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 이야기 · 1
지우수드라, 아트라하시스, 우트나피슈팀, 노아는 같은 줄거리를 공유한다. 신이 홍수를 결정하고, 한 사람이 미리 경고를 듣고, 배를 짓고, 산에 걸리고, 제사를 올린다. 그런데 홍수가 왜 일어나는지와 이야기가 무엇으로 끝나는지는 판본마다 다르다. 그 차이는 앞쪽에 놓인 전제, 곧 인간이 무엇을 하려고 만들어진 존재인가라는 설정에서 나온다.
길가메시 서사시 열한째 토판에서 홍수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의 이름은 우트나피슈팀이다. 그는 자기 입으로 자신이 슈루팍 사람이며 우바라투투의 아들이라고 밝힌다. 그런데 배를 짓는 장면 한 줄에서만 다른 이름이 나온다. 앤드루 조지가 2003년에 낸 교정본은 49행을 이렇게 읽는다.
ana bāb atar-hasīs ipahhur mā[tum]
아트라하시스의 문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길가메시 서사시 표준판 11토판 49행. A. R. George, The Babylonian Gilgamesh Epic(Oxford, 2003)의 음역과 번역에 따름.
동틀 무렵 목수가 도끼를 들고 갈대 세공인이 돌을 들고 모여드는 장면이다. 배를 짓기 시작하는 자리인데, 그 배를 짓는 사람의 이름이 아트라하시스로 적혀 있다. 아트라하시스는 이 서사시보다 앞서 존재하던 별개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다. 홍수 이야기를 길가메시 서사시 안으로 옮겨 붙이는 과정에서 이름 하나가 바뀌지 않고 남았다.
이 한 줄은 네 판본의 관계를 본문 안에서 보여준다. 지우수드라와 아트라하시스와 우트나피슈팀은 한 이야기의 세 판본이며, 이름만 다르다. 노아는 히브리어 본문에 속하므로 계통이 다르지만, 새를 내보내는 순서와 산에 걸리는 배와 제사 장면이 앞의 셋과 겹친다.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은 오래전에 정리되었다. 이 글이 다루는 것은 겹치지 않는 부분이다. 홍수가 왜 일어나며 이야기가 무엇으로 끝나는지를 네 판본이 서로 다르게 적고 있고, 그 차이는 각 판본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 설정했는지에서 나온다. 그것이 이 글의 주장이다.
비교에 들어가기 전에 각 판본이 어떤 물건으로 남아 있는지 밝혀 둔다. 남은 분량이 다르면 없는 내용과 사라진 내용을 혼동하기 쉽기 때문이다.
수메르어 판본은 점토판 한 점이 전부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박물관이 소장한 CBS 10673으로, 니푸르에서 발굴되었고 글자체로 보아 기원전 17세기에 필사되었다. 여섯 단으로 된 판의 아래 3분의 1만 남았고, 온전한 판은 260행 안팎이었을 것으로 본다. 옥스퍼드 대학의 수메르 문학 전자 코퍼스는 이 작품을 1.7.4번으로 싣고 있는데, 남은 부분은 A부터 E까지 다섯 토막이고 토막마다 30행 이상이 비어 있다. 주인공 이름은 지우드수라로 읽는다. 한국어 표기는 지우수드라가 널리 쓰인다.
아트라하시스는 아카드어로 쓴 세 개의 토판이다. 가장 완전한 사본은 서기 이피크아야가 필사한 고바빌로니아 판본이고, 필사기에 적힌 왕 이름으로 함무라비의 증손자 암미사두카 때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암미사두카의 재위는 기원전 1646년부터 1626년까지다. 1965년 윌프리드 램버트와 앨런 밀라드가 대영박물관 소장 토판들을 새로 공개했고, 1969년에 두 사람이 낸 교정본이 지금도 표준으로 쓰인다.
길가메시 서사시 11토판은 니네베의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에서 나온 K.3375를 중심으로 복원한다. 물건 자체는 기원전 7세기 사본이지만 작품의 전승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열두 토판으로 된 표준판의 열한째이며, 앞뒤가 이어지는 온전한 서사 안에 홍수 이야기가 들어 있다. 네 판본 중 홍수 장면이 가장 길고 가장 온전하게 남은 것이 이 판본이다.
