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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제자가 알려진 문자는 한글뿐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기록으로 창제자와 창제 연도가 확인되는 문자 11가지

한글날마다 되풀이되는 문장 하나

해마다 10월이면 같은 문장이 돌아온다. 세상의 문자 가운데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기록으로 남은 것은 한글뿐이라는 말이다. 교과서에도, 박물관 해설판에도, 신문 칼럼에도 실린다. 이 문장은 확인해 보면 성립하지 않는다.

창제자의 이름과 창제 연도가 동시대 또는 그에 가까운 기록으로 확인되는 문자는 여럿이다. 4세기 고트 문자부터 1989년 아들람까지, 대륙을 가리지 않고 나온다. 그중에는 지금도 한 나라의 공식 문자로 쓰이는 것이 있고, 왕조와 함께 사라진 것이 있으며, 지난 40년 사이에 유니코드에 들어가 휴대전화 자판까지 얻은 것도 있다.

통념이 틀렸다고 해서 한글이 평범해지지는 않는다. 한글이 드문 이유가 다른 곳에 있다는 뜻이다. 그 자리를 정확히 짚으려면 먼저 비교 대상을 늘어놓아야 한다. 아래에 열한 가지를 시대순으로 놓는다. 글자 모양은 실제 글꼴의 윤곽선을 그대로 벡터로 옮겨 실었으므로, 읽는 기기에 해당 문자의 글꼴이 없어도 보인다.

문자와 언어는 다른 것이다 이 글이 다루는 대상은 문자다. 언어는 사람들이 입으로 쓰는 말이고, 문자는 그 말을 눈에 보이게 적는 기호 체계다.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의 언어가 문자를 바꿔 입는 일도 있고(소말리어), 문자는 남았는데 그 문자로 적던 언어가 위태로워진 경우도 있다(체로키어). 둘의 운명은 따로 움직인다.

성경을 읽히려고 만든 세 문자

가장 오래된 사례 세 가지는 동기가 같다. 기독교 선교사가 자기 신자들에게 성경을 읽히려고 문자를 만들었다.

고트 문자, 4세기 중반

고트족은 게르만계 민족으로 당시 로마 제국 변경에 살았다. 울필라(311~383)는 서고트족의 종교 지도자였고, 자기 민족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려고 문자를 고안했다. 완성 시점은 4세기 중반으로 잡힌다. 27자이며 글자 대부분이 그리스 문자를 바탕으로 삼고, 거기에 라틴 문자와 룬 문자에서 몇 자를 가져다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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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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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르칸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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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바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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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그스 [d]

고트 문자의 첫 네 글자. 그리스 문자와 계통이 이어지지만 획이 곧고 각이 져 있다.

울필라의 설계에는 판단이 들어가 있다. 게르만어의 순음화 연구개음, 곧 [hw]와 [kw]처럼 입술을 둥글게 하면서 내는 소리를 한 글자로 처리했고, 유성 파열음과 그 마찰음 짝도 한 글자로 적었다. 고트어의 음운을 잘 반영한 설계였는데, 울필라 이후 고트어의 발음이 바뀌면서 글자와 소리의 대응이 흐트러진 대목이 생겼다. 지금도 ai, au, g의 정확한 음가는 확정되지 않았다.

고트 문자는 6세기에 이미 쇠퇴했다. 고트어 자체가 소멸했기 때문에 문자도 함께 사라졌다. 지금은 남은 성경 번역 필사본이 게르만어의 가장 오래된 모습을 보여 주는 자료로 쓰인다.

아르메니아 문자, 405년

메스로프 마시토츠는 아르메니아의 성직자이자 언어학자였다. 아르메니아는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지만 성경이 그리스어나 시리아어로만 있어서 일반 신자가 읽을 수 없었다. 마시토츠는 405년경 36자짜리 문자를 완성했다. 13세기에 두 글자가 더해졌고, 1920년대 정서법 개혁에서 합자 하나를 글자로 인정하면서 39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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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브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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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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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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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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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치 [e]

아르메니아 문자의 첫 다섯 글자. 고리와 곡선이 많고 위아래로 삐침이 길게 뻗는다.

