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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갈 왕에 관해 실제로 남은 자료 — 곤봉머리 한 점, 아비도스 U-j 무덤, 그리고 다시 검증된 이집트 편년

2026년 9월 12일

전갈 왕이라는 이름은 대중에게 영화로 알려졌다. 2002년 척 러셀이 감독한 미국 영화 《스콜피온 킹》은 드웨인 존슨의 첫 주연작이었고, 1999년작 《미이라》와 2001년작 《미이라 2》보다 5,001년 앞선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다. 주인공 마테이우스는 마지막 아카드인 용병으로 나오고, 그가 쳐들어가는 악역 멤논의 도시는 고모라다. 아카드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왕국이고 고모라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도시이므로, 이 설정은 서로 다른 세 문명의 이름을 한 무대에 모은 창작이다. 그런데 제목만은 실제 인물에서 왔다. 이집트 원왕조기의 왕, 이른바 전갈 왕이다.

문제는 그 실제 인물에 관해 무엇이 확인되었느냐다. 백과사전과 다큐멘터리는 같은 줄거리를 들려준다. 전갈 왕은 상이집트를 다스리며 북쪽 삼각주를 정복했고, 이집트 통일의 마지막 단계를 열었으며, 나르메르의 직전 왕이었다고 한다. 이 줄거리를 떠받치는 실물은 석회암 곤봉머리 한 점이다. 그 곤봉머리에는 왕의 이름이라고 읽어 온 기호가 있고, 왕이 괭이를 든 장면이 있다. 정복을 명시한 글은 한 줄도 없다.

줄거리와 실물 사이의 이 간격은 자료가 모자라서 생긴 것만은 아니다. 발굴 기록이 부실했던 사정, 이름을 읽는 방식의 불확실성, 그리고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편년표가 겹쳐 생겼다. 최근 20년 동안 그 편년표 자체가 방사성탄소 연대로 검증대에 올랐고, 결과는 기존 줄거리의 전제를 흔들었다. 전갈 왕을 둘러싼 논의가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 살피려면 유물부터 다시 봐야 한다.

곤봉머리는 신전 아래 구덩이에서 한꺼번에 나왔다

1897년부터 1898년 발굴 시즌에 영국 발굴자 제임스 퀴벨과 프레더릭 그린은 상이집트의 히에라콘폴리스에서 호루스 신전 구역을 파고 있었다. 히에라콘폴리스는 고대 이집트어로 네켄이라 불린 도시로, 나일강 상류, 지금의 콤 엘아흐마르에 해당한다. 두 사람은 신전터 아래에서 의례용 물건이 무더기로 묻힌 구덩이를 찾아냈고, 이것을 '주 퇴적층(Main Deposit)'이라 불렀다. 여기서 나르메르 팔레트, 나르메르 곤봉머리, 그리고 전갈 왕 곤봉머리가 함께 나왔다.

팔레트는 본래 눈가에 바르는 안료를 가는 돌판이다. 실생활용 팔레트는 한 면에만 장식이 있다. 나르메르 팔레트는 양면에 새겨져 있어 신전에 바친 봉헌물로 본다. 곤봉머리도 마찬가지다. 옥스퍼드 애슈몰린 박물관이 소장한 전갈 왕 곤봉머리는 등록번호 AN1896-1908 E.3632로, 실제로 무기에 쓰는 곤봉머리보다 다섯 배쯤 크다.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상태로 나와 남은 파편을 석고에 박아 원래 크기와 형태를 짐작할 수 있게 복원했고, 복원본은 높이 31.5센티미터에 최대 지름 30센티미터다. 바닥 쪽 작은 파편으로 미루어 중심을 뚫은 세로 구멍의 지름은 7센티미터가량이었다. 손잡이를 끼우기 위한 구멍인데, 그 굵기의 자루를 단 물건을 전투에 쓸 수는 없다. 헬렌 화이트하우스가 애슈몰린 박물관의 유물 해설 시리즈에서 정리한 대로, 이것은 주 퇴적층에서 나온 특대형 장식 곤봉머리 가운데 가장 큰 것이며 처음부터 의례용으로 만들어졌다.

남은 부분은 원래 유물의 3분의 1에 못 미친다. 그 3분의 1에 무엇이 새겨져 있는지가 논쟁의 전부다.

왕의 얼굴 앞에 놓인 두 기호는 읽기가 정해지지 않았다

남은 면에서 가장 크게 새겨진 인물은 상이집트를 상징하는 흰 왕관을 쓰고 있다. 고대 이집트는 남쪽의 상이집트와 북쪽 삼각주의 하이집트로 나뉘었고, 상이집트 왕은 길쭉한 흰 왕관을, 하이집트 왕은 납작한 붉은 왕관을 썼다. 이 인물은 허리띠에 황소 꼬리를 늘어뜨렸는데, 초기 도상에서 왕의 힘을 나타내는 표지다. 양옆에는 부채를 든 시종이 서 있고, 앞에는 괭이를 들고 물가에 선 자세다. 앞쪽 인물은 바구니를 들고 있어, 왕이 파낸 흙을 받으려는 것으로 본다.