창세기 6장부터 9장까지는 히브리어 성경 본문이며, 파손이 없다. 인용은 슈투트가르트 히브리어 성경에서 가져온다.
아래 표는 네 판본이 같은 항목에서 무엇을 적고 있는지 늘어놓았다. 빈칸으로 두는 대신 '기록 없음'과 '본문 손상'을 구분해 적었다. 앞의 것은 남은 본문에 그 요소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뒤의 것은 그 자리가 깨져 알 수 없다는 뜻이다.
| 항목 | 지우수드라 | 아트라하시스 | 우트나피슈팀 | 노아 |
|---|---|---|---|---|
| 언어 | 수메르어 | 아카드어 | 아카드어 | 히브리어 |
| 사본 연대 | 기원전 17세기 | 기원전 17세기 | 기원전 7세기 | 중세 사본으로 전승 |
| 이름의 뜻 | 오랜 날의 생명을 붙잡은 자 | 지혜가 뛰어난 자 | 생명을 찾은 자 | 앞의 셋과 연결되지 않음 |
| 주인공의 신분 | 왕이며 구두 사제 | 왕 또는 현자 | 슈루팍 사람, 우바라투투의 아들 | 의인, 족장 |
| 홍수의 이유 | 본문 손상 | 인구 증가와 소음 | 기록 없음 | 땅에 가득한 폭력 |
| 결정한 쪽 | 안과 엔릴 | 엔릴 | 큰 신들의 합의 | 야훼 |
| 경고한 신 | 엔키 | 엔키 | 에아 | 야훼가 직접 |
| 경고 방식 | 옆벽에 대고 | 갈대벽에 대고 | 갈대 울타리에 대고 | 직접 명령 |
| 배의 형태 | 본문 손상 | 본문 손상 | 가로·세로가 같고 6층 | 300×50×30규빗, 3층 |
| 홍수 기간 | 7일 7야 | 7일 7야 | 6일 7야 | 비 40일, 물 150일 |
| 정박지 | 기록 없음 | 본문 손상 | 니무쉬산 | 아라랏의 산들 |
| 새를 내보냄 | 기록 없음 | 기록 없음 | 비둘기·제비·까마귀 | 까마귀, 비둘기 3회 |
| 제사 뒤 신의 반응 | 본문 손상 | 몰려들어 먹음 | 파리처럼 몰려듦 | 냄새를 맡음 |
| 주인공의 보상 | 신과 같은 영생, 딜문 정착 | 본문 손상 | 영생(이미 받은 상태로 등장) | 언약과 무지개 |
| 재발 방지 | 기록 없음 | 불임·유아 사망·독신 제도 | 기록 없음 | 다시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 |
| 마지막 명령 | 기록 없음 | 기록 없음 | 기록 없음 | 생육하고 번성하라 |
표의 아래 절반, 그러니까 홍수의 이유부터 마지막 명령까지가 이 글이 다루는 자리다. 위 절반은 네 판본이 서로 비슷하거나 손상으로 알 수 없는 항목이고, 아래 절반에서 판본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아트라하시스는 홍수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는다. 인간이 아직 없는 세계에서 시작한다. 첫 네 줄은 이렇다.
inūma ilū awīlum
ublū dulla izbilū šupšikka
šupšik ilī kabit-ma
dullum kabit maˀad šapšāqum신들이 사람이던 시절
아트라하시스, 고바빌로니아 시파르 판본, 토판 1 i 1~4. 클라우스 빌케의 음역과 번역에 따름.
그들은 부역을 졌고 흙 광주리를 날랐다
신들의 흙 광주리는 무거웠고
부역은 무거웠으며 고생이 많았다
첫 줄의 아윌룸은 아카드어로 사람을 가리키며, 특히 노예가 아닌 자유민을 뜻한다. 그러니 첫 줄은 신들이 사람의 자리에 있었다는 진술이다. 둘째 줄의 둘루는 부역, 곧 지배자가 부과해 거절할 수 없는 노동을 말한다. 슈프시쿠는 흙을 담아 나르는 광주리다. 운하를 파고 그 흙을 실어 나르는 작업이 이 서사시가 그리는 최초의 세계다.
