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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이 바빌로니아 신화를 빌렸다는 논거는 어디까지 검증되었는가 — 테홈의 어원과 넷째 날의 해와 달

창세기 1장이 주변 신화의 신격을 피조물로 끌어내렸다는 설명은 두 개의 논거 위에 서 있다. 하나는 깊음을 뜻하는 히브리어가 바빌로니아 여신의 이름에서 왔다는 어원 논거이고, 다른 하나는 넷째 날에 해와 달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는 표현 논거다. 앞의 것은 언어학적으로 성립하지 않고, 뒤의 것은 경쟁하는 네 갈래 해석 가운데 하나다.

2026년 9월 12일

창세기 1장 16절에는 히브리어에 멀쩡히 있는 낱말 두 개가 나오지 않는다. 해를 뜻하는 שֶׁמֶשׁ(셰메시)와 달을 뜻하는 יָרֵחַ(야레아흐)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 낱말들을 그냥 쓴다. 그런데 창조 기사의 넷째 날에는 쓰지 않는다.

וַיַּעַשׂ אֱלֹהִים אֶת־שְׁנֵי הַמְּאֹרֹת הַגְּדֹלִים אֶת־הַמָּאוֹר הַגָּדֹל לְמֶמְשֶׁלֶת הַיּוֹם וְאֶת־הַמָּאוֹר הַקָּטֹן לְמֶמְשֶׁלֶת הַלַּיְלָה וְאֵת הַכּוֹכָבִים

바야아스 엘로힘 에트 셰네 하메오로트 하게돌림 에트 하마오르 하가돌 레멤셸레트 하욤 베에트 하마오르 하카톤 레멤셸레트 할라일라 베에트 하코카빔

하나님이 두 개의 큰 광명체를 만드셨다. 큰 광명체는 낮을 다스리게, 작은 광명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고, 별들도 만드셨다.

창세기 1장 16절, 레닌그라드 코덱스 계열 마소라 본문(BHS)

쓰인 낱말은 מָאוֹר(마오르)다. 빛을 내는 물건이라는 뜻이며, 출애굽기에서 성막의 등잔에 쓰이는 것과 같은 낱말이다. 해와 달이 기능으로만 불리고 이름이 지워져 있다.

이 관찰에서 출발하는 설명이 널리 퍼져 있다. 주변 문화에서 해와 달은 신의 이름이었고, 창세기는 그 이름을 의도적으로 피해 신격을 피조물로 끌어내렸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은 학술서와 교회 강단과 온라인 해설에 두루 등장한다. 그런데 이 설명이 어떤 논거 위에 서 있고 그 논거가 어디까지 검증되었는지는 따로 따져 볼 문제다.

신격 격하라는 읽기에는 계보가 있다

이 읽기를 학술 문헌에서 체계적으로 제시한 것은 게르하르트 하젤이다. 그는 1972년 『앤드루스대학 신학 연구』 10권에 창세기 1장의 우주론을 고대 근동 평행 자료와 견주는 논문을 실었고, 1974년에는 『복음주의 계간』 46권 81쪽부터 102쪽까지 「창세기 우주론의 논쟁적 성격」을 냈다. 창세기 1장이 주변 종교의 우주론을 겨냥한 논쟁 문서라는 주장이다.

하젤의 지위를 밝혀 두는 편이 좋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1935년에 태어나 1958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앤드루스대학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학교의 구약 및 성서신학 교수이자 학장이었다. 그가 이 신학교에서 처음 가르친 해석학 과목은 대부분의 비평적 방법에 반대하면서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의 7일로 읽는 역사적·문자적 해석을 지지했다. 논쟁 문서라는 읽기는 이 입장에서 유용한 도구다. 본문의 특징을 당대 종교와의 대결이라는 문제로 옮겨 놓기 때문이다.

이 말이 하젤의 논증을 무효로 만들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읽기가 어느 자리에서 어떤 필요에 응답하며 등장했는지를 아는 것은 그 읽기를 평가할 때 필요한 정보다. 논거 자체는 논거로 검토해야 한다.

