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
튀르키예 남동부 샨르우르파 일대의 언덕 몇 곳에서 나온 유적이 20년 넘게 세계 고고학의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두 유적 모두 사람 키를 훌쩍 넘는 T자 모양 석주가 원형으로 둘러선 큰 건물을 갖고 있는데, 그 건물을 만든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재배종 곡물도, 가축도 나오지 않았다.
이 조합이 문제가 된 까닭은 20세기 내내 통용된 설명의 순서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농사가 먼저 생기고, 농사가 잉여를 낳고, 잉여가 사람을 한곳에 모으고, 모인 사람들이 신전을 세웠다는 순서다. 괴베클리 테페는 마지막 항목이 첫 항목보다 먼저 왔다고 말한다.
그래서 대중 매체는 이 유적을 "역사를 다시 쓴 발견"으로 소개한다. 정작 발굴을 맡은 연구진은 2020년 이후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순서를 뒤집는 해석 역시 발굴이 진행되면서 근거를 잃었다고 한다.
뒤집혔다는 그 순서부터 밝혀야 한다. 순서를 만든 사람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V. Gordon Childe, 1892~1957)다. 그는 1936년 런던에서 펴낸 Man Makes Himself에 「신석기 혁명」과 「도시 혁명」이라는 제목의 장을 두고, 선사시대를 경제 혁신이 이끈 몇 차례의 혁명으로 설명했다. 신석기 혁명이라는 용어는 여기서 굳어졌다.
차일드의 설명은 이렇게 이어진다. 사람이 식물과 동물을 순화하면서 먹을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그 결과 한자리에 눌러살 수 있게 됐다. 수확량이 먹고 남을 만큼 늘자 농사를 짓지 않고도 먹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사제와 장인과 지배자가 그들이다. 기념비적인 건축물과 조직된 종교는 이 단계에서 나온다.
차일드의 모델은 단순해서 강력했다. 경제가 바뀌면 사회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면 관념이 바뀐다. 인과의 화살표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20세기 중반의 교과서와 박물관 전시가 이 화살표를 따랐고, 지금도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신석기 서술은 대개 이 순서를 밟는다.
차일드가 자료를 충분히 갖고 이 모델을 세운 것은 아니다. 1936년 시점에 서아시아의 초기 신석기 유적 발굴은 막 시작 단계였다. 그가 쓴 재료는 후대의 대형 취락에서 나온 것이고, 농경이 시작되던 바로 그 시기의 유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모델은 자료보다 앞서 있었다.
괴베클리 테페는 샨르우르파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언덕이다. 이스탄불대학교와 시카고대학교의 공동 지표조사가 1963년에 이곳을 기록했지만, 당시에는 비잔티움 시기 묘지 정도로 분류됐다. 독일고고학연구소의 클라우스 슈미트가 발굴을 시작한 것은 1995년이다.
드러난 것은 지름 10m 안팎의 원형 또는 타원형 건물이었다. 건물 가장자리를 따라 T자 모양의 석주가 둘러서 있고, 한가운데에 더 큰 석주 두 개가 마주 보고 서 있다. 석주에는 여우, 멧돼지, 뱀, 전갈, 학, 거미가 부조로 새겨져 있다. 가장 큰 석주는 높이 5m를 넘고 무게는 수 t에 이른다.
슈미트의 해석은 명료했다. 이 건물들은 의례를 위해 지은 특수 건물이고, 괴베클리 테페는 주변 집단이 모여드는 성소였다는 해석이다. 독일고고학연구소의 리 클레어가 2020년에 정리한 바에 따르면, 이 해석은 세 가지 관찰에 기대고 있었다. 화려하게 조각된 T자 석주를 갖춘 특수 건물이 있다는 것, 주거용 건물이 없다는 것, 믿을 만한 수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결정적인 사실이 하나 더 붙었다.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재배종 식물도 가축도 나오지 않는다. 이 건물들을 세운 사람들은 수렵과 채집으로 살고 있었다.