노동은 하급 신들이 맡았다. 아카드어 본문은 신들을 두 무리로 나눈다.
이기기는 밤낮으로 일하며 파낸 구덩이에서 서로 불평하고 저주한다. 그러다 한 신이 나서서 감독관을 찾아가자고, 엔릴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자고 말한다. 선동한 신의 이름은 웨로 읽는다. 이어지는 장면은 노동 쟁의의 형태를 그대로 갖추고 있다.
ilū išmû zikiršu
išātam nēpešīšunu iddû-ma
marrīšunu išātam
šupšikkīšunu Girra ittakšū신들은 그의 말을 들었다
아트라하시스, 고바빌로니아 시파르 판본, 토판 1 ii 7~11. 클라우스 빌케의 음역과 번역에 따름.
연장에 불을 놓았고
삽에도 불을 놓았으며
흙 광주리에는 불의 신 기라를 붙였다
연장을 불태운 신들은 한밤중에 엔릴의 신전 에쿠르를 에워싼다. 본문은 밤이 경비의 중간에 이르렀고 집이 포위되었는데 신은 알지 못했다고 적는다. 시종 카카가 빗장을 만지고 문을 살펴본 뒤 누스쿠를 깨우고, 누스쿠가 엔릴을 침상에서 일으킨다. 엔릴은 무기를 가져오게 하고 겁먹은 얼굴이 된다. 그때 시종 누스쿠가 하는 말이 이 장면의 성격을 보여준다. 저들은 당신의 자식들인데 무엇이 두렵냐고 묻는다.
신들의 회의가 소집되고, 엔릴은 자신이 또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느냐고 항의한다. 사태의 해결책은 처벌이 아니었다. 노동을 대신할 존재를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램버트와 밀라드가 낸 교정본에서 1토판 220행대의 장면은 이렇게 진행된다. 신들은 지성을 가진 신 하나를 회의 자리에서 죽인다. 앞서 파업을 선동한 웨로 보는 판독이 있고, 게슈투에나 일라웰라로 읽는 판독도 있다. 출산의 여신 닌투는 그 신의 살과 피를 진흙에 섞어 인간을 빚는다. 본문은 그 뒤로 사람들이 북소리를 영원히 듣게 되었다고 적고, 죽은 신의 살에서 유령이 생겨나 그 신을 잊지 않게 한다고 덧붙인다. 창조를 마친 어머니 신 마미는 신들을 향해, 그들이 지성을 가진 신을 죽였으며 자신이 그들의 고된 부역을 없애고 그 짐을 인간에게 지웠다고 말한다.
여기까지가 홍수 이전의 설정이다. 인간은 신의 노동을 대신하려고 만들어졌고, 재료는 진흙과 살해된 신의 몸이며, 인간에게 지성과 유령이 있는 것은 죽은 신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와 겹치는 것은 흙이라는 재료 하나뿐이다. 창세기에는 신의 시체가 없고, 노동을 대신한다는 용도도 없다.
이 설정을 알아야 다음 장면이 이해된다. 인구가 늘자 문제가 생기는데, 그 문제가 도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트라하시스에서 사람은 불어나고 땅은 시끄러워진다. 엔릴은 그 소리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 그는 먼저 역병을 내렸고, 그것으로 부족하자 기근을 내렸으며, 마지막에 홍수를 결정한다. 세 번의 재난은 수를 줄인다는 같은 목적을 갖는다.
인간이 잘못한 것은 없다. 불어났고 시끄러웠을 뿐이다. 도덕 판단이 개입하지 않으므로 엔릴은 정의를 집행하는 신이 아니라 잠을 방해받은 신이다. 아트라하시스 2토판에는 엔릴의 결정을 인간에 대한 악한 처사라고 부르는 구절이 들어 있다. 재난을 내린 쪽을 비난하는 문장이 작품 안에 들어 있다.
