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점토판은 문학이 아닌 장부이며, 곡물과 가축과 노동일수를 적었다. 이 출신은 취미 수준의 사실이 아니다. 최초기 점토판들이 어떤 언어를 적었는지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고, 그 상태가 수메르 역사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정한다.
문자의 발명을 이야기할 때 자주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누군가 자기 생각이나 신에게 바치는 말을 남기려고 기호를 고안했다는 장면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은 다르다.
우루크에서 나온 가장 오래된 점토판들은 물자 기록이다. 얼마만큼의 보리가 누구에게 배급되었는지, 양이 몇 마리인지, 노동자가 며칠 일했는지를 적었다. 서사시와 찬가와 법 모음집은 그로부터 수백 년 뒤에 나타난다.
이 순서가 왜 중요한가. 문자가 회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문자가 무엇을 기록하도록 설계되었는지를 결정했고, 그 설계가 남긴 결과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최초기 점토판의 언어가 무엇인지조차 확정되지 않은 상태가 그 결과 가운데 하나다.
문자 이전 단계의 기록 수단이 확인되어 있다. 점토로 빚은 작은 기하학적 물체들이며 학계에서는 토큰이라 부른다. 원뿔, 구, 원반 같은 모양이고, 각각이 어떤 물품의 일정량을 나타냈다.
드니즈 슈만트베세라는 이 체계에서 문자가 나왔다고 주장했다. 1992년에 낸 『Before Writing: From Counting to Cuneiform』이 그 주장을 정리한 책이다. 설명의 골자는 이렇다. 불라 겉면에 토큰의 모양을 찍어 표시하다 보면 안에 든 토큰이 필요 없어지고, 그러면 공 모양을 유지할 이유도 사라져 납작한 판이 된다. 그 판 위의 눌린 자국이 최초의 문자 기호다.
이 설명은 널리 퍼졌고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런데 전문 연구자들이 받아들인 범위는 그보다 좁다.
합의가 있는 부분은 수(數) 기호다. 불라 안에서 나온 단순한 형태의 토큰들이 원쐐기문자의 수 기호에 대응한다는 데는 폭넓은 동의가 있다. 그러므로 쐐기문자가 수를 적는 기호에서 출발했다는 서술은 근거를 갖는다.
합의가 없는 부분은 그 나머지 전부다. 토큰과 문자 기호를 하나씩 짝지어 보는 작업에서 수 기호를 제외하면 실증이 거의 되지 않는다. 로버트 엥글룬드가 1993년에, 폴 지만스키가 같은 해에 슈만트베세라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각각 이 문제를 지적했다. 기호 형태의 기원이 여러 갈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지금의 평가다.
차이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토큰 체계가 문자보다 앞서 존재했고 회계 실무의 연속성이 있었다는 것과, 문자 기호 하나하나가 토큰에서 나왔다는 것은 다른 주장이다. 앞의 것은 확인되었고 뒤의 것은 수 기호 바깥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최초기 문자는 원쐐기문자(proto-cuneiform)라 불린다. 기원전 3350년에서 3000년 사이 우루크의 점토판에서 처음 확인되며, 도상 기호 수백 개로 이루어진 복잡한 회계 체계다. 중요한 사실은 그 기호 가운데 다수가 지금도 해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료의 규모와 출처는 잘 정리되어 있다. 독일 고고학연구소가 1913년부터 1967년까지 우루크를 발굴했고, 1928년부터 1976년까지의 조사에서 5천 점 가까운 점토판과 파편이 나왔다. 이 자료를 간행하고 해독하는 장기 연구 사업이 베를린에서 진행되었다.
시기 구분은 발굴 층위를 따른다. 우루크 5기가 기원전 3500년에서 3350년 무렵, 우루크 4기가 3350년에서 3200년 무렵, 우루크 3기가 3200년에서 3000년 무렵이다. 다만 점토판과 파편은 모두 안정된 층위가 아닌 폐기물 퇴적층에서 나왔다는 조건이 붙는다. 우루크 외에 젬데트 나스르, 카파제, 텔 우카이르에서도 같은 성격의 점토판이 나왔고, 수량은 적지만 해독에 도움을 주었다.
해독의 표준 참고 문헌은 한스 니센과 페터 다메로프와 로버트 엥글룬드가 함께 낸 『Archaic Bookkeeping: Early Writing and Techniques of Economic Administration in the Ancient Near East』(1993)다. 제목이 이 자료의 성격을 그대로 말한다. 초기 문자를 다루면서 부제에 경제 행정 기술이 들어가 있다.
기호를 읽는 방법은 후대 문헌과의 대조다. 원쐐기문자 기호를 후대의 쐐기문자 기호와 비교해 뜻을 추정하고, 같은 기호 배열이 특정 수와 반복해서 나타나면 그것이 세어지는 물건이라고 판단한다. 이 방법으로 물품 목록 쪽은 대부분 풀렸다.
여기서 이 글의 논지에 해당하는 문제가 나온다. 원쐐기문자 점토판이 어떤 언어를 기록했는지가 확정되지 않았다.
