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관념이 어떤 인지 기제에서 생겨났는지를 설명하면 그 관념이 거짓이라는 결론이 따라 나오는가. 이 추론이 성립하려면 기제가 체계적으로 거짓을 낳아야 한다. 진리와 무관한 정도로는 부족하고, 그런 기제의 후보는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
사람이 왜 초자연적 존재를 상정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여럿 나와 있다. 움직임의 배후에 행위자를 상정하는 성향, 타인의 마음을 추론하는 능력, 죽은 사람의 의도를 계속 추적하는 습관 같은 것들이다. 이 설명들이 옳다고 하자. 그러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는가.
같은 의심은 오래됐다. 찰스 다윈이 1881년 7월 3일 윌리엄 그레이엄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But then with me the horrid doubt always arises whether the convictions of man's mind, which has been developed from the mind of the lower animals, are of any value or at all trustworthy. Would any one trust in the convictions of a monkey's mind, if there are any convictions in such a mind?
그런데 나에게는 늘 끔찍한 의심이 떠오른다. 하등 동물의 마음에서 발달해 나온 사람 마음의 확신이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거나 믿을 만한가 하는 의심이다. 원숭이의 마음에 확신이라는 것이 있다 한들, 그 확신을 누가 믿겠는가.
찰스 다윈이 윌리엄 그레이엄에게 보낸 1881년 7월 3일자 편지. 한국어 번역은 직접 옮겼다.
다윈의 의심은 종교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람 마음 전체를 겨냥한다. 이 범위 문제가 뒤에 나올 논쟁의 핵심이 된다.
조너선 종과 아쿠 비살라는 2014년 학술지 『International Journal for Philosophy of Religion』 76권 3호 243~258쪽에 이 문제를 정리한 논문을 실었다. 종은 당시 옥스퍼드대학 인지·진화인류학연구소에, 비살라는 노터데임대학 인류학과에 있었다.
두 사람이 먼저 짚은 것은 논증 형태 자체의 문제다.
종과 비살라가 드는 예는 화학자 아우구스트 케쿨레의 일화다. 케쿨레는 벤젠의 고리 구조를 발견한 경위를 회상하면서, 겐트의 독신자 숙소 서재에서 글이 막혀 몽상에 잠겼다가 제 꼬리를 문 뱀을 보았다고 적었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논점에는 상관없다. 꿈에서 화학 구조를 알아내는 것이 믿을 만한 방법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고 하자. 그래도 벤젠이 고리 구조를 갖는다는 믿음이 비합리적이 되지는 않는다. 케쿨레가 그 뒤에 이론의 함의를 계산하고 경험적 증거를 모았기 때문이다.
이 예가 보여 주는 것은 조건이다. 어떤 사람이 그 믿음을 지지하는 좋은 논거를 갖고 있다면, 그 믿음이 어떤 경로로 생겨났는지는 판단과 무관하다. 그러면 폭로 논증은 좋은 논거가 아예 없는 경우에만 적용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좋은 논거가 없으면 그 믿음은 어차피 정당화되지 않으므로, 기원 설명이 따로 하는 일이 없다.
가이 카헤인은 2011년 학술지 『Noûs』 45권 103~125쪽에 실은 논문에서 폭로 논증의 일반 도식을 제시했다.
카헤인의 도식은 세 줄이다. 어떤 사람의 믿음이 어떤 과정으로 설명된다는 인과 전제, 그 과정이 비진리추적이라는 인식 전제, 그러므로 그 믿음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결론은 그 믿음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데서 멈춘다. 거짓이라고까지 말하지 않는다.
종과 비살라가 짚는 첫째 난점은 인식 전제를 세우는 일 자체에 있다. 어떤 믿음이 문제인지, 그 과정이 어느 영역에 대해 비진리추적인지를 순환논법에 빠지지 않게 규정해야 한다. 종교적 믿음을 초자연적 행위자에 관한 믿음으로 규정한다면, 그 영역에 대해 인지 기제가 비진리추적임을 어떻게 독립적으로 보일 것인가가 문제로 남는다.
