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적은 1600년 남짓 유지되다가 기원전 9세기 천년기 후반에 버려졌다. 원인으로 기후 급변이 자주 지목된다. 그러나 발굴단이 정리한 자료는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결정적 손상은 주민들이 스스로 쌓아 올린 비탈이 무너지면서 일어났고, 기후 증거가 있는 시점과 인구가 움직인 시점은 서로 어긋난다.
괴베클리 테페의 거대 구조물이 흙에 덮인 채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이 유적의 인상을 결정한 요소였다. 클라우스 슈미트는 이를 의도적 행위로 설명했다. 사용을 마친 건물을 대규모 축제와 함께 일부러 메웠다는 설명이다. 이 설명은 1995년부터 2000년대 초까지 나온 보고서들에 반복해서 나오고, 차요뉘 테페시에서 관찰된 건물 매장 관행과 함께 묶여 제시되었다. 신전을 지어 쓰다가 의례적으로 매장했다는 그림은 이 유적을 다루는 대중 서술에 그대로 남아 있다.
발굴단이 이 설명을 폐기한 시점은 2020년이다. 리 클레어가 e-Forschungsberichte des DAI 2020년 2호 81~88쪽에 실은 보고는 20년치 기록 재검토의 결과를 담고 있다. 남동쪽 저지대의 특수건물들은 인접한 높은 봉우리와 비탈에서 흘러내린 퇴적물에 잠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모리츠 킨첼과 클레어가 같은 해에 낸 글과 얀 브뢰어스와 킨첼이 2022년에 낸 석기 및 유적형성과정 연구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2023년 D 구조물 발굴이 이 판단에 직접 증거를 더했다. 클레어가 2024년 Documenta Praehistorica 51권 6~43쪽에 실은 논문은 그해 확인한 것을 열거한다. 건축 구조에 남은 손상, 잔해 속의 공기주머니, 무너진 지붕에서 나온 목재 들보의 음형, 그리고 잔해 기질 안에 보존된 지붕 미장 구역이다. 여기에 하나가 더 있다. 충전토 안에서 단단하게 굳은 수평의 보행면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 마지막 항목이 중요하다. 건물이 한 번에 메워졌다면 충전토는 한 덩어리여야 한다. 중간에 사람이 밟고 다녀 굳은 면이 끼어 있다는 것은, 건물이 반쯤 묻힌 상태로 한동안 쓰였고 그 뒤에 다시 묻혔다는 뜻이다. 사면 붕괴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는 해석이 여기서 나온다.
사면 붕괴 모델은 의도적 매몰 모델이 설명하지 못한 것들을 함께 설명한다. 충전토가 어디서 왔는지, 왜 그 안에 PPNA 유물과 초기 PPNB 유물이 뒤섞여 있는지, 그리고 왜 그 흙에서 뽑은 시료의 방사성탄소 연대가 그토록 들쭉날쭉했는지다. 높은 곳에 쌓인 여러 시기의 퇴적이 한꺼번에 쓸려 내려왔다면 셋 다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이 붕괴가 왜 하필 이 유적에서 일어났는지는 지형을 보면 드러난다.
클레어가 2024년 논문에서 기술한 바에 따르면, 이 인공 언덕의 표면은 남동쪽과 북동쪽과 북서쪽의 세 개의 낮은 오목지와 그 사이의 높은 봉우리 및 비탈로 나뉜다. 이 구분을 만든 것은 그 아래 석회암 기반암의 형태다. 특수건물은 낮은 오목지에 자리 잡았다. C, D, E 구조물은 인공적으로 평평하게 다듬은 자연 석회암 대지 위에 직접 세워졌고, 중앙의 두 T자형 기둥은 기반암을 깎아 만든 낮은 받침 홈에 끼워졌다.
