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케르만샤 주의 절벽에 새겨진 다리우스 1세의 명문은 쐐기문자 해독의 열쇠가 된 기록이다. 그런데 이 명문은 지상에서 60미터 넘게 떨어진 암벽면에 있어 아래에서는 글자를 분간할 수 없다. 자리를 고른 방식, 제작이 진행된 순서, 그리고 바빌론과 이집트에서 나온 사본 조각을 함께 놓으면 이 기념물이 무엇을 하도록 만들어졌는지가 드러난다.
이란 서부 케르만샤 주, 케르만샤 시에서 동쪽으로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비소툰 산이 있다. 석회암 덩어리인 이 산은 케르만샤 평야를 북쪽에서 막아선 길고 좁은 산맥의 끝봉우리이며, 하마단 쪽에서 다가오는 사람의 눈에는 평지에서 500미터 넘게 솟아오른 것처럼 보인다. 그 절벽면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 다리우스 1세가 기원전 520년 무렵부터 새기게 한 부조와 명문이 있다.
이 명문은 세 언어로 같은 내용을 적었다.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아카드어)이며 셋 다 쐐기문자로 적혔다. 19세기에 이 세 판본을 대조한 덕분에 끊겨 있던 쐐기문자가 다시 읽히게 되었고, 그래서 이집트 상형문자에 로제타석이 한 역할을 메소포타미아 쪽에서는 이 비문이 했다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해독에서 이 비문이 한 역할은 개설서마다 적혀 있다. 그런데 그 역할을 설명하는 문장에는 조용히 깔린 전제가 하나 있다. 비문은 읽히기 위해 새겨진 글이라는 전제다. 베히스툰에서는 이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기념물의 위치는 실측되어 있다. 독일 고고학연구소 테헤란 지부가 1963년 겨울 기념물에 비계를 세워 조사했을 때 하인츠 루셰이가 실측한 값에 따르면, 고대 페르시아어 본문 아래에 난 좁은 바위 턱은 샘 부근의 옹벽에서 61.80미터 위에 있고, 부조 자체의 아랫변은 66.05미터 위에 있다. 그 턱은 폭이 1.5미터가 채 되지 않는다. 비문 바로 아래까지 사람이 기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지점, 곧 돌무더기가 덮인 단에서 재도 기념물은 약 20미터 위다.
대중적인 안내문은 이 위치를 "절벽 100미터 위"라고 적는 경우가 많다. 이 숫자가 무엇을 재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루셰이의 실측은 기준점을 샘 옹벽으로 잡았고, 그 기준에서 나온 값은 60미터대다. 어느 쪽을 택하든 결론은 같지만, 숫자를 쓸 때 기준점을 밝히지 않으면 같은 대상에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벌어지는 값이 함께 유통된다.
규모도 실측되어 있다. 부조와 세 판본을 합친 전체는 폭 18미터, 높이 약 7미터다. 뤼디거 슈미트는 1991년 판본에서 이 값을 쓰고, 2000년에 발표한 백과사전 항목에서는 명문이 차지한 면적을 높이 7.80미터, 길이 22미터로 적었다. 부조만 떼어 재면 가로 5.48미터, 세로 약 3미터이고, 그 안의 왕은 거의 실물 크기다. 고대 페르시아어 본문은 다섯 단으로 나뉘어 각각 96행, 98행, 92행, 92행, 36행이며 모두 414행이다. 행과 행 사이는 평균 3.8센티미터다. 엘리자베스 폰 포이크틀란더는 바빌로니아어 판본을 다루면서 이 간격을 손가락 두 마디 너비로 읽었다.
행간이 3.8센티미터인 글자를 60미터 아래에서 읽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슈미트는 이 사실을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절벽 높은 곳에 새긴 본문을 실제로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사본이 여러 언어로 제국의 모든 민족에게 보내졌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절벽의 원본은 존재 자체로 작동하도록 만들어졌다.
자리는 임의로 고른 곳이 아니다. 비소툰 산은 메디아 고원에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메소포타미아로 내려가는 동서 간선도로의 북쪽에 붙어 있다. 대상과 군대가 함께 쓰던 길이며, 이란의 가장 오래된 주요 도로다. 이 길은 바위 밑동과 여러 샘 사이를 지나간다. 다리우스의 기념물은 그중에서도 물이 가장 많이 솟는 샘 하나의 바로 위에 있고, 거의 정동쪽을 향한다.