종과 비살라는 폭로 논증을 확률로 옮겨 그 힘을 잰다.
어떤 명제가 참일 확률과 거짓일 확률을 비교하려면, 그 사람이 그 명제를 믿는다는 사실을 관측한 뒤의 사후확률 비를 보면 된다. 이 비는 두 항의 곱으로 분해된다. 하나는 우도비로, 명제가 거짓일 때 그 사람이 그것을 믿을 확률을 명제가 참일 때 믿을 확률로 나눈 값이다. 다른 하나는 사전확률비로, 그 사람의 믿음을 빼고 다른 모든 증거를 반영한 값이다.
비진리추적이라는 말은 명제가 참이든 거짓이든 그 사람이 그것을 믿을 확률이 같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도비가 1이 된다. 1을 곱해도 값이 바뀌지 않으므로, 사후확률의 비는 사전확률의 비가 그대로 정한다. 폭로 논증이 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증거가 양쪽 모두 없는 상황이면 사전확률비도 1이 되어 사후확률비도 1이 된다. 이 경우 그 사람은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 결론은 전적으로 사전확률에서 나온 것이지 인지 기제의 성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사정이 달라지려면 그 과정이 거짓을 체계적으로 산출해야 한다. 카헤인의 도식에서 인식 전제를 '그 과정은 거짓추적 과정이다'로 바꾸면 결론은 '그 믿음은 거짓이다'가 된다. 이 논증은 유효하다. 문제는 그런 인지 과정의 후보가 없다는 데 있다.
조금 약한 형태도 생각할 수 있다. 그 과정이 언제나 거짓을 낳지는 않지만, 명제가 참일 때는 그 믿음을 거의 만들지 않고 거짓일 때는 자주 만든다면 어떨까. 종과 비살라는 두 확률에 각각 0.9와 0.0001을 넣어 계산해 보인다. 그러면 우도비가 9,000이 되어, 다른 증거가 없을 때 그 명제는 참일 확률보다 거짓일 확률이 9,000배가 된다. 이런 인지 과정이 있다면 폭로 논증은 강력하다. 그런데 이런 과정의 후보도 제시된 적이 없다.
리처드 조이스는 2006년 MIT출판부에서 낸 『The Evolution of Morality』에서 발생론적 오류를 반박하는 사고실험을 제시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이겼다고 믿게 만드는 알약과 졌다고 믿게 만드는 알약이 있고, 두 알약을 해독하는 약도 있다고 하자. 지금 누군가는 나폴레옹이 졌다고 믿으며 잘 살고 있는데, 과거 어느 시점에 누군가 자기에게 '나폴레옹이 졌다' 알약을 먹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이스는 이 사실이 그 믿음에 대한 신뢰를 흔들어야 하며, 독립적인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해독제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과 비살라는 이 이야기가 설득력 있어 보이는 이유를 인정하면서도 같은 반론을 적용한다. 나폴레옹이 졌다는 데 대해 독립적인 근거를 이미 갖고 있다면 알약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근거가 없다면 그 믿음은 알약과 무관하게 처음부터 정당화되지 않았다. 조이스 자신도 인용문의 뒷부분에서 이 점을 인정한다. 알약에 관한 지식은 그 믿음이 애초에 정당화된 적이 없었음을 지적하는 데서 멈춘다.
카헤인의 대응은 두 갈래다. 첫째로 카헤인은 어떤 사람의 믿음이 정당화되어 있는가와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구분해야 한다고 본다. 좋은 논거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믿음의 원인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정당화되지 않았다. 둘째로 어느 지점에서는 논거가 바닥난다. 가치 판단의 경우 결국 직관에 기대야 하는데, 그 직관 자체를 폭로하는 설명이 있으면 그 믿음은 실제 근거도 대안 근거도 잃는다.
