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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지 문서는 어떻게 족장 이야기의 증거가 되었다가 증거이기를 그쳤는가 — 비교 방법이 무너진 경위

1930년대부터 40년 동안 이라크 북부에서 나온 점토판은 창세기 족장 이야기의 시대 배경을 확증하는 자료로 인용되었다. 1970년대에 이 합의가 무너졌는데, 무너뜨린 것은 새로운 발굴이 아니라 이미 출간되어 있던 자료를 다시 센 작업이었다.

2026년 9월 12일

창세기 31장에는 설명 없이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야곱이 장인 라반의 집을 떠날 때 아내 라헬이 아버지의 집안 신상을 훔친다. 본문은 그 행위의 이유를 적지 않고, 라반이 그것을 잃은 뒤 추격하는 장면만 이어진다. 왜 훔쳤는가에 대한 답은 본문 안에 없다.

20세기 중반의 구약학은 이 물음에 답을 가지고 있었다. 답은 성경 바깥에서 왔다. 이라크 북부의 한 유적에서 나온 점토판 문서들이 그 시대의 상속 관행을 알려 주며, 집안 신상을 가진 사람이 유산에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고 본다. 라헬의 행위를 도둑질이 아니라 재산권 확보로 읽는 설명이다.

이런 종류의 설명이 수십 개 만들어졌고, 그것이 모여 족장 이야기가 기원전 2천년기의 실제 사회를 반영한다는 결론을 떠받쳤다. 그 결론은 40년 동안 유지되다가 1970년대에 무너졌다. 무너진 과정을 따라가면 고고학 자료로 성경을 검증한다는 작업이 실제로 어떻게 굴러가는지가 드러난다.

누지는 어떤 유적이고 무엇이 나왔는가

문제의 유적은 누지다. 지금 이름은 요르간 테페이고 티그리스강 동쪽에 있다. 출토 문서는 기원전 2천년기 중반의 것이며 쐐기문자로 쓰였다. 이 도시의 주민은 후르리인이었다.

후르리인 기원전 2천년기에 메소포타미아 북부와 시리아 북부에 살던 민족이다. 셈어도 인도유럽어도 아닌 독자적인 언어를 썼다. 미탄니 왕국을 세워 한동안 이 지역의 강자였고, 누지는 그 영향권 안의 지방 도시였다. 이 민족의 법과 관습이 셈족과 다르다는 점이 뒤에 나올 논쟁의 출발점이 된다.

누지 문서의 대부분은 개인과 가문의 법률 문서다. 상속, 입양, 혼인, 담보, 재산 이전을 기록한 계약서가 많다. 이런 성격 때문에 성경의 족장 이야기와 견주기에 적당해 보였다.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도 상속과 혼인과 재산을 둘러싼 가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비교 작업을 본격화한 사람은 에프라임 아비그도르 스파이저다. 그는 1928년과 1929년 조사분으로 1930년에 간행된 『미국 동양학 연구원 연보』 10권에 「가족법에 관한 키르쿠크 신출토 문서」를 1쪽부터 73쪽까지 실었고, 1964년에는 앵커 바이블 총서의 창세기 주석을 뉴욕에서 냈다. 사이러스 고든과 만프레트 마이어호퍼가 이 작업을 확장했다.

40년 동안 이 비교는 정설이었다

이 비교가 학계에서 차지한 지위는 강했다. 마틴 셀먼이 1974년 틴들 성서고고학 강연으로 발표하고 1976년 『틴들 회보』 27권 1호 114쪽부터 136쪽까지 실은 논문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정리한다. 누지라는 이름은 지난 40년 동안 성경 족장 연구에서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했으며,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를 진지하게 연구하려면 이 유적의 쐐기문자 토판에서 나온 정보를 무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인용되는 판단들은 강한 표현을 썼다. 스파이저는 일부 족장 관습이 그 지역의 배경으로도, 후르리 자료가 아닌 다른 어떤 자료로도 설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존 브라이트는 족장의 관습법이 거의 같은 지역, 거의 같은 시기의 후르리 주민들 사이에 특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사이러스 고든은 야곱과 라반의 이야기가 누지 문서에 비추어 전혀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고 말했다. 셀먼의 관찰로는 이런 견해가 족장을 다루는 책과 논문의 대다수에 실려 있었다.