왕의 얼굴 바로 앞에 두 기호가 있다. 일곱 장 꽃잎의 로제트와 전갈이다. 이 둘을 묶어 '전갈 왕'으로 읽어 온 것이 표준 해석이고, 이 유물에 붙은 이름도 거기서 나왔다. 근거는 나르메르 팔레트와의 비교다. 팔레트에서 왕의 얼굴 앞에 놓인 메기와 끌은 나르메르라는 이름을 적은 것이므로, 같은 자리에 놓인 기호는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다.

그런데 이 읽기에는 두 가지 걸림돌이 있다. 하나는 로제트의 정체다. 로제트를 '왕'이라는 칭호로 읽으면 두 기호는 "왕 전갈"이 된다. 볼프강 카이저가 지적한 문제는, 그렇게 읽을 경우 이집트 문자 전체에서 로제트가 왕의 칭호로 쓰인 사례는 이것 하나뿐이라는 점이다. 로제트를 꽃으로 보아 호루스 신의 이름과 음이 같은 낱말로 읽자는 견해, 야자나무 잎을 위에서 본 모양으로 보는 견해, 메소포타미아에서 들어온 문양으로 보는 견해가 각각 있다. 토머스 헤이기는 나르메르 카탈로그에 실은 논문에서, 흰 왕관이 이미 왕임을 명시하고 있으므로 로제트는 이름의 일부이거나 왕을 꾸미는 별칭일 것이라고 본다. 나르메르의 이름에서 끌이 메기에 붙은 부차적 이름인 것과 같은 구조라는 설명이다.

다른 하나는 전갈 그림 자체다. 곤봉머리의 전갈에는 배 아래쪽에 짧은 꼭지가 달려 있다. 야로미르 말레크는 이 꼭지가 장대나 깃대에 꽂기 위한 것이므로 이 전갈을 의례용 상징물의 그림으로 보았다. 왕의 이름을 적은 글자로 읽을 수 없다는 뜻이다. 새뮤얼 마크와 화이트하우스도 같은 판단이다. 화이트하우스는 이 돌기가 전갈 자체의 묘사가 아님을 보여 준다고 적었다. 한 개인보다 집단의 소속을 가리킨 표지물이었을 수 있다고 그는 보았다. 이 해석이 힘을 얻는 이유는 히에라콘폴리스에서 나온 전갈 조각상들이 모두 바닥에 구멍이 있어 어딘가에 꽂을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엘리스 바움가르텔은 1966년 독일 학술지 《이집트어와 고대학 연구(ZÄS)》 93권에 실은 논문에서, 전갈은 훗날 셀케트로 불린 전갈 여신을 가리키며 이 곤봉머리는 나르메르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근거는 이집트 왕들이 개인 이름에 여신의 이름을 쓴 전례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 주장 자체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양식이 나르메르의 유물과 비슷하다는 관찰은 지금도 유효하고, 곤봉머리를 나르메르의 것으로 보는 연구자가 오늘날에도 있다.

정리하면 왕의 이름을 적은 것이라는 해석이 다수설이되, 그 다수설을 뒷받침하는 것은 나르메르 유물과의 배치 유사성이라는 간접 근거 하나다. 전갈 왕이 실재했다는 명제의 토대가 이 정도다.

괭이를 든 장면이 정복의 증거로 읽혀 온 경로

이름 다음은 장면이다. 아래쪽 구획에는 강이 흐르고, 그 옆에 수로로 보이는 물길이 있으며, 두 물길이 울타리 친 땅을 감싼다. 그 안에 사람 둘과 야자나무 한 그루가 있다. 왼편에는 돔을 덮은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성소로 본다. 왕의 왼쪽에는 파피루스가 그려져 있다.

이 장면을 퀴벨과 그린은 1902년 발굴 보고서 《히에라콘폴리스 II》에서 왕이 관개 수로를 여는 의식으로 읽었고, 이 해석이 오래 표준으로 통했다. 스탄 헨드릭스와 프랑크 푀르스터는 2010년 공저 논문에서 이 해석을 반박했다. 당시 대규모 관개 체계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였고, 두 사람은 농경과 관련된 창건 의례로 보자고 제안했다. 크시슈토프 치아워비치는 멤피스 창건 장면으로 읽었다. 헤이기는 나일강과 성소 사이에 물길을 여는 의식일 것으로 본다. 한 장면을 두고 관개, 창건, 파종, 성소 봉헌이 각각 제시되어 있다.

