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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한 테페의 특별 건물 — 신전인가 집인가라는 물음이 이 유적에서 성립하지 않는 이유

튀르키예 샨르우르파 동쪽의 이 유적은 농경보다 먼저 대규모 석조 건축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정한다. 그러나 발굴 보고가 실제로 기록한 것은 의례 공간과 살림 공간이 한 정착지 안에 함께 있었다는 배치이며, 두 공간을 갈라 하나를 먼저 놓는 서술은 이 배치 위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2026년 9월 12일

사람이 정착하고 도시를 만들고 종교와 국가를 갖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표준 순서가 20세기 내내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농사를 지으면 먹을 것이 남고, 남은 식량이 사람을 한곳에 묶어 두고, 묶인 사람들 사이에서 분업과 위계가 생기고, 그 위에서 신전과 도시가 세워진다는 순서다. 이 순서를 만든 사람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다. 차일드는 1936년 런던의 와츠 출판사에서 낸 대중서 『Man Makes Himself』에 「신석기 혁명」과 「도시 혁명」이라는 두 장을 두고, 인류사의 큰 변화를 생산 양식의 전환으로 설명했다. 신석기 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이 책에서 대중에게 퍼졌다. 차일드는 1950년 학술지 『Town Planning Review』 21권 1호 3~17쪽에 「도시 혁명」을 따로 발표하면서, 도시가 성립하려면 농민 한 사람이 자기 소비를 넘는 잉여를 내고 그 잉여가 신이나 왕에게 모여야 한다는 조건을 열 개 항목으로 정리했다.

이 순서에서 잉여는 원인이고 기념비는 결과다. 튀르키예 남동부 샨르우르파 일대에서 지난 30년 동안 나온 발굴 자료는 이 인과의 방향을 되묻게 만들었다. 농사를 짓지 않던 집단이 수백 명이 들어갈 크기의 석조 건물을 짓고 거기에 사람과 짐승을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괴베클리 테페가 먼저 알려졌고, 2019년부터 발굴이 시작된 카라한 테페가 그 뒤를 이었다.

여기까지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덜 알려진 것은 그다음이다. 차일드의 순서가 흔들린 자리에 곧바로 다른 순서가 들어섰다. 신전이 먼저 있었고 마을은 나중에 생겼다는 설명이다. 카라한 테페의 발굴 보고를 읽으면 이 두 번째 순서도 이 유적의 자료로는 지탱되지 않는다. 발굴자가 기록한 것은 의례용 건물과 살림 공간이 한 정착지의 서로 다른 구역에 동시에 존재했다는 배치이기 때문이다.

카라한 테페라는 유적의 물리적 조건

이스탄불 대학교 선사학과의 네즈미 카룰은 2019년부터 카라한 테페 발굴을 이끌고 있다. 카룰이 2021년 튀르키예 문화관광부 문화재박물관총국이 펴내는 학술지 『Türk Arkeoloji ve Etnografya Dergisi』 82호 21~31쪽에 실은 보고가 이 유적에 관한 첫 본격 학술 기술이다. 그 보고에 따르면 카라한 테페는 샨르우르파 시내에서 동쪽으로 55킬로미터 떨어진 테크테크 산맥 국립공원 안에 있다. 테크테크 산맥은 하란 평야와 비란셰히르 평야 사이에 놓인 길이 60킬로미터의 낮은 대지이고, 북쪽이 해발 761미터, 남쪽이 500미터 아래로 내려간다.

이 지형이 유적의 성격을 결정했다. 카라한 테페가 놓인 곳은 수평으로 쌓인 석회암 층이 계단처럼 내려앉은 지대다. 석회암은 다루기 쉬운 돌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기둥을 따로 세워 올리는 대신 기반암을 파내 건물 자체를 만드는 방식이 가능했다. 카룰은 유적의 고고학적 퇴적이 약 10헥타르에 걸쳐 있고, T자 기둥을 떼어 낸 채석장까지 더하면 5헥타르가 추가된다고 적었다.