지명 자체가 이 자리의 성격을 알려준다. 오늘날의 이름 비소툰은 중세 이후의 형태를 민간어원으로 바꾼 형태다. 중세 및 근세 페르시아어 형태 바헤스툰은 '기둥이 좋은'이라는 뜻으로 읽혔고, 여기서 다시 '기둥이 없는'으로 읽히는 비소툰이 나왔다. 이 계열이 거슬러 올라가는 원형은 고대 페르시아어 *바가스타나이며, 뜻은 '신들의 자리'다. 이 형태는 그리스어 기록으로 보증된다. 디오도로스 시켈리오테스는 『역사총서』 2권 13장 1절에서 이 산을 '바기스타논 산'이라고 적었고, 그가 옮겨 쓴 자료는 기원전 5세기 말에 페르시아 궁정에 머물렀던 의사 크테시아스의 저작이다.
슈미트는 이 이름이 그 장소가 아주 오래전부터 신성하게 여겨졌음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적었다. 다리우스가 고른 것은 사람이 많이 지나는 길목인 동시에, 이미 신의 자리로 불리던 바위였다.
그 길은 이 시기에 다리우스 자신이 오간 길이기도 하다. 그는 기원전 521년 봄, 메디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프라바르티시를 치러 바빌론에서 자그로스를 넘어 북상하면서 비소툰 산을 지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라바르티시와의 전투는 그해 5월 8일 메디아의 쿤두루 부근에서 벌어졌다. 그 한 해 전 가우마타를 죽인 곳으로 비문이 지목하는 요새 시카야우바티시도 메디아의 니사야 지구에 있었고, 비소툰 인근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있다. 공사는 마르기아나의 반란자 프라다를 제압한 기원전 521년 12월 28일 직후, 곧 기원전 520년 초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다리우스가 만든 것은 새로운 형식이 아니다. 같은 간선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약 150킬로미터, 자그로스의 이른바 '아시아의 문' 부근인 사르폴레자하브에 룰루비 왕국 지배자 아누바니니의 암각 부조가 있다. 슈미트는 다리우스가 비소툰을 고르도록 한 착상이 이 부조에서 왔을 수 있다고 본다.
아누바니니 부조의 제작 시기는 확정되지 않았다. 아카드 제국 시기인 기원전 2300년 무렵으로 보는 견해와 이신·라르사 시기인 기원전 2000년 전후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슈미트와 백과사전 항목은 기원전 2000년경을 택했다. 구도는 베히스툰과 거의 같다. 왕이 활과 전투도끼를 들고 오른쪽을 향해 서서 쓰러진 적을 밟고 있고, 하늘에는 천체 신들의 상징이 있으며, 맞은편에 여신이 서서 밧줄로 묶인 포로 둘을 붙들고 있다. 왕과 여신 아래로 포로 여섯이 더 새겨져 있다. 부조 아래에는 아카드어 명문이 있어 인물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승리한 왕, 발밑의 적, 줄지어 선 포로, 신의 상징, 인물을 지시하는 명문이라는 요소가 1500년 앞서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문장 형식 쪽에도 앞선 것이 있다. 슈미트는 베히스툰 본문의 문학적 원형으로 아시리아 왕실 연대기, 특히 아슈르바니팔 시기의 연대기를 꼽는다. 또 우라르투 왕들의 암각 명문과 닮은 정형구가 여럿 있어 다리우스가 적어도 간접적으로 그쪽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인정한다. 야노시 하르마타는 이 본문의 짧고 반복적인 문체와 서술 방식이 구전 시가의 특징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는데, 슈미트는 그 주장 가운데 본문이 운문으로 지어졌다는 전제는 잘못이라고 본다.
아누바니니 부조와 베히스툰 부조 사이에는 한 가지 큰 차이가 있다. 아누바니니 부조는 사르폴레자하브 마을을 내려다보는 절벽 16미터 높이에 있다. 베히스툰은 그보다 네 배 높은 곳에 있고, 완성 뒤에는 올라가는 길까지 없앴다.
1960년대 이후 레오 트륌펠만, 하인츠 루셰이, 발터 힌츠, 폰 포이크틀란더, 뤼클레 보르거가 진행한 연구로 제작 단계가 정리되었다.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부조 옆에 붙는 짧은 명문 DBa가 엘람어로 새겨졌다. 이 열 줄짜리 본문은 왕의 칭호를 적는 방식이 본문 첫 단락과 달라서, 본문보다 먼저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본문이 엘람어로 부조 오른쪽에 새겨졌다. 이어서 바빌로니아어 판본이 부조 왼쪽 돌출면에 112행 한 단으로 들어갔고, 마지막으로 고대 페르시아어 판본이 부조 아래에 들어갔다.