왜 이런 상황이 생기는지는 기호의 성격에서 나온다. 소 그림 옆에 획을 세 개 그으면 그것은 어느 언어로도 소 세 마리로 읽힌다. 한국어로 읽든 영어로 읽든 뜻이 바뀌지 않는다. 표의 기호와 수 기호만으로 이루어진 문서는 언어를 특정하지 않는다. 언어를 특정하려면 소리를 적은 흔적, 곧 음가를 표시하는 기호나 문법 요소를 적은 기호가 있어야 한다.
후대 문헌에서 수메르어가 확인되고 남부 바빌로니아의 문화적 연속성이 강하므로, 원쐐기문자의 언어도 수메르어일 것이라는 추정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엥글룬드는 그 추정을 지지하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가 2004년에 낸 글 「The State of Decipherment of Proto-Elamite」에서 제시한 판단은 두 가지다.
첫째, 최초기에 기호가 여러 값으로 쓰였다는 증거는 회의론자를 설득할 만큼 강하지 않다. 둘째, 수메르어의 수사(數詞)와 60진법 사이에 고유한 연결이 있다는 좀 더 정교한 논증도 마찬가지다. 60진법 표기는 이미 선사 시대 점토 불라의 토큰 조합에서 확인되므로, 그 연결을 수메르어의 존재 증거로 쓰기 어렵다는 것이 엥글룬드의 지적이다.
그는 오히려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이 성립한다고 보았다. 최초기 문자 사용 공동체에 수메르어가 있었다고 볼 근거가 약하다는 주장이다. 이 문제를 결정할 책임은 수메르학 쪽에 있다는 것이 그의 정리였다.
반대 방향의 주장도 제출되었다. 원쐐기문자에서 그림 구조를 알아볼 수 있는 기본 기호들이 기원전 3천년기 초부터 여러 음가를 유지하는데, 그 음가 가운데 일부는 해당 그림이 가리키는 물건과 의미상 이어지는 수메르어 낱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현상을 근거로, 그 음가들이 문자의 발달과 밀접하게 연결된 다른 언어에서 물려받은 흔적이라는 가설이 제출되었다. 다만 어떤 언어를 후보로 놓을지는 연구자마다 다르고, 이 가설 자체가 소수 의견이다.
그래서 현재 상태는 이렇다. 인류 최초의 문자 자료가 어떤 민족의 말을 적은 것인지에 관해 확정된 답이 없다. 수메르어가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데는 동의가 있으나, 그것을 증명할 자료는 제출되지 않았다.
기호의 기원에 관한 논의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2024년 학술지 『Antiquity』에 실린 논문 「Seals and signs: tracing the origins of writing in ancient South-west Asia」는 원통형 인장에 새겨진 도상에서 초기 기호의 원형을 찾는다.
이 연구가 드는 사례가 술 장식이 달린 천을 나타내는 도상이다. 이 도상은 문자가 없던 시기의 수사와 우루크, 문자가 막 생기던 시기의 제벨 아루다와 하부바 카비라와 초가 미시, 그리고 초기 문자 시기의 여러 유적에서 확인된다. 수사와 우루크에서 나온 두 점의 수(數)·표의 혼합 점토판에 이 기호가 쓰였고, 처음부터 도식화된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형태가 이집트 사카라에서 나온 나카다 2기 원통형 인장에서도 확인된다.
이 논의는 문자의 기원이 단일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회계용 토큰, 원통형 인장의 도상, 수 기호 체계가 각각 기여했고, 그것들이 결합해 표기 체계가 만들어졌다.
최초기 점토판 가운데 장부가 아닌 것이 있다. 어휘 목록이다. 직업 이름, 동물 이름, 그릇 이름 같은 범주별 낱말을 순서대로 늘어놓은 문서이고, 서기 교육에 쓰였다.
이 목록들이 갖는 성격이 특이하다. 문장이 아니고 서술도 아니다. 낱말을 정해진 순서로 배열한 것이며, 그 순서 자체가 외워야 할 대상이었다. 니센과 엥글룬드가 함께 낸 『Die lexikalischen Listen der archaischen Texte aus Uruk』(1993)가 이 자료를 다룬다.
서기를 기르는 기관은 에두바라 불렸다. 문자를 배우는 과정이 낱말 목록을 베끼는 일로 이루어졌고, 이 방식은 이후 2천 년 넘게 유지된다. 신아시리아 시기 아시리아의 서기들도 같은 종류의 어휘 목록으로 수메르어를 배웠다.
여기서 하나가 분명해진다. 최초의 문자 교육은 행정에 쓰는 기호와 범주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언어를 가르치는 과정과는 성격이 달랐다. 문학 텍스트가 교육 과정에 들어오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문자가 회계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수메르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가른다.
