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obhan.me

수메르인의 자칭과 수메르어의 재발견 — 이웃이 붙인 이름과 이웃의 언어로 복원된 문명

수메르인은 자신을 수메르인이라 부른 적이 없다. 그 이름은 이웃한 아카드인의 말이고, 그 언어의 해독도 아카드어 대역본에 의존했으며, 이 민족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도 유물이 아닌 문자의 내부 모순에서 추론되었다. 복원의 모든 단계가 이웃을 거쳤고, 그래서 40년 동안 이 민족의 실재가 부정당하는 일도 가능했다.

2026년 9월 12일

인류 최초의 도시 문명을 가리킬 때 우리는 수메르라는 이름을 쓴다. 이 이름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그렇게 불린 사람들은 자기를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

수메르라는 말은 아카드어 슈메루(šumeru)에서 왔다. 아카드인은 수메르인보다 북쪽에 살던 셈어계 주민이고, 나중에 사르곤이 남부를 정복하면서 이 지역의 지배자가 된다. 그들이 남부의 비(非)셈어계 주민을 부르던 명칭이 지금 학계의 표준 용어로 굳었다.

셈어와 비셈어 셈어는 아카드어, 히브리어, 아람어, 아랍어가 속한 어족의 이름이다. 자음 세 개로 이루어진 어근에 모음을 끼워 넣어 단어를 만드는 구조가 공통된다. 수메르어는 이 구조를 전혀 쓰지 않고,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어족에도 속하지 않는다. 아카드인과 수메르인은 같은 땅에서 수백 년을 함께 살면서 서로의 언어에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두 언어의 계통은 무관하다.

이웃에게서 온 것은 이름만이 아니었다. 수메르어를 오늘날 읽을 수 있는 것도 아카드어 덕분이고, 이 민족이 실재했다는 주장 자체가 아카드어 문서를 분석하다 나온 추론이었다. 그 추론이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기까지 40년 넘는 논쟁이 있었고, 그동안 유력한 반대편은 수메르어라는 언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그들의 자칭이 무엇이었는지에서 출발해, 그 자칭이 어떤 경로로 우리에게 도달했는지를 따라간다.

땅을 부른 이름 — 켕기르

수메르인은 자기 비문에서 땅을 ki-en-gi 또는 ki-en-gi-r라고 적었다. 쐐기문자로는 𒆠𒂗𒄀이고, 켕기르로 읽는다.

글자를 하나씩 뜯으면 ki는 땅이나 장소, en은 주인, gi는 고귀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표준적인 번역은 고귀한 주인들의 땅이다. 이 풀이는 학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지만 확정되지 않았다.

다른 독법이 둘 더 있다. 윌리엄 스티빙은 『Ancient Near Eastern History and Culture』에서 이 이름을 광휘의 주인들의 땅으로 옮겼다. 나이절 포스트게이트는 en을 혀와 말을 뜻하는 eme가 자음 동화를 거쳐 변한 형태로 보고, 전체를 수메르 말의 땅으로 읽었다. 세 번역이 서로 다른 원인은 en이라는 한 음절이 수메르어에서 여러 값을 갖는다는 사정에 있다. 이 다의성 문제가 뒤에 나올 논쟁 전체의 출발점이 된다.

ki-en-gi가 처음부터 남부 전역을 가리켰는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토르킬 야콥센은 1957년 『Zeitschrift für Assyriologie』에 실은 논문 「Early Political Development in Mesopotamia」에서 파라 출토 행정 문서를 근거로, 초기 왕조 2기와 3기 사이에 우루크, 아답, 니푸르, 라가시, 슈룹팍, 움마 여섯 도시가 군사 동맹을 맺었다고 보고 이를 켕기르 동맹이라 불렀다.

이에 대해 나카하라 요모쿠로는 1964년 『史林』 47권 1호에 실은 논문 「ケンギル都市同盟について」에서 다른 해석을 냈다. 야콥센이 파라 문서의 EN.GI.KI를 남부 전역을 뜻하는 말로 읽은 반면, 나카하라는 그것을 동맹 본부가 있던 장소로 읽었고, 그 지명이 전역을 가리키는 말로 확장된 시점을 초기 왕조 3기 중엽으로 추정했다. 야콥센이 쓰지 않은 파라와 우르의 행정 문서를 추가로 검토한 결과였다.