창제 과정도 기록에 남아 있다. 마시토츠는 먼저 기존 문자를 아르메니아어에 맞춰 쓸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북시리아의 에데사로 갔다. 에데사는 당시 기독교 학문의 중심지였다. 성과가 없자 새 문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아르메니아 서부의 헬레니즘 도시 사모사타로 옮겨 그리스 문자 체계를 참고해 설계를 마쳤다. 글자꼴을 다듬는 데는 그리스인 서예가 루피누스가 도왔다고 전한다. 새 문자로 처음 옮긴 것은 성경이었고 잠언의 한 구절부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시토츠는 362년경 타론 지방 하체카츠 마을에서 태어났다. 코류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어, 페르시아어, 시리아어, 조지아어에 능통했다. 군에서 경력을 쌓고 아르메니아 왕실에서 일하다가 교회로 들어갔으며, 395년 무렵 수도사가 되었고 뒤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440년 바가르샤파트에서 죽어 아슈타라크 인근 오샤칸 마을의 예배당에 묻혔다. 창제는 마시토츠 개인의 일이 아니었다. 총대주교 사하크 파르테브와 국왕 브람샤푸가 함께 움직였다.

배경에는 정치가 있었다. 387년 아르메니아가 비잔티움과 사산조 페르시아 사이에서 분할되면서 나라가 독립을 잃었고, 분할된 양쪽에서 동화가 진행될 위험이 생겼다. 문자 창제는 그 상황에서 언어와 종교를 함께 지키려는 선택이었다.

이 사례가 특별한 까닭은 기록의 두께에 있다. 마시토츠의 제자이자 전기 작가인 코류가 5세기에 쓴 『마시토츠의 생애』가 남아 있고, 이 책은 아르메니아어로 쓰인 가장 오래된 저작이기도 하다. 모브세스 호레나치와 라자르 파르페치의 기록도 같은 세기에 나왔다. 창제 과정과 성경 번역 작업이 동시대 증언으로 확인되는 드문 경우다.

다만 이 사료들은 다른 주장도 싣고 있다. 중세 아르메니아 사료는 마시토츠가 조지아 문자와 캅카스 알바니아 문자까지 만들었다고 적었는데, 조지아 문자에 관해서는 대다수 학자가 카르틀리 왕국의 기독교화 과정에서 따로 생겨났다고 본다. 창제자 기록이 남았다는 사실과 그 기록이 빠짐없이 옳다는 것은 별개다.

아르메니아 문자는 1600년 넘게 끊긴 적 없이 쓰였고 지금 아르메니아공화국의 공식 문자다.

글라골 문자, 863년경

비잔티움 선교사 콘스탄티노스(훗날의 성 키릴로스)와 그의 형 메토디오스가 슬라브어를 적으려고 만들었다. 두 사람은 슬라브어권 남쪽 끝인 테살로니카 출신으로, 862년 모라바 공 라스티슬라프의 요청에 따라 비잔티움 황제가 대모라바로 보냈다. 라스티슬라프의 목적은 종교보다 정치에 가까웠다. 동프랑크 성직자에게 매인 상태를 느슨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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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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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키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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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디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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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골리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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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브로 [d]

글라골 문자의 첫 다섯 글자. 원, 삼각형, 고리를 조합한 기하학적 모양이다.

여기서 널리 퍼진 오해를 하나 정리해야 한다. 키릴 문자는 성 키릴이 만들지 않았다. 키릴과 메토디오스가 만든 것은 글라골 문자이고, 키릴 문자는 두 사람이 죽은 뒤 제자들이 만들었다. 클리멘트가 세운 오흐리드 문자학교와 나움이 맡은 프레슬라프 문자학교가 그 무대였다. 프레슬라프에서 필경사들이 그리스 문자로 쓰면서 글라골 문자의 자모를 일부 끌어다 쓰는 방식으로 점차 형태가 잡혔다. 글자 모양만 그리스식으로 바꾸고 음운 체계는 글라골 문자의 것을 유지했다.

글라골 문자는 863년부터 885년까지 대모라바에서 행정 문서와 종교 서적에 쓰였다. 886년 니트라의 주교 비힝이 이 문자를 금지하고 메토디오스의 추종자 200명을 투옥하면서 모라바에서의 사용은 끝났다. 제자들은 불가리아로 옮겨 갔고, 그곳에서도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 사이에 더 간편한 키릴 문자에 밀렸다. 크로아티아 성직자들은 19세기 초까지 계속 썼다.

세 사례의 공통점은 동기다. 문자를 만든 쪽은 학자였고, 그들을 움직인 것은 번역이었다. 셋 중 둘은 살아남았고 하나는 언어와 함께 사라졌다. 문자의 운명을 가른 것은 설계의 우열이 아니었다.