장면의 무대가 어디인가도 논쟁거리다. 왕 위쪽 깃대에는 새가 목이 매달린 채 걸려 있는데, 댕기물떼새로 본다. 이집트 도상에서 댕기물떼새는 레크히트라 불리는 사람들과 연결되고, 그 레크히트를 삼각주 주민으로 보는 해석이 널리 퍼져 있다. 여기에 파피루스가 하이집트의 상징이라는 점, 돔 지붕 성소가 하이집트식 신전과 닮았다는 점을 더하면, 흰 왕관을 쓴 상이집트 왕이 하이집트에서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 된다. 남쪽이 북쪽을 정복했다는 줄거리는 여기서 나온다.

케네스 그리핀은 2018년 저서에서 이 연결을 문제 삼았다. 댕기물떼새를 삼각주 주민으로 보는 해석을 뒷받침하는 문헌이 없으며, 오늘날에는 이 새를 이집트 전체의 백성으로 보는 쪽이 더 널리 받아들여진다고 그는 적었다. 헤이기는 여기에 실무적인 반론을 덧붙인다. 백성을 깃대에 목매단 모습으로 그렸을 리는 없으므로, 매달린 새는 적이나 반란자를 가리켰을 가능성이 높다.

헤이기가 지적한 순환논증도 짚어 둘 만하다. 어떤 연구자는 곤봉머리에 댕기물떼새가 있으니 이 새가 삼각주를 뜻한다고 하고, 다른 연구자는 댕기물떼새가 삼각주를 뜻하니 이 장면이 삼각주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같은 자료가 두 결론의 근거로 번갈아 쓰인다.

같은 유적에서 나온 또 하나의 전갈

전갈이라는 이름이 여러 곳에 나타나는 것도 판정을 어렵게 한다. 히에라콘폴리스에서는 선왕조기와 원왕조기에 걸쳐 전갈 표현이 46점, 매 표현이 30점 확인되었고, 대부분 주 퇴적층에서 나왔다. 아비도스에서 나온 전갈 표현은 66점인데 그중 63점이 U-j 무덤 한 곳에서 나왔다. 다른 유적에는 이만한 집중이 없다.

르네 프리드먼은 히에라콘폴리스에 전갈을 주신으로 모시는 지역 신앙이 있었고 왕의 이름이 거기서 왔을 수 있다고 본다. 토비 윌킨슨도 이 유적에 전갈 표현이 몰려 있는 것은 지역 제의로 설명하는 쪽이 안전하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전갈 그림이 새겨진 유물을 모두 왕의 이름으로 읽을 수는 없다. 실제로 헤이기는 전갈 왕의 이름으로 거론되어 온 명문 19건을 하나씩 검토한 끝에 두 건만 남기고 나머지를 물리쳤다. 타르칸에서 나온 토기 명문 두 건은 드라이어가 적외선 사진으로 다시 읽어 악어임을 밝혔고, 투라에서 나온 명문은 카이저가 같은 방법으로 제1왕조 왕 제르의 이름임을 확인했다.

영국 런던 피트리 박물관에 있는 곤봉머리 조각 UC14898의 사례는 이 분야의 증거가 얼마나 얇은지 보여 준다. A. J. 아켈은 1963년 《앤티쿼티》 37권에 발표한 논문 〈전갈 왕은 메네스였는가〉에서 이 조각에 로제트와 전갈이 있다고 판독하고 전갈 왕의 유물로 분류했다. 바버라 애덤스는 1974년 저서 《고대 히에라콘폴리스》에서 같은 조각을 다시 살폈지만 아켈이 말한 세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니컬러스 밀레는 1990년 논문에서 이 조각이 너무 부서져 다룰 것이 없다고 적었다.

아켈의 그 논문은 당시 상황을 한 가지 더 알려 준다. 그는 논문 서두에서, 피트리 소장품을 관리하던 선임자 마거릿 머리가 히에라콘폴리스 출토품을 가능한 한 다시 조사하라고 권했다고 밝혔다. 머리가 그렇게 권한 이유는 원래의 발굴 보고서가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불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발굴 기록이 남기지 않은 것

