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obhan.me

베히스툰 비문을 사료로 읽기 — 가우마타 이야기, 바빌로니아 점토판의 연호, 다리우스가 만들었다는 문자

쐐기문자 해독의 열쇠가 된 이 명문은 아케메네스 왕들이 남긴 기록 가운데 유일하게 사건을 서술한 본문이다. 동시에 왕위를 차지한 사람이 자기 즉위를 정당화하려고 만든 문서이기도 하다. 이 두 성격이 어디에서 충돌하는지는 세 군데에서 확인된다. 바빌로니아 점토판이 적은 연호, 키루스가 남긴 계보, 그리고 비문 스스로 밝힌 문자의 내력이다.

2026년 9월 13일

아케메네스 왕들이 남긴 명문은 대부분 정형구다. 왕들은 자기 이름과 칭호, 아후라마즈다에 대한 감사,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들의 목록을 같은 틀로 되풀이해 적었다. 베히스툰 명문만 다르다. 뤼디거 슈미트는 이 본문이 그 왕조의 어떤 통치자가 남긴 글 가운데 역사적 사건의 서술을 담은 유일한 문서라고 적었다. 기원전 522년부터 520년까지 제국 전역에서 벌어진 반란과 그 진압이 날짜와 지명과 인명을 갖추어 적혀 있다.

사료로서의 값어치는 여기서 나온다. 그런데 같은 사실이 반대 방향으로도 작용한다. 이 기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동시대의 서술이 이 하나뿐이고, 그것을 쓰게 한 사람은 그 사건의 당사자이자 승자였다.

슈미트는 이 본문을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선전 문서라고 규정하면서 한 가지 특징을 지적했다. 왕의 승리만 열거할 뿐 자기 군대의 손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쓰지 않는다.

비문이 스스로 세운 적은 '거짓'이다

본문의 구성 자체가 논증이다. 서두에서 다리우스는 자기 계보를 대고, 자기가 왕이 되었을 때 제국에 속해 있던 23개 지방의 목록을 제시하며, 아케메네스 가문에서 왕권을 빼앗아 간 찬탈자에게서 그것을 되찾을 수 있었던 사람은 자기뿐이었다고 말한다. 이란 문헌에 남은 가장 오래된 지방 목록이 여기 들어 있다.

가운데 부분이 전투 서술이다. 즉위년과 재위 1년에 왕위를 참칭한 아홉 명과 19차례 싸웠다는 내용이며, 다섯 차례에 걸쳐 이 모든 일을 같은 한 해에 해냈다고 되풀이해 강조한다.

끝부분은 해석이다. 반란이 일어난 이유로 '거짓'을 지목하고, 그것을 진압한 것은 아후라마즈다라고 말한다. 이어 거짓을 경계하라는 훈계가 나오고, 자기가 적은 것이 사실이며 자기는 진실을 사랑한다는 엄숙한 선언이 나오며, 자기 업적에 견줄 것이 없다는 진술이 나온다. 그다음에 후대 사람들이 이 기록을 감추지 않고 퍼뜨릴 것에 대한 축복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의 저주가 붙는다.

드라우가 고대 페르시아어 낱말로 '거짓'을 뜻한다. 베히스툰 명문에서 이 낱말은 왕권을 어지럽히는 원리 전체를 가리킨다. 반란 지도자 아홉 명은 모두 '거짓을 말한 자'로 규정되고, 그들이 왕가의 일원을 사칭했다는 점이 공통 혐의다. 반대편에 놓인 낱말은 '진실'을 뜻하는 하시야이며, 다리우스는 자기가 이쪽에 속한다고 여러 차례 선언한다.

구조를 이렇게 놓고 보면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이 문서는 사건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판정한다. 왕위를 주장한 아홉 명이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관찰이 아니라 판결이며, 그 판결을 내리는 주체가 그들과 싸워 이긴 당사자다. 슈미트는 이 본문이 명백히 역사 교육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적었는데, 가르치려 한 내용은 그 경과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었다.