글을 읽을 줄 몰랐던 사람이 만든 문자

체로키 음절문자, 1821년

세쿼이아는 체로키족 은세공인이었다. 1809년부터 1821년까지 12년에 걸쳐 문자를 만들었는데, 그가 어떤 문자도 읽거나 쓸 줄 몰랐다는 점에서 앞의 세 사례와 성격이 다르다. 영어를 비롯해 그가 문자로 아는 언어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이 문자는 기존 알파벳으로 체로키어 소리를 옮겨 적는 방식과 무관하다. 체로키어의 소리에 맞춰 처음부터 짠 체계다.

처음에는 단어마다 기호 하나를 주는 방식을 시도했다가 감당이 안 되어 접었다. 다음으로 음절 단위를 택했고, 85자(처음에는 86자)로 정리했다. 앞의 여섯 자는 홀로 쓰이는 모음 음절이고 그 뒤로 자음과 모음이 결합한 음절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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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t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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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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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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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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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ya]

체로키 음절문자 다섯 자. 앞의 세 자를 이어 읽으면 체로키족의 자칭인 '찰라기'가 된다.

글자 모양에는 함정이 하나 있다. 라틴, 그리스, 히브리 문자와 닮은 글자가 많은데 음가는 무관하다. 세쿼이아가 모양만 눈으로 보고 가져왔기 때문이다. 언어학자 피터 언셋은 이 문자의 글자꼴이 영어, 그리스어, 히브리 문자에서 온 요소를 포함한다고 정리했다. 영어를 아는 사람이 보면 오히려 더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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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D 모양, 음가는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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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R 모양, 음가는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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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T 모양, 음가는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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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H 모양, 음가는 [mi]

라틴 문자와 모양이 겹치는 글자들. D처럼 보이는 글자가 [a], R처럼 보이는 글자가 [e]로 읽힌다.

세쿼이아의 생애는 상당 부분이 불확실하다. 1770년에서 1778년 사이에 지금의 테네시주 보노어 인근 터스키기에서 태어났다고 본다. 사냥 사고로 평생 다리를 절었고 뛰어난 은세공인이 되었다. 백인들과 접촉하면서 책을 보았고 그것을 말하는 잎사귀라고 불렀다. 1809년에 그 비밀을 풀어 자기 민족에게 적용하겠다고 마음먹었다.

12년 동안 그는 조롱과 모욕을 받았다. 이웃들은 그가 주술을 부린다고 의심했고, 아내는 화가 나서 그의 종이 일부를 태웠다. 처음 가르친 제자는 여섯 살 딸 아요카였다. 문자를 완성할 무렵 체로키 지도자들이 두 사람을 주술 혐의로 문제 삼았고, 재판에서 문자로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음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세쿼이아는 사촌 조지 라우어리에게 문자를 처음 보였고, 두 번째 아내의 오빠 마이크 워터스가 처음 문자를 배운 사람이 되었다. 이 문자로 쓴 첫 글은 체로키 네이션과 조지아와 테네시 사이의 경계선에 관한 것이었다. 얼마 뒤 그는 조지아 북동부 차투가에서 열린 법정에 소를 제기하고 자기 문서를 소리 내어 읽으며 변론했다. 이 장면이 소문을 퍼뜨렸다.

보급 속도는 다른 어떤 사례보다 빨랐다. 1821년 체로키 평의회 앞에서 시연해 승인을 받았고, 2년 안에 상당수가 익혔다. 1825년 체로키 네이션이 공식 채택했으며, 1827년에 성문 헌법이, 1828년에 미국 최초의 원주민 신문 『체로키 피닉스』가 나왔다. 인쇄기는 선교사 새뮤얼 워스터가 주선했다.

이 속도를 설명하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음절문자는 자음과 모음을 따로 나누는 알파벳보다 배우기 쉬운 경우가 있다. 사람이 말을 들을 때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단위가 음절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세쿼이아가 음운학 용어를 몰랐으면서도 음절 단위로 내려간 것은 그 점을 귀로 짚은 결과다.

