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무엇을 믿느냐로 재는 틀은 근대 서구에서 굳어진 관행이다. 대규모 비교 자료와 현장 실험은 의례 쪽이 앞선다는 방향을 가리키는데, 그 실험들의 표본은 작고 해석은 아직 갈린다.
어떤 사람이 어느 종교에 속하는지 물을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믿느냐다. 교리를 받아들이면 신자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니다. 종교를 비교할 때도 같은 기준을 쓴다. 신관과 내세관과 구원관을 나란히 놓고 비교표를 만든다.
이 기준은 보편적이지 않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 교파들이 서로를 구별하는 방식이 신앙고백의 내용이었고, 그 방식이 종교 일반을 보는 틀로 굳어졌다. 고전학자들이 그리스 종교를 다룰 때 겪는 곤란이 이 사정을 드러낸다. 그리스 종교에는 경전이 없고 계시가 없고 신조가 없었으며, 중앙 교회 조직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중앙 정치 조직도 없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그리스식 정통도 그리스식 이단도 성립하지 않는다. 신조를 기준으로 삼으면 그리스인에게 종교가 있었다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대안은 무엇을 하느냐로 재는 쪽이다. 반복되는 행위가 먼저 있고 그 행위를 설명하는 말은 나중에 붙는다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인류학에서 오래 이어져 왔고, 최근 20년 사이에 검증 가능한 형태를 갖추었다.
로이 라파포트는 1999년 케임브리지대학출판부에서 낸 『Ritual and Religion in the Making of Humanity』에서 의례를 인간 사회의 기본 형식으로 놓았다. 라파포트의 논지에서 의례가 하는 일은 어떤 내용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의례에 참여한다는 행위 자체가 그 의례가 표현하는 질서를 받아들인다는 공적 수락이 된다.
이 구조가 왜 중요한가. 말로 하는 동의는 속이기 쉽다. 마음속으로 무엇을 믿는지는 본인만 알고, 믿는다고 말하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반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동작을 하는 일은 남들이 보고 확인할 수 있다. 의례는 내면을 묻지 않고 수행을 묻는다.
라파포트의 틀에서 신념은 의례에 뒤따르는 것이 된다. 사람들은 함께 무언가를 반복해서 하고,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그 뒤에 만들어지거나 갱신된다. 설명이 바뀌어도 수행이 유지되면 공동체는 유지된다.
하비 화이트하우스는 이 관점을 검증 가능한 가설로 바꾸었다. 2004년 알타미라출판사에서 낸 『Modes of Religiosity: A Cognitive Theory of Religious Transmission』이 그 틀을 제시한다.
화이트하우스의 예측은 두 양식이 각각 다른 규모의 사회와 짝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교리적 양식은 반복과 표준화가 가능하므로 대규모 인구에 같은 내용을 퍼뜨릴 수 있다. 심상적 양식은 한 번에 소수만 겪을 수 있고 개인마다 해석이 달라지므로 작고 결속이 강한 집단을 만든다.
이 예측은 비교문화 자료로 검정할 수 있다. 퀜틴 앳킨슨과 화이트하우스는 2011년 학술지 『Evolution and Human Behavior』 32권 50~62쪽에 그 결과를 실었다.
앳킨슨과 화이트하우스는 이 자료에서 74개 문화의 종교 의례 645건을 뽑아 각 의례의 수행 빈도와 정서적 각성 수준을 코딩했다. 결과는 의례가 두 무리로 몰린다는 것이었다. 빈도가 낮으면서 고통을 동반하는 각성이 높은 쪽과, 빈도가 높으면서 각성이 낮은 쪽이다. 두 무리 사이의 조합, 곧 자주 하면서 고통이 심한 의례나 드물면서 밋밋한 의례는 드물었다. 그리고 각 무리는 집단 크기 및 구조와 연관됐다.
이 결과가 곧 의례가 믿음보다 먼저라는 증명은 아니다. 보여 주는 것은 의례의 형식적 특징만으로도 사회 규모를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신관이나 교리의 내용을 보지 않고도 예측이 선다는 점에서, 종교를 재는 축이 하나 더 있다는 뜻이 된다.
화이트하우스와 조너선 라먼은 2014년 학술지 『Current Anthropology』 55권 6호 674~695쪽에 실은 논문에서 두 양식을 심리 기제와 연결했다.
이 구분의 근거로 이들이 든 것은 두 갈래다. 하나는 인공 의례를 써서 각성 수준을 조작한 실험들이다. 공포와 불안의 강도를 달리한 뒤 시간을 두고 관찰하면, 불쾌한 각성 조건에 있던 참가자들이 그 의례에 대해 더 많이 더 구체적으로 되새긴다는 결과가 나왔다. 다른 하나는 현장 연구로, 디미트리스 지갈라타스가 2007년에 보고한 자료를 포함해 불쾌 정도가 다른 의례들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비교했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현장 실험은 지갈라타스와 공저자들이 2013년 학술지 『Psychological Science』 8월호에 실었다. 저자는 여덟 명이었고 그중 다섯이 오르후스대학 상호작용하는마음센터 소속이었다.