순서가 이렇게 된 이유를 슈미트는 명확히 한다. 본문이 처음 작성될 당시에는 고대 페르시아어 쐐기문자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엘람어가 여전히 궁정의 공식 문어였다. 왕은 자기 모어인 고대 페르시아어로 구술했고, 이중언어 서기들이 그것을 엘람어로 옮겨 적었다. 다른 아케메네스 왕들의 삼중언어 명문과 달리 베히스툰 명문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단계적으로 세 언어를 갖추었다.
그다음 단계에서 기념물은 크게 고쳐졌다. 다리우스 재위 2년과 3년에 엘람의 아타마이타와 스키타이의 스쿤카를 제압한 뒤, 붙잡힌 스키타이 지도자 스쿤카의 상을 포로 행렬의 오른쪽 끝에 추가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다. 그 자리는 이미 엘람어 본문이 새겨져 있던 면이었다. 그래서 엘람어 본문 전체를 포기하고 깎아냈다. 대신 고대 페르시아어 본문 왼쪽의 새로 다듬은 면에 그 본문을 정밀하게 베껴 세 단 81행, 85행, 94행으로 다시 새겼다. 조지 캐머런은 1948년 조사로 깎여 나가기 전의 첫 엘람어 본문 네 단 323행을 처음으로 읽어냈고, 두 엘람어 판본의 내용이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재위 2년과 3년의 사건을 적은 단락들이 고대 페르시아어 본문에만 다섯째 단으로 덧붙었다. 이 단은 다른 네 단의 절반 높이도 되지 않고 폭도 6분의 1만큼 좁다. 엘람어와 바빌로니아어 판본에는 이 내용이 없다.
여기서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지상에서 읽을 수 없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 기념물은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수정되었다. 읽는 사람을 상정하지 않았다면 굳이 본문 하나를 통째로 깎아내고 다시 새길 이유가 없다. 수정의 대상은 남을 기록이었다.
공사가 끝난 뒤 왕은 접근로를 없애라고 지시했다. 슈미트의 기술은 구체적이다. 다리우스의 조각공과 서기와 인부들이 기념물에 오르는 데 쓰던 바위 길은 가능한 한 제거되었고, 자연 암면은 매끄럽게 다듬어졌다. 백과사전 항목에서는 계단을 없애고 길과 절벽 일부를 깎아냈다고 적었다. 목적도 함께 적혀 있다. 부조와 명문이 멀리서는 보이되 누구도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그 길은 일부 구간만 따라갈 수 있다.
본문 자체에도 같은 관심이 나타난다. 다리우스는 이 명문과 조각을 보는 사람에게 그것을 파괴하지 말고 힘이 있는 한 돌보라고 요구하면서, 그렇게 하면 아후라마즈다가 우호적일 것이고 자손이 많을 것이며 오래 살 것이라고 적었다. 훼손을 막으려는 조치가 물리적 차단과 축복의 약속 양쪽으로 걸려 있다.
물리적 차단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명문을 실제로 망가뜨린 것은 주로 물이었다. 부조와 고대 페르시아어 본문 사이의 가로 균열은 암반 지층 사이를 흐르는 지하수의 출구이고, 비가 오면 여기서 물이 쏟아져 본문 위를 넓은 띠로 흘러내린다. 이 물이 단 위쪽의 암석을 12~15센티미터 이상 깎아냈다. 겨울에는 흘러나온 물이 곧바로 얼어붙어 암면을 조금씩 갈아낸다. 루셰이가 1964년 1월 20일에 찍은 사진들이 이 상태를 기록했다. 아래쪽에서는 물에 녹은 석회 성분이 다시 굳으면서 쐐기 자국을 메웠는데, 이 침전물은 글자를 가리는 동시에 풍화로부터 지켜주기도 했다. 캐머런은 1948년에 이 침전물을 조심스럽게 두드려 떼어내는 방법으로 보이지 않던 기호 몇 개를 되살렸다.
사람에 의한 훼손도 있었다. 슈미트와 백과사전 항목은 20세기 들어, 주로 두 차례 세계대전 동안 산맥 아래 도로를 지나던 병사와 총을 가진 사람들이 부조의 인물상을 표적 삼아 쏘아 기념물을 더 망가뜨렸다고 적는다. 고대 페르시아어 본문 첫 단 8행의 숫자 기호는 근대의 총격으로 손상되어 일부만 읽힌다.