주거는 다른 자리에 있었다. 클레어가 2024년 논문에 실은 사진과 도면은 D 구조물 북쪽 비탈의 초기 PPNB 주거 공간들을 보여준다. 회반죽 바닥을 갖춘 공간들이 좁은 복도 같은 통로로 나뉜 채 촘촘히 붙어 있고, 바닥 높이에 갈돌이 놓여 있다. 일부는 제자리에 있던 것이고, 일부는 건물이 무너질 때 지붕이나 위층에서 떨어졌다. 50번 공간의 남서쪽 모서리에는 큰 석회암 저장 용기가 있다.
클레어가 2026년 Heritage 9권 5호에 실은 논문은 이 배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초기 PPNB에 이 유적은 가장 조밀하게 점유된 단계에 들어섰고, 건물 형태가 점점 사각형과 사다리꼴로 바뀐 것은 좁은 공간을 경제적으로 쓰려는 대응일 수 있다. 그리고 주민들이 특수건물에 가까운 자리를 놓고 경쟁한 것으로 보인다고 적는다. 그 결과 남동쪽에서 특수건물을 둘러싼 비탈에 텔 퇴적이 쌓였다.
비탈이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도 알았다. 이미 PPNB 시기에 특수건물을 내려다보는 비탈에 축대용 테라스 벽이 세워졌다. 2001년과 2002년 발굴에서 D 구조물 위 북쪽 비탈의 테라스 벽이 드러났고, 그 중앙에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B 구조물과 D 구조물에서 확인된 재건축과 개조도 늘어나는 비탈 압력에 대응해 구조적 결함을 해결하려 한 시도일 수 있다고 클레어는 적는다.
대응은 충분하지 않았다. 사면은 여러 차례 미끄러졌다. 클레어가 2026년 논문에서 더 유력하다고 본 방아쇠는 강수보다 지진이다. 여러 건물에서 지진 피해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폭우나 폭설이 비탈의 무게를 늘려 붕괴를 거들었을 수는 있지만, 비탈의 조직을 약화시킨 쪽은 지진 활동이었다는 판단이다.
흙이 어디서 왔는지가 바뀌면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의 의미도 바뀐다.
특수건물의 충전토에서는 대량의 동물 뼈가 나왔다. 이 뼈는 오랫동안 대규모 축제의 잔해로 해석되었다. 올리버 디트리히와 공저자들이 2012년 Antiquity 86권 333호 674~695쪽에 실은 논문이 그 해석을 본격적으로 전개했고, 최대 165리터 용량의 석회암 구유가 곡물 발효에 쓰였을 가능성과 함께 제시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라는 보도로 이어졌다. 슈미트 자신이 이 가설의 초기 형태를 냈다. 건물을 의도적으로 메우던 시점에 벌어진 대규모 축제에서 엄청난 양의 고기가 소비되었고, 그것이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유인이었으며, 발굴에서 나오는 많은 동물 뼈가 그 흔적이라는 설명이다.
사면 붕괴 모델은 이 연결을 끊는다. 클레어는 2024년 논문에서, 특수건물에서 나온 동물 뼈가 침식으로 밀려 내려온 쓰레기 퇴적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축제 가설이 최근 몇 해 사이에 신뢰를 상당 부분 잃었다고 적는다. 같은 대목에서 그는 이 가설이 위험할 만큼 단순한 그림을 그린다고 덧붙인다. 고기에 대한 채울 수 없는 욕구에 이끌려 움직이는 노동력이라는 그림이다.
바닥에 놓인 유물의 해석도 함께 바뀐다. 종전에는 특정 물건이 매몰 과정 직전이나 도중에 건물 바닥에 의도적으로 놓였다고 설명되었다. 클레어는 이 주장이 이제 유지되기 어렵다고 적는다. 그 물건들은 침수 시점에 이미 그 자리에 있었거나, 사면 붕괴 과정에서 다른 건물이나 퇴적에서 밀려와 다시 쌓인 것이다.