슈미트는 여기서 차일드의 화살표를 거꾸로 돌렸다. 수렵채집민이 이런 건물을 세우려면 사람을 대규모로 모아야 하고, 모인 사람들을 먹여야 한다. 수렵채집 경제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다. 그 부담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식물 순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종교적 열의가 농경을 불렀다는 이 설명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조직된 종교는 경제적으로 발달한 사회에서야 생긴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거슬렀기 때문이다.
이 설명에 힘을 실어 준 분야는 식물 유전학이었다. 1997년 11월 Science에 실린 만프레트 호인(Manfred Heun)과 동료들의 논문이 그것이다. 이들은 야생 외알밀과 재배종 외알밀 계통들을 증폭 단편 길이 다형성(AFLP)이라는 분자표지 288개 자리에서 비교해 계통수를 그렸다.
결과는 튀르키예 남동부 카라차다으 산지의 야생 외알밀 무리가 재배종 외알밀의 조상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었다. 논문은 근처 초기 농경 취락의 발굴 증거도 이 결론을 뒷받침한다고 적었다. 카라차다으는 괴베클리 테페에서 동쪽으로 100km 남짓 떨어져 있다.
서사가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수렵채집민이 언덕 위에 성소를 세웠고, 그 성소를 유지하려다 100km 밖에서 밀을 길들였다는 이야기다. 기사와 다큐멘터리가 이 서사를 반복했고, 괴베클리 테페는 2018년 7월 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튀르키예 문화관광부는 2019년을 '괴베클리 테페의 해'로 선포했고, 그해 방문객은 40만 명을 넘었다.
다만 호인의 논문에 실린 연대는 서사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늦다. 1998년 Science에 실린 독자 논평은 이 논문이 정리한 관련 유적의 보정하지 않은 방사성탄소 연대가 기원전 7600년에서 6200년 사이에 걸쳐 있고, 순화된 외알밀이 처음 기록되는 시점은 기원전 7000년경이라고 짚었다. 논평자는 그보다 이른 농경 유적이 남쪽으로 800km 떨어진 곳에 있다는 점도 함께 적었다. 괴베클리 테페의 대형 건물이 세워진 시기보다 2000년 이상 뒤다. 유전학이 가리킨 장소와 고고학이 가리킨 시점이 곧바로 맞물리지는 않는다.
순수 의례 중심지 해석을 떠받치던 세 근거는 2015년부터 2019년 사이의 조사에서 하나씩 무너졌다. 이 조사를 정리해 공표한 것은 발굴을 이끄는 독일고고학연구소 이스탄불지부의 리 클레어이고, 발표 지면은 독일고고학연구소가 펴내는 e-Forschungsberichte 2020년 2호다.
첫째 근거인 주거 건물의 부재부터 보자. 2015년과 2016년에 유적 북서쪽 K10-13과 K10-23 구역에 걸쳐 깊은 시굴을 넣었다. 석회암 암반 위 또는 바로 그 언저리에 지은 둥근 타원형 건물들이 서로 붙어 늘어선 모습이 드러났고, 그보다 조금 큰 여러 시기의 둥근 타원형 건물도 함께 나왔다. 이 건물들이 둘러싼 작은 작업 공간에서는 화덕 자리가 연속으로 확인됐고, 돌구슬과 뼈구슬을 만든 흔적, 그리고 유난히 많은 뼈 도구가 나왔다.
이듬해인 2017년에는 보호 시설의 빗물 배수관을 묻으려고 판 좁은 도랑에서 또 다른 둥근 집터들이 이어져 나왔다. 클레어는 이 건물들이 토기 이전 신석기 A기, 곧 기원전 9500년에서 8700년 사이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적었다.