절벽의 원본이 읽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읽히는 몫은 다른 데 있었다. 그 사정은 고대 페르시아어 판본에만 있는 70번째 단락에 적혀 있다. 이 단락은 왕이 새로운 형태의 문자를 만들었고, 그것이 아리아어로 된 것이었으며, 점토판과 가죽에 놓였고, 새겨서 자기 앞에서 낭독하게 했으며, 그런 다음 이 글을 모든 지방으로 보냈다고 말한다. 바빌로니아어 판본에는 이 단락의 번역이 없고, 엘람어 판본에는 자리가 모자라 본문 끝에 넣지 못하고 부조 왼쪽 위 빈 공간에 별도 명문 DBl로 들어갔다.
이 진술은 검증할 수 있는 종류의 진술이다. 사본이 실제로 있었다면 조각이라도 나와야 한다. 두 곳에서 나왔다.
첫째는 바빌론이다. 바빌론에서 나온 명문 조각 두 점이 바빌로니아어 판본과 대응한다. 첫 조각은 현무암 덩어리의 일부로 높이 26센티미터, 길이 40센티미터이며, 두 단에서 각각 13행씩 남아 베히스툰 본문의 55~58행 및 69~72행에 해당한다. 이 조각은 베히스툰의 바빌로니아어 판본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고 오히려 엘람어 및 고대 페르시아어 본문에 더 가까워 보인다. 둘째 조각은 몇 낱말씩 다섯 행만 남았고 현재 소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폰 포이크틀란더는 1978년 판본에서 이 조각들을 다루었고, 우르줄라 자이들은 1976년 논문에서 이 조각들과 바빌론에 남은 글자 없는 석재들이 한 기념물에서 나왔을 가능성, 곧 바빌론에 다리우스의 부조와 명문을 옮겨 놓은 복제 기념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두 조각은 작지만, 베히스툰 본문 전체가 바빌론에서 공개되었음을 보여준다.
둘째는 이집트다. 나일강 첫 폭포의 엘레판티네섬에는 페르시아 행정 아래 복무하던 유다인 군사 취락이 있었고, 1906년부터 1908년까지 독일 조사단이 이곳에서 아람어 문서를 다량 발굴했다. 그 가운데 베히스툰 본문의 아람어 번역이 있다. 베를린 파피루스 13447로 등록되어 있고, 문서 총서 기호로는 TADAE C2.1이다. 낱장 두 장과 파편 수십 점이 남았는데 훼손이 심해 완전한 행이 하나도 없다. 조나스 그린필드와 브살렐 포르텐은 1982년 판본에서 원래 11단 약 190행 가운데 5단 79행이 부분적으로 남았다고 정리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아케메네스 왕실 명문의 아람어 판본은 이것 하나뿐이다.
이 파피루스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연대다. 내용은 기원전 520년 무렵의 사건인데, 사본이 필사된 시기는 기원전 420년경으로 본다. 그러니까 100년이 지난 뒤에 다시 베껴졌다. 그린필드와 포르텐은 이 재필사가 다리우스 2세 재위 중의 어떤 사정 때문에 왕실 서기들에 의해 촉발되었을 수 있다고 보았다. 남은 조각은 지방 총독들이 중요한 역사 기록으로 보관하던 더 오래된 문서에서 베낀 번역이며, 공개 낭독이나 사본 배포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것으로 본다.
이 아람어 사본에는 원본에 없는 것이 들어가 있다. 고대 페르시아어 본문의 55번째 및 60~61번째 단락에 해당하는 자리에, 낙쉐로스탐에 있는 다리우스 1세 무덤 명문 DNb의 마지막 단락 일부가 삽입되어 있다. 니콜라스 심스윌리엄스가 1981년 논문에서 이 대응을 밝혔다. 언제 어떤 경로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대목은 사본이 필요에 따라 재편된 문서였음을 보여준다.