세쿼이아는 1823년 아칸소로 가서 먼저 서쪽으로 옮겨 간 체로키인들에게 문자를 가르쳤고 1828년에 그들과 함께 오클라호마로 옮겼다. 1830년 인디언 이주법이 통과되면서 대부분의 체로키인은 눈물의 길이라 불리는 강제 이동에 오르게 된다. 집과 재산을 빼앗기고 많은 사람이 죽는 과정에서도 그들은 체로키어와 이 문자를 가지고 갔다. 세쿼이아 본인은 멕시코로 옮겼고 1843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바이 음절문자, 1833년경

라이베리아의 모몰루 두왈루 부켈레가 만들었다. 전승에 따르면 꿈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 막대기로 땅에 기호를 그으며 그것들이 바이어의 소리와 뜻을 나타낸다고 알려 주었고, 깨어난 뒤에는 정확한 모양을 기억하지 못해 다시 만들어 냈다고 한다. 부켈레도 이전에 어떤 문자를 읽고 쓸 줄 몰랐으며 영어도 거의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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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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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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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그베 [mg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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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vu]

바이 음절문자 네 자. 기호마다 음절 하나를 나타낸다.

체로키와의 연결 가설이 있다. 1820년대 후반 여러 체로키인이 라이베리아로 이주했고, 그중 오스틴 커티스는 1823년에 정착해 유력 가문과 혼인하고 추장이 되었다. 두 문자는 자음과 모음이 결합한 음절과 단독 모음을 적는 구조가 같고, 체로키 문자가 1821년에 완성된 뒤 바이 문자가 1832년에서 1833년 사이 같은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에서 나왔다. 반론도 있다. 커티스나 다른 누가 부켈레에게 직접 가르쳤다는 기록이 없다.

이 논쟁 자체가 창제 기록의 성격을 보여 준다. 창제자 이름과 대략의 연도는 확정되는데, 착상의 경로는 확정되지 않는다. 한글의 기원 논쟁도 같은 구조에 놓여 있다.

바이 문자는 살아남았다. 19세기 내내 문해율이 올라갔고 20세기에 쇠퇴했다가 컴퓨터로 되살아났다. 손편지, 장신구 각인, 목공 도면, 일기, 장부 정리에 쓰였고 지금도 출판물에 쓰이며 유니코드에 들어가 있다.

기호를 돌려 모음을 바꾸는 문자

1840년 감리교 선교사 제임스 에번스(1801~1846)가 매니토바의 노르웨이 하우스에서 스웜피 크리어를 적기 위해 만든 문자다. 에번스는 원래 라틴 문자를 오지브웨어에 맞춰 쓰려 했는데 잘 맞지 않았다. 피트먼 속기와 데바나가리에서 착상을 얻어 새 체계를 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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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방향 [pe]
glyph
아래 방향 [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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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방향 [po]
glyph
위 방향 [pa]

같은 기호를 네 방향으로 돌린 것. 방향이 바뀌면 붙는 모음이 바뀐다.

설계 원리가 특이하다. 기호 하나를 네 방향으로 돌려 쓰면 붙는 모음이 달라진다. 위의 네 글자는 같은 삼각형을 돌린 것이며 차례로 [pe], [pi], [po], [pa]로 읽힌다. 기호 아홉 개만으로 오지브웨어를 적을 수 있었다. 모음만 있는 음절도 같은 규칙을 따른다.

glyph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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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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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glyph
[a]

모음 음절도 같은 원리로 돌아간다. 차례로 [e], [i], [o], [a]다.

종이가 귀해서 사람들은 자작나무 껍질에 탄 나뭇가지 그을음으로 쓰거나 나무에 새겼고, 에번스에게 자작나무 껍질을 말하게 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에번스는 활자를 직접 주조해 1841년에 크리어 찬송가와 성경 일부를 찍었다.

창제자 기록에 단서가 붙는 사례이기도 하다. 크리족과 호피족 전승에는 콜링 배저라는 우드 크리족 치유자가 에번스보다 앞서 이 문자를 받았고 선교사들이 그것을 배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위키피디아의 해당 항목도 에번스가 원주민 언어 전문가들과 협력했을 가능성을 적어 둔다. 선교사 한 사람의 단독 발명으로 정리하기에는 남은 증언이 엇갈린다.

이 문자는 지금 살아 있다. 이누크티투트로 확산되어 누나부트 준주에서 라틴 문자와 함께 공용 문자다. 1999년 누나부트 출범 때 준주 정부가 디지털 글꼴을 발주해 Pigiarniq와 Euphemia가 나왔고, Euphemia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이 라이선스해 지금은 기본 탑재된다.