지표 조사와 지자기 탐사로 확인된 구역은 넷이다. 서쪽 단구와 동쪽 단구는 기둥의 윗부분이 지표에 드러나 있고, 그 돌의 배열만으로도 크기가 다른 원형 건물들이 구분된다. 세 번째는 남쪽 평지다. 여기에는 기둥으로 보이는 잔해가 지표에 없고 대신 갈돌 같은 유물이 나온다. 네 번째는 기둥의 원석을 떼어 낸 채석장이며, 서쪽 언덕이 남서쪽으로 내려가는 단구에 기둥 자리와 반쯤 다듬다 만 T자 기둥이 남아 있다.

토기 없는 신석기(PPN) 질그릇이 아직 쓰이지 않던 신석기 초기를 가리킨다. 영어 약칭은 Pre-Pottery Neolithic이고, 건물 평면과 화살촉 형식의 차이에 따라 앞 시기 PPNA와 뒷 시기 PPNB로 나뉜다. 이 구분을 만든 사람은 영국 고고학자 캐슬린 케니언이며, 기준이 된 자료는 예리코 유적의 층서였다. 케니언은 앞 시기에 둥근 평면의 건물이, 뒷 시기에 네모난 평면의 건물이 나타난다는 관찰에서 출발했다. 독일고고학연구소가 정리한 연대는 PPNA가 기원전 9500년에서 8700년 사이, PPNB의 이른 단계가 기원전 8700년에서 8200년 사이다. 카라한 테페와 괴베클리 테페는 모두 이 시기에 속한다.

서쪽 단구에서 나온 네 개의 지하 구조물

2019년과 2020년 발굴로 서쪽 단구 북쪽에서 지하식 구조물 네 개가 드러났다. 카룰은 발견 순서에 따라 AA, AB, AD, AC로 이름을 붙였고, 바닥 높이는 서로 다르지만 셋이 하나의 건물군을 이룬다는 점에서 같은 시기로 보았다. 시기는 PPNA 늦은 단계에서 PPNB 이른 단계 사이다.

AD가 가장 크고 건물군의 중심이다. 지름이 23미터에 이르고, 평면은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에 가깝다. 서쪽 절반은 기반암을 깎아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벽면의 높이가 4.3미터다. 이쪽 벽에는 기반암에서 깎아 낸 부벽이 있고 벽 아래쪽은 두 단으로 된 의자 모양이다. 나머지 절반은 두께 1.5미터의 석벽으로 둘러쌌고 그 벽을 따라 기둥과 두 단짜리 의자가 이어진다. 건물 안쪽에서 무너진 기둥 두 개가 나왔는데, 원래는 건물 중앙에 서로 마주 보게 얕은 자리를 파고 세워 두었다.

AB는 AD의 북쪽에 붙어 있고 전체가 기반암을 파내 만들어졌다. 크기는 7미터 곱하기 6미터이고 평면은 모서리가 둥근 사다리꼴이다. 들어가는 길은 남쪽에 뚫린 지름 70센티미터의 둥근 구멍이며, 그 안으로 다섯 단의 계단이 내려간다. 북동쪽 모서리에는 바닥에서 위로 올라가는 네 단짜리 계단이 따로 있다. 계단이 닳은 모양을 보면 남쪽으로 내려와 북동쪽으로 나갔다. 남쪽 입구는 옆 건물인 AD에서도, 지표에서도 닿을 수 있다.

AB의 서쪽 위쪽에는 능선처럼 솟은 부분이 있고, 그 가운데가 사람 머리 모양으로 다듬어져 공간 안쪽으로 뻗어 나와 있다. 머리는 입구 계단 쪽으로 약간 돌아 있다. 이마가 튀어나오고 입술이 두껍고 턱 아래에 수염이 표현된 남자다. 머리 근처 의자에는 작은 벽감 두 개가 파여 있다. 북쪽에는 구불구불한 홈이 건물 안으로 열려 있다.