맥주 쪽 근거도 따로 검토되었다. 라우라 디트리히를 제1저자로 하는 2020년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Reports 34권의 논문은 석회암 구유 여섯 점을 맥락 분석과 사용흔 분석과 화학 분석과 실험을 결합해 다루었다. 그 논문은 구유 벽면에서 검출된 옥살산염이 맥주 제조의 증거로 논의되어 왔지만, 곡물이 물과 자주 닿기만 해도 옥살산염이 생길 수 있으므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정리했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하나의 판단 변경이 여러 갈래로 번진다는 점이다. 매몰의 원인이 바뀌자 뼈의 출처가 바뀌었고, 뼈의 출처가 바뀌자 축제 가설이 근거를 잃었고, 축제 가설이 흔들리자 슈미트 인과 논증의 중간 고리가 끊겼다. 그 논증은 대규모 의례가 많은 사람을 모았고, 그들을 먹이는 부담이 순화를 불렀다는 구조였다.
기후 쪽 설명을 검토하려면 먼저 어떤 자료로 무엇을 재는지 알아야 한다.
클레어가 2026년 4월 30일 Heritage에 실은 논문은 두 종류의 자료를 나란히 놓는다. 한쪽은 인구의 대리 지표이고 다른 쪽은 기후의 대리 지표다.
인구 쪽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상류의 후기 구석기 및 토기 이전 신석기 유적 22곳에서 나온 방사성탄소 연대다. 전체 700개 가운데 275개를 걸러내고 남은 425개를 썼다. 걸러낸 기준은 표준편차가 100 방사성탄소년 이상인 값과 명백한 이상치다. 괴베클리 테페의 경우 141개 가운데 이상치 1개, 뼈에서 얻은 31개, 토양탄산염과 휴민산에서 얻은 20개를 제외했다. 뼈와 토양탄산염 시료가 이 유적에서 신뢰하기 어렵다는 판단은 2020년의 편년 재구성에서 나온 것이다.
기후 쪽은 네 종류를 썼다. 이라크 쿠르디스탄 지역의 동굴 유적 LoNAP514에서 얻은 동굴 침전물의 산소 및 탄소 동위원소는 강수와 식생의 대리 지표다. 사해의 홀로세 수위는 동지중해 강수량의 대리 지표다. 에게해 해양 시추 코어 LC21에 든 유공충의 산소 동위원소는 해수면 온도의 대리 지표다. 그린란드 빙하 GISP2에 든 육상 기원 칼륨 이온의 농도는 급격한 기후변화 구간의 발생과 강도를 보여주는 지표다.
그린란드 빙하의 칼륨 이온을 왜 쓰는지는 설명이 필요하다. 바다에서 오지 않은 칼륨은 대륙의 먼지에서 온다. 그 농도가 높다는 것은 대기 순환이 강해 먼지를 멀리 실어 날랐다는 뜻이다. 이것이 시베리아 고기압의 강도를 재는 대리 지표가 된다. 이 지표는 폴 마이예프스키를 제1저자로 하는 1997년 Journal of Geophysical Research 논문에서 제시되었다.
두 종류의 자료를 겹쳐 놓으면 이 지역 선사시대의 큰 움직임이 몇 개 보인다.
첫 번째는 영거드라이아스 안에서 정주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1만 900년 무렵부터 1만 년 무렵까지의 이 한랭기에 티그리스 강가의 쾨르틱테페와 본주클루 타를라에서 정주 수렵채집 취락이 시작되어 홀로세로 이어진다. 유프라테스 쪽에서는 아부 후레이라와 제르프 엘아흐마르와 텔 카라멜에서 이 시기의 연대가 나온다. 남레반트에서는 그보다 앞선 온난기에 이미 정주가 시작되었지만,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상류에서는 오히려 추워진 시기에 정주가 나타난다. 기후 악화가 정주를 막지 않았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PPNA에서 초기 PPNB로 넘어가는 시기의 재배치다. 기원전 9000년 안팎의 몇 세기 동안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상류에서 인구가 줄어든다. 오래 유지되던 취락 몇 곳이 이미 PPNA 후기에 버려졌다. 티그리스 쪽의 쾨르틱테페와 할란 체미, 유프라테스 쪽의 아부 후레이라가 그렇다. 정주의 중심은 몇 개의 거점으로 좁혀지고, 그중 일부는 이미 쇠퇴 중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샨르우르파 지역에서는 유적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클레어는 이 전환기를 수렵채집민의 위기라고 부른다.