잘 아는 쪽은 경제다. 배급량, 곡물 수확량, 가축 수, 노동일수, 신전의 재산 목록이 대량으로 남아 있다. 우르 제3왕조 시기의 행정 문서는 수만 점 단위로 확인된다. 이 자료 덕분에 고대 사회의 경제 운영을 구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알기 어려운 쪽은 그 바깥이다. 사람들이 왕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도시들 사이에 어떤 논쟁이 있었는지, 지배 체제에 대한 반대가 있었는지는 남은 문서로 확인하기 어렵다. 장부는 그런 것을 적지 않고, 왕의 비문은 패배와 반대를 적지 않는다.
우르 왕릉이 이 한계를 보여 주는 사례다. 레너드 울리가 1922년부터 1934년까지 대영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대학 박물관의 공동 사업으로 우르를 발굴했고, 묘지에서 1,850기의 매장을 확인했다. 그 가운데 16기를 왕릉으로 분류했는데, 기준은 석조 묘실과 이례적인 부장품과 순장된 시종의 유해였다.
규모가 확인된 사례가 둘이다. 울리가 왕의 무덤이라 부른 PG 789는 묘실이 고대에 도굴되었지만 순장 구덩이는 온전했고 63구의 시종 유해가 나왔다. 입구에 선 병사 여섯, 소가 끄는 수레 두 대와 마부, 남서쪽 벽을 따라 늘어선 여성들이 확인되었다. PG 1237은 묘실 없이 74명의 유해만 나와 대(大) 순장 구덩이라 불린다. 남성 여섯이 입구 쪽에 있었고, 진홍색 옷을 입은 여성 68명이 북서쪽 구석에 네 줄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남동쪽 벽 가까이 여섯 명이 리라 두 대와 하프 옆에 놓여 있었다. 푸아비의 무덤에서는 9킬로그램이 넘는 금 장신구가 나왔다.
이 사건을 설명하는 동시대 문헌은 없다. 순장을 지시한 근거도, 순장된 사람들의 신분도, 그것이 자발적이었는지도 문서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해석은 발굴 자료의 재검토에 의존한다.
수전 폴록이 1991년 『Cambridge Archaeological Journal』에 실은 논문 「Of priestesses, princes and poor relations: the dead in the royal cemetery of Ur」가 그 작업을 했다. 폴록은 울리가 골격을 보존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부장품이 죽은 자에게 영구히 준 것이 아니라 빌려준 것일 가능성과 순장이 단기간의 현상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한 이 묘지의 매장 수가 해당 시기 우르에서 죽었을 사람 수를 설명하기에 너무 적다는 사실에서, 나머지 사망자를 처리한 다른 방식이 있었으리라고 보았다.
오브리 바즈고르는 2008년 박사학위 논문에서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대 순장 구덩이의 61번 시신이 다른 여성 시종들보다 훨씬 정교한 머리 장식을 착용했고, 그와 비슷하게 화려한 머리 장식을 가진 다른 여성은 왕비로 여겨지는 푸아비뿐이라는 관찰이다. 울리가 묘실이 파괴되었다고 본 것과 달리, 주인공이 그 구덩이 안에 있었을 수 있다는 해석이 여기서 나온다.
같은 유적을 놓고 이런 논의가 계속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문헌이 없기 때문이다. 회계에서 출발한 문자는 신전의 배급량은 꼼꼼히 적었지만 무덤에서 일어난 일은 적지 않았다.
쐐기문자의 출발점은 물자 관리였다. 토큰과 불라로 운영되던 회계 실무가 있었고, 그중 수를 적는 부분이 먼저 기호가 되었으며, 나머지 기호들은 여러 경로에서 모였다. 인류 최초의 문자 자료 5천 점은 곡물과 가축과 노동을 적은 문서다.
이 출신이 남긴 결과는 두 가지다. 첫째, 최초기 자료의 언어를 확정할 수 없다. 표의 기호와 수 기호만으로 이루어진 문서는 어느 언어로도 읽히며, 엥글룬드의 판단대로라면 수메르어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는 아직 제출되지 않았다. 둘째, 남은 자료의 종류가 편중되어 있다. 경제 운영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고, 정치적 갈등과 관념은 왕의 비문이 허용하는 범위에서만 알 수 있으며, 우르 왕릉의 순장처럼 문헌이 전혀 없는 사건은 발굴 자료의 재해석에 의존해야 한다.
여기서 흔한 서술 하나가 무너진다. 수메르인이 문학과 법과 사상을 남겼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이 문명의 기록 활동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대표하는 것은 장부다. 문학 텍스트는 수백 년 뒤에 나타난 파생물이고, 그 대부분은 서기 교육용 필사본으로 전해졌다.
앞으로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지도 분명하다. 원쐐기문자의 언어 문제는 음가를 표시한 기호가 최초기 자료에서 확인되면 결정된다. 지금까지 그런 자료가 나오지 않았을 뿐이며, 안정된 층위가 아닌 폐기물 퇴적층에서 나온 자료가 대부분이라는 조건을 고려하면 새 발굴이 상황을 바꿀 가능성은 남아 있다. 반대로 그런 자료가 계속 나오지 않는다면 엥글룬드의 침묵 논증이 더 무게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