연구 장소는 인도양의 모리셔스섬이다. 힌두교 축제 타이푸삼 기간에 수행되는 두 가지 의례를 비교했다. 하나는 노래와 집단 기도로 이루어진 저강도 의례다. 다른 하나는 카바디라 불리는 고강도 의례로, 수행자는 창과 갈고리와 꼬챙이 같은 금속 물체를 몸에 꿰고 무거운 구조물을 진 채 무루간 사원까지 몇 시간 동안 행진한다. 축제에 앞서 채식과 금욕과 찬물 목욕과 바닥에서 자기 같은 고행이 이어진다.
연구진은 남성 86명을 대상으로 삼았고, 그중 19명이 카바디를 직접 수행했다. 측정한 것은 기부액과 자기 정체성의 포용 범위였다. 결과는 카바디 수행자와 그것을 지켜본 사람 모두가 기도만 한 집단보다 더 많이 기부했다는 것이었다. 통증 수준이 높을수록 기부액이 컸고 자기 정체성의 범위가 넓었다. 연령과 종교성과 사원 출석 빈도를 통제한 뒤의 결과다.
연구진은 이 설계의 강점을 실험실에서 조작할 수 없는 강도의 실제 자극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찾았다. 실험실에서 사람 몸에 꼬챙이를 꿸 수는 없다.
지갈라타스 연구진은 모리셔스에서 10년 넘게 현장 연구를 이어 왔고, 후속 연구에서 다른 변수를 찾아냈다.
2022년에 보고된 연구에서 이들은 카바디를 수행한 80명을 모집해, 의례 당일 각자의 피어싱 개수를 세고 카바디의 크기를 실측했다. 이후 직업과 학력과 혼인 상태와 종교성을 묻는 설문을 시행했다. 결과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더 큰 카바디를 진다는 것이었다.
지갈라타스가 이 연구의 동기로 밝힌 것은 기존 의례 신호 이론의 공백이었다. 의례가 사회적 의도를 알리는 신호로 작동한다는 이론은 신호 자체에 집중하고 신호를 보내는 사람의 배경을 무시했는데, 사회적 위계는 개인에게 서로 다른 압력을 가한다. 앞선 연구들은 이 편차를 잡음으로 처리했다.
이 발견은 2013년 결과를 뒤집지 않지만 해석의 폭을 넓힌다. 고통 자체가 결속을 만든다는 단순한 인과에 지위 신호라는 변수가 끼어든다. 큰 카바디를 진 사람이 더 많이 기부했다면, 그것이 고통의 효과인지 원래 여유가 있는 사람이 큰 카바디와 큰 기부를 함께 택한 결과인지 가려야 한다.
표본의 제약도 남는다. 2013년 연구는 남성 86명이고 한 축제 한 지역이며, 후속 연구는 80명이다. 상관을 인과로 옮기려면 더 큰 표본과 다른 문화권의 반복 검정이 필요하다.
정체성 융합 가설은 예측 하나를 더 낳는다. 융합이 강할수록 집단을 위해 치르는 비용의 상한이 올라간다는 예측이다.
화이트하우스는 2018년 학술지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42권에 극단적 자기희생의 일반 이론을 제시하는 표적 논문을 실었다. 자살 공격이나 전투에서의 자기희생처럼 유전자를 남길 가능성을 스스로 없애는 행동은 진화적 설명에서 오랫동안 난제였다. 화이트하우스가 제시한 설명은 공유된 불쾌 경험이 융합을 만들고, 융합된 개인이 집단을 확장된 자기로 다루기 때문에 집단을 위한 희생이 자기 보존처럼 작동한다는 것이다.
같은 방향의 실증 연구가 2017년 학술지 『Scientific Reports』 7권에 실렸다. 화이트하우스와 공저자들은 공유된 불쾌 경험이 극단적 협력을 낳는 경로를 다뤘다.
이 확장은 의례 우선 관점의 설명 범위를 넓히는 동시에 부담도 늘린다. 의례가 협력을 만든다는 주장에서 의례가 목숨을 내놓게 만든다는 주장으로 가면 검증해야 할 인과 고리가 길어지고, 각 고리에서 대안 설명이 붙을 여지가 생긴다. 카바디 연구에서 사회경제적 지위가 끼어들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문제다.
화이트하우스가 2021년 옥스퍼드대학출판부에서 낸 『The Ritual Animal: Imitation and Cohesion in the Evolution of Social Complexity』는 이 논의를 한데 모은 책이다. 여기서 화이트하우스는 결속의 두 형태를 구분한다. 강렬한 정서로 이루어지는 융합과 공유된 속성에 기반한 동일시다. 심상적 양식은 앞엣것을, 교리적 양식은 뒤엣것을 만든다.