두 해석의 차이는 사소하지 않다. 야콥센의 독법이 맞으면 수메르인에게는 처음부터 남부 전체를 아우르는 지리적 자기 인식이 있었던 것이 된다. 나카하라의 독법이 맞으면 그 인식은 나중에 생겨난 것이고, 초기의 자기 인식 단위는 개별 도시와 그들이 맺은 동맹까지였던 것이 된다.

사람을 부른 이름 — 검은 머리

사람을 가리킬 때 쓴 표현은 saĝ-gíg-ga다. 머리를 뜻하는 글자와 검다를 뜻하는 글자를 합쳤고, 길게 쓰면 ùĝ saĝ gíg ga가 된다. 뜻은 검은 머리 사람들이다.

이 표현은 문학 작품에도 행정 문서에도 나온다. 수메르어 홍수 설화의 첫 부분이 그 예다.

an den-lil2 den-ki dnin-hur-saj-ja2-ke4 / saj gig2-ga mu-un-dim2-ec-a-ba

안과 엔릴과 엔키와 닌후르사가가 검은 머리 사람들을 빚고 난 뒤에

수메르어 홍수 설화, 단편 A 11~12행. 교정본은 옥스퍼드 수메르 문학 전자 텍스트 총서(ETCSL) 1.7.4. 옮김은 필자.

왕의 칭호에도 들어간다. 우르 제3왕조의 왕 슐기는 자신을 사방의 왕이자 검은 머리 사람들의 목자라고 칭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자칭이 타칭으로도 쓰였다는 사실이다. 아카드인은 수메르인을 같은 뜻의 셈어 표현 찰마트 카카디(ṣalmāt qaqqadi)로 불렀다. 자기들이 쓰던 표현이 정복자의 언어로 번역되어 그대로 유지된 셈이며, 이것은 두 집단이 서로의 어휘를 얼마나 밀접하게 옮겨 썼는지를 보여 준다.

이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두고도 해석이 나뉜다. 문자 그대로 머리카락 색을 가리킨 인종적 자기 규정으로 읽을 수도 있고, 신에게 속한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관용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다. 아카드인 자신도 같은 표현으로 수메르인을 불렀고 나중에는 메소포타미아 주민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확장되었으므로, 좁은 인종 표지로 보기는 어렵다.

말을 부른 이름 — 에메기르

자기 언어를 가리킬 때 쓴 이름은 eme-gir 또는 eme-gi다. 쐐기문자로 𒅴𒂠 또는 𒅴𒄀이며, 에메기르로 읽는다. eme는 혀와 말, gir는 토박이라는 뜻이어서 전체 의미는 토박이 말이다. eme-ki-en-gi-ra, 곧 켕기르의 말이라는 긴 형태도 쓰였다.

아카드인은 이 언어를 리샨 슈메리(lišān Šumeri), 곧 수메르의 말이라고 불렀다. 여기서도 자칭과 타칭이 갈라진다.

수메르어에는 에메살이라는 별도의 변종도 있었다. 종교 찬가와 여성 화자의 대사에 쓰였고, 같은 단어를 다른 음으로 적는 규칙적인 대응 관계를 보인다. 에메기르가 표준형이고 에메살이 특정 용도의 변종이라는 관계가 문헌에서 확인된다.

정체성의 실제 단위는 도시였다

여기까지 보면 땅과 사람과 말에 각각 자칭이 있었으므로 통합된 자기 인식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수메르에는 통일 국가가 없었다. 우르, 우루크, 라가시, 움마, 니푸르, 키시 같은 도시 국가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운영되었고 서로 전쟁했다. 도시마다 수호신이 있었고 땅은 형식상 그 신의 소유였다. 한 사람의 일차 소속은 자기가 사는 도시와 그 도시의 신이었다.