다리우스가 적은 경위

비문이 말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키루스 2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고, 형이 캄비세스 2세, 동생이 바르디야였다. 캄비세스는 왕이 된 뒤 동생 바르디야를 죽였고, 백성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캄비세스가 이집트 원정을 떠난 사이 거짓이 나라 안에 퍼졌다.

기원전 522년 3월 11일, 가우마타라는 이름의 마구스가 봉기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키루스의 아들이자 캄비세스의 동생인 바르디야라고 거짓말했다. 페르시아와 메디아를 비롯한 여러 지방이 캄비세스에게서 돌아서 그에게로 갔고, 그해 7월 1일 그가 왕권을 차지했다. 그 뒤 캄비세스는 죽었다.

pasāva Kabūjiya uvāmaršiyuš amariyatā

그 뒤에 캄비세스는 자기 죽음으로 죽었다.

베히스툰 명문 제1단 43행(DB I 43). 고대 페르시아어 본문은 뤼디거 슈미트의 1991년 교정본(Corpus Inscriptionum Iranicarum I/I, Texts I)에 실린 전사를 음소 형태로 옮긴 것이다. 한국어 번역은 직접 옮겼다. 여기서 uvāmaršiyuš를 '자기 죽음으로'로 옮기는 것은 관례적 번역이며, 병사인지 자살인지는 이 표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 한 구절이 이후 논쟁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다리우스는 캄비세스의 죽음에 자기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만 말하고 사인을 밝히지 않는다. 헤로도토스는 캄비세스가 말에 오르다가 자기 칼에 허벅지를 다쳐 그 상처가 썩어 죽었다고 전한다.

비문의 서술은 계속된다. 백성 가운데 누구도 가우마타에게서 왕권을 되찾으려 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기원전 522년 9월 29일, 다리우스는 소수의 사람을 데리고 메디아 니사야 지구의 시카야우바티시 요새에서 가우마타와 그의 주요 추종자들을 죽였다. 그는 왕권을 빼앗아 자기가 왕이 되었다. 본문은 이 일을 도운 여섯 사람의 이름을 마지막 부분에 적고, 후대의 왕들에게 그들의 자손을 돌보라고 당부한다.

그 뒤 1년 남짓 동안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이어졌다. 엘람의 아치나, 바빌로니아의 니딘투벨, 메디아의 프라바르티시, 사가르티아의 치찬타흐마, 마르기아나의 프라다, 페르시아의 바흐야즈다타, 바빌로니아의 아라하를 비롯한 아홉 명이 차례로 제압되었다. 부조에 새겨진 포로 행렬은 이들을 제압한 날짜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고, 본문은 지리적 순서를 따라 서술한다. 같은 아홉 명의 순서가 부조와 본문에서 다르다.

19차례의 전투를 한 해에 치렀다는 주장은 검증되었다. 뤼클레 보르거는 1982년에 이 기념물의 연대를 다룬 연구에서 바빌로니아력과 페르시아력의 날짜를 대조했다. 가우마타 살해를 이 '한 해'에서 빼면 바빌로니아인들에 대한 첫 승리인 기원전 522년 12월 13일부터 마르기아나의 프라다를 제압한 기원전 521년 12월 28일까지가 실제로 한 해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보였다. 다리우스의 즉위년은 윤달이 든 해였고 기원전 522년 3월 27일부터 521년 4월 13일까지 이어졌다. 슈미트는 보르거의 논증을 설득력 있다고 평가했다. 자랑은 계산의 문제였다.

바빌로니아 점토판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못하는 것

이 서술을 바깥에서 대조할 수 있는 동시대 자료가 하나 있다. 바빌로니아의 경제 문서다. 당시 바빌로니아 서기들은 계약서와 영수증에 날짜를 적을 때 재위 중인 왕의 이름과 재위 연수를 썼다. 누가 왕으로 인정받고 있었는지가 문서마다 기록되었다.