이어지는 초기 토기 이전 신석기 B기, 곧 기원전 8700년에서 8200년 사이에도 주거 활동은 계속된다. 이 시기에는 둥근 건물에 더해 사각형 건물이 차츰 나타난다. 클레어는 둥근 공간을 일부러 사각형으로 고쳐 쓴 사례까지 확인된다고 적었다. 사각형 건물 자체는 1990년대 발굴에서도 나왔지만, 그동안 연구자들의 관심이 대형 특수 건물에 쏠려 있어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둘째 근거인 수원의 부재도 흔들렸다. 2015년 K10-55 구역의 시굴에서 암반을 파 만든 지름 8.0m, 깊이 2.8m의 구덩이가 나왔다. 서쪽으로 12m 떨어진 K10-35 구역에서는 슈미트가 2013년에 확인한 암반 수로가 있는데, 이 수로 구간은 석회암 판으로 덮여 보호돼 있었다. 클레어는 이 구덩이가 빗물을 모으는 시설의 일부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셋째로, 건물의 성격을 가리키는 유물 조성도 달라진 그림을 보여 준다. 괴베클리 테페의 뗀석기 조성은 도구 종류로 보아 주거 맥락의 것과 같다. 2017년 가을에는 남동쪽 배수관 도랑에서 드러난 여러 시기의 사각형 건물에서 콩팥 모양으로 판 바닥 아래 무덤이 확인됐다. 예비 분석 결과 적어도 3명분의 흐트러진 인골이 들어 있었다. 바닥 아래 매장은 토기 이전 신석기의 주거 유적에서 흔한 장례 방식이다.
세 근거가 모두 흔들리면 무엇이 남는가. 대형 특수 건물이 특수하다는 관찰은 남는다. 그러나 그 건물들이 사람이 살지 않는 언덕 위에 따로 서 있었다는 그림은 남지 않는다.
여기서 두 번째 수정이 나온다. 괴베클리 테페의 대형 건물들은 쓰임이 끝난 뒤 흙과 돌로 가득 채워진 상태로 발견됐다. 슈미트는 이것을 의도적인 매립으로 읽었다. 건물을 사람처럼 장사 지냈다는 해석이다. 이 해석은 유적의 상징 체계를 설명하는 핵심 고리 노릇을 했다.
클레어가 2020년에 내놓은 재검토 결과는 다르다. 유적 남동쪽 저지대 주 발굴 구역의 채움층을 다시 보니, 높은 쪽 둔덕과 사면에서 이미 쌓여 있던 고고학 퇴적물이 흘러들어 건물을 덮은 것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 해석이 두 가지를 함께 풀어 준다고 적었다. 채움층 물질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왜 그 안에 A기와 B기 유물이 뒤섞여 있고 방사성탄소 측정값이 들쭉날쭉한지다. 사면이 여러 차례 흘러내렸고, 당시 사람들이 특수 건물을 보호하려고 손을 쓴 흔적도 함께 연구 대상이 됐다.
같은 현상을 두고 카라한 테페의 발굴 책임자는 반대 방향의 결론을 유지한다. 이스탄불대학교의 네지미 카룰이 2021년 Türk Arkeoloji ve Etnografya Dergisi 82호에 발표한 논문이 그것이다. 제목부터 「토기 이전 신석기 카라한 테페의 매장된 건물들」이다.
카룰이 제시한 근거는 구체적이다. 구조물 AB의 내부를 남북으로 자른 단면을 보면, 건물 서쪽 절반에는 큰 돌들이 암반 경사를 따라 끌려 들어온 모양으로 여러 줄 겹쳐 있고, 중심으로 갈수록 기울기가 줄어 바닥과 나란해진다. 그 위에 더 작은 돌이, 다시 그 위에 크기가 제각각인 돌이 섞인 두꺼운 흙층이 얹혀 있다. 동쪽 절반도 채움 양상은 비슷하되 기울기가 반대다. 남쪽 계단 앞은 다른 곳과 달리 돌로만 채워졌고, 그것도 큰 돌을 거의 수직으로 세워 넣었다.