현장 실험과 별개로 역사 자료 쪽에서도 같은 방향의 결과가 나왔다.
화이트하우스를 제1저자로 하는 14명의 연구진은 2019년 3월 20일 『Nature』 568권 7751호 226~229쪽에 세샤트 세계사 데이터베이스를 쓴 분석을 실었다. 1만 년에 걸친 414개 사회를 대상으로 사회 복잡성 지표 51개와 도덕적 신 지표 4개를 코딩한 작업이었다. 두 가지 결과가 나왔다. 도덕적 신은 사회가 복잡해진 뒤에 나타났고, 대규모 인구에 걸쳐 종교 전통을 표준화하는 의례는 도덕적 신보다 먼저 나타났다. 논문은 사회 복잡성의 초기 상승에 중요했던 것이 신앙의 내용보다 의례 관행이었다고 정리했다.
이 논문은 2021년 7월 7일 철회됐다. 바스티안 베하임과 공저자들이 결측치 처리가 결론을 좌우했다고 반박했고 저자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도덕적 신의 존재 여부가 기록되지 않은 사회를 부재로 코딩했으므로 자료가 적은 이른 시기가 자동으로 '도덕적 신 없음'이 되었다는 지적이다. 저자들은 2022년 학술지 『Religion, Brain & Behavior』에 수정·확장판을 실었고, 결측치 처리의 오류를 고쳐도 주요 결론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같은 호에 동료 논평 7편과 저자 답변이 함께 실렸다.
철회를 겪은 자료를 근거로 쓸 때는 범위를 좁혀야 한다. 확정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진행 중인 논쟁에서 한쪽이 여러 차례 자료를 고쳐 가며 같은 방향의 결과를 재확인했다는 사실까지다.
의례 우선 관점을 끝까지 밀면 반론이 생긴다. 의례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면 그 행위가 왜 의례인가. 카바디 수행자는 무루간이라는 신에게 바치는 행위로 그 고통을 겪는다. 신에 대한 관념이 없으면 그 행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반론은 타당하다. 의례 우선 관점이 내세우는 바는 믿음의 구체적 내용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이지 않다는 쪽이다. 믿음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같은 의례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 의례의 뜻을 서로 다르게 설명하는 사례는 민족지에 흔하다. 화이트하우스가 심상적 양식의 특징으로 꼽은 것 가운데 하나가 개인마다 해석이 갈린다는 점이다. 해석이 갈려도 수행이 같으면 집단은 유지된다.
반대 방향의 사례도 있다. 성문 교리를 갖춘 종교에서는 무엇을 믿느냐가 소속을 가르고, 교리 차이가 분열로 이어진다. 화이트하우스의 틀에서 이것은 교리적 양식의 특징이고, 그 양식은 대규모 사회와 짝을 이룬다. 그러니 믿음의 내용이 결정적인 상황 자체가 특정한 사회 조건의 산물이 된다.
종교를 무엇을 믿느냐로 재는 습관은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 굳어진 것이고, 고대 그리스처럼 경전도 계시도 신조도 없는 사례 앞에서 곧바로 곤란해진다. 대안으로 제시된 의례 중심 관점은 로이 라파포트에서 틀을 얻었고, 하비 화이트하우스가 두 양식이라는 검정 가능한 가설로 바꾸었다. 앳킨슨과 화이트하우스가 74개 문화의 의례 645건을 코딩한 결과 의례는 실제로 두 무리로 몰렸고, 각 무리가 서로 다른 집단 규모와 연관됐다. 세샤트 자료 분석에서도 표준화된 의례가 도덕적 신보다 앞선다는 결과가 나왔다.
자료의 무게는 그 방향만큼 단단하지 않다. 세샤트 논문은 결측치 처리 때문에 한 번 철회됐고 수정판이 나왔다. 모리셔스 카바디 연구는 남성 86명 한 축제 한 지역의 자료이고, 같은 연구진의 후속 조사에서 사회경제적 지위가 카바디 크기를 예측한다는 결과가 나와 고통의 효과와 지위 신호가 뒤섞여 있을 가능성이 생겼다. 정체성 융합 가설은 인공 의례 실험과 현장 관찰에 걸쳐 있지만, 실험실의 각성 조작과 몸에 꼬챙이를 꿰는 행위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메울지는 남는 문제다.
정리되지 않은 물음은 믿음의 자리다. 의례 우선 관점이 축소하는 대상은 믿음의 존재가 아닌 그 내용의 몫이다. 그런데 무엇을 믿느냐가 소속을 가르는 상황 자체가 특정한 사회 조건에서 생긴다면, 두 관점은 서로 다른 조건에 적용되는 설명일 수 있다. 어느 조건에서 어느 쪽이 작동하는지를 가르는 기준은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