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에는 전체를 다스리는 정부가 없었다. 그런데도 도시들 사이의 분쟁에 중재가 들어갔고, 왕들은 부채를 사면하고 법을 선포했다. 이 질서를 떠받친 것은 신의 권위를 빌린 승인이었으며, 우리가 법전이라 부르는 문서들은 법정에서 집행된 법률과는 성격이 달랐다.
기원전 3천년기의 남부 메소포타미아에는 여러 도시 국가가 있었다. 우르, 우루크, 라가시, 움마, 키시, 니푸르 같은 도시들이 각자 성벽과 신전과 지배자를 갖고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전체를 아우르는 정부는 없었다.
그런데 이 도시들은 서로 무관하게 지내지 않았다. 같은 신들을 섬겼고, 같은 문자를 썼으며, 국경 분쟁이 생기면 제3의 도시가 중재에 들어갔다. 한 왕이 즉위하면서 백성의 빚을 무효로 선포하기도 했고, 판례 형식으로 정리된 법 모음집을 남기기도 했다.
강제력을 행사할 상위 기구가 없는 상태에서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규범은 실제로 어떤 구속력을 가졌는가. 이 글은 남아 있는 문서를 따라 그 두 물음에 답한다.
국가 사이의 전쟁 가운데 기록이 가장 잘 남은 최초 사례가 라가시와 움마의 국경 분쟁이다. 초기 왕조 3기, 곧 기원전 2600년에서 2350년 사이에 벌어졌다. 이 시기는 지역이 여러 도시 국가로 나뉘어 있던 때였다.
분쟁의 대상은 구에데나라는 경작지였다. 가로 10킬로미터 세로 4킬로미터 정도의 계곡이고 티그리스강 물로 관개되었다. 이 지역의 농업은 강수량이 적어 관개에 전적으로 의존했고, 수로와 제방을 유지하려면 인접 공동체 사이의 협력이 필요했다. 경작지 하나를 두고 몇 세대에 걸쳐 싸울 이유가 여기 있었다.
사건의 경위는 라가시 쪽 비문으로 재구성된다. 조지프 쿠퍼가 1983년에 낸 『Reconstructing History from Ancient Inscriptions: The Lagash-Umma Border Conflict』가 이 자료를 정리한 표준 연구다. 쿠퍼는 라가시의 지배자 에안나툼이 구에데나를 두고 움마와 적어도 두 차례 전쟁을 치렀다고 본다. 첫 번째는 그의 치세 초기이고 그의 거의 모든 비문에 언급되며, 두 번째는 치세 후반이고 독수리 비석에 기념되었다.
명문에서 에안나툼은 움마의 사람이라고만 지칭된 인물이 메실림이 세운 국경 협정을 깨고 라가시 영토를 불법으로 빼앗았다고 주장한다. 자신은 라가시의 신 닌기르수가 그 신의 재산을 움마가 점거한 상태를 해결하라고 만든 존재라는 서술도 나온다.
전후 처리 방식이 이 사건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이다. 에안나툼은 움마의 지배자 에나칼레와 땅을 나누고 합의된 경계를 따라 무인 지대를 설정했다. 자신의 경계비를 세웠고, 훼손되어 있던 메실림의 비를 복원했다. 경계 둔덕 위에 엔릴과 닌후르사가와 닌기르수와 우투를 위한 단을 지었다. 그리고 움마의 지배자에게 국경을 넘지 않겠다는 서약을 신들 앞에서 하게 했다.
규모도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움마 측 사망자는 100명에서 200명 정도로 추정되며 이는 그들 군대의 대부분이었고, 라가시의 손실은 적었다. 도시 국가 사이의 전쟁이 어떤 규모였는지를 보여 주는 수치다.
이 사건에서 제3자로 등장하는 인물이 키시의 지배자 메실림이다. 그는 라가시와 움마보다 북쪽에 있던 키시의 왕이었고,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지역의 도시 국가들이 이루는 느슨한 연합 안에서 관례적인 패권 지위를 갖고 있었다. 두 도시의 협정은 그의 권위 아래 외부 중재자의 형식으로 체결되었다.