기후가 원인이었는지가 여기서 쟁점이 된다. 기원전 8800년에서 8700년 무렵에 짧은 RCC 신호가 있다. 그린란드 빙하의 칼륨 이온과 에게해 코어에 나타나고,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동굴 침전물 기록에서도 이 무렵 더 서늘하고 건조한 조건이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클레어의 판단은 부정적이다. 이 구간의 고기후 증거가 약하고, 해당 시기의 사회경제 체계가 오히려 저항력이 높은 단계였으므로, 수렵채집민의 위기가 기후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낮으며 관찰되는 변화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중기 PPNB의 급감이다. 유적 수가 뚜렷하게 줄어든다. 이 전환은 약 1만 200년 전(calBP)의 기후 사건과 시기가 겹친다. 베른하르트 베닝어는 이 사건이 이 지역 여러 유적에서 순화된 보리와 소가 처음 나타나는 시점과 겹친다고 보고 인과 관계를 제안했다. 클레어는 이 시기가 이 유적의 폐기와 겹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인과를 단정하지 않는다.
클레어가 이 자료들을 배치하는 데 쓰는 틀은 생태학에서 온 적응 순환 모델이다.
클레어가 이 지역에 붙인 대응은 이렇다. 후기 구석기(영거드라이아스)가 재조직 국면, PPNA가 성장 국면, 초기 PPNB가 경직 국면, 그 이후가 해체 국면이다.
이 배치에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1만 200년 전의 기후 사건이 유적 수의 급감과 겹치는데, 그 시점은 적응 순환에서 가장 취약한 해체 국면이 아니라 저항력이 높다고 상정된 경직 국면에 해당한다. 클레어는 이 어긋남을 감추지 않고 세 가지 해석 가능성을 나열한다. 첫째, 저항력이 높았음에도 충격이 너무 커서 완충 장치가 감당하지 못했다. 둘째, 이용 가능한 방사성탄소 연대가 아직 너무 적어 이 구간의 시작 시점을 고고학적 순서 안에 제대로 놓지 못하고 있다. 셋째, 초기 PPNB에서 중기 PPNB로의 전환이 애초에 기후와 무관하다.
세 가능성을 나란히 적고 어느 하나를 고르지 않는 서술이 이 논문의 성격을 보여준다. 자료가 모델과 어긋날 때 모델을 손보는 대신 어긋남 자체를 기록에 남긴 것이다.
기후 충격이 어떤 사회에는 재난이 되고 어떤 사회에는 그렇지 않은 이유를 다루는 개념이 취약성이다. 클레어와 베닝어가 2010년 Documenta Praehistorica 37권에 정리한 구분을 따르면, 취약성은 두 갈래로 나뉜다.
생물물리적 취약성은 자연 재해에 노출되는 정도다. 위험한 장소에 사는가, 쓸 수 있는 자원이 있는가, 주거의 질이 어떤가 같은 조건이다. 사회적 취약성은 사회경제적 조건이다. 재난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사건이 닥쳤을 때 사회가 어떻게 짜여 있었는가라는 관점이다.
이 구분을 괴베클리 테페에 적용하면 이 유적의 위험이 어디서 왔는지가 드러난다.