종과 비살라는 이 대응을 받아들이면서도 범위를 좁힌다. 첫째 대응이 맞다면 폭로 논증은 자기 믿음에 대해 논거를 대지 않는 사람에게만 적용되고, 그런 사람에게는 그냥 논거를 물어보면 된다. 둘째 대응은 형이상학적 믿음에도 적용될 수 있지만, 충분이유율이나 절약 원리 같은 직관이 진리를 좇는지 아닌지를 평가하는 일은 또 다른 직관에 기대므로 문제가 되돌아온다.
폭로 논증의 더 야심 찬 형태는 인지 기제 전체를 겨냥한다. 앨빈 플랜팅가가 1993년 옥스퍼드대학출판부에서 낸 『Warrant and Proper Function』과 2011년의 후속 저작에서 제시한 자연주의에 반대하는 진화 논증이 그것이다. 플랜팅가는 자연주의적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인지 기능이 신뢰할 만하다고 가정할 근거가 없다고 논증한다. 이 논증이 겨냥하는 표적은 자연주의이지만, 논리 구조 자체는 모든 믿음을 무너뜨린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 하나가 폴 그리피스와 존 윌킨스가 제시한 원리다.
그리피스와 윌킨스는 상식적 믿음에 대해 이 다리가 놓인다고 본다. 눈앞의 중간 크기 사물에 관한 믿음의 경우, 인지 기능이 만들어 내는 믿음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믿음이 참이거나 참에 가깝다는 것이라는 논지다. 인지의 기본적 진화 기능이 진리 추적 말고 무엇일지 알기 어렵다고 이들은 적는다.
과학적 믿음에는 직접 다리가 놓이지 않는다. 사람의 인지 기능은 사람이 사는 환경 안에서 진리를 좇도록 선택됐지 미적분을 하거나 양자 수준의 중첩에 관한 진리를 좇도록 선택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간접 다리를 놓는다. 과학적 결론이 옳다고 볼 근거는 과학자들이 그 결론과 방법론적 혁신에 대해 제시한 자료와 논증이며, 그것들은 결국 다른 모든 믿음과 같은 상식적 검토를 통과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진화가 우리 인지 기능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그 기능으로 자기 자신의 한계를 찾아내는 일에 대한 신뢰도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리피스와 윌킨스는 이 간접 다리가 과학적 믿음은 구하지만 도덕적 믿음과 종교적 믿음은 구하지 못한다고 본다. 종교적 믿음에 관해 이들이 드는 근거는, 종교적 믿음의 진화를 설명하는 주요 이론 가운데 어느 것도 그 믿음의 참 거짓을 끌어들여 번식 적합도에 미치는 효과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종과 비살라는 이 근거가 과학적 믿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반박한다. 어느 이론도 양자역학 명제의 참 거짓을 끌어들여 번식 적합도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근거는 직접 다리를 배제할 뿐 간접 다리를 배제하지 않는다. 과학적 믿음이 상식의 법정에서 검토받아 구원받는다면, 최소한 일부 종교적 추론도 같은 방식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이 지적은 새롭지 않다. 리처드 스윈번은 플랜팅가의 논증에 답하면서 같은 구조를 제시했다. 세속적 사안에 관한 믿음과 형이상학적 사안에 관한 믿음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없고, 뒤엣것은 더 크고 깊은 사안에 관한 믿음의 연속선 끝에 놓여 있을 뿐이라고 스윈번은 적는다. 관측 가능한 자료에서 단순한 일반화를 끌어내는 추론 기제에는 선택상의 이점이 있고, 사람은 그보다 더 정교한 추론을 할 수 있으며, 성찰과 실험으로 참된 믿음을 늘리는 데 선택상의 이점이 있다. 세속적 사안과 형이상학적 사안 사이에 주제의 연속성이 있으므로 형이상학에서도 같은 기준을 쓰게 된다.
스윈번 자신도 조건을 붙인다. 이런 영역에서는 믿음 형성 체계가 원래 진리를 좇도록 진화한 영역 바깥에서 작동하므로 훨씬 조심스럽게 증거를 다뤄야 한다. 상식적 믿음이 틀린 개체는 빨리 제거되지만 과학적·철학적·종교적 믿음이 틀린 개체는 그렇지 않으므로, 이 영역의 거짓 믿음은 훨씬 오래 살아남는다.
