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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이야기 · 3

홍수 이야기의 원전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 1872년 스미스의 해독부터 2014년 방주 토판까지 계속 바뀌어 온 본문

메소포타미아 홍수 이야기를 읽을 때 사람들은 고정된 원문이 있다고 전제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1872년 첫 해독 이후 150여 년 동안 새 점토판이 나올 때마다 본문의 모양이 바뀌었고, 주인공의 이름과 배의 형태와 작품의 범위까지 수정되었다. 창세기 쪽도 사정이 비슷하다. 이 이야기의 원전은 지금도 손질되는 중인 작업물이다.

2026년 9월 12일

1872년 12월 3일, 총리가 앉아 있던 강연

런던의 성서고고학회는 1872년 12월 3일 저녁 모임을 열었다. 발표자는 조지 스미스라는 대영박물관 직원이었다. 그는 판화 조각공으로 일하다가 박물관 전시실을 드나들며 설형문자를 독학했고, 니네베에서 실려 온 점토판 조각을 맞추는 수리공으로 채용된 사람이었다.

강연 제목은 「홍수에 관한 칼데아의 기록」이었다. 청중 가운데 당시 영국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앉아 있었다고 타임스가 보도했다. 학술 강연에 현직 총리가 참석한 이유는 제목이 알려 주고 있다. 성서의 홍수 기사보다 오래된 기록이 나왔다는 소식이 성서의 역사성에 관한 논쟁으로 곧바로 이어질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스미스가 읽은 물건은 니네베의 아슈르바니팔 도서관 자리에서 나온 점토판이다. 대영박물관 등록번호 K.3375로,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와 호르무즈드 라삼이 1840년대와 1850년대에 발굴해 런던으로 보낸 수십만 점의 조각 가운데 하나였다. 스미스는 그 조각들 사이에서 홍수를 묘사한 부분을 찾아내고 서로 맞춰 붙였다.

그가 이 작품에 붙인 이름은 지금 쓰는 이름과 다르다. 스미스는 주인공의 이름을 이즈두바르로 읽었고, 자신이 찾아낸 것을 이즈두바르 연작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연작이 적어도 열두 개의 토판으로 이루어졌으며 홍수를 묘사한 것이 열한째 토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즈두바르라는 판독이 길가메시로 바로잡힌 것은 뒤의 일이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이름이 첫 해독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강연 내용은 이듬해 성서고고학회 회보 2권 213쪽부터 234쪽에 실렸다. 모임이 끝나자마자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대리인이 스미스에게 접근해, 사라진 부분을 찾는 발굴을 신문사 비용으로 재개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스미스는 1873년 니네베로 떠났다.

교정본 설형문자 작품은 온전한 한 권으로 남아 있지 않다. 여러 유적에서 나온 조각과 여러 시대의 사본이 흩어져 있고, 같은 자리를 다르게 적은 사본도 있다. 연구자는 이 조각들을 맞추고 깨진 부분을 다른 사본으로 메워 하나의 읽을 수 있는 본문을 만드는데, 그 결과물을 교정본이라 한다. 교정본에는 어느 조각에서 왔고 어디가 복원인지가 표시된다. 새 조각이 나오면 교정본이 바뀐다. 그래서 같은 작품이라도 1930년대 교정본과 2000년대 교정본의 본문이 다르다.

1914년, 수메르어 판본이 뒤늦게 공개되다

스미스가 읽은 것은 아카드어 판본이었다. 더 오래된 수메르어 판본이 있다는 사실은 40년 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 판본을 담은 점토판은 1889년에서 1900년 사이 니푸르에서 발굴되어 펜실베이니아 대학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등록번호 CBS 10673이다. 그런데 이 판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복사본과 번역을 공개한 것은 1914년, 독일 아시리아학자 아르노 포에벨이었다. 발굴과 공개 사이에 십수 년의 간격이 있다. 포에벨은 같은 해에 펴낸 바빌로니아 부문 간행물 4권과 5권에 이 자료를 실었다.