더 오래된 논거는 궁켈의 어원 주장이다

신격 격하라는 읽기보다 먼저 있었고 더 널리 인용된 것은 차용 주장이다. 헤르만 궁켈이 1895년 괴팅겐에서 낸 『태초와 종말의 창조와 혼돈』이 그 출발점이다. 궁켈은 바빌로니아 신화 전승을 성경 자료를 거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시작까지 추적했다고 밝혔고, 특히 창세기 1장 2절이 바빌로니아 창조 신화 에누마 엘리시의 영향 아래 있다고 보았다.

וְהָאָרֶץ הָיְתָה תֹהוּ וָבֹהוּ וְחֹשֶׁךְ עַל־פְּנֵי תְהוֹם

베하아레츠 하이타 토후 바보후 베호셰크 알 페네 테홈

땅은 토후 바보후였고 어둠이 테홈의 표면 위에 있었다.

창세기 1장 2절 앞부분, 레닌그라드 코덱스 계열 마소라 본문(BHS)

여기서 תְּהוֹם(테홈)은 보통 깊음이나 심연으로 옮긴다. 궁켈은 이 낱말이 에누마 엘리시에 나오는 원시 바다의 여신 티아마트에서 직접 파생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뒤 많은 성서학자가 티아마트와 테홈 사이에 직접이든 간접이든 어떤 연결이 있다고 전제했다. 버나드 앤더슨처럼 창세기 1장이 에누마 엘리시와 마찬가지로 창조 이전의 물의 혼돈 상태를 그린다고 보는 서술이 그 예다.

에누마 엘리시 바빌로니아의 창조 서사시다. 제목은 첫 두 낱말인 위에 있을 때라는 구절에서 왔다. 신들 사이의 다툼 끝에 마르둑이 원시 바다의 여신 티아마트를 죽이고 그 몸을 갈라 하늘과 땅을 만든다는 줄거리를 담는다. 창조가 전투의 결과로 나온다는 이 구도를 독일어 학술어로 카오스캄프(Chaoskampf), 곧 혼돈과의 싸움이라고 부른다.

궁켈의 주장은 100년 가까이 표준 설명으로 인용되었다. 테홈이 여신의 이름에서 왔다면 창세기 1장 2절은 신화의 잔재를 담고 있는 셈이 되고, 그 잔재를 신이 아닌 것으로 처리한 것이 곧 탈신화화라는 해석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 넷째 날의 해와 달 읽기도 같은 구도 위에 얹힌다.

어원 논거는 언어학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이 논거를 정면으로 검토한 것은 츠무라 다비드 도시오다. 1989년에 낸 『창세기 1장과 2장의 땅과 물: 언어학적 평가』, 그리고 그 책을 대폭 고쳐 쓴 2005년 위노나레이크 아이젠브라운스 판 『창조와 파괴: 구약의 카오스캄프 이론 재평가』가 그의 작업이다.

히브리어 테홈은 아카드어 티아마트에서 파생될 수 없다. 두 낱말의 어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테홈은 바다나 대양을 뜻하는 원셈어 형태에서 나온 히브리어 형태이며,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지표 전체를 덮고 있던 지하수를 가리킨다.

츠무라가 든 증거는 어원 추정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우가리트어 tehom 계열 낱말, 아카드어의 같은 계열 낱말, 그리고 에블라 문서에 나오는 형태를 함께 조사했다. 아카드어 형태는 티아마트를 가리키지 않는 것이 분명한 비신화 문맥에서도 쓰이며, 이 낱말들은 모두 바다나 대양을 뜻하는 보통 명사다. 히브리어 테홈도 마찬가지다. 두 낱말은 한쪽이 다른 쪽을 빌린 관계가 아니라 셈어 어근 thm에서 각각 나온 동계어다.

여기에 방향 문제가 붙는다. 우가리트어와 아카드어의 이 낱말은 신격화될 수 있고 실제로 아카드어에서는 티아마트라는 여신이 되었다. 그러나 반대 방향, 곧 신격에서 보통 명사로 내려오는 탈신격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테홈을 신격을 벗겨 낸 형태나 탈신화화의 산물로 보는 해석은 언어 자료에서 지지를 얻지 못한다.