맨 위층의 처리는 더 분명하다. 큰 돌들이 빈틈 없이 공간을 덮었는데, 그 돌들은 건물 경계 밖으로 퍼지지 않는다. 채우는 작업이 건물이 차지한 범위에 한정됐다는 뜻이다. 동쪽에는 2.65m × 1.65m 크기의 큰 판돌이 미리 파 둔 자리에 놓여 있었고, 같은 구역에 다른 판돌들도 규칙적으로 배열돼 있었다.
사면에서 흘러든 퇴적이 건물 경계에서 멈추지는 않는다. 큰 판돌을 미리 판 자리에 맞춰 놓지도 않는다. 카룰의 관찰이 맞다면 카라한 테페의 채움은 사람이 계획해서 한 일이다.
두 유적을 나란히 놓으면 '매립'이라는 현상 자체가 쟁점이 된다. 한쪽에서는 의도적 매립이라던 해석이 철회됐고, 다른 쪽에서는 의도적 매립이 새로 주장됐다. 같은 문화권의 같은 형식 건물이라도 폐기 방식은 유적마다 달랐을 수 있고, 관찰의 정밀도가 달랐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는 카라한 테페의 채움층에서 나온 시료의 연대 분포가 공표돼야 가려진다.
카라한 테페는 괴베클리 테페에서 동쪽으로 약 46km 떨어진 테크테크 산지에 있다. 1997년 지표조사에서 확인됐고, 바하틴 첼릭이 2000년 신석기 연구 소식지 Neo-Lithics 2/3호 6~8쪽에 「새로운 초기 신석기 취락: 카라한 테페」라는 제목으로 보고했다. 본격 발굴은 2018년과 2019년에 카룰이 시작했다.
카룰이 2021년 논문에 적은 유적의 지리는 이렇다. 카라한 테페가 선 구간은 수평으로 누운 석회암층이 위에서 아래로 퍼지며 계단 모양 언덕을 이룬다. 이 석회암은 건축 재료이자 T자 석주의 원석이었다. 다루기 쉬운 석회암 암반이 있었다는 조건이 암반을 깎아 만든 대형 건물과 큰 석주의 제작을 가능하게 했다.
규모에 관해 카룰이 적은 숫자는 하나다. 카라한 테페의 고고학적 채움층은 약 10헥타르에 걸쳐 있고, T자 석주를 캐낸 채석장을 포함하면 5헥타르가 더해진다. 대중 매체가 쓰는 14헥타르라는 숫자는 이 두 값을 합친 것에 가깝다.
지표조사와 지자기 탐사로 확인된 구역은 넷이다. 서쪽 단구와 동쪽 단구, 채석장, 그리고 남쪽 평지다. 카룰은 앞의 두 단구가 특수 건물을 위해 따로 떼어 둔 구역이라고 보았고, 남쪽 평지는 취락 거주민의 생활 공간이었으리라고 적었다. 2024년 3·4월호 Archaeology 지의 현장 취재 기사는 이 남쪽 평지에서 맷돌과 뗀석기를 비롯한 일상 용구가 나왔다고 전한다.
여기가 괴베클리 테페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주거 흔적이 20년 넘게 발굴한 뒤에야 확인됐다. 카라한 테페에서는 발굴을 시작하기 전 지표조사 단계부터 의례 구역과 생활 구역이 함께 잡혔다. 순수한 의례 중심지라는 그림은 카라한 테페에서는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았다.
이 차이가 해석의 방향을 바꾼다. 괴베클리 테페 한 곳만 놓고 보면 특수 건물의 존재는 예외적인 현상으로 읽힌다. 샨르우르파 일대의 유적 여러 곳을 함께 놓으면, 사람이 사는 마을 안에 또는 그 가장자리에 이런 건물이 서 있는 배치가 표준으로 보인다. 사이부르츠 유적을 조사한 이스탄불대학교의 에일렘 외즈도안은 2024년 Documenta Praehistorica 51권에 발표한 논문에서, 사이부르츠의 특수 건물이 주거 건물 가까이 세워졌고 여기에 상징물이 함께 놓인 점이 신성한 것과 일상이 얽혀 있음을 보여 준다고 적었다.