모겐스 헤르만 한센이 코펜하겐 폴리스 센터의 연구를 정리한 『Polis: An Introduction to the Ancient Greek City-State』(2006)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를 기준점으로 삼아 세계사에서 확인되는 도시 국가 문화 37개를 비교한 조사이며,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수메르를 지목하고, 우루크와 우르와 라가시를 대표 사례로 든다. 이 체제가 유지된 기간을 기원전 3100년 무렵부터 사르곤이 수메르를 정복한 기원전 2350년 무렵까지로 잡고, 아카드 왕조가 무너진 기원전 2150년 무렵에 도시 국가가 잠시 되살아났다가 우르 제3왕조가 이들을 왕국 안의 속주로 바꾸었다고 서술한다.

노먼 요피가 『Paléorient』 2000년호에 쓴 서평은 이 체제의 특징을 하나 더 짚는다. 정치적 현실은 도시 국가들의 독립이었지만 문화적 이상은 한 도시가 나머지 전체를 다스리는 것이었고, 둘을 함께 보아야 이 문명의 성격이 잡힌다는 지적이다. 수메르 왕명록에 적힌 도시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나머지 전부를 다스린 적이 없다는 사실보다, 한 도시만이 다스려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요피의 서술이다.

이 구도에서 켕기르라는 이름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국적의 이름이 아닌 문화권의 이름이었다. 같은 신들을 섬기고 같은 문자를 쓰고 같은 말을 하는 도시들이 모인 범위를 가리키는 말이었지, 그 범위 전체를 다스리는 정치체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 문명은 발굴이 아니라 문자의 모순에서 추론되었다

수메르인이 잊힌 기간은 2천 년이 넘는다. 수메르어는 기원전 2000년 무렵 일상어로서 쓰이지 않게 되었고, 문어로서의 사용도 기원후 1세기에 끊겼다. 그 뒤로 이 민족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재발견의 경로는 고고학이 아닌 문헌학이었다. 19세기 중반 유럽 학자들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쐐기문자를 해독하는 중이었다. 1842년 프랑스 영사 폴에밀 보타가 코르사바드에서 사르곤 2세의 궁전을 발굴했고, 이어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가 님루드와 니네베에서 대량의 명문을 찾아냈다. 해독 대상이 쌓였다.

해독의 공식 확인은 1857년에 이루어졌다. 런던의 왕립아시아학회가 시험을 주관해 쥘 오페르, 헨리 롤린슨, 에드워드 힝크스, 윌리엄 탤벗 네 사람에게 같은 왕실 비문을 따로 해독하게 했고, 결과를 대조해 같은 해 5월 25일 아카드어 쐐기문자의 해독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해독된 아카드어 문서 안에는 아카드어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문자 체계의 구조 자체가 셈어에 맞지 않았고, 셈어가 아닌 언어로 적힌 구절이 아카드어 번역과 나란히 배치된 문서들이 나왔다. 191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Sumer and Sumerian」 항목은 이 상황을 이렇게 정리한다. 셈어가 아닌 어법이 어떤 경우에는 셈어 번역과 행을 번갈아 가며, 다른 경우에는 셈어 번역과 단을 나란히 두고, 또 다른 경우에는 셈어 대응 없이 단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적는다.

오페르는 이 문자 체계가 원래 셈어가 아닌 언어를 쓰는 집단이 고안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처음 이 언어를 칼도스키타이어라 부르고 우랄알타이 계통으로 추정했으며, 1869년에 이름을 수메르어로 바꿨다. 투란어족으로 분류한 그의 견해는 나중에 기각되었지만, 수메르어가 별개의 언어이고 문자의 기원이 그 언어에 있다는 판단은 이후 연구로 확인되었다.

즉 이 민족은 유적에서 나오지 않았다. 문자 체계가 자신이 표기하는 언어와 어긋난다는 관찰에서 존재하지 않던 집단이 추론되었고, 발굴은 나중에 그 추론을 확인했다.

40년 동안 수메르어는 언어가 아니라고 여겨졌다

추론에서 출발한 주장은 반박에도 취약하다. 실제로 오페르의 명명 직후부터 정면 반론이 나왔다.