머리의 판단은 과장이 아니었다. 주 퇴적층의 유물들은 출토 위치와 정황이 분명하게 기록되지 않은 채 수습되었다. 나르메르 팔레트의 경우 퀴벨과 그린의 보고가 서로 어긋난다. 그린의 기록은 팔레트를 퇴적층에서 1~2야드 떨어진 다른 층에 두었는데, 현장 야장을 근거로 보면 그린 쪽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이것이 왜 결정적인가는 층위라는 개념을 알아야 보인다. 땅은 시간이 지나면서 위로 쌓이므로, 유물이 어느 지층에서 나왔는지를 기록해 두면 유물끼리의 선후를 정할 수 있다. 층위 정보를 잃으면 한 구덩이에서 함께 나온 물건들이 같은 시기의 것인지, 수백 년에 걸쳐 모인 것인지 판정할 방법이 사라진다. 퀴벨과 그린 자신은 1902년 보고서에서 주 퇴적층의 물건들이 가장 이른 역사 시대에 속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면서도, 묻힌 시점은 그보다 뒤였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시 말해 제작 시기와 매납 시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간격을 특정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이 퇴적층의 성격 자체를 다시 따지는 연구자도 있다. 리엄 맥나마라는 2008년 논문에서, 전통적으로 초기 왕조 신전이나 성소의 기초로 보아 온 구조물이 실은 왕의 의례 구역이었다고 주장했다. 무엇이 묻힌 자리인지에 대한 합의도 아직 굳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전갈 왕 곤봉머리의 연대는 나르메르 유물과의 양식 비교로 정해졌다. 유물 자체의 출토 정황은 근거가 되지 못했다. 윌리엄 데이비스와 마크는 세 유물이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다고 보고, 윌킨슨은 전갈 왕과 나르메르의 치세가 일부 겹쳤을 수 있다고 본다. 다수는 곤봉머리가 나르메르 유물보다 조금 이르다고 보아 전갈 왕을 나르메르의 직전 왕으로 놓는다. 어느 쪽이든 근거는 조각 솜씨의 유사성이다.

아비도스 U-j 무덤과 두 번째 전갈

1988년 독일고고학연구소 카이로 지부의 귄터 드라이어는 아비도스의 움 엘카아브 묘역, 그중 U구역에서 무덤 하나를 찾아냈다. 번호는 U-j였고, 이집트에서 확인된 선왕조기 무덤 가운데 가장 컸다.

선왕조기와 나카다 편년 이집트에서 제1왕조가 서기 전, 곧 기원전 4000년 무렵부터 3100년 무렵까지를 선왕조기라 부른다. 이 시기의 상이집트 문화를 나카다 문화라 하는데, 1894년부터 1895년까지 플린더스 피트리가 발굴한 나카다 유적에서 이름을 땄다. 나카다 문화는 I기, II기, III기로 나뉘고 각 기는 다시 알파벳과 숫자를 붙인 소단계로 나뉜다. 이 구분은 무덤에서 나온 토기의 형태 변화를 기준으로 만들어졌고, 앞뒤 순서만 나타내는 상대 편년이다. 제1왕조 직전의 나카다 III기를 따로 원왕조기라 부르기도 한다.
이 글에 나오는 시기 구분

나카다 I기(암라티안) 기원전 3900년경~3650년경. 상이집트 각지에 소규모 공동체.

나카다 II기(게르제안) 기원전 3650년경~3300년경. 히에라콘폴리스 HK6의 대형 무덤과 동물 매장(나카다 IC~IIB기).

나카다 III기 기원전 3300년경~3100년경. U-j 무덤(IIIA1~IIIA2), 전갈 왕 곤봉머리와 나르메르 팔레트(IIIB~IIIC).

제1왕조 아하의 즉위를 기원전 3111~3045년(68퍼센트 구간)으로 보는 2013년 연대 모형 기준.

U-j 무덤은 진흙벽돌로 지었고 방이 열두 칸으로 나뉘어 있다. 그 배치가 왕궁의 평면을 본뜬 것으로 보인다는 점, 같은 묘역의 다른 무덤보다 압도적으로 크다는 점이 이 무덤을 왕의 것으로 보는 근거다. 매장실에서는 목조 사당의 흔적과 상아로 만든 헤카 왕홀이 나왔다. 헤카 왕홀은 목자의 지팡이처럼 끝이 굽은 홀로, 이후 이집트 역사 전체에 걸쳐 왕권을 나타내는 표지로 쓰인다.

부장품 가운데 수가 가장 많은 것은 토기다. 400점이 넘는 항아리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수입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일부에는 포도주 잔여물이 남아 있었다. 기원전 3300년 무렵의 상이집트 지배자가 동지중해 연안과 정기적으로 교역했다는 뜻이다.

이 무덤의 주인을 '전갈 1세'라 부르는 관행이 생긴 것은 항아리와 토기 조각에 전갈 그림이 먹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전갈 그림은 세레크처럼 보이는 틀 위에 놓여 있다. 세레크는 왕궁 외벽의 무늬를 본뜬 직사각형 틀로, 그 안에 왕의 이름을 적는 장치다. 드라이어는 1998년 발굴 보고서 《움 엘카아브 I》에서 이 무덤의 주인을 전갈이라는 이름의 지배자로 제안했다.

주의할 점이 둘 있다. 첫째, U-j의 전갈은 히에라콘폴리스 곤봉머리의 전갈 왕과 다른 인물이다. U-j는 아비도스 B묘역에 묻힌 0왕조 왕들보다 최소 100년 이르다. 둘째, 전갈 1세가 실재했는지 자체가 확정되지 않았다. 헤이기는 자신의 논문에서 전갈 1세의 존재 여부는 논쟁 중이며 자기 글의 범위 밖이라고 명시한 뒤, 혼동을 피하려고 곤봉머리의 왕을 전갈 2세로 표기했다.