이 결론은 츠무라와 신학적 입장이 다른 연구자들도 받아들인다. 로빈 루트리지는 창세기 1장 2절의 테홈이 바빌로니아의 티아마트를 가리킨다는 궁켈의 주장에 대한 츠무라의 반박을 설득력 있다고 평가한다. 츠무라의 1989년 책에 대한 학술지 서평도 이 대목에 대해서는 츠무라가 명백히 옳다고 적는다.

이 대목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어원 논거는 차용 주장 가운데 가장 검증하기 쉬운 종류였다. 낱말의 형태와 어근은 문헌만 충분하면 대조할 수 있다. 그 논거가 자료 축적으로 무너졌다는 것은, 차용을 주장하든 반박하든 앞으로는 낱말 하나에 논증을 걸 수 없다는 뜻이다.

혼돈이라는 번역도 본문에서 나오지 않는다

같은 절의 다른 표현도 재검토 대상이 되었다. תֹהוּ וָבֹהוּ(토후 바보후)는 한국어 성경에서 혼돈하고 공허하다고 옮겨지고, 영어에서는 formless and void로 옮겨진다. 이 번역이 창조 이전의 혼돈 상태라는 그림을 만든다.

츠무라는 토후 바보후가 땅의 혼돈 상태라는 관념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판정한다. 이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황량하고 비어 있는 상태이지 무질서한 뒤엉킴이 아니다.

번역어가 해석을 만들고 그 해석이 다시 차용 주장을 뒷받침하는 순환이 여기서 생긴다. 토후 바보후를 혼돈으로 옮기면 창세기 1장 2절이 혼돈을 전제하는 본문이 되고, 혼돈을 전제하는 창조 이야기는 에누마 엘리시와 같은 계열로 보이며, 그러면 테홈과 티아마트의 연결도 그럴듯해진다. 고리 하나를 풀면 나머지가 함께 느슨해진다.

창세기 1장에는 싸움이 없고, 궁켈이 그렇게 보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세 번째 지점은 더 단순하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과 테홈의 물 사이에 다툼이나 전투의 기미가 전혀 없다. 마르둑이 티아마트를 죽이고 그 시체로 세계를 만드는 것과 달리, 창세기 1장의 창조에는 대적이 등장하지 않는다.

츠무라는 원역사 바깥의 시적 본문들까지 검토 범위를 넓혔다. 시편과 이사야와 욥기에서 카오스캄프 모티프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되어 온 대목들이 실은 폭풍과 홍수의 언어를 비유로 쓴 것이며 태초의 전투와 무관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다만 이 확장 논지는 어원 논지만큼 넓은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시편 74편과 이사야 27장이 리워야단과 라합을 제압하는 언어를 쓰는 것은 사실이고, 그 언어를 어떻게 분류할지가 지금도 논쟁 대상이다.

여기서 존 월턴의 지적이 유용하다. 그는 2008년 『칼빈 신학 저널』 43권 48쪽부터 63쪽까지 실은 논문에서 카오스캄프 모티프가 고대 근동의 사고 세계에서 실제로 얼마나 중심적이었는지를 먼저 따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짚은 것은 자료의 양이다. 궁켈이 카오스캄프를 고대 근동 창조 기사의 주요 모티프라고 주장하기는 쉬웠다. 그 시점에 고려할 수 있는 창조 기사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료가 훨씬 풍부하고, 그 상태에서는 카오스캄프를 더 큰 모티프 안의 한 사례로 놓는 편이 낫다는 것이 월턴의 정리다.

학설이 오래 버틴 이유를 비교 대상의 빈곤에서 찾는 진단이다. 1895년의 판단을 2026년에 그대로 인용하면 그 사이에 발굴되고 해독된 문헌을 무시하는 셈이 된다.

어원이 무너져도 공유 배경은 남는다

어원 논거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서 창세기 1장이 주변 세계와 무관하게 쓰였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츠무라의 논증은 낱말과 모티프 수준의 특정 연결을 끊는 작업이며, 더 넓은 문화적 공유까지 부정하지 않는다.