먼저 물이다. 이 언덕에는 샘이 없고, 지금까지 샘이 있었다는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상주가 가능하려면 빗물을 모아 쓰는 수밖에 없었다. 클레어는 이 유적에서 강수 증가가 정주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라고 보면서, 기반암을 깎아 만든 수로와 저수조를 그 체계의 일부로 든다. 2015년에 북서쪽 K10-55 트렌치에서 지름 8미터에 깊이 2.8미터인 암반 굴착 구덩이가 드러났고, 서쪽으로 12미터 떨어진 K10-35 트렌치에서는 기반암을 깎은 수로가 석회암 판으로 덮인 채 나왔다. 이 시설들의 정확한 연대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토기 이전 신석기에 속한다는 것은 층위로 확인된다. 물 공급이 강수에 직접 걸려 있었다는 뜻이고, 이것은 생물물리적 취약성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유적을 실제로 무너뜨린 취약성은 다른 종류였다. 앞에서 본 대로 특수건물 가까이에 집을 지으려는 경쟁이 비탈에 퇴적을 쌓았고, 그 퇴적이 지진과 강수를 만나 흘러내렸다. 클레어는 2026년 논문에서 이 대목을 명시적으로 적는다. 초기 PPNB는 적응 순환에서 취약성이 낮다고 상정되는 단계인데, 적어도 이 특수한 사례에서는 주민들의 행동과 건축 전통이 자연재해에 타격을 입을 가능성을 오히려 높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글의 논지다. 이 유적의 붕괴에서 기후는 배경이고, 손상의 직접 원인은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쌓아 올린 배치였다. 특수건물에 가까운 자리가 좋은 자리였다는 사회적 사실이 비탈의 물리적 불안정으로 번역되었고, 축대를 쌓아 버티다가 결국 밀려났다.
적응 순환의 경직 국면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전통에 대한 참조가 굳어진다는 것이다. 클레어는 2024년 논문에서 이 특징을 이 유적의 가장 이상한 사실 하나와 연결한다.
내용은 이렇다. 초기 PPNB에 이 유적은 가장 조밀한 취락이 되었고, 거대 기둥과 대형 석상이 특수건물에 들어간 것도 이 시기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이 유적에서는 형태학적으로 순화된 동식물이 나오지 않는다. 인근 네발르 초리에서는 순화된 외알밀이 확인되고 양과 염소와 돼지를 소수나마 사람이 관리한 정황도 제기되는데,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순화가 처음 나타날 만한 시기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클레어가 제시하는 설명은 이 부재가 선택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경직 국면의 특징인 전통에 대한 완강한 참조가 이 부재를 설명할 수 있다는 서술이다. 이 해석에서 특수건물과 그 안의 의례는 수렵채집민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장치가 된다. 그는 이 유적의 창의성 폭발을 신석기적 혁신의 표현으로 읽는 것은 오독이며, 오히려 구석기 전통의 정점으로 읽은 기존 연구들과 자기 판단이 일치한다고 적는다.
같은 대목에서 그는 유적 간 차이도 이 틀로 읽는다. 괴베클리 테페에는 동물 그림이 많고 카라한테페에는 사람 그림이 많은데, 이런 차이는 쇠퇴 직전 체계의 특징인 지역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는 독립된 방향의 자료가 하나 붙는다. 왕신을 제1저자로 하는 연구진이 2023년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20권 4호에 실은 논문은 동남 아나톨리아와 남레반트의 PPNB 유적에서 나온 인골의 동위원소와 고DNA를 분석했다. 클레어는 이 연구가 네발르 초리에서 이 무렵 이동성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여준다고 정리하면서, 그 변화가 순화에 대한 의존이 커지는 과정과 함께 이 유적이 괴베클리 테페의 생활 체계와 세계관에서 사회적으로 멀어지는 과정과 겹친다고 적는다.
다만 이 해석에는 검증 조건을 명확히 붙이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순화가 없는 이유를 전통 고수로 설명하는 것과 자료가 부족해 아직 못 찾은 것으로 설명하는 것 사이에서 어느 쪽이 옳은지를 가릴 관측이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괴베클리 테페 주변 유적의 식물 및 동물 유체 분석이 축적되어, 같은 시기 인접 취락들 사이에서 순화의 유무가 갈리는 패턴이 확인된다면 이 설명은 힘을 얻는다. 반대로 이 유적에서 순화 증거가 나오면 설명 자체가 불필요해진다.
붕괴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클레어는 2026년 논문에서 괴베클리 테페의 최종 취락 단계에 대한 절대연대가 하나도 없다고 명시한다. 초기 PPNB 이후 층에서 연대측정에 쓸 유기물 시료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는 이를 다음 시즌들의 과제로 지목한다.