파리의 동양학자 조제프 알레비는 1874년부터 수메르어가 자연 언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쐐기문자의 기호 하나가 갖는 음가와 뜻이 지나치게 많고 서로 무관해 보이는데, 자연적으로 발달한 언어에서는 이런 어휘 목록이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수메르어라 불리는 것은 셈어를 쓰는 바빌로니아 사제 집단이 자기들 목적에 맞게 만들어 낸 인위적인 표기 체계, 곧 일종의 암호다. 알레비는 1900년에 『Le Sumérisme et l'histoire babylonienne』을 내어 이 입장을 정리했다.

이 주장이 힘을 얻은 것은 근거가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1911년판 브리태니커의 같은 항목은 브뤼노브의 기호 목록을 살펴보면 같은 기호가 몇 쪽에 걸친 뜻을 갖고 그중 다수가 서로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인다는 사실이 확인된다고 적는다. 첫인상만 놓고 보면 알레비의 결론이 자연스러웠다.

논쟁은 10년을 넘겼고 학계를 둘로 나누었다. 당대 최고의 아시리아학자로 꼽히던 프리드리히 델리치가 1885년부터 알레비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12년이 지난 1897년에야 이를 철회했다.

알레비 쪽이 무너진 근거는 언어 내부의 규칙성이었다. 1911년판 브리태니커는 수메르어가 교착어를 바탕으로 삼았음을 보여 주는 증거를 여섯 갈래로 정리하면서, 그 첫째로 음운 변이를 든다. 임의로 만들어 낸 체계에서는 나올 수 없는 규칙적인 모음 교체가 관찰된다는 것이다. 같은 뜻에 ga와 ge가 함께 쓰이고, i가 e로 바뀌어 di와 de가 대응하는 식이다. 발명된 암호에는 이런 변이가 생길 이유가 없다.

여기에 실물 자료가 쌓였다. 프랑수아 튀로당쟁은 1898년부터 1938년까지 루브르에서 수메르어 문헌을 간행했고, 1905년에 『Les inscriptions de Sumer et d'Akkad』를 냈다. 샤를 포시는 1905년부터 1907년까지 『Contribution au Dictionnaire sumérien-assyrien』을 펴냈다. 해독 가능한 텍스트가 늘어나면서 암호설은 설명력을 잃었다.

이 논쟁이 왜 그토록 오래갔는지에 대해서는 언어학 바깥의 설명도 제출되어 있다. 이 논쟁은 학계에서 수메르 문제(Sumerian problem)라 불렸는데, 실제 쟁점의 상당 부분이 최초의 문자 체계를 발명한 것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이었고, 여기에 당시의 인종 관념이 개입했다. 언어와 종교와 문화를 하나의 본질로 묶는 사고가 전제되어 있었고, 한쪽은 이 발명이 셈족의 것이 아님을 입증하려 했고 다른 쪽은 고대 바빌로니아에 셈족만 살았으므로 발명자도 셈족일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알레비는 반(反)수메르파의 지도자였다.

수메르인이 실재했는가라는 물음이 40년 넘게 미결로 남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증거는 이미 충분했다. 증거를 해석하는 틀이 언어학의 물음이 아닌 민족의 우선순위를 다투는 물음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해독은 지금도 아카드어를 경유한다

수메르어가 언어라는 사실이 확정된 뒤에도 그것을 읽는 방법은 바뀌지 않았다. 지금도 수메르어 해독은 아카드어에 의존한다.

이유는 수메르어가 고립어이기 때문이다. 친척 언어가 하나도 없으므로 비교 언어학의 방법을 쓸 수 없다. 아카드어는 셈어족에 속해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통해 검증할 수 있지만, 수메르어에는 그런 외부 통로가 없다.

대신 고대인이 남긴 학습 자료가 있다. 기원전 2천년기 중반부터 수메르어 문학 텍스트는 대개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를 나란히 적은 대역본으로 필사되었다. 신아시리아 시기가 되면 서기들은 아카드어 아시리아 방언을 모어로 쓰면서 수메르어를 외국어로 배워야 했고, 그래서 어휘 목록과 문법서와 대역 텍스트를 만들어 썼다. 지금 우리가 수메르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훨씬 잘 알려진 아카드어를 통해 접근하게 해 주는 이 고대의 학습 도구 덕분이다. 옥스퍼드의 오락(ORACC) 프로젝트가 님루드 자료를 정리하며 같은 사정을 지적한다.