창세기는 같은 자리에 다른 이유를 넣는다.
וַתִּשָּׁחֵ֥ת הָאָ֖רֶץ לִפְנֵ֣י הָֽאֱלֹהִ֑ים וַתִּמָּלֵ֥א הָאָ֖רֶץ חָמָֽס׃
밧팃샤헤트 하아레츠 리프네 하엘로힘 밧팀말레 하아레츠 하마스
땅이 하나님 앞에서 부패하였고, 땅에 폭력이 가득 찼다.
창세기 6장 11절. 슈투트가르트 히브리어 성경.
마지막 낱말 하마스는 강탈과 억압을 포함하는 폭력을 가리킨다. 랍비 문헌은 이 말을 재판으로 다루기 어려운 종류의 침해로 풀이해 왔고,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이 자리를 불의를 뜻하는 아디키아로 옮겼다. 어느 쪽이든 도덕 위반이다. 소음은 물리적 사태이고 폭력은 도덕 사태이므로, 같은 홍수를 놓고 두 판본은 다른 종류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아트라하시스는 신들이 왜 인간을 참지 못했는지 설명하고, 창세기는 인간이 왜 벌을 받았는지 설명한다.
원인이 바뀌면 신의 성격도 바뀐다. 잠을 방해받아 화가 난 신은 달래거나 속일 수 있다. 실제로 아트라하시스에서 엔키는 엔릴을 속여 인간을 살린다. 반면 정의를 집행하는 신을 속이는 장면은 창세기에 없다. 야훼가 노아에게 알리는 것은 공개된 명령이다.
홍수가 끝나고 살아남은 자가 제사를 올린다. 네 판본이 모두 가진 장면이다. 길가메시 11토판은 그 순간을 이렇게 적는다.
ilū īṣīnū irīša
ilū īṣīnū irīša ṭāb[a]
ilū kīma zumbē eli bēl niqî iptahrū신들이 그 냄새를 맡았다
길가메시 서사시 표준판 11토판 161~163행. A. R. George, The Babylonian Gilgamesh Epic(Oxford, 2003)의 음역과 번역에 따름.
신들이 그 좋은 냄새를 맡았다
신들은 파리처럼 제사 드리는 자 위로 몰려들었다
파리에 빗댄 표현이 조롱으로 읽히지만, 이 장면은 앞의 설정에서 곧바로 따라 나온다. 인간은 신의 노동을 대신하려고 만들어졌고, 그 노동에는 신에게 음식을 바치는 일이 들어 있다. 인간이 전멸하면 제물이 끊긴다. 아트라하시스 3토판의 해당 자리는 홍수 뒤 신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하다가 아트라하시스의 제사를 발견하고 몰려드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신이 인간의 노동에 의존한다는 전제가 여기서 드러난다.
창세기에도 같은 순서가 있다. 노아가 제단을 쌓고 제사를 올리며, 야훼가 그 냄새를 맡는다.
וַיָּ֣רַח יְהוָה֮ אֶת־רֵ֣יחַ הַנִּיחֹחַ֒ וַיֹּ֨אמֶר יְהוָ֜ה אֶל־לִבּ֗וֹ לֹֽא־אֹ֠סִף לְקַלֵּ֨ל ע֤וֹד אֶת־הָֽאֲדָמָה֙ בַּעֲב֣וּר הָֽאָדָ֔ם
밧야라흐 야훼 에트 레아흐 한니호아흐 밧요메르 야훼 엘 립보 로 오시프 레칼렐 오드 에트 하아다마 바아부르 하아담
야훼께서 그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말씀하셨다. 사람 때문에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창세기 8장 21절 앞부분. 슈투트가르트 히브리어 성경.
두 장면은 냄새까지 같지만 그다음이 다르다. 아카드어 판본에서 신들이 몰려드는 것은 굶주렸기 때문이고, 창세기에서 야훼가 냄새를 맡는 것은 마음을 정하기 위해서다. 그 마음의 내용은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같은 절 뒷부분에서 야훼는 사람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덧붙인다. 인간이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걷어낸 자리에서 관용을 정한다.