가장 오래된 이집트 문자는 창고 장부였다

U-j 무덤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이유는 꼬리표에 있다. 뼈와 상아로 만든 작은 꼬리표가 150점 넘게 나왔다. 크기는 가로 2센티미터, 세로 1.5센티미터 남짓이고, 각 꼬리표에는 기호가 한 개에서 네 개까지 새겨져 있다. 연대는 기원전 3320년에서 3150년 사이로 매겨졌고, 이집트 문자의 가장 이른 사례로 꼽힌다.

내용이 중요하다. 시카고대 고대문화연구소(ISAC)가 소장품 해설에서 정리한 바로, U-j의 기록 유물은 세 종류다. 먹으로 쓴 토기 명문, 봉니, 그리고 새김 꼬리표다. 꼬리표에 적힌 것은 물품의 수량과 산지다. 어떤 꼬리표에는 새김 자국이 여섯 개 있는데, 삼나무 상자에 든 아마포의 수량을 적은 것으로 본다. 드라이어는 일부 기호가 왕실 영지와 행정 구역, 부토와 부바스티스 같은 삼각주 도시의 이름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가장 이른 이집트 문자가 물품 꼬리표였다는 사실은 전갈 왕 이야기의 성격을 바꾼다. 이 시기 이집트에서 글자를 만들고 쓴 동기는 정복을 기념하는 데 있지 않았다. 곡물과 직물이 어디서 얼마나 들어왔는지 세는 데 있었다.

이 꼬리표들이 문자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다. 존 베인스는 U-j 단계의 기호들이 이집트어라야만 읽히는 것은 아니며, 동시에 이집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적었다고 볼 근거도 없다고 정리했다. 그가 확실한 문자로 인정하는 것은 나카다 IIIB기, 곧 0왕조에 해당하는 기원전 3150년에서 3050년 무렵부터다. 그때부터 자음 하나를 나타내는 기호들이 나타나고, 제1왕조 중엽에 이르면 그 범위가 거의 다 확인된다. 기호로 언어를 분석했다는 증거가 그때 처음 나온다는 뜻이다. 베인스는 U-j 체계가 그 뒤의 문자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현재로서는 말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일세 레굴스키는 U-j부터 제3왕조가 시작될 무렵까지, 곧 기원전 3150년에서 2611년 사이의 초기 왕조 명문 전체를 모아 자형을 분석했다. 그 결과 U-j의 뼈 꼬리표와 토기 명문 사이에 자형 차이가 크다는 점을 들어, U-j의 기호들을 후대 신성문자의 직계 조상으로 보는 기존 해석에 의문을 제기했다. 두 계통이 따로 있었다는 진단이다.

유물의 순서를 정한 것은 19세기의 진보 관념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연대는 모두 한 체계에 기대고 있다. 나카다 편년이고, 그 편년은 플린더스 피트리가 만든 순서배열법에서 나왔다. 이 체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면 전갈 왕 이야기의 형태가 어디서 왔는지도 보인다.

순서배열법(세리에이션) 유물의 형태가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한다고 보고, 형태가 비슷한 것끼리 이웃에 놓아 전체를 한 줄로 늘어세우는 방법이다. 절대 연대를 알려 주지 않고 앞뒤 순서만 알려 준다. 지층이 뚜렷하지 않은 유적에서 시간 순서를 세우려고 고안되었으며, 오늘날 세계 각지의 선사 고고학에서 쓰는 표준 기법의 출발점이 되었다.

마이클 디와 데이비드 웬그로를 비롯한 연구진이 2014년 《고고과학지(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46권에 발표한 논문은 피트리의 작업 과정을 이렇게 정리한다. 피트리는 나카다, 발라스, 디오스폴리스 파르바 세 유적의 무덤 토기를 분석하면서 부장 토기를 700가지가 넘는 형식으로 정의하고, 형태와 마감을 주된 기준으로 삼되 재질도 고려해 전체를 아홉 개 대분류로 나눴다. 그다음 토기가 다섯 점 이상 나온 무덤 900여 기에 집중했다. 무덤마다 나온 토기 형식을 종이 띠에 적고, 이웃한 띠끼리 차이가 가장 작아지도록 순서를 바꿔 가며 늘어세웠다. 차이를 재는 기준은 '비슷한 정도'나 '양식의 유사성' 같은 정성적 표현이었다.

여기서 피트리가 세운 또 하나의 전제가 결정적이다. 그는 몇몇 토기 형식이 시간이 지나면서 형태가 퇴화한다고 보았다. 대표 사례가 물결무늬 손잡이 항아리다. 피트리는 이 계통이 손잡이가 달린 둥근 형태에서 손잡이 없이 물결무늬만 남은 원통형으로 변해 갔다고 해석했다.