왕과 술탄이 만든 문자

바뭄 문자, 1896년에서 1910년까지

카메룬 서부 바뭄 왕국의 17대 왕 이브라힘 은조야(1860~1933)가 만들었다. 스물다섯 살 무렵 시작해 14년에 걸쳐 그림문자에서 음절문자로 바꿔 나갔다. 처음에는 500자에서 600자 규모의 그림 기억 보조 장치였고, 개정을 거듭하며 단어 기호를 넣었으며, 1910년에 완성한 여섯 번째 판은 80자 음절문자다. 첫 네 글자를 따서 아카우쿠라고 부른다.

glyph
[a]
glyph
[ka]
glyph
[u]
glyph
[ku]

바뭄 문자의 첫 네 글자. 이 넷의 음가를 이어 읽은 것이 문자의 이름이 되었다.

은조야는 학교에서 이 문자를 가르치게 하고 행정 전 단계에 쓰도록 했다. 왕조사와 법률, 관습, 약 처방까지 기록했고 궁정 문서고에 8000점이 넘는 원본이 남아 있다. 1918년에는 인쇄용 구리 활자를 주조했다. 문자를 만든 쪽이 왕이었기에 보급 속도가 빨랐는데, 같은 이유로 왕이 사라지자 문자도 끊겼다. 이 대목은 2편에서 따로 다룬다.

오스마냐 문자, 1920년에서 1922년까지

소말리아 호비요 술탄국의 술탄 아들이자 시인이었던 오스만 유수프 케나디드(1889~1972)가 만들었다. 아랍 문자로 가족에게 편지를 쓰다가 자신이 소말리인이고 소말리어를 쓰는데 왜 소말리 글자가 없느냐고 자문한 데서 출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30자와 숫자 10개로 이루어지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glyph
[f]
glyph
[a]
glyph
[r]
glyph
[s]

오스마냐 문자 네 글자. 아랍 문자와도 라틴 문자와도 닮지 않게 설계되었다.

설계 의도가 정치적으로 명확하다. 케나디드는 아랍 문자가 이슬람과 외래 영향에, 라틴 문자가 이탈리아와 영국의 식민 지배에 묶여 있다고 보고 둘 다 물리쳤다. 어느 쪽도 닮지 않은 글자를 만든 것은 그 판단의 결과다. 이탈리아 식민 당국은 그가 학교에서 이 문자를 가르친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투옥했다.

영어 철자를 고치려던 데저렛

미국 유타에서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가 만든 문자다. 1847년부터 1854년 사이에 브리검 영이 이끄는 데저렛 대학 평의회가 개발했고, 글자 고안에는 조지 D. 와트가 가장 깊이 관여했다.

glyph
[d]
glyph
[e]
glyph
[s]
glyph
[i]

데저렛 문자 네 글자. 새 언어가 아닌 영어를 적으려고 만들어졌다.

목적이 다른 사례들과 다르다. 새 언어를 적으려는 시도가 아니었고, 영어 철자법을 소리대로 고치려는 시도였다. 영어는 철자와 발음이 심하게 어긋나는 언어여서 이민자들이 읽기를 배우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평의회는 처음에 피트먼 속기 계열 알파벳을 채택하려 했는데, 논의에 불참했던 윌러드 리처즈가 뒤늦게 보고 영어 알파벳과 너무 닮았다며 새로 만들자고 주장해 방향이 바뀌었다.

브리검 영이 이 문자에 붙인 설명에는 신학이 섞여 있다. 어떤 언어의 소리든 나타낼 수 있는 문자이며, 바벨탑 이전에 쓰였다는 순수한 언어로 부분적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적었다. 1854년부터 1869년까지 책, 신문, 거리 표지판, 우편에 쓰였고, 교회가 강하게 밀었는데도 오래가지 못했다.

20세기에 만들어져 지금도 퍼지는 두 문자

은코, 1949년

기니의 솔로마나 칸테(1922~1987)가 5년간의 실험 끝에 1949년 4월 14일 완성했다. 서아프리카 만딩어군을 적기 위한 문자이며, 마닝카어, 밤바라어, 줄라어, 만딩카어가 여기 든다. 만딩어 화자는 2000만 명 규모로 추산된다. 은코는 모든 만딩어에서 '내가 말한다'라는 뜻이다.

glyph
[n]
glyph
[k]
glyph
[o]
glyph
[t]

은코 문자 네 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고 글자가 아래쪽 선에서 이어진다.