아트라하시스는 홍수가 끝난 뒤 같은 문제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조치로 마무리된다. 엔키가 출산의 여신 닌투에게 지시하고, 닌투는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범주를 만든다. 아이를 낳는 여자와 낳지 못하는 여자를 두고, 아기를 낳은 어미의 무릎에서 아기를 채가는 파시투라는 여자 악령을 둔다. 특정 계층의 여자에게는 출산을 금한다. 불임과 유아 사망과 독신 사제직이 제도로 도입된다.
해결 방향이 분명하다. 문제가 인구였으므로 인구를 줄인다. 신은 자신의 행동을 제한하지 않는다. 제한되는 쪽은 인간이다.
창세기는 같은 자리에 정반대 문장을 놓는다.
וַיְבָ֣רֶךְ אֱלֹהִ֔ים אֶת־נֹ֖חַ וְאֶת־בָּנָ֑יו וַיֹּ֧אמֶר לָהֶ֛ם פְּר֥וּ וּרְב֖וּ וּמִלְא֥וּ אֶת־הָאָֽרֶץ׃
바예바레크 엘로힘 에트 노아흐 베에트 바나브 밧요메르 라헴 페루 우레부 우밀우 에트 하아레츠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가득하라.
창세기 9장 1절. 슈투트가르트 히브리어 성경.
같은 명령이 9장 7절에 한 번 더 나오고, 그 사이에 짐승의 고기를 먹어도 되지만 피는 먹지 말라는 규정과 사람의 피를 흘린 자를 벌한다는 규정이 들어간다. 인구를 억제하는 대신 인구를 늘리라 하고, 홍수의 원인이었던 폭력을 다루는 법을 준다.
제한되는 쪽도 바뀐다. 창세기 9장 11절에서 신은 자기 자신에게 조건을 건다.
וַהֲקִמֹתִ֤י אֶת־בְּרִיתִי֙ אִתְּכֶ֔ם וְלֹֽא־יִכָּרֵ֧ת כָּל־בָּשָׂ֛ר ע֖וֹד מִמֵּ֣י הַמַּבּ֑וּל וְלֹֽא־יִהְיֶ֥ה ע֛וֹד מַבּ֖וּל לְשַׁחֵ֥ת הָאָֽרֶץ׃
바하키모티 에트 베리티 잇테켐 베로 익카레트 콜 바사르 오드 밈메 함맙불 베로 이흐예 오드 맙불 레샤헤트 하아레츠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니, 다시는 모든 육체가 홍수의 물로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땅을 멸할 홍수가 없을 것이다.
창세기 9장 11절. 슈투트가르트 히브리어 성경.
아트라하시스의 결말이 인간의 출산을 제한한다면 창세기의 결말은 신의 행동을 제한한다. 이 반전은 앞의 전제에서 따라 나온다. 인간이 신의 노동을 대신할 도구라면 도구의 수량을 조절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결이다.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재라면 같은 해결이 성립하지 않는다. 창세기 9장 6절은 사람의 피를 흘린 자를 벌하는 이유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든다. 도구에는 형상이 없다.
수메르어 판본은 지우수드라가 무엇을 받았는지 분명하게 적는다.
til3 dijir-gin7 mu-un-na-cum2-mu
zi da-ri2 dijir-gin7 mu-un-<na>-ab-ed3-de3그들은 신과 같은 삶을 그에게 주었고
수메르 홍수 이야기 E단 7~8행. 옥스퍼드 수메르 문학 전자 코퍼스 1.7.4의 합성 본문. 이 음역에서 c는 영어 sh에 가까운 소리, j는 영어 ng에 가까운 소리를 나타낸다.