이 방에는 기둥이 열한 개 서 있다. 그중 열 개는 기반암을 깎아 남긴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따로 다듬어 얕은 자리에 끼워 넣은 판이다. 사람 머리 앞쪽 네 개가 앞줄을 이루며 좌우로 둘씩 늘어서 있고 머리 정면은 비워 두었다. 앞줄 기둥은 높이가 1.6미터에서 1.7미터이고 뒷줄 여섯 개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 뒷줄 기둥은 높이가 1미터에서 1.4미터, 지름이 30센티미터에서 50센티미터다. 카룰은 이 기둥들이 모두 남근 모양으로 세워졌다고 기술했다. 건물 안에 살림과 관련된 시설은 없다.

AA는 8.5미터 곱하기 7미터이고 깊이가 1.1미터로 다른 구조물보다 얕다. 서쪽으로 길이 6.6미터의 의자가 이어지고, 그 끝의 두 단이 건물을 바깥과 연결한다. 의자 앞면에는 뱀이 새겨져 있고, 그 무늬 끝 계단 아래에 여우가 새겨져 있으며, 여우 턱 밑에 작은 벽감이 있다. AC는 지름 5.5미터이고, 2021년 보고 시점에는 경계만 확인된 상태였다.

채움은 무너져 내린 흙이 아니었다

카룰의 2021년 보고는 건물의 형태보다 건물이 묻힌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신석기 유적에서 건물을 일부러 메우는 관행은 1960년대부터 논쟁거리였고, 카룰은 그 논쟁의 새 자료로 카라한 테페를 제시했다.

AB의 채움은 단계가 뚜렷하다. 바닥의 고르지 않은 면 위에 붉은빛이 도는 흙이 40센티미터에서 50센티미터 두께로 깔렸다. 여기에는 5센티미터에서 10센티미터 크기의 납작한 석회암 조각이 섞여 있고 고고학적 유물은 들어 있지 않다. 돌이 기둥 사이에 던져지거나 군데군데 줄지어 놓인 상태로 나왔다. 카룰은 이 상태를 빠른 채움의 흔적으로 읽었다. 남쪽 계단 앞은 다른 곳과 달리 돌로 가득 메워졌고 큰 돌을 거의 세운 자세로 썼다.

그 위에 1.5미터 두께의 어두운 채움이 온다. 여기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돌과 함께 고고학적 유물이 들어 있고 질그릇 조각도 몇 점 섞여 있다. 마지막으로 큰 돌들이 빈틈 없이 전체를 덮는다. 이 돌들은 건물 경계 바깥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동쪽에는 2.65미터 곱하기 1.65미터의 큰 판석이 자리에 맞춰 놓였고 같은 구역에 납작한 돌이 규칙적으로 배치됐다.

카룰이 의도적 매몰의 결정적 근거로 든 것은 뒷줄 기둥 처리다. 앞줄 기둥은 원래 키가 커서 채움이 끝났을 때 지표 바로 아래까지 닿았다. 뒷줄 여섯 개는 낮아서 그대로는 묻혀 버린다. 그래서 뒷줄 기둥 위에만 큰 돌을 얹어 지표까지 높여 놓았다. 자연적으로 흙이 흘러들었다면 돌이 기둥 머리 위에 우연히 올라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카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채움이 건물 경계 안쪽에만 머무르고 낮은 기둥이 지표까지 올라와 있다는 것은, 메운 뒤에도 건물의 자리와 범위가 밖에서 보였다는 뜻이다. 나중에 다시 파낼 생각으로 메웠을 가능성이 떠오르지만, 카라한 테페에서도 다른 유적에서도 그런 사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래서 카룰은 건물을 그 안에서 있었던 일과 함께 묻어 과거에 대한 참조를 보존한 행위로 읽었다.