남은 것은 여섯 단으로 된 판의 아래 3분의 1이다. 온전한 판은 260행 안팎이었을 것으로 본다. 새뮤얼 크레이머는 1967년 글에서 이 조각이 여전히 유일본이며 짝이 되는 사본이 없다고 적었다. 이스탄불과 필라델피아의 소장품을 뒤졌지만 깨진 부분을 복원할 자료를 찾지 못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크레이머는 1964년 여름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일하던 중 관리자 에드몽 졸베르제가 오래전에 사들여 연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수메르어 문학 토판 육십여 점을 가져다주었다고 기록했다.

수메르어 판본이 늦게 공개되면서 계보의 그림이 바뀌었다. 아카드어 판본이 가장 오래된 형태라는 전제가 무너졌고, 이 이야기가 수메르어에서 아카드어로 옮겨 갔다는 순서가 자리잡았다. 40년 넘게 유지되던 계보가 점토판 한 점으로 수정되었다.

1965년과 1969년, 조각이 작품이 되다

아트라하시스는 더 복잡한 경로를 밟았다. 스미스가 이 작품의 조각들도 맞춰 번역했고 칼데아의 창세기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냈지만, 주인공의 이름을 잘못 읽었다. 1899년 독일 학자 하인리히 치머른이 그 이름을 아트라하시스로 바로잡았다. 그 앞뒤로 다른 조각들이 각자 다른 경로로 공개되었다. 프랑스 사제 뱅상 셰일이 1898년에 홍수 서사시의 한 조각을 냈는데, 그것은 스미스의 것과 다른 판본이었고 셰일은 이를 암미사두카 시대의 것으로 연대를 매겼다. 같은 해 시어필러스 핀치스가 같은 시대의 신화 본문 하나를 복사했는데 그 내용은 인간의 창조였다.

흩어진 조각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묶인 것은 1965년이다. 윌프리드 램버트와 앨런 밀라드가 대영박물관 소장 문학 본문을 모은 총서 46권에 추가 토판들을 공개했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1969년에 아트라하시스: 홍수에 관한 바빌로니아 이야기를 냈다. 아카드어 음역과 영어 번역과 주석과 점토판 선 도면을 한 권에 담은 이 책이 지금도 표준 교정본으로 쓰인다.

가장 완전한 사본의 연대는 필사기에 적힌 왕 이름으로 확인된다. 함무라비의 증손자 암미사두카의 재위 기간인 기원전 1646년에서 1626년 사이다. 서기의 이름은 이피크아야로 읽으며, 옛 판독에서는 쿠아야로 읽었다. 그가 남긴 것이 세 개의 토판으로 된 판본이다. 우가리트에서도 조각 하나가 나왔고, 아시리아 방언으로 된 판본이 아슈르바니팔 도서관 자리에서 확인되었다.

1872년에 사람들이 읽은 것과 1969년 이후에 읽는 것은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앞의 것은 길가메시 서사시 안에 든 홍수 삽화였고, 뒤의 것은 인간 창조에서 시작해 역병과 기근을 거쳐 홍수로 가는 독립된 작품이다. 100년 사이에 작품의 범위 자체가 달라졌다.

2014년, 배가 둥글어졌다

가장 최근의 큰 수정은 2014년에 나왔다. 대영박물관의 설형문자 담당자 어빙 핑켈은 2009년 더글러스 시몬즈라는 소장자에게서 점토판 한 점을 받아 판독했다. 휴대전화만 한 크기로 가로 11.5센티미터, 세로 6.0센티미터이고 앞뒤로 60행이 적혀 있다. 필사기가 없어 서기가 연대를 밝히지 않았지만, 글자의 형태와 문법으로 기원전 1900년에서 1700년 사이로 본다. 첫 줄은 아트라하시스의 도입부로 아시리아학자들에게 익히 알려진 문장이었다.

이 판이 특별한 이유는 내용이다. 배를 어떻게 지으라는 지시가 치수와 자재 분량까지 적혀 있는 유일한 설형문자 자료다. 야자 섬유 밧줄의 길이, 나무 갈빗대의 수, 방수를 위해 끓인 역청의 양이 나온다. 핑켈이 읽어 낸 배의 모양은 앞서 알려진 어느 판본과도 달랐다. 원형이었다.