신과 같은 영원한 생명을 그에게 내려 주었다
같은 단락은 안과 엔릴이 그를 해 뜨는 곳인 딜문 땅에 살게 했으며, 그 이유가 짐승과 인류의 씨앗을 보존했기 때문이라고 적는다. 영생과 함께 인간 세계 바깥의 거처가 주어진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우트나피슈팀은 이미 영생을 받은 상태로 등장한다. 서사시의 첫 장면에서 길가메시는 그를 보며 자기와 다를 것 없는 몸인데 어떻게 신들의 회의에 참석해 영원한 생명을 얻었느냐고 묻는다. 홍수 이야기 전체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놓여 있고, 대답의 요지는 그것이 한 번뿐인 예외였다는 데 있다. 길가메시는 영생을 얻지 못한 채 돌아간다.
노아는 영생을 받지 않는다. 창세기 9장은 그가 950세를 살고 죽었다고 적는다. 대신 언약과 무지개를 받고 인간 세계 안에 남는다. 유대 백과사전의 노아 항목은 앞의 세 이름이 모두 생명이나 지혜와 연결되는 데 반해 노아라는 이름은 그 셋 중 어느 것과도 연결되지 않는다고 정리한다. 창세기 5장 29절은 이 이름을 다른 방향으로 풀이한다. 라멕이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 부르며, 이 아이가 땅이 저주받은 탓에 겪는 수고와 노동에서 우리를 쉬게 하리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노동에서 벗어난다는 주제가 여기서 한 번 더 나오는데, 여기서는 사람이 벗어난다.
세부를 맞대 보면 창세기가 아카드어 판본과 얼마나 가까운지 드러난다. 길가메시 11토판은 배의 치수를 이렇게 적는다. 바닥 면적이 1이쿠이고, 네 변이 각각 10닌단 높이로 섰으며, 윗면의 가장자리도 10닌단으로 같았다. 이쿠와 닌단은 메소포타미아의 면적 단위와 길이 단위다. 가로와 세로와 높이가 같은 상자 형태라는 뜻이다. 이어서 여섯 개의 갑판을 놓고, 배를 일곱으로 나누고, 내부를 아홉으로 나눴다고 적는다.
창세기의 방주는 길이 300규빗, 너비 50규빗, 높이 30규빗이고 삼층으로 되어 있다. 길쭉한 상자 형태다. 그런데 두 본문 모두 배를 밀폐된 용기로 그린다. 길가메시의 에아는 배를 아프수처럼, 곧 지하 담수처럼 덮으라고 지시하고, 창세기는 안팎에 역청을 칠하라고 지시한다. 어느 쪽에도 돛과 노가 없다.
새를 내보내는 장면은 더 가깝다. 길가메시 11토판에서 우트나피슈팀은 이레째 되는 날 비둘기를 내보내고, 앉을 자리가 없어 돌아오자 제비를 내보내며, 역시 돌아오자 까마귀를 내보낸다. 까마귀는 물이 빠지는 것을 보고 먹이를 먹으며 돌아오지 않는다. 창세기는 까마귀를 먼저 내보내고 비둘기를 세 차례 내보낸다. 두 번째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을 물고 오고, 세 번째는 돌아오지 않는다. 새의 종류와 순서가 다르지만 구조가 같다. 새를 내보내 땅이 드러났는지 확인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을 신호로 삼는다.
수메르어 판본의 남은 부분에는 새가 없다. 대신 E단은 짐승들이 잇달아 배에서 내려 땅으로 나왔다고 적는다. 새를 내보내는 장면이 원래 없었는지, 사라진 3분의 2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정리하면 배의 성격과 새의 절차는 아카드어 판본에서 히브리어 판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반면 넘어가지 않은 것이 있다. 신이 인간의 제물에 의존한다는 설정, 인간이 노동을 대신할 도구로 만들어졌다는 설정, 인구를 줄여 문제를 해결한다는 결말이다. 세부는 건너갔는데 전제는 건너가지 않았다. 옮긴 쪽이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렸는지가 여기서 보인다.