마크 스미스는 2010년에 낸 『창세기 1장의 제사장적 구상』에서 이 점을 다룬다. 그는 우가리트 문헌에 깊음에 해당하는 동계어가 있다는 사실을 들어, 문제가 테홈과 티아마트라는 두 낱말에 국한되지 않으며 바빌로니아와 히브리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지리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더 가까운 우가리트까지 포함하는 넓은 이해의 공유가 있었다고 본다.

스미스가 그리는 창세기 1장은 이렇다. 고대 이스라엘 안에는 창조를 설명하는 세 가지 모형이 있었다. 우주적 대적에 대한 신의 승리로 보는 모형, 신적 지혜의 활동으로 보는 모형, 그리고 신의 임재로 채워진 성전으로 보는 모형이다. 이 세 모형은 서로 완전히 분리된 전승이 아니라 자주 섞였다. 창세기 1장은 세 모형에서 얻은 통찰을 모두 끌어와 독자적인 방식으로 배치한 본문이라는 것이 스미스의 분석이다. 그는 창세기 1장이 기원전 6세기의 본문이며 제사장 계열 저자가 썼다는 주류 견해를 지지한다.

여기서 두 주장이 어떻게 양립하는지가 드러난다. 테홈은 티아마트에서 오지 않았다는 것과 창세기 1장이 고대 근동의 공유 세계 안에서 쓰였다는 것은 동시에 참일 수 있다. 무너진 것은 개별 낱말의 계보이지 문화적 배경이 아니다. 차용 논쟁을 따라갈 때 이 둘을 섞으면 논의가 엉킨다.

넷째 날 해석은 네 갈래이고 논쟁적 읽기는 그중 하나다

그러면 맨 앞의 관찰로 돌아가자. 해와 달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것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창세기 1장의 넷째 날에는 설명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빛은 첫째 날에 생기는데 해와 달과 별은 넷째 날에 만들어진다. 빛의 원천보다 빛이 먼저 나온다. 오하이오대학의 코리 크로퍼드는 2018년 『베투스 테스타멘툼』 68권 4호 556쪽부터 580쪽까지 실은 「창세기 1장의 빛과 공간」에서 이 문제에 대한 고대와 근대의 답을 네 부류로 정리했다. 논쟁적 설명, 시간적 설명, 현상적 설명, 신비적 설명이다.

논쟁적 설명이 앞에서 본 신격 격하 읽기다. 야코브 밀그롬의 2004년 논문이 이 설명의 최근 대표 사례로 꼽힌다. 그는 광명체의 히브리어 본래 이름이 회피된 이유를 메소포타미아의 큰 신들, 특히 우주 전체를 관장한다고 여겨진 샤마시와 이름이 비슷했기 때문으로 보고, 제사장 저자가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라는 우회 표현을 대신 넣었다고 설명한다. 밀그롬의 논거 가운데 하나가 앞에서 언급한 마오르라는 낱말이다. 제사장 자료가 이 낱말을 쓰는 다른 자리는 성막뿐이며, 성막의 마오르는 바깥에서 연료를 받아야 빛을 낸다. 그러니 해와 달도 첫째 날 창조된 빛을 반사할 뿐 자기 빛을 보태지 않으며 그 자체로는 무력하다고 그는 결론짓는다.

에이버트 티헬라르는 이 논거를 세 갈래로 정리한다. 첫째, 16절에서 하나님이 광명체를 명시적으로 만든다. 곧 독립된 행위자가 아니다. 둘째, 본문이 해와 달이라는 흔한 낱말 대신 큰 빛과 작은 빛을 쓴다. 셋째, 본문은 이 천체들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적 능력을 가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샤마시와 신 메소포타미아의 해의 신과 달의 신이다. 샤마시는 정의와 재판을 관장하는 신으로도 숭배되었고, 신은 도시 우르와 하란의 주신이었다. 두 이름은 각각 히브리어의 해(셰메시)와 소리가 가깝다. 이 유사성이 창세기가 그 낱말을 피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인다.