같은 건물군 안에서도 처리 방식이 달랐다. AB와 AA와 AC는 채워졌지만 가장 큰 AD는 허물어졌다. AD 한가운데를 동서로 자른 단면을 보면, 흙과 돌의 층이 건물 바깥 양쪽에서 가운데를 향해 기울어 내려오다가 중앙에서 평평해진다. 서쪽 절반에는 건물이 놓인 기반암의 경사를 따라 끌려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큰 돌들이 여러 줄 겹쳐 있고, 가운데로 갈수록 기울기가 줄어 바닥과 나란해진다. 동쪽 절반도 채움의 성격은 비슷하나 기울기가 반대 방향이다. 카룰은 채움의 기울기가 기반암 경사와 맞지 않고 바깥에서 안쪽을 향한다는 점을 의도적 과정의 근거로 들었다. 여기에 더해 부서진 조각상과 접시와 그릇 같은 석기가 의자 위에 남아 있었다. 카룰은 AD가 너무 커서 메우기 어려웠기 때문에 허무는 쪽을 택했을 것으로 보았다.

발굴자가 주거 구역으로 지목한 곳은 따로 있다

카라한 테페를 다루는 대중 자료 대부분은 서쪽 단구의 지하 구조물에서 멈춘다. 카룰의 보고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결론 부분에서 카룰은 지금까지 서쪽 단구에서 나온 건물이 모두 특별 건물이며, 서쪽 단구와 동쪽 단구가 특별 건물을 위해 남겨진 구역이라고 정리한다. 그리고 두 단구 남쪽에 있는 남쪽 평지가 이 정착지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 구역이었을 것이라고 적는다.

특별 건물 살림에 쓰인 흔적이 없고 크기·설비·상징물에서 주거와 구분되는 건물을 가리키는 이 지역 발굴 보고의 용어다. 영어로는 special building이라 쓴다. 이 말은 신전이나 성소 같은 단어를 피하려고 선택한 말이다. 신전이라는 말은 성과 속을 나누는 관념과 전업 사제와 봉헌 체계를 함께 끌고 들어오는데, 토기 없는 신석기 유적에서 그런 제도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특별 건물은 그 대신 관찰된 것만 지시한다. 즉 살림 시설이 없고 주변 건물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 구분이 왜 중요한가. 유적 전체가 의례 공간이라는 주장과, 유적 안에 의례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명제이기 때문이다. 앞의 주장은 사람이 살지 않는 순례지를 뜻하고, 뒤의 주장은 사람이 사는 마을에 공동 건물이 있다는 뜻이다. 카룰이 남쪽 평지에서 확인한 갈돌은 뒤쪽을 가리킨다. 갈돌은 곡물이나 열매를 부수고 가는 도구이고 살림살이의 표지다.

2026년 4월 카룰이 아나돌루 통신에 밝힌 수치는 이 구역 문제의 규모를 보여 준다. 유적 전체 면적이 12헥타르이고 발굴이 진행된 면적이 6000제곱미터다. 12헥타르는 12만 제곱미터이므로 파낸 곳은 전체의 5퍼센트다. 그나마 파낸 구역 안에도 더 깊은 층이 남아 있다고 카룰은 덧붙였다. 남쪽 평지의 주거 여부는 본격 발굴로 확인해야 할 항목으로 남아 있다.

이웃 유적에서는 특별 건물과 집이 섞여 있었다

카라한 테페의 구역 구분을 판단할 비교 자료가 최근에 나왔다. 같은 샨르우르파 대지에 있는 사이부르츠 유적이다. 이스탄불 대학교 고고학과의 에일렘 외즈도안이 2024년 학술지 『Documenta Praehistorica』 51권 44~58쪽에 이 유적의 첫 3년 조사 결과를 정리했다.

사이부르츠는 샨르우르파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신석기 정착지의 넓이는 약 3000제곱미터로 추정된다. 카라한 테페나 괴베클리 테페보다 작다. 1949년에 들어선 현대 마을이 유적 위를 덮고 있어 발굴은 마을 사이에서 진행된다.