디와 웬그로 연구진은 이 전제가 19세기 말 영국 학계에 퍼져 있던 진화론적 점진주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오거스터스 피트리버스와 에드워드 타일러의 저작에 담긴 발상, 곧 형태와 문화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차례차례 나아간다는 발상이다. 그리고 피트리의 편년이 이후 이 분야를 지배하면서 그 전제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고 적는다. 이집트 국가 형성의 경로 역시 토기 계열처럼 선형으로, 한 단계씩 나아갔다고 보는 관점이 자리 잡았다.

피트리 자신이 처음 내놓은 해석은 더 나갔다. 그는 나카다에서 나온 무덤들이 이집트적이지 않다고 보고 리비아에서 침입한 '새로운 종족'의 흔적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이집트학자 자크 드 모르강이 이를 바로잡아, 이 유물들은 상형문자 이전 시대, 곧 선왕조기의 이집트 유물이라고 지적했다. 케임브리지대 휘플 도서관이 정리한 이 경위에 따르면, 피트리는 지적을 받아들인 뒤 토기 자료를 체계적으로 연구해 순서배열법을 만들었다. 종족 교체설은 폐기되었지만, 그 자리에 들어선 편년표는 점진적 진보라는 같은 시대의 가정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피트리는 이 순서에 30부터 80까지 번호를 매겼고, 양끝에 더 넣을 자리를 남겨 두려고 일부러 그 범위를 골랐다. 그리고 전체를 암라티안, 게르제안, 세마이니안 세 '문화'로 나눴다. 20세기 내내 이 구분은 보완되었다. 베르너 카이저는 토기의 공간 분포에 무게를 두어 다듬었고, 헨드릭스는 훨씬 많은 발굴 자료를 종합했다. 그런데도 피트리의 원래 구조는 거의 그대로 남았다. 오늘날 쓰는 나카다 I기, II기, III기라는 이름이 그의 세 구분의 자취다.

방사성탄소로 검증했더니 순서가 어긋났다

상대 편년은 그 자체로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 독립된 절대 연대와 맞대 봐야 한다. 2013년과 2014년에 나온 두 연구가 그 작업을 했다.

베이즈 방사성탄소 연대 방사성탄소 연대는 생물 시료에 남은 탄소14의 양으로 사망 시점을 추정한다. 측정값 하나만으로는 오차 범위가 넓어, 보정 곡선을 거치면 95퍼센트 확률 구간이 200~300년에 이르기도 한다. 베이즈 통계 모형은 여기에 고고학적 정보를 추가로 넣는다. 예를 들어 어느 왕이 다른 왕보다 먼저 즉위했다는 순서를 조건으로 걸고 여러 측정값을 함께 계산하면 각 시점의 확률 분포가 좁아진다. 결과로 나오는 'hpd 구간'은 그 확률이 집중된 연대 범위를 뜻한다.

디를 제1저자로 하는 연구진은 2013년 《영국 왕립학회보 A》 469권에 이집트 초기 국가의 절대 편년을 발표했다. 왕묘와 주변 무덤에서 나온 머리카락, 뼈, 식물 시료로 100건이 넘는 방사성탄소 연대를 새로 얻고 기존 고고 증거와 결합한 결과, 제1왕조 왕 아하의 즉위 연대는 68퍼센트 구간에서 기원전 3111년부터 3045년 사이, 중앙값 3085년으로 나왔다. 95퍼센트 구간으로 넓히면 3218년부터 3035년 사이다. 연구진은 이집트 국가 형성 과정이 종래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결론지었다.

더 직접적인 검증은 이듬해 나왔다. 같은 연구진은 2014년 논문에서 나카다 상대 편년 자체를 방사성탄소 자료로 시험했다. 선왕조기 무덤에서 나온 연대 91건을 모으고, 시료 품질과 내재 연대 문제를 이유로 일부를 걸러 낸 뒤, 통계 프로그램 옥스칼의 순서 판정 기능으로 각 단계의 평균 연대가 실제로 차례대로 놓이는지 계산했다.

결과는 두 갈래로 나왔다. 여러 단계를 묶은 '단순형' 편년은 검증을 통과했다. IC-IIB, IIC-IID, IIIA1-IIIA2 세 덩어리가 실제 시간 순서대로 이어진다는 것이 방사성탄소 자료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개별 단계까지 쪼갠 '통상형' 편년은 통과하지 못했다. IC, IIA, IIB 세 단계가 이 순서로 놓인다는 가정은 자료와 어긋났고, 계산 결과는 오히려 IC가 셋 중 가장 늦은 단계일 가능성을 가리켰다. IID가 IIIA1보다 앞선다는 확률은 0.49로 나왔다. 두 단계를 시간으로 구별할 수 없다는 뜻이다.

덩어리 단위로도 겹침은 남았다. IIC-IID가 IIIA1-IIIA2보다 앞설 확률은 0.62에 그쳤다. 연구진은 이를 두고, 한 덩어리에서 아무 무덤이나 골랐을 때 그것이 다음 덩어리의 무덤보다 반드시 앞선다고 보장할 수 없다고 적었다.