같은 논거에 대한 반론이 같은 자료에서 나온다

논쟁적 설명에 대한 반박이 제기되어 있다. 마크 스미스는 메소포타미아 문헌에도 해와 달과 별을 아누·엔릴·에아 같은 큰 신들 아래에 두는 대목이 있고 천체를 표징이라고 부르는 대목까지 있다고 지적한다. 더 직접적인 것은 북서셈어 문헌에서 해를, 어쩌면 달까지도 큰 빛이라는 표현으로 부른 사례가 있다는 점이다. 히브리어 본문이 쓴 표현이 이 지역에서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가장 강한 반론은 문제의 대상 문헌 자체에서 나온다. 윌리엄 램버트는 2013년에 낸 『바빌로니아 창조 신화』 172쪽에서 에누마 엘리시 다섯째 토판의 천체 배치 대목을 두고, 거기에 신화적 요소가 거의 없으며 저자가 달의 기능을 다루면서 달신 신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창세기 1장이 반박 대상으로 지목되는 바로 그 본문이, 창세기와 같은 방식으로 달신의 이름을 쓰지 않는다.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이 논쟁의 표지라면 에누마 엘리시도 무엇인가를 논쟁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그 결론을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크로퍼드가 본문 내부에서 제시하는 반론도 있다. 광명체가 무력하다는 밀그롬의 그림은 본문과 어긋난다. 창세기 1장 16절과 18절은 광명체가 낮과 밤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적고, 18절은 빛과 어둠을 나누는 일을 광명체에게 맡긴다. 그 나누는 일은 4절에서 하나님이 직접 한 것이었다.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에 가깝다.

이름을 쓰지 않는 것도 넷째 날만의 특징이 아니다.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등장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총칭으로만 불린다. 별, 새, 물고기, 바다 생물, 들짐승, 그리고 사람까지 그렇다. 반대로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이름 붙이는 행위가 반복된다.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며,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고, 마른 땅을 땅이라 부르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른다. 이 대비가 규칙적이라면 넷째 날에 해와 달의 이름이 없는 것은 그 자리의 특수 사정이 아니라 구조의 결과다.

그래서 크로퍼드는 논쟁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다른 제사장적 관심의 부산물일 수 있다고 본다. 넷째 날의 광명체들을 첫째 날의 빛과 연결해 질서 잡힌 창조를 보이려는 관심, 또는 창조된 질서 안의 위계를 드러내려는 관심이다. 흔한 명사를 쓰면 그 두 가지를 하기 어렵다. 그는 제사장 자료가 경쟁 신들과의 창조 투쟁에서 멀어진 것이 여러 지점에서 분명하다고 인정하면서도, 빛을 해에서 분리한 것이 저자의 주된 목적이었는지는 의심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판정한다.

공간으로 읽으면 논쟁이 필요 없어진다

크로퍼드 자신의 대안은 공간 읽기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두 개의 세 날 묶음으로 짜여 있고, 앞 묶음이 공간을 만들면 뒤 묶음이 그 공간을 채운다. 첫째 날의 빛과 어둠, 둘째 날의 궁창과 바다, 셋째 날의 땅이 공간이고, 넷째 날의 광명체, 다섯째 날의 새와 물고기, 여섯째 날의 짐승과 사람이 그 거주자다.

이 대칭 구조를 지적한 것은 근래의 일이 아니다. 크로퍼드는 그 관찰이 궁켈보다 앞선다고 적는다. 궁켈이 1901년 창세기 주석 118쪽에서 인용한 카를 다비트 일겐의 1798년 저작에 이미 나오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가 1774년에 낸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에 날짜를 도표로 배치한 형태로 들어 있다.

앞 묶음에서 분리를 뜻하는 동사가 두 번 쓰이고, 물이 한곳으로 모여 마른 땅이 드러난다. 빛과 어둠도 같은 동사로 분리되고 같은 방식으로 이름을 얻는다. 그렇다면 빛과 어둠도 공간으로 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절이 어둠을 이미 공간에 고정해 두었다는 점도 이 읽기를 돕는다. 어둠은 테홈의 표면 위에 있다고 적혀 있다.

공간 읽기에서는 넷째 날의 광명체가 첫째 날에 마련된 영역을 다스리는 거주자가 된다. 큰 빛이 낮을, 작은 빛이 밤을 맡는다. 신격 격하라는 설명이 필요 없다.