이 비교가 제공한 이득은 세 방향이었다. 첫째, 족장 이야기의 수수께끼 같은 장면들이 누지의 관행으로 설명되었다.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과 엘리에셀 사이의 상속 합의, 29장부터 31장까지의 야곱의 혼인, 31장의 라헬의 신상 절도가 그 예다. 둘째, 이 설명들이 쌓이면서 족장 이야기의 배경 시대가 기원전 2천년기로 특정되었다. 셋째, 그 특정은 이야기의 역사성 전반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존 브라이트가 1959년에 내고 1960년에 재판을 낸 『이스라엘 역사』는 이 합의를 대표하는 문장을 남겼다. 고고학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존재를 직접 확증하지는 못해도, 창세기의 인명과 지명과 관습이 기원전 2천년기에 고유한 것이므로 족장 이야기가 2천년기의 사회 관습을 진짜로 반영한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셀먼이 센 숫자가 문제를 드러냈다

셀먼의 강연은 이 합의를 뒤집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점검하려는 시도였다. 그가 한 일은 간단하다. 누지에서 나온 문서가 몇 점이고 그중 몇 점이 실제로 인용되는지를 셌다.

누지에서 출간된 쐐기문자 토판은 약 4000점이다. 그 가운데 족장 이야기의 배경과 관련 있다며 규칙적으로 인용되는 것은 열두 점을 넘지 않는다. 실제 상황은 더 나빠서, 그 열두 점 전부를 언급하는 연구자는 손에 꼽는 수준이었다.

이 숫자가 왜 문제인지는 통계의 문제로 옮겨 놓으면 분명해진다. 4000점 가운데 열 점 남짓을 골라 성경과 맞는다고 보고하는 작업은, 맞지 않는 3990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떤 대규모 문서군에서든 다른 문서군과 비슷해 보이는 항목 열 개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비교가 의미를 가지려면 비슷한 항목의 비율이 우연히 기대되는 수준보다 높아야 하는데, 그 비율을 계산한 연구는 없었다.

셀먼이 이 강연을 한 자리도 기록해 둘 만하다. 1975년 1월 3일 런던대학 동양아프리카학대학에서였고, 강연을 주최한 틴들 펠로십은 복음주의 성서학 단체다. 합의를 점검한 쪽이 그 합의로 이득을 보던 진영 안에 있었다는 뜻이다. 셀먼의 재검토가 내린 판정은 누지 문서나 관습과 족장 시대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자매 아내 모티프의 근거는 토판 한 장이었다

개별 사례를 하나 따라가면 논증의 구조가 보인다.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하는 이야기가 두 번, 이삭이 리브가를 두고 같은 일을 하는 이야기가 한 번 나온다. 스파이저는 이것을 후르리의 자매 아내 혼인 관습으로 설명했다. 아내를 법적으로 누이의 지위에 올려 보호를 강화하는 제도가 있었고, 족장 이야기가 그 제도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이 설명의 근거는 누지 문서 한 장이다. 하버드 셈어 총서 5권에 1929년에 수록된 67번 문서이며, 스파이저 자신이 1930년 간행분에서 음역하고 번역했다.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 이 토판은 누지에서 그런 관행을 보여 주는 유일한 사례다. 둘째, 누지 문서 안에서도 전형적이지 않다. 4000점 가운데 한 점이고 그 한 점조차 예외적이라는 뜻이다.

그 한 점이 실제로 자매 아내 혼인을 증언하는지도 다투어졌다. 세실 멀로 위어는 1967년 『글래스고대학 동양학회 회보』 22권 14쪽부터 25쪽까지 실은 논문에서 창세기의 후르리 자매 아내 모티프 주장을 검토했고, 이 이론이 스파이저가 제시한 누지 증거로도 성경 증거로도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냈다. 토머스 톰슨도 1974년 저작 234쪽부터 248쪽까지에서 같은 문제를 다뤘다.