판본들 사이의 관계도 사본의 존재를 뒷받침한다. 아람어 판본과 바빌로니아어 판본은 서로 가깝고, 엘람어 판본과 고대 페르시아어 판본이 서로 가깝다. 앞의 두 판본은 죽거나 사로잡힌 적의 수를 적는 점에서 일치하고, 셈어계 달 이름과 특정 지명 형태에서도 일치한다. 여기서 본문이 왕의 고대 페르시아어 구술을 받아 궁정에서 처음부터 아람어와 엘람어 두 갈래로 기록되었으리라는 추정이 나온다. 다만 슈미트는 이 추정의 근거가 결정적이지 않다고 본다. 보르거는 아람어 판본만이 실제로 19차례의 전투를 서술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본문이 아람어로만 먼저 적혔다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확정되지 않았다.
사본이 어디까지 퍼졌는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단다마예프를 비롯한 몇몇 학자는 그리스어를 포함한 다른 언어로도 번역되었다고 주장했으나, 슈미트는 이를 뒷받침할 결정적 증거가 없어 열린 문제로 남는다고 적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있는 여러 진술이 이 명문의 축자 번역처럼 보인다는 지적은 있다.
비소툰이라는 자리의 성격은 다리우스 이후의 사용에서도 확인된다. 이 산자락에는 선사시대부터 사파비 시기까지 거의 끊이지 않는 인간 활동의 흔적이 남아 있다.
기원전 148년의 것으로 판단되는 헤라클레스 석상이 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메디아를 지배하던 마지막 시기의 조각이며, 사자 가죽 위에 비스듬히 기대 잔을 든 모습이다. 1958년 지방 도로를 낮추는 공사 중에 발견되었고, 처음에는 머리가 없었다가 며칠 뒤 따로 발견되었다. 그 머리는 이후 도난당했고 현재 자리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파르티아 시기의 암각 부조도 둘 있다. 하나는 미트라다테스 2세, 다른 하나는 고타르제스 2세를 새긴 것으로 판독되며, 두 부조 모두 17세기에 덧새겨진 명문 때문에 손상되었다. 사산 시기의 주두 조각과 파르하드 타라시라 불리는 거대한 다듬은 암벽도 같은 산에 있다.
2006년 유네스코는 이 일대를 '비소툰'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등재 기준은 (ii)와 (iii)이며, 지정번호는 1222번이다.
베히스툰 기념물을 두고 자주 쓰이는 설명, 곧 다리우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기 업적을 알리려고 길가 절벽에 비문을 새겼다는 설명은 실측 앞에서 무너진다. 본문은 샘 옹벽에서 60미터 넘게 위에 있고 행간은 3.8센티미터이며, 완성 직후 접근로가 제거되었다. 다리우스는 읽을 수 없는 자리를 우연히 고른 것이 아니라, 읽을 수 없는 자리를 의도적으로 만들었다.
이 기념물이 실제로 한 일은 세 갈래로 정리된다. 첫째, 자리 자체가 주장이다. 신들의 자리로 불리던 바위, 제국의 간선도로가 지나는 목, 물이 솟는 샘 위라는 조건이 겹치는 곳을 골랐고, 승리한 왕을 밟힌 적과 묶인 포로와 함께 새기는 형식은 1500년 전 아누바니니 부조에서 이미 쓰이던 것이었다. 다리우스는 그 지역 사람들이 왕권의 표시로 이미 알고 있던 형식을 빌려 썼다.
둘째, 원본은 지워지지 않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 접근로 제거, 훼손 금지 요구와 축복의 약속, 그리고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본문 하나를 통째로 깎아내고 다시 새긴 수정 작업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관심은 존속에 있었다.
셋째, 읽히는 몫은 사본이 맡았다. 70번째 단락의 배포 진술은 두 곳의 물증으로 확인된다. 바빌론의 석편 두 점은 본문이 그곳에서 공개되었음을 보여주고, 엘레판티네의 아람어 파피루스는 그 사본이 100년 뒤에도 다시 베껴졌으며 그 과정에서 무덤 명문의 한 대목이 끼워 넣어지는 재편까지 겪었음을 보여준다.
남은 문제는 사본의 범위다. 지금 확인된 것은 바빌로니아어와 아람어 두 갈래뿐이고, 그리스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 판본의 존재는 증거가 없어 미정이다. 엘레판티네 사본이 왜 다리우스 2세 시기에 다시 필사되었는지, 낙쉐로스탐 무덤 명문의 대목이 어느 단계에서 끼어들었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 물음들은 파피루스와 점토판 쪽에서 답이 나올 성질의 것이다. 엘레판티네의 아람어 사본이 남은 것은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 덕분이었고, 같은 조건을 갖춘 곳은 많지 않다. 답이 더 나올지는 발굴에 달려 있다.