크로퍼드는 이 읽기가 다른 설명들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신적 광채와의 연결도, 바빌로니아 신들에 대한 논쟁도, 시간 표시 기능도 함께 작동할 수 있다. 다만 제사장 창조 기사의 최종 형태에서는 공간 개념이 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여기서 확인되는 사실은 이렇다. 히브리어에 있는 낱말이 이 대목에서 쓰이지 않는다. 그 사실을 설명하는 방식은 적어도 다섯 가지가 제시되어 있고, 논쟁적 읽기는 그중 하나이며 학계 표준이 아니다. 그리고 그 하나에 대해서는 대상 문헌 자체에서 나온 반론이 붙어 있다.

탄닌은 어떤가

격하 논거로 함께 인용되는 자리가 하나 더 있다. 창세기 1장 21절의 תַּנִּינִם(탄니님)이다. 큰 바다 생물로 옮겨지며, 우가리트 신화에서 같은 계열 낱말은 바알과 아낫이 제압하는 괴물의 이름이다. 창세기에서는 이 존재가 물고기와 새와 함께 나열되고, 창조를 뜻하는 동사 בָּרָא(바라)의 목적어로 쓰인다.

이 관찰 자체는 본문에 있다. 그런데 앞선 대목과 같은 문제가 여기서도 나온다. 창세기 1장의 저자가 우가리트의 신화를 알고 일부러 그 괴물을 피조물 목록에 넣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그것을 신으로 여기지 않는 전제에서 서술한 결과 그렇게 되었는지를 본문이 알려 주지 않는다.

구조 쪽 설명도 여기에 걸린다. 21절은 이 생물을 큰 탄니님이라고 부르는데,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서술에는 위계를 나타내는 표현이 반복된다. 광명체에 큰 것과 작은 것이 있고, 바다 생물 가운데 큰 것이 따로 지목되며, 땅과 바다의 모든 것은 사람이 다스린다. 큰 탄니님이라는 표현이 이 위계 언어의 한 사례라면, 그 자리에 신화적 괴물을 끌어내리려는 의도를 넣지 않아도 설명이 된다. 앞의 경우라면 논쟁을 의도한 글이고 뒤의 경우라면 논쟁 상대를 염두에 두지 않은 글이다. 명시적인 언급, 곧 저 민족이 섬기는 것들은 사실 피조물일 뿐이라는 식의 문장이 본문에 없기 때문에 의도 여부는 추론으로 남는다.

성경 전체를 보면 사정이 더 복잡해진다. 시편 74편 13절과 14절, 이사야 27장 1절, 욥기 26편은 리워야단과 라합을 제압하는 싸움의 언어를 그대로 쓴다. 성경이 신화 언어를 걷어냈다는 일반화는 이 본문들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성립하는 것은 창세기 1장이 그 언어를 쓰지 않는다는 훨씬 좁은 진술뿐이다.

발화 위치가 강조점을 정한다

이 논쟁의 참여자들이 어디서 말하고 있는지를 놓고 보면 강조점의 배치가 설명된다.

하젤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학교의 학장이었고 비평적 방법 대부분에 반대했다. 논쟁적 읽기는 이 위치에서 두 가지 일을 한다. 창세기 1장이 고대 근동 문헌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유사성을 차용이 아니라 대결로 돌려 놓는다.

츠무라는 복음주의 계열의 셈어학자이며 그의 작업은 아이젠브라운스처럼 복음주의권과 학술권을 함께 상대하는 출판사에서 나왔다. 어원 논거를 무너뜨리는 작업은 차용 주장의 기반을 제거하므로 이 위치에서도 쓸모가 있다. 그렇다고 논증이 약해지지는 않는다. 실제로 이 논증은 입장이 다른 연구자들에게 받아들여졌고, 그 사실이 논증의 힘을 보여 준다.

월턴은 휘튼대학의 복음주의 구약학자이고, 그의 주장은 창세기 1장을 고대 우주론으로 읽으면서 물질의 기원이 아니라 기능의 배정을 다루는 본문으로 보는 쪽이다. 이 읽기는 창세기 1장과 자연과학의 충돌을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 그를 지지하는 논자들도 논쟁적 성격이 창세기 1장의 주된 목적은 아니지만 본문에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정리한다.