수정된 내용만큼 눈여겨볼 것은 클레어가 2020년 글에서 그 수정을 서술한 방식이다. 그는 괴베클리 테페를 '세계 최초의 신전'으로 부르는 대중적 통념을 만들고 이어서 키운 것이 고고학자들 자신이었다고 적었다. 특수 건물의 축조를 종교적 동기에서 나온 일련의 사건으로 서술한 글이 연구진 이름으로 수없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 통념을 걷어내기가 어려우리라고 덧붙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둘러싼 홍보 전략에서 그 표현이 핵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다. 언론이 최근 몇 해 동안 이 가설을 강화하려고 괴베클리 테페를 '시간의 영점'이라 부르기까지 했다고도 적었다.
발굴 책임자가 자기 기관이 만든 표현의 유통 경로를 지목해 문제 삼는 서술은 드물다. 이 대목은 유적 해석이 어떤 힘을 받는지를 보여 준다. 발굴 재원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나오고, 유적은 관광 자원이 되며, 관광은 '최초'라는 낱말을 먹고 자란다. 카라한 테페의 발굴을 지원한 기관은 튀르키예역사학회, 문화관광부 문화유산·박물관총국, 이스탄불대학교, 샨르우르파광역시, 샨르우르파주지사실이다. 이 목록은 카룰의 2021년 논문에 그대로 적혀 있다.
학술적 반론은 홍보보다 훨씬 먼저 나왔다. 토론토대학교의 테드 배닝은 2011년 Current Anthropology 52권 5호 619~660쪽에 「이토록 아름다운 집」이라는 논문을 실었다. 그의 논지는 두 갈래다. 하나는 서아시아 초기 신석기에서 의례 건물을 가려내는 기존 근거가 모호하거나, 성스러운 공간과 세속 공간을 가르는 자민족 중심의 구분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괴베클리 테페의 건물들이 상징으로 가득 찬 집이었을 수 있다는 대안 가설이다.
배닝은 인류학 쪽 근거를 댔다. 래드클리프브라운 이래 인류학자들은 종교 의례와 세속 의례 사이에 연속선이 있다고 보았고, 민족지 기록은 주거 공간이 종교 의례와 세속 의례 양쪽에 쓰인 사례를 거듭 보고해 왔다는 것이다. 성과 속을 깔끔하게 나눌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현대 서구의 것이라는 지적이다.
발굴 연구진은 반박했다. 젠스 노트로프와 올리버 디트리히는 이 건물들에 일상적인 살림 시설이나 살림 활동의 증거가 없다는 점을 들었다. 그런데 2020년 클레어의 보고는 그 반박의 전제를 일부 거두어들인 셈이 된다. 유적 다른 구역에 주거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배닝의 대안 가설이 그대로 옳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겨눈 방법론적 문제, 곧 무엇을 근거로 어떤 건물을 의례용으로 판정하는가라는 물음이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순서를 따지려면 연대가 정확해야 한다. 그런데 2020년의 수정은 연대 쪽에서도 일어났다.
클레어는 특수 건물 A·B·C·D를 3차원으로 실측하고 건축고고학 방법으로 다시 읽으면서, 건물 진흙 모르타르에 든 유기물로 가속기질량분석 방사성탄소 연대를 냈다고 적었다. 이 시료는 채움층에서 뽑은 기존 시료보다 훨씬 균질했다. 결과는 이 건물들이 그동안 생각한 것보다 오래 쓰였다는 쪽이었다. 어떤 건물은 마지막 축조 단계가 기원전 9천년기 중반에 해당하는데, 처음 세운 시점에서 5세기 넘게 지난 뒤다.
그 결과 둥근 특수 건물(슈미트의 III층, A기)과 사각형 건물(II층, B기)의 연대가 분명하게 겹친다. 슈미트가 세운 세 층 순서는 폐기됐다. 위아래로 놓였던 두 단계가 사실은 나란히 쓰인 두 종류의 건물이었다.