점토판이 확인해 주는 것은 기원전 522년의 몇 달 동안 '바르지야'라는 이름의 왕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 바빌론에서 캄비세스 재위 8년을 적은 마지막 문서는 니산누월 23일자이고, 바르디야의 즉위년을 적은 문서들이 아야루월과 시만누월에 나온다. 바르디야 재위 1년을 적은 바빌론의 가장 이른 문서는 두우주월 27일자다. 바빌론에서 다리우스나 네부카드네자르 3세가 아야루월과 시만누월에 인정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이 문서들을 검토한 연구자들은 바빌론 서기들이 기원전 522/1년의 아야루월부터 바르디야를 왕으로 인정했다고 본다.

아야루월은 대략 4월에서 5월에 걸친다. 비문은 가우마타가 왕권을 차지한 날을 7월 1일로 적는다. 바빌론의 서기들은 그보다 두 달쯤 앞서 그를 왕으로 적기 시작했다. 비문이 3월 11일을 봉기일로, 7월 1일을 왕권 장악일로 나누어 적은 것을 감안하면 이 격차가 곧바로 모순은 아니지만, 두 기록이 같은 사건에 다른 시점을 부여한다는 사실은 남는다.

점토판이 말하지 못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문서에 적힌 것은 이름과 연수뿐이다. 바르디야라는 이름으로 왕 노릇을 한 사람이 실재했다는 것은 확인되지만, 그가 키루스의 아들이었는지 그를 사칭한 다른 사람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점토판은 다리우스의 서술 가운데 사건의 골격을 뒷받침하면서, 정작 쟁점이 되는 대목에서는 침묵한다.

같은 점토판들은 그 뒤 반란들의 연대도 고정해 준다. 니딘투벨이 네부카드네자르 3세를 자칭한 것은 가우마타가 제압된 기원전 522년 9월 29일 무렵이고, 그는 같은 바빌로니아력 해의 테베투월 2일, 곧 12월 18일 직후까지 다스렸다. 아라하는 네부카드네자르 4세를 자칭하면서 같은 인물의 재위를 이어 세는 방식을 택했다. 다비드 소페르 소장품에 새로 들어온 점토판을 기존의 날짜 자료와 함께 검토한 연구는 이 시기에 바빌로니아의 도시마다 인정하는 왕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한 지역에서 다리우스가 인정받는 동안 다른 지역에서는 네부카드네자르 4세가 인정받았다.

계보 — 키루스 원통에는 아케메네스가 없다

다리우스가 자기 정통성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 혈통이다. 비문 첫머리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를 히스타스페스, 할아버지를 아르사메스, 그 위를 아리아람네스, 다시 그 위를 테이스페스, 그리고 아케메네스로 거슬러 올린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적는다.

VIII manā taumāyā tyaiy paruvam xšāyaθiyā āha. adam navama. IX duvitāparanam vayam xšāyaθiyā amahy.

여덟 사람이 내 가문에서 전에 왕이었다. 나는 아홉 번째다. 우리는 두 계열로 아홉이 왕이었다.

베히스툰 명문 제1단 8~11행(DB I 8-11). 고대 페르시아어 본문은 슈미트의 1991년 교정본 전사를 음소 형태로 옮긴 것이며, 한국어 번역은 직접 옮겼다. duvitāparanam의 뜻은 확정되지 않았다. '두 계열로'와 '잇달아' 두 갈래로 옮겨지며,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왕가의 구조에 대한 진술이 달라진다.