메실림이 군대를 동원해 두 도시를 굴복시켰다는 기록은 없다. 그의 개입은 지위에 근거했고, 합의를 구속한 것은 신들 앞에서 한 서약이었다. 협정 위반은 계약 위반이자 신에 대한 서약 위반으로 규정되었다.
그의 권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시간의 길이로 확인된다. 쿠퍼가 정리한 대로, 메실림의 이름은 그 사건이 있고 한 세기가 지난 뒤에 작성된 비문에서도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남았다. 라가시의 후대 지배자 엔메테나가 원뿔형 봉헌물에 남긴 명문에도 메실림의 비를 복원했다는 서술이 이어진다.
같은 구조가 더 큰 규모에서 작동한 사례가 니푸르다.
니푸르는 군사적으로 강한 도시가 아니었다. 남부를 제패하려고 다툰 기록도 없다. 그런데 이 도시에는 수메르 신들의 우두머리인 엔릴의 신전 에쿠르가 있었고, 남부 전체를 장악한 지배자는 이곳에서 승인을 받아야 정통성을 얻었다.
승인의 실제 내용은 봉헌과 건축이었다. 지배자는 니푸르의 엔릴 신전에 봉헌물을 바치고 건물을 보수하며 그 사실을 비문에 남겼다. 이 행위가 남부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는 형식이 되었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강제력과 정통성의 분리다. 실제 힘을 가진 쪽은 정복 전쟁을 수행한 도시였고, 그 힘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절차는 힘이 없는 도시가 맡았다. 두 기능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어느 도시가 패권을 잡든 같은 형식을 거쳐야 했다.
이 관념이 문서로 정리된 것이 수메르 왕명록이다. 사본이 16종 알려져 있고 모두 수메르어로 적혔다. 고대에는 첫 낱말을 따라 남루갈(nam-lugal), 곧 왕권이라 불렸다. 기원전 3천년기 후반 우르 제3왕조 시기에 작성되어 이후 갱신된 것으로 보이며, 고바빌로니아 시기 이전의 판본으로는 아답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우르 제3왕조 판본 하나가 알려져 있다.
필사자들은 이 문서를 다음 두 행으로 시작했다.
nam-lugal an-ta e11-de3-a-ba / eridu{ki} nam-lugal-la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왔을 때, 왕권은 에리두에 있었다.
수메르 왕명록 1~2행. 교정본은 쐐기문자 전자도서관 사업(CDLI) 합성본 Q000371. 옮김은 필자.
이어지는 서술은 왕권이 한 도시에 머물다가 그 도시가 무너지면 다른 도시로 옮겨 간다는 형식을 반복한다. 에리두가 무너지자 왕권이 바드티비라로 옮겨 갔고, 바드티비라가 무너지자 라라크로 옮겨 갔다는 식이다. 홍수 이전의 왕들에게는 실제일 수 없는 재위 기간이 붙는다. 알룰림이 28,800년, 알랄가르가 36,000년이며, 다섯 도시에서 여덟 왕이 합쳐 241,200년을 다스린 뒤 홍수가 휩쓸었다고 적는다.
이 문서가 사실 기록이 아니라는 점은 오래전에 확인되었다. 실제로는 여러 도시가 동시에 병립했고 서로 싸웠다. 그러면 이 문서는 무엇인가.
피오트르 미할로프스키가 1983년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3권에 실은 논문 「History as Charter: Some Observations on the Sumerian King List」가 이 물음을 다뤘다. 제목의 charter는 헌장이나 특허장을 뜻하며, 과거의 서술이 현재의 권리를 근거 짓는 문서로 기능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연구의 초점이 이 논문 이후 이동했다. 20세기 초에 이 문서가 처음 간행되었을 때는 창세기의 연대기를 검증하고 초기 메소포타미아 정치사를 재구성할 자료로 높이 평가되었다. 지금은 이 문서가 작성되고 편집되던 시점에 어떤 기능을 했는지에 연구가 집중된다. 왕권 또는 패권이 한 시점에 한 도시에서만, 그것도 한정된 기간만 행사될 수 있다는 정치적 교의를 퍼뜨리기 위해 작성되었다는 것이 지금의 평가이며, 이 교의를 이신 왕조 초기의 지배자들이 이용했다는 지적이 따라붙는다.