만든 계기가 구체적으로 남아 있다. 칸테가 코트디부아르 부아케에 있을 때 카멜 므로와의 책에서 아프리카 언어들이 새소리 같아 옮겨 적을 수 없다고 한 대목을 보고 반박하려 했다는 일화가 은코 사용자들 사이에 전한다. 서아프리카에서 만딩어는 그전에도 아랍 문자를 변형한 아자미로 적혀 왔으므로, 아프리카에 고유 문자 전통이 없었다는 전제 자체가 틀린 것이었다.

구조에는 아랍 문자와 겹치는 대목이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고 글자가 밑선에서 이어진다. 아랍 문자와 달리 성조와 모음을 반드시 적어야 한다. 성조는 구별 부호로 표시한다. 자음 21자와 모음 6자로 27자가 기본이다. 쓰기 방향을 정할 때 칸테는 문자를 모르는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험했고,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을 고른 비율이 70에서 96퍼센트로 나왔다고 전한다.

아들람, 1989년

기니 은제레코레에서 열네 살 이브라히마 바리와 열 살 압둘라예 바리 형제가 만들었다. 풀라어 화자는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에 4000만 명이 넘는다.

glyph
[a]
glyph
[d]
glyph
[l]
glyph
[m]

아들람의 첫 네 글자. 이 넷의 이름 앞 글자를 따서 문자 이름을 지었다.

배경은 아버지의 일과 이어져 있다. 아버지가 마을에서 글을 읽을 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 사람들이 받은 편지를 들고 찾아왔다. 풀라어는 주로 아랍 문자로 적혔는데 실제 발음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해 읽기가 까다로웠다. 아버지가 바쁘면 두 소년이 대신 해독을 도왔다. 1989년 형제는 자기들이 더 잘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방에 들어가 글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6개월이 걸렸다.

이름은 첫 네 글자 A, D, L, M을 딴 것이자 민족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는 문자라는 뜻의 문장을 줄인 말이다. 28자이며 나중에 34자로 늘었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자음 글자 모양이 조음 위치와 방법을 반영하도록 설계되었는데, 이 원리는 훈민정음 제자해가 밝힌 것과 같은 발상이다. 두 형제가 훈민정음을 알고 만들었다는 근거는 없다. 같은 문제를 풀면 비슷한 해답이 나온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손으로 책을 만든 시기가 길었다. 글꼴도 디지털 자판도 없어서 책을 하나하나 손으로 썼고, 한 글자만 틀려도 쪽 전체를 다시 썼다. 자기들이 쓰는 것이 곧 표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2007년 두 사람 모두 미국으로 옮겼고, 이브라히마가 캘리그래피 수업을 듣다가 학회에서 유니코드 컨소시엄 편집자를 만난 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2014년 유니코드 기술위원회에서 논의되었고 2016년 유니코드 9.0에 들어갔다. 2018년 구글이 Noto Sans Adlam 글꼴과 안드로이드 자판을 만들었으며, 2023년 5월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협력해 개선판 글꼴을 마이크로소프트 365 전체에 넣었다.

표준에 들어갔다고 문제가 끝나지는 않았다. 2026년 공개된 분석 하나는 언어모델 4종의 토크나이저를 대상으로 삼아, 유니코드 등재 10년이 지난 시점에도 이들이 아들람을 바이트 단위로 처리해 라틴 문자 대비 20.9배의 토큰을 쓴다고 보고했다. 대상이 4종뿐이므로 업계 전체로 일반화되지는 않는다. 풀라어 사용자는 자기 문자로 쓴다는 이유만으로 20배의 비용을 치른다.

서아프리카에서 100년 넘게 이어진 문자 창제의 연쇄

앞에서 바이, 은코, 아들람을 따로 다뤘다. 이 셋은 서로 무관한 사건이 아니다. 서아프리카는 19세기 이후 세계에서 새 문자가 가장 많이 나온 지역이며, 그 문자들은 앞선 문자를 보고 만들어진 연쇄를 이룬다.

출발점이 바이 문자다. 1833년 무렵 라이베리아에서 나온 뒤 이 문자는 이웃 만데어군 사용 지역으로 퍼졌다. 그 영향을 받아 크펠레 문자, 멘데 키카쿠이, 로마 문자, 바사 바가 잇따라 나왔다. 서아프리카 문자 연구자들은 이 계열을 멘데 음절문자군으로 묶는다.