연구진이 이어서 던진 물음은 방법론 전체를 향한다. 유물을 늘어세운 순서가 언제나 참된 연대인지, 아니면 형식들의 연속일 뿐인지. 그리고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이 방법은 문화 변동을 실제보다 질서 있고 점진적인 것으로 그려 내는 것은 아닌지. 이런 체계는 물질 형태의 밑에 깔린 실제 변화 속도의 불규칙성을 매끄럽게 덮어 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 이들의 지적이다.

앨리스 스티븐슨은 2016년 《고고학 연구 저널》 24권에 실은 선왕조기 연구 개괄에서 같은 방향의 진단을 내놓았다. 2001년에는 이집트에서 복합 사회가 점진적으로 발달했다는 합의가 형성되는 듯 보였지만, 새 자료와 다른 이론 틀이 그 통설을 흔들면서 오늘날의 그림은 더 불분명해졌다. 그는 이집트의 국가 형성을 박자가 어긋나는 과정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신진화론이 상정한 고른 행진과는 다른 그림이다.

전갈 왕에게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분명하다. 전갈 왕을 '통일 직전 단계의 왕'으로 배치해 온 근거는 편년표 위의 자리였다. 유물의 층위가 그 자리를 정한 것은 아니다. 그 편년표의 개별 칸들이 실제 시간 순서를 담보하지 않는다면, 곤봉머리를 나르메르 직전에 놓는 배치 역시 그만큼만 확실하다.

히에라콘폴리스에서 계속 나오고 있는 것

편년표가 흔들리는 동안 현장에서는 자료가 늘었다. 히에라콘폴리스 조사단은 1979년 이래 HK6이라 부르는 엘리트 묘역을 발굴해 왔고, 1970년대 말부터 르네 프리드먼이 조사를 이끌고 있다. 여기서 나온 것들은 전갈 왕 시대보다 수백 년 이른 나카다 II기의 지배층 무덤이다.

HK6의 특징은 큰 무덤 주위에 딸린 무덤을 두르고 거기에 사람과 동물을 함께 묻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150마리 가까운 동물이 확인되었고 그중 50마리 가까이가 야생 동물이다. 들소 세 마리, 하마 세 마리, 하테비스트 한 마리, 살쾡이 한 마리, 표범 한 마리, 아프리카코끼리 두 마리가 나왔다. 개코원숭이는 프리드먼과 공동 연구자들이 정리한 시점까지 스무 마리가 확인되어, 이집트에서 이 영장류가 확인된 가장 이른 사례가 되었다. 두 사람이 지적했듯 코끼리와 개코원숭이는 홀로세 이집트의 토착 동물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들여왔다는 뜻이다.

무덤 위에는 나무 기둥으로 세운 상부 구조가 있었고, 일부는 울타리로 둘러싸였다. 나카다 IIB기 전반의 23호 무덤은 가로 5.5미터, 세로 3.1미터로 그 시기 알려진 무덤 가운데 가장 크다. 무덤 구덩이 양옆에 늘어선 기둥 구멍 여덟 개가 상부 구조의 존재를 확인해 주었다. 이집트에서 확인된 가장 이른 지상 장제 건축이다.

여기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특정 왕의 이름보다 권력의 규모다. 야생 동물을 먼 곳에서 산 채로 들여와 무덤가에 묻을 만큼의 인력과 물자를 동원한 지배층이 기원전 3700년에서 3500년 사이에 이미 히에라콘폴리스에 있었다. 통일이라 부르는 사건보다 500년 이상 앞선다.

이 사실은 전갈 왕의 지위를 다시 따지게 만든다. 헤이기가 제안한 해석이 그 지점을 파고든다. 전갈 왕의 이름은 히에라콘폴리스 바깥에서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아비도스의 움 엘카아브 왕묘는 여러 차례 도굴되었는데도 이리호르, 카, 그리고 제1왕조 모든 왕의 명문이 수습되었다. 그런데 전갈 왕에게 귀속할 만한 자료는 아비도스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리호르와 카, 나르메르의 무덤은 B묘역에 나란히 놓여 있고 나르메르의 무덤은 아하의 무덤과 맞붙어 있으며, 그 구역은 전면 발굴이 끝났지만 빈자리가 없다.

헤이기는 여기서 전갈 왕을 히에라콘폴리스를 다스린 지역 왕으로 보되, 아비도스 왕조에 종속된 속왕으로 놓자고 제안한다. 헨드릭스와 프리드먼이 앞서 지적한 사실이 이 제안의 바탕이다. 아비도스와 히에라콘폴리스 사이에 무력 충돌이 있었다는 증거는 지금까지 조금도 나오지 않았고, 두 곳은 같은 정치·종교 상징을 공유했다. 나르메르의 대표 유물인 팔레트와 곤봉머리가 정작 히에라콘폴리스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그렇다. 두 세력이 처음에는 동맹이었다가 아비도스가 점차 우위를 차지하는 관계로 옮겨 갔고, 히에라콘폴리스에는 지역 왕이 남아 자기 신전에 자신을 왕으로 새길 권리를 유지했다는 그림이다.