이 유적의 북쪽 구역에서 폭 14미터의 지하식 건물이 나왔다. 기반암을 깎아 만들었고 벽을 따라 도는 의자가 있으며 의자에는 기둥을 세웠던 자리가 파여 있다. 의자 앞면에 사람과 짐승 다섯이 새겨져 있다. 외즈도안은 이 건물을 특별 건물로 판정했다.

처음에는 이 건물이 발견된 북쪽 구역 자체가 특별 건물 구역이라고 보았다. 차요뉘나 네발르 초리 같은 다른 유적에서 확인된 배치가 그랬기 때문이다. 남쪽 구역 발굴이 진행되면서 판단이 바뀌었다. 남쪽에도 특별 건물이 있었고, 주거 사이에 끼어 있었다. 남쪽 구역에서 특별 건물로 분류된 것이 적어도 셋이다. CB라 불리는 타원형 건물에는 벽 앞에 T자 기둥 일곱 개가 놓였고 가운데에 기둥이 하나 더 있었다. 인접한 CD에서도 같은 특징이 확인됐고, 더 남쪽의 DA에는 벽 앞에 두 단짜리 의자와 중앙 기둥이 있었다.

외즈도안이 특별 건물과 주거를 가르는 기준으로 든 것은 상대적 크기, 기둥의 수, 두 단짜리 의자, 조형물의 유무다. 상대적이라는 말이 붙는 이유는 사이부르츠에서 두 종류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던 집에도 사람 모양이 표현된 T자 기둥과 돌 의자가 있었다. 완전히 발굴된 유일한 집인 BB에는 사람 특징이 새겨진 기둥이 방 한가운데 서 있었고, 같은 방에 벽감과 벽 속에 낸 돔형 화덕과 갈돌이 함께 있었다.

외즈도안은 같은 배치가 괴베클리 테페와 카라한 테페에서도 관찰된다고 적으며 각각 리 클레어의 2020년 보고와 카룰 등의 2023년 발굴 보고를 근거로 들었다. 결론에서는 특별 건물이 여럿이고 주거에 섞여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전통이 기원전 9500년 무렵의 괴베클리 테페와 카라한 테페에서 기원전 8500년 무렵의 사이부르츠까지 이어진다는 점을 정리했다. 작은 정착지에도 특별 건물과 높은 수준의 조형물이 있었다는 것은, 이런 요소가 크고 이름난 유적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순화의 증거는 이 유적에 없다

농경보다 먼저라는 진술이 성립하려면 이 유적에서 재배 작물과 가축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 이 조건은 확인돼 있다. 괴베클리 테페에 관해서는 독일고고학연구소가 순화된 식물도 동물도 나오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카라한 테페에 관해서는 2026년 4월에 공개된 분석 결과가 있다.

카룰은 실험실 분석 결과 카라한 테페 사람들의 단백질 공급원이 가젤에 집중돼 있었다고 밝혔다. 잔해의 빈도는 일정한 생계 전략을 가리킨다. 괴베클리 테페에서도 가젤 소비의 흔적이 강하게 나오지만 차이가 있다. 괴베클리 테페의 동물 잔해는 낮은 평지부터 산지까지 여러 생태 구역에 걸친 종을 포함하는 반면, 카라한 테페 쪽은 대상이 더 좁다.

식물 쪽에서는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 이 지역 초기 신석기 식단은 오랫동안 곡물 중심으로 설명돼 왔다. 카라한 테페의 식물 잔해에서는 콩과 식물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카룰은 이 결과를 놀랍다고 표현했고, 곡물이 식물성 섭취의 대부분을 차지하리라는 예상이 빗나갔다고 밝혔다. 이 분석은 이전 발굴 시즌에서 수습한 시료를 대상으로 한 것이며 괴베클리 테페와의 비교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재배 작물이 언제 어디서 생겼는지는 따로 확인돼 있다. 만프레트 호인을 비롯한 연구진이 1997년 11월 14일 학술지 『Science』 278권 5341호 1312~1314쪽에 낸 논문이 그 기준점이다. 이들은 야생 외알밀 계통을 근동 각지에서 모아 288개의 표지 자리에서 유전자 지문을 비교했고, 재배 외알밀과 가장 가까운 야생 집단이 튀르키예 남동부 카라자다으 산지의 것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시료 일부는 디야르바크르 서쪽 52킬로미터 지점 해발 1400미터에서, 일부는 시베레크 동쪽 16킬로미터 해발 1050미터에서 채집됐다. 카라자다으는 카라한 테페와 괴베클리 테페가 있는 대지에서 북동쪽으로 떨어진 화산지대다.