실물 자료와의 관계도 정리되었다. 주세페 마르케시가 2015년 『History & Philology』(ARCANE 3권)에 쓴 초기 왕조 시대 상대 연대기는 왕명록의 숫자를 쓰지 않는다. 그 역사적 가치가 논쟁 중이기 때문이며, 대신 기념 비문과 행정 문서, 계보와 동기화 정보, 고문자학과 언어학 분석, 그리고 고고학적 맥락을 근거로 삼는다.
도시 내부의 질서는 다른 문서에 남아 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가장 이른 개혁 조치를 남긴 인물은 라가시의 지배자 우루카기나다. 우루이님기나로도 읽는다.
그는 기원전 2350년에서 2340년 무렵 라가시 제1왕조의 마지막 독립 왕이었고, 전임자 루갈안다의 행정을 뒤엎고 집권했다. 개혁 내용은 점토 봉헌 원뿔에 새겨졌다. 문서는 먼저 이전 통치에서 있었던 폐단을 열거한다. 관리들이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자의 재산을 빼앗았다는 내용이다. 그다음에 시정 조치가 나온다. 부채 사면, 장례비와 배 사용료의 상한 설정, 유력자가 차지한 신전 토지의 반환이 포함된다.
이 문서에 ama-gi라는 낱말이 나온다. 아마기 또는 아마르기로 읽으며, ama는 어머니, gi는 돌아감을 뜻해 문자 그대로는 어머니에게 돌아감이다.
적용 범위가 좁고 구체적이다. 대상은 보리나 은을 빌리면서 담보로 잡힌 자국민 채무 노예였다. 전쟁 포로나 교역으로 들어온 외국인 노예는 제외되었다. 조치의 내용은 개인을 원래의 가족 관계로 되돌려 신전이나 유력자에게 넘어가던 토지와 노동의 이전을 멈추는 것이었다.
이 낱말을 기록에 남은 최초의 자유 개념으로 소개하는 서술이 많다. 그 소개에는 조건이 붙어야 한다. 이 용어의 정확한 성격은 분명하지 않으며, 개혁이 신들이 정한 본래의 사회 질서로 되돌아가는 일이라는 관념에 비추면 어머니에게 돌아감이라는 번역이 들어맞는다는 설명이 제출되어 있다. 개인의 권리를 선언한 문장과 원상 회복을 선포한 문장은 구조가 다르고, 이 낱말은 뒤쪽에 속한다.
개혁의 수명은 짧았다. 10년이 지나지 않아 우루카기나는 움마의 지배자 루갈자게시에게 무너졌고 라가시는 정복되었다. 우루카기나의 개혁 문서 자체는 남았지만 조치의 효력은 그의 몰락과 함께 끝났다.
판례 형식으로 정리된 법 모음집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 우르남무 법전이다. 기원전 2100년에서 2050년 사이의 것으로 보며, 함무라비 법전보다 300년가량 앞선다.
발견과 복원의 과정은 두 단계였다. 첫 사본은 니푸르에서 두 조각으로 나왔고 새뮤얼 크레이머가 1952년에 번역했다. 보존 상태가 나빠 서문과 다섯 개 조항만 판독되었다. 이후 우르에서 나온 점토판이 1965년에 번역되면서 전체 57개 조항 가운데 약 40개가 복원되었다. 시파르에서 나온 또 다른 사본에는 약간의 이문(異文)이 있다.