이 주장은 바깥 자료와 맞춰 볼 수 있다. 키루스 2세가 기원전 539년 바빌론에서 만들게 한 원통 명문이 있다. 여기서 키루스는 자기를 캄비세스의 아들, 키루스의 손자, 테이스페스의 후손으로 밝히고, 이들 모두에게 '안샨의 왕'이라는 칭호를 붙인다. 아케메네스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파사르가다에에 남은 키루스의 기념물에서도 아케메네스는 나오지 않는다. 그곳의 '나는 키루스 왕, 아케메네스 사람이다'라는 명문이 있지만, 그 고대 페르시아어 판본은 후대에 추가된 것이라는 견해가 다수를 이룬다. 프로츠 옥토르 스키에르뵈는 키루스 명문의 고대 페르시아어 판본이 아카드어 및 엘람어 판본에 나중에 덧붙은 것임이 밝혀졌다고 정리한다.

다리우스의 증조부와 조부 이름으로 된 명문도 있다. 하마단에서 나온 금판 두 점이며 각각 아리아람네스와 아르사메스의 것으로 되어 있다. 슈미트는 이 두 명문의 언어가 결함이 많다는 점을 들어 후대의 것이라고 판정했고, 스키에르뵈는 슈미트의 2007년 논의를 인용하면서 이것들이 근대의 위작일 가능성이 높고 고대의 위작일 가능성은 그보다 낮다고 적는다. 즉 다리우스 이전에 고대 페르시아어로 적힌 명문은 지금까지 하나도 확인되지 않았다.

여기서 나오는 문제는 분명하다. 키루스 가문은 자기를 안샨의 왕들의 후손으로 소개했고 아케메네스를 언급하지 않았다. 아케메네스를 공통 조상으로 놓고 두 계열을 하나의 가문으로 묶은 것은 다리우스의 명문에서 처음 나타난다. 매튜 워터스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이 근거로 키루스 가문을 테이스페스 계열로 따로 부르고, 다리우스가 자기 가계를 그 위에 접붙였다고 본다. 반대쪽에서는 프랑수아 발라는 2011년 논문에서 다리우스를 계보 조작 찬탈자로 보는 통설을 반박했다.

문자 — 다리우스가 만들었다는 진술과 그 물증

비문에는 문자에 관한 진술이 따로 있다. 고대 페르시아어 판본에만 붙은 70번째 단락이며, 왕이 새로운 형태의 글을 만들었고 그것이 아리아어로 된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이 진술이 사실인지는 문자 자체로 확인된다. 발터 힌츠가 지적한 근거는 기호의 모양이다. 베히스툰 명문에서 낱말을 갈라 주는 구분 기호는 비스듬한 쐐기이고 높이가 행 높이의 절반이다. 이후의 모든 고대 페르시아어 명문에서는 이 기호가 각진 모양이고 행 높이를 다 채운다. y를 적는 기호의 첫 세로 쐐기도 마찬가지로 베히스툰에서만 행 꼭대기까지 닿지 않는다. 두 기호의 형태가 이 명문에서만 다르다는 사실은, 이 명문이 그 문자를 쓴 첫 사례임을 가리킨다.

제작 순서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이 기념물의 본문은 엘람어로 먼저 새겨졌고, 바빌로니아어가 다음이었으며, 고대 페르시아어가 마지막이었다. 슈미트는 그 이유를 고대 페르시아어 쐐기문자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엘람어가 궁정의 공식 문어였다는 데서 찾는다. 왕은 자기 모어로 구술했고 이중언어 엘람인 서기들이 그것을 옮겨 적었다. 70번째 단락은 바빌로니아어로는 번역되지 않았고, 엘람어로는 본문 끝에 넣을 자리가 없어 부조 왼쪽 위에 별도 명문으로 들어갔다.

다만 이 단락의 번역은 확정되지 않았다. 본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복원에 기대는 부분이 크고, 낱말 몇 개의 해석이 나뉜다. 파울 휘세는 1999년에 이 단락의 어형을 분석한 연구에서 patišam을 '맞은편에'로 옮기고, 다리우스가 부조와 바빌로니아어 및 엘람어 판본의 맞은편, 곧 그 아래에 아리아어 본문을 덧붙였다는 뜻으로 읽었다. 슈미트는 dipiciça를 복원하면서 다리우스가 먼저 새 글자의 외형을 말하고 이어 그 내형, 곧 아리아어로 본문을 적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덧붙인 것으로 보았다. 2024년 『쐐기문자 디지털 도서관 회보』에 실린 새 판독은 이 단락이 새로운 아리아어 본문의 내용에 관한 것이라고 본다. 롤린슨은 1848년 출판에서 이 단락의 쐐기 기호를 하나도 베끼지 못했고 복원하지도 못했다.