정리하면 이렇다. 밀이 재배 작물이 된 자리는 이 유적들에서 멀지 않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난 시점에 이 유적들의 사람들은 아직 야생 자원에 의존하고 있었다. 곡물을 다루기는 했다. 라우라 디트리히를 비롯한 연구진이 2019년 5월 1일 학술지 『PLOS ONE』 14권 5호에 실은 논문은 괴베클리 테페의 갈돌과 갈판을 3차원 모형으로 기록하고 사용 흔적을 현미경으로 분석했으며, 퇴적물과 갈돌 표면에서 식물규소체를 뽑아 종류와 양을 쟀다. 결론은 곡물 채집과 가공이 이 건물들을 세운 집단의 생계 체계에 들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저장 시설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곧바로 소비할 음식을 특정 시기에 대량으로 마련했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같은 자료에서 한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가젤 사냥이 집중되는 양상을 함께 확인하고 이를 대규모 노동 잔치의 흔적으로 해석했다.

신전이 먼저라는 문장은 무엇을 전제하는가

차일드의 순서를 뒤집은 자리에 들어선 두 번째 순서는 괴베클리 테페 발굴을 맡았던 독일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의 것이다. 슈미트는 1995년부터 1999년까지의 발굴을 정리한 보고를 2000년 학술지 『Istanbuler Mitteilungen』 50권 5~41쪽에 실으면서 표제를 이렇게 달았다.

Zuerst kam der Tempel, dann die Stadt

먼저 신전이 왔고 그다음에 도시가 왔다

클라우스 슈미트, 『Istanbuler Mitteilungen』 50권(2000년) 5~41쪽에 실린 괴베클리 테페·귀르쥐테페 발굴 예비보고의 표제

독일어 Tempel은 신전, Stadt는 도시다. 이 표제가 대중 서술에서 인류 최초의 신전이라는 표현으로 굳었다.

이 문장에는 두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첫째, 문제의 건물들이 신전이라는 것. 둘째, 그 건물들이 있던 곳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것. 두 전제는 서로를 지탱한다. 사람이 살지 않았어야 건물이 순수한 의례 시설이 되고, 건물이 모두 의례 시설이어야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말이 성립한다.

토론토 대학교의 에드워드 배닝이 2011년 10월 학술지 『Current Anthropology』 52권 5호 619~660쪽에 실은 논문이 이 순환을 겨냥했다. 배닝의 논지는 두 갈래다. 하나는 성스러운 공간과 세속 공간을 가르는 구분이 근대 서구의 관념이며 토기 없는 신석기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의례나 상징이 확인된다고 해서 그 건물이 전용 신전이라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배닝은 대안 가설로 괴베클리 테페의 건물들이 상징이 풍부하게 들어간 집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 건물들에서 잔치와 매장과 입문 의례가 이루어졌을 가능성 자체는 배닝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실이 그곳이 집이 아니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배닝의 주장이다.

이 논쟁에서 자료를 내놓은 쪽은 발굴단이었다. 독일고고학연구소 이스탄불 지부의 리 클레어는 2015년부터 2019년까지의 조사를 정리해 2020년 10월 12일 학술지 『e-Forschungsberichte des DAI』 2호 81~88쪽에 보고를 실었다. 보고는 순수한 의례 유적이라는 해석이 세 가지 관찰에 기대어 있었다고 정리한다. 특별 건물의 존재, 주거 건물의 부재, 믿을 만한 수원의 부재다.