그리피스와 윌킨스도 결국 한 가지를 인정한다. 폭로는 반증이 아니며, 종교적 믿음에 독립적인 근거가 있다면 그 믿음에 진화적 설명이 붙는다는 사실이 그 근거의 설득력을 없애지 않는다.
그렇다면 폭로 논증에 남는 쓸모가 있는가. 종과 비살라는 한 가지 자리를 지목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 믿음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을 그 믿음의 정당화로 제시하는 경우다. "나는 이러이러한 신뢰할 만한 능력으로 이것을 안다"고 말하는 구조다. 이 경우 그 능력이 실제로는 비진리추적 과정이라는 것을 보이면 정당화가 무너진다. 폭로 논증은 여기서 특정한 증거의 원천을 봉쇄하는 일을 한다.
이 구분은 인식론의 두 진영에 다르게 작용한다. 내재주의는 정당화를 인식 주체가 접근할 수 있는 논거에 연결하고, 신뢰주의를 비롯한 외재주의는 믿음이 신뢰할 만한 기제의 산물일 때 정당화된다고 본다. 폭로 논증은 기제의 신뢰성을 정면으로 문제 삼으므로 외재주의 쪽에 더 위협적이다.
종과 비살라가 예로 드는 내재주의 자연신학자는 스윈번이다. 스윈번은 존재의 우연성, 자연법칙의 미세조정, 도덕과 이성을 갖춘 인간 행위자의 존재 같은 경험적으로 관측 가능한 특징에서 신의 존재로 나아가는 논증을 편다. 이 논증의 정당화는 공적으로 접근 가능한 논거에 있으므로, 신 믿음의 발생에 신뢰할 수 없는 인지 기제가 관여했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대쪽에 있는 것이 개혁주의 인식론이다. 플랜팅가가 2000년의 저작에서 제시한 이 입장은, 신 믿음이 자연신학이 요구하는 종류의 증거 없이도 합리적일 수 있다고 본다. 신 믿음이 믿는 사람에게 직접 제시되며, 그 믿음을 무너뜨리는 논거에 대한 반박만 갖추면 정당화된다는 구조다. 신뢰주의에서 인지 기능의 산물은 유죄가 입증되기 전까지 무죄인데, 폭로 논증은 바로 그 인지 기능을 피고석에 세운다.
여기서 종과 비살라는 결론을 내린다. 폭로 논증은 유신론 일반보다 현대 종교철학의 한 흐름을 겨냥한 논증으로 읽는 편이 더 생산적이다.
종교 관념의 인지적 기원을 설명한다고 해서 그 관념이 거짓이라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 발생론적 오류 때문만이 아니다. 베이즈로 계산하면 비진리추적 과정은 우도비를 1로 만들어 사후확률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고, 폭로의 힘은 전적으로 독립적 증거에서 나온다. 힘을 가지려면 그 인지 과정이 거짓을 체계적으로 산출해야 하는데 그런 후보는 제시되지 않았다.
전면적 회의로 가는 길도 막혀 있다. 인지 기능 전체를 의심하면 과학적 믿음도 함께 무너진다. 그리피스와 윌킨스는 상식적 믿음에 밀비우스 다리를 놓고 거기서 과학으로 간접 다리를 놓아 과학을 구하지만, 종과 비살라가 지적하듯 종교적 믿음을 그 다리에서 배제하려면 별도의 논거가 필요하고 그 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그리피스와 윌킨스 자신도 폭로가 반증이 아님을 인정한다.
이 정리가 남기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논쟁의 자리가 옮겨진다는 점이다. 종교적 믿음이 정당화되는지는 진화생물학이나 인지과학이 아니라 그 믿음을 지지하는 논거를 따지는 작업에서 결정된다. 다른 하나는 이 결론이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지과학이 유신론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은 유신론을 지지한다는 뜻이 아니고, 기원 설명을 근거로 삼은 무신론 논증이 약하다는 것도 무신론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기원 연구가 하는 일은 논쟁의 무대를 옮기는 것이지 승부를 내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