수메르 속담 가운데 서기의 자격을 묻는 구절이 있다. 수메르어를 모르는 서기가 무슨 서기냐는 문장이며, 신아시리아 시기 아시리아에서도 이 말은 그대로 유효했다. 자기 언어를 잃은 지 천 년이 넘은 뒤에도 그 언어를 아는 것이 전문가의 조건이었다.

언어가 죽은 시점은 확정되지 않았다

수메르어가 일상어로서 언제 소멸했는지는 지금도 미정이다. 세 가지 입장이 있다.

전통적인 견해는 우르 제3왕조가 무너진 기원전 2000년 무렵으로 잡는다. 이 왕조가 수메르어를 쓰는 마지막 주요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보다 이르게 보는 견해는 우르 제3왕조가 시작되는 기원전 2100년에 이미 수메르어가 죽었거나 죽어 가고 있었다고 본다. 늦게 보는 견해는 니푸르와 그 주변에서 기원전 1700년까지 구어로 남았다고 본다. 크리스토퍼 우즈가 2006년 논문 「Bilingualism, Scribal Learning, and the Death of Sumerian」에서 이 논쟁을 정리했고, 같은 해 피오트르 미할로프스키가 「The Lives of the Sumerian Language」를 발표했다. 두 논문 모두 2006년 시카고에서 나온 논문집 『Margins of Writing, Origins of Cultures』에 실렸다.

세 견해의 차이는 자료 해석의 차이에서 나온다. 우르 제3왕조 시기에 수메르어 행정 문서가 대량으로 생산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쓰던 말을 반영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문어가 구어를 오래 앞지르거나 뒤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소멸 이후의 경로는 분명하다. 기원전 2000년 이후 수메르어는 종교와 의례와 문학과 학문에만 쓰였고, 그 상태로 기원후 1세기까지 유지되었다. 마지막 흔적은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의 그리스바빌로니아 점토판에 그리스 문자로 적힌 수메르어 단어들이다. 쐐기문자 전통의 끝을 보여 주는 자료다.

결론 — 자칭은 남았으나 그것을 읽는 길은 모두 바깥을 거쳤다

수메르인이 자기를 부른 이름은 세 가지로 남아 있다. 땅은 켕기르, 사람은 검은 머리, 말은 에메기르였다. 셋 다 실제 비문에서 확인되며, 그 가운데 검은 머리는 아카드인도 같은 뜻으로 번역해 썼다.

그런데 이 이름들이 우리에게 도달한 경로는 모두 바깥을 거쳤다. 오늘날 이 문명을 부르는 이름은 아카드어이고, 그 언어를 읽는 방법은 아카드어 대역본이며, 이 민족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낸 방법은 아카드어 문서에 남은 어긋남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세 층 모두에서 매개가 이웃의 언어다.

이 의존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알레비 논쟁이 보여 준다. 출발점이 실물 유적이 아닌 문헌 내부의 추론이었으므로, 그 추론을 부정하는 반대 가설도 40년 넘게 유효한 경쟁자로 남을 수 있었다. 수메르어가 언어임을 최종적으로 확정한 것은 발굴된 왕궁이 아니라 그 언어 내부의 음운 규칙이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한 문명의 자기 명칭이 남아 있다는 사실과 그 명칭을 우리가 읽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문제다. 켕기르라는 낱말은 4천 년 넘게 점토판 위에 있었지만 그것을 읽어 낼 방법은 19세기에야 생겼고, 그 방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언어를 경유했다.

남아 있는 물음은 어원 쪽이다. ki-en-gi를 고귀한 주인들의 땅으로 읽을지 수메르 말의 땅으로 읽을지는 en이라는 음절의 값에 달려 있고, 이 값은 새 자료가 나오지 않는 한 확정되기 어렵다. 켕기르 동맹을 둘러싼 야콥센과 나카하라의 해석 차이도 같은 상태에 있다. 두 물음 모두 초기 수메르인의 자기 인식 범위가 도시였는지 남부 전역이었는지를 결정하는 문제이며, 지금 남은 자료로는 어느 쪽도 배제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