뒤의 두 관찰이 흔들렸다. 2015년과 2016년에 유적 북서쪽 K10-13과 K10-23 구덩이에 걸쳐 판 깊은 시굴에서 기반암 바로 위에 지은 둥근 타원형 건물들이 여러 채 붙은 상태로 나왔다. 그 옆에 화덕이 잇달아 놓인 작업 공간이 있었고 돌과 뼈로 구슬을 만든 흔적과 뼈 도구가 많이 나왔다. 2017년에는 빗물 배수관을 묻으려고 판 좁은 도랑에서 같은 성격의 건물이 또 나왔다. 클레어는 이 건물들을 PPNA에 속한 주거로 보았다. 2015년 K10-55 구덩이에서는 기반암을 파 만든 지름 8미터, 깊이 2.8미터의 구덩이가 확인됐고, 인근 K10-35에서 나온 기반암에 새긴 수로와 함께 빗물을 모으는 시설로 해석됐다. 수로는 석회암 판으로 덮여 보호돼 있었다.

클레어는 같은 보고에서 이 해석을 만들고 퍼뜨린 쪽이 발굴단 자신이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새 관찰 때문에 대중 과학적 서술의 수정이 불가피해졌다고 썼다. 슈미트가 세운 세 층 편년은 폐기됐다. 특별 건물의 진흙 모르타르에서 뽑은 유기물로 측정한 연대가 이 건물들이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오래 쓰였음을 보여 주었고, 일부는 마지막 건축 단계가 처음 세워진 때보다 500년 이상 뒤였다. 그 결과 둥근 특별 건물과 네모난 건물이 시기적으로 겹친다는 것이 확인됐다.

결론 — 확정된 것은 순서 하나이고, 건물의 이름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카라한 테페와 그 이웃 유적들이 확정한 명제는 하나다. 재배 작물과 가축이 생기기 전에, 야생 자원에 의존하던 집단이 기반암을 깎고 돌을 옮겨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들어갈 건물을 지었고 거기에 사람과 짐승을 새겼다. 이 명제는 잉여가 먼저고 기념비가 나중이라는 차일드식 순서와 맞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발굴 자료로 지탱된다.

그다음 명제는 지탱되지 않는다. 이 건물들이 신전이었고 마을은 나중에 생겼다는 문장이다. 카라한 테페의 발굴자는 서쪽과 동쪽 단구를 특별 건물 구역으로, 남쪽 평지를 생활 구역으로 나누어 놓았다. 곧 한 정착지 안의 구역 분화다. 사이부르츠에서는 그 구분조차 흐릿해서, 사람이 살던 집에도 사람 모양 기둥과 돌 의자가 있었고 특별 건물이 주거 사이에 끼어 있었다.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발굴단 자신이 주거 건물과 빗물 시설을 확인하고 순수 의례 유적이라는 전제를 거두어들였다.

세 유적의 자료가 함께 가리키는 것은 의례 공간과 생활 공간이 애초에 분리돼 있지 않았다는 배치다. 이 배치 위에서는 신전이 먼저인가 마을이 먼저인가라는 물음이 답을 가질 수 없다. 두 가지가 같은 정착지에서 같이 나오기 때문이다. 배닝이 2011년에 제기한 것도 시간 순서의 문제는 아니었다. 범주의 문제였다. 성과 속을 가르는 선이 있었는지부터가 확인되지 않았다.

남은 항목은 분명하다. 카라한 테페에서 발굴된 면적은 전체의 5퍼센트이고, 발굴자가 생활 구역으로 지목한 남쪽 평지는 아직 본격적으로 파지 않았다. 여기서 주거가 확인되면 이 유적은 특별 건물을 갖춘 마을이 되고, 확인되지 않으면 구역 분화의 성격을 다시 물어야 한다. 어느 쪽이든 결론은 땅에서 나오며, 그 전에 붙는 이름은 자료가 아니라 이름을 붙이는 사람의 분류 습관을 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