멘데 키카쿠이가 그중 가장 널리 쓰였다. 1917년경 시에라리온 남부 바리 추장령의 마카라는 마을에서 이슬람 학자 모하메드 투라이(1850년경~1923)가 만들었다. 첫 세 글자의 소리를 따서 키카쿠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42자였다. 투라이는 이 문자를 자기 쿠란 학생이자 조카이며 사위였던 쿠란코 출신 재단사 키시미 카마라에게 가르쳤고, 카마라는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150자가 넘는 음절 글자를 보태 200자 규모로 키웠다. 카마라는 1920년대부터 멘데 지역을 돌며 이 문자를 퍼뜨렸고 20세기 중반에 시에라리온 남부의 유력 추장이 되었다.

카마라가 창제자로 잘못 인용되는 일이 잦다. 실제 고안자는 투라이이고 카마라는 확장자이자 보급자였다. 창제 기록이 남은 문자에서도 누가 무엇을 했는지가 뒤섞이는 사례다.

키카쿠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고 단어 사이를 띄우지 않는다. 편지와 기록 관리, 법정 문서, 기독교와 이슬람 문헌 작성에 쓰였고 쿠란을 옮겨 적는 데도 쓰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사용이 절정에 이르렀다. 숫자 체계가 독특해서 10진법이 아니며, 10부터 1,000,000까지의 자릿수를 나타내는 결합 부호와 10대 수를 나타내는 별도 부호를 쓴다.

이 연쇄를 놓고 보면 1편 앞부분에서 다룬 체로키와 바이의 연결 가설이 다르게 읽힌다. 서아프리카 안에서 문자 창제가 전파되는 경로는 뚜렷하게 확인된다. 한 사람이 새 문자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문자 체계의 지식이 아니었다. 문자를 새로 만들 수 있다는 발상이었고, 그 발상은 이웃의 사례를 보는 것으로 전달된다.

선교사들이 만든 20세기 문자들

4세기 고트 문자부터 이어진 선교 목적의 문자 창제는 20세기에도 계속되었다. 중국 서남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폴라드 문자는 1904년 구이저우성 웨이닝현 스먼칸에서 만들어졌다. 유니코드 제안서는 창제자를 영국인 새뮤얼 폴라드와 묘족인 왕밍지, 존 장, 제임스 양, 그리고 한족 지식인 스티븐 리로 적는다. 선교사 한 사람의 단독 작업이 아니었고 현지인이 함께 참여한 공동 작업이었다는 기록이다.

착상의 경로도 확인된다. 폴라드는 젊은 시절 런던에서 일하며 피트먼 속기를 익혔을 가능성이 있고, 같은 감리교 선교사 제임스 에번스가 19세기에 오지브웨어와 크리어를 위해 만든 음절문자를 알고 있었다. 실제로 폴라드 문자는 캐나다 음절문자를 부모 체계로 삼는다고 분류된다. 캐나다에서 만들어진 문자가 60여 년 뒤 중국 서남부의 소수민족 문자로 이어졌다.

폴라드 문자는 지금도 쓰인다. 아흐마오어, 리포어, 쓰촨 묘어, 나수어를 적으며 유니코드 U+16F00부터 U+16F9F 구간에 들어가 있다. 같은 시기 미얀마 출신 카렌족 전도자 사라 바 토가 1915년경 만들고 선교사 제임스 프레이저가 다듬은 옛 리수 문자도 지금까지 쓰인다.

지금까지 나온 문자를 한 표에 놓으면

연도문자만든 사람적는 언어지금 상태
4세기 중반고트울필라고트어소멸
405아르메니아메스로프 마시토츠아르메니아어공식 문자
863경글라골키릴로스, 메토디오스고대 교회 슬라브어실사용 종료
1821체로키세쿼이아체로키어사용 중, 언어는 위기
1833경바이모몰루 두왈루 부켈레바이어사용 중
1840캐나다 음절문자제임스 에번스크리어, 이누크티투트 등누나부트 공용
1854데저렛조지 D. 와트 등영어1869년 이후 끊김
1896~1910바뭄이브라힘 은조야바뭄어1931년 끊김, 2007년 복원 시작
1904폴라드새뮤얼 폴라드 외 4인아흐마오어 등사용 중
1915경옛 리수사라 바 토, 제임스 프레이저리수어사용 중
1917경멘데 키카쿠이모하메드 투라이멘데어1940년대 쇠퇴, 소규모 잔존
1920~1922오스마냐오스만 유수프 케나디드소말리어1972년 이후 쇠퇴
1949은코솔로마나 칸테만딩어군사용 확대 중
1989아들람이브라히마·압둘라예 바리풀라어사용 확대 중

14건이다. 여기에 동아시아의 거란(920), 서하(1036), 여진(1119), 파스파(1269), 만주(1599), 소욤보(1686)를 더하면 20건이 된다. 훈민정음까지 넣으면 21건이며, 그중 창제자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창제자가 전해지는 것과 창제 기록이 남은 것은 다르다

지금까지 열한 가지를 늘어놓았다. 여기에 더해 서하 문자(1036년, 야리 인영), 파스파 문자(1269년, 팍파), 소욤보 문자(1686년, 자나바자르)도 창제자와 연도가 사료에 남아 있다. 이 셋은 3편에서 다룬다.