이 논쟁에서 확정된 것과 확정되지 않은 것을 갈라 두는 편이 낫다. 확정된 것은 고대 페르시아어 쐐기문자로 적힌 현존 최고(最古)의 사례가 베히스툰 명문이라는 사실, 그리고 기호 두 개의 형태가 이 명문에서만 다르다는 사실이다. 확정되지 않은 것은 다리우스가 그 문자를 처음 만들게 했는지, 아니면 키루스 2세 때 이미 시작된 작업을 정리해 처음 사용한 것인지다. 슈미트는 아케메네스 왕가의 모어를 적을 새 문자의 개발이 키루스 2세 치세에 이미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문자에 관한 이 진술이 계보 문제와 겹치는 지점이 있다. 다리우스 이전의 고대 페르시아어 명문이 하나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이전 왕들이 자기를 어떻게 불렀는지를 확인할 통로가 아카드어와 엘람어 기록뿐이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 기록들에는 아케메네스가 없다.

헤로도토스와의 일치는 검증인가 반복인가

비문의 진술을 검증하는 데 자주 쓰이는 자료가 헤로도토스의 『역사』다. 일치하는 대목이 여럿이다. 캄비세스에 의한 동생 살해, 마구스 가우마타의 반란, 다리우스를 도운 여섯 사람의 명단, 그리고 동생이 캄비세스와 아버지도 어머니도 같다는 진술이 그렇다. 슈미트는 이 대응을 이 명문의 사료 가치와 진술의 진실성을 판단할 근거로 제시한다.

그런데 같은 사실이 반대로도 읽힌다. 슈미트 자신이 그 가능성을 적어 놓았다. 헤로도토스의 여러 진술이 이 명문의 축자 번역처럼 보이며, 베히스툰 본문이 이 그리스 저자에게 알려져 있었을 수 있다고 그는 적었다. 아드리아나 마르토렐리가 1977년 논문에서 헤로도토스에 남은 페르시아사 서술에 공식 판본의 반향이 있다고 논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가능성이 성립하면 검증 관계가 무너진다. 제국 각지로 사본이 배포되었고 그 사본이 공개 낭독이나 재필사를 통해 알려졌다면, 헤로도토스가 접한 것은 아케메네스 궁정의 공식 설명이었을 수 있다. 두 기록의 일치는 그 경우 하나의 증거가 두 번 나타난 것이 된다.

이집트 엘레판티네에서 기원전 420년 무렵에 필사된 아람어 사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헤로도토스가 활동한 시기와 겹치는 때에, 제국의 변방에서 이 본문의 번역이 다시 베껴지고 있었다.

연구자들의 입장이 나뉘는 자리

가우마타 문제에 대한 학계의 견해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피에르 브리앙은 2002년 저작에서 이 논쟁의 흐름을 정리했다.

한쪽은 다리우스의 서술을 큰 틀에서 받아들인다. 무함마드 단다마예프는 1976년 저작에서 이 입장을 취했다. 프랑수아 발라는 2011년 논문에서 다리우스가 현대 연구자들이 즐겨 묘사하는 찬탈자가 아니며 동시대인들이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계보를 조작할 수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에리크 피라르는 2002년 논문에서 비슷한 방향으로 논했다. 라힘 샤예간은 2006년 논문에서 바르디야와 가우마타를 모두 실재한 인물로 보는 재구성을 제시했다.