다른 사례들도 사정이 비슷했다. 창세기 31장 15절의 은을 삼킨다는 표현이나 27장 2절의 이제 내가 늙었다는 임종 문구가 누지 문서의 정형구와 같다고 주장되었으나, 이런 표현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톰슨과 반 세터스가 마무리했다

점검이 반박으로 넘어간 것은 1974년과 1975년이다. 토머스 톰슨의 『족장 이야기의 역사성』이 베를린과 뉴욕에서 구약학회 부록 133권으로 나왔고, 존 반 세터스의 『역사와 전승 속의 아브라함』이 1975년 6월 18일 뉴헤이븐 예일대학교출판부에서 338쪽으로 나왔다.

두 사람의 논거는 방법을 겨눴다. 제시된 평행 사례들은 둘 중 하나였다. 여러 시대에 걸쳐 확인되는 고대 근동 법의 일반적 유형이거나, 누지에만 있고 창세기에는 실제로 평행이 없는 것이었다. 앞의 경우라면 연대를 특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고, 뒤의 경우라면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톰슨의 정리는 더 강했다. 그는 올브라이트와 스파이저와 고든과 브라이트가 인용한 고고학 증거 가운데 족장 이야기의 역사성을 반박 불가능하게 입증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지적했고, 고고학이 족장 전승의 어떤 사건도 역사적임을 증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떤 전승도 개연적임을 보여 주지 못했다고 썼다. 역사적 아브라함을 찾는 작업은 역사가에게도 성경 연구자에게도 기본적으로 결실 없는 일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반 세터스의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에서 그는 이야기의 기원이 기원전 2천년기에 있음을 가리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 논증한다. 그의 검토 대상은 지난 반세기 동안 고고학에 기대어 초기 족장 시대를 재구성하려 한 주요 시도들이었다.

여기서 확인해 둘 것이 있다. 두 사람은 새로운 발굴 자료를 가져오지 않았다. 이미 출간되어 있던 누지 문서와 이미 발표되어 있던 비교 연구를 다시 읽었을 뿐이다. 정설을 무너뜨린 것은 새 증거가 아니라 기존 증거의 재계산이었다.

톰슨의 책이 나온 뒤 윌리엄 올브라이트의 명성은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한 세대의 연구 방향을 정한 학자가 방법의 결함 때문에 평가가 내려간 사례다.

낙타가 다시 불러온 같은 문제

비교 방법이 무너진 뒤에도 족장 이야기의 연대를 두고 물증을 찾는 작업은 이어졌다. 최근 30년 동안 가장 널리 인용된 것은 낙타 문제다.

텔아비브대학 고고학·고대근동문화학과의 에레즈 벤요세프와 리다르 사피르헨은 2013년 학술지 『텔아비브』 40권 277쪽부터 285쪽까지에 남부 레반트의 사육 낙타 도입을 다룬 논문을 실었다. 표본은 아라바 계곡의 구리 생산 유적에서 나온 뼈다. 방사성탄소 연대로 보면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사육 낙타 뼈는 기원전 10세기 후반으로 나온다. 두 사람은 이집트인들이 아라비아반도에서 사육 낙타를 들여오면서 제련 방식을 바꾼 시점과 이 연대가 맞물린다고 본다.

창세기에는 낙타가 20번 넘게 나온다. 12장 16절은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 낙타를 얻었다고 적고, 24장 10절은 종이 가나안에서 아람으로 낙타를 끌고 갔다고 적는다. 그래서 이 논문은 본문이 서술하는 사건보다 훨씬 뒤에 편집되었다는 직접 증거로 널리 인용되었다.

여기서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한다. 논문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발견이 성경과 모순된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 연결을 만든 것은 보도였다. 그리고 고대 근동 전체의 낙타 사육 시점에 대한 견해는 기원전 3천년기 초부터 9세기까지 폭이 넓다. 이 연구가 측정한 것은 남부 레반트의 사정이며 메소포타미아의 사정이 아니다.

그러니 이 자료가 확정하는 것은 좁다. 남부 레반트에서 사육 낙타가 일상적으로 쓰인 시점이 기원전 10세기 후반 이후라는 것, 그리고 창세기의 낙타 서술이 그 이후의 조건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야기 전체가 후대의 창작이라는 결론은 여기서 나오지 않는다. 서술 시점의 흔적과 서술 내용의 진위는 다른 문제다.