이 그림이 옳다면 전갈 왕은 이집트를 통일한 정복자도 아니고, 통일을 저지하려다 패한 경쟁자도 아니다. 통일이 진행되는 동안 남쪽 옛 중심지에 남아 있던 마지막 지역 왕이다. 물론 이것도 제안이다. 헤이기 자신이 여러 갈래 증거를 조화시키려는 새 이론으로 제시한 것이지 확정된 결론이 아니다.

결론 — 전갈 왕의 전기는 유물이 아니라 유물을 배열한 방식에서 자라났다

전갈 왕에 관해 확인된 것을 모으면 짧다. 히에라콘폴리스 신전 아래 구덩이에서 나온 곤봉머리 한 점이 있고, 거기에 흰 왕관을 쓰고 괭이를 든 인물과 로제트, 전갈이 새겨져 있다. 아비도스 U-j 무덤에서는 전갈 그림이 그려진 토기와 물품 꼬리표가 나왔다. 확인된 목록은 여기서 끝난다. 정복을 기록한 문장도, 즉위와 사망 연도도, 확인된 무덤도 없다.

그런데 이 짧은 목록에서 정복 왕의 전기가 만들어졌다. 세 갈래가 그 이야기를 떠받쳤다. 첫째는 유물의 출토 정황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정이다. 퀴벨과 그린의 1897년 발굴은 주 퇴적층의 층위를 남기지 않았고, 그래서 곤봉머리의 연대는 나르메르 유물과의 양식 비교로 정해졌다. 마거릿 머리가 1960년대에 재조사를 권한 이유가 그것이었고, 아켈이 판독했다고 한 세부를 애덤스가 확인하지 못한 사례가 그 결과다. 둘째는 도상 해석의 순환이다. 댕기물떼새가 삼각주 주민이라는 전제에서 장면의 무대가 하이집트로 정해지고, 그 무대에서 다시 새의 정체가 확증된다. 그리핀이 지적했듯 이 전제를 뒷받침할 문헌은 없다. 셋째는 편년표다. 피트리가 토기 형태의 점진적 변화를 가정해 세운 순서가 이집트 국가 형성 자체를 점진적 진행으로 그리게 만들었고, 전갈 왕은 그 진행의 마지막 직전 칸에 배치되었다.

세 번째 갈래는 이제 검증되었다. 디와 웬그로 연구진의 2014년 분석은 나카다 편년이 큰 덩어리 수준에서는 참된 연대이지만 개별 단계 수준에서는 신뢰할 수 없음을 보였고, 2013년 연구는 국가 형성이 종래 추정보다 빨리 진행되었음을 시사했다. 스티븐슨의 정리대로 오늘날 이집트 국가 형성은 박자가 어긋나는 과정으로 다뤄진다. 전갈 왕을 통일 직전 단계에 놓아 온 자리 자체가 그만큼 느슨해졌다.

남은 자료가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은 다른 종류의 그림이다. U-j 꼬리표는 물품의 수량과 산지를 적었고, 400점 넘는 수입 항아리는 동지중해와의 교역을 보여 준다. HK6의 동물 매장은 통일보다 500년 앞서 원거리에서 코끼리와 개코원숭이를 들여올 수 있는 권력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곤봉머리에 새겨진 장면조차 전투가 아니라 물길을 여는 의식이다. 세 갈래 자료가 함께 그려 내는 것은 한 사람의 정복담이 아니다. 물자를 모으고 세고 표시하면서 커진 조직이다.

영화가 만들어 낸 아카드인 용병과 고모라 함락은 창작이고, 창작임을 굳이 따질 이유는 없다. 따져 볼 만한 것은 고고학 쪽의 이야기가 왜 영화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는가다. 이름 하나와 의례 장면 하나에서 정복과 통일의 서사가 자란 데에는, 19세기 말 유럽이 역사를 단계적 진보로 본 습관과 그 습관을 담은 도구가 함께 작용했다.

확인되지 않은 채 남은 물음은 여럿이다. 전갈 왕의 무덤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히에라콘폴리스 HK6의 1호 무덤이 후보로 거론되지만 그와 연결되는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로제트의 뜻도 정해지지 않았고, 전갈 그림 배에 달린 꼭지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설명되지 않았다. 아비도스와 히에라콘폴리스의 관계를 동맹으로 볼지 종속으로 볼지도 아직 제안들이 경쟁하는 단계다. 이 물음들에 답하려면 새 편년표를 세우기보다, 층위가 남은 맥락에서 자료를 얻어 절대 연대와 맞춰 보는 작업이 쌓여야 한다. 히에라콘폴리스 조사단이 1979년 이래 HK6에서 해 온 발굴이 그런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