다른 한쪽은 이 서술을 정통성이 부족한 찬탈자의 변론으로 읽는다. 요제프 비제회퍼는 1978년 저작에서 이 방향의 연구를 대표하고, 잭 마틴 발서는 1987년 『헤로도토스와 비시툰』에서 같은 문제를 다루었다. 스테판 자바츠키, 아멜리 쿠르트, 로베르트 롤링거도 이쪽에 속한다. 이 입장에서는 다리우스의 계보 주장 자체가 왕조적 정당성을 만들어내려는 장치로 읽히며, 계보가 모호하다는 점이 근거가 된다.

두 입장이 실제로 다투는 지점은 생각보다 좁다. 반란이 있었다는 것, 바르디야라는 이름의 왕이 몇 달 동안 인정받았다는 것, 다리우스가 기원전 522년 9월 29일에 그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것, 그 뒤 1년 남짓 제국 각지에서 반란이 이어졌다는 것은 양쪽 모두 받아들인다. 다투는 것은 죽은 사람이 누구였는가 하나다. 그리고 그 물음에 답할 자료는 죽인 사람이 남긴 기록뿐이다.

결론 — 쟁점은 확정되지만 답은 확정되지 않는다

베히스툰 명문은 쐐기문자 해독의 열쇠였고 아케메네스 초기를 아는 거의 유일한 동시대 서술이다. 동시에 그 사건의 승자가 자기 즉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문서다. 두 성격은 같은 문서의 두 측면이며, 어디에서 충돌하는지를 짚어 두는 것이 이 명문을 사료로 쓰는 방법이 된다.

충돌 지점은 세 군데다. 날짜에서, 바빌론 서기들은 비문이 왕권 장악일로 적은 7월 1일보다 두 달쯤 앞선 아야루월부터 바르디야를 왕으로 적기 시작했다. 계보에서, 키루스 자신의 원통 명문과 파사르가다에 기념물은 안샨의 왕들만 열거하고 아케메네스를 언급하지 않으며, 아케메네스를 공통 조상으로 세운 것은 다리우스의 명문이 처음이다. 문자에서, 다리우스 이전에 고대 페르시아어로 적힌 명문은 하나도 확인되지 않았고, 확인되었다고 주장된 하마단 금판 두 점은 후대 또는 근대의 위작으로 판정되었다.

이 세 가지가 다리우스의 서술을 거짓으로 확정하지는 않는다. 날짜의 격차는 봉기와 왕권 장악을 나누어 적은 비문의 서술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고, 계보의 문제는 키루스 가문과 다리우스 가문이 실제로 먼 친척이었다면 표기의 차이로 줄어들며, 문자의 문제는 다리우스가 이미 준비되어 있던 것을 처음 새겼을 가능성을 남긴다. 반대로 세 가지가 한 방향을 가리킨다는 사실도 남는다.

무엇을 본체로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비문을 사건의 보고로 보면 바빌로니아 점토판은 그 보고의 골격을 확인해 주는 자료가 되고, 헤로도토스는 독립된 방증이 된다. 비문을 즉위의 변론으로 보면 점토판은 쟁점에서 침묵하는 자료가 되고, 헤로도토스는 같은 공식 설명의 반복일 수 있게 된다. 자료의 목록은 양쪽이 같고 배열만 다르다.

이 논쟁이 앞으로 결론에 이르려면 다리우스의 손을 거치지 않은 기록이 더 나와야 한다. 바빌론에서 나온 명문 석편 두 점과 엘레판티네의 아람어 파피루스는 모두 그의 본문을 옮긴 것이므로 이 조건을 채우지 못한다. 채울 수 있는 자료는 바빌로니아의 경제 문서처럼 왕실의 의도와 무관하게 작성된 문서, 또는 페르세폴리스 행정 문서군처럼 행정 실무에서 나온 기록이다. 그런 자료가 다리우스 즉위 직전 몇 달의 페르시아 본토를 비추어 줄 만큼 나올지는 발굴에 달려 있고, 지금까지는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