절대연대는 없지만 건축과 층위의 증거는 있다. 초기 PPNB 구조물 위에 더 작고 둥근 공간들이 흩어져 나타난다. 2022년에 남동쪽 오목지 서쪽 비탈의 L09-58 트렌치에서 발굴된 구조물이 그 사례로, 지름이 1.8미터 안팎인 원형에 가까운 공간의 북동쪽 4분의 1이 남아 있었다. 클레어는 이것을 이 유적의 마지막 선사시대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본다.
이런 공간을 무엇으로 볼지에 대해 그는 폐허에 머문 사람들의 임시 거처일 가능성을 든다. 큰 건물이 무너지고 취락이 흩어진 뒤에도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남은 구조물 사이에 작은 거처를 만들어 썼다는 그림이다.
취락의 중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클레어가 2026년 논문에서 정리한 바에 따르면 샨르우르파 주변의 구릉과 암반 지대에서 하란 평야의 귀르쥐테페,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아카르차이 테페와 메즈라 텔레일라트 쪽으로 이동한다. 이 지역의 초기 농경이 자리를 잡는 것은 그 뒤의 일이다. T자형 거석 건축은 이 이동과 함께 사라진다.
이 유적이 버려진 과정을 지금까지 확인된 자료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거대 구조물이 흙에 덮인 것은 의례가 아니라 사고였다. 남동쪽 저지대의 특수건물들은 위쪽 비탈에서 밀려 내려온 퇴적에 여러 차례 잠겼다. 2023년 D 구조물에서 나온 건축 손상과 잔해 속 공기주머니와 지붕 들보의 음형과 충전토 속 보행면이 그 증거다. 그 비탈은 자연 지형이 아니라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쌓은 텔 퇴적이었고, 특수건물 가까이에 집을 지으려는 경쟁이 그 퇴적을 만들었다. 축대용 테라스 벽과 건물 개조는 그 압력에 대응하려던 시도였다. 붕괴의 방아쇠로는 지진이 더 유력하고, 폭우와 폭설이 거들었을 수 있다.
기후 쪽 설명은 시점이 맞지 않는다. 이 지역 인구가 가장 크게 재배치된 PPNA에서 초기 PPNB로의 전환기에 기후 급변의 증거는 약하고, 그 시기의 사회경제 체계는 오히려 저항력이 높은 단계였다. 1만 200년 전의 기후 사건은 유적 수의 급감과 시기가 겹치지만, 그 겹침이 인과인지는 확정되지 않았고 논문 자신이 세 가지 가능성을 나란히 둔다.
이 정리가 바꾸는 것은 폐기의 원인만이 아니다. 매몰의 원인이 바뀌자 충전토 속 동물 뼈의 출처가 바뀌었고, 그것이 축제 가설의 근거를 무너뜨렸으며, 축제 가설이 흔들리자 대규모 의례가 식량 수요를 만들어 순화를 불렀다는 인과 논증의 중간 고리가 끊겼다. 하나의 퇴적학적 판단이 이 유적에 관한 가장 유명한 설명까지 되짚어 올라간 것이다.
아직 비어 있는 자리는 분명하다. 최종 단계의 절대연대가 없다. 이 공백이 채워지면 판단이 갈릴 지점도 분명해진다. 마지막 작은 원형 구조물들의 연대가 1만 200년 전 기후 사건보다 뒤로 나온다면, 기후 사건이 폐기의 직접 원인이었다는 설명은 약해지고 사면 붕괴 뒤의 긴 잔존 기간이 그림에 들어온다. 반대로 그 연대가 사건과 겹친다면 기후 쪽 설명에 무게가 실린다. 클레어가 이 연대측정을 다음 시즌들의 과제로 적어 둔 이유가 이것이다.
넓게 보면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정주의 대가다. 한곳에 오래 머무는 생활은 퇴적을 만들고, 퇴적은 지형을 바꾸며, 바뀐 지형은 새로운 위험이 된다. 이 유적의 주민들은 그 위험을 인지하고 축대를 쌓았다.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이 세운 건물은 1600년을 버텼고, 그 건물을 묻은 것은 그들 자신이 만든 언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