마크 스미스는 뉴욕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가르친 비평 학자이며 우가리트 문헌 연구자다. 그의 배치에서 창세기 1장은 이스라엘 내부의 여러 창조 모형을 종합한 6세기 본문이다.

코리 크로퍼드는 오하이오대학의 고전·종교학 연구자이며 성전 건축과 공간 개념을 다뤄 왔다. 그가 넷째 날 문제의 답을 공간에서 찾는 것은 이 관심과 이어진다. 그의 논문도 제사장 저작의 중심에 있는 성전 공간과 창세기 1장의 구조를 떼어 놓기 어렵다는 결론으로 닫힌다.

다섯 사람의 결론이 각자의 위치와 무관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위치가 결론을 결정한다고 말하면 논증을 읽지 않겠다는 선언이 된다. 확인할 것은 어느 주장이 자료로 검증 가능한 형태인가다. 어원 논거는 검증 가능했고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 넷째 날 논거는 본문 해석의 문제이고, 경쟁하는 해석이 여럿 남아 있다.

결론 — 무너진 것은 낱말의 계보이고 남은 것은 서술의 차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한 문장으로 모인다. 창세기 1장이 주변 신화를 빌려 신격을 끌어내렸다는 설명은 두 개의 논거 위에 서 있었는데, 한쪽은 언어 자료가 무너뜨렸고 다른 쪽은 여러 해석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무너진 쪽부터 정리하면 이렇다. 히브리어 테홈은 바빌로니아 여신 티아마트에서 파생되지 않았다. 두 낱말은 셈어 어근에서 각각 나온 동계어이며, 아카드어 형태는 신화와 무관한 문맥에서도 쓰인다. 신격에서 보통 명사로 내려오는 탈신격화는 이 계열에서 확인되지 않으므로, 테홈을 탈신화화의 산물로 보는 해석은 언어 자료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토후 바보후도 혼돈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창세기 1장에는 창조와 결부된 전투가 없다. 이 학설이 오래 버틴 조건은 논증의 강도가 아니라 비교 대상의 부족이었다.

남은 쪽은 다르다. 창세기 1장 16절이 해와 달의 이름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본문의 사실이다. 21절이 우가리트 신화의 괴물과 같은 계열의 낱말을 피조물 목록에 넣는 것도 본문의 사실이다. 이 사실들을 설명하는 방식은 여럿이고, 신격 격하는 그중 하나다. 공간 읽기처럼 논쟁을 전혀 가정하지 않는 설명도 본문 내부 근거를 갖추고 제시되어 있다.

논쟁적 읽기에 붙은 반론의 성격도 적어 둘 만하다. 반론은 창세기 바깥이 아니라 창세기가 겨냥했다는 그 문헌에서 나왔다. 에누마 엘리시 다섯째 토판이 달의 기능을 다루면서 달신의 이름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이 논쟁의 표지라는 전제를 직접 흔든다. 본문 안에서도 광명체는 무력하지 않고 낮과 밤을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받으며, 이름 없이 총칭으로만 불리는 것은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일관된 특징이다.

판단이 나뉘는 자리를 확정하면 이렇다. 창세기 1장의 서술이 주변 문헌과 다르다는 데는 다툼이 없다. 다투는 것은 그 차이가 의도된 반박인가, 아니면 애초에 다른 전제에서 서술한 결과인가다. 본문에는 반박 대상을 지목하는 문장이 없고, 따라서 이 물음은 본문만으로 닫히지 않는다.

여기서 방법에 관한 문제가 하나 남는다. 창세기와 고대 근동 문헌을 견주는 작업은 지난 150년 동안 두 번 방향을 바꿨다. 19세기 말에는 유사성이 곧 차용으로 읽혔고, 20세기 후반에는 차이가 곧 대결로 읽혔다. 두 읽기 모두 유사성과 차이라는 관찰에서 저자의 의도로 곧장 건너뛴다. 그 도약을 지탱할 자료는 지금도 확보되어 있지 않으며, 새 점토판이 나올 때마다 비교의 기준선이 움직인다. 1895년의 결론이 자료 부족의 산물이었다면, 지금의 결론도 같은 사정에서 자유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