이 결과는 '기념비가 먼저이고 마을이 나중'이라는 구도를 다시 흔든다. 마을이 없던 언덕에 기념비만 섰다가 나중에 마을이 생긴 것이라면 순서 이야기가 성립한다. 둘이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면 순서를 물을 자리가 사라진다.
정리하자면 세 겹의 이야기가 차례로 무너졌다.
첫 겹은 차일드의 순서다. 농경이 잉여를 낳고 잉여가 기념비를 낳는다는 모델은 괴베클리 테페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이 유적의 대형 건물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재배종도 가축도 없었다. 이 사실은 2015년 이후의 수정에도 흔들리지 않고 남았다.
둘째 겹은 그 자리를 대신한 역전 서사다. 종교적 열의가 대규모 노동을 불러내고 그 부담이 농경을 촉발했다는 설명은, 괴베클리 테페가 사람이 살지 않는 순수 성소라는 전제 위에 서 있었다. 클레어가 2020년에 공표한 바에 따르면 그 전제를 떠받치던 세 근거가 모두 흔들렸다. 주거 건물이 나왔고, 빗물을 모으는 시설로 볼 만한 유구가 나왔고, 석기 조성은 살림살이의 것과 같다. 바닥 아래에는 사람을 묻었다.
셋째 겹은 유적을 배치하는 방식 자체다. 카룰이 2021년에 보고한 카라한 테페의 구역 구분은 특수 건물 구역과 생활 구역이 한 유적 안에 함께 있었음을 보여 주고, 외즈도안이 2024년에 보고한 사이부르츠에서는 특수 건물이 주거 건물 곁에 서 있다. 성소와 마을을 갈라 놓고 어느 쪽이 먼저냐를 묻는 질문의 전제가 여기서 사라진다.
무엇이 남는가. 남는 것은 자료다. 기원전 10000년 무렵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암반을 깎고 큰 돌을 세워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건물을 만들었다. 그 건물에 사람과 동물의 형상을 새겼고, 쓰임이 끝나면 어떤 방식으로든 흙과 돌 밑으로 사라지게 했다. 같은 시기에 그들은 야생 동물을 사냥하고 야생 식물을 거두어 먹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관찰된 전부이고, 둘 사이의 인과 방향은 관찰되지 않았다.
판단이 갈리는 자리도 분명해졌다. 무엇을 본체로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대형 건물을 본체로 보면 이 사회는 노동을 조직할 줄 아는 사회였고, 그 조직력이 어디서 왔는지가 물음이 된다. 주거 구역과 일상 도구를 본체로 보면 이 사회는 평범한 신석기 취락이었고, 대형 건물은 그 취락이 자원을 어디에 썼는지를 보여 주는 지표가 된다. 지금 공표된 자료는 두 읽기 어느 쪽도 배제하지 않는다.
남은 물음은 카라한 테페 쪽에 몰려 있다. 카라한 테페에서 의도적 매립이 실제로 확인된다면, 괴베클리 테페의 채움을 사면 붕락으로 설명한 해석은 그 유적에 한정된 설명이 된다. 반대로 카라한 테페의 채움층에서도 서로 다른 시기의 유물이 섞여 나온다면 매립론 전체가 다시 검토 대상이 된다. 카라한 테페는 2023년 기준으로 전체 면적의 5% 미만이 발굴됐고, 남쪽 평지의 주거 구역은 아직 본격 발굴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 유적에서 나올 자료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지금 알 수 없다.
차일드의 모델이 90년을 버틴 까닭은 자료의 양보다 순서의 단순함에 있었다. 지금 샨르우르파 일대에서 나오는 발굴 자료는 그 단순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화살표를 반대로 돌려 놓은 설명도 같은 이유로 오래 버티지 못했다. 경제와 사회와 관념 가운데 무엇이 먼저인지를 묻는 질문 형식 자체가 이 유적들에 맞지 않을 가능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