이다.

이 연대는 어느 출애굽 안과도 맞지 않는다. 이른 연대의 기원전 1446년보다 적어도 200년, 늦은 연대의 기원전 1250년보다는 400년 이상 앞선다. 이 어긋남을 해소하려고 이집트 연대기 자체를 재구성하자는 주장이 나오지만, 그 재구성은 이푸웨르 하나를 맞추기 위해 왕조 목록과 토기 편년과 방사성탄소 연대를 함께 옮겨야 하는 작업이 된다. 하나를 맞추려고 나머지를 함께 움직이는 조정은 설명의 부담을 옮겨 놓을 뿐이다.

장르 판정이 연대보다 무겁게 작용한다

연대를 접어 두더라도 장르 문제가 남는다. 가디너는 1909년 판본에서 이 시에 그려진 혼란이 제1중간기의 실제 사회 붕괴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제1중간기는 고왕국이 무너진 뒤 이집트가 분열해 있던 기간이다. 가디너의 해석은 오래 영향력을 유지했으나, 이후 연구는 다른 방향으로 갔다.

결정적인 관찰은 이 작품이 혼자 서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중왕국 이집트에는 '나라가 무너졌다'는 주제를 정형화된 수사로 노래하는 작품군이 있다. 질서가 뒤집히고, 천한 자가 높아지고, 자식이 아비를 공경하지 않고, 외지인이 삼각주로 들어오고, 강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문장을 여러 작품이 되풀이해 쓴다. 엔마치는 2008년 연구서에서 이푸웨르를 그 계열의 한 편으로 다루었다. 그 책의 제목이 『뒤집힌 세계』인 것도 이 장르 관습을 가리킨다. 그리고 엔마치 본인은 이 시가 출애굽과 관련된다고 보지 않는다.

이 작품의 목적도 재난 보도와 어긋난다. 시의 화자는 왕과 조정 앞에서 말하고, 불의한 관리를 통제하는 왕이 좋은 왕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치윤리 논설로 분류된다. 재난의 목록은 주장을 세우기 위한 재료로 쓰인다. 엔마치 본인의 번역과 주석을 포함한 학계의 정리는, 이 파피루스가 중왕국 애가 문학 안에 정확히 들어맞으며 출애굽 이야기와 관계가 없다는 쪽이다.

2020년에는 엘런 모리스가 제임스 호프마이어 기념 논문집에 「트라우마를 쓰다: 이푸웨르와 문화적 기억의 관리」를 실었다. 이 연구는 이 작품을, 집단이 겪은 위기를 후대가 다룰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해 보존한 기억 장치로 읽는다. 이 접근에서도 파피루스는 사건의 증인이 아닌 기억의 산물로 남는다.

장르 판정이 왜 연대만큼 중요한가 같은 문장이라도 어떤 종류의 글에 실렸느냐에 따라 증거 가치가 달라진다. '강이 피가 되었다'는 문장이 관리의 보고서에 있으면 사건의 단서이고, 정형화된 애가에 있으면 그 장르의 상투구다. 이푸웨르에서 이 문장이 놓인 자리는 후자다. 그래서 연대가 우연히 맞아떨어진다 해도 이 문서만으로는 사건을 세울 수 없다.

결론 — 배경은 개연적이고 사건은 비어 있으며, 채워 넣은 자료는 다른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확인한 것을 논지 기준으로 묶으면 세 갈래다.

첫째, 배경은 여러 갈래의 독립 자료로 확인된다. 브루클린 파피루스는 제13왕조 이집트의 한 가문에서 하인의 절반 가까이가 서아시아 출신이었음을 보여 준다. 아나스타시 6번 파피루스는 에돔 쪽 목축민이 국경을 넘어 삼각주 동쪽 목초지에 자리 잡는 절차를 보여 준다. 출애굽기가 그리는 상황, 곧 셈족 집단이 이집트 변경에 들어와 살다가 종속적 지위로 떨어지는 구도는 그 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일의 범주 안에 있다.

둘째, 사건은 비어 있다. 재앙의 발생을 기록한 이집트 문서가 없고, 수십만 명의 이동을 뒷받침하는 광야의 물질 흔적이 없으며, 이스라엘이 처음 언급되는 메르넵타 석비는 이집트가 이 집단을 무찔렀다고 적는다. 연대조차 고정되지 않아 어느 지층과 대조해야 하는지가 정해지지 않는다.

셋째, 그 빈자리를 메우려고 동원된 자료는 다른 것을 말한다. 이푸웨르 파피루스의 사본은 제19왕조 것이지만 본문은 제12왕조 후기에서 제13왕조 사이의 작품이고, 장르는 중왕국 애가이며, 목적은 왕권의 정당성을 논증하는 데 있다. 이 문서를 목격 기록으로 읽으려면 연대와 장르를 동시에 뒤집어야 하는데, 둘 다 독립된 근거 위에 서 있다.

남는 물음은 방법론 쪽에 있다. 어떤 종교 서사가 역사적 사건에서 나왔는지 판정하려 할 때, 배경의 개연성이 확인되면 사건도 개연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 글이 검토한 자료들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삼각주에 셈족이 살았다는 사실과 그들에게 열 차례의 재앙이 내렸다는 서술 사이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증거가 필요하며, 뒤쪽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나올 가능성도 열려 있지만, 그때까지 앞쪽 자료로 뒤쪽을 대신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