누지 사례와 낙타 사례는 방향이 반대지만 같은 함정을 공유한다. 한쪽은 유리한 평행 열 점을 골라 연대를 확정하려 했고, 다른 쪽은 불리한 세부 하나로 전체를 부정하려 했다. 두 경우 모두 좁은 자료에서 넓은 결론으로 건너뛴다.

일반적 유형과 특정 시대의 관습을 가르는 기준

이 논쟁이 남긴 방법의 문제는 지금도 유효하다. 어떤 관습이 특정 시대와 지역에 고유한 것인지, 아니면 여러 시대에 널리 퍼진 일반적 유형인지를 어떻게 구별하는가라는 물음이다.

구별의 기준은 원칙적으로 분명하다. 그 관습이 다른 시대와 지역의 문서에서 확인되는지를 조사하면 된다. 문제는 그 조사가 실제로 수행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스파이저와 고든이 비교를 제시하던 시기에 누지 문서는 막 출간되는 중이었고, 다른 지역과 시대의 법률 문서는 비교 대상으로 충분히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톰슨의 작업이 방법론적으로 개선된 부분이 여기다. 그는 족장 이야기를 통상적인 경우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성경 외 문헌과 견주려 했다. 다만 그 시도가 의도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엘리에셀의 입양 문제를 논하면서 그는 누지의 실자 입양 계약 50건 가까이 가운데 열한 건만 다뤘다. 앞선 연구들이 다룬 최대치보다 나아졌지만 전수 조사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사정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확인되는 것은 개별 관행의 존재이지 그 관행이 어느 시대에 국한되는지가 아니다. 후자를 확정하려면 비교 대상 전체를 다루는 조사가 필요하고, 그런 조사는 자료의 양과 해독 상태 때문에 여전히 부분적으로만 가능하다.

결론 — 무너진 것은 자료가 아니라 자료를 고르는 절차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한 문장으로 모인다. 누지 문서가 족장 이야기의 시대를 확증한다는 정설은 자료가 반증되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자료를 고르는 절차가 검토되면서 무너졌다.

무너진 과정은 세 단계였다. 첫째, 4000점 가운데 열두 점을 넘지 않는 문서가 규칙적으로 인용되었고 나머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둘째, 자매 아내 모티프처럼 핵심 사례의 근거가 토판 한 장이었고 그 한 장조차 누지 안에서 전형적이지 않았다. 셋째, 제시된 평행들은 여러 시대에 걸친 일반 유형이거나 창세기에 실제 대응이 없는 것으로 판정되었다.

이 판정을 내린 연구자들의 위치가 판정의 성격을 알려 준다. 셀먼은 복음주의 단체의 강연에서 자기 진영이 쓰던 논거를 점검했고, 톰슨과 반 세터스는 비평 학계에서 앞 세대의 방법을 겨눴다. 서로 다른 목적에서 출발한 세 작업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이 판정이 진영 논리의 산물이 아님을 보여 준다.

지금 확정되어 있는 것과 확정되어 있지 않은 것을 가르면 이렇다. 확정된 것은 누지 문서와 족장 이야기 사이에 시대를 특정할 만한 특별한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확정되지 않은 것은 족장 이야기가 언제 어떤 사회를 반영하는가다. 전자가 후자의 답을 주지는 않는다. 고고학이 어떤 연대를 확증하지 못했다는 진술과 그 연대가 틀렸다는 진술은 같지 않다.

남는 물음은 자료의 성격에 있다. 고대 근동의 법률 문서와 창세기의 이야기는 애초에 종류가 다른 글이다. 앞의 것은 특정 거래를 기록한 문서이고 뒤의 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진 서사다. 두 종류의 글에서 같은 관행이 확인된다 해도, 그것이 서사가 그 시대에 만들어졌음을 뜻하는지 서사가 그 관행을 후대에 알고 있었음을 뜻하는지 자료가 가려 주지 않는다. 1930년대의 비교 작업은 이 구별을 세우지 않은 채 진행되었고, 그 결함이 40년 뒤에 청구서로 돌아왔다. 지금 진행 중인 비교 작업들이 같은 구별을 세우고 있는지는 따로 확인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