서문은 왕권의 유래를 밝히는 형식으로 시작한다. 안과 엔릴이 우르의 왕권을 난나에게 넘긴 뒤, 우르남무가 난나의 힘과 우투의 참된 말에 따라 땅에 공정을 세웠다는 서술이다. 여기에 행정 표준화의 내용이 이어진다. 신전의 월 지출을 보리 90구르, 양 30마리, 버터 30실라로 정하고, 청동 실라 용기를 만들고, 1미나 추와 은 1셰켈의 무게 기준을 표준화했다는 서술이 나온다. 사회적 약자 보호도 명시된다. 고아가 부자에게 넘겨지지 않았고 과부가 권력자에게 넘겨지지 않았다는 문장이다.
조항의 형식은 조건문이다. 각 조항이 만약을 뜻하는 tukum-bi로 시작하고 결과가 뒤따른다. 다루는 범위는 살인, 상해, 성범죄, 혼인, 이혼, 상속, 재산 분쟁, 절도, 무고에 걸친다.
처벌 방식에 특징이 있다. 살인 같은 중범죄에는 사형이 따랐지만 다수의 위반은 은으로 내는 벌금으로 처리되었다. 도구로 남의 발을 절단하면 은 10셰켈, 무기로 뼈를 부러뜨리면 은 1미나, 게슈푸라는 도구로 코를 자르면 은 3분의 2미나를 물게 했다.
함무라비 법전과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우르남무 법전은 재산이나 지위와 무관하게 자유민에게 동일한 형벌을 적용해 계층 구분이 거의 없다. 함무라비 법전은 아윌룸과 무슈케눔과 와르둠, 곧 상층 자유민과 평민과 노예를 명시적으로 구별하고 상위자에 대한 범죄를 더 무겁게 다룬다. 시간상 먼저인 쪽이 더 평등한 형식을 갖고 있다.
저자 문제는 미결이다. 왕의 이름이 들어갈 서문 첫머리가 잘 보존되지 않았다. 마사 로스가 『Law Collections from Mesopotamia and Asia Minor』에서 정리한 대로, 현재 통설은 우르의 왕 우르남무 또는 그 아들이자 후계자인 슐기 가운데 한쪽으로 본다. 서문에 서술된 역사적 사건 가운데 일부가 우르남무의 치세 안에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 슐기 설의 근거이고, 슐기가 행정과 사법 개혁으로 알려진 인물이라는 점도 덧붙는다. 논거의 정리는 피오트르 미할로프스키와 크리스토퍼 워커가 1989년에 낸 글에 있다.
지금까지의 서술은 익숙한 그림을 따른다. 왕이 법을 선포하고 신하와 백성이 그것을 따랐다는 그림이다. 이 그림이 무너지는 지점이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는 실제 재판 기록이 수천 점 단위로 남아 있다. 계약서, 증서, 채권, 영수증, 회계 문서와 함께 법정에서 판사들이 내린 판결이 대량으로 전한다. 그런데 이 판결문들이 법전의 조항을 인용해 판단의 근거로 삼은 사례가 확인되지 않는다.
이 관찰에서 출발한 연구가 둘이다. 프리츠 라인하르트 크라우스가 1960년 『Genava』 8권에 실은 논문 「Ein zentrales Problem des altmesopotamischen Rechts: Was ist der Codex Hammurabi?」와, 장 보테로가 1982년 『Annali della Scuola Normale Superiore di Pisa』 12권에 실은 논문 「Le 'Code' de Hammurabi」다. 보테로의 글은 1987년 『Mésopotamie: L'écriture, la raison et les dieux』에 수록되었고, 자이나브 바흐라니와 마르크 판 데 미룹이 1992년에 영역했다. 두 논문은 이후 이 분야의 연구 방향을 바꿔 놓았다.
두 사람은 이 문서들이 입법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체계적인 법령집이 아니고, 그 조항들이 바빌로니아 사회의 규칙이었다거나 통치의 근거였다는 증거도 없다. 바빌로니아 사회에는 다른 종류의 법령 문서가 따로 있었고, 일상적인 법 실무 문서에서 인용되는 것은 그쪽이다.