핑켈의 계산으로 이 배는 바닥 면적 3,600제곱미터에 벽 높이 6미터이고, 지름이 약 70미터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강을 건널 때 쓰던 원형 배인 구파를 거대하게 키운 형태다. 판독의 핵심은 아카드어 낱말 킵파툼으로, 원이라는 뜻이다. 핑켈은 밧줄과 갈빗대의 분량이 원형 평면과 맞아떨어진다고 보았다.

둥근 배가 낯설게 보이지만 기능으로는 무리가 없다. 방주는 어딘가로 항해할 필요가 없었다. 물 위에 떠서 안에 실은 것을 지탱하기만 하면 된다. 앞 편에서 확인했듯 길가메시 판본의 배도 가로와 세로와 높이가 같은 상자이고 돛과 노가 없다. 이 판본은 같은 성격을 다른 형태로 구현한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손상된 뒷면에 있다. 짐승들이 둘씩 짝지어 배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그때까지 이 표현은 창세기에만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히브리어 본문에 고유하다고 생각되던 요소가 그보다 천 년 이상 앞선 아카드어 점토판에 이미 있었다.

학계의 반응은 호평이되 무조건적이지 않았다. 라이프치히 대학의 미하엘 슈트렉은 아시리아학과 서아시아 고고학지 107권(2017) 140쪽 이하에 서평을 실어, 이 책이 유익하고 재미있으며 전문 설형문자 연구자도 핑켈의 방대한 지식에서 많은 것을 얻는다고 평가하면서, 동시에 때때로 반론을 부르는 책이라고 적었다. 원형 해석 자체에 대한 반박도 나왔다. 본문이 제시한 갈빗대 치수가 원형 평면을 성립시키기에 수학적으로 부족하다는 주장인데, 이 반박은 창조론 계열 학술지에 실린 것이라 아시리아학계의 일반적 평가와는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원본이 사라진 판본을 인용의 인용으로 읽는다

점토판만 문제가 아니다. 홍수 이야기의 다섯째 판본은 아예 원본이 없다.

베로소스는 바빌론의 에사길라 신전에 속한 사제로, 셀레우코스 왕조 시기에 그리스어로 바빌로니아 역사서를 썼다.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에게 헌정했고 집필 시기는 기원전 290년에서 278년 사이로 본다. 세 권으로 되어 있었고, 첫 권은 세상의 시작부터 홍수까지를 다루었다.

이 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남은 것은 후대 저자들이 인용한 조각뿐이다. 기원전 1세기의 알렉산드로스 폴리히스토르가 인용했고, 4세기의 에우세비오스가 그 인용을 다시 옮겼으며, 홍수 대목은 9세기의 게오르기오스 싱켈로스를 거쳐 전해졌다. 삼차 사차 인용을 통과한 본문이다. 스탠리 버스틴이 1978년에 낸 교정본과 제럴드 페르브루게와 존 위커샴이 1996년에 낸 번역본이 지금 쓰이는 판본이다.

내용은 이렇다. 홍수 이전에 열 명의 왕이 있었고 마지막이 크시수트로스다. 이 이름은 수메르어 지우수드라를 그리스어로 옮긴 형태다. 크로노스라는 그리스 이름으로 적힌 신이 꿈에 나타나 다이시오스 달 15일에 홍수가 온다고 알리고, 모든 기록을 태양의 도시 시파르에 묻으라고 명한다. 물이 빠지자 크시수트로스는 새를 내보내는데, 처음 돌아온 새는 발에 진흙이 묻어 있었고 세 번째로 내보낸 새는 돌아오지 않았다. 배는 아르메니아에 걸렸고, 남은 사람들은 시파르로 돌아가 묻어 둔 기록을 파내 인류에게 전한다.