홍수에서 한 사람이 살아남는 이야기는 근동 바깥에도 있다. 산스크리트 문헌에서 가장 이른 형태는 샤타파타 브라흐마나 1권 8장 1절에 실린 마누와 물고기 이야기다. 마누가 손 씻을 물에 든 작은 물고기를 발견하고, 물고기는 큰 물고기에게 잡아먹힐까 두렵다며 보호를 청하면서 대신 다가올 홍수에서 마누를 구하겠다고 약속한다. 마누는 물고기를 항아리에서 못으로, 못에서 강으로, 강에서 바다로 옮겨 준다. 물고기가 계속 자라기 때문이다.
가장 이른 형태에서 이 물고기는 이름이 없고 어떤 베다 신과도 동일시되지 않는다. 후대로 가면서 창조신 브라흐마와 연결되고, 다시 뒤에는 비슈누의 첫 화신 마츠야로 자리잡는다. 문헌 연대는 샤타파타 브라흐마나가 기원전 4세기에 최종 형태를 갖추었고, 마하바라타는 서기 300년경, 바가바타 푸라나와 마츠야 푸라나는 500년경으로 본다.
메소포타미아 계통과의 관계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차용을 의심하는 쪽은 가장 이른 형태에서 물고기가 무명이고 기존 신 체계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이것이 외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첫 단계일 수 있다고 본다. 반대쪽은 남아 있는 인도 기록이 처음부터 인도의 제의와 우주론 안에 녹아 있어 차용 가설을 뒷받침하지 못한다고 본다.
이 글의 주장에 비춰 보면 판별의 기준은 전제가 일치하는지에 있다. 마누 이야기에서 구조자는 물고기이고, 배는 물고기의 뿔에 매여 끌려가며, 홍수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우주의 소멸 가운데 한 번이다. 도덕 심판도 인구 조절도 여기에는 없다. 인간이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이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와 다른 답을 전제하고 있다. 근동의 네 판본이 공유하는 뼈대가 여기에는 없다.
네 판본은 한 줄기에서 갈라져 나왔다. 길가메시 11토판 49행에 아트라하시스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이 그 증거이고, 배를 밀폐된 용기로 그리는 방식과 새를 내보내는 절차가 아카드어 본문에서 히브리어 본문으로 이어진 것도 같은 계통을 가리킨다. 여기까지는 오래 정리된 사실이다.
달라지는 것은 이야기의 앞과 뒤다. 아트라하시스는 신이 부역을 지던 세계에서 시작해 인간을 그 노동을 넘겨받을 존재로 만든다. 그래서 인간이 불어나 시끄러워진 것이 문제가 되고, 문제 해결은 인구 억제로 끝난다. 홍수의 원인에 도덕이 없으므로 신을 속여 인간을 살리는 장면이 가능하고, 신이 제물에 의존하므로 제사 자리에 파리처럼 몰려드는 장면이 가능하다. 이 네 장면은 하나의 설정에서 파생한 결과다.
창세기는 그 설정을 들어내고 다른 것을 넣었다. 인간은 노동을 대신하려고 만들어지지 않았으므로 수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홍수의 이유가 폭력이 되고, 결말이 번성 명령이 되며, 제한되는 쪽이 인간에서 신으로 옮겨간다. 신은 굶지 않으므로 제사는 관계의 표시가 된다. 여기서도 네 가지가 따로 놀지 않는다.
그러므로 두 계통을 가르는 것은 홍수의 규모나 배의 치수나 날짜 계산이 아니다. 인간이 무엇을 하려고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이다. 그 답이 도구이면 뒤따르는 모든 것이 아트라하시스의 모양이 되고, 형상이면 창세기의 모양이 된다. 같은 줄거리가 천 년 넘게 옮겨 다니는 동안 바뀐 것은 그 앞에 놓인 전제였다.
이 비교에는 한계가 있다. 수메르어 판본은 3분의 1만 남아 있어 홍수의 이유와 결말을 확인할 수 없고, 아트라하시스도 배의 치수와 정박지가 깨져 있다. 지금 네 판본의 차이라고 부르는 것 가운데 얼마가 실제 차이이고 얼마가 사라진 점토의 몫인지는 열려 있는 문제다. 이 물음이 닫히려면 새 토판이 나와야 하고, 실제로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새 토판이 나올 때마다 본문의 모양이 바뀌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