그러면 이 문서들이 있던 자리는 어디인가. 서기 학생들과 학자들이 메소포타미아 문헌을 길러 내던 자리다. 정의에 관한 고대의 학문적 사변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그 사변을 왕의 수사(修辭)에 동원한 사례가 함무라비라는 것이 이 해석의 결론이다.
물리적 조건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함무라비의 석비는 높이가 225센티미터이고, 명문은 당시 서기들이 일상적으로 쓰지 않던 고풍스러운 서체로 적혔다. 대중이 읽을 수 있는 문서가 아니었다.
우르남무 법전에도 같은 문제가 있다. 니푸르와 이스탄불에 보관된 점토판에 약 40개 조항이 조건문 형식으로 남아 있을 뿐이고, 법정에서 집행되었다는 직접 증거는 없다. 이 때문에 이 문서를 구속력 있는 법전 대신 모범 사례집이나 표준 왕실 포고로 보는 견해가 제출되어 있다. 공개 전시의 흔적이 없다는 사실도 이 견해의 근거가 된다. 우르남무 법전은 점토판에만 적혔고, 함무라비 법전처럼 광장에 세운 석비로 공표되지 않았다.
집행되지 않았다고 해서 기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능의 종류가 달랐다.
우르남무 법전의 목적은 실용적이었다. 구티인의 지배가 끝난 뒤의 혼란 속에서 우르남무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사회 질서의 회복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서문이 왕권의 신적 유래를 밝히고, 도량형 표준화를 나열하고, 약자 보호를 명시하는 구성은 이 목적에 맞춰져 있다.
우루카기나의 개혁 문서도 같은 구조다. 전임자의 폐단을 열거하고 자신의 시정 조치를 나열하는 형식은 새 지배자가 왜 정당한지를 서술하는 형식이다. 실제 부채 사면이 집행되었을 가능성은 높다. 그래도 문서가 남긴 것은 집행 기록이 아닌 선포문이다.
왕명록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왕조 목록을 늘어놓아 현재의 지배자가 그 계보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근거 짓는다. 미할로프스키가 헌장이라는 표현으로 가리킨 기능이 이것이다.
세 문서가 같은 일을 한다. 메실림의 중재가 지위에 근거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문서들도 강제력 대신 승인을 생산했다.
수메르 도시 국가 체제에는 전체를 다스리는 기구가 없었다. 그 조건에서 질서를 만들어 낸 장치가 셋 확인된다. 신들 앞에서 한 서약으로 구속된 도시 간 협정, 힘이 없는 도시가 발급하는 패권의 정통성, 그리고 왕이 선포한 규범 문서다.
셋 다 강제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메실림은 군대로 라가시와 움마를 굴복시키지 않았고, 니푸르는 어느 도시도 정복하지 않았으며, 우르남무 법전은 법정에서 인용되지 않았다. 작동한 것은 신의 권위를 빌린 승인이었고, 그 승인을 어기는 행위가 신에 대한 위반으로 규정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정리는 익숙한 서술 하나를 수정하게 한다. 함무라비 법전을 최초의 성문법으로, 우르남무 법전을 그보다 이른 성문법으로 소개하는 서술은 법전이라는 낱말에 현대의 뜻을 넣어 읽은 결과다. 크라우스와 보테로 이후 이 문서들은 법령이 아니라 정의에 관한 사변과 왕의 자기 서술이 결합한 문헌으로 다뤄진다. 우르남무 법전이 함무라비 법전보다 계층 구분이 적다는 사실도 사회가 더 평등했다는 증거로 곧장 읽을 수 없다. 두 문서가 다른 시기에 다른 목적으로 쓰인 왕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남는 물음은 규범의 실제 내용이다. 법전이 집행 법률이 아니었다면 실제 재판의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남아 있는 판결문들은 계약과 관행과 판사의 판단으로 사건을 처리하며, 그 배후의 규범 체계는 아직 충분히 재구성되지 않았다. 법전 연구가 왕권 연구로 이동한 뒤에 비어 있는 자리가 이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