여기에는 앞선 판본에 없는 요소가 있다. 문자로 된 지식을 보존하는 장면이다. 이것이 베로소스가 덧붙인 것인지 그가 참고한 설형문자 본문에 있던 것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원본이 없기 때문이다. 홍수 이전 열 명의 왕이 432,000년을 다스렸다는 계산도 마찬가지다. 창세기의 홍수 이전 열 족장과 수가 같은데, 이 일치가 무엇을 뜻하는지 판정하려면 베로소스가 실제로 무엇을 썼는지 알아야 한다.

창세기 안에도 두 벌의 서술이 있다

파손이 없는 창세기는 사정이 다를 것 같지만, 본문 안에 서로 맞지 않는 서술이 두 벌 들어 있다.

홍수의 기간이 두 번 나온다. 창세기 7장 17절은 홍수가 사십 일 동안 땅에 있었다고 적고, 7장 24절은 물이 백오십 일 동안 땅에 넘쳤다고 적는다. 8장 3절에도 백오십 일이 다시 나온다. 짐승의 수도 두 번 나온다. 한 곳은 암수 한 쌍씩 배에 들이라 하고, 다른 곳은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씩 들이라 한다. 신을 부르는 말도 갈마든다. 어떤 대목은 야훼를 쓰고 어떤 대목은 엘로힘을 쓴다.

자료비평과 두 자료 같은 이야기가 한 본문 안에서 두 번 되풀이되고 두 서술이 서로 맞지 않을 때, 원래 두 개의 글이 있었고 뒤에 편집자가 그것을 엮었다고 설명하는 방법이 자료비평이다. 창세기 홍수 기사에서는 야훼라는 호칭을 쓰고 정결한 짐승 일곱 쌍을 말하는 대목을 야휘스트 자료, 엘로힘을 쓰고 암수 한 쌍을 말하며 날짜를 정밀하게 적는 대목을 제사장 자료로 나눈다. 각각 머리글자를 따서 J와 P로 부른다.

이 본문은 오경 전체의 자료 구분이 시작된 자리다. 2026년 구약연구지 50권 3호 272쪽부터 298쪽에 실린 논문은 이 사정을 정리하면서, 홍수 기사가 18세기의 장 아스트뤽 이래 창세기와 오경의 자료 구분이 출발한 지점이었고 자료비평의 대표작이자 문서가설의 전형으로 불려 왔다고 적는다. 1753년의 아스트뤽에서 1853년의 후프펠트를 거쳐 1990년의 블룸, 1996년의 카, 2021년의 베이든까지 이 본문을 다룬 연구의 계보가 이어진다.

웬함의 반론과 그 뒤의 이동

1978년 고든 웬함이 베투스 테스타멘툼 28권 3호 336쪽부터 348쪽에 「홍수 서사의 응집성」을 실었다. 그는 백 년 넘게 이 본문이 오경에서 복합 서사의 대표 사례로 취급되어 왔으며, 이따금 반대 의견이 나왔지만 J와 P 두 자료로 이루어졌다는 학계의 합의를 흔들지 못했다는 진술로 글을 연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문법이다. 웬함은 프랜시스 앤더슨이 히브리어 통사론 연구에서 제기한 지적을 가져온다. 홍수의 시작과 방주 진입을 묘사하는 창세기 7장 6절에서 17절까지가 하나의 문법 단위이며 교차대구와 서사시적 반복을 정교하게 쓰고 있는데, 자료 분석은 그 가운데 7절에서 10절, 12절, 16절 후반을 J에 배정하고 나머지를 P에 배정한다. 한 문장의 앞뒤가 서로 다른 저자에게 나뉘어 배당된다. 웬함은 여기에 더해 홍수 기사 전체가 교차대구 구조를 이루며 그 설계가 단일 저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교차대구 첫 항목이 마지막 항목과 짝을 이루고 둘째가 끝에서 둘째와 짝을 이루는 식으로, 앞뒤가 거울처럼 대응하도록 배열한 구조다. 가운데에 놓인 항목이 전환점이 된다. 창세기 홍수 기사에서는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다는 8장 1절이 그 전환점에 해당하며, 물이 불어나는 과정과 빠지는 과정이 그 앞뒤에서 대응한다.