그러면 통념은 왜 이렇게 널리 퍼졌을까. 창제자 이름이 전해지는 문자와 창제 과정이 동시대 기록으로 확인되는 문자를 구분하지 않은 탓이 크다.

한자는 창힐이 만들었다고 전하고, 일본 가나는 구카이가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티베트 문자는 7세기 톤미 삼보타가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들은 후대에 붙은 전승이며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런 전설과 위의 열한 사례를 한데 놓고 보면 창제자가 기록된 문자가 드물어 보인다. 둘을 갈라 놓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위의 사례들은 창제 연도, 명령한 사람 또는 만든 사람, 목적이 문서로 확인된다.

또 하나는 비교 범위의 문제다. 라틴, 그리스, 아랍, 한자처럼 널리 쓰이는 큰 문자들은 대개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만들어졌고 창제자가 없다. 이 큰 문자들만 놓고 비교하면 한글이 유일해 보인다. 사용자 수가 적은 문자까지 넣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서아프리카 한 지역에서만 19세기 이후 바이, 은코, 아들람, 멘데 키카쿠이가 잇따라 나왔다.

그래서 한글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창제자 기록이 아니다. 창제 원리를 만든 쪽이 직접 설명한 동시대 문서가 함께 남았다는 사실이다. 위의 열한 사례 가운데 어느 것도 그런 문서를 남기지 않았다. 세쿼이아는 왜 그 모양을 골랐는지 적지 않았다. 부켈레는 꿈 이야기만 남겼다. 울필라와 마시토츠는 번역을 남겼지 설계 설명서를 남기지 않았다. 바리 형제는 설계 원리를 말로 설명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30년 뒤의 회고이지 창제 당시의 문서가 아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446년에 간행되었고, 자음 글자가 발음할 때의 혀와 입술과 목구멍 모양을 본떴다고 적었다. 문자를 만든 쪽이 왜 이 모양인가를 당대에 문서로 남긴 사례는 확인되는 범위에서 이것 하나다.

그 책이 1940년에야 발견되었다는 사실, 그전까지 한국인도 자기 문자의 제자 원리를 몰랐다는 사실은 4편에서 다룬다.

결론 — 통념을 버려야 한글의 자리가 정확해진다

창제자가 기록된 문자는 드물지 않다. 4세기 고트 문자에서 1989년 아들람까지 열한 가지를 시대순으로 확인했고, 여기에 동아시아 사례 셋을 더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아르메니아 문자는 1600년째 한 나라의 공식 문자이고, 캐나다 음절문자는 누나부트의 공용 문자이며, 은코와 아들람은 지금도 사용자가 늘고 있다. 고트 문자와 글라골 문자는 사라졌고 데저렛은 15년 만에 끊겼다.

창제 동기에도 몇 갈래가 있다. 성경 번역이 가장 오래된 갈래이고(고트, 아르메니아, 글라골, 캐나다 음절문자), 자기 말을 제대로 적겠다는 요구가 다음 갈래이며(체로키, 바이, 은코, 아들람), 식민 지배와 외래 문자에 맞선 정치적 선택이 또 한 갈래다(오스마냐, 바뭄, 은코). 데저렛은 철자 개혁이라는 점에서 혼자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한글을 설명할 때 창제자 기록을 근거로 삼는 방식은 사실과 어긋난다. 정확한 자리는 다른 곳이다. 창제 원리를 밝힌 동시대 해설서가 함께 전하고, 그 설명대로 글자 모양이 소리의 성질을 반영한다.

남는 물음이 있다. 위 열한 사례 가운데 절반은 살아남았고 절반은 사라지거나 끊겼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는가. 설계의 정교함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데저렛은 음소 대응이 정확했는데 15년을 못 갔고, 바이 문자는 꿈에서 나왔다는 설계인데 200년째 쓰인다. 다음 글에서 그 기준을 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