같은 구조를 놓고 정반대 결론도 나왔다. 스티븐 스콧은 2020년에 나온 논문집 교차대구: 연구 현황 35쪽부터 65쪽에 실은 글에서, 구조 분석이 오히려 두 자료설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J와 P가 각각 독립적으로 만든 두 개의 교차대구가 있었고 편집자가 그것을 하나로 합쳤다고 그는 보았다. 같은 증거가 단일 저자의 근거도 되고 두 저자의 근거도 되는 상태다.

2020년대에는 세 번째 제안이 나왔다. 앞서 언급한 2026년 구약연구지 논문은 홍수 기사가 여러 다른 본문에서 요소를 끌어와 상호텍스트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설명을 제시한다. 논쟁은 진행 중이고, 창세기 본문의 성립 연대 역시 확정되지 않았다. 창세기 전체는 기원전 5세기 무렵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1장에서 11장까지의 원시사가 기원전 3세기까지 내려올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결론 — 고정된 원문을 전제하면 이 이야기를 잘못 읽는다

150여 년의 경과를 늘어놓으면 본문이 계속 움직여 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1872년에 처음 읽힌 주인공의 이름은 이즈두바르였고 지금은 길가메시다. 1899년까지 아트라하시스의 이름은 잘못 읽히고 있었다. 1914년 이전에는 수메르어 판본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이 공개되자 계보의 순서가 바뀌었다. 1969년 이전에는 아트라하시스가 조각들의 모음이었고 그 뒤로 인간 창조에서 홍수까지 이어지는 독립 작품이 되었다. 2014년에는 배의 형태에 원형이라는 후보가 추가되었고, 창세기에만 있다고 여겨지던 둘씩이라는 표현이 그보다 훨씬 이른 아카드어 본문에서 확인되었다.

창세기 쪽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본문 자체는 파손 없이 전해졌지만, 그 본문이 하나의 글인지 두 자료의 결합인지, 아니면 여러 본문에서 끌어온 구성물인지는 250년 넘게 논쟁 중이다. 같은 교차대구 구조를 두고 단일 저자의 증거라는 판정과 두 자료의 증거라는 판정이 함께 나와 있다.

여기서 따라 나오는 것이 있다. 이 이야기의 판본들을 비교하거나 실제 사건에 대응시키려 할 때, 비교의 대상이 되는 본문 자체가 변수라는 사실이다. 앞의 두 편에서 다룬 문제가 여기에 걸린다. 네 판본의 차이 가운데 얼마가 실제 차이이고 얼마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점토판의 몫인지 확정할 수 없고, 지층의 연대가 아무리 정밀해져도 어느 진흙층이 이야기의 홍수인지는 본문이 정해 주어야 하는데 그 본문이 움직이고 있다.

실무적인 함의도 있다. 한국어로 나온 해설서 상당수는 20세기 중후반의 교정본을 옮긴 것이어서, 배의 형태나 산의 이름이나 작품의 범위가 현재 학계의 판독과 어긋나는 경우가 있다. 배가 걸린 산을 니시르로 적은 책과 니무쉬로 적은 책은 같은 자리를 다르게 읽은 두 시기의 교정본을 각각 따르고 있다. 어느 쪽이 틀렸다기보다 판독의 시점이 다르다.

남아 있는 물음은 앞으로 무엇이 더 나올 것인가다. 아트라하시스의 여러 조각은 100년에 걸쳐 하나씩 접합되었고, 방주 토판은 개인 소장자가 박물관에 가져오면서 알려졌다. 이라크와 시리아의 유적에는 발굴되지 않은 토판이 남아 있고, 이미 박물관 수장고에 들어간 것 가운데도 판독되지 않은 것이 있다. 크레이머가 1964년에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육십여 점의 미연구 토판을 건네받았던 것과 같은 일이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그때마다 이 이야기의 원전은 다시 한 번 손질된다.

이 글은 홍수 이야기를 다루는 세 편 가운데 셋째다. 첫째 편은 네 판본이 홍수의 원인과 결말을 어떻게 다르게 적는지를, 둘째 편은 이 이야기를 실제 지질·고고 사건